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선생을 테레범으로 기술한 뉴라이트 역사 교과서 분석 한국근현대사 說

2010. 3. 2. 20:50일반/금융·경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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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이 교과서는 첫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비위가 거슬리는 기술을 하고 있다. ‘일러두기’(4쪽)라는 데서 <1945년 이전 시대에 있어서 종래에 관습적으로 사용해 온 ‘조선’, ‘조선인’이란 단어를 ‘한국’, 한국인‘이란 보통명사로 바꾸어 쓴다.>라고 썼다.


이는 역사 기술에 있어 가나다도 모르는 자들의 망언이다. 과거의 객관적 사실의 왜곡일 뿐 만 아니라 상식의 도를 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고조선의 단군왕검’을 ‘한국의 단국왕검’으로 표기해도 된다는 말인가? 과거 역사적 고유명사는 그대로 두어야 하는 것이다. 지난 ‘조선시대’는 ‘조선시대’다. 어찌 ‘한국시대’라고 억지를 부리는가?


아마 이것은 ‘한국’이 ‘대한민국’의 약자로써 일제 통치에서 벗어난 1945년부터 1948년 까지 끈질기게 주장하던 우리민족의 통일정부를 부정하고 단독정부를 주장한 이승만의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역사적 의미를 부각하려는 의도와 이 땅의 북녘에서 사용하고 있는 ‘조선’에 대한 엘러지 반응일 수도 있다.


‘조선일보’를 ‘한국일보’로 바꿔 불러 두 개의 ‘한국일보’ 가 생기는 것과 같이 웃기는 일이다. 이론과 논리의 부재이다. ‘한국의 박혁거세’, ‘한국의 강감찬’이 나올 판이다. 1945년에는 ‘대한민국’이 없었다. 근현대사 시기라 해도 ‘조선군’이 강화도에서 프랑스군과 미군을 물리쳤다’이지 ‘한국군’이 물리쳤냐?


이하 중국에 대한 명칭 일본에 대한 명칭, 이북에 대항 명칭 등등을 비롯하여 시비 거리가 있으나 갈 길이 머니 일단 제쳐두기로 하자. ‘책을 내면서’-대한민국 근.현대사를 바로쓰다‘(5쪽)라는 머리말 부분에서 ‘기본자세는 실증정신’으로 썼다고 하면서 ‘역사가의 주관적인 개입을 피해’라고 했다. ‘실증정신’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실증사학’ 네이버인에 검색 결과를 빌려보기로 하자.


<  친일파 사학자 이병도의 역사관   역사 바로알기> 

2006/09/15 17:23


 http://blog.naver.com/jeenzzakr/140028792393


우리나라 사람중에, 환단고기와 단군역사 부정하는 대학교수들, 중.고 선생들, 대학생등은 대부분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근대 서양역사학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랑케의 실증사관의 역사해석이 머리에 세뇌되어 있어서 입니다... 랑케의 실증사관은 이병도의 역사관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제가 과거에 학원에서 과학강사를 할 때도, 사회 역사 선생이 늘 수업 중에 떠드는 내용이 이 랑케의 실증사학 이었습니다...


랑케의 실증사관은


1. 눈에 보이는 유물, 유적, 문헌(역사책)에 대해 정치, 종교, 철학 등의 관점 없이, 순수하게 역사사료만 으로만 100%의 철저하고 객관적인 역사해석을 주장하지만,


2. 랑케의 실증사학은 "역사 문헌 중에 100% 객관적인 역사서술도 있을 수 없고, 100% 객관적인 역사연구도 불가능하다"는 큰 모순을 갖고 있는 근.현대 역사학입니다...


지금 중.고.대학에서 배우는 역사학 교과서나, 교수, 교사들이 시중에 펴낸 거의 모든 책은 대부분 이 랑케의 역사학에 바탕을 둔 책들입니다.


이런 책들이 베스트셀러이고, 그 책들을 읽고, 자기도 모르면서


환단고기와 단군조선 역사를 부정하는 천박한 오류에 휩싸여 있는 국민들과 지식인들이 의외로 상당히 많습니다...


그야말로 혼 빠진 역사를 알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역사로 포교할 때, 이들은 반박을 합니다...

우리가 체계적으로 정확한 문헌에 의거하여 역사를 정리해 줘야합니다


그럼 이병도의 실증사학에 대해 정리가 잘된 네이버 지식in을 봅시다...


1920년대 후반기의 역사 연구의 학풍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즉, 박은식, 신채호 등에 의해 주도된 민족주의 사학과 백남운 등에 의해 주도된 사회경제사학으로 불리는 유물사관 그리고 역사적 사실의 고증에 중점을 두는 실증주의 사학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병도는 실증주의 사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병도의 국사관]


실증주의 사학은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학풍으로 랑케라는 학자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이후 랑케의 사학이 수입되어, 츠다 등에 의해 고등문헌비판사학으로 발전하고, 그것을 다시 이병도가 한국의 고등문헌비판사학의 단서를 열게 된 것입니다.


(고등문헌비판사학이란 옛 문헌들을 사실인지 아닌지에 중점을 두고 비판하는 연구방법입니다. 우리의 단군신화 등은 실증주의 사학에 의해 부정되었습니다. 말이 안 된다는 논리에 의해서 말입니다.


어떻게 곰이 사람이 되느냐... 하면서

이병도는 실증주의 사학자로서 엄밀한 문헌고증에 바탕을 두고 사실을 사실대로 밝히는 것이 역사학자의 임무라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곧 유럽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지만, 일본의 학풍과 식민사관의 토대 위에서 한 번 더 왜곡되어, 이병도의 주장들은 일제 사학자들의 식민사관과 유사하게 되어버립니다.


여기서 이병도의 실증주의 사학의 한계점이 드러나는데

즉, 역사연구에서 실증은 하나의 예비단계일 뿐 역사연구 자체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병도의 실증주의 사학은 그 사실을 잊고, 자료들을 짜맞추는 데만 몰두하여,

일제의 식민사관에 부합하는 학풍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오류들을 살펴보면,

첫째, 고대에서 조선 말기까지 우리의 역사를 귀족사회로 주장, 왕조의 교체에 따른 사회적 진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즉, 고조선-삼국시대-고려-조선으로 이어지는 역사 속에서 왕조가 교체될 때마다 나름대로의 발전과 진보를 거듭하게 되지만, 이병도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둘째, 조선왕조시대의 유교와 양반, 당쟁의 정치형태를 조선의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의 발달을 저해한 원인으로 보며 조선왕조를 부정합니다. 이것은 일제 사학자들의 정체성론의 근거로 사용되었던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도 한국인이기에 조금의 갈등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즉, 중국과 일본의 강대국 사이에서 민족사회를 유지해 온 공동체정신이 있었음을 주목하며, 협동과 타협의 아름다운 전통을 찾으려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듯 두 입장사이의 논리적 통일성의 결여는 이병도사학의 자기갈등의 일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병도의 사학사적 위치


이병도는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 지식인들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양극구도를 이루고 있던 1920년대 우파계열의 학자로서 타협주의 노선을 따르며, 자신의 연구방향을 일본학자들의 의도와 방향에 맞추어 그것을 성실히 따랐으며, 그들의 의도-조선의 식민지배-를 실현하기위해 노력했습니다.


물론 그가 근대적 역사학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할 고등문헌비판의 방법론과 역사학의 전문화의 길을 열어놓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식인의 양심과 학자로서의 전문성이 동시에 요구되었던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의 특수한 시대상황 속에서 학자로서의 전문성에만 치중해왔던 그의 인생관과 시국관은

자연히 그의 학문이 국민 속에 살아 숨 쉬는 생기 있는 역사의식을 고취하지 못하게 한 것

도 사실입니다.


해방 후 국사학자들에게는 일제식민사학의 청산과 과학적 사고방식에 의한 민족사의 구축이라는 이중의 과제를 동시에 수행해야만 했습니다.

즉, 일제 침략 하에서 식민사학의 모든 악폐를 일소하고, 전통문화와 민족발전의 저력을 역사적으로 인식시켜 주어야 했으며, 이러한 역사적 인식을 통하여 민족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강화로 인하여 전반적인 민족운동들이 꺾인 상황에서 오직 일제의 식민사관에 부합하는 실증주의 사학만이 살아남았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해방 후에도 계속되었는데, 많은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학계를 거의 떠나거나 혹은 죽기도 하였고, 유물사관론자들은 납북되기도 하여, 국사학계는 이병도를 주축으로 한 실증주의 사학자들이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이병도는 이제 죽고 없지만 아직도 그가 이끈 실증주의 사학에 일제 학풍의 잔존이 남아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을 바로 제대로 청산해야 할 우리의 의무인 것입니다.


(출처 : '실증주의 사학자 이병도' - 네이버 지식iN)

[출처] 친일파 사학자 이병도의 역사관 |작성자 jeenzzakr


이상을 읽어보면 이 교과서가 무엇을 지향하는 것인가를 아 수 있을 것이다.

즉 이교과서가 ‘민족자주’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사대매국’을 위한 것인가?

또 1% 부자들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다수의 민중을 위한 것인가? 판단은 독자에게 맡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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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한말 사진전 에서

 

 

'땅 위를 걷는' 기적


그대가 지금 이 순간에 살아 있고,
발걸음을 옮기고 있음을 느끼는 것은 하나의 기적이다.

9세기의 유명한 선승인 임제 선사는

'기적이란 물 위를 걷는 게 아니라 땅 위를 걷는 것'이라고 말했다.

모든 사람들이 땅 위를 걷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혀 자유롭지 않게 노예처럼 걷는다.
그들은 미래나 과거에 붙잡혀서
자신들의 삶이 있는 지금 이 순간에 살 수가 없다.


- 틱낫한의《어디에 있든 자유로우라》중에서 -


* 병상에 누워 본 사람만이 압니다.
젓가락 드는 힘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를. 우리는 매일 매순간

'땅 위를 걷는' 기적 속에 살아가지만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더는 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다음에야

비로소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에 깨어 있다면,

당신은 지금 엄청난 기적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의 삶이 곧 기적입니다.

 

 

- <고도원의 아침편지> 중에서

  

 

 

술 마시고 / 백 낙천

 

달팽이 뿔 위에서 싸운들 무엇하리

부싯돌 번쩍이듯 순간에 사는 몸

부자든 가난하든 주어진 대로 즐겁거늘

입 벌려 웃지 않으면 바보로다

  

白樂天 / 對酒 二   

 

蝸牛角上爭何事  와우각상쟁하사 石火光中寄此身  석화광중기차신 

隨富隨貧且歡樂  수부수빈차환락 不開口笑是癡人  불개구소시치인

 

 

 * 우리가 일상에서 분쟁하고 시기하는 것은 자기 욕심에서 나온 것인데,

이는 달팽이 뿔위의 좁은 공간에서 아귀다툼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한 세상 100년이라 해도 돌아보면 전광석화같은 찰라에 불과하다.

부자다 가난하다 하고 가슴 조리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 .  마치 

해변에서 모래성을 쌓고 노는 아이들처럼 지나고 나면 허망한 것이다.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매일 만나는 자연의 모습은

감동과 환희에 차서 입벌리고 손뼉치며 즐거워 하지 않을 수 없건만 . . . 

우리는 구름낀 얼굴로 고뇌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 시 감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