2010. 1. 26. 20:44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반야와 화엄-반야바라밀과 보현행원]
반야심경에서 경전은 '없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무명도 없고 무명이 다함도 없고, 생사도 없고 생사가 다함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없다'는 것만 쫓다 되면 반야심경은 '없는 것(無)'을 가르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있다'고 생각한 모든 것들이 무너진 그 자리에 오직 찬란히 빛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반야'입니다. 모든 분별지(分別智, 분별해서 보는 것)가 사라진 그 자리에, 반야지(般若智, 분별 이전의 세계,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가 진실로 찬란히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 반야, 그렇게 본 반야의 세계는 '부정'이나 '허무'가 아니고 '대긍정', 그리고 모든 것이 꽉 차 있는, '묘유'의 세계입니다. 이러한 반야관은, 현대 물리학이 밝힌 진공의 진실 상과도 비슷합니다.
고전 물리학에서 진공이란 문자 그대로 '아무 것도 없는 텅빈 것'을 말했으나, 현대 물리학에서는 '너무나 꽉 차 있기에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너무나 많은 에너지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기에 전체 물리량이 0(zero)로 보일 뿐, 실지로는 모든 것이 다 들어있는 세계가 진공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전 물리학에서는 진공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세계'이지만, 현대물리학에서 진공은, '모든 것이 가능한 세계'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쓰는 방법'을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모든 것이 꽉찬 세계! 그것이 이 세상의 진실 모습입니다.
그렇게 '꽉찬 그것'을 반야경에서는 '반야'라 합니다. '반야'가 이 세상에 숨 쉴 틈도 없이 꽉 차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화엄에서는 그것을 '부처'라고 부릅니다. 화엄안(華嚴眼)으로 보면 이 세상은 '부처님으로 꽉 찬 세계'인 것입니다. 따라서 '말(표현)만 다를 뿐'입니다.
반야가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佛母)'라 불린다면, 화엄은 '이미 부처님이 계시는 세계'를 말합니다. 따라서 반야와 화엄은 '하나'입니다. 다만 반야는 '근원', 또는 '근본 자리'로서의 부처님을 강조한 가르침이라면, 화엄은 그런 근본자리의 부처님이 '실지로 부처님으로 탄생한 자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물리학적으로 말하면 우주의 출발점인 '빅뱅의 특이점'이 반야라면, 우리가 아는 현재의 광활한 이 우주가 바로 '화엄'입니다. 그 대신 특이점과 현재 우주는 150억년이라는 천문학적 시공간이 사이에 존재하지만, 반야와 화엄은 한치의 간격도 없습니다. 그것은 반야와 화엄이 '무위의 세계'를 말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반야와 화엄을 따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이렇게 반야와 화엄은 하나입니다.
실지로 반야경전들을 보면 반야는 없는 것을 뜻하기보다는 '진실로 있는 세계'를 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린 사람들이 하도 '있는 것'에 집착하기에, 그래서 무명도 있고 번뇌도 있고 열반도 있고 해탈의 길도 '있는 줄'로만 알기에 '없다'고 일부러 말씀하시는 것뿐입니다.
그런 것은 모두 허망한 세계, 있는 줄 알고 나누고 차별하는 분별의 눈으로 본 가상 세계의 모습이며, 진실로 있는 것은 오직 반야! 한치의 차별도 오차도 없는, 모두가 진리인 반야의 세계뿐입니다.
허망하고 생멸하는 이 모두가 거짓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의 진실 모습이요 진실로 존재하는 세계!
허망하게 보이는 모든 차별 상이 사실은 모두가 진실을 꽃피우는 세계!
허망을 통해 진실이 들어나며 허망과 진실이 둘이 아닌 세계!
그러한 세계가 반야의 세계이며 모두가 진실 생명으로 가득 찬 세계가 화엄이요 연화장 세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야와 화엄에서는, 못난 이 모습 이대로, 업장 가득한 비참한 이 모습이, 찰나로 사라지는 번뇌 가득한 허망한 이 모습, 거짓으로 가득찬 업보 덩어리 이 모습이 바로 찬란한 영원의 세계, 부처님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그대로 반야와 화엄의 모습이라 말합니다.
따라서 이 모습 이대로 영원의 길, 진리의 길을 걸어라가고 말합니다. 멀리서 찾지 말고, 무엇을 이루고 나서 무엇을 하려 하지 말고, 번뇌 가득하고 업장 가득한 이 자리에서 바로 해탈을 이루라!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고 고통 가득하고 비천하고 못난 이 자리에서 '바로 지금' 진리 생명, 부처님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이 반야바라밀이요 선(禪)이요 화엄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반야와 선, 화엄이 이렇게 만납니다. 이 셋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반야와 화엄은 하나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잘 모르고 있거나 반야를 보고 화엄을 보려 합니다. 그래서 깨친 후에 화엄을 보고, 반야를 알고 보현행원을 하려고 합니다.
반야를 체(體)로 삼고 보현행원을 용(用)으로 삼는 가르침도, '본래는' 그런 뜻이 아니었지만(이 부분을 꼭 잊지 말고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반야만 보고 보현행원은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그런 우는 자칫하면 보현행원을, 이론이 없는 '맹행(盲行)'으로 전락시켜 버리기도 합니다.
불광의 광덕큰스님, 그리고 큰스님의 또 다른 스승이신 소천선사께서는 분명 반야에서 바로 화엄을 보신 분들이십니다. 그러니 그 분들 분상에서는 반야와 화엄이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비록 '반야'의 이름으로 설법을 하셨더라도, 내용은 모두 '반야화엄'입니다. 반야의 눈으로 화엄의 세계를 투철히 뚫어 보셨던 것입니다. 다만 반야화엄을 '반야'의 테두리에서 말씀을 그렇게 하셨을 뿐입니다.
그러나 저희같은 범부는, 화엄에서 반야를 보는 것이 더 쉽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큰그림을 그리다가 작은 그림을 그리기는 쉬워도, 작은 그림을 그리다가 큰 그림을 그리기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큰 세계를 보던 고전물리학이, 작은 세계를 보는 양자역학에 오기까지 무려 수백 년의 시간이 걸린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 저는 봅니다.
화엄을 공부하면, 그리고 보현행원을 하면, 화엄을 알게 될 뿐 아니라 반야도 알게 됩니다. 큰 그림을 그리다 작은 그림까지 그리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스승님들이야 워낙 근기가 출충하신 분들이시라 작은 그림에서 큰 그림 보시기 어렵지 않으셨겠지만(성장할수록 작은 세계의 아름다움에 눈이 떠지기 시작하지요), 저희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에 동의하지 않으실 분도 계시겠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덧글
-화엄을 공부하시면 고전 물리학뿐 아니라 현대 물리학의 세계에도 눈을 뜨시게 됩니다. 더구나 현대 물리학이 가진 한계마저 뛰어넘는 눈을 가질 수 있게 되리라 봅니다.
양자물리학이나 초끈이론 학자들이 연구에 난제를 만나는 것은, 제가 보기에 불교의 '일심(一心)', 그리고 '연기(緣起, 특히 법계연기)'의 소식을 모르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보이는 세계나 보이지 않는 세계를 모두 꿰뚫고 섭수하는 '마음'의 세계,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더불어' 존재하는, 그리하여 '서로가 원인이 되고 서로가 결과'가 되는 중중무진의 '연기'의 세계에 대한 개념이 없기에 한계에 부닥치는 것 같다는 것이 제 개인의 생각입니다.
그 분들이 불교를 공부하시어 이러한 세계에 눈을 뜨게 되시면, 진정 모든 물리학자들이 그토록 갈구하는 '만물의 이론(TOEs, Theory Of Everythings)'도 조만간 출현할 것 같다는 것이 제 개인적 예측입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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