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無常)의 도리와 복밭

2010. 1. 31. 20:1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728x90

21세기에 대한민국이라는 조그만 나라에서 태어난 우리는 핵을 앞세운 강대국들의  세력다툼과 무역을 앞세운 경제전쟁과 국내경제의 침체 등으로 시대를 공존하고 살아가는 우리는 혼란스럽습니다.


주변에 흔히 일어나는 가정의 해체와 늘어만 가는 이혼율, 충분히 의지만 있으면 이겨낼 수 있는 현실의 어려움이건만, 힘들이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의 일상을 말초적인 퇴폐와 향락으로 불나방처럼 달려 들어가는 어리석은 중생들을 보면서 이 시대를 건강하게 하는 처방은 과연 없는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해보시기바랍니다.


내 자식만 잘 키우면 된다는 생각으로 남의 자식들을 무관심으로 대하지만, 내 자식이 나가서 만나는 친구들이 바로 내가 무관심하게 대했던 남의 자식들이고 금쪽같은 자식은 친구 따라 강남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제대로 된 며느리는 어디서 만날 것이며 제대로 된 사위는 어디서 구할 것입니까?


거기다 결혼할 때 백년해로한다고 온 동네방네 아는 사람들 다 알리고 떠들썩하게 치룬 결혼식이 얼마 가지 못해 서로 등 돌리는 것은 요즘엔 흠도 되지 않지만, 다 늙어서 황혼이혼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이 시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이웃들의 자화상을 우리는 남의 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되돌아 자기를 점검해보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무슨 휴거다, 말세다 해서 우매한 신도들을 현혹해서 이성적, 상식적으로도 용납될 수 없는 참으로 어리석은 짓들을 하는 데도 많이 배웠다는 사람들마저도 거기에 현혹되는 기현상은 우리의 내면세계가 그만큼 약해져 있고 영양결핍이 되어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즘 TV방송에서 “웰빙”이라는 이름으로 먹거리가 판을 치는 세상에 세끼를 먹던 두 끼를 먹든 칼로리를 재고 영양을 따지면서 예수님께서 “사람이 빵만으로 살수 없다”고 영혼의 양식이 필요함을 절절히 일러주고 있듯,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는 편식하지 않고 골고루 음식을 먹어 건강이 유지되듯, 사람의 정신세계도 영혼도 다양한 정신세계를 공부해야 하건만, “오직 하나”에 빠져 “믿으면 천국, 불신지옥”이라는 허무맹랑한 공갈에 소위 지식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허우적대고 있습니다.


이렇게 불확실한 삶의 경계에서 인간의 내면이 나약해지고 있는 현세에서 부처님의 수승한 가르침을 통해 스스로가 한 생각에 자기로 부터 대 자유인이 되고 보이지도 않는 마음을 비운다고 해대기보다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만져지는 모든 것들로 인해 내면에서 불끈불끈 일어나는 자기의 욕구를 바로바로 알아차리고 들여다보며 부질없는 허욕을 경계할 줄 아는 참 사람 되는 길을 전해주어야 하건만 과연 이 시대의 불자는, 우리불교는 이에 걸맞고 있는가를 진단해 봐야 할 것입니다.


요즘, 학자요 박사인 분이 총무원장이 되셔가지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종단이 되어가고 있고, 이번 14대 종회의원 선거는 6당 4락 이라고들 합니다.

소위 6억을 쓰면 종회의원에 당선되고 4억을 쓰면 낙선된다고들 하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고 있는 작금의 조계종단의 뒷모습일진대 참으로 부끄러움을 감출수가 없습니다.

 

이 산중의 저로서는 이런 현실이 상상이 가질 못하고 있습니다.

거기다, 종단에서 하나 뿐인 중앙승가대학을 유지하고 지원하고 발전 시켜나가야 하는 시점에서 지원이 절실하다고 하는데도 나 몰라라 하고 종권유지와 기득권의 도심 대형사찰의 주지인사에 말도 많고 탈도 많다고 강남 봉은사에서는 승가대학 학인 스님들이 단식농성을 한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을 직접 현장에서 보면서 제 마음 속에서는 부처님께서 입멸하시기 직전에 남기셨던 불과 일천자에 불과한 “불설법멸진경” 의 대목들이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일요법회에 여러분들이 전혀 듣도 보도 못하셨던 불설법멸진경에 대해 설해드리며 이 시대 승가에 법고를 울리고 싶은 것입니다.


지금부터 “불설법멸진경”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경은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 직전에 설한 경이라고 합니다.

한자(漢字)로 불과 1천자에 불과한 아주 작은 분량의 경입니다.

부처님은 이 작은 분량의 경을 설하는데 아주 침통해 하시는 인간적인 모습이 묘사되어있습니다.

대부분의 다른 경을 설할 때는, 설하기에 앞서 여러 가지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나는 것으로 경에 묘사가 되는데, 대지가 진동하고 하늘에서는 여러가지 서상(瑞相)이 나타나며 부처님의 백호(白豪)에서 방광(放光)을 하는 등, 자못 엄숙한 분위기가 고조되는 것이 상례입니다.

우리가 법당에서 대하는 불화인 탱화를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데 부처님 께서 이 경을 설하기에 앞서서는 아무런 징후가 나타나지 않을 뿐 아니라, 부처님은 전혀 설법을 하려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킵니다.

설법을 기다리는 대중 가운데 기다리다 못한 아난(阿難)이 일어나 세존께서 설법을 할 때면 언제나 위광(威光)이 나타났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고 또 설법을 하지도 않으시니 거기에는 반드시 깊은 까닭이 있을 것이므로 그것을 “일러 달라”고 세 번을 간청합니다.


그때서야, 부처님은 설법의 서두를 꺼내십니다.

“내가 열반에 든 뒤의 일이긴 하지만 불법이 멸하려고 할 때 오역(五逆)의 죄를 범하는 자는 많아지고 마도(魔道)는 치성하며 악마가 사문(沙門)이 되어 교단 내부에서 불도를 혼란하게 하고 파괴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래지 않아서 열반에 드실 부처님으로서는 불법이 멸할 장래의 일들을 생각하고 쉽사리 설법할 마음이 일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마음이 무거웠을 것이 분명합니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이승에 나와 50년의 오랜 세월동안 교화를 펴고 이제 열반을 앞둔 부처님으로서는 법멸(法滅)에 관하여 설법한다고 하는 것은 괴로운 일임에 틀림없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당신이 열반에 든 뒤 1천 5백년 뒤에 올 말법시대의 중생을 위하여 괴로우나 설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지금의 이 경을 제가 말씀드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악마의 무리가 승려의 모양을 하고서 교단 안에 들어와 불도(佛道)를 내부로부터 혼란하게 하고 파괴한다.

그 마승(魔僧)들은 속인의 옷을 입고 5색의 가사를 즐겨 입는다.

그들은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으며 살생을 하며 질리지도 않고 맛을 추구한다.

무릇 자비심은 전혀 없고 부처의 제자를 표방하면서 서로 미워하고 질투한다. 

그러나 그러한 말법시대에도 보살과 벽지불(酸支佛)과 아라한이 출현하여 정진하고 수행해서 덕을 쌓는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그들을 존경하며 그들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교화하고 가난한 사람을 동정하며 노인을 걱정하고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들을 구조한다.

그들은 항상 불상과 경으로써 사람들에게 봉사할 것을 가르치고 온갖 공덕을 짓고 그 뜻과 성품은 선하여 사람들을 해치지 않는다.

자기의 몸과 재물을 바쳐 남을 구제하고 인욕하여 사람들을 화합하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이 있으면 마승(魔僧)의 무리들은 함께 질투하며 비방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보살의 욕을 퍼뜨리고 내쫒아 절에 살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그러한 보살을 내쫒은 다음에는 함께 불도를 닦지도 않고 절이 황폐하여도 수리하지 않고 도리어 절이 무너지도록 방치한다.

다만 재물을 탐하여 축적하는 데만 힘쓰고 남에게 재물을 나누어 주지도 않으며 복덕을 짓지도 않는다.

그들은 노비를 사고팔며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며 산과 숲에 불을 질러 중생을 상해(傷害)하는 등 자비심이 전혀 없다.

야비한 사람이 비구가 되고 비구니가 된다.

그러니 도덕이 있을 리가 없고, 그러한 사람은 음란한 짓을 일삼고 남녀를 구별하지 않는다.

불도가 희박해지는 것은 모두가 다 이들의 탓이다.

그들 마도의 자식들은 혹은 나라의 법을 피하여 승려가 되고, 그러니 매월 15일과 30일에 같은 지역의 승려들이 모여 계목(戒目)을 읽으며 반성하고 죄를 고백하고 참회하는 포살(布薩)을 행하지 않고, 비록 계목을 읽는다 해도 싫어하면서 읽고 권태(倦怠)로와 하며 앞뒤를 줄여버리고 다 읽지도 않을 뿐 아니라 열심히 듣고자 하지도 않는다.


경을 읽지도 않고 배우지도 않으며 설사 읽는 이가 있다고 해도 자구(字句)의 뜻도 모르고 읽으면서도 굳이 아는 이에게 물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유명해지기를 바라고 거만하고 겉모양은 당당하고 뽐내며 남으로부터 끊임없이 칭찬을 받고 공양받기를 바란다.”


법이 멸하려고 할 때, 여인은 정진하며 항상 공덕을 짓는다.

그러나 남자는 게으르고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아니하며 사문(沙門)을 마치 분토(糞土)와 같이 여기고 신심(信心)이 없다.

그러니 법이 멸하려고 할 때, 모든 하늘은 눈물을 흘려 슬퍼하고

오곡(五穀)은 여물지 않으며 질병이 퍼지고 죽는 사람은 많아지며 중생들은 괴로움에 시달리고 관리는 도리에 따르지 아니하고 빼앗는 것만을 꾀한다.

사람들은 혼란을 일으켜 그 기회를 이용해서 일시에 욕망을 성취하고자 한다.

그러니 악인은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으나 선한 사람은 한 두 사람 뿐이다. 

세계의 종말 직전이 되면 해와 달이 짧아지고 사람의 수명도 줄어 나이 40에 머리가 희어진다.

남자는 음란을 일삼다가 정력이 다하여 젊어서 죽으며 혹 수명이 60이라 해도 여자보다는 짧다.

세계의 종말에는 갑자기 홍수가 일어나지만 사람들은 세계의 종말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홍수는 빈부와 귀천을 가리지 아니하고 삼켜 물고기의 먹이가 된다.

그러한 때에 보살과 벽지불과 아라한은 온갖 마군(魔軍)에게 쫒기어 삼승(三乘)의 산, 복덕의 땅으로 들어간다.

그들은 스스로 법을 따르고 계를 지키며 기뻐한다.

그리고 월광(月光)보살이 나와 불법이 잠깐 흥할 것이다.

이것은 마치 기름등잔의 불이 꺼지기 직전에 불꽃이 커져서 밝아지는 것과 같다.


“이 이상은 더 설하여 자세히 들려 줄 수가 없다.” 하시고 침통하게 앉아계셨다. 한문으로 의역된 경에 이렇게 씌어져 있습니다.


이 경은 부처님께서 돌아 가시고난 후, 불법(佛法)이 멸하여 다한 말법시대를 경고하는 부처님의 말씀으로 정법시, 상법시, 말법시라는 삼시관을 기준으로 나누게 되는데, 이 삼시관이라는 것은 정법(正法)과 상법(像法)과 말법(末法)이라고 하는 불교에 대한 역사관으로 이것을 삼시관(三時觀)이라고 합니다.


정법시대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그것을 따르는 행과, 가르침과 행에 의해 깨달음을 성취한다는 세 가지 것이 갖추어져서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불법이 살아 있는 시기를 말합니다. 

이때 정법(正法)이라고 하는 정(正)은 살아 있는 부처님의 바른 법을 뜻하면서 동시에 사람들이 그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제로 경험할 수 있는 증험(證驗)을 뜻하기도 합니다.

정법이 지속하는 시기는 5백년이 정설이 되고 있습니다.


상법시대라고 하는 것은 정법의 시기와 닮은 시대를 말합니다.

이때 상법(像法)의 상(像)은 비슷하다는 뜻으로 부처님의 가르침과 가르침을 따르는 행은 있어서 정법시대와 그 점에 있어서는 같으나 그 가르침과 힘에 의해서 깨달음을 성취하는 일은 없는 시대입니다.  이 시기는 1천년이 정설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를 말법시대라고 하는데 이 시기는 다만 부처님의 가르침만이 있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행도 깨달음도 없는 시기입니다.

이 시기는 1만년이 지속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1만년이 지나면 다른 부처님이 세상에 나와 정법을 펴 다시 정법시대가 오고 상법시대를 거쳐 말법시대가 오는 주기가 되풀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삼시관(三時觀)이 부처님 당시부터 명확하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부처님 당시나 부처님이 입멸(入滅)하신 직후, 즉 초기불교 시기에는 정법은 1천년 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말해지고 있었으므로 그 시기에는 상법이라든가 말법이라고 하는 문제는 일어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부처님이 입멸하신지 5백년경이 되었을 때, 불교교단은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게 되고 교단내부의 대립은 심화되었고 이로 인해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의 귀추를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1천년이 지속한다고 했던 정법이 부처님 입멸하신지 500년에 이르러 이같이 혼란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은 여자의 출가(出家) 떄문에 정법시대가 5백년으로 줄 것이라고 한 부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이제 정법시대는 끝났다고 생각한 것 입니다.


정법시대가 끝났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이제 부처님의 가르침도 없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행도 없으며 깨달음도 없는 시대를 어떻게 헤쳐 나아갈 것인가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순간 절망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법시대가 끝났다고 해서 결코 불법이 멸하여 없어진 것은 아니다.

다만 교단의 분열로 인하여 정법이 우리 눈앞에서 보이지 않을 뿐이다.” 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때 그들은 역사적으로 실재한 세존에 한하지 않고 모든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 즉 진리는 그것 자체가 변하거나 없어지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전달되는 과정에서 여러 영향으로 변화할 뿐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의 성격과 능력에 따라서,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의 성격과 능력에 따라서, 그 시대와 사회에 따라서 변화하며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는 경우와 부처님이 없는 시대에 부처님을 상상하면서 간접적으로 가르침을 받는 경우와는 차이가 있음을 그들은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더 유지하고 수행할 것인가 생각하였고 그것이 상법시대에 대한 자각입니다.


불법의 지속을 바라는 이들에 의해서 상법시대는 1천년이라고 설하는 대집경(大集經)과, 정법 1천년, 상법 5백년이라고 설하는 비화경(悲華經)과, 정법과 상법이 각각 5백년이라고 설하는 현겁경(現劫經)과 말법이 1만년이라고 하는 대비경(大悲經) 등이 결집됩니다.


부처님이 입멸한 1천 5백년 뒤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행(行)과 행에 의한 꺠달음이 불가능한 시대가 온다고 하는 말법사상의 자각은 그 당시의 불교인들로 하여금 깊은 반성을 하게 하였습니다. 

즉, 행과 깨달음이 없는 시대에서 어떻게 하면 성불(成佛)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가 고심(苦心)하게 되었고, 고심한 사람들 중에는 중국의 삼계교(三階敎)의 주창자인 신행(信行540∼594)과, 정토교를 주장한 도탁(562∼645)이나,선도(善導613∼681)

스님 등은 스스로 성불하는 길을 찾아 아미타불을 신앙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 신방(神肪)은 지장십륜경(地藏十輪經)의 가르침에 따를 것을 주창하기도 했습니다.


중국 당나라의 도세(道世)가 저술한 법원주림(法苑珠林)에는 말법 시대가 되면 다섯가지 혼란한 현상이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비구가 속인에게서 법(法)을 배우며,

둘째 속인이 윗자리에 앉고 비구는 낮은 자리에 앉으며,

셋째 비구의 설법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속인의 설법을 으뜸이라 고 하며, 

넷째 비구가 악마의 집에 스스로 태어나 세속의 생활을 하며 그것이 옳다고 하므로 불법(佛法)의 옳고 그름이 분명하지 않으며,

다섯째 비구가 아내와 자식과 하인과 하녀를 두고 생활하면서 세속 사람과 다름없이 다투기를 일삼는다고 하였습니다.

 

이 시대의 불교와 종교계의 실정을 보면 지금이 바로 도세가 말하는 말법시대가 바로 이게 아닌가 여겨집니다.


그러나, 도세가 지적한 말법시대의 이러한 다섯 가지 혼란상(混亂相)을 오란(五亂)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도세가 처음으로 말한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경전 속에서 설해지고 있는 것을 도세가 묶어서 말하였을 뿐 입니다. 

말법시대를 말하는 경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법멸진경(法滅盡經)은 정신은 황폐화되어가고 물질의 편리함을 편리함만을 누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의 노예로 전락되어 못 저지르는 짓이 없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이 난세를 살아가는 우리는 위기의식을 느껴야 합니다.


법멸진경에서 남기신 승단에 관한 부처님의 말씀은 오늘의 우리로 하여금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평소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기 때문에 봉은사에 갔던 날 더욱 가슴이 짓눌렸던 것입니다.

승단의 혼란은 출가한 스님들에게는 곧바로 자신의 일이지만, 수행자의 공덕과 수행은 스님 개인을 넘어서서 중생제도와 연결되는 일이기 때문에, 재가신도의 입장에서도 바람직한 일이 못되는 것이기에 시주은혜를 축내고 있지는 않은지 반문해봐야 할 것입니다.

동시에 재가신도에게는 불법을 지키고 스님들이 수행을 잘 할 수 있도록 의식주를 도울 외호(外護)의 의무가 있으므로, 수행자의 일상의 수행을 지켜보고 그릇됨은 지적해주어야 하며 승단의 혼란은 재가신도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느껴야 할 것입니다.

또, 항상 말법을 자각하면서 말법시대에 어떻게 하면 불도(佛道)를 성취할 수 있을까 전념해야 할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내 죽는 순간에 걸림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전등록에 보면 우바국다 존자께서 삼매에 들으셨을 때, 마왕이 우바국다 존자를 우롱하다가 도리어 나중에 우바국다 존자님의 신통력에 곤혹을 치르고 마왕이 마지못해 존자님 앞에서 존자님께서 시키신 대로 삼귀의를 하여 풀려난 뒤에 도망가면서 다시 외치길, “내가 말법시대에 가면 내 권속(마졸)들을 풀어 출가스님을 만들어서, 모두 고기 먹고 술 마시고 춤추며 온갖 계율을 무너뜨려 기어코 불법을 망하게 하고 말겠다.”라고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에서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도저히 미움이 지나쳐 해결할 수 없을 때, 적어도 불법을 믿고 따르는 불자라면 지금 이 순간에 부처님은 이일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해결하셨을까? 를  생각해볼 줄 아는 지혜로움이 항상 그림자가 되어있어야 할 것입니다.


매사에 부딪치는 일들에 대해 정말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에 비추어 보고 정견(正見)에 의지하여 어떤 길이 우리 중생들을 바른 길로 이끌어 주는 것인지 잘 판단하여, 하루 빨리 이 몸이 생명을 다하여 저 죽음의 세계로 가더라도 윤회로부터 벗어나고 구경에는 불도를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허나, 지금시대는 정말 말법시대임이 분명하며, 이런 말법시대에 태어나는 중생들은 부처님 당시처럼 근기가 수승하지 못하여 도를 이루는 것은 고사하고, 십악을 범하지 않고 살아가기도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하물며 세속에서 온갖 경계에 부딪쳐, 때로는 싸우기도 하고 때론 남을 속이기도 하며, 울고 웃고 살아가는 인생살이 속에서 어떻게 해야만 할 것인가?

 

그것은 바로 염불입니다.


화장실에 있어도 몸이 화장실에 있을 뿐이지 내 마음은 간절히 기도를 한다면 주인공은 정토에 있는 것이며, 내가 설거지를 하거나 걸레질을 하고 있다 해도 내 입과 생각이 간절하게 염불을 하고 있다면 주인공은 부처님의 세계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시대의 이러한 난세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스스로가 노력하시면, 생각만 한번 일으키면 할 수 있는 염불이라는 자력수행으로 이겨내고 헤쳐나가시기 바랍니다.

부디 성불하십시오.

 

이 세상에 무슨 불치병들이 그리도 많은지 모르지만, 가장 무서운 것은 세월일 것입니다.


세월 앞에선 그 어떤 아름다운 사람도 세월가면 볼품 없어지고 아무리 높은 자리에서 권력을 누리고 살았던들 권불십년이라 듯이 가는 세월 앞에선 “무상” 이 제일 무서울 것입니다.


이제 다음 주 부터는 또다시 천일기도가 시작되고 지금 이 자리에 이 몸뚱이를 끌고 온 “나다”하는 주인공이 다겁생을 돌고 돌며 윤회의 바다에서 몸 바꿔 살아오면서 뿌려왔던 인과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시작되는 살업을 참회하고 소멸시키는 백일기도가 시작되기에 이번에 다녀오리라 생각하고 부모님 두 분이 호젓이 계시는 선영에 바삐 다녀왔습니다.


살아생전처럼 두 분이 뎅그마니 계시는 묘소에 올라 백 세주 한잔을 붓고 일배를 드리고 주변의 잡초를 뽑아드리고 옆자리에 앉아 문득 떠오르는 금강경의 마지막 사구게송이 떠올라 혼잣소리로 독송해드렸습니다.


“하이고 일체유위법이 여몽환포영이요 여로역여전이니 응작여시관이라.

(何以故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어찌하여 눈과 귀와 코와 입과 감촉과 분별이라는 육근에 의해 존재가치를 느끼고 분별을 일으켜 욕구와 착심을 일으키도록 하는 모든 것들이 세월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은 스러지고 마는 꿈속의 그림자와 같고 풀잎 끝에 맺힌 가을 이슬과 같으니 이러한 공수래공수거의 이치를 마음의 눈으로 들여다보라는 이 게송이 그리도 와 닿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이 세상에 백년을 산다 해도 삼만 육천 오백일에 불과할 것이고 인생 팔십을 산다 해도 이만 구천이백일에 불과함이요, 인생 칠십을 다 산다 해도 이만 오천오백오십일에 불과 할 것이니 여기에서 철없던 시절을 빼버리고 병들고 괴롭고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을 다 빼버리고 호시절이라 야! 살맛난다! 하는 날들을 모아보면 과연 얼마나 살맛나게 살았다고 할 날들이 될까요?


지금 각자가 주머니에 든 핸드폰을 꺼내서 메뉴를 눌러 계산기로 계산해보십시오.


꿈은 야무지게 꾸더라고 일년 365일에 곱하기 눌러 구십은 산다고 쳐서 곱하기 구십을 쳐보십시오. 

삼만 이천 팔백오십일이 나올 것이나, 지금 내 나이 사십을 친다면 365일 곱하기 40을 쳐보십시오.

만사천육백일을 살았으니 삼만이천팔백오십일에서 만사천육백일을 빼보십시오.

이제 남은 날은 만 팔천이백일에 불과할 것입니다.


오십을 살아오셨다면 만 팔천이백오십일을 살아오셨으니, 90세를 산다쳐도 남은 날은 만사천육백일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겨우 이것 살자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리도 아득바득하게 살아오고 있단 말입니까?


이렇게 살다 가신 두 분의 선영에서 천주교 집안으로 사셨으니 가셨다면 천국을 가셨을 것이고 막내를 부처님 전에 보냈으니 이 공덕으로 극락구경은 하셨을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만,


돌고 도는 육도윤회는 없는 것이 아니기에 중생들을 교화하고 제도하기 위해 방편으로 구구절절하게 설하셨던 것입니다.


하여, 천국도 지옥도 축생계도 모두가 다 중생들의 의업들이 모여 만들어진 세계인 것입니다.


우리가 한 생각 돌리면 지옥도 극락으로 변해지고 그토록 밉던 사람도 한 생각 돌리면 잊혀지고 미움보다는 연민이 될 수 있듯이 사람 중생은 분별지가 있어서 한 생각을 돌리면 악도 선으로 변해지고 미움과 증오도 연민과 동정으로 바뀔 수 도 있습니다.


그런데 일단 사람중생의 몸을 벗어버리면 분별지를 가질 수 없기에 죽기 전에 가졌던 어두운 마음의 지향성과 에너지에 의해 어두운 에너지에서 벗어나올 또 다른 에너지가 될 수 있는 수행이라는, 인연이라는 에너지를 만들 수 없기에 그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어두움과 무거움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후손들이 불전에 재를 올리고 무상의 법문을 들려주며 온갖 공덕을 대신해주는 것이건만,

요즘 세상은 물질이 풍요로우면 다 되는 세상인지라 그 마저도 세속적으로 변해져 가고 있으니 개탄할 노릇입니다.


천계의 세계나 육도윤회의 세계를 알려준들 그 또한 눈에 보이지 않고 손바닥에 올려두고 보여줄 수 없으니 전설따라 삼천리로 받아들여지는 중생들의 제 잘난 알음알이와 전 번에 뉴스 꺼리가 됬던 일산의 황룡사의 허무맹랑한 기가차지도 않는 짓들이나 휴거를 주장하며 온갖 사람들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고가는 삿된 무리들이 빙자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있으니 정말로 개탄할 노릇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법이 정법을 호도하는 세상에서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신행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집고 넘어 가는 게 싫으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만, 이러한 진리를,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태어나면 언젠가는 간다는 순리를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우리는 보다 진솔해질 수 있고 겸손해지고 내가 잘났다는 교만과 어리석은 분별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렇게 초로에 이슬과 같은 삶을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그리고 그렇게 살았을 때 우리에게는 어떤 변화가 올 것인가가 궁금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아미타경에 나오는 대로 윤회를 벗어나버리는 부처와 같아지는 때가 올 때까지 우리는 정진하고 자신을 닦아 가는 것 일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 재가 불자들이 우선 할 수 있는 수없이 많은 수행 중에 알고 넘어갈 것들을 정리해보았습니다.


즉, 세간(世間)의 복전(福田)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①보은(報恩)의 밭이요, ②공덕(功德)의 밭이며,

③빈궁(貧窮)의 밭이니, 보은의 밭은 부모와, 스승과, 화상(和尙)을 말하고, 공덕의 밭은 부처님 법을 받아가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이며, 빈궁의 밭은 모든 어렵고 곤란한 사람을 말합니다.


고로 “출가자는 보은의 밭과,공덕의 밭과,빈궁의 밭 세 가지 복전이 있는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우바색계경 권 3)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보살이 보시를 행할 때에는 두 가지 밭이 있으니, 그 하나는 복(福)의 밭이요, 또 하나는 빈궁의 밭이니, 보살이 복덕을 더하기 위하여 빈궁한 사람에게 보시하고, 더 없이 훌륭한 지혜를 더하기 위하여 복전에 보시하며, 보은을 위하여 복전에 보시하는 것이다. 또한 불쌍하고 가엾은 마음을 냄으로 빈궁의 밭에 보시하며, 번뇌를 버리기 위하여 복의 밭에 보시하며, 공덕을 이루기 위하여 빈궁의 밭에 보시하며, 온갖 즐거움을 키우기 위하여 복전에 보시하고, 온갖 고(苦)의 인연을 버리기 위하여 빈궁의 밭에 보시하는 것이다.

친애(親愛)하는 곳에 보시하는 것은 은혜를 갚기 위한 것이요, 원수에게 보시하는 것은 악(惡)을 없애기 위함이다.”고 하셨습니다. 

 (우바색계경 권 2)


세존께서는 또한 두 가지 밭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①자비의 밭(悲田)이요, ②공경의 밭(敬田)이니, 자비의 밭은 모든 고독(孤獨), 빈궁, 곤고(困苦)를 말하고, 공경의 밭은 불, 법, 승 삼보와,부모와,스승을 이르며, 자비의 밭에 대해서는 마땅히 가볍게 여기고 천(賤)하게 여겨 이는 복전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것이요, 공경의 밭에 대해서는 마땅히 결과를 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고 하셨습니다.  (대승리취 육바라밀경 권 4 보시품)

 

인(仁)을 행하고 자(慈)를 행하여 큰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건지면 11가지 자랑이 있게 된다고 하셨으니,

11가지 자랑이란, ①복이 항상 몸을 따르고, ②누워자도 편안하고 ③잠을 깨도 편안하고 ④악한 꿈을 꾸지 않고 ⑤하늘이 보호하고 ⑥사람들이 사랑하고  ⑦독(毒)을 받지 않고 ⑧전쟁을 만나지 않고 ⑨물에 빠져 죽지 않고 ⑩불에 상하지 않고 ⑪살아서는 이(利)를 얻고 죽어서는 범천에 나는 일이다. 고 하셨습니다.

 (법구경 권상자인품)


남에게 먹을 것을 주면 힘을 주는 것이요, 입을 것을 주면 고운 얼굴을 주는 것이며, 탈 것을 주면 편안과 즐거움을 주는 것이요, 등불을 주면 눈을 주는 것이다. 있을 곳을 주는 사람은 모든 것을 주는 것이요,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은 영생(永生)을 주는 것이니, 믿음과 청정한 마음으로 먹을 것을 보시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어디서나 먹을 복이 있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색한 마음을 항복받아 번뇌를 이기고 보시를 행하면, 그 공덕은 모든 사람의 뒷세상을 건지는 나루터가 되리라. 고 하셨습니다.

(증일아함 권 4 호심품)


또, 보시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재시(財施)요, 둘째는 법시(法施)라 합니다.

그리고 보시는 준다는 생각도 없이 주는 베품이지만,


다섯 가지 보시할 것과 못할 것이 있습니다.

 

즉, 보시를 해도 복(福)을 받지 못하는 다섯 가지는 ①칼을 남에게 보시하는 일이요 ②독물(毒物)을 남에게 보시하는 일이요 ③들소(野牛)를 남에게 보시하는 일이요 ④음녀를 남에게 보시하는 일이요 ⑤신사(神祠:외도가 귀신을 섬기는 사당)를 짓는 일입니다. 


그리고 보시하면 큰 복(福)을 받는 다섯 가지란, ①원관(園觀:경치를 바라보며 쉬는 누각)을 짓고 ②수림(樹林)을 만들며 ③다리(橋樑)를 놓고 ④큰 배를 만들며 ⑤미래를 위하여 여행자의 숙소와 주택을 짓는 일이다.고 하셨습니다.

(증일아함 권 27 사취품)

이처럼 우리는 한번 뿐인 삶에서 이 손과 발과 말은 모두가 다 생각의 지배를 받기에 이 생각을 지극하고 간절하게 가져서 손과 발과 입이라는 이 종들을 오로지 현세에는 복을 짓고 후세에 인과에 걸리지 않고 부질 없는 업들이 모여있는 세계에 가지 않도록 항상 밝고 긍정정인 생각으로 바꿔가며 지금 이 현실의 삶은 모두가 다 인과의 과정이요, 결과로 겸허히 받아들여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 자신이 알게 모르게 뿌려왔던 인과의 밭에서 잡초를 골라내고 마음 농사 잘 지으시길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오.

 

부처님의 거짓말

똑같이 필요에 의해 생겨난 양초는 자기를 태우면서 주변을 밝혀주고 사라지건만,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돈은 모두가 알고 있듯이 물물교환이 불편하기에 화폐를 만들어 편리함을 추구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지혜스러움이 이제는 모두가 돈의 노예가 되어 저지르지 못할 일들이 없어져 버렸고, 만물의 영장이라던 사람이 인간 포유류에 불과하게 변해가는 모습이 아침마다 뉴스 시간에 보게 됨은 흔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돈만 손에 쥘 수 있으면 자신의 양심은 말할 것도 없고 혈육의 천륜도, 영혼도 팔아넘길 수 있는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어찌보면 우리는 과학의 발달로 물질문명의 바탕 위에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또는 사회주의라는 관념들로 인해 사람들의 삶과 질이 더 풍요로워지고 행복해지기 보다는 더 영악해지고 험악해지고 난세가 되어가는 21세기의 인간 군상들이 되어버렸습니다.


넉넉하진 않더라도 세끼 밥술 먹고 사지 멀쩡하게 건강하고 밤이면 한 지붕 밑에 가족들이 오손도순 모일 수 있다는 행복은 이미 행복이 아닌지 오래 전이고, 언제 어떻게, 악착같이 살아온 이 삶을 마감할지도 모르면서 앞만 보고, 남과 자기를 비교하면서 자기를 잊어버리고 살아가고들 있습니다.


지금 제가 전해드리는 대장엄경에 실려있는 초계라는 비구스님과 아주라는 비구스님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 신선한 충격이 오실 것입니다만, 들으시면서 한편으론 요즘 세상을 대입시키시면서 또 다른 가치관이 머리를 스치실 거라고 여깁니다.


“어떤 비구스님이 길을 가다가 도적을 만나 그나마 얼마되지 않은 여비와 입고 있던 옷가지들을 다 빼앗겼는데 도적들은 그 스님이 관청에 가서 신고를 못하도록 칡넝쿨과 풀줄기로 스님의 손과 발을 묶어두고 떠나버렸습니다.

발가벗긴 채로 숲속에서 풀줄기에 묶여있던 스님은 풀어나려고 몸을 움직이자 자신을 묶고 있던 풀들이 뿌리채 뽑히는 것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이 일어나자 자신이 움직이면 풀들이 행여 상할까봐 염려되어 사람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며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렇게 있기를 밤이 되면 추위에 떨었고, 낮이 되면 뜨거운 볕에 온몸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온갖 벌레와 개미들이 괴롭혀도 자신이 움직이면 풀들이 상할까봐 모든 고통을 참고 하룻밤 낮을 사람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사냥을 나왔던 임금이 벌거벗긴 채로 풀줄기에 묶여있는 이상한 모습의 스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부하들을 시켜 스님을 풀어주도록 하고 옷을 입혀 사연을 묻자, 그간의 일들을 왕에게 말하고 행여 풀들이 뿌리 채 뽑혀 상할까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스님의 자비스러움에 크게 감명을 받아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하였고 이 일로 인해 그 스님의 이름을 (풀에 묶였던 스님)이라 하여 초계비구(草繫比丘)라고 불렀습니다.


또, 어떤 스님이 식량이 떨어져 탁발을 하러 갔는데 그 집은 구슬을 줄에 꿰어 훌륭한 명품목걸이를 만드는 집으로 주인은 값비싼 마니주로 왕비의 목걸이를 만들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스님이 오자 나름대로 신심이 있던 그 주인은 탁발을 온 스님에게 음식을 갖다드리고자 부엌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때 마당에 서있는 스님의 붉은 빛이 도는 가사가 햇빛에 반사되어 투명한 구슬에 비추게 되자 구슬이 붉은 빛으로 보이자 마당에 지나다니던 거위가 그 구슬을 고기 살점으로 알고 대뜸 먹어버렸습니다.

주인은 공양음식을 가지고 나왔는데 탁자에 있어야 할 마니주가 안보이자, 스님에게 수상한 생각이 들어 묻자 그 스님이 잠자코 말을 하지 않자 슬쩍 훔친 것으로 알고 복을 짓겠다던 마음에서 공양음식을 들었던 손이 스님의 멱살을 잡고 구슬을 내 놓으라고 다그치기 시작하고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왕에게 바칠 날짜는 내일인데 구슬이 없어진 주인은 스님에게 폭력까지 쓰면서 다그치기 시작하는데도 그 스님은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거위가 구슬을 삼켰다고 사실대로 말한다면 일에 바쁜 주인은 당장에 거위를 죽여 배를 갈라 구슬을 찾을 것이 뻔하기에 스님은 온갖 수모를 다 당하면서도 거위만을 살피면서 묵묵히 참고 있었습니다.


그때, 거위가 주인의 폭행에 상처가 난 스님의 몸에서 흐르는 피가 땅을 적시자 그 피를 먹으려 기웃거리다 주인이 휘두르는 몽둥이에 머리를 맞아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습니다.

거위를 살리고자 모진 고통을 참았던 스님은 그때서야 숨길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사실대로 말해주었습니다.

당신이 음식을 가지러간 사이 거위가 마니주구슬을 삼켜버렸으나 사실을 말하면 당신이 거위를 죽일거라 여겨 거위가 똥을 누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라고,...

이제 죽은 거위의 배속을 보면 구슬이 있을 거라고 말하자 그제서야 사실을 알게된 주인은 스님에게 죄스러움과 부끄러움으로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고 진심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했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이 스님의 이름을 아주비구(鵝珠比丘)라고 했다고 합니다.


대장엄경에 실린 이 두 스님의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영악하게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는 너무나 융통성이 없다고 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자신의 편리함과 욕구에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감히 언감생심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주관보다는 객관을 먼저 헤아리는 이타행의 숭고함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으로 살아가는 이 시대의 현대인들이 초계비구스님과 아주비구스님의 그림자만이라도 닮아보려 한다면 우리의 삶은 서로가 서로의 입장을 배려해주는 사람다운 이웃들이 넘쳐날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주제인 아함경에 실려있는 부처님의 거짓말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세존께서 제자들과 함께 이웃나라로 법을 전하러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야트막한 산길을 걸어가시다 언덕고개 마루턱에 썩은 나무둥치에 잠시 쉬고 계셨는데, 갑자기 세존의 맞은편 숲에서 후다닥!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사슴 한 마리가 뒷다리에 화살이 박힌 채로 튀어나오더니 세존의 일행을 발견하고 멈칫 놀래더니 자비하신 세존과 눈을 마주치자 세존의 앞에 가서 자신을 숨겨달라는 눈빛으로 세존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세존께서 자신의 가사를 들어 사슴을 그 속에 막 숨겨주는 순간에 말을 탄 사냥꾼이 사슴이 튀어나온 숲에서 나오더니 세존의 일행을 발견하고는 사슴을 보지 못했느냐고 묻자 세존께서는 손을 들어 반대편의 숲쪽으로 사슴이 갔다고 하자 사냥꾼은 인사를 하고 바삐 사슴의 뒤를 쫓았습니다.


사냥꾼이 멀리 간 것을 확인하신 세존께서는 자신의 가사 밑에 감췄던 사슴을 꺼내어 박힌 화살을 빼내고 상처에 약을 발라주고는 반대편으로 도망을 시켰습니다.

이 모습을 다 지켜보았던 제자들인지라 그 중에서도 세존을 시봉했던 아난존자는 수행비서인지라 평소에 열가지의 십악 중에 거짓말을 하지 말라던 부처님의 계율이 떠올라 세존께 묻습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이 알기로는 거짓은 열가지의 계율 중에 하나로 악한 행에 속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승님께서는 어찌 저희들이 다 보는 앞에서 사냥꾼에게 거짓을 하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대답하기를 “아난아! 그렇다. 그것은 분명히 거짓에 속한다. 하지만 내가 사실대로 말했을 때, 사슴은 사냥꾼에게 잡히어 죽게 될 것이다.

거짓보다 더 큰 죄는 살생이니라, 너 같으면 작은 거짓을 하지 않기 위해 더 큰 살생의 죄를 범하라는 것이냐?” 하고 반문을 하십니다.


이와 같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렇게 수승하신 것입니다.

절집에 들어와 맨 처음 배우는 계초심학인문의 첫머리에 수오계십계등(受五戒十戒等) 하야 선지지범개차(善知持犯開遮)이니라”하여 이를 개차법(開遮法)이라고 하는데 마땅히 계율을 목숨처럼 받아 지니되, 계율자체에 매여 아난의 어리석음과 같이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계율에 매여 답답하기만 한다면 계율을 지키는데 생각을 열어야 할 것이기에 열 開字를 쓰고, 융통성을 살린다고 자기 합리화에 빠짐을 막기위해 막을 遮字를 써서 개차법이라는 지혜로움이 있습니다만,

요즘 승가는 이렇게 수승한 개차법을 자기 합리화하는 데만 써먹고 있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불법은 이렇게 현실적이고 지혜로운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부처님 가르침처럼 살다가는 주변에 이용만 당하고 어딘가 부족한 놈이라는 소리나 듣고 손해만 보게 된다고들 합니다.


그것은 불법의 오묘함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천지자연은 원인 없는 결과가 없고 삼라만상은 나름대로 존재의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느 신도분이 오셔서 대화중에 어느 TV방송에서 하는 사랑의 리퀘스트라는 프로를 보면 왜그리 못사는 사람들에게만 그렇게 몹쓸 병들이 오냐면서 제게 업과 운명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우리가 언덕을 오르면 내리막길이 있고 산을 오르면 내려 가게 됩니다.  이와 같습니다.

과거 생에 떵떵 거리고 살면서 온갖 교만과 독선과 이기심과 불량스러움으로 남들을 위한 보시행을 전혀 하지 않았던 과보로 지지리도 못살고 가난하고 온갖 병고로 인과를 치러야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금생에 잘나가는 사람들이 지금의 자기가 잘나가는 것이 과거 생에 고만한 보시공덕이 있어 그리 됐으니 금생에 더욱 겸손하고 자비스러움으로 더 큰 공덕을 쌓아야 함에도 교만에 떨어지는 어리석음으로 금생을 마감한다면 다음 생에 내리막길임은 천지자연과 우주의 질서인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과거 생에 그리도 교만으로 박복하게 살았던 이들이 금생에 살아가는 게 그리 힘들지만, 심성은 착하게 태어나 다음 생을 기약하게 되고, 금생에 잘나가는 이들은 과거 생에 공덕행을 짓고 이타행을 했던 심성은 어디로 가고 금생에는 아주 못된 심성으로 살아가는 것을 많이들 보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은 공평하고 돈은 돌고 도나 봅니다.

이제 이러한 도리를 깨달아 초계비구나 아주비구처럼은 못 된다 해도 해를 바라보는 해바라기처럼 우선 가까운 가족 간에라도 그리들 살아보시는 연습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여기 좋은 인과 법문이 있어 약간의 수정을 하여 올려드립니다.


                    인 과 응 보

인과응보 없다마소 생로병사 원인결과

율리법칙 자연순리 산은높고 물은깊네.

사시절후 유전법과 기와운을 계산하는

사성진리 종교법인 인생사가 사주라네.


사주팔자 다스림은 만물영장 인간이요

사주팔자 부정하면 신과자연 노예된다.

인과응보 알아보세 현세지은 선악업보

현세받고 내세받고 무량억겁 후세받네.


착한일을 하는사람 부귀당장 아니와도

재앙점점 물러나니 자손창성 아니올까?

악한일을 하는사람 빈천당장 아니와도

재앙점점 다가오니 자손불화 아니올까?


현세인과 알아보세 이십전은 부모인과

이십넘어 사십까지 과거지은 자기업보

사십넘어 육십까지 현세지은 자기과보

육십넘어 죽기까지 현세내세 거울이라

용서하고 참회하며 반성하고 정진하세.


현세운명 현재마음 내가지어 내가받네

덕을닦아 종자뿌려 부부자손 화합하고

일가친척 우애하며 가꾸며는 풍년이라

마음닦고 효도하면 천지신명 보호하네.


부모뿌리 남편줄기 자식열매 화목하세

부모에게 거름하면 남편자식 절로성공

뿌리불효 썩어지면 남편자식 죽는구나

단출하다 좋다마소 다음생에 인과응보

친구권속 전혀없어 외로워서 고통받네.


오순도순 화목한집 서로도와 만난인연

참회하고 반성하니 지상정토 이아닌가?

부모남편 거역하며 원수맺고 저주하면   

머리병을 앓게되고 백천가지 실패한다.


친구권속 불화하고 저주하며 싫어하면

가슴병을 앓게되고 하는일이 아니된다

후배후손 미워하고 짜증내며 학대하면

잔병치레 자주하니 모든일이 고통이라.


악담악질 시기질투 모진질병 앓게되고

저하늘을 속인과보 불치병을 앓는구나

우선잠깐 좋다마오 두고보세 훗날보세

남의자식 미워하면 내자식이 말안듣네.


원수맺어 원한이면 내자식이 평생필패

하늘에서 내린비는 이땅에서 증발한것

곤란할때 베푼자는 내자식이 성공하고

참회하고 반성하면 내자식이 효도하네.


성질내면  실패하고 화목하면 성공하고 

콩심은데 콩이나고 팥심은데 팥이난다.

착한자는 예뻐지고 악한자는 미워지며

수효하면 무병이요 방종하면 질병이라 .


오래살며 고통하면 부모지천 원인이요

병신자식 안았거든 부모불효 과보로다.

오늘내가 빈천함은 인색함이 원인이요

자식인연 멀어지면 내가부모 멀리했다.


남의고통 외면하고 악착같이 재물모아

자식주려 하였다면 어느날에 재가되어

허망한꼴 보게되며 친구자식 배신한다.

상대방은 나의거울 그를통해 나를보라.


빈천자를 보거들랑 내일같이 생각하여

부디바삐 공덕짓고 보시하며 정진하세.

부귀공자 만나거든 베풀어서 그러하니

우리또한 공덕지어 부귀영화 누려보세.


가진자를 질투마라 베풀어서 그러하고

없는자를 웃지마라 인색하면 그러하다

어린아이 보거들랑 너도그리 자랐으니

잘못한다 꾸중말고 가르치고 인도하면

수도하는 효자되고 자랑스런 자손되니

슬기로운 국민이요 풍요로운 국토된다 .


늙은이를 뵙거들랑 너도그리 늙을테니

노망한다 천대말고 자성법을 가르쳐서

법문듣고 공덕쌓아 동업인연 곱게맺어

염불하는 마음으로 극락세계 가게하소.


내몸이다 내입이다 마음대로 하지마소

나의손이 도끼되고 나의발이 칼이되어

한을맺고 원수맺어 죽어다시 만난곳이

이세상의 부부자식 인과응보 이아닌가?


한손에는 식량들고 한손에는 약병들어

원수맺고 빚진이들 갖은고통 풀어주며

보살도를 행하는자 부부자손 화합하니

존경받고 사랑받네 이 아 니 좋을손가.


누 구 를 원망하고 누 구 를 탓을하랴

지은자도 너였었고 받는자도 너이니라

오는고통 달게받고 종자다시 심어가꿔

세세생생 자손만대 좋은원인 좋은결과 .


가르치고 전하여서 부귀영화 자손창성

생사해탈 자유자재 전지전능 누려보세

인과모른 그사람은 주고받는 업장으로

윤회고만 증가하니 생사고통 끝이없고 .


염불하는 그사람은 주고받는 인연으로

윤회고가 소멸되니 극락세계 현전하네

짜증내고 원망하면 그게바로 지옥이고

감사하며 참회하면 서방정토 이아닌가?


가정두고 어디가서 허송세월 보내는자

마음두고 어디가서 무얼찾아 헤메는가

마음하나 바로쓰면 세상천지 극락세계

마음하나 돌려쓰면 세상천지 화택이라.


보살심을 내는자는 모든중생 보살이요

중생심을 내는자는 사대성인 악마로다

인과응보 부정하고 윤리도덕 배척하며

조상자손 멀리하는 인간동물 되지말자.


조상부모 불신하고 형제친척 불화한자

두고보자 자손보라 멀리보면 알수있다

사바세계 뿌리치고 어느세계 갈것인가

동업인연 자성으로 숙업습기 소멸하고

사바세계 가꾸어서 지상천국 불국토를

우리함께 이뤄보세 동업인연 지어보세.


업장소멸 발원하며 뼈와살을 깍아내는

굳은신심 정진으로 우리함께 성불하세

수도하고 효도하며 생사넘고 선악넘고

종교넘어 해탈세계 사차원의 마음고향

지상에다 건설하며 자성미타 함께하여

조상부모 모시면서 자손들을 가꿔보세.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동견무량수 개공성불도.

 

명절 대해 알고 삽시다

오늘법문은 부처님 말씀을 위주로 하기보다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추석, 한가위라 부르는 명절에 대해서 말씀드리면서 우리나라의 명절들이 어디에 근거를 두고 생겨났으며 또 어떤 정신세계와 접목되는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추석은, 중추절(中秋節)·가배(嘉俳)·가위·한가위라고도 하는데, 한은 크다는 뜻이고 가위는 가운데라는 의미로 쓰였던 옛말인데 8월 가운데 가장 큰 날이라는 뜻으로, 한해 농사를 끝내고 오곡을 수확하는 시기로 명절 중에서 가장 풍성한 때로, 서양의 추수감사절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유리왕(儒理王) 때 6부(六部)의 여자들을 둘로 편을 나누어 두 왕녀가 여자들을 거느리고 7월 기망부터 매일 뜰에 모여 밤늦도록 베를 짜 8월 보름이 되면 그동안의 길쌈성적을 가려 진편에서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이긴 편에게 대접하는 놀이를 했는이 놀이를 “가배”라 불렀으며 이때 회소곡(會蘇曲)이라는 노래와 춤을 추며 놀았던 것입니다.

고려시대에도 추석명절을 쇠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국가적으로 선대왕에게 추석제(秋夕祭)를 지낸 기록이 있으며, 1518년(중종 13)에는 설·단오와 함께 3대 명절로 정해지기도 했었습니다.


여러분들께서 추석날이나 그 전날에 다들 하시고 온 일 입니다만, 추석날 아침에는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가서 여름비에 무너진 무덤 보수와 벌초를 하고, 제물은 햇곡으로 준비하여 먼저 조상에게 선보이며 1년 농사의 고마움을 조상님께 전하셨을 것입니다.


대체로 명절은 크게 보면 9가지로 설·대보름·한식·초파일·단오·유두(流頭)·백중(百中)·추석·동지 등이 있습니다만, 요즘에는 4대 명절이라 하여 새해가 시작되과 모든 곡식이 익어 추수를 하는 소위 서양의 추수 감사절과 같은 추석, 그리고 양기가 가장 강하다는 단오, 새해에 처음으로 맞이하는 보름이자 달이 꽉 찬다는 정월대보름이 있습니다.

 

은 새해의 첫날로 세배와 성묘를 하고 그해의 운수를 점치기도 했고, 이날 백병(白餠)이라고 하는 떡국으로 만든 세찬(歲饌)과 세주(歲酒)를 먹었다고 하는데,

옛날에는 정초의 즐거움이 초하루에만 즐기고 마는 것이 아니라 정월보름까지 즐겼다고 합니다.


보름은 정월 14일 작은 보름15일의 대보름으로 나뉘는데, 오곡밥과 묵은 나물을 무쳐먹고, 부럼을 깨물어 부스럼이 생기지 않기를 빌고, 귀밝이술이라 하여 청주를 데우지 않고 차게 먹기도 했다고 합니다.


2월 초하루에는 머슴날[奴婢日]이라 하여 일꾼들이 콩으로 소를 넣은 송편을 만들어 먹으며 한해 농사를 준비하고, 한식(寒食)날에는 조상의 묘를 찾아 벌초하고 차례를 지내며 찬밥을 먹었고,


3월 삼짇날에는 찹쌀가루로 반죽해 진달래꽃으로 수놓은 화전(花煎)을 지지며 즐겼었고,


4월의 초파일은 불교가 들어오면서 생겨난 명절로서 빈자일등의 복전을 일구는 연등공양의 풍속이 행해지고, 


5월 5일 단오는 한 해에서 양기(陽氣)가 가장 그득한 날로 수레바퀴 모양의 수리취나물로 수리취떡을 만들어 먹고 창포물에 머리를 감는 등 다양한 행사를 벌렸다고 합니다. 

6월 6일 유두에는 산이나 계곡에서 힘든 농사에서 한숨을 돌리며, 수단·건단·상화떡을 해먹었으며,

7월 15일 백중날에는 불필요한 농기구를 씻어놓고 농사의 힘겨움을 위로했고,


8월 추석가배일(嘉俳日) 또는 가윗날이라 하여 한 해 농사의 수확이 멀지 않은 가장 풍성한 명절로 햇과일과 햇곡식으로 음식을 만들어 조상에게 성묘를 지내고, 


9월 9일 중양(重陽)은 가을걷이가 한창 바쁜 철이기에 중요도가 덜하지만 잎이 누런 국화꽃으로 국화전을 만들어 먹고, 배와 유자, 석류와 잣을 꿀물에 탄 화채(花菜)를 먹기도 했다고 합니다.


10월에 접어들면 한 해 농사의 수확이 모두 마무리 된다하여 시월상달이라 하여 상달고사나 집안 조상들의 시제를 모셨고,


11월 동짓날에는 팥죽을 쑤어 가묘(家廟)에 차례를 지내고 먹었는데 이때, 액막이를 위해 집 문 앞에 팥죽을 뿌리기도 했었습니다만, 요즘은 동지 죽을 먹기도 바쁘지요.


작년 동지 때 말씀드렸듯이 옛날에는 절기의 기점이 동지로부터 출발했는데, 그 이유는 고대 동양력(東洋曆)에서는 역(曆)의 출발점을 낮과 밤, 즉 음과 양의 기운이 바뀌는 기준을동지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후한서의 율력지(律曆志)에는 세수지야(歲首之也)는 말이 있어 세수(歲首), 즉 연초(年初)를 동지로 정하여 후한시대에는 동지가 세수에 해당되었으나 후대로 오면서 한 해의 시작을 정월로 하고 계절의 시작도 봄으로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명절은 농사절기와 깊은 관계가 있어 각 농사주기에 맞게 이루어져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만,


이 명절을 지내는 행사에서 잘 살펴보면, 항상 조상님들을 위하는 효성스러움을 함께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우리는 지금 존재하고 있는 나, 이 나 라는 한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근원을 도외시 해버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해가며 자기 얼굴에 도로 떨어지는 누워서 침뱉어내는 어리석음이 우리의 주변에 널브러져 있다는 것 입니다. 


추석이나 설 명절날 성묘 가서 조상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설엔 새해인사를 드리고 집에서 차례를 모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차례인 것입니다.


예전에는 차(茶)를 써서 다례(茶禮)를 모신다고 또는 다례를 지낸다고 했었습니다.


옛날엔 찻값이 금값보다 비싸서 조상님들께 향기로운 차를 다려내 조상님의 다례 상에 올려 한해 농사의 풍요로움과 무병무탈 함에 감사의 인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헌데 요즘엔, 명절에 조상님께 인사를 드리는 것도 제사요, 돌아가신 날을 효성스럽게 기리는 날도 제사라 불러대고 있습니다.


제사를 지내는 데는 다섯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돌아가신 선영들께 이 몸이 존재하게 된데 대한 효성스런 마음으로 운명하신 날을 기억하고 기리기 위함이 그 첫째요,

그 날을 기해서 서로 살기 위해 사방에 흩어져 살던 피붙이들이 그 날을 기해 서로 모여 그동안의 안부를 묻고 서로 단합을 하고 화합을 하기 위함이 그 두 번째 의미인 것이며,


제사를 지내며 삼헌(三獻)이라 초헌, 아헌, 종헌이라 하여 제주가 첫 잔을 올리며 그 다음 근친자들 순서로 지방이나 신주 앞에 술잔을 세 번 올리는데, 본디 이 또한 예전에는 차를 세 번 올리던 것이 해방이후 술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첫 잔인 초헌(初獻)을 올릴 때, “조상님들과 부모님 함자에 남의 손가락질 받지 않고 그동안 잘 살았습니다.” 하는 보고의 의미가 있는 것이며,

둘째 잔인 아헌(亞獻)을 올릴 때는 “저희 자식들도 그렇게 교육을 시키겠습니다.” 하는 의미인 것이며,


셋째 잔인 종헌(終獻)을 올릴 때엔 “열심히 살아가는 저희를 지켜봐 주소서” 하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제사를 지내는 깊은 의미가 다 채워지는 것입니다.

헌데, 이러한 제사를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아예 지내지 조차 않거나, 생략해버리고 이 잘난 나를 이 세상에 존재케 해주신 조상님들의 신주 앞에 우상이라 하여 감사의 절 조차도 않으니 이 나라의 미풍양속이 앞으로 어찌 변해갈지 싶습니다.


또, 차례는 명절날 아침에 지내지만, 제사 날은 내일이 돌아가신 날이라면 전 날 밤 자시에 상을 차려 제사를 모시게 됩니다.


그 이유는 子時에는 소위 하늘의 문인 天門이 열리는 시간인지라 그 시간에 제사를 지내 하늘의 문이 닫히기 전에 제사를 마치고 지방을 손에 들고 불살라 하늘에 올라가시도록 했던 것이며 제사상에 올리는 음식은 지지고 볶고 기름지고 구수한 냄새가 진동하도록 했던 것은 보이지 않는 영가는 식향(食香)이라 몸이 없으니 당연히 입이 없고 손이 없으니 보이지 않는 냄새로 배를 불리우고, 제사를 지내는 후손들의 마음만을 흠향하는 것이기에 그리 했던 것입니다.


요즘은 휴가철에 제사가 있으면 콘도에 가서 지내버리고 제수도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모든게 해결된다고 하니 여러분들도 이 세상 가신 다음에 어디 관광지를 가셔서 제사상을 받으실런지 그 소식은 지금 잘들 하셔야 할겁니다. 


그런데 부처님 도량에서 기제사를 모시게 되면 앞의 다섯 가지의 의미 외에 세 가지가 더 첨부가 됩니다.


그 하나는 살아생전에 가족들 먹여 살리기 위해 부처님의 불자도 아니 不字로 알았던 무지와 어리석음을 법당에 모셔두고 법사스님들이 부처님의 계법에 의지하여 무상의 법문을 들려주어 일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지혜의 감로법을 설해주심이 그 첫째요.


둘째는 살아생전에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 한잔 떠주는 급수공덕이나, 개울에 뒷사람 편히 오도록 돌덩어리 하나들어 징검다리하나 놓아준 월천공덕 한번 지은 적이 없는 부모조상님들을 위해 부처님께 공덕을 기리고 그날의 음식과 과일들을 주변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게 되니 두 번째 의미요.


세 번째 의미는 끝없는 윤회로부터 건져 올려주거나, 윤회를 벗어나는 씨앗을 인연지어 주심이 세 번째 입니다.

세속에서 지내드리는 제사는 효성스러움과 후손들의 화합이 우선이지만, 부처님 전에서 지내드리는 제사는 이렇게 영가를 윤회로부터 제도해주는 헤아릴 수 없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풍선을 하나 손에 들고 있다 놓아보십시오.

풍선 그 자체는 손에서 놓아버리면 직하라 바로 발밑에 떨어지고 말 것이요,

풍선에 입김을 불어 넣어 주둥이를 묶어 놓으면 바로 떨어지지 않는다 해도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떠다니다가 어디에 쳐 박힐지 모릅니다.


허나, 풍선에 수소를 넣고 주둥이를 묶어 보십시오.

풍선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위로 위로 올라가 버리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이와 같습니다.

살아생전에 무지와 무명으로 자기만을 위한 이기심으로 꽉 막혀 온통 욕심과 어리석음으로 뭉쳐진 사람의 영혼은 마치 바람 없는 풍선과 같아 이 생명이 다 되면 뚝 떨어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살아생전에 적당히 교회도 다니고 절에도 다니며 좋은 일도 쬐끔, 악한 짓도 꽤나 저지른 사람의 영혼은 풍선에 온갖 탁한 기운이 들어가 있는 입김 들어간 풍선일 것이고,


한 세상 살면서 부질없는 과욕을 경계하고 전번에 말씀드린 대로 애초에 괴로움과 번뇌의 씨앗을 만들거나 저지르지 않는 지혜로운 사람은 분자량이 가장 가벼운 수소가 들어간 풍선처럼 위로위로 올라가고 말 것입니다.


천국도 지옥도, 축생계도 모든 육도가 다 중생들의 의업이 에너지가 되어 끼리끼리 모여 있는 안개 같은 업의 구름덩어리들일 뿐입니다.


현실세계의 중생들이 모여들어 큰 집단을 이루는 곳 또한, 동업중생들이 끼리끼리 모여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육도를 벗어난 곳은 오직 여래의 법이 밝히신 극락일 뿐입니다.


점점 바빠지는 미래세에 언제 제사상을 기다리실 것입니까?


그래서 바로 오늘, 자식이 아예 없거나, 있다 해도 천하에 불효를 하거나, 머나먼 외국 땅에서 살거나, 종교가 달라 아예 제사라는 자체도 외면하고 사는 자식을 둔 분들이 자기 살아생전에 자기 갈 길을 자기 스스로 닦아간다 하여 생전예수재(生前豫修齋)라 윤 칠월에 기도를 입제하여 오늘이 회향하는 날입니다.


오늘 이 회향하는 기도에 동참하신 기도 발원제자들께서는 이차 인연공덕으로 “원멸사생육도법계 유정다겁 생래 죄업장 아금참회계수례 원죄제장실소제 세세상행보살도”하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동견무량수 개공성불도”라,


“부디 부디 멸해지기를 원하옵노니, 네 가지의 기운으로 한 생명이 태로 태어나고, 알로 태어나고, 습해서 존재하고 더운 기운으로 생겨나 육도를 돌고 돌아 윤회를 거듭하며 저질러온 다겁생래의 온갖 죄와 업으로 인한 장애들을 참회하고 소멸시키고자 머리를 조아려 예를 다해 참회 하옵고, 알게 모르게 지은 그 모든 죄와 업장들이 봄눈 녹듯이 불에 타버리듯이 없어지기를 원하옵나니 이차인연공덕이 널리 일체 중생들에게도 미치어 나와 더불어 모든 중생들이 현생의 살아생전에 주처정토를 함께 맛보아 세세생생 성불보살의 길을 가도록 원하옵나이다.” 


또, 오늘이 이 산에 우리절이 자리를 튼 개산일입니다만, 오늘은 산에 올라가 지기가 올라오는 좋은 터를 골라 잡아 산신제를 지내야 마땅하나, 그보다 더 중요한 생전예수재 기도를 마치는 회향날인지라, 산신님 전에 마지공양만을 올리고 예수제 회향으로 가름하게 됬습니다.









1960년대 당시엔
부잣집에서도 재산 목록
상위를 차지하던
럭키금성 흑백TV.

가난한 시골에선
한동네에 한대,
아니면 두서너 동네에
한대나 있었던
참 귀한 물건이었다.

당시로서는
요술 상자 같은
그 작은 TV화면에
어찌하여 그 많은 사람들이 나오는지
무척이나 궁금하기도 하고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많았지만,

그보다는
요사이 텔런트라 통칭하는
이쁜 주인공을 보기위해

공부는 지지리도 못하는
TV가 있는 집 아이에게
비굴한 웃음을 흘리며

고놈의 티비에 환장한 친구들은
TV가 있는 집에 들렸다가
일진이 사나울라치면

TV시청은 커녕
안테나를 들고
여기저기로 옮겨 다니며
들었다가 놓았다가
또는 돌렸다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전파에 맞춰
화면을 잡기위해
야! 오른쪽으로 임마
아님 왼쪽으로
또는 위 아래로
잘못하면 그것도 못 맞춘다며
욕을 먹기 일쑤였다.

간신히 잡히는 화질도
화면에 줄이 서너 개
그어지는 것은 예사고

아래위로 오르내리고
또는 찌지직거리며
요새 같으면
아마 성질 급한 친구들은
TV 몇 트럭은 족히 부셨을 것이라 짐작된다.

뉴스를 보며,
연속극 여로를 보며,
분노하기도 했고
슬퍼하기도 했던
우리의 추억들....

저 흑백 TV처럼
세월은 잊혀진 한낮 꿈,

그러나 깨어나지 못하는
몽환처럼
기억은 언제나
어둠 속을 헤매는
허망함은 아닐지....

  

==

 
생명의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