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극락을 가고자 하는가? (염불수행에 대해서 )

2010. 2. 7. 23:2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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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보고 말해 볼까요. 
                



 




 

그대 극락을 가고자 하는가? 

             염불 수행의  의미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해보겠다는 의욕만큼 실제수행(修行)이 쉬운 것은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신심(信心)과 보리심이 무엇이며, 수행자의 자세와 수행 간 주의사항, 계율수행, 참선수행, 염불과 진언 등 여러 수행법의 원리와 그 실천방법 등을 이해한다면 더욱 알찬 수행생활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여기에 대해서 전해드릴까 합니다.

먼저, 염불(念佛)이란 부처님의 명호(名號)를 소리내어 부르거나 상호를 관상하고 공덕을 의념 함으로써 부처를 보고 부처를 이루며 불국토에 왕생하는 수행법입니다.


염불은 지금까지 행해지고 있는 수행법으로 가장 대중적으로 행해지는 수행법 중의 하나입니다.

특히 정토불교에서는 염불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수행체계와 방법을 세워 발전시켰으므로 요즘은 염불하면 극락왕생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정토신앙은 한마디로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지하여 극락정토에 왕생하고자 하는 것으로, 극락정토는 아미타불이 교주(불)이고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좌우 보처보살로 아미타불을 주로 하고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보조적인 염불로 합니다.


이러한 정토신앙에 근거한 염불 외에도 독자적인 관음신앙과 지장신앙에 기반한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 염불이 많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염불이 불보살의 본원력에 의지하므로 타력신앙이라고 생각되지만 자력이 없는 타력은 결코 있을 수 없으므로 자력과 타력이 동시에 갖추어지는 수행인 것입니다.


더구나 정토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단순히 정토에 나겠다는 생각만으로는 정토에 날 수 없으며 보리심을 발하고 일심으로 염불수행을 닦아야 합니다.


정토가 서쪽으로 십만억 밖에 있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부처와는 그만큼 거리가 있다는 것으로 실제로는 십선(十善)과 팔정도(八正道)를 닦으면 십악은 사라지고 십선이 자리하게 될 때,십만억이라는 그 거리는 바로 사라지고 곧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서방극락정토에 계신다는 아미타 부처님도 바로 우리 마음의 바탕으로서 우리 마음이 청정해지면 무량한 광명이 이 마음으로부터 밝게 빛날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믿음으로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염불수행의 역사는 어떨까요.

염불의 역사는 부처님 당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함경에 보면 삼념, 오념, 육념, 10념 등의 염법이 있는데, 즉, 염불(念佛), 염법(念法), 염승(念僧), 염계, 염시(念施), 염천, 염휴식, 염안반, 염신, 염사(念死)의 수행법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며(여래 10호), 나무불을 표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승단을 생각하는 삼염법, 부처님의 계율과 가장 깨끗하며 선한 공덕이 있는 하늘을 생각하는 오념법, 여기에 보시를 생각하는 것이 더해진 육수념이 있습니다.

그리고 육수념에 마음의 조용함을 염하는 염휴식, 출입하는 숨을 세고 장단 등을 아는 염안반, 이 몸은 항상 하지않음을 생각하는 염신, 이 몸은 결국 죽는다는 염사 등을 더하여 십념(十念)이 됐던 것입니다.


염불이 지금처럼 중요한 수행법의 하나로 자리하게 된 것은 역시 정토신앙과 관련이 깊습니다.


정토신앙은 부처님의 본원에 의지하여 정토에 왕생하고자 하는 신앙으로, 정토왕생의 방법으로 염불이 권장되기 때문입니다. 

정토신앙은 기원 후 1-2세기에 걸쳐 대승불교 운동과 함께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고, 이후 정토신앙은 인도에서 서역과 중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와 일본으로 전해진 것입니다.


마명보살의 기신론,용수보살의 십주비바사론과 지도론, 세친보살의 정토론 등에서도 염불은 부처님의 무량공덕과 근본 서원을 확신하는 수행이기 때문에 불보살과 감응하고 불보살의 가피를 입어, 마치 순풍에 돛단배와 같이 수행하기 쉽고 성불(成佛)하기 쉬운 이른바,이왕이수의 수행법임을 찬양하였습니다.


중국에서는 혜원, 담란, 지의, 도작, 선도, 자민, 지례, 주굉 등으로 이어지면서 다양한 논의와 주장들이 있었으며 다른 종파와 결합하여 쌍수(雙手)하는 모습으로 정착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부터 정토신앙이 대중 속에 뿌리내렸습니다. 


원효, 자장, 의상스님 등 신라의 대표적인 스님들은

물론이고 많은 학승들에 의해 정토삼부경에 대한

번역과 각종 주석서가 집필되어 정토교학에 대한

연구가 매우 활발하였습니다. 

고려시대에도 대각, 보조, 태고, 나옹스님들에 의해

선종을 위시하여 화엄, 법상, 천태, 밀교 등의 각 종파에서 폭넓게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독자적인 종파로는 성립하지 못하였고, 조선시대에 함허, 서산, 사명대사 등이 선과 염불을 융합한 선정일치의 견지에서 염불을 역설하여 지금도 염불은 승속을 막론하고 가장 대중적인 수행법

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예로 보면 금강산 건봉사에서 발징화상(發徵和尙)에 의해 창도된 만일염불회가 있습니다.

만일염불회의 동참대중은 승려 31인, 신도 1,828인이었으며, 신라 경덕왕 17년(758)에 극락왕생을 발원하고 만일(萬日) 염불정진을 시작, 29년만인 병인년(786)에 만일(萬日)이 되었는데, 그 날 금빛 찬한 아미타불이 현신(現身)하여 염불대중을 차례로 극락으로 인도하였음을 삼국유사는 전하고 있습니다.


금강산 건봉사의 염불만일회를 기점으로 하여 그후, 한국의 대소사찰에는 염불당이 들어서고 만일회의 염불결사운동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던것입니

다.


현풍 도성암에서는 1624년 성범(成梵)화상의 주도

로 일만 팔천일 염불회가 개설되기도 하였습니다.


근래에 들어 염불에 대한 불교인들의 관심이 커지

면서 만일염불결사가 새롭게 계승되고 있습니다.


염불수행의 의의

부처님을 마음 속에 모시고 잠시라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 바로 염불이니, 생각이 곧 부처의 생각이요, 말이 곧 부처의 말이며, 행동이 곧 부처의 행동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이 염불하는 자의 모습이 당연히 부처를 닮아 갈 것이므로 성불하기 위한 방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수행의 문이 여럿이나 궁극적 경지는 하나이며 그렇기 때문에 어느 문으로든 자신에게 적합한 것을 택법하여 여일하게 해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염불은 누구나 쉽게 행할 수 있고 또 쉽게 증득할 수 있기 때문에 예로부터 재가불자에게, 하근기 중생에게, 말세 중생에게 특히 권해졌던 것입니다.


염불에서는 거창한 이론이나 복잡한 절차도 없이 무조건 부처님의 명호를 불러라고 말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염불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중생심이 조금씩 사그라지고 그렇게 하는 사이에 어느 순간에 이르러 염불삼매가 되면 망심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서 자성불(自成佛)이 드러나게 됩니다.


또한 비록 염불삼매를 이루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공덕은 결코 헛되지 않으니, 언젠가는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어떤 수행보다 쉽게 할 수 있으면서 공덕이 크고 부작용이 없으니 말세중생에게 권하는 것입니다.

염불수행의 원리

염불은 자신의 본성이 부처임을 믿고 자기 마음 가운데서 부처를 찾는 것입니다.

이것은 염불뿐만 아니라 불교의 모든 수행의 목표이기도 하지만, 그런데도 염불이 탁월한 점은 이행도(易行道)에 있습니다. 


이행도란 실행하기 쉽고 증득하기 쉽다는 뜻으로 염불을 통해 소원이 성취되고 장애가 사라지며 나아가 무생법인 (無生法忍)을 얻고, 극락왕생하며 성불(成佛)하는 원리는 불보살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자비심과 우리가 불보살님을 그리는 마음이 존재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리가 마음을 다해 그분을 만나고자 하면 곧 우리 앞에 나타나실 것입니다.

다만 찾고 나면 우리의 근본성품이 곧 아미타 부처님과 다르지 않았음을 알게 될 것이다. 한 치의 간격도 없이 중생심이 머물던 바로 그 자리가 법신, 보신, 화신의 체성(體性)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정토신앙과 염불수행

정토(淨土)란 한마디로 성불(成佛)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이 잘 갖추어져 있는 곳으로 그곳에 태어난다면 성불(成佛)이 보장되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불자들은 천상(天上)에 나기를 바라기보다 정토(淨土)에 왕생하여 윤회로부터 해탈하고 부처를 이루기를 원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이용하는 방편이 염불수행인 것입니다.

염불수행을 하면 부처님의 광명으로 아무리 두터운 무명업장도 무너져 내리게 되여 이렇게 나의 본래 면목을 발견하게 되면 정토에 왕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염불수행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미타정토신앙과 연관된 몇가지 필요한 사항들을 살펴본다면,


1) 신(信)

모든 수행에 있어 가장 근본은 발보리심과 신심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정토불교에서도 마찬가지로, 정토불교에서는 수행의 기본 요건으로 신(信), 원(願), 행(行)의 3자량(自量)을 가장 중요시합니다.


① 신이란 아미타불과 극락정토의 실존을 믿는 것

   이고,

② 그곳에 가겠다는 원을 세우는 것이며,

③ 실천으로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신의 본성이 곧 부처임을 믿는 것이고, 염불을 통해 그것을 발견할 수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정토왕생을 위해서는 신, 원, 행의 삼자량이 필요하며, 그 중에서도 신이 기본입니다.


따라서 처음의 믿음이 중요하고 다음으로 발심이 중요하며, 마지막으로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는 실천이 필요한 것입니다.


염불하는 뜻을 나누면,

둘로 나누어  念을 心念과 口稱으로나누어 念은 마음으로 생각하고 입으로 부르는데 통하므로,

 

관념염불 : 아미타불을 관찰하며 마음으로 생각하

               는 것으로 관념하는 뜻으로 해석하여 부

               처님을 관찰 억념하는 것.


구칭염불 : 칭념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부처님의 명

              호를 부르는 것을 말합니다.


佛은 佛像과 佛體와 佛名에 통함으로 4가지 염불법으로 나뉘어, 


4種念佛이라하여 ㉠ 稱名念佛 ㉡ 觀像念佛 ㉢觀想

                          念佛 ㉣ 實相念佛로 나뉘는데,

稱念은 : 입으로 불명을 외우면서 마음으로 부처님

           을 생각하는 것을 말하고,

稱名은 : 단순히 입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

           으로,

稱名念佛 : 단순히 입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으로

 觀像念佛 : 부처님의 불상의 형상을 관념함으로 觀

               像念佛.

觀想念佛 : 부처님의 상호와 공덕을 觀하여 생각하

              는 念佛

實相念佛 : 자신과 일체만유의 진실한 자성인 법신

              을 관하는 것을 실상염불이라 합니다.

 

염불을 해석하면 : 念은 마음으로 생각하고 입으로 부르는데 통하고, 佛은 불상과 불체와 불명에 통하므로 4가지로 나뉘지만, 稱名염불은 불명을 부르는 稱念의 염불을 말하고 여기에 定心念佛과 散心念佛이 있고 소리의 크고 작음으로 大念念佛小念念佛로 나누어지고, 또 한 부처님의 명호만을 칭념하는 稱名定行( 왕생정토하려는 사람의 바른 행업)과 여러 부처님의 명호를 일컫는 稱名雜行의 두가지가 있답니다. 


오종정행 : 오정행이라고도 하는데, 정토에 왕생하

               는데 필요한 다섯가지의 바른 행업으로 ①讀誦 ②觀察 ③禮拜 ④稱名 ⑤讚歎供養의 다섯가

 지인 것입니다.


※ 참고 :

팔정도(八正道): 열반으로 이끌어 주는 여덟 가지

의 바른 길. 정견(正見) 즉 바른 견해, 정사(正思)

즉 바른 사유, 정정진(正精進) 즉 바른 노력, 정념

(正念) 즉 바른 기억, 정어(正語) 즉 바른 말, 정업

(正業) 즉 바른 행위, 정명(正命) 즉 바른 생활, 정

정(正定) 즉 바른 명상 등을 말합니다.

이행도(易行道): 행하기 쉽고 깨닫는 경계에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교법(敎法)으로, 용수보살이 지은

십주비바사론 이행품에 제불보살의 명호를 일컫는

것으로 이행(易行)의 도라 한데서 비롯되었으며 뒤

에 정토교에서 아미타불의 타력본원에 의지하는 것

을 이행도라 하였습니다.

무생법인(無生法忍): 불생불멸하여 극락세계에 왕

                            생하기로 결정된 것을 믿어

                           의심치 않음을 말합니다.

 

       너무 좋은 글이 있어 함께 올립니다.

부처는 복을 주지 않는다.

다만, 복을 구하는 길을 제시할 뿐이다.

행복을 바란다고 행복이 주어지진 않는다.

부처는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 할 뿐이다.

행함도 없이 떡이 생기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목마른 자는 스스로 우물을 파서 그 물을 마셔야만 한다.

스스로의 복은 스스로 복밭을 일궈 가꾸어가야만 한다.

부처님 말씀(진리)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할때 복은 저절로 굴러온다.


부처님은 복을 주지 않는다.

다만 겸손한 마음으로 간절히 바램 할 때 원하는 그 길을 밝힐 뿐이다.

깨달음을 원하는 이에겐 깨달음을, 업장소멸을 원하는 이에겐 업장소멸에 이르는 이정표가 되어질 뿐이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 세상부귀영화를 다 주어 행복하게 하고 싶지만 그 행복을 찾는 건 자식의 몫이다.

부처님 또한 이와 다를게 없다.

품안에 깃든 삼라만상이 공존속에 평화롭기를 바라지만 그 행복은 스스로 찾아 가꾸어나가야 한다 부모가 돌아온 탕아를 더 큰 사랑으로 품에 안듯 부처님 또한 잘못 살아온 삶을 진심으로 참회하고 불법 안에 살아갈 때 더 큰 사랑으로 거두리라.

성불하십시요. 그리고 건강이 제일입니다.^^!

지금 실물경제는 바닥이라고 하면서도 휴가를 안 가고는 배겨나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그만큼 우리네 삶의 질이 높아진 면도 있겠으나, 남들 다가는 휴가에 우리는 왜 안가냐는 가족들의 등쌀도 있었을 것이고, 복잡한 일상을 벗어나 재충전을 위한 시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허나, 이렇게 산사에 오시어 시원한 계곡에 발도 담궈보시고 법당에 참배와 더불어 법회에 참석하시어 보심도 좋을 거라 싶습니다.


각설하고, 우리가 적어도 불교라는 한 종교를 선택하여 신앙행위를 함으로써 자신의 삶에 의지처가 되고자 한다면 먼저 부처님께서 살아생전에 우리에게 남기셨던 말씀들을 정리해보고 말세 중생인 우리들에게 전해주려 하셨던 참다운 가르침을 찾아가보는 여행도 의미와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빌어,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 몸으로 수행을 이루어 완전한 인격자가 되셨으며, 그 삶은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살다, 길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인간으로서 생멸의 길을 보여주셨고, “너희도 내가 행한 수행을 실천한다면 부처를 이루리라” 하셨던 가르침, 이 세상 종교의 어느 교조가 일반 범부중생들에게 동등한 자격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주신분이 계시겠습니까?


우리는 부처님께서 일생동안 남기셨던 말씀들을 요약하여 골수만을 신앙심의 뼈대로 정리하여 두었을 때, 불자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며, 혼탁한 현실의 오탁악세에서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 까지도 무명에 빠져 떠밀려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삶으로부터 지혜로운 광명의 빛을 찾아 살아갈 수 있는 참다운 정신적인 의지처이자 불교라는 신앙행위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여, 부처님께서 남기셨던 일대사의 가르침들을 다섯단락으로 나누어보면,


첫째로 화엄시라 하여, 세존께서 성도하신 후, 그동안의 힘겨웠던 수행의 완성을 사흘 동안 홀로 즐기시다 홀연히 밤하늘을 올려다보시고 우주법계의 대 파노라마를 관하시고 21일 동안 중중무진의 화엄법계를 노래하신 게송이 바로 화엄경이셨던 것입니다.


둘째로아함시라 하여, 세존께서 우주법계에 대한 말씀을 홀로 설하시다, 이를 중생들이 알아들을 수 없음을 깨닫고 중생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12년간을 녹야원에서 법을 설하셨으니 이때 설해진 아함부가 후대에는 남전 북전으로 나뉘어져 현재 우리가 아는 장아함과 잡아함, 증아함과 증일아함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화엄경, 반야경, 법화경, 열반경등의 4부 경전을 제외한 모든 경전을 방등부경 이라하며 이때를 방등시라 하여, 녹야원에서 아함을 설하신 후, 8년 동안 지금의 우리가 아는 유마경, 금광명경, 능가경, 승만경, 무량수경 등의 방등부의 여러경전을 설하셨던 것입니다.


네 번째로 반야시라 하여, 22년 동안 600부가 되는 반야부의 경전을 설하시어 아집과 집착과 애욕과 질투와 증오와 미움과 신기루 같은 허상과 욕구에 휘둘리며 온갖 번뇌와 무명 속에 허덕이는 중생들에게 참답고 지혜롭게 살아가는 무상의 아뇩다라 샴먁삼보리의 길을 일러주셨던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 법화열반시라 하여, 최후의 8년간을 당신의 삶을 마무리하고자 하셨던지, 말세 중생들에게 참다운 보살은 오탁악세에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위해 법화경을 설하시고 입멸을 앞두시고 열반경을 설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계종의 소의경전이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지혜로운 삶의 비젼을 제시해주고 있는 금강경은 어떠한 경인가? 알아보겠습니다.


금강경은 반야부에 속해있는 경으로 대반야경중 제577부 째 해당되는 능단금강분, 분량 300송 32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금강경의 한역본은 6가지가 있는데 가장 먼저 번역된 번역본은 경, 율, 론의 삼장에 통달하신 구마라습(鳩摩羅什, 343~413)이라는 법사님의 번역본을 위주합니다.  


또, 금강경의 대의를 두 가지로 나누어 보면 집착을 깨뜨리고 세가지 공의 이치를 나타내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파이집 현삼공(破二執 現三空)이라하여 아공, 법공(我空, 法空)이라하여 두 가지의 집착을 여의고, 삼륜체공, 삼륜청정이라는 주는 자와 받는 자, 주고받는 시물조차도 존재함이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금강경의 주된 구성은 수보리의 물음에 의해 부처님이 대답하신 질문과 대화의 형식으로 전개되며, 수보리가 부처님께 두 가지의 질문을 한 것은,

“응운하주 운하항복기심(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이러니, 보살은 세존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자 하는 보리심을 일으켰으되 초발심시 변정각이요, 작심삼일이 되지 않도록 즉, 그 마음이 시간이 가도 변하지 않도록 하려면 그 마음을 어디에 머무르도록 하며, 또 일상에 일어나는 온갖 번뇌와 나를 괴롭히는 주변의 번뇌의 씨앗들로부터 어떻게 하면 그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그러한 온갖 번뇌를 이겨나갈 수 있겠습니까?” 하는 질문인 것입니다.


이 질문은 현실을 어지럽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하면 삶의 질곡에서도 흔들림 없는 신앙심과 삶의 올바름을 지켜나갈 수 있는가라는 의미이자, 금강경의 실마리를 푸는 말로 어떤 자세로 수행에 임하느냐하는 주(住)와 수(修)가 합해진 물음으로 보살의 생활과 수행과 마음가짐에 대해 묻는 것인 것입니다. 


이에 대한 부처님 말씀은 딱 한마디로 요약됩니다.   바로 “ 무 집착 ”


그러나, 없는 것은 무능력이지 무소유는 아닌 것입니다.

진정한 무소유는 재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나, 자신의 재력에 대해 일체의 집착이나 애착이 없이 고통받고 힘든 이들에게 베풀어 줄 수 있고 나눌 수 있는 마음이 진정한 무소유인 것이지 없는 것은 무소유가 아니라 무능력일 것입니다.

허나, 그 소유에도 삼륜청정의 원칙은 존재하는 것입니다.


금강경은 중국선종의 5조홍인과 6조혜능 대사가 중요시 했던 경으로, 금강경의 사구게 중에 가장 유명한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 비상 즉견여래”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 하여, “무릇 존재하는 일체의 모든 것은 영원함이 없이 모두가 잠시 존재하다 사라지는 허망한 것이다. 만약 이렇게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가치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곧 여래를 보리라.” 하셨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소유권이라는 것. 소위 등기문서이니 내 것이니 네 것이니 하는 삶에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그 모든 것들이 죽을 때는 다 놓아두고 가야하는 것이니  어찌 소유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모든 것들은 살아생전에 일시 점유하다 갈 뿐이니 선인들이 들려주는 말은 이 모든 것들을 잠시 빌려 쓰다 가는 것 뿐 이라는 가르침들을 해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삶의 정곡을 깨닫게 된 사람에게 어찌 착심으로 인한 괴로움으로 농락당함이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부처님께서 남겨두셨던 佛說의 다섯단락을 새겨 아! 이 경은 부처님께서 언제 남기셨던 경이로구나.

하는 경전에 대한 근거를 알아둠도 신행생활에 더욱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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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마주할 시간이 도래합니다.


                                          성재 서상민




발길을 헛걸음질 한 사실은
손을 내밀지 못한 2%의 못남 때문입니다.
도달하지 못한다면
마주한 것이 아닙니다.

눈길로 하늘을 지켜보고
백날을 셈한다해도
오매불망하는 마음이 당신께 전달되지 않는 것은
마주 못하는 두려움의 뿌리가 원인입니다.

행동할 때
용기가 나타납니다.
용기를 가질 때
희망이 생겨납니다.

이제 마주할 시간이
도래합니다.
뒤에 물러서서
주저할 만한 시간이 벌루 남아 있지 않습니다.

봄을 기다림해서는 아니됩니다.
겨울이 추운 건
난로같은 따뜻한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겨울에 피는 꽃이 진짜 꽃입니다.

냉장고에 갇힌 냉동식품처럼 움추리고
꼼짝하지 아니할 때
시베리아 벌판을 걸어 가는 용기에서
희망의 꽃이 피어납니다.

삶은 자기개발입니다.
삶의 진짜 모습은 우연을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필연입니다.
저기 자신이 만들어 갖는 것이 삶의 진실입니다.

하늘보고 말해 볼까요.
"내가 보이냐구요." 아마도 응답이 오지 않을 겁니다.
행동으로 복 받고
그 복으로 또 행동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