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과 천도제의 차이 2

2010. 1. 29. 22:1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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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행이 무상이니 시생멸법이요, 생멸이 멸이하니 적멸위락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합장을 풀으시고,


이 세상에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사생으로 태어나 존재하게 되나 영원한 현상과 존재란 언젠가는 멸해져 사라지게 되는 존재와 현상이니 이를 무상이라하고, 무아라 하는 것입니다.

(제행무상 : 모든 현상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변화한다는 뜻이고,)

(제법무아 : 모든 현상적 존재들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므로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

 

이렇게 존재와 현상이 생멸을 하는 것을 생멸의 법이라하는 것이니, 여기에 무상의 도리를 알고 사는 사람과 모르고 사는 사람의 차이는 불법을 알고 살아가는 것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의 차이와 같으며, 이 차이는 마치 가고자 하는 길을 알고 찾아가는 사람과 생판 모르는 길을 찾아가는 사람과의 차이라 할 것입니다.


방금 말한 49일 동안의 중음이라는 것은 중유라고도 하는데 사람이든 축생이든 4생이라 (어미의 몸안에서 사지가 갖추어져서 태어나는 사람이나 소,말, 개의 축생들)(알로 태어나는 것들)(모기,귀뚜라미,쥐며느리,나비)(자체가 없이 의탁하지도 않고 홀로 홀연히 생겨나는 천상, 지옥에 태어나는 것들)로 태어나는 중생들이 생명 있는 몸을 받아, 살다, 죽는 윤회생을 1기로 하여 이를 사유(四有)라 하여 네 가지 현상으로 분류해 놓은 것을 말하는데 잘 들어보십시오.

우리가 여기에 존재하고 있으니 첫째, 이를 생유(生有)라 하여 금생에 입태하여 탁태하는 동안 어머니 뱃속의 맨 처음의 몸을 말하는 것이고, 둘째, 본유(本有)는 출태하여 죽을 때까지의 지금의 이 몸을 말하는 것이며, 째, 사유(死有)는 금생의 맨 나중 몸이니 목숨이 끊어지는 1 찰나에서 한 줌 재가 되든  땅 속에 들어가던 그 때까지의 몸을 말하는 것이고, 넷째의 중유(中有)는 전생과 금생, 또는 금생과 내생의 중간에 있는 몸 아닌 몸, 소위 중음신을 말하는 것으로 다음 생을 받아 날 때까지의 칠칠일 까지를 중음이라하는 것입니다.


허나, 사람이 살면서 지극한 선을 행했거나, 극한 악을 범했을 때는 그 사람은 죽자마자 중음이 생략되어버리고 곧 바로 다음 생을 받게 되지만, 보통으로 살아간 사람은 이 중음으로 있는 동안에 생전의 생각과 말과 행위의 인연과보로 다음 생의 과보가 결정지어져 새로운 몸을 받는다고 합니다. 

바로 오늘이 故 정운영 지월광 보살님에게는 그렇게도 중요한 날인 것입니다.

어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에게 사형이 집행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수니파인지라 반대파인 시아파들을 무자비하게 죽였던 마지막 가는 후세인은 손에 이슬람의 경전인 코란을 손에 들고 사형장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인간은 이렇게 나약한 것입니다.

가보지도 못한 저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이승에 사랑하는 가족들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아쉬움과 서운함의 애착과 집착들이 죽음이라는 과정을 대하면서 말로 다할 수 없는 두려움의 분별지들로 인해 우리는 신을 만들었고 신에 나약한 자신을 의지하여 편안함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신이 아니십니다. 진리를 가르쳐주신 분입니다.


바로 전에 제가 해드렸던 게송은 부처님께서 과거생에 선혜라는 이름의 수행자로 사실 때의 일입니다.


선혜수행자는 홀로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수하암상에 깨달음을 참구하던 중, 어느 여름날 밤 갑자기 숲속에서 청아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위 게송이 들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제행이 무상이니 시 생멸법이요, 생멸이 멸위하면 적멸위락이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영원한 것이 하나도 없음이니 이를 일러 생멸의 법이라 하나니 나고 죽는 것들에 대한 애착과 집착이 없어지면 곧바로 적멸의 즐거움이로다. 하는 게송이었습니다.

헌데, 선혜 수행자는 앞의 두 구절의 가락은 알아들었으나 뒤의 구절들이 잘 들리지 않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가 들려온 곳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습니다.

한 밤중에 우거진 숲을 헤치고 소리가 난 곳을 찾아가다보니, 고목나무 가지 위에서 소리가 난 것을 확인하고 소리쳐 묻기를 “방금 그 노래는 그대가 낸 것입니까?” 하고 묻자 그 그림자는 그렇다고 말하자 선혜수행자는 나는 그 노래를 듣고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나머지 구절도 들려줄 수 없느냐고 부탁을 합니다. 


그러자, 그 그림자는 모습을 드러내는데 흉측하기 이를데 없는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악귀인 나찰로 말하기를 “내가 너에게 그 노래를 들려주면 너는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느냐, 공짜로는 안 된다”고 하자 선혜수행자가 말하기를 당신이 원하는 것은 다 들어드리겠다고 하자, 나찰은 “좋다, 나는 사람을 잡아먹는 귀신으로 사람의 고기와 피를 좋아하니 너에게 노래를 들려주고 나서 너를 잡아먹어도 되겠느냐” 하자, 선혜수행자는 생각하기를 “내가 진리를 깨닫기 위해 무엇인들 못하리오, 무명의 중생으로 이 목숨을 연명해 가느니 차라리 지금 이 자리에서 목숨을 버리더라도 진리를 깨달고 죽음이 더욱 값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자 흔쾌히 승낙하고 나찰이 들려주는 나머지 게송을 듣고는 곧바로 환희작약하며 나찰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높은 나무를 기어 올라가 나찰에게 말하기를 “내가 이 밑으로 떨어지면 나의 몸을 먹이로 삼으십시오.” 하고는 몸을 내던져버립니다.

그때 나찰의 몸으로 있던 그 나찰은 선혜동자가 높은 데서 떨어지는 순간에 제석천의 모습으로 변하면서 선혜수행자의 몸을 가볍게 받아 공손히 내려놓고 말하기를 “나는 천상의 제석천으로 그대의 수행의 깊이를 시험해보기 위하여 이리한 것이다”라고 하며 선혜수행자에게 예배하고 물러갔다고 합니다.


여기에 계신 모든 분들과 오늘의 주인공이신 지월광 영가와 법회 동참제자들의 모든 선망조상의 제청영가들 또한 이제 이 도리를 낱낱이 새겨들으시어 이생에 대한 일체의 애착과 집착과 서운함과 아쉬움과 일말의 티끌일지라도 착심을 내던지고 인로왕보살님의 인도로 극락세계에 화생하시어 윤회로부터 영원히 연을 끊고 대 자유 해탈의 세계를 맛보시기를 삼가 법사는 일러드립니다.


“생종하처래에 사향하처거라, 생야일편부운기며 사야일편부운멸이라 -  “나무아미타불”--

부운자체 본무실이니 생사거래 역여연이라 독유일물 상독로이니 담연불수 어생사라, - “나무아미타불”


맹구우목이라, 불법 만나기가 힘들다는 말을 절에 와서 많이 듣습니다.

지구는 태양계에 있고 태양계는 은하계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은하계 끝을 빛의 속도로 가면 약, 천억 광년을 가야한다고 합니다.

눈 깜짝하면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을 가는 빛의 속도로도 엄청난 세월을 가야 은하계 끝을 갑니다.

그러니 우주세계에서 보면 지구는 먼지 티끌만한 작은 것입니다. 

심지어 미국의 물리학자인 스티븐호킹은 우리가 아는 은하계 말고도 또 다른 은하계들이 존재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시간적으로 지구는 45억 년쯤 되었다고 하는데, 우주의 시간은 부처님 말씀에 따르면 무량수입니다.

무시무종이라 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에서 우주적 개념에서 곤지암 상림리 우리절을 떠올리신다면 아마, 태평양에서 바늘침하나 딱 떨어지는 지점보다도 작은 시간과 공간에서 우리는 지금 서로 만나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것 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만나는 것은 절대로 작은 인연이 아닙니다. 


이 넓은 우주 공간의 가운데 이 엄청난 긴 시간 속에 우리는 만난 것인데, 우리는 이렇게 어렵게 만난 가까운 주변의 인연들을 자신의 어리석은 분별과 이기심과 욕구들로 인해 이 소중한 인연들을 과소평가하고 홀대하고 무시하고 미워하고들 지냅니다.

지금부터라도 이 한번 뿐인 이생의 아까운 세월을 귀하고 소중하게 생각하시고 훨씬 더 귀하고 아름다운 선업과 선연을 짓는데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모두 오늘의 이차인연공덕으로 성불하십시오.

요즘, 대순진리교도라는 사람들이 길거리를 다니면서나, 혹은 사주카페라는 찻집을 열고 차 마시러 온 사람들에게 사주관상을 봐주면서 이딴 짓들을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질문): 제가 다니다 보면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고를 풀어줘야 된다는 말을 하시고 또 어떤 사람은 조상을 위해서 굿을 해야 한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습니다. 저는 원래 이런 걸 믿지 않은 사람이라 지금도 그렇지만 사람들이 자꾸 그런 말을 하니까 정말 그렇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고, 하는 일도 잘 안 풀리고 그래서 내가 할 일을 안 해서 그런지 자꾸 의문이 생깁니다. 하라는 사람도 있고 하지 말라는 사람도 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합니다.)

대충 이런 질문이었습니다.


유한한 삶을 살다가는 인간중생인 우리들에겐 하루하루가 죽어가는 날이요, 매일 뜨고 지는 태양을 바라보면서도 낮과 밤을 반복하는 해와 달을 통해 나고 죽는 생사와 끝없는 윤회가 반복되고 있음을 전혀 의식하지들 못하고 살아가는데 바빠서 막연하게 하루의 시작과 하루의 저뭄을 쳇바퀴 돌듯이 일상으로 그냥그냥, 바삐 바삐, 그럭저럭으로 보내다 문득 주변의 인연 중에 다시 볼 수 없는 이별이 생기게 되면 문득 자신을 둘러보며 순간에라도 침잠하지만, 그 다음날이면 또다시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이 현대인들의 일상일 것입니다. 


여러분, 부처님의 가르침보다도, 예수님의 말씀보다도 더 깊이 우리에게 무상을 깨우쳐 줄 수 있는 진짜 공부처가 있습니다.

우리 다들 그곳으로 현장실습 내지는 견학을 한번 가보십시다.


그곳이 어디냐? 하면 바로 멀리 벽제로 갈 것도 없이 성남 가는 길목에 갈마터널 지나자마자 있는 성남화장장입니다.


우리 모두 언제 날 정해서 일요법회 때, 그곳에 가서 한나절만 있다 오시면 인생무상을 절절히 느끼시고, 부질없는 욕구와 이기심과 온갖 분별로 인한 어리석은 자기 갈등들은 잘게 부셔져버릴 것이고 집에 가서 보게 되는 가족들이 새삼 달리 보일 것입니다.

“속 썩여도 좋다 건강하게만 살아다오.” 하는 마음이 절로 우러나올 것입니다. 


그곳에 가보시면 철부지 아이를 두고 죽어버린 남편의 관을 부여잡고 통곡을 하는 부인의 절규와 피어보지도 못하고 죽어버린 아들딸의 관을 부여잡고 우는 어미의 한 맺힌 피눈물과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버린 온갖 사람들의 슬픔들을 보게 되면 백이면 백사람 모두가 무상을 절절히 느끼고 온갖 것들로 부터의 애착과 집착을 곧 벗어날 도인들처럼 보이지만, 화장장을 나서 몇 걸음 걸으면서 대충 까먹고 오는 길에 차안에서 반 까먹고, 다음 날에는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일상에 떠밀려 살아가는게 우리들의 자화상일 것입니다.

   

그런데 실은 이렇게 살다 이 삶을 마감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의 나고 죽음과 관련해서 소위 영혼이나 귀신 이야기를 꺼리로 해서 이런 사람들이 소위 수입 올리고 자기네 구역신도 수 늘리는데 써먹는 짓들로 변해가는 작태들로, 무슨 심령부흥회다, 성령 대부흥회다 무슨 굿이다 하는 짓들이 다 말이 성령이고, 말이 심령이지 그게 바로 다 귀신 놀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영과 육이 동전의 앞뒷면처럼 바짝 붙어 있기에 온전한 것처럼 보일 뿐이지, 죽음을 통해 영과 육이 헤어지게 되면 여러분의 몸뚱이를 동서남북으로 이리가고 저리 가도록 하고, 웃고 울게 만든 그 주인공이 바로 살아있으니 마음이라 부르고 생각이라 부르는 것이지 그게 바로 귀신이요 영혼이란 말입니다. 

좀 고상하게 불러주는 것이 영혼이라고 하는 것이고 막 부르는 것이 귀신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도대체 살아있을 때는 마음이라 불러 주변이 수틀리면 제멋대로 해대면서 누가 뭐라 할라치면 내 맘대로 하는데 무슨 참견이냐고 해대는 그 마음이라는 것과 뭐든 자기 생각대로 하려고 하는 그 생각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고 이 몸뚱이를 이 나이 이 세월이 되도록 헷갈린 삶을 살도록 한 그 주인공을 한번 알아나 보시고 그리 살다 죽게 되면 몸뚱이는 단견외도들의 말처럼 한 줌 재가 되거나 지수화풍의 사대로 변해버리는 것은 자명한 것이지만, 살아있는 동안 그렇게도 몸뚱이에 애착과 집착을 일으키게 만들어 온갖 짓을 다 저지르도록 했던 그 못된 마음이라 부르고 생각이라 불렀던 것이 이제는 영혼이라 부르고 귀신이라 불리우며 죽어서 어떻게 변해가는 가를 한번 알아나 보십시다.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부하시기를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생들에게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말해준들 중생들은 지 눈으로 봐야만 직성이 풀리고 제 손으로 만져봐야 만이 믿으려드는 속성이 있기에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보이지 않는 사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괴로워하는 중생의 처한바 상황에서 그 중생의 근기에 맞게 알아듣기 쉽게 마음의 편안함을 주어 중생들이 온갖 욕구와 이기심으로 스스로 번뇌와 갈애에 빠져들어 괴로워하는 고통을 제도해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외도들과 신통한 술법내기를 한 것을 아신 부처님께서 꾸중을 내리시며 말세에 미륵불이 하생하실 때까지 사바세계에 머물면서 불법을 외호하라고 수기를 내리시며 나무라셨던 나반존자에게 여섯가지의 신통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사마외도들도 수행을 하면 다섯가지의 신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일체의 번뇌를 여의고 영원한 윤회를 벗어나는 법은 여래의 법이 아니고는 얻을 수 없다고” 단언을 하셨던 것입니다.


헌데 지금 제가 보이지 않는 산 중생의 주인공인 마음이 죽음을 통해 귀신이 되고 영혼이 되어 보이지 않는 세계에 있는 중음에 대해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기가 심히 부처님께 죄스럽습니다만, 이제 그 다섯가지 신통들로 돈만있으면 일반 범부들도 다 누릴 수 있게 변해버린 21세기의 우리들입니다.

부처님의 제자 중에 한 제자가 혼자서 수행을 하여 도를 깨쳐 아라한이 되어보겠다고 부처님의 수행처를 떠나 홀로 산 중에 숨어들어 벽지 독각승이 되어 십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물위를 걸어 다니는 신통을 얻게 되자 뛸듯이 기뻐하며 부처님 앞에 자신의 공부경계를 자랑스럽게 내보이며 대중들에게 뽐내고 싶어 한달음에 세존께서 계시는 곳으로 오는 도중에 부처님께서 이웃나라에 법문을 하러가신다는 말을 듣고 가는 길에 큰 강이 있음을 알고 그 수행자는 나루터에서 부처님의 일행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이윽고, 부처님의 일행이 나루터에 다다르자, 그 수행자는  자랑스럽게 부처님과 많은 대중 앞에서 보란 듯이 물위를 걸어 나갔습니다.

그때, 대중들은 다 놀라고 신기해하며 웅성거리자 부처님께서도 그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그를 보자 예전에 함께 수행하던 제자임을 알아보시고 그를 불러 그동안의 안부를 물어보시고 그에게 연유를 묻자 그 수행자는 자랑스럽게 혼자 공부하여 이런 신통을 얻었노라고 뽐내자 부처님께서는 탄식을 하시며, 그 수행자에게 말하기를 “너는 그동안 혼자서 수행을 한다면서 겨우 은자 몇 잎의 공부를 하고 말았드냐!”하고 나무라시자, 그 제자는 어안이 벙벙하여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고 되묻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저 강을 건너는 것은 은자 몇 잎을 뱃사공에게 주면 건너다 주는 것을 너는 그 많은 세월에 겨우 은자 몇 잎에 불과한 수행을 했더냐,” 하고 나무라셨던 것입니다.


요즘은, 그런 수행자가 절 집에 한사람만 있어도 그 스님 있는 절은 텔레비전에 대문짝만하게 나오면서 아마 대박이 날 것입니다만, 아직까지 그런 수행력이 제게는 생기지를 않고 있습니다.

요즘은 돈만 있으며 비행기가 하늘을 날라 지구 반대편에도 데려다 주고, 수천 킬로 떨어진 사람들끼리도 화상전화를 연결하여 서로 보면서 말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부터 지금까지도 수행자를 제외한 보통의 사람들은 자기 안으로의 여행은 해본적도 없으며 심지어 그토록 자기를 갈애와 번뇌의 노예로 만드는 악마요,사탄이며 고상한 표현으로 성령이라 부르고 심령이라 부르는 자기의 진짜 주인공에 대해서는 알려고 들지를 않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큰 맘 먹고 후일에 전백장과 후백장에 나오는 전백장이 될런지 후백장이 될런지는 모르겠으나, 신행상담에 올라온 참 어려운 질문에 답을 해드리고자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 모두가 겪게 되는 살다가 죽음이라는 과정을 겪게 되는데, 그 죽음과 죽음 후에 남은 가족들이 망자를 위한 49제와 천도제와 굿, 이런 제의행위에 대한 의미와 뜻을 알려드려 흔들림 없이 신행생활을 해 가시도록 하고자 합니다.


사람중생들이 사는 이 지구촌에서는 자전이라 해서 매일 지구가 혼자서 돌기에 낮과 밤이 있는 것이요, 공전이라 하여 지구가 태양둘레를 돌면서 멀어졌다 가까워 졌다 하면서 우리 사는 대한민국은 춘하추동의 사시장철이 있는 것이고 우리가 말하는 시간이라는 것은 여기서의 시간과 외국의 시간이 시차라는 것으로 서로 다릅니다.


이처럼, 이 작은 지구촌에서는 시차가 있지만, 이 지구를 벗어난 우주공간에서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유기질체인 인간의 몸으로는 영원히 살지를 못하고 유한하기에 소위 력(曆)을 만들어 세월이라는 잣대로 나이를 만들어 우리는 죽음이라는 과정을 밟게 되고 거기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법당 안에서는 오전 10시에 모두 모이면 만남이라 부르고 법회가 끝나 헤어지면 이별이라 부르고 집에 돌아가시면 가족들과의 만남이 다시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수시로 이별과 만남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살아있기에 무심코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면서도 의식하지들 못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여기 태워다준 자동차가 기사가 내리고 나니 빈차로 멈추고 있다가 기사가 다시 차에 타고 시동을 걸고 동서남북가자는 대로 운전하면 자동차는 기사 맘대로 사방이 바삐 움직입니다.

우리의 몸을 자동차로 본다면 우리 몸을 움직이는 기사는 무엇일까요?

그것을 살아있으니 마음이라 부르고 생각이라 부릅니다.

사람의 살아있는 이 생명력은 소위 에너지인지라 휘발유도 될 수 있고, 배터리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인공은 아닙니다.


마치 우리가 잘 먹고 잘 자고 적당히 운동해주면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 것 같지만, 사실은 숨 한번 내쉬었다가 못 들여 마시면 우리 생이 끝나는 것처럼, 나라는 자아는 과연 무엇이며 내 마음은 또 무엇이며, 내 생각은 무엇인가를 들여다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을 마감하여 죽음이라는 세계에 들어가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현상들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상견에 떨어져 사후가 있다고 괴로워하면 세존께서는 “사후는 없는 것이다, 지금 현실을 잘살라고 하셨고, 또 어떤 사람은 단견에 사로잡혀 사후가 없다고 막행막식하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단견외도들에게는 사후가 있는 법이니 함부로 처신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던 말씀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단견외도란 무엇인가하면, 만유는 무상한 것이어서 실재하지 않는 것과 같이 사람도 죽으면 재나 흙이 되어 몸과 마음이 모두 없어져서 공과 무에 돌아가 다시 뒷세상이 없다고 고집하는 그릇된 외도들을 말하는 것이고, 이에 반대되는 상견외도들은 사람은 죽지만 자아는 없어지지 않으며 5온은 과거나 미래에 상주불변하여 간단하는 일이 없다고 하는 그릇된 견해의 외도을 말합니다.


여기서 5온(5蘊)이란 색, 수, 상, 행, 식, 이라는 다섯가지를 말하는 것으로 온(蘊)이란 음(陰)이라고도 하는데 모아 쌓인 것으로 “곧 화합하여 모인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색온(色蘊)이란 스스로 변화하면서 다른 것들에도 장애를 주는 물체를 말하는 것이고, 두 번째 온(受蘊)이란 고와 낙, 소위 즐거움과 괴로움을 또는 불고불락(不苦不樂)을 느끼는 마음의 작용을 말하며, 세 번째상온(想蘊)이란 외계의 사물을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그것을 상상해 보는 마음의 작용을 말합니다.

네 번째의 행온(行蘊)이란, 인연으로 생겨나서 시간적으로 변해가는 것을 말하며, 다섯 번째의 식온(識薀)은 우리가 일상에서 모든 현상이나 사물에 대해 의식하고 분별하는 것을 말합니다.


중생들의 소위 나다, 하는 자아(自我)라는 것은 실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위에서 말한 다섯가지의 오온이 잠깐 화합하여 모였다 흩어짐과 같기에 중생의 현재 살아가는 삶을 “오온이 가화합”된 상태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주제에 맞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여기에는 사람의 죽음이라는 명제를 두고서 말씀드리겠습니다만, 몇 마디로 말 할 수 없기에 이번 주에 일부를 말씀드리고 다음 주에 이어서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성불하십시오.

이렇게 빠른 시간 속에서 우리의 살아가는 삶도 급하게 흐르는 개울물처럼 흘러가고 있습니다.


잠자리에 들었다가 눈뜨면 뭔가를 해야하고, 또 하고 있고 나름대로 의미있게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모두가 열심 또 열심히 매일 매일을 최선을 다하는 노력 속에 직업이라는 것에 매여 그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고 있지만,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절대적인 명제는 우리는 순간순간 매일 매일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번 주부터 법문의 주제가 된 별로 즐겁지 않은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명제를 떠올리고 싶지도 않고 아직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지만, 우리는 모르고 살아가는 무명의 삶보다는 항상 생각하며 알고 의식하면서 살아갈 때,삶은 더욱 지혜로워지게 되는 것이고,

언젠가 다가올 자신의 삶의 절대명제를 항상 잊어버리지 않게 된다면, 일상생활 속에서 부질없는 욕구나 이기심을 뿌리로 한 분별심들로 인해서 스스로 일으키는 애착과 집착, 미움과 번뇌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삶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조그만 불편이나 채워지지 않는 욕구들로 인해 스스로 번뇌의 불길 속에 쉽게 빠지지는 않는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굿과 천도제와 49제를 같은 의미로 알고들 있는데 오늘은 우선 굿이란 무엇인가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굿이라는 의식은 사전적으로는 죽은 사람을 위해 행하는 민간신앙인 무속제의라고 하는데, “죽음의 부정(不淨)을 풀고 죽은 사람의 넋을 위로하여 저승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행하는 무속적인 제의”고 말합니다.


망자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준다는 데는 같은 맥락을 가진다고도 할 수 있으나, 엄밀하게 구별한다면 망자를 위한 제의의 사상과 의식을 진행하는 그 깊이부터 다르다 할 것입니다.


사실, 무속적인 경들을 보게 되면 상당히 주술적인 면도 강하지만, 어느 종교이든 종교의 기도문은 주술인 것입니다.

그 기도문이 알기 쉽게 한글로 풀이되어있던 불교의 식에서 주로 독송하는 만트라(짧은 주)나 다라니(장문의 주)역시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무속인들의 무경을 보면 주로 도교적인 문장이나 단어와 불교적인 기도문들이 혼재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알아보니 무속인들이 사용하는 무경이 만들어지는데 사실은 원효스님이 한몫을 해주셨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무속인들은 상당히 친 불교적인 경우가 많고 소위, 우리가 만신이라 부르는 무속인들의 소품으로 사용되는 주된 장식물들이 불교적인 성물이다 보니 일반인들에게 불교가 무속적으로 비추는 경향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이렇게 무속과 불교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로 되다 시피 하여 불교가 무속화 되었는가, 무속이 불교화 되었는가에 있어서는 여러분들이 소위 성지 순례라 하여 큰절에 가시는 곳마다 사찰 경내지 안에 있는 산신과 용왕과 칠성을 모셔둔 삼성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삼성각을 근거로 말씀드리자면 무속이 불교화 된것입니다. 

 

불교가 천 육백년 전에 이 땅에 전래되기 시작했을,토착화된 민간신앙이 있었고 토착신앙의 세력과 마찰이 있게 되자, 당시의 선지식들은 토착신앙을 불교화 시켜버렸던 것이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삼성각인 것입니다.


또 우리가 우리의 시조인 단군왕검이라고 하듯이 왕검은 통치자라는 뜻이고 단군은 제사장을 뜻하는데 그 당시에 제사장이라는 뜻은 바로 무속의식을 주관하는 위치이자 신성한 계급이었던 것이며, 그 제사장을 뜻하는 단군이 의성이 되어 요즘 무당이나 만신을 뜻하는 당골, 당골래가 된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제사장이라는  뜻도 같은 맥락으로 아시면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굿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굿은 상황과 조건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서울·경기도 지역에서는 진오기 굿이라고 하고 평안도·황해도에서는 시왕 굿이라 하며 함경도에선 망무기 굿이라 부르고 전라도와 충청도에선 씻김굿 이라고도 하고 동해안에서는 오구굿, 제주도에서는 시왕맞이 등이라고 부릅니다.

그밖에도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의 넋을 건져 저승에 보내는 넋건지굿·수망 굿, 미혼으로 죽은 남녀를 결혼시키는 사후혼인굿 등도 있습니다.


사실, 망자를 위하여 망자의 “죽음의 부정(不淨)을 풀고 죽은 사람의 넋을 위로하여 저승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행하는 무속적인 제의일지라도 망자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준다는 데는 같은 맥락을 가진 다고도 할 수 있으니, 사람이 살다가 죽음에 이르러 뒤돌아보면 일생동안 충족된 삶을 영위하고서 적당한 나이에 자기 집에서 죽는 경우와 그렇지 못한 죽음이 있는데, 전자의 경우를 호상(好喪)이라고 부르고 후자의 경우에는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는 절, 횡사, 자기 집이 아닌 타관·거리에서 죽는 객사,결혼하지 못하고 죽는 미혼사, 자살·타살로 인한 죽음, 교통사고, 해상사고 등의 사고로 죽은 사고사 등이 있는데, 민간에서 속설로 호상으로 죽은 경우는 소위, 사령(死靈)이라 하여 반드시 천도제를 행하지 않아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저승으로 들어가 후손을 보살펴주는 조상신(祖上神)이 된다고 하며, 호상의 경우에 천도제를 지내주게 되면 사령이 조상신 이 빨리 되도록 촉진하는 의미에서, 또는 죽은 사람에 대한 효성에서 행해진다고도 합니다.


제 명을 다 못 살고 죽은 후자의 경우 혼령은 일정한 기간이 지나도 저승에 들지 못하며 이승을 떠돌면서 살아 있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원귀가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에 의미를 두고 나약한 인간의 본성에 의해 굿이라는 의식이 생겨나게 된 동기이자 배경이 됩니다만, 소위 자식 없이 죽어 제사밥도 못 얻어먹는 주고혼(無主孤魂), 물에 빠져 죽고 불에 타죽고 배고파 죽은 수귀(水鬼), 화귀(火鬼), 아귀(餓鬼),말명이라고 불리는 처녀귀신, 몽달귀신이라고도 불리는 총각귀신 등이 바로 굿이라는 의식이 만들어지게 한 주인공들입니다.

  

이처럼 원귀가 된 사령에 대해서는 반드시 천도제를 해주어야만 저승에 들 수 있다하여, 사람이 죽은 뒤그 넋이 저승에 들지 못하면 가족이나 친지에게 병이나 해를 끼치기에, 굿을 통해 넋이 저승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면 가족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오히려 도움을 준다고 믿었고, 따라서 굿은 단순히 죽은 사람을 위한다는 것 외에도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재해를 막고 복을 가져다준다는 의미도 포함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굿은 혼령으로 인해 탈이 생겼을 경우에도 행하게 되는데, 예컨대 죽은 사람으로 인해 생긴 병을 치료하기 위해 행해지는 굿의 경우 병(病)굿의 성격을 겸하게 됩니다.


이것 또한 소위 신병으로 인했거나, 병원에 가면 원인도 없다는데 본인은 아프고 헛 것이 보일 때, 불교에서는 구병시식이라는 의식을 하게 되고, 기독교에서는 무슨 심령부흥회니, 성령대부흥이니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 심(心)자와 귀신령(靈)자를 쓰고 있으니 바로 살아있는 사람의 마음과 그 마음을 담고 있던 몸뚱이가 수명을 다해 귀신이 됐으니 바로 산 자의 마음과 죽은 자의 혼이 만나는 것이 부흥회라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를 비방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똑바로 알고들 다른 종교를 미신이니 사탄이니 해대며 함부로 매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음 주에는 천도제와 49제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재미들 있으십니까? 오늘 공부로 모두들 한 마음 공부들 하시고 매일 매일 집 앞을 나서는 순간부터 동서 남북이 바쁠지 몰라도 그 바쁜 하루가 저물어갈 때면 우리의 바쁘던 하루는 사실은 정해진 날에서 하루씩을 까먹고 있으니 순간순간에 부질없는 집착이나 애착들로부터 자유로워지시기들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오.

 

[다시 두 번째 천일기도에 동참하며]

 

수도암修道庵!

김천 수도암, 법전종정法傳宗正스님께서 원력을 세워 퇴락한 암자를 손수 지은 절이다. 지대가 높아서(해발1050m)수행하기 좋은 터로 알려져 있다. 오늘은 겨울안개에 싸여 있다.

11월 넷째주 28일, 전국에서 온 금강카페도반들과 제2차 천일기도 입제식을 갖는다. 삼귀의,반야심경, 발원문을 합송한다. 카페지기 경주법사님이 우리의 공부방향의 대강을 말씀해주셨다. 다시 천일기도를 시작하는 단계에서 늘 수지해야할 핵심이라고 본다.

 

염불念佛이란 지도론智度論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일심으로 불성을 깨달아가는 공부(현전일념 각오본각진성現前一念 覺悟本覺眞性)며, 부처와 하나임을 확인하는 공부(여불불이與佛不二)고,본래부처인 자리를 떠나지 않는 공부(여불불리지행與佛不離之行)인지라, 근기가 낮은 공부가 아니라 근기가 높은 상근인(上根人)의 염불(念佛)이다. 따라서 부처님佛의 법신法身이 비유비공非有非空한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묘심妙心임을 관조觀照하는 게 바로 염불인 것이다. 염불선念佛禪이란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로 우주의 실상과 일체존재의 실상을 진리자체를 관조하는 참선염불이요 염불참선인 것이다.

 

도안 한창호거사님의 실상염불 영역내용을 보면 “실상염불實相念佛은 우주와 마음의 참 본성을 관찰하는 염불이다.”(...thirdly, mindfulness of the Buddha's true nature or Yeombul Seon, which is contemplating the true nature of the universe and our minds.) 결국 염불 부처님을 그리는 것은 칭명-관상-관상-실상을 통관하면서 부처님의 지혜자비공덕을 그리는 것이요 바로 진리 자체에 계합하는 것이다.

염불선念佛禪의 효시嚆矢는 4조 도신대사道信大師의 ‘입도안심요방편법문入道安心要方便法門’이다. 모든 부처님의 마음이 제일이다(제불심제일!諸佛心第一). 부처를 염하면 부처요, 망녕된 생각을 하면 범부다(염불심시불 망념시범부念佛心是佛 妄念是凡夫) 이게 핵심구다. 그러나 무상정변지에 이르려면 일행삼매를 닦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청화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공부가 익어져서 한 고비를 넘어서면 염불이고 화두고 다 초월해버립니다. 그러나 화두나 염불이나 묵조나 모두가 다 한 고비를 넘어서기 전에 습인(習忍)을 익혀서 마음이 딱 자성(自性) 곧, 불성(佛性) 한자리에 머물기 전에 하는 것이지 익은 사람들한테는 이런 것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땅히 부질없는 시비논쟁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공부는 부처님이 되는 공부다. 부처님을 늘 그리는 공부다. 부처님과 함께 하는 공부다. 부처와 내가 하나 되도록 공부하는 것이다. 부처님중의 부처님 아미타부처님을 염송한다. 금타金陀대화상님께서 삼매중에 정리하신 보리방편문288자를 암송한다. 좌선하거나 절하면서도 암송하고 독송한다. 사경도 한다. 진리에 이르는 방편을 익게 하는 수행법이다.

아.미.타阿.彌.陀는 진리와 실상 그 자체다. 아.미.타는 광명 그 자체요 영원한 생명이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부처님이 타陀요, 원만보신 로사나부처님이 미彌요,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부처님이 아阿다. 아.미.타는 삼신으로 화현된 한 부처님이다.

따라서 한 부처님께 올리는 공덕은 무량 제부처님께 올리는 그것과 같다. 가장 소박하지만 온 우주를 감싸 안은 공양이 바로 아.미.타 부처님인것이다.

 

“너 비록 미흡하고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이지만 일체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와 광명을 두루 갖춘 본래 부처님이다!”

 

청화스승님은 진리를 향한, 부처님을 향한 깊은 신심을 바탕으로 한 신.해.행.증信.解.行.證이 원만히 구현되도록 철저히 닦아 수행자의 귀감龜鑑이 되셨다. 후인들은 모두가 부처님과 역대 조사 선지식께서 이미 밝혀놓은 길 따라 가면 되는 것이다. 사만성불四滿(信.解.行.證)成佛의 길은 매일의 나침반이다.

 

지난 천일기도(2006.11.25-2009.8.20)기간 우리 금강도반들과 함께 아미타불염불선을 원만히 회향했다. 천일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일과를 수행했다. 그 때 얻은 근根.력力으로 다시 정한 일과를 성실히 수행해갈 결의를 다지고 있다. 2009년11월28일부터 2012년8월23일까지!

 

나는 매일 새벽3시-4시 사이에 일어나 청수를 올려 예불하고 천수경을 독송한다. 108배, 보리방편문108독, 광명진언108독 기본으로, 자양되는 몇가지 보구寶句를 독송하고 발원문으로 하루를 연다. 아미타불염불 일과 1만념이상은 보보행로,어디에서든 보리방편문가락과 곁들여 마친다. 마음이 허공과 같음을 바라보면서 매일매일의 수행만이 ‘어쩌다가 어리석은 무명에 가리어’ 생긴 다겁생래 업장을 녹이고 밝고 맑은 세계로 향상되어 갈 것을 믿는다. 오늘 ‘천행으로’ 불법을 만나 공부하는 행복한 하루의 삶이 바로 천일의 삶, 천년의 삶이지 않겠는가!

 

무념 김영일 합장_()_

 
      
      진정한 친구는 인생의 자산.
      인생에서 많은 친구가 
      필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많은 친구가 있다면 
      그 사람은 그 만큼
      인간관계를 잘 형성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중요한 것은
      진정한 친구의 필요성에 대한 것이다.
      당신은 친구가 당신의 마음에 
      흡족하고 맡은 것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기를 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만약에 그렇다면 당신은 진정한 
      친구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이 친구로 사귀고 싶은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에게 무엇인가 
      얻으려 하지 말고, 
      그 사람을 조금이라도 먼저 이해하려고, 
      생각한다면 쉽게 우정을 나누고 
      큰 믿음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가 헌신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지키고 가져다 준다면 그들도 
      기회가 있으면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기업은 일반적으로 자산과 부채를 
      가지고 있는데 부채가 너무 많으면 
      어떤 사업이든 힘들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 친구는 자산이다.
      너무 많은 부채가 있으면 기업이 망하듯,
      적이 많으면 당신 개인의 성공과 
      행복은 불가능하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자산을 늘리고 
      부채를 줄이는 지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