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한톨이 일곱근 나간데요 글쎄

2010. 2. 17. 21:0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오매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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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한톨이 일곱근 나간데요 글쎄

 

이전에 곳간 뒤주에 쌀만 그득하면

부러울 것이 없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혹 우리네 어머니들 밥을 지으실라치면

아래는 보리쌀을 놓고 위에는 쌀을 조금 얹어

밥을 지어서 위에 부분은 어른들께 드리고

아래 보리밥과 긁갱이 밥은 어머니와

형제들이 나누어 먹던 시절입니다

 

혹 쌀 한됫박이나 쌀 말이나 팔아 온 날은

하루 종일 먹지 아니 하여도 배가 부르고

뒤주나 쌀 항아리에 쌀이 줄어 갈때마다

마음도 조금씩 타들어 갔지요

 

그렇게 귀하고 값지던 쌀이 어느 사이엔가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는 날이 올줄은

참으로 꿈도 꾸지 못하였는데

 

이 나라 이 땅에서 생산된 쌀조차도

다 소비하지 못하는 시절에

다시 수입 쌀 운운하는 시대를 살아 가니

참으로 천지가 개벽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식사 대사라는 말처럼

아직까지는 먹는 것이 큰 일이기에

여전히 서민들 밥상에는 쌀을 주원료로 하여

내용은 같으면서도 이름만 달리 한 반찬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은 절 소유의 논을 농사지은 분이

쌀 두가마니를 가져 오셨습니다

 

반짝 반짝 빛나는 알곡들을 바라 보면서

천지 자연의 말없으신 은혜와

수고하신 농부의 땀방울이 생각나

감사의 마음으로 불기에 나누어 담아

부처님 전에 올리고

장독대와 주방 싱크대에도 올렸습니다

 

무게로 따진다면 팔십킬로그램 두가마지만

그 안에 담긴 진정한 가치를 논하여 본다면

산수로는 이루 다 헤아릴수 없는

무한의 가치가 담겨 있는 산물입니다

 

흔히 말하기를 쌀 한톨의 무게가

절집에서는 일곱근 나간다고 하거니와

쌀미米자를 나누어 보면 위에 팔

가운데 십 아래 팔 하여

팔십팔이라는 수가 되는데

쌀한톨이 비록 작을지라도 여든 여덟번의

수고와 땀방울과 정성의 손길이 닿고서야

비로소 우리 앞에 온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하는 내용이라 하겠습니다

 

쌀 한톨이 일곱근이면 현대 계량형으로

한근이 육백그람이니 총 4키로 200그람입니다

 

그러니 겉으로 달아 본 무게가 160 킬로일지언정

그 속에 담긴 진정한 무게는 천문학적인 숫자입니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그럽니다

 

배우자로서 그 사람 됨됨이를

알아 보는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가

같이 밥을 먹어 보는 것이라고.

 

같은 밥을 먹어도

밥을 남김없이 깨끗이 먹거나

남기더라도 반찬이 묻은 부분을

걷어 먹고 남기거나

미리 덜어 놓고 먹을줄 아는 사람은

다른 일에 있어서도

크게 실수 하지 않을 사람이라고.

 

평소 마음이 그렇다 보니

같이 밥을 먹다가 상대의 밥그릇을 보고

아니다 싶으면 바로 지적을 하니

처음 그런 일을 겪는 사람들은

조금 어려워 하기도 합니다만

 

밥알 한톨이 수채 구멍에 떨어 져 있으면

제석 천왕이 와서 그것이 다 삭아 없어 질때까지

지켜 보고 있으면서 측은해 한다하니

바쁜 천왕의 직무 유기를 유발하고도

복을 받기를 바라겠습니까

 

교육 가운데 가장 중요한 교육이

바로 밥상에서의 교육이라 생각합니다

 

또 사람들은 살기 위해 먹는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먹기 위해 산다고 하는 것이

정답에 가깝습니다

 

잘 먹으려면 잘 살아야 하고

잘 살려면 잘 먹어야 하는 것이

천고의 이치입니다

 

우리 먹다 남긴 찌꺼기에

배 고픈 아귀가 허겁지겁 먹다가

목이 막혀 돌아 간다면 그 또한

살생의 중한 죄를 짓는 일입니다

 

내일은 부처님 전에 햅쌀로 공양 지어 올리고

부처님과 천지와 부모와 동포 국가등

깊은 은혜에 더욱 감사하는 마음으로 축원하겠습니다

 

원효스님

 

나무아미타불 

 


우루므치-트루판-돈황-하밀

명사산은 산이름 그대로 소리낼 鳴,모래 沙를 쓴다.
강한 바람이 불면 모래산은 거대한 소리를 내며, 가벼운 바람이 불어도
마치 관현악 연주를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바람이 불 때마다 모래언덕의 모양이 계속 바뀐다.

명사산에는 특이하게도 천년 넘게 단 한 번도 마른 적이 없는 샘,
월아천이 있어 더 유명하다.







월아천


▲월아천은 명사산 안에 있는 초승달 모양의 호수다.
거대한 모래언덕 사이의 지반이 함몰된 부분이다.


그렇게 크지도 않은 월아천은 심한 강풍이 불어도
모래에 덮인 적이 없고 무려 1000년 동안 마르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모래바람으로 건물 지붕위가 뿌옇다.




사막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꽃이





 






<"사막에 핀 불교예술의 꽃 돈황">


7월16일 오후 막고굴 일정이
돈황 관광의 마지막이고 하이라이트다.



고비사막의 오아시스 도시 돈황은
실크로드를 대표하는 유적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많은 이들이 돈황을 찾는 큰 이유는 바로 막고굴의
▲돈황에 이틀동안 머물면서 쨍한 날은 없었다.
연일 황사 바람이 우리를 괴롭혔다.



사진을 찍지 못해 아쉬움이 있지만 팜프렛에 올려져 있는
그림 몇점을 옮겨 본다.










▲막고굴 안에서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그래서 카메라를 가이드에게 보관시키고 막고굴 전문
가이드를 따라 상세한 설명과 안내를 받았다.



◆돈황석굴의 존재가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은 1907년 영국인
스타인이 이 굴을 탐사하면서부터다.
1908년에는 프랑스인 펠리오가, 1910년에는 일본인 오타니팀과
미국의 워너 등이 탐사했는데 펠리오는 제17굴에서 엄청난 고문서와
서화 등을 수습, 본국 으로 가져갔다.
그 문서 속에는 유명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들어있었다.
이들 자료의 고고학적 가치는 엄청나다.
석굴의 회화적, 종교적, 학술적 가치와 함께 이들 자료들은
‘돈황학'이라는 독특한 학문으로 자리 매김하면서
세계적 관심을 끌어왔다.

막고굴이야말로 돈황을 세계적인 도시로 만든
거대한 불교미술의 보고인 것이다.


▲제275석굴 / 교조미륵보살


▲제45석굴/ 상인이 도둑을 만남


▲제45석굴/길안내 보살 당나라


▲제85서굴/ 나무아래 비파타기 그림 당나라 말기


▲제57석굴/미륵보살 당나라 초기


▲제321석굴/쌍비천 당나라 초기
<"돈황에서 우루무치로">


07년 7월16일 돈황일정은 모두 끝이 났다. 이제는 열차를 타고
하미- 선선- 투루판을 거쳐 우리무치로 가야한다.

돈황에서 우루무치간 침대열차는 06년부터 관광객을 위해
개통이 되었다고 한다. 장장 12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다.

우리는 저녁을 먹고 유원역으로 나갔다. 원래 돈황에서
유원까지는 1시간 넘게 차량으로 이동을 해야한다.

우루무치로 가는 열차는 모두 4인 1실 침대칸인데 작년에
개통되긴 해서나 열차는 오래된 듯 화장실, 세면장등이
깨끗하지 못했다.


▲열차를 타기위해 홈으로 들어가고 있다.




▲각 열차칸 마다 여승무원1명이 승객들의 출입을 도왔다.
아직도 사회주의 사상 탓인지 웃는 모습은 없고 군인처럼
부동사세를 하고 있었다.




▲우리일행 17명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나는 계속 행동을
같이 한 서울팀 3명과 함께 객실이 배당되었다.
열차는 8시20분경 우루무치를 향해 출발했다.
우리는 열차 출발과 동시에 술판을 벌였다.
 차창밖은 어둠이 지고 술잔은 돌았다.
곧 하나, 둘 자기 자리를 찾아서 눕고
모두 정신 없이 곯아 떨어 졌다.


▲우루무치에서 서안으로 가는 열차다.


▲7월17일 날이 밝았다. 차창밖 풍경





▲차창밖 풍경


▲차창밖 풍경


▲어디쯤인지는 모르나 미국의 그랜드 캐년을 지나고 있는 것 같았다.

 




▲투루판역에 도착했다. 1시간 가량 연착 될 것이란다.
그러니 12시가 넘어야 도착할 것 같다.






▲12시20분경 더디어 우루무치역에 도착했다.
많은 비가 오는 것은 수십년만이란다.
<"우루무치 사람들">


7월17일 12시가 넘어 우루무치역에 도착했다.
비가 내린다.한손에는 우산을 쓰고 다른 한손에는 가방을 끌고
실크로드 여행이 사실상 마무리가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