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출가(出家)란?|

2010. 2. 1. 20:3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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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 중생이 아침에 눈을 뜨고 동서남북을 아무리 바쁘게 움직이고 머리를 바쁘게 회전하고 전화통이 불이 난다한들, 이 모든 행위의 근본 목적은 어디에 있을까요?


제가 지금 드리는 말씀은 이렇게 바쁘게 살고계시는 그 자체에 점을 찍는게 아니라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 중생들의 근본의 존재이유와 이리 살아가는 데서도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는 삶의 축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살피건대 세존께서는 지금의 시대와 3천 년 전이라는 시공의 세월을 격하고 계시는데도 그 때의 가르치심을 대하고 있으면 그것은 삼천여년 전의 일 같지 않고 지금의 우리들 주변에 흔히 일어나는 온갖 문제들을 대하고 있는 듯이 느껴집니다.


어떻게 부처님께서는 삼천여년 후에 태어난 우리의 일을 이처럼 잘 알고 계셨을까, 하는 생각도 듭 니다.


오늘날 이 시대가 겪는 환경, 곧 투쟁견고 백법은몰(鬪爭堅固 白法隱沒)의 시대를 환히 보시고ㆍ꾸짖고ㆍ타이르시며 참회 가운데서 살라고 하시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앞으로도 인간들의 이기심으로 인해 이 지구촌이 멸망하지 않는 한, 천년, 이천년 후에 태어날 사람들도 부처님의 가르치심을 대하게 되면 또한 그러할 것이라 여겨집니다.


부처님의 가르치심은 언제나 새롭습니다. 시대가 변하면 시들어 버리는 가르침이 아니라, 언제나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가장 적절(適切)하게 오욕으로 끄달리는 어리석음으로 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가르침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이 남겨진 경전은 절대의 진리(眞理)인 것입니다.


우리가 600부나 되는 반야부 경전 속에서 “다이아몬드 수트라”라 하여 금강경이라 부르는 이유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외도들이 주장하고 선전하는 그 어떤 가르침보다도 참다운 불변의 진리에 다가갈 수 있는 단단하고 흔들림 없이 어떠한 시대에서나 모든 사람들이 다 귀의(歸依)하게 되고 어떠한 시대에서도 새롭고 즐거운 감동을 주는 구세경(救世經)이라는 단순하고 상징적인 일차원적인 의미에서 만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가르치심은 마치 다이아몬드가 다면체로 깍여 어느 각도 어느 면, 어느 위치, 어느 전공에서건 아름답게 반짝거리는 빛을 발하여 온갖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 세계에서 삼독과 오욕으로 인해 일어나는 8만 4천 가지의 번뇌와 고통만이 아니라, 번뇌 즉 보리라 8만 4천 가지의 번뇌마가 있다면 앞이 있으면 뒤가 있듯, 중생들이 빠져서 허우적대며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는 8만 4천 가지의 유한한 즐거움이라는 환희마 또한 존재하는 것인데, 세존께서는 중생들이 이 유한함에 취해서 끝없는 윤회의 길에서 헤어나지 못함을 보시고 원을 세워 공교(空敎)라는 지혜를 말씀으로 남기시여 다양한 모습과 다양한 업에 쌓여있는 중생 중생들을 인도해주시기에 금강경이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육신은 부처님의 세계를 여는 도구입니다.


저는 기도하면서 망상을 할 때가 많습니다.

저 하늘에 날아다니는 온갖 새들이나, 여기저기 어슬렁 거리는 개들이나 축사에 갇혀서 주는 사료만 먹으며 살아가는 소나 돼지나 닭들을 보게 되면 이 몸 받기 전에는 나 또한 저 몸의 주인공도 되었을 것이고, 저것도 생명이고 나도 생명이기는 마찬가지고, 저것도 지 삶에 착심을 가지고 있기에 그 몸 어서 벗고 사람 몸 받거라 하는 마음에 어서 죽으라 하면,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며 차라리 이 몸으로 살테니 건들지 말라는 식으로 지나는 개미에 옆에 손바닥을 내려칠 량이면 동서남북 방향감각이 없이 줄행랑치는 모습을 목격하면 다음 생에 받을 이 몸이 걱정되어 기도 중에 망상관을 하다보면 과거 전생의 모습도 보이고 다음 생에 갈 인연이 친화력을 가지고 자꾸 떠오를 때가 있어 소위 엉덩이에 불침 맞은 듯, 지극 간절하게 기도하게 됩니다.


육도는 윤회라, 육도 중에 으뜸이라는 천상계를 간다한들 언젠가는 인연이 다하면 또다시 윤회에 들 것이니 중생계에서 사람의 몸만이 부처의 세계에 들어가는 도구일지니 다음 생에도 사람의 몸을 받아 더욱 정진 잘하여 윤회없는 세계에 가리라는 혼자 다짐을 하면서 요즘에는 사람 몸 받드라도 좋은 인연지어 세가지 복, 스승 잘 만나는 복과 좋은 도반을 만나는 복과 좋은 공부처소를 만나는 복을 성취하고자 지금 이 순간에도 이렇게 기도하고 법문을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법화경화성유품에 나오는 부처님의 가르치심은 천만년을 가도 변하지 않는 것임을 더욱 더 간절하게 설하신 덕목으로, 석가세존께서는 일체중생구제를 전제로 한 진실교(眞實敎)인, 법화경을 세상에 펴려는 자비심으로 일관하셨슴이 밝혀집니다. 


그러나 듣는 사람의 근기(根機)가 같지 않아서 근기가 낮은 사람에게는 방편의 교(方便敎)를 설해주셨던 것이고, 이러한 방편설은 진실설인 법화경에 들어가는 것을 전제한 예비적(豫備的)인 가르치심이기 때문에,

 

방편교를 배운 것으로 그치고 말면 부처님의 眞實意, 곧 참 마음을 알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방편의 가르침을 통해서 중생의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움을 느끼고 조금이라도 신앙심이 생겼으면, 다시 더 나아가 부처님의 진실의 교, 곧 일불승 법화경까지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자상하게 말씀하시고 계신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참 우스운 점은 부처님은 출가하시기 전에 결혼하시어 라훌라, 장애(障碍)라는 이름의 아들을 두셨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대통지승여래불을 보더라도 한국불교 장자종단이라 자타가 공인하는 조계종에서도 기득권을 가지고 살아가는 계층이 있어 꼭 동진 출가하여야만 부처를 이룰 수 있거나, 부처를 이루는 지름길을 가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화성유품에 보게되면, 당시에 대통지승여래불이라는 부처님이 계셨는데 대통지승여래불 또한 출가하시기 전에 이미 열여섯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맏아들의 이름은 지적(智積)으로 맏아들을 비롯한 모든 아들들은 진기(珍奇)한 보물과 재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지라 평화롭고 즐거운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 아들들은 아버지 대통지승불이 그 모든 화려함을 뒤로 두고 오랜 동안 수행한 결과로 정각을 열고 부처를 이루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때 아들들은 자기들도 수행하여 부처님의 지혜를 열겠다는 결심으로 호화스러운 생활을 버리고 아버지 대통지승불의 처소(處所)를 찾아 출가하게 됩니다.


그 때, 그들의 어머니를 비롯한 유모와 그들을 보살핀 권속들이 모두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들의 출가를 막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당시에도 무엇 때문에 사는가 하는 문제를 고민하고 그 해답을 찾으려는 사람의 출가를 막지 않았다는 것 입니다. 우스갯 소리로 요즘 IMF행자들이 많이 생겼다고들 합니다만,

 

살피건대, 출가라는 것은 다만 세상과 처자식을 버리는 그런 단순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혹자는 인생무상(人生無常), 권력무상을 느끼고 세상이 싫어서 입산했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진정한 출가의 동기, 곧 출가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참 뜻을 알고 싶다, 나는 무엇 때문에 태어났는가, 무엇 때문에 사는가, 무엇 때문에 노력하는가 하는 진정한 의미를 알고 싶어서 출가하는 것입니다.

설사, 첫 출가의 동기가 그렇지 않다해도 불법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각오가 생겨날 수도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발심을 했던 마음들이 나중에는 세속적인 욕구에 다시 물들여지면서 종단의 온갖 시시비비에 매이기에 "초발심이 변정각"이라는 말로 경책시켜 주는 것입니다.


싯달타 태자의 출가동기를 보게 되면 답은 간단합니다.


요즘 자식들은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냐며, 지들 좋아서 만들었다는 내가 나오고 싶어서 나왔냐는 식으로 부모 속 터지게 하는 놈들이 한 둘이겠습니까 만은, 행복하기 위해서 살아간다 해도, 그토록 열심히 살아온 삶에서 어느 날 아침 화장을 하다가? 출근 준비로 세수하고 면도하다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희끗하게 변해진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그때부터 인생을 잘 살아보리라 이제 밥술이라도 먹게 됬으니 내 인생 나도 누려보리라하고 고작 누린다는게 대부분의 중생들은 말초적인 환희마에 빠져 요즘 유명한 바다이야기라는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살아 가는 부류들이 바로 하근기 중생들이 살아가는 삶일 것입니다.

 

개같이 벌어 정승처럼 쓴다는 옛말이 있습니다만, 쓰는 법도 배워야 정승처럼 쓰게 되는 것입니다.


개 같이 버는 데만 집착하면서 쓰는 법을 못 배우게 되면 벌어서 써도 개같이 쓰게 되는 것입니다.


부언하면 올바른 출가란 수행을 쌓아 인생의 참뜻을 알려는 목적으로 출가를 하거나 공부과정에서 그런 발심을 일으켜야하는 것입니다.


출가에는 네가지의 종류가 있습니다.

 

신심출가와 신출심불출가가 있으며, 심출신불출가와 신심불출가라는 네 종류의 출가가 있습니다.


흔히 세상이 싫어져서 세상을 버리기 위해 출가한다는 것은 자기 멋대로의 행동, 곧 자기 증오(憎惡)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라고 하는 한 사람이 존재하기까지는 삼세 간에 걸쳐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폐를 끼치며 모든 사람의 덕택으로 존재한 것입니다.


하물며 염세(厭世), 곧 세상이 싫다고 해서 세상을 버리고 제멋대로 산중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자기 증오(自己憎惡)의 표현일 뿐, 그것은 진정한 출가가 아닙니다.

이런 연유로 절집에 들어온 사람은 얼마 견디지 못하고 또 다시 환속하고 마는 것입니다.

  

불교의 진정한 정신은 은애(恩愛)입니다.

남의 은혜와 덕(德), 곧 사랑을 받고 살다가 자기가 싫다고 해서 세상을 버린다는 것은 은애를 무시한 처사이며 세상에 대해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父母) 처자(妻子)를 버리고 출가하여 생노병사학(生老病死學)을 공부한 인연과보로 생사관(生死觀)이 확고해지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 모든 사람에게 그 깨달은 생사학(生死學)을 가르쳐서 그들을 구원해주리라 하는 생각으로 출가를 해야하고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 한 사람을 위해 출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 출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청신사도인경(淸信士度人經)에 이르시기를 중생은 삼계 가운데를 유전하여 은혜를 끊지 못한다.

은혜를 버리고 무위(無爲)로 들어가는 것은 진실하게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흔히 세상 사람들은 은애(恩愛)가 있는 부모나 처자를 버리고 입산하여 수행생활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은혜를 모르는 자ㆍ은혜를 배반하는 자 라고 생각할런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출가 수행하여 제대로 공부하는 것이 진실로 은혜에 보답하는 길인 것입니다.


양가득죄라, 출가하여 제대로 공부를 못하게 되면 부처님 집안에도 시주 밥을 공짜로 축내기에 죄를 짓는 것이며 출가하여 부모님에게 사람 효도를 못하였기에 양쪽 집안에 죄를 짓는다 하여 양가득죄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받은 은혜를 갚겠다는 생각으로 출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식된 도리로서 부모의 은혜를 갚는데는 부모님 살아생전 금생에 비단금침에 호의호식은 못시켜 드렸다 해도 부모님 주인공이 이 한 생을 마감하여 어느 몸을 받을 것인가를 헤아려 윤회로부터 벗어나도록 해드리는 것은 영원한 효도인 것입니다.

 

부모로서 자식에게, 남편으로서 아내에게 유한한 윤회를 벗어나 존재의 진정한 뜻을 가르쳐 주는 것이 가장 자비(慈悲)로운 부모이며 남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교가 인간의 정이라든가, 은애라든가, 하는 것을 별개(別個)의 것으로 여긴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치도 않습니다.


대방광부사의경계경에서,은혜를 아는 자는 생사(生死)에 있다 하더라도 선근을 무너뜨리지 아니하고 은혜를 모르는 자는 선근(善根)을 끊어 없애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부언하면 우리가 불교를 배우는 것은, 과거 수많은 생을 거치는 동안 자기가 받은 모든 사람의 은혜를 갚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 도락(道樂)으로 하는 것이 아니요, 내가 박식(博識)하게 되어 남에게 자랑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체중생구제론 분상에서 우선 가까운 오음세간 중생, 곧 부모ㆍ처자ㆍ일가친척과 친구들에게 가르쳐 주고, 되도록 이면 그 밖의 다른 많은 사람들, 곧 삼세간의 사람들도 알게 하기 위해 열심히 불교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출가인 것이고 이리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불자의 길인 것입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이미 마음이 출가를 하신 분들이기에 처음 그 마음이 변치 않고 그대로 정진하신다면 반드시 정각을 이루어 저와 더불어 대통지승여래불 처럼되시리라 여깁니다.

이것이 바로 同成佛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발심했던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곧 바로 정각을 이룬다는 뜻으로 초발심시 변정각이라 하는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오.

범부와 성인의 차이천지자연의 이치는 이리도 걸림이 없건만, 만물의 영장이라고 큰소리치며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해내지 못할 일 없는 것처럼 해대는 인간중생의 삶들의 내면을 보면 “왜~ 사~냐~?” 하는 생각이 드는 인간 군생들이 주변에 너무나 많다할 것입니다.  


엊그제 아침, 밤사이 일어난 소식이라는 뉴스에 보니 참으로 기가 막힌 뉴스가 있어 법문의 소재로 삼아야 할 것 같아 기억해 두었다가 오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뉴스를 들으면서 인간의 어리석음과 무지와 과욕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떠올리게 하면서 저것도 인과요 업보인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어느 날, 제자들과 함께 산길을 지나던 중에 고갯마루를 올라서자 언덕 아래 망고나무 가지에 있던 까마귀가 인기척에 놀라 푸드득 하며 날아올랐고 까마귀가 날아오르는 순간 나뭇가지에 달렸던 탐스런 망고열매가 오비이락이라 툭, 떨어지면서 하필이면 그 밑을 지나던 뱀의 머리에 떨어지며 뱀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맙니다.


그때 그 광경을 지켜보던 제자들 중에 아난존자가 세존께 여쭙기를 “세존이시여, 묻습니다. 방금 저희 눈앞에서 일어난 저 까마귀와 뱀의 현상도 우연의 일치입니까? 아니면 저것도 인과입니까?”하고 묻게 됩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저것도 인과이니라, 하자, 모두들 어리둥절해서 어째서 저것이 인과에 들어갑니까? 저것이야 말로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까? 하고 반문하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저 까마귀와 지나던 뱀은 바로 전생에 산비둘기의 몸으로 산비탈에 집을 짓고 새끼를 낳아 기르고 있던 중에 마침 비탈 위를 지나던 뱀의 전생인 멧돼지가 발을 헛디딤으로 작은 바윗돌이 굴러 내려와 산비둘기의 집을 덮쳐 산비둘기의 새끼들을 다 깔려 죽였느니라, 비록 멧돼지가 살심을 일으킨 일이 아니었건만, 이로 인해 서로 원한이 생긴 둘은 축생의 업을 벗어나지 못해 눈앞에서 새끼들을 잃어버린 산비둘기가 금생에 까마귀의 몸이 되어 있었고, 멧돼지는 뱀의 몸이 되어 길을 지나던 중에 인과의 연이 다되어 까마귀의 날아오름으로 떨어진 망고열매가 전생의 멧돼지인 뱀의 머리를 덮쳐 죽이게 되었느니라.

이와 같이 인과는 인연이 다하면 무르익어 받게 되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몇 천생의 원을 세워 한 지붕 밑에서 살기로 부부의 인연을 맺어놓고서 평생을 원수로 싸우며 살아가고, 평생을 애를 먹이고 가정폭력을 휘두르며 뉴스의 주인공들이 되어 살아가는 삶들은 왜 이리 됬을까요.

그것은 과거생에 상대방에게 지었던 원결과 악연을 풀어버리지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제가 아침에 듣게 된 뉴스는 이렇습니다.

둘째 딸이 대학을 다니면서 사귀게 된 남자와 결혼한다고 하자 그 어머니는 남자가 탐탁치를 않아 극구 말리며 결혼할려면 너 죽고 나죽자고 까지 하며 말렸건만, 그 딸은 도망을 가면서 까지 죽으려면 엄마 혼자 죽지 왜 나까지 죽냐며 난 죽어도 결혼하겠다고 고집을 부려 결국은 결혼을 시켜 한 지붕 밑에서 살게 되었건만, 결혼하면서부터 이날 이때까지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은 한 푼도 없이 아내가 장사를 하여 가정을 꾸려갔고 그 남편은 도박에 빠져 헤어나지를 못하면서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용돈만 받으면 도박장으로 달려가기를 반복하여 하룻밤 새에 3억 5천만 원까지도 도박으로 날리며 이 사건이 일어나는 직전까지 그렇게 살다 그 날도 용돈을 주지 않는다고 아내가 운영하는 찜질방에 찾아와 아내와 다투다 고의로 불을 질렀고 그 와중에 함께 있던 처형은 온 몸에 3도 화상을 입고 폐인이 다 되었고, 아내는 결국은 온 몸에 화상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이것을 어떤 인연과 과보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러니 지금 부터라도 이 법문을 듣는 순간에 서로가 8천 생의 인연을 지어 한 지붕 밑에서 한 솥밥을 먹게 된 소중한 인연들을 다시한번 바라보며 다음 생을 위해서라도 서로 잘들 하시기 바랍니다.


이 뉴스를 들으며 저는 엉뚱하게도 이솝의 우화에 나오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른 어리석은 농부의 우화가 떠올랐습니다.


이 날 이때까지 자기를 남편으로 알고 이혼을 몇 번을 결심했다가도 아이들을 위해 살아온 아내, 매 맞으면서도 자기를 위해 살아주고 용돈을 주던 아내에게 더 많은 용돈을 요구하다 결국에는 불을 질러 아내를 죽게 한 이 어리석은 사람이 매일 황금알을 낳아주던 거위의 배를 가르면 더 많은 황금알이 나올 거라는 어리석음으로 거위의 배를 갈랐다던 우화가 떠올랐습니다.


바로 절제 할 줄 모르고 범사에 감사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의 교만과 과욕이라는 어리석음이 빗어내는 일들이 주변을 둘러보면 너무나도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남들 세끼 밥 먹을 때 두 끼만 먹게 된다면 못 먹게 되는 한 끼니 식사에 대한 생각을 바꾸시면 됩니다.


“아이쿠, 이렇게 해서 다이어트를 하게 되네, 라든가 아니면 덕분에 이 시간에 못해낸 일들을 하게 되네” 하는 식으로 내면에서 일어나는 불만족을 긍정적인 한 생각으로 돌릴 수만 있다면 우리는 마음부자가 되기 시작할 것이고 항상 현실에 자족하며 살아가는 지혜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참을 인자(忍字) 셋이면 못해낼 일이 없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틀린 말입니다.


참다 참다 못 참으면 못 저지를 일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참는게 능사가 아닙니다.

 

참고 참다 보면 결국에는 만병의 근원인 스트레스를 일으키게 되고 병원에서도 못 고치는 불치병으로 가슴에 홧병만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참으려 들지 마시고 생각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이보다 못했을 때를 생각한다면 지금 조금 부족함도 감사하는 겸손함이 묻어나올 것이건만, 나와 이웃집을 비교하고 내 남편과 드라마에 나오는 남자들이나 이웃집과 비교하면서 스스로 번뇌를 찾아 들어가는 바보짓으로부터 우리는 벗어나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이 지혜롭게 제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참다운 부처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바보 천치가 아닌 한에는 범부와 성인의 차이는 없습니다. 그 차이가 있다면 다름이 아닙니다.


범부도 성인도 서로가 분별을 할 줄 알기에 좋고 나쁘고 예쁘고 밉고, 길고 짧고, 밉고 곱고, 아름답고 추함은 다 압니다.


허나, 범부는 좋기 때문에, 예쁘기 때문에 내 가까이 두어야 하고 내가 가져야하고 너는 내 것이기 때문에 소유해야하고 뜻대로 되면 즐겁고 기쁘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번뇌를 싹 띄우고 괴로움이 익어가게 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똑같은 분별로 곱고 미운 것은 알되 그로 인해 일어나는 욕구에 끄달리지 않음으로 번뇌는 싹을 띄우지 않게 되고 번뇌가 없으므로 부질없는 괴로움 또한 생기지 않음과 같습니다.


헌데, 문제는 자기는 그리 살고 싶다 해도 가족이라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토끼 같은 자식들과 여우같은 마누라가 있는 현실에서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의 삶이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쳤을 때, 우리는 결국에는 번뇌에 사로잡히고 괴로움에 떨어져 헤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순간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바로 종교요, 종교 중에도 편리한 인간본위적인 서양종교의 “오직 믿으면 천당, 불신지옥”이라는 흑백논리로 믿음이 지나치면 눈먼 맹신(盲信)에서 더 지나치면 미치는 광신(狂信)에 빠지게 되고 소망이 지나치면 기복이 되며 사랑이 지나치면 집단이기주의에 빠져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정화시키지 않고 오직 신에 의지해 구원만을 찾는 편리한 타력종교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허나, 부처님께서는 천지자연의 이치와 같은 인과법을 설하시고 마치 원자의 분열과 결합과 같은 인연법을 설하시여 중생들이 모든 인과의 원인과 결과를 깨달아 스스로 일어서는 고차원적인 자력수행의 구원관을 우리에게 전해 주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범부와 성인의 출발은 같아도 과정과 결과는 천층만층으로 달라지는 정신세계인 것입니다.


똑 같은 금덩이 건만, 어떤 인연을 만나게 되느냐에 따라, 귀고리도 되고 반지도 되고, 목걸이도 되고, 발찌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름 날 바닷가를 가서 야! 저 파도 봐라 하고 소리를 치지만, 파도의 본질은 물인 것이고 안개도, 얼음도, 내리는 비도 모두가 본질은 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 죽인 칼을 무섭다하고 부정하게 쓰인 돈을 더럽다고 하지만 본디 칼과 돈이 더러운 것이 아닙니다.


칼을 잘 쓰면 부엌에서 가족의 건강을 지키는 요리 칼이 되는 것이요, 잘 못 쓰게 되면 강도짓을 하는 도구로 쓰이게 되는 것입니다.


돈 또한 잘 쓰면 불우이웃도 돕고 불사도 하고 교회에 헌금도 하고 나보다 못한 남을 위하는데 쓰일 수 도 있건만,

잘못 쓰게 되면 주색잡기와 저 바다이야기라는 도박의 밑전으로 쓰게 되어 패가망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돈과 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것을 쓰는 사람의 마음씀씀이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를 용심(用心)이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범부와 지혜로운 이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이 도리를 알아 지혜롭게 사실 것입니까?


아니면 현실 속에 인간 평생 팔십도 다 못 살다 가고야 마는 한생에서 오욕칠정이라는 어두운 미망의 유혹에서 허우적거리시다 다음 생에는 스스로 뿌린 금생의 모든 인연의 에너지에 의해 또 다른 모습의 다음 생에 받을 인과와 업에 매어 돌고 도는 삶을 택하실 것입니까?


지구촌에서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죽어가는 저승세계로의 여행은 공짜로 시켜준다고 해도 선뜻 나서서 갈사람은 없을 것이고, 태어나서 안 가본데 없다는 사람들도 돈한 푼 안들이고 갈 수 있는 자기 안으로의 여행을 가는 사람은 드물드라 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법문을 평생의 화두로 삼으시어 “자작자수”라 스스로 짓고 스스로 받는 너무나 단순한 이치를 절절하게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순간순간 자기를 들여다보며 자기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부질없는 욕구를 알아차리며 절제하기 보다는 한 생각을 바꾸며 살아가는 사람은 쌀을 쪄서 밥을 짓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주변의 환경과 충동에 따라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욕구의 노예가 되어 내키는 대로 절제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마치, 모래를 쪄서 밥을 짓겠다고 하는 사람과 하등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산골짝에 흐르는 물을 소가 마시면 우유를 만들어 내지만,

뱀이 그 물을 마시게 되면 독을 만들어내게 되듯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 마음을 어찌 쓰느냐에 따라 부처님 가운데 토막으로 보일 수도 있고, 이 사회에서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이 되든지, 있어서는 안 될 사람도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의지에 달린 일일 뿐입니다.


날아다니는 날짐승들이나, 기어 다니는 길짐승들도 생명이 있기는 나와 매 한가지이되 다만, 과거 전생의 업에 의해 금생에 걸친 옷이 털옷일 뿐인 것입니다.

금생에 사람 몸 받은 지금이 얼마나 귀한 삶인지를 가만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오.

마음 밭에 농사는 어떤지요

오늘의 법문 주제는 억겁의 시간을 두고 사람중생으로 태어 나게 되면 누구나 갖게 되는 영특한 분별지를 뿌리한 마음 밭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출가하여 산문에 들어서면 맨 처음 배우는 것이 초발심수행에서 사미의 길에 들어서면 치문(淄門)이라 하여 물들일 淄字를 써서 소위 “절집의 물을 들인다”라고 우스운 소리로 합니다만, 여기에 “八溢聖 解脫門”이라 하여 성인의 길에 들어 해탈 할 수 있는 여덟가지의 방편(예불, 념불, 지계, 간경, 좌선, 참선, 득오, 설법.)을 통해 성스러운 해탈의 길에 들어서는 방편에 대해 남겨놓은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여기엔 우리 신행의 일상이 담겨있다 할 것입니다.

禮佛者는 敬佛之德也요, 念佛者는 感佛之恩也며, 持戒者는 行佛之行也요, 看經者는 明佛之理요, 坐禪者는 達佛之境也며, 參禪者는 合佛之 心也요, 得悟者는 證佛之道也며, 設法者는 滿佛之願也니, 實際理地에는 佛受一塵이나 佛事門中에는 佛捨一法이니라, 然이나, 次 八事는 猶如四方四隅하니 闕一不可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부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부처님의 덕을 공경하는 것이요, 부처님을 념하는 것은 부처님의 은혜를 감사히 여기는 것이며 계를 지니고 지키는 것은 부처님의 행을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며, 경을 보는 것은 부처님의 이치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며, 앉아서 선정을 닦는 것은 부처님의 경지에 달하고자 하는 것이며, 선을 참구하는 것은 부처님의 마음에 계합하고자 하는 것이고,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부처님의 도를 증득하고자 하는 것이며 법을 설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49년 동안의 원을 원만하게 해드리는 것이니, 실제이지인 진여무상한 자성의 자리에서는 한 티끌의 도 아님은 받아들이고 용납될 수 없으나 일을 처리하는 불사문중에서는 한 법도 버리지 않음이니, 이 여덟가지의 일은 마치 네 방향과 네 귀퉁이와 같아서 하나라도 소흘하면 불가한 것이니 이전의 성인들도 그렇고 후세의 성인들에게도 이 도는 같은 것이다.


또한, 육바라밀을 함께 수행하여 행할 것이니 육조 혜능이 이르되, 공에 집착한 사람은 한 구석에 머물러 있어서 불법의 진수는 불립문자라고만 주장하니 스스로 迷함을 오히려 즐기거니와 불경을 비방하는 것 또한 죄장이 깊고 무거우리니 어찌 경계치 않겠는가? 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이 시간에 여기 모여 부처님의 덕을 공경하고 예경하며 위의 여덟가지를 우리는 동시에 하고 있음이니 이 얼마나 기막힌 시간이겠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열심히 수행을 하고 예경을 한다해도, 또 했다한들, 달을 가르키면 달을 봐야지 손가락에 머물면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남들 다 놀러가고 피서 다닐 때 생활 속에서 수행하는 근본의 이유는 다른게 아닙니다.


노 보살님들이나 노거사님들 모두가 죽는 순간까지 큰 병없이 갈 때 잠자듯이 가는 것이 소원일 것이고, 가족 모두가 큰 병 큰 탈 없이 생활하기를 원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리 살다 죽으면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를 한번쯤 생각해 봐야합니다.

영원히 윤회가 없다는 극락을 가는 것? 이것도 아닌 것입니다.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이 남기신 말씀을 외면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잠자듯이, 큰 병 없이 가고자 한다면, 극락으로 직행을 하려면 자격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곤지암에서 동서울 터미널만 갈려해도 차표 없이는 못 간단 말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이 여덟가지를 수행하는 것은 바로 가수 송대관씨의 노래처럼 차표한장을 손에 쥐어야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럼 이 차표는 돈으로 해결되는가? 아닙니다.

그 동안 여러분들과 만나서 법회를 보면서 말씀드렸던 바이나, 중생은 발등에 불 떨어져 화급하면 한마디라도 주옥으로 금과옥조로 받아들이지만, 지 뱃속 편하면 잠꼬대나 잔소리로만 듣게 되어있습니다.


지금부터 모두 부자가 될 수 있고, 모두가 극락가는 방법을 말씀드릴 터이니 여러분들은 맞뚫린 한쪽 귓구멍을 막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먼저 법정스님의 “텅빈충만”이라는 책에서 나온 구절을 들려드리겠습니다.


“화가 풀리면 인생도 풀린다. 화는 모든 불행의 근원이다.

화를 안고 사는 것은 독을 안고 사는 것과 같다.

화는 타인과의 관계를 고통스럽게 하며 인생의 많은 문을 닫게 한다.


화를 다스릴때 우리는 미움, 시기 절망과 같은 감정에서 자유로워진다. 

타인과의 사이에 얽혀있는 모든 매듭을 풀고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은 밭이다. 그 안에는 기쁨과 사랑, 즐거움과 희망과 긍정의 씨앗이 있는가 하면, 미움, 절망, 좌절, 시기, 두려움과 같은 부정의 씨앗도 있다.


어떤 씨앗에 물을 주어 꽃을 피울지는 자신의 의지에 달렸다. 


이 세상에 허물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정도의 차이지. 큰 눈으로 보면 모두가 거기서 거기일 것이다. 

가해자 건 피해자 건 돌려세워 놓은 뒷모습은 모두가 똑같은 인간의 모습이고, 저마다 인간적인 우수가 깃들어 있다. 

문제는 자신이 저지른 허물을 얼마만큼 바로 인식하고 진정한 뉘우침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인간의 자질이 가늠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권력도 금력도 명예도 체력도 사랑도 증오도 모두가 한때일 뿐이다.

우리가 어떤 직위에 일에 나아가고 물러남도 그런 줄 알고 진퇴를 한다면 분수 밖의 일에 목말라 하며 연연하지 않을 것이다.


숲은 나목(裸木)이 늘어가고 있다.

응달에는 빈 가지만 앙상하고, 양지쪽과 물기가 있는 골짜기에는 아직도 매달린 잎들이 남아 있다.


때가 지나도 떨어질 줄 모르고 매달려 있는 잎들이 보기가 민망스럽다.

그 때가 되면 미련 없이 산뜻하게 질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빈자리에 새 봄이 움이 틀 것이다.


꽃은 필 때도 아름다워야 하지만, 질 때도 또한 아름다워야 한다. 왜냐하면 지는 꽃도 또한 꽃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생의 종말로 생각 한다면 막막하다.

그러나 죽음을 새로운 생의 시작으로도 볼 줄 안다면 생명의 질서인 죽음 앞에 보다 담담해질 것이다.


다 된 생에 연연한 죽음은 추하게 보여 한 생애의 여운이 남지 않는다.


날이 밝으면 말끔히 쓸어내어 찬 그늘이 내리는 빈 뜰을 바라보고 싶다.”

- 법정 스님의<텅빈 충만>中에서 -


어생일각(魚生一角)이라, 육조스님의 적손이신 마조스님은 남악회상에서 좌선만 하면서 좌복을 일곱 개나 뚫었습니다. 

坐에 집착되어 마치 죽은 사람 같고 또한 목석으로 만든 등상(等像)같았다고 합니다.

그때 회양(懷讓)선사께서 조금도 진전이 없는 것을 보시고 묻기를,"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묻자 마조스님이"좌선합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회양선사께서"좌선을 해서 무엇을 하려는가"라고 묻자, 마조스님은"부처가 되려고 좌선합니다"고 했습니다.


그 날 이후, 회양선사께서 마조가 좌선하고 있는 댓돌아래서 벽돌을 갈기 시작했습니다.

벽돌 가는 소리를 듣다 못한 마조스님이 "스님, 벽돌을 갈아서 무엇 하렵니까"라고 그 까닭을 묻자 회향선사는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마조스님은 아무리 생각하여 보아도 벽돌을 갈아서는 도저히 거울이 될 것 같지 않아 "벽돌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자 회양선사는"벽돌을 갈아 거울이 안되면 앉아만 있는다고 부처가 될 줄 아는가"라고 했습니다. 

마조스님이 다시"어떻게 해야 옳겠습니까"라고 묻자 회향선사는 "우차가 가지 않을 때에 소를 때려야 되겠는가, 수레를 때려야 되겠는가"라고 했습니다. 이 말에 마조스님은 크게 깨달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언하대오(言下大悟)"인 것입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이 시간에 여기에 계시면서 여덟가지를 한꺼번에 해치우고 계십니다만,


이리하는 동기는 어디에 있고 이렇게 하는 신심은 어디에 자리를 잡아야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이 시간에  수레를 때리시나요, 소를 때리고 계시나요.

금강경에 수보리가 묻는 대목에 대해 자주 말씀드렸습니다만, 수보리가 부처님께 묻기를 세존이시여, 스승님의 말씀을 들으면 그 순간에는 아! 나도 저렇게 해야지 하는데도 막상 경계에 떨어지면 그렇게 되질 않으니 어떻게 해야, 어디에 그 마음을 두어야 그 마음이 변치 않겠으며 순간순간 일어나는 온갖 마군의 경계에 끄달리는 분별심을 항복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는 대목이 나오지 않습니까?


여러분, 달을 가르키면 달을 봐야합니다. 결코 손가락을 보거나 손가락에 매이지 말고 일상의 내 마음을 순간순간 들여다 보면서 여덟가지의 수행의 뿌리를 몸에 익혀 수레를 때리는 어리석음보다는 마음 소를 때리는 농사에 익숙해지시기 바랍니다. 

 

종교의 본래 목적이 무엇입니까?

극락가기위해? 죽어서 천당가기 위해서?

모두들 손에 암표가 아닌 진짜 표를 손에 쥐시기를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오.

 

♣ 우리는 길 떠나는 인생 ♣


언제 떠나는지 서로 몰라도 가다보면
서로 만나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애절한 사연 서로 나누다 갈랫길 돌아서면,
어차피 헤어질 사람들...

더 사랑해 줄걸 후회 할 것인데
왜 그리 못난 자존심으로 용서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비판하고 미워했는지...

사랑하며 살아도 너무 짧은 시간
베풀어 주고 또 줘도 남는 것들인데
웬 욕심으로 무거운 짐만 지고 가는
고달픈 나그네 신세인가 ...

그 날이 오면 다 벗고 갈텐데,무거운 물질의 옷도,
화려한 명예의 옷도, 자랑스런 고운 모습도...

더 그리워하면 더 만나고 싶고, 더 주고 싶고,
보고 또 보고 따뜻이 위로하며 살아야 하는데...

왜 그리 마음에 문만 닫아걸고 더 사랑하지 않았는지,
아니 더 베풀지 못했는지..
천년을 살면 그리할까? 만년을 살면 그러리요.

사랑한 만 큼 사랑 받고 도와준 만큼 도움 받는데
심지도 않고 거두려고만 몸부림쳤던 부끄러운 나날들...

우리가 서로 아끼고 사랑해도 허망한 세월인 것을
어차피 저 인생의 언덕만 넘으면 헤어질 것을
미워하고 싸워 봐야
상처난 흔적만 훈장처럼 달고 갈텐데...

이제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하고
이제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사랑해야지.
우리는 다 길 떠날 나그네들 이라네..

  
Giovanni Marradi - I Love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