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 7. 23:20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春來不死春이라 가버린 봄은 다시 오지 않는다고들 합니다만, 똑 같은 봄은 금년에 다시 오지 않는다 해도 그래도 봄은 해마다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몸은 젊음이 다시 오지 않고 해마다 달라지고 있으니 이를 세월이라 합니다.
세월 속에서 똑같은 봄은 다시 오지 않는다 해도 해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은 되풀이되고 있어 이 가운데 우리는 생노병사를 거스르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
우리는 이 자연의 섭리 앞에서 윤회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이를 무상이라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여기에 전혀 지장을 받질 않습니다.
우리는 마음은 청춘이라고들 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몸은 늙었어도 마음은 청춘이라고 하듯이 우리 마음은 이렇게 시간이나 세월에 구애받지 않고 정정한 것입니다.
바로 시간과 세월에 구애 받지 않고 존재해 가는 이 마음법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부처님이 중생들에게 팔만대장경의 가르침을 남겨 놓았다 해도 사실, 그 가르침은 욕구와 분별과 집착과 애착이라는 착심과 욕구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있는 중생의 마음번뇌에서 일어나는 팔만 사천가지의 온갖 망상과 번뇌들에 대한 처방전에 불과할 것이니, 팔만 사천가지의 번뇌를 일으키는 본 자리는 마음이라는 구멍 뚫린 우물일 것이고, 그런 팔만 사천가지의 번뇌수로 가득찬 중생심에 팔만 사천가지의 감로수로 바꿔주는 부처심 또한, 다름아닌 여래의 마음인 것입니다.
心佛及衆生이 是 三無差別이라듯, 중생심과 부처심은 둘이 아니며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은 다만 하나이건만, 우리는 삶에 휘둘리고 떠밀려 살아가야 하는, 살아야 한다는, 살아가야만 한다는 현실에 떠밀리며 중생심으로 뒤범벅이 되어 지금, 오늘 이 순간까지 다다른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만큼이라도 우리네 옛 조상님들이 가져왔던 지혜와 덕성을 다시금 되새기며, 입춘 날에 붙이는 입춘첩의 의미처럼 좋은 일만 일어나고 경사스런 마음세계의 훈습을 길들이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24절기가 있으나, 보름마다 바꿔 들어오는 절기가운데 입춘이란 어떤 절기인가를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작년에도 입춘에 대해 말씀드렸지만, 입춘은 양력 2월 4일경 태양이 시황경 315°에 왔을 때를 입춘입기일로 하여 이후 약 15일간이 입춘기간에 해당하고 음력으로는 정월의 절기로 동양에서는 이 날부터 봄이라고는 하지만, 추위는 아직도 강합니다.
그러나 입춘 전날이 절분(節分)인데 이것은 철의 마지막이라는 뜻입니다.
이날 밤을 해넘이라고 부르고, 콩을 방이나 문에 뿌려서 귀신을 쫓고 새해를 맞는다고 하고, 그러므로 입춘을 마치 연초(年初)처럼 여겼습니다.
옛날 중국에서는 입춘 15일간을 5일씩 3후(候)로 갈라서, ① 동풍이 불어서 언땅을 녹이고, ② 동면하던 벌레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③ 물고기가 얼음 밑을 돌아다닌다고 하였습니다.
잡절(雜節)은 입춘날을 기준으로 하여 결정되었습니다.
밭에 씨앗뿌리기가 시작되는 88야(夜), 태풍시기인 210일, 220일 등은 각각 입춘날로 부터 88일, 210일, 220일째 날로 계산됩니다.
그렇다면 입춘(立春)의 뜻은 무엇일까요.
입춘은 대한(大寒)과 우수(雨水) 사이에 있는 첫 번째 절기로 해가 황도(黃道) 315도에 위치할 때이고, 양력으로는 2월 4일경인데 음력으로는 섣달(12월)에 들기도 하고 정월에 들기도 하며, 윤달이 들어있는 해에는 반드시 섣달과 정월에 입춘이 두 번 들게 듭니다.
이것을 복입춘(複立春), 또는 재봉춘(再逢春)이라고 합니다.
입춘 방이란 무엇일까요.
입춘이 되면 새 봄을 맞이하는 뜻으로 대궐에서는 신하들이 지은 '춘첩자(春帖子)'를 붙이고, 민간에서는 '춘련(春聯)'을 붙였고, 특히 양반 집안에서는 손 새로운 글귀를 짓거나, 옛사람의 아름다운 글귀를 따다가 춘련을 써서 봄을 축하하는데 이것을 '춘축(春祝)'이라 합니다.
이때, 댓구를 맞추어 두 구절씩 쓴 춘련을 '대련(對聯)'이라 부르고, 이 춘련들은 집안의 기둥이나 대문, 문설주 등에 두루 붙였습니다.
대련에 가장 많이 쓰이는 글귀는 '입춘대길(立春大吉)건양다경(建陽多慶)'이었습니다.
이 뜻은 “입춘에는 크게 좋은 일이 있고, 새해가 시작됨에 경사스러운 일이 많기를 바랍니다”뜻입니다.
여기에서「건양」은 19세기 말 고종즉위 33년부터 다음해 7월까지 쓰인 고종황제의 연호(1896∼1897)인 것입니다.
건양다경은 그 당시 국태민안(國泰民安: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편안함)을 기원하는 뜻에서 집집마다 써서 붙였다고 합니다.
그 외에는“수여산(壽如山) 부여해(富如海) : 산처럼 장수하고, 바다처럼 부유해지기를 바랍니다.”와 “소지황금출(掃地黃金出) 개문백복래(開門百福來) : 땅을 쓸면 황금이 나오고, 문을 열면 온갖 복이 들어오기를 바랍니다.”등이 있습니다.
조선 때 천문, 지리, 측후를 맡아보던 관청인 관상감(觀象監)에서는 붉은 물감으로 귀신을 쫓는 글인 '신다울루(神茶鬱壘)'를 써서 궁중의 문설주에 붙여 둡니다. 신다와 울루, 이 두 신은 귀신들이 다니는 문의 양쪽에 서서 모든 귀신을 검열하는데 남을 해치는 귀신이 있으면, 갈대로 꼰 새끼로 묶어 호랑이에게 먹인다고 했답니다.
마치, 사찰의 사천왕문에 있는 사천왕과 같은 역할이랍니다.
또, 흥부집 기둥에 입춘방(立春榜)이란 속담이 있습니다.
잠결에 기지개를 켜면 발은 마당 밖으로 나가고, 두 주먹은 벽 밖으로 나가며, 엉덩이는 울타리 밖으로 나가 동네사람들이 걸리적거린다고 궁둥이 불러들이라고 하여 깜짝 놀라 일어나 앉아 대성통곡하는 그런 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집 기둥에 입춘방을 써 붙였으니 격에 맞지 않음을 빗대는 말이랍니다.
또, 아홉 차리라는 말도 있었는데 이날은 각자 맡은 바에 따라 아홉 번씩 일을 되풀이하면 한 해 동안 복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액을 받는다고 생각했었고, 글방에 다니는 아이는 천자문(天字文)을 아홉 번 읽고, 나무꾼은 아홉 짐의 나무를 하며, 노인은 아홉 발의 새끼를 꼰다. 계집아이들은 나물 아홉 바구니를, 아낙들은 빨래 아홉 가지를, 길쌈을 해도 아홉 바디를 삼고, 실은 감더라도 아홉 꾸리를 감았었고, 또 밥을 먹어도 아홉 번, 매를 맞아도 아홉 번을 맞았으니 아홉 번 한다는 뜻은 우리 조상들이 ‘9’라는 숫자를 가장 좋은 양수(陽數)로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난해도 부지런하고, 열심히 살라는 교훈적인 세시민속이었던 것입니다.
또 다른 풍속에는 적선공덕행(積善功德行)이라하여 입춘이나 대보름날 전날 밤에는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좋은 일을 꼭 해야 일 년 내내 액(厄)을 면한다는 적선공덕행(積善功德行)이란 풍속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밤중에 몰래 냇물에 가 건너 다닐 징검다리를 놓는다든지, 거친 길을 곱게 다듬어 놓는다든지, 다리 밑 거지움막 앞에 밥 한 솥 지어 갖다 놓는다든지 등등을 실천하는 미풍양속이었습니다.
그리고 상여 나갈 때 상여머리에서 부르는 상엿소리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입춘날 절기 좋은 철에/ 헐벗은 이 옷을 주어 구난공덕(救難功德) 하였는가 / 깊은 물에 다리 놓아 월천공덕(越川功德) 하였는가 / 병든 사람 약을 주어 활인공덕(活人功德)하였는가 / 부처님께 공양드려 염불공덕(念佛功德)하였는가' 죽어서까지도 염라대왕으로부터 입춘날의 적선공덕행(積善功德行)을 했는지 심판 받는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 우리의 아름다운 풍속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좋은 우리네 풍습들이 이제는 온데 간데 없고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자식은 부모를, 부모는 자식을 내버리고 심지어 철모르는 자식을 고층 아파트로 데리고올라가 밀어 떨어뜨리고, 이웃이 이웃을 죽이고 살아가는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으니 만약에 이 시대에 예수님과 부처님이 다시 오신다면 어떤 해결책을 내놓으실까요.
제 생각에는 두분이 오시기를 기다리기보다도 우리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우리 사이에 인과법이 허물어져 버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기의 행위에 대한 인과의 두려움을 모르고 살아가고, 종교적인 회개의식을 통해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자유로워져 버리는 현대인들의 단편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자기 합리화가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일 것입니다.
천지 자연의 이치를 보면 인과를 벗어남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천지 자연이 여실히 보여주는 부처님 이전부터 존재해 왔던 인과법을 두려워하고 어려워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요.
초하루 법문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깨달음을 성취하여 중생을 구제하는 것에 있습니다.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은 상구보리이며, 중생을 제도하는 것은 하화중생의 일이라고 합니다.
정토교학에서는 신심과 원력으로 깨달음과 중생제도를 성취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력은 스스로 수행을 통해 성불을 하는 것이고 타력은 불보살의 위신력에 의해 성불을 하는 것인데 타력도 엄밀히는 자력인 것입니다.
백중법문
제가 우리절에서 처음 봉행하는 우란분재일입니다.
오늘은 위패의 주인공들만이 아니라, 도량내외 유주무주인연무연의 일체 영가들께 무상의 도리를 일러드려 금생에 대한 일체 불급한 연을 정리하여 홀연히 가벼운 영이 되어 되돌아 가시도록 해드리는 축제의 날인 것입니다.
불교의 큰 행사에 하나인 우란분절, 백중은 음력 7월 15일로 모두들 아시다 싶이, 백종일(百種日), 백중절(百中節) 또는 망혼일(亡魂日)이라고도 부릅니다.
정월 대보름을 상원일이라 하는데 반해 이 날을 중원일(中元日)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절에서는 망자(亡者)를 위한 재를 올리며 불공을 올리는 큰 명절로서 고려시대까지는 일반인들도 불전과 조상님 전에 공양하였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절집만의 행사로 되어 버렸습니다.
또, 예전에는 백종 일을 전후하여 큰 시장이 서는데 이를 백중장(百中場)이라고도 했답니다.
이때는 여러가지 놀이와 노름, 그리고 흥행이 벌어지는 난장이 서는데, 이 장이 서면 주인은 머슴들에게 새옷 한 벌과 장에 나가 먹고 즐길 돈을 주었기 때문에 그래서 이 날을 머슴날이라고도 했답니다.
7월이 되면 논이나 밭을 매는 일이 거의 끝나고 비교적 한가하여 마을에서는 일정한 날을 정하여 호미씻이를 하고, 백중날은 일을 하지 않는 날이라, 이 날은 산신(山神)들이 곡식을 추수하는 날이라 들에 나가 일을 하면 방해가 된다고 해서 남자들은 들에 나가지 않고, 여자들도 집안에서 바느질이나 그 밖의 일을 전혀 하지 않고, 지주들이 마련해준 술과 음식을 갖고 산이나 계곡을 찾아가 먹고 마시며 하루를 흥겹게 즐겼습니다.
요즘 세상이야기 : (목련존자이야기)
초심에 사음수 하면 성독이요 우음수 하면 성유라, (해석) 했지만, 사람의 마음도 물과 같은 것입니다. 물은 만물을 생장하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사람의 경우에도 인체의 2/3가 물로 되어있습니다.
물은 모든 것을 씻어주고 깨끗하게 정화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물이란 것이 또 묘합니다. 맹물에다 설탕을 타면 설탕물이 되어 단맛을 내고, 소금을 타면 소금물이 되어 짠맛을 내게 됩니다. 만약 물에 누군가가 독을 타게 되면 독물이 되어서 그 물을 마시면 사람이 죽게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부처님을 향하면, 물과 같은 이 마음에 부처님의 자비가 들어오게 되어, 자비수로 가득 찬 마음이 될 것입니다.
이리된다면, 자비수로 마음이 가득찬 불제자는 일상에서 모든 이를 대함에 있어 부처님의 자비로써 대하게 될 것입니다.
음식도 맛이 있어야 하는데 그 맛이 우리 구미에 맞을 때 식도락이 느껴지고, 만족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불자들의 마음에 부처님의 법이 성취되어 마음의 만족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이 항상 자비수가 되어 있어야합니다.
여러분들은 항상 우리 마음이 물과 같다는 이 생각을 잊지 마시고, 항상 내 몸을 이루고 있는 (身水)에 무엇이 들어있는가를 살펴야합니다.
설탕을 타면 단맛이 나고, 소금을 넣으면 짠맛이 난다고 했듯이, 재료는 똑같은 금이 건만, 금반지도 될 수 있고 반지도 팔찌도 귀걸이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무엇이 들어있는가를 살피는 것이 불교신행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불교를 독실히 신행해 나가면 물과 같은 내 마음에 그 무엇이 녹아내리게 됩니다. 달리 말씀드린다면마음이 훈습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훈습 된다는 말은, 마치 향을 태워 우리 옷깃에 갖다대면 그 향 내음이 우리 옷깃에 스며들고 낙엽을 태우면 낙엽타는 냄새가 스며드는 것과 같습니다.
중생의 일상생활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불교교리를 대입해 말할 때는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업보중생으로 과거생의 과보에 따라 인연따라 천태만상으로 달리 태어나게 되며, 업식훈습(業識薰習)이 이루어진다고 표현합니다.
업을 일으키는 종자가 있는데, 이 종자에 의해서 어떤 행동이나 습관, 성격이 만들어지고, 이를업식이 훈습된다고 합니다.
결국 마음이 어떻게 훈습되어지는냐는 하는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을 잘 하느냐 못하느냐 부처가 되느냐 못하느냐의 방향을 결정짓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처님법을 따르는 사람들을 불교에서는 불자라고 하며, 불자를 종불보생(從佛報生), 종법화생(從法化生)이라 합니다.
종불보생은 부처님 입으로부터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이 입으로 설법을 하기 때문에 그 설법을 들은 사람이 새로운 정신을 일으켜, 자기 인격을 새롭게 탄생시킨다는 의미이고, 종법화생은 부처님 법으로부터 교화가 되어 태어난다란 뜻입니다.
불교란 결국 부처님 법에 의해서 우리 마음이 훈습되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이 훈습이 되면, 훈습되기 전과 큰 차이가 생깁니다.
그 중에 하나가 이 세상을 바로 알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에 훈습이 되면 비로소 이 세상을 보는 자기안목이 생기게 되며, 바로 이 세상이 인과법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불자들과 비불자들의 차이는 마음 속 사고방식에 인과법을 이해하는 지적인 힘이 있느냐 없느냐에서 나타납니다. 얼마전 30이 넘은 자식이 퇴직한 부모를 살해한 사건이 광주에서 일어났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인과를 모르고 살아가는 이들의 악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사실은 변함없는 시간의 진행을 따라가는 것뿐입니다.
부처님께서 깨치고 나서 이 세상은 모든 것이 원인없는 결과가 없고 인연따라 이루어진다는 연기의가르침을 맨 처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우주의 질서요, 순환인 것입니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에 불과할 뿐이기에 뿌리면 거두고 심으면 나는 것입니다.
“욕지 전생사이면 금생 수자시요,
욕지 내생사이면 금생 작자시라,”
인생은 모두 인과로 이어져있습니다. 어제의 원인이 오늘의 결과를 만들고, 오늘은 내일의 원인이 됩니다.
따라서 오늘이라는 현재가 항상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은 어제의 결과이면서 내일의 원인이 됩니다. 이것을 인과동시라 합니다.
불교를 독실히 믿으면 인과법이 가슴속에 와 닿게 되고, 비로소 부처님의 법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과법의 자식교육과 이시대의 목련존자”
“목련존자 어머니의 이기심과 인과의 도리” 모두들 오늘의 이차인연으로 성불하십시요.일기도 불순한데 여기까지 와주신데대해 감사드립니다.
타력이란 불보살의 본원력과 가피력에 의해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염불입니다.
염불이란 생각 念字,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입으로 명호를 부르는 칭명염불(稱名念佛)과 부처님의 상호나 공덕을 관하는 觀相念佛(觀相念佛)로 구분할 수 있고, 불보살의 덕성을 떠올리면서 하는 관상염불(觀想念佛)이 있습니다.
이러한 염불의 기원은 부처님 당시부터 있었습니다.
부처님의 교단은 불법승 삼보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삼보에 귀의하는 것은 불교도로서 최초의 의식이자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도리였던 것입니다.
초기에 불교교단에 귀의하려면ꡒ나무불, 나무법, 나무승ꡓ을 외우면서 부처님 주위를 세번 돌게되면 부처님께서ꡒ선래비구야ꡓ라고 하여 출가가 허락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ꡒ나무불ꡓ이 바로 염불의 시초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염불은 불교교단에 대한 신앙의 표명이며, 귀의의 방법이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대소승을 막론한 모든 불교의식에는 반드시 삼귀의로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삼보에 귀의하는 것은 깨달음에 들어가는 첫 번째의 관문이며, 사홍서원은 중생구제와 보살도 실천의 마지막 서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재동자가 53 선지식을 찾아 떠난 구도 행각에서 맨처음 만난 스승은 바로 지혜를 뜻하는 뭄수보살님이었으며, 맨 마지막에 만난 스승은 바로 대행원력보살이신 보현보살이었습니다.
우리는 인사에 성불하십시오.! 하지만 성불한 다음에 할 일은 무었일까요?
그래서 대승불교의 모든 신앙행위는 믿음의 표현인 삼귀의와 대비원력의 발원인 사홍서원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염불로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 인도의 용수보살은 십주비바사론 이행품에서 부처님을 믿는 신불(信佛)만으로도 아유월치(阿惟越致)즉 불퇴전지(不退轉地)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보면, 불법에는 무량한 문이 있습니다.
세간의 도(道)에도 난(難)과 이(易)가 있으니 육로로 걸어가는 것은 고행이며, 수로로 배를 타고 가는 것은 편안하고 쉬운 일이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보살의 도에도 난행정진(難行精進)하는 사람도 있으며, 또한 신방편(信方便)의 이행(易行)으로 빠르게 아유월치(阿惟越致)에 도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방법도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지고 있으며, 어려운 정진방법을 선택하는 난행도(難行道)와 쉬운 방법인 이행도(易行道)가 있는데, 그 중에서 이행도인 부처님을 믿는 믿음에 의해서도 불퇴전지인 야유월치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부처님의 다겁생래 동안 닦은 무량한 수행력과 한량없는 중생구제의 본원력의 공덕력에 의해 깨달음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즉 용수보살은 염불로서 현세에 아유월치에 이르러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 세친보살은 왕생론(往生論)에서 극락왕생행으로 찬탄문(讚歎門), 예배문(禮拜門), 작원문(作願門), 관찰문(觀察門), 회향문(回向門)의 오념문(五念門)을 설하면서, 염불을 찬탄문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용수가 염불로서 현세에 아유월치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으나, 세친은 염불로서 내세에 왕생하여 가능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중국의 담랑(曇鸞), 도작, 선도 등에게도 계승되었습니다.
칭명염불. 관상염불 수행만으로도 간절한 신심만 있으면 불보살 본원력. 가피력에 힘입어 성불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량수경, 관무량수경, 아미타경, 등의 정토삼부경과 반주삼매경에서는 염불로서 견불(見佛)과 왕생을 설하고 있습니다.
정토계 경전에서는 견불은 깨달음으로 여기며, 왕생은 성불로 보고 있습니다.
무량수경의 제18원 십념왕생원(十念往生願)에서는 오역죄와 정법을 비방한 자를 제외하고는 누구나 십념염불(十念念佛)로 왕생이 가능하다고 하며, 왕생은 삼배구품(三輩九品)에 따라서 왕생한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왕생을 하게되면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아미타불의 설법을 들어서 성불을 보장받으며, 결국은 모습과 이름이 모두 아미타불과 같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명동호(同名同好)가 되어 모두가 아미타불이므로 부처와 극락성중이 둘이 아님을 설하고 있습니다.
관무량수경의 제8상상관(像想觀)에서는 제불여래는 법계신(法界身)이므로 일체중생의 마음속에 들어 있느니라, 고 하면서ꡒ마음이 부처를 지으면, 마음이 곧 부처(是心作佛是心是佛)ꡓ이라고 했습니다.
즉 중생의 마음이 부처의 마음으로 바뀌면 부처의 마음은 곧 부처라는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이ꡐ마음이 곧 부처 (是心是佛)ꡑ라고 하는 말씀은 관무량수경과 반주삼매경에서 나오며, 이러한 말씀이 선종에 영향을 미쳐서 선종에서 많이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은ꡐ마음이 부처를 지었을 때 그 마음이 부처ꡑ라는 것입니다.
만약 마음이 부처를 만들지 못한다면, 그는 그대로 중생임을 명심해야합니다.
“부처님을 형상으로 관할 것ꡓ을 설하면서, 관념염불로서 ꡒ무량억겁 동안의 생사의 죄를 소멸하고 현재의 몸으로 염불삼매(念佛三昧)를 성취한다ꡓ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염불삼매에 들게 되면, 견불을 하게 되며, 견불(見佛)은 견성(見性)과 같은 경지인 깨달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9관인 진신관(眞身觀)에서는ꡒ불신을 관하면, 불심을 본다(觀佛身故 亦見佛心)ꡓ고 했습니다.
부처님의 모습인 불신을 친견하는 것은 바로 부처님의 마음인 불심을 보게되며, 이는 부처님의 성품인 불성을 보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정토교에서는 염불삼매를 성취하면 부처님을 친견하게 되며, 그렇게 되면 자신이 의심나는 것을 부처님께 직접 물어보게 되며, 부처님은 친절하게 가르쳐 주시게 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법시대의 중생들이 친구의 얼굴을 보기는 쉽지만, 친구의 마음을 보기는 어려운 것이듯, 이와 같이 부처님의 모습을 보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부처님의 마음인 불성(佛性)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인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눈에 보이지 않은 마음을 보기는 대단히 어려우나,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을 보기는 쉽습니다.
중생은 모습과 마음이 다를 수 있지만, 부처님은 모습과 마음이 같으므로 불신은 바로 불심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의 모습을 보면서 바로 부처님의 마음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불심(佛心)이란 무엇인가? ꡒ부처님의 마음이란 큰 자비이므로 무연자비(無緣慈悲)로서 모든 중생을 섭취하는 것ꡓ이라고 합니다.
즉 불신을 보는 자는 불심을 보게되며, 불심이란 무연자비로서 구현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깨달은 자의 인격은 무연자비로서 표현되고 있음을 설하고 있고, 깨달은 자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설하고 있습니다.
즉 깨달은 자는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임을 밝히고 있다.
아미타경에서는ꡒ아미타불의 명호를 굳게 지니기를 일일 내지 칠일 동안 한결 같은 마음으로 흐트러지지 아니하면, 그 사람이 임종할 때에 아미타불이 여러 성중들과 함께 그 사람 앞에 나타날 것이니라. 그 사람이 목숨을 마칠 때에 마음이 뒤바뀌지 않고 바로 아미타불의 극락국에 왕생하게 될 것ꡓ이라고 했습니다.
즉 아미타불의 명호를 일심불란하게 칭명한다면, 반드시 임종시에 마음이 흐트러지지 아니하고 바로 왕생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심불란한 경지는 생사를 초월한 경계이므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다고도 볼 수 있다.
반주삼매경은 재가불자인 발타화보살을 상대로 설한 것인데,
아미타불과 제불보살을 친견하는 방법에 대하여 설하고 있습니다.
아미타불을 친견하는 삼매가 바로 반주삼매이며, 이는 제불이 눈앞에 나타나 설법하는 삼매인데, 반주삼매(般舟三昧)야 말로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는 중요한 방법인 것입니다.
반주삼매를 닦는 방법으로는 3개월 동안 경행하면서 염불을 지속할 것을 설하고 있습니다. (탑돌이가 여기서 유래되었습니다.)
이러한 방법을 활용한 것이 천태지자대사의 사종삼매법 중 상행삼매(常行三昧)인 것입니다.
90일 간의 상행삼매를 행하여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도록 하고 있다.
이상을 정리한다면, 아미타불을 입으로 부르는 칭명염불법이나 마음으로 관하는 관념염불을 통하여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으며, 이는 바로 견성하는 것과 같은 경지로 염불로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며, 이렇게 쉬운 방법이 있음을 설하며. 왕생은 바로 성불이며, 성불을 보장받는 곳이고 왕생은 성불하기 위하여 가는 것이며, 이같이 모든 것은 부처님 본원력의 힘에 의해 가능함을 설하고 있습니다.
서산대사의 극락왕생 발원문을 보게되면,
弟子 兼判禪敎事 都大禪師(제자 겸판선교사 도대선사) 某(서산대사)는 극락교주 아미타불의 尊容一幀을 삼가 그리옵고, 향을 사르고 頂禮하오며 대서원을 발하옵니다.
"원하옵건데 저는 임종할때에 죄업의 장애를 없애고 서방 大慈尊(아미타불)의 금색광명속으로 나아가서 수기를 받자옵고, 미래세상이 다 할 때까지 중생을 건지겠나이다.
허공이 다하는 일이 있더라도 이 서원은 다하지 않을 것이오니,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은 증명을 하여 주옵소서. (淸虛集 券4)
"나무아미타불"은 윤회를 벗어나는 지름길입니다.
육조 혜능스님께서는 "부처는 자기 성품 속에서 이룰 것이지 자기 밖에서 구하지 말라" 고 가르치신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상근기들에게 통하는 본심(本心)을 바로 가르친 것입니다.
이치대로만 말한다면 참으로 그렇지만, 현상으로는 아미타불의 사십팔원(四十八願)이 분명히 있고, 극락세계가 확실히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일심으로 열 번만 염불하는 이도 그 원의 힘으로 연꽃 속에 태어나고 쉽사리 윤회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삼세의 부처님들이 다같이 말씀하시고, 시방세계의 보살들도 모두 그 곳에 태어나기를 발원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극락세계에 왕생한 사람들의 행적이 분명하게 전해오고 있으니 공부하는 이들이 잘못 알아서는 안될 것 입니다.
아미타(阿彌陀)란 우리말로 "끝없는 목숨(無量壽)" 또는 "끝없는 광명(無量光)"이란 뜻으로, 시방삼세에 첫째가는 부처님의 명호인 것 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아미타불의 전생 수행시의 이름은 법장비구였습니다.
세자재왕(世自在王) 부처님 앞에서 마흔여덟 가지 원을 세우고 말하기를 "제가 성불할 때에는 시방세계의 무수한 하늘과 인간들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작은 벌레까지도 일심으로 제 이름을 열번만 부를지라도 반드시 저의 세계에 와서 나게 하여지이다. 만약 이 원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저는 성불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옛 어른이 말씀하기를 "염불 한 소리에 악마들은 간담이 서늘해지고, 그 이름이 저승의 문서에서 지워지며 연꽃이 금못에 나온다"하였으며, 또한 "어린애가 물이나 불에 쫓기어 큰 소리로 부르짖게 되면 부모들이 듣고 급히 달려와 구원하는 것과 같이, 사람이 임종할 때에 큰 소리로 염불하면, 부처님은 신통을 갖추었으므로 반드시 오셔서 맞아갈 것이다.
부처님의 자비는 부모보다 더 지극하고, 중생의 나고 죽는 고통은 물이나 불의 피해보다도 더 심하다." 라고 했습니다.
만일 누가 말하기를 "자기 마음이 정토 (淨土)인데 새삼스레 정토에 가서 날 것이 무엇이며, 자기 성품이 아미타불인데 따로 아미타불을 보려고 애쓸 것이 무엇인가?" 라고 한다면, 이말이 옳은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저 부처님은 탐하거나 성내는 일이 없는데, 그럼 나도 탐하거나 성내는 마음이 일지 않는가? 저 부처님은 지옥을 연화세계로 바꾸기를 손바닥 젖히듯 하신다는데, 나는 죄업으로 지옥에 떨어질까 오히려 겁을 내면서 어찌 그걸 바꾸어 연화세계가 되게 한단 말인가?
저 부처님께서는 한량없는 세계를 눈앞에 놓인 듯 보시는데, 우리는 담벼락 너머의 일도 모르면서 어떻게 시방세계를 눈앞에 본단 말인가.
그러므로 사람마다 성품은 비록 부처이지만 실제 행동은 중생이다.
그 이치와 현실을 말한다면 하늘과 땅 사이처럼 아득한 것입니다.
규봉선사가 말하기를 "가령 단박 깨쳤다 할지라도 결국은 점차로 닦아가야 한다." 고 하였으니 참으로 옳은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자기 성품이 아미타불이라는 사람에게 물어본다 치면,
어찌 천생으로 된 석가여래와 자연히 생긴 아미타불이 있는가? 스스로 헤아려 보면 그냥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고 합니다.
임종을 당해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큰 고통이 일어날 때에 자유자재할 수 있겠는지요.?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한때에 만용을 부리다가 길이 악도(惡道)에 떨어지는 후회막급의 누를범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마명보살이나 용수보살이 이미 다 조사이면서도 분명히 말씀하여 왕생하는 길을 간절히 권했거늘, 나는 어떤 사람이라고 왕생을 부정하겠는가?" "나무아미타불" 여섯 자 법문은 윤회를 벗어나는 지름길이다라는 확신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마음으로는 부처님의 세계를 생각하여 잊지 말고, 입으로는 부처님의 명호를 똑똑히 불러 산란하지 않아야 하며, 이와같이 마음과 입이 서로 합치되는 것이 염불(念佛)인 것입니다.
요즘처럼 갑자기 한강다리가 무너져 내리지를 않는가, 무슨 암이다, 무슨 병이다 하면서 온전히 죽음을 맞이하기도 어려운 요즘 세상인데다, 이처럼 살아가기 어려운 시기에 돈 없고 빽 없고 가진 것 없는 우리는 기도라도 열심히 하는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 우리는 불보살의 가피만이 아니라, 비록 몸뚱이는 없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해도, 몸뚱이의 주인공이자 이 몸들의 운전수였던 영혼만을 가지고 있는 선망조상들을 위해 음덕이라도 지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세속에서는 기제사 이외에 제사를 지나버린 여러 조상님들을 사당에서 한번으로 지내드리는 시제가 있듯이 혼자서 집안에 조상천도제를 크게 해드리기에는 경제적으로 힘에 부치기로 십시일반으로 여러 동참신도들끼리 모여 삼년 전부터 해왔던 합동천도제를 양력10월 22일(음력9월 9일)에 하고자 합니다.
모든 일이 삼세번이라 했고, 삼년 탈상을 하듯이 금년까지 해드리는 것이 뿌린대로 거두고 심은대로 싹이 나는 것은 자연의 이치고 인과의 법리인 것입니다.
비용은 경제가 어려우므로 3십 만원으로 합니다.
그런데, 예전처럼 외부스님들을 모시고 하자니 경비가 너무 많이 들어 저 혼자서 기도를 하고 22일에 천도제를 하게됩니다.
많은 동참을 바랍니다.
“밀린다 왕이 나가세나 비구에게 부처만 믿으면 극락에 간다는데 사실인가? 하고 물었을 때, 나가세나 비구스님은 들고있던 찻잔을 왕궁의 연못에 던져버리자, 찻잔은 연못바닥으로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밀린다왕이 괴이여겨 그 이유를 묻자 나가세나 스님은 저 찻잔은 연못하나도 건너지 못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배에 싣게 되면 수천수만의 찻잔일지라도 차안에서 피안을 건널 수 있음과 같다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부처님의 지혜의 배에 올라 피안의 세계를 향해야 할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오.
사실은 오늘 이런 날이 여러분에게는 아주 중요하고 소중한 날이건만, 과연 그 의미를 아시는 분이 얼마나 계실런지 싶습니다.
오늘 우리는 가족 법회를 행하면서 기도를 하고 법문을 듣는데 이러한 일련의 의식들이 참으로 중요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
대저 기도라 하는 것의 사전적인 의미는 기념(祈念) 기청(祈請)기원(祈願)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마음으로 소원하는 것을 빌어서 불보살의 가피를 구하는 것으로 흔히들 재앙을 없애며, 질병이 낫기를 비는 등의 현세에 대한 행복을 구하기 위하여 행하는 의식이다, 라고 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기도는 입으로 하는 것이고 이렇게 하기 위하여 공덕을 짓는다거나 선행을 쌓는다고들 하는데 이러한 공덕이나 선행은 몸으로 짓는 것으로 알고들 있습니다.
입으로 하는 것은 구업을 닦는 것이요, 몸으로 하는 것은 신업을 닦는 것이지만, 신업과 구업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이니 신업과 구업은 바로 의업이라는 주인의 뜻에 따를 뿐이고 바로 이 의업이 다겁생래를 거쳐 지금의 나를 존재하게 했던 인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는데 종류도 많습니다.
사경기도, 절기도, 염불기도, 무슨무슨 기도 등이 있고 여기에 관음기도가 좋다드라 하면 우르르 관음기도하러 몰려들고, 어디 지장기도처가 좋다드라 하면 지장기도하러 우르르 몰려드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은 모두가 중생들의 혹하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미혹한 중생심에서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기도 중에 가장 수승한 기도는 염불기도요, 수행 중에 가장 수승한 수행은 염불수행인 것입니다.
다만, 맨 처음 시작할 때, 발원을 어찌 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수행을 시작하던, 어떤 기도를 시작하던 간에 맨 처음에 자신의 내면에 대고 스스로 다짐을 하고 불보살님을 향해 간절한 발원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 발원은 현실의 어려움으로 인해 힘들고 괴롭기때문에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현세의 복도 중요하지만, 자칫하면 현세복 만을 쫓아가는 기복으로 떨어질 염려가 있기에 위험한 것입니다.
문제는 나에게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에 대한 왜? 를 생각해보는 지혜가 생겨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저는 기도를 하는 중간 중간 출가 전에 철들면서 알게 모르게 지었던 업들이나, 추억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속세에 살 때 아버님 따라 낚시질 다녔던 그런 업, 철모를 때 남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던 그런 생각이 떠오를라 치면 바로 참회의 발원을 하고 상대를 향해 기도공덕을 회향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인으로 인한 과는 소멸이 될지 어떨지 모르나,(불매, 불낙인과의 전백장과 후백장고사) 내 마음에서 진실한 참회를 통해 몸과 마음이 한결 가쁜 해짐이 느껴집니다.
이렇게 기도 중간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잡념으로 여기지 마시고 그 순간에 대상을 향해 바로 참회의 마음을 일으키고 오늘 기도의 공덕을 그 대상에게 집중하여 참회를 해보십시오.
지금 여러분을 힘들게 하는 것은 바로 알게 모르게 다겁생래에 지어온 업들이라는 인이 씨앗이 되고 과가 되어 바로 여러분의 삶에 걸림돌로 나타난 현상일 뿐인 것입니다.
때문에, 여러분께서 기도를 하실 때 발원을 어떻게 하시느냐? 발원 중에 가장 수승한 발원은 바로 여러분 자신들이 다겁생래에 어떤 이름, 어떤 모습으로 살았던 내가 살기위해 저질러온 온갖 업을 소멸하는 “업장소멸” 발원이 가장 크고 무겁고, 힘들고 어려운 발원이기에 그 발원에는 마장도 많고 기도수행에 힘이 들지만, 성취에 다달으면 일체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모든 것이 생각만 해도 이루어지고 하루하루가 참으로 즐거워지는 것입니다.
그럼 염불은 무엇인가? 싶다면 염불은 열가지 念佛, 念法, 念衆(僧), 念戒, 念施, 念天, 念休息, 念安般, 念身, 念死.십념 중의 하나로 십념 중에 으뜸인데, 염불이란 부처님의 상호를 관찰하면서 그 공덕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염불공덕에서, 공덕의 의미는 범어로 구나(求那 / Guna)라는 뜻인데 좋은 일을 쌓은 공과 불도를 수행한 덕을 이르는 말이나, 공덕을 해석하는데는 여러의미가 있어, 복덕과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하고, 善을 행하는 이를 도와 복되게 함으로 복이라 하고 복의 덕이므로 복덕이라 한다고 하지만, 공은 베푸는 것을 뜻하고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을 덕이라고도 합니다.
이렇듯 힘들이는 것을 힘쓸 공자를 써서 공덕이라 하고 이 힘든 씨앗을 뿌림으로써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을 덕이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께서 힘들여 절을 하고 여러 가지 기도를 하는 자체가 공인 것이요, 그럼으로 여러분께 자연스레 돌아 오는 덕이 있으니 이를 공덕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덕 중에 가장 뛰어나고 효과 있는 공이 있으니 염불이요, 이로써 생기는 공덕이 있으니 바로 염불공덕인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자신의 업장을 소멸하는 원을 세우고 기도를 하는 것이 가장 수승한 것입니다.
업이 소멸되기 시작하면 자신의 주변에 모든 일들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되기까지 오는 온갖 마장들을 이겨내야만하는 의지가 필요한 것이고 거기서 져버린다면 어쩔 수 없이 윤회와 업의 회오리에서 지금 이 순간에 떨어져 삶을 생활하는 우리의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해 낼 것이냐, 못 해낼 것이냐, 는 바로 자신에게 달려 있는 일이긴 하나, 약해지는 자신에게, 지쳐가는 자신에게, 힘을 주고 함께 해주고, 나누면 작아지고 적어지게 할 수 있는 도반이 필요한 것이고 스승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드리기 위해 바로 오늘 우리절에 모여 함께 기도를 하고 다라니 염불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오.
오늘은 일요 가족법회 날이면서 양평 노인 병원의 원장님 내외분께서 병원에 입원하셨다 저세상으로 가신 노인 분들을 위해 가족들이나 자식들과는 상관없이 3일간의 천도기도를 올려 오늘 회향하는 날입니다.
“자작자수”라 자기 스스로 짓고 자기 스스로 받는다는 뜻인데, 끝없는 윤회의 삶에서 우리는 이 한생의 농사를 어떻게 지어 가고 있는가를 한번쯤 점검해볼 이유는 있다고 봅니다.
왜냐, 금생의 씨뿌리는 이 행위에 의해 다음생이 결정되는 인을 짓기 때문인 것입니다.
대저, 구두쇠라 함은 이미 자신은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뿐 만이 아닌 남에게 베풀지 않은 사람을 일컬어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 자리의 우리를 비롯하여 사람들 모두가 구두쇠일 것입니다.
사람마다 스스로 이미 한없는 지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지혜를 쓰는데 인색한 구두쇠이고 스스로 이미 한없는 슬기로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슬기로움을 쓰는데 인색한 구두쇠이며 모두가 이미 한없는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사랑을 쓰는데 인색한 구두쇠이고 스스로 이미 한없는 이해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해심을 쓰는데 인색한 구두쇠일 것입니다.
물질 만을 중하게 여기는 물질적인 구두쇠도 지양해야 할 일이지만, 나보다는 남이 먼저 이해하기를 바라고 먼저 마음을 쓰기를 바라는 정신적인 구두쇠 역시 지양해야 할 일입니다.
신에게 능력을 바라고, 부처에게 자비를 바라며, 주변의 모든 이들에게 나보다는 네가 먼저해주기를 바라는 구두쇠 마음, 이제 해도 바뀌었는데 바꿔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씨를 뿌리는 농사꾼이 되시어 스스로의 복 밭은 스스로가 씨뿌리고 온갖 번뇌와 잡념과 욕심의 잡초를 제거하실 때, 여러분은 이미 충분히 부자가 될 수 있는 터전을 일군 것일 것입니다.
욕지 전생사이면 금생수자시오. 욕지 내생사이면 금생작자시라. 욕지 노년사이면 초년작자시일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오.
인생은 혼자라는 말밖엔/조병화
나보다 더 외로운 사람에게 외롭단 편지를 보내는 것은
사치스러운 심사라고 생각하겠지요
나보다 더 쓸쓸한 사람에게 쓸쓸하다는 시를 보내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리고 나보다 더 그리운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그립다는 사연을 엮어서 보내는 것은
인생을 아직 모르는 철없는 짓이라 생각하겠지요
아, 나는 아직 당신에게는 나의 말을 전할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그저 인생은 혼자라는 말밖엔 . . .
01.Songbird - Steve Raiman
02.Eros - Chris Spheeris
03.Movie Medley - Steve Barakatt
04.Wintersun - Bond
05.Romance - John Williams
06.The Music Played - Claude Ciari
07.Alcatraz - Cusco
08.To The Children - Denean
09.Armenian Song - Kheops
10.Angel Eyes - Jim Brickman
11.Variations on The Kanon By
Pachelbel - George Winston
12.To a Secret Place - Alison Hood
13.Moon River - Simund Gor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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