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 8. 23:54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 내 안에 무량광명無量光明을 켭시다.』
부처님 오신 날은 비단 불교인만의 축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을 비롯한 다른 동물이나 자연계, 유정무정, 유상무상(有相無相)중생
모두가 존중하고 경축해야 할 축제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탄생하시자마자 누구의 부축도 없이 혼자 걸어서 일곱 발을 가셨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부처님도 사람인데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의심을 품습니다마는,
부처님도 사람인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같은 보통사람은 아닙니다.
과거전생에 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 즉 무수한 세월동안 닦아 오신 것입니다.
대도(大道)를 통하기 위해서 진리를 얻기 위해서,
더러는 소중한 눈(目)도 (바라는 사람이 있으면) 빼서 보시하고,
더러는 자기 몸을 몽땅 주린 범에게 바치기도 하고
또는 설산동자로 계실 때는 망설임도 없이 자기 몸까지도 회한 없이
나찰귀신에게 바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하신 분이기 때문에 금생에 태어나실 때도 부모님이 칠세청정(七世淸淨)이라,
청정한 부모를 골라서 태어나셨습니다.
우리 불자님들도 잘 아시는 일입니다마는
위대한 인물들은 부모가 위대해야 혈통적으로 위대한 인재가 태어날 수 있습니다.
이른바 쉬운 말로 용생용(龍生龍)이요, 봉생봉(鳳生鳳)이라,
용이 용을 낳고 봉이 봉을 낳는 것이지 봉황새가 용을 낳거나
용이 봉황새를 낳을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할 때 가정적으로 자녀들 교육에 있어서나 여러 문제에 있어서도
부모님의 혈통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부처님은 그와 같이 과거 숙세에 많이 닦아 오신 분이지만
금생에도 그냥 쉽게 대도를 성취하신 분이 아닙니다.
보통 세간적인 시험 같은 것도 합격을 위해서는
가지가지 난행(難行) 고행(苦行)이 필요합니다.
하물며 위없는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이루기 위해서는,
만중생이 거기에 의지하고 인생의 모든 고난을 없앨 수 있는 대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부처님은 과거 전생에 닦아오셨지만 금생도 육년 고행이라,
육년 동안 스승들을 찾아서 고생을 많이 하시고 또한 수도를 많이 하셨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중요한 것은 예를 들면 맨 처음에는 발가바(跋伽婆)선인 을 만났는데
발가바선인은 고행외도(苦行外道)입니다.
그러나 고행외도도 아무런 원칙도 없이, 목표도 없이 고행을 한 것은 아닙니다.
먹을 것 다 먹고 몸뚱이가 하자는 대로 다 한다면 진리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고행이라는 것은 우리 욕망을 절제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나 현재나 어느 시대나 수행생활을 통해
인간이 더 높은 차원으로 향상하기 위해서는
자기 욕망을 절제하는 것이 전제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발가바선인한테 가서 고행을 공부하셨단 말입니다.
진리에 대해서 철저한 생각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
고행도 보통 고행이 아니라 정말로 죽음 직전까지 가는 그런 고행을 하셨습니다.
지금 조선당(祖禪堂)에는 부처님 육년 고행상(六年苦行像)을 모시고 있습니다마는
그 고행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야말로 피골(皮骨)이 상접(相接)이라,
뼈만 앙상히 남아있는 해골 같은 모습이 될 때까지 고행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다만 고행으로만 끝나버리고 인간의 욕망을 절제하는 데에만 목적을 둘 뿐
참다운 해탈, 즉 인간의 모든 번뇌와 고난을 다 벗어버리는
숭고한 목적은 별로 없기 때문에 발가바선인을 떠나서
그 당시의 위대한 스승이라 하는 아라라가란 신선 앞에 가서 공부를 하셨습니다.
아라라가란 은 무소유처(無所有處) 공부를 했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생각할 때,
학자들같이 보통 이론적으로 체계를 세우면 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진리라는 것은 이론적으로 체계를 세워서 이해하고 납득한다고 해서
진리공부가 다 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물론 이론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론이라는 것은 우리가 실천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
이론 자체가 참다운 깨달음이 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아라라가란은 명상을 하는 신선인데 무소유처라 하는 것은 상당히 높은 차원입니다.
인간의 욕망을 다 떠나고 이른바 무색계(無色界)라 하는 천상입니다.
우리 중생이 태어나는 세계가 인간적인 세계도 있고 또 천상의 세계도 있고
같은 천상도 욕심을 미처 못 떠난 천상도 있고 욕심을 떠난 색계천상도 있고
또는 물질적인, 물질형태를 떠나버린 무색계 천상도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할 때는 우리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교만심을 품습니다마는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인간도 하나의 우주에 있는 모든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존재 가운데서
하나의 염력인 것이지 인간이 최상의 존재는 절대로 아닙니다.
그래서 아라라가란 한테 가서 무소유처까지 올라가는 참선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부처님께서는
투철한 천재인 동시에 강고한 의지를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오래가지 않아서 신선이 올라간 데까지 다 올라가셨단 말입니다.
이른바 명상공부를 해서 그와 같이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인생의 모든 고난을 해탈해버리는 공부는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도 한계를 느끼고 다시 더 훌륭한 스승이 없는가 하고 찾아 헤맬 때
우다카라는 분을 만났는데 이 분은 아라라가란의 아들로 아버지보다 높은 신선입니다.
그래서 우다카 한테 가서 공부를 하기로 했습니다.
우다카는 어떤 공부를 하는가 하면 이 사람도 신선공부 명상공부인데
우리 중생들이 생사윤회하는 세계 가운데서 최상의 세계가
비상비비상처(非相非非相處)라는 하나의 천상세계입니다.
여기까지 올라가는 명상법을 공부하는 분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거기 가서 그 사람이 시킨 대로 해가지고서
그냥 얼마 안가서 비상비비상처라는 삼계에서 가장 높은 하늘까지 가는
그러한 명상을 충분히 성취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비상비비상처라는 하늘로 올라가는 공부인 것이지
영생해탈의 공부는 못되었습니다.
즉 다시 말하면 거기서 설사 태어난다 하더라도
팔만겁이라는 오랜 동안의 수명을 연장할 수는 있지마는
영원히 죽지 않는 생사를 완전히 떠나버리는 공부는 되지 못했습니다.
부처님은 거기서도
“내가 바라는 것은 인생의 모든 번뇌와 고난을 해탈하는 공부인데
나는 여기서 더 머물 필요가 없구나.”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은 아무리 찾아봐도 스승이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 때 비로소 녹야원 저편에 있는 보리수 밑에 가셔서
오랫동안 명상을 닦아서 대각을 성취하셨습니다.
우리 불자님들이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할 때
훌륭한 부처님 말씀인 경전을 공부하고 배우고 하지마는
그 전부가 다 우리한테 실천적으로 옮겨지지가 않습니다.
왜 그러는가 하면 스스로가 마음을 가다듬어서 마음을 통일시켜서
깊은 삼매라는, 깊은 선정이라는 공부를 우리가 미처 못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비단 불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나 일반 사람들도
학문적으로는 많이 알고 있지마는 그것만으로 얼마만큼 우리 마음이
정화될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금생에 우리가 잘못 산 때뿐만 아니라
과거 무수생 동안 나고 죽으면서 때묻어온 번뇌를 녹이기는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참다운 진리의 핵심내용은 어떠한 것인가,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성불하신 내용은
여러분도 들어서 아시는 바와 같이 연기법(緣起法) 곧 인연법입니다.
인연법이라는 것은 간단한 것이지만
그 가운데 불교의 모든 진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인연법도 단순하게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식의
연기법은 하나의 상식적인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연기법인 것이고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참다운 연기법은 보다 더 심오한,
우주 모두를 다 포함시켜버리는, 해결해버리는 연기법입니다.
그것이 어떤 연기법인가? 명심해서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연기법 가운데에 부처님의 숭고한 가르침이 다 들어있습니다.
부처님의 근본사상인 대승적 연기법은 잘 생각하고 깊이 명심해야
알아들으실 수 있습니다.
연기법은 법계연기(法界緣起), 또는 진여연기(眞如緣起)임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아시겠지마는 진여(眞如)는 참 진(眞)자, 같을 여(如)자입니다.
진리라는 말입니다.
일반 사람은 진리라 하지만 불교에서는 진여라고 합니다.
진여, 또는 진리란 우주의 생명 그대로의 여실하고 참다운 이치란 말입니다.
우주의 참다운 생명인 진여는 그냥 보통 이치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생동하는 생명인 점에서 진여불성,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고도 합니다.
진여는 보통 이치적으로 우주의 원리, 또는 우주의 도리라고도 하지마는
그 진리는 또 하나의 우주생명이기 때문에 불성이라는 말을 합해서
진여불성이라고도 합니다.
연기법 가운데 진여연기는 대승적인 인연법입니다.
그것은 어떤 것인가 하면 우리 중생이 알고 모르고 에 상관없이
진리라는 것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우주는 항시 그 진리,
즉 우주의 원리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창조하거나 또는 누가 우리한테 베풀어서 준 것이 아니라
우주에는 우리가 알고 모르고 에 상관없이,
어떤 성자가 나오시고 안 나오고 에 상관없이
우주의 진리는 항시 우주의 도리 그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런 도리가 진여불성 또는 진여연기의 도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진여연기라는 것은 우주의 근원적인 진리이고
우주의 생명 존재를 그대로 말한 것이기 때문에
어느 것도 진여불성 밖으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나 또는 삼계제천(三界諸天)의 욕계에 있는 천상이나
또는 우주에 충만해 있는 모든 보살들 또는 삼천대천세계에 두루 있는 부처님들도
모두가 다 진여불성 가운데에 들어 있습니다.
진여불성이라는 것은 시간적으로 봐서 한도 끝도 없이 유구한 생명체이고
또는 거기에 들어 있는 공덕상으로 봐서는 만공덕(萬功德)의 자리입니다.
그런 공덕이 들어 있는 자리, 자비로운 기운, 지혜로운 기운,
모두를 알 수 있고 할 수 있는 그런 공덕이 들어 있는 자리가 진여불성자리입니다.
진여불성,
이것은 바로 우주의 생명인 것이고 또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기 때문에
아무리 미세한 것 속에도 다 진여불성이 들어있습니다.
여러분들중에도 법성게(法性偈)를 외시는 분이 계시겠지요.
법성게 가운데는 하나하나의 가운데에 전체가 들어 있고
또는 전체 가운데는 하나가 들어 있어
우주가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어떤 충돌이나 마찰이 없이
모두가 원만하게 갖추어 있습니다.
우리 중생은 겉만 보기 때문에 잘못 느끼지만
근본자리에서 본다면 우주의 생명은 하나의 생명인데
하나의 생명 위에서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천차만별로 모양만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진여불성이라는 그 자리, 그 도리로 본다면
어느 것도 진여불성으로 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또는 곤충이나 병균이나 모두가 다
진여불성으로 돼 있습니다.
진여불성이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가, 그런 차이만 있습니다.
우리가 부처님 공부할 때 참선도 하고 염불도 하고 있습니다.
그 참선과 염불이 우리한테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부처님 법은 덮어놓고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으십니다.
부처님 법은 실제로 우리 몸에나 마음에도 유익하며 재미도 있고
공부를 하면 할수록 깊어지는 것입니다.
진리는 이론적으로만 안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편안하고
또한 만공덕을 갖춘 자리가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진리의 길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면
나아간 만큼 우리 행복도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진여불성은 만중생의 근본자리인 동시에 바로 우리 인간성의 본질입니다.
우리 인간이 고통스러워하는 원인은 자기 정체성, 자기 본질을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자기 본질을 왜 모르는 것인가,
그것은 허망한 것에다 자기를 묶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보고 거기에 매여 버리기 때문에 자
기를 구속시키고 자기 본질도 모르고,
자기 본질을 모르기 때문에 또한 불행하단 말입니다.
가령 우리가 자기 몸만 두고 볼 때도 이 몸뚱이가 개인에게는 중요하지만
사실은 이런 몸뚱이가 있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실이 아닌 몸뚱이 하나를 잘 간수하고 꾸미기 위해서
남과 싸우고 턱없는 욕심을 내고 더러는 남을 죽이기도 합니다.
이런 것이 모두가 자기 몸뚱이 때문입니다.
그러면 자기몸뚱이는 어떠한 것인가.
몸뚱이를 바로 안다면 허망한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서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은
우리 몸뚱이나 눈에 보이는 모두가 다 허망하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 중생은 허망한 것을, 있지 않는 것을 허망한 줄을 모릅니다.
실제로 이 몸뚱이가, 그야말로 자기 금쪽같은 몸뚱이가
과거나 현재는 물론 죽어서까지 이 몸뚱이 그대로 가지고 간다고 몽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만 보더라도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럴 수 없는 문제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우리 중생입니다.
몸뚱이, 이것은 인연생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있는 것같이 보이는 것입니다.
시시각각으로 변해서 지금도 변화하고 있습니다.
우리 몸뚱이나 만유가 다 변화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모두가 실존적으로 있지가 않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부처님 오신 날은 우리가 지혜와 자비의 등을 켜고 경축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부처님께서 우리한테 가르쳐주신 인생의 도리를 알고 밝혀야 합니다.
그런 도리가 바로 참다운 광명이고 등불입니다.
참다운 진리의 빛입니다.
그런 빛을 생각하고 그런 빛을 더욱 빛나게 하면서 등을 밝혀야 공덕이 큰 것입니다.
우리 몸뚱이 이것은 우리 중생이 생각하는 것 같이 있지 않습니다.
무상한 환상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제법공(諸法空)이라, 또는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는 말씀이 불교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은 부처님께서 비유로 말씀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로 비었으니까 비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공이니까 공이라 하신 것입니다.
정말로 공인 것입니다.
여러 불자님들,
집으로 돌아가실 때든지 주무시면서 혹은 불을 켜실 때든지
모두가 비었다는 제법공의 도리를 늘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전체의 뜻이 제법공(諸法空)입니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은 물질이 다 비었다는 것입니다.
내 몸뚱이가 물질이고 사방이 물질인데 물질이 공이라고 하면
우리가 살아야 할 보람이 무엇인가 하시지마는 참으로 물질은 비었습니다.
물질은 실제적으로 고유한 물질이 될 수 없습니다.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지 사실은 있지가 않습니다.
그때그때 순간순간 찰나찰나 변화무상합니다.
자꾸자꾸 이렇게 변화가 되고 바꾸어지는 것을
우리 중생은 그대로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금생에 태어나서 이렇게 온갖 물질에 집착하고
권력이나 재물에 집착하다가 끝나버리면
우리 인생은 금생에 지은 업 따라서 틀림없이 지옥도 가고 축생도 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온다는 것도 참 소중한 것입니다.
몇 만대일 정도로 아주 희귀하게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소중한 인생 가운데서 우리가 그렁저렁 살지 않으려면 말씀 드린 대로
내 몸뚱이도 허망한 것이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실제로 있지가 않다는 것을
알고 느끼고 실천해서 그 자리에 이르셔야 합니다.
지금 철학 가운데서 실존철학이 있는 것은 여러분도 다 아시는 바입니다마는
철학자들도 실존은 무엇인가,
실제로 존재하는 참다운 것이 무엇인가를 평생 공부하고 노력하면서
그 성과를 책으로 펴냅니다.
그러나 사실 이론으로는 깨달을 수 없는 문제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론이란 것은 불교용어로는 간혜지(幹慧地)라,
마를 간(幹)자, 지혜 혜(慧)자, 바싹 마른 지혜란 말입니다.
깊은 명상으로, 선정(禪定)으로 바꾸어져야지, 우리 생각이 변화합니다.
그렇지 않고서 이론적으로는 절대로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생각할 때 우리 불자님들은 지극히 행복스런 분들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 범부의 마음을 바꾸어서 성자가 되는 공부를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자가 되는 불교공부는 지식이 있으면 좋지마는 없다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마음이 있는 존재는 누구나 성자가 될 수 있는 공부가 불교공부입니다.
많이 배워가지고 자꾸만 분별하고 따지고 있으면 마음이 정화가 안 되고
분별 시비 하다가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진여불성으로 해서 이 세상에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진여불성이라는 보배가 우리 마음에는 온전히 들어 있습니다.
진여불성이 들어 있기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아무 것도 없다고 하더라도 서러워할 것이 없습니다.
사실, 무엇이 많이 있으면 진여불성이라는 우리 보배를
닦고 빛나게 할 겨를이 별로 없습니다.
실제로 자기 주변이 간편하고 무엇이 없으면 자기 마음을 닦는 기회가 훨씬 많아집니다.
그래서 그 기회를 갖고자 해서 집을 떠나서 출가도 하고
신부가 되고 수녀가 되는 것입니다.
뜻은 모두가 다 하나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깨달아서 하느님 곁에 가까이 가려고 그와 같이 하는 것입니다.
우리 불교로 말하면 부처님을 깨닫고 하느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느님, 부처님은 표현만 다르지 뜻은 다 똑같습니다.
모두 우주의 참다운 진리란 말입니다.
우주의 참다운 진리를 우리는 바로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간접적으로 누구 중개자가 들어서 깨닫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고 우리 마음이 바로 하느님인지라,
우리가 마음을 닦고 마음 깨달으면 그 속에 부처님 하느님이 다 들어갑니다.
천지우주라는 것은 하나의 진리기 때문에
부처님이나 하느님이나 모두가 다 하나의 진리입니다.
그래서 그와 같이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진여불성 뿐이다, 하나의 진리다,
부처님 자리다, 하느님 자리다, 이렇게 먼저 믿는 것이 대승의 인연법입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불자님들께서는
진여연기란 말을 깊이 잘 새기셔야 합니다.
진여연기는 어느 것보다도 중요한 도리입니다.
우리 인간의 소중한 마음이 바로 진여연기의 도리 속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그마한 티끌 가운데나 자연의 모든 존재 가운데도
진여연기라는 도리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주라는 것은 이것이나 저것이나 하나의 도리로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 가운데 저것이 있고 저것 가운데 이것이 있습니다.
불교의 전문술어로 말하면 입아아입(入我我入)이라, 들 입(入)자 나 아(我)자,
저것?? 나한테 들어있고 또는 아입(我入)이라, 나 아(我)자 들 입(入)자
또 내가 저것 속에 들어 있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진여연기의 높은 도리를 알기 어렵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냥 알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중생은 지금 겉만 보니까 그러는 것이지
성품으로 본다면 사실로 물질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허망한 그림자나 같아서 그런 성품으로 본다면
성품은 모양이 아니어서 바로 그 자리가 참다운 생명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자리는 모양의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이것 가운데 저것이 있고 저것 가운데에 이것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이러한 눈에 안 보이는 도리에 관해서 깊이 명심하셔야 됩니다.
금강경이나 반야심경이나 무슨 경전이나 눈에 안 보이는 성품의 도리를 말씀했습니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모든 눈에 보이는 것은 다 꿈이나 허깨비나 그림자나 같은 것이다,
이렇게 여실히 철저히 봄으로써 비로소 직견여래라, 부처님을 안단 말입니다.
부처님이란 것은 바로 성품을 말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모든 뜻도 모두가 다 그런 뜻인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겉만 보고,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느끼고 집착하니까
하나의 생명을 못 보는 것입니다.
모든 집착을 풀어버리고 살아야지 못 풀면 인생은 고난밖에 안됩니다.
자기 몸밖에 모르고 물질만 생각할 때 그 가운데서 작은 싸움도 큰 전쟁도 일어납니다.
참답게 바른 도리를 안다면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근본적인 성품으로 봐서는 너나 나나 다 하나의 성품인데
어떻게 자기만을 위해서 다른 존재나 다른 사람을 함부로 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고난이나 부조리나 고통은 성품을 잘 몰라서 생깁니다.
즉 겉만 알고 참된 생명의 바른 도리를 몰라서 생깁니다.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특히 불교인들이 할 일은
부처님 가르침 따라서 허망한 것을 허망한 것으로 알고
모두가 인연 따라서 잠시간 있는 것 같이 보이나
‘참말로 있는 것은 진여불성 뿐이다’라고 아셔야 합니다.
진여불성, 이것은 바로 우주생명의 빛입니다.
우주라는 것은 부처님의 빛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공부하시는 나무아미타불은 바로 우주의 생명의 빛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아미타불은 다른 말로 하면 무량광불입니다.
한도 끝도 없는 광명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아미타불은 바로 무량광불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불경에는 ‘아미타불을 부르는 염불수행자는 사람 가운데서 향기로운 꽃이다
(念佛修行者 是人中芬陀利華), 가장 위대한 사람이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생명의 광명인 우주생명인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또는 다른 부처님 이름이나 다 똑같지만
특히 아미타불은 광명의 상징인 생명이란 말입니다.
염불수행자는 그런 향기로운 존재이기 때문에
관세음보살이나 대세지보살이 위기승우(觀音勢至爲其勝友)라,
그 위대한 보살들이 아주 훌륭한 도반으로 안단 말입니다.
벗이 된단 말입니다.
얼마나 그것이 존중스러운 일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보통사람이 벗이 되어도 좋고
공부 잘하고 총명한 사람의 벗이 되어도 축복된 일인데
하물며 대우주의 자비의 상징인 관세음보살이나 우주의 지혜의 상징인 대세지보살이나
그런 대보살들이 우리의 도반이 된다면 우리 인생이 얼마나 축복된 일이겠습니까?
또 능엄경은 참선할 때도 꼭 참고로 해야 할 훌륭한 경전입니다.
이 능엄경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약중생심(若衆生心) 억불염불(憶佛念佛) 현전당래(現前當來) 필정견불(必定見佛)’
이라는 법문이 있습니다.
만약 중생이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 이름(명호)를 왼다면
살아서 현생에라든가 죽은 뒤에라도 틀림없이 부처님을 뵙는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본래 생명은 본래 부처입니다.
부처님은 어디에 있고 어디에 없고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나 우리 몸속에나 우주 가운데 어디에서나
조그마한 티끌 속에도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껍데기, 겉만 보니까 모르는 것인데
그 실상(實相) 성품(性品)으로 본다면 우주는 모두가 다 부처님뿐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이 맑아지고 우리 마음이 보다 더 근원적으로 깊어지면
깊어진 만큼 부처님과 가까이 되는 것입니다.
성인들은 어떠한 사람들인가. 성인은 별종이 아닙니다.
같은 사람인데 마음이 깊어지고 맑아져서 본래의 생명을 깨달은 분이 성인입니다.
따라서 성인은 특별한 사람만 되는 것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성인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금생에 태어난 것은 다른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성인이 되기 위해서 나온 것입니다.
알고 보면 누구나가 꼭 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금생의 목적도 성인이 되는 데에 있습니다.
지위가 높고 돈을 많이 벌고 하는 것은 하나의 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참다운 목적은 인격의 완성입니다.
앞서 능엄경 말씀을 다시 한번 외겠습니다.
약중생심(若衆生心) 억불염불(憶佛念佛)이라,
만약 중생의 마음에 부처님을 기억하고 잊지 않고 염불이나 부처님 이름을 외고 한다면,
현전당래(現前當來) 필정견불(必定見佛)이라,
반드시 부처를 뵙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우리가 어떻게 부처를 뵈올 것인가.
부처님은 하나의 우주의 생명인 동시에 우주의 빛이란 말입니다.
어디에 고유하게 고정되어 계신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공부를 부지런히 하면 틀림없이 부처님의 광명을 훤히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염불하는 가운데도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라,
부처님을 생각하고 생각하고 하다보면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이라,
부처님이 우주의 어디에나 계시는 부처님의 광명이 훤히 보인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미처 성자는 온전히 못 된다 하더라도
정말로 부처님 공부를 많이 한 분들은
그때그때 순간적으로 부처님의 광명을 다 보는 것입니다.
불경 가운데도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이 있습니다.
반주삼매경은 무슨 경인가 하면 부처님이 훤히 자기 앞에 나타나 계시는 경입니다.
우리말로 풀이하면 반주란 것은 인도말인데 음역하면 부처 불(佛)자 설 립(立)자,
부처님이 훤히 나타나 서서 보인단 말입니다.
다만 부처님의 광명만 보일 뿐 아니라 부처님 자리란 만능의 자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정말로 바란다면 신통자재(神通自在)한 자리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모양으로 모두가 보일 수도 있고
부처님이 하나하나 천만 백만 수 십억의 부처님 모양으로도 보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불교는 또는 부처님 진리는 그렇게 신비부사의(神秘不思議)한 것입니다.
우리가 상식으로 생각하는 그런 정도가 아닌 것입니다.
다만 우리 마음이 얕아서 중생들은 없는 것을 억지로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모양이 있는 가운데서는 참다운 행복은 절대로 없습니다.
우리 중생은 그런 것을 전도(顚倒)하고 거꾸로 본단 말입니다.
불교인들은 결단을 내려야 됩니다.
우리가 이론적으로만 이것이다, 저것이다 알아서는
우리한테 행복이 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다운 신앙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매서운 윤리적인 결단을 해서 우리 스스로 깊은 명상에 잠겨야 합니다.
억불염불(憶佛念佛) 현전당래(現前當來) 필정견불(必定見佛)이라,
이것도 그냥 한번 두 번으로 그냥 금생이나 내생으로 해서
부처님을 훤히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렇게 함으로 해서 깊은 명상에 든단 말입니다.
명상에 들어야 금생이나 전생에 지은 번뇌가 녹아서,
녹아지면 맑은 거울에 모양이 제대로 비춰오듯이 비춰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도 역시 꼭 거울이나 똑같습니다.
우리 마음은 지금 때 묻어 있는 것인데 무엇에 때 묻어 있느냐 하면
자기라는 지독스런 관념 때문에 그것이 고집이 되어서
지나친 이익도 생각하고 폭력도 휘두르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부처님 오신 날 여러 불자님들과 만나게 되어서 대단히 행복스럽게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가물다가 감로수같은 비가 와서 천지은혜에 대해서 감사를 느끼고,
부처님 오신 날의 축제를 불자님들과 함께 맞게 되어서 행복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는 부처님 공부는 절대로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우주의 도리 그대로 따르는 것이 불법이고
그대로 따른다는 것은 우주의 실상이 바로 부처님이기 때문에
부처님 명호(名號)를 부르고 외는 것을 끊임없이 지속시켜야 합니다.
부처님을 부르는 것을 지속시켜야
이른바 삼매가 되어서 명상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삼매란 명상입니다.
명상은 아무 것이나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명상은 부처님을 명상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실상인 모든 존재의 근원자리인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같이 훌륭한 명상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다른 방법으로 명상을 하시더라도 그 근원은 모두가 다 부처님이다,
이렇게 부처님을 명상의 근원자리에다 모시고서 명상을 하셔야
명상도 잘 되고 그래야 해탈의 길로 연결됩니다.
그렇게 하셔서 우리 스스로가 바꾸어져야 합니다.
우리 범부가 성자의 길로 차근차근 바꾸어져야 됩니다.
그렇게 해야 우리가 금생에 산 보람이 있고
무상대도(無上大道)인 부처님 법을 만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꼭 등을 밝히시면서 우주에 충만한 진리광명
또는 내 마음이 범부의 마음으로부터 부처의 마음으로,
한도 끝도 없는 무량광명으로 옮겨주소서, 하는 간절한 기원을 드리면서
부처님 등을 켜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