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에 대한 감사, 찬탄이 나오는가?

2010. 1. 28. 22:1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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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에 대한 감사,  찬탄이 나오는가?]

 

 

 

불자라면 무슨 공부를 하더라도 그 끝에 부처님에 대한 감사, 찬탄이 나와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공부가 제대로 익은 것이 아니라 할 것입니다.

 

 

 

절을 하든 주력을 하든 염불을 하든 참선을 하든, 절이 다하고 주력이 다하고 염불이 다하고 화두가 다한 곳에 필경은 부처님이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처님은 한없는 자비, 한없는 지혜의 모습으로, 우리는 그러한 부처님을 뵈올 때 찬탄과 감사가 아니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수행이 다 그러합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다시 시작'입니다. 지금까지의 내 공부는 모두 무(無)로 가고, 감사와 찬탄 속에 비로소 참된 공부가 다시 시작되는 것입니다.

 

 

 

시작은 업장 참회였던 아니면 해탈이나 깨달음이었던, 끝은 모두가 한결같이 '부처님 감사합니다!' 인 것입니다. 들어가는 문, 시작하는 이유는 다양하였으나, 마침내 종착지는 모두가 '부처님에 대한 감사, 찬탄'인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공덕을 이루었다 하는데, 수없는 절, 수없는 독경, 주력, 염불, 그리고 수없는 화두를 타파하였더라도, 내 공부에 절이 남아있고 독경이 남아있고 주력, 화두가 남아 있다면, 또는 업장 참회나 깨달음이라는 상(相)이 남아있다면, 궁극의 자리는 가지 못합니다. 그저 유위법적인 자리에서만 맴돌 뿐입니다.

 

 

 

유위법적 자리에 머문다함은, 겉보기에, 그리고 남보기에는 대단해 보여도 '궁극의 해탈'은 이루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즉, '나를 속이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화엄경 본문이 '부처님에 대한 찬탄'의 게송으로 끝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할 것입니다. 그 난해한 모든 화엄경이, 그리고 선재가 걸었던 그 수십 년의 어려운 구도의 길이,  그 긴 구도의 끝, 깨달음의 끝이 알고보니 오직 '부처님에 대한 감사와 찬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큰 바닷물은 다 마실 수 있고 허공의 바람은 모두 셀 수 있어도, 부처님 공덕은 결코 말할 수 없다는, 부처님에 대한 무한한 감사와 찬탄으로 화엄경 본문은 끝이 나는 것입니다.

 

 


공부의 끝은 공부 그 자체가 아닙니다. 선가(禪家)에서 '백천간두진일보'를 설하시는 것 역시 이러한 이유라 할 것입니다.

 

 

 

무릇 공부하시는 불자님들이시라면, 공부 중간 중간에 늘 '부처님에 대한 감사와 찬탄이 나오는가?'하고 스스로 반문하실 일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아직도 내 공부만 눈에 보이신다면, 그리하여 내가 절을 몇 번 했는지 내가 독경, 염불, 사경을 몇 번 했는지만 눈에 보이신다면, 내 공부가 아직 별 것 아니구나! 아직 멀었구나! 하고 아실 일입니다. 그리고 내 주위에 상관없이 스스로를 경계하시며 더욱더 큰 서원과 보리심을 발하실  일입니다.

 

 

 

 

 

普賢合掌

 


 

*좀더 엄밀히 말씀드리면 화엄경 본문은 '부처님에 대한 감사'와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며 끝납니다.
그런데 부처님에 대한 감사와 믿음은 사실은 둘이 아니기에 여기서는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감사와 찬탄은 비단 수행에서만 궁극의 세계가 아닙니다. 세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을 바르고 밝게 살 때, 부모, 남편 아내, 자녀, 그리고 이웃에 대한 감사와 찬탄을 필연적으로 오게 되어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그런 분들에 대한 감사와 찬탄이 나오지 않으면, 세상을 제대로 산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 됩니다.

 

***보현행원의 뛰어남은, 처음부터 부처님에 대한 감사와 찬탄으로 들어가는데 있습니다.
즉, 원인과 결과가 같은 것(因果同時)입니다. 무슨 공부든 처음부터 이렇게 들어가면 그 형태야 무엇이든 '보현행원적 수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힘을 주는 글] 우리의 인생은 바로 우리 자신의 것입니다.

 

 

 

 

 

 

어느 제자가 스승님께 여쭈었습니다.

"인생에 대한 말씀은 자주 해 주시면서 왜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해 주시지 않으십니까?"

제자 하나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묻자
스승은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만일 내가 너에게 사과를 준다고 할 때에


그 사과를 내가 먼저 씹어서 맛을 보고 너에게 준다면
너는 좋겠느냐?"



우리의 인생은 바로 우리 자신의 것입니다.
누구도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삶을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타인의 삶에 의존하여 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의 삶을 살고 삶의 의미를 깨닫기보다는
타인의 삶을 모방하려 하고 타인의 처지를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처지가 가장 비참하게 여겨지더라도
그런 삶을 체험하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며

그런 삶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가야 하는 것도
자신뿐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모방해야 할 삶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를 초월하여 인류의 스승으로 살아 있는 분들이
바로 우리 삶의 모범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그들일 수 없듯이
우리의 삶이 결코 그들과 같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사과를 건네 받았을 뿐
그들이 씹은 사과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그들의 삶이 인류에게 가르침을 줌으로써
그들 자신에게 의미가 있었듯이

우리도 우리 삶을 통하여 우리 나름의 의미를 찾음으로써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야 하리라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가끔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고 반성하면서
자신의 삶이 주는 의미를 차분한 마음으로 음미해 보아야합니다.
자신의 인생을 살며 그 주인이 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의미 있는 인생은 속도와 능률로 얻어지는 것은 아니며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을 얼마나 빨리 하느냐가 아니라

그 일을 왜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열심히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느냐가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요?

결국 인생의 의미는, 자신만의 귀중한 존재 가치를
스스로 찾아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요.


 

 

 

 

 

< 오늘의 명언 > 

 

아름다운 작별

나는 이제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를 수가 없다.
온갖 것을 다 자기에게로 불러가는
저 바다가 나를 부른다.


이제 나는 배에 올라야 한다.
머물러 있다는 것, 그것은 비록
그 하룻밤 동안은 시간이 불타오를지라도
곧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린 것이고,
굳어 버리는 것이며,
틀에 묶이는 것이므로...

- 칼릴 지브란의《예언자》중에서 -

 

 



*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리를 떠날 때가 옵니다.
모든 것을 훌훌 털고 표표히 사라지는 시간이 옵니다.


더 이상 틀에 묶이지 않고, 더 이상 굳어지지 않도록
떠나야 하는 아름다운 작별의 날이 옵니다.


떠날 때는 떠나야 합니다. 그 하룻밤의
미련없이, 그림자도 남기지 말고...

 

 

Dreams Come Tru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