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어른이 잃었다" …법정스님 입적 '애도'

2010. 3. 11. 23:20일반/금융·경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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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法頂) 스님 11일 입적, 다비식은 13일 순천 송광사
    법정(法頂) 스님 11일 입적, 다비식은 13일 순천 송광사 폐암으로 투병중이던 법정(法頂) 스님이 3월 11일 오후 1시52분께 서울 성북2동 길상사에서 입적했다. 세수 78세.법랍 54 법정스님의 다비식은 3월 13일 전남 순천 송광사에서 엄수된다. 그러나 법정스님의 평소 유지대로
    특별한 추모행사는 없을 것으로 알려졌다. 평소 가르침대로 일체의 장례의식을 치르지 말고, 사리를 찾으려 하지 말고 탑도 세우지 말라는 내용의 유언을 남겼으며 그냥 입던 승복차림으로 다비해달라고 당부했습니다. “절대로 다비식 같은 것을 하지 말라. 이 몸뚱아리 하나를 처리하기 위해 소중한 나무들을 베지 말라. 내가 죽으면 강원도 오두막 앞에
    내가 늘 좌선하던 커다란 넙적바위가 있으니 남아 있는 땔감 가져다가 그 위에 얹어 놓고 화장해 달라. 수의는 절대 만들지 말고,내가 입던 옷을 입혀서 태워 달라. 그리고 타고 남은 재는 봄마다 나에게 아름다운 꽃공양을 바치던 오두막 뜰의 철쭉나무 아래 뿌려달라. 그것이 내가 꽃에게 보답하는 길이다. 어떤 거창한 의식도 하지 말고,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다. 1932년 10월 8일 = 전남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 출생 1955년 통영 미래사로 입산 출가했다. 은사는 효봉(曉峰) 스님이다. 1956년 7월 사미계를 수지한 뒤 1959년 3월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자운(慈雲)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1959년 4월 해인사 전문강원에서 명봉(明峰) 화상을 강주로 대교과를 졸하고 지리상 쌍계사와 가야산 해인사, 조계산 송광사 등 선원에서 수선안거(修禪安居) 했다.
    보현행원


    1. 내 이제 두손-모아 청하옵나-니

    시방세계 부처-님 우주대-광-명

    두눈어둔 이내몸 굽어살피-사

    위없는 대법-문을 널리여-소-서

     
    (후렴) 
    허공계와 중생-계가 다할지라-도 
    오늘-세운 이-서원은 끝없아-오-리 
      
     
    2. 내 이제 엎드-려서 청하옵나-니 
    영겁토록 열반-에 들지맙-시-고 
    이세상에 중생을 굽어살피-사 
    삼계화택 심한-고난 구원하-소-서 
      
     
    (후렴) 
    허공계와 중생-계가 다할지라-도 
    오늘-세운 이-서원은 끝없아-오-리
     
    

     



정치권 "큰 어른이 잃었다" …법정스님 입적 '애도'

뉴시스 | 황의영 | 입력 2010.03.11

【서울=뉴시스】김은미 황의영 기자 = 여야는 11일 법정스님의 입적과 관련, "이 시대의 큰 어른이자 참스승을 잃었다"며 일제히 깊은 애도를 표했다.

한나라당 조해진 대변인은 이날 오후 논평을 통해 "대립과 갈등, 탐욕이 팽배한 세상에서 스님이 남긴 무소유와 화합의 정신은 모든 더러운 것을 맑게 씻어내는 정화수로 흐를 것"이라고 밝혔다.

조 대변인은 또 "일찍이 스님은 맑은 샘이셨다"며 "큰 어르신을 보내는 마음은 아쉽고 슬프지만, 풍경소리 같은 맑은 여운이 우리 속에 계속 남아서 화합하고, 공존하고, 또 비우면서 충만해지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민주당 노영민 대변인도 이날 오후 국회 정론관에서 브리핑을 갖고 "이제 스님의 가르침을 더 이상 직접 듣지 못함에 진한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느낀다"며 스님은 이 시대의 참 현인"이라고 밝혔다.

노 대변인은 이어 "혹독한 독재의 시대에는 몸소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실천자셨고 중생들에게는 '비움'의 진정한 가치를 가르쳐 주셨던 참스승"이라며 "스님의 입적을 애도하며 명복을 빈다"고 추모했다.

자유선진당 박선영 대변인은 이날 국회 정론관에서 브리핑을 통해 "또 한 분의 큰 어른을 잃었다는 허탈감과 슬픔에 목이 메여온다"며 말문을 열었다.

박 대변인은 또 "'소유'이기보다는 '존재'로서의 삶을, 구도자의 자세로 끊임없이 추구해 오신 법정스님은 물질 만능주의에 도취된 우리 중생들에게 깊은 가르침을 주셨다"며 "이제 스님의 말씀을 따라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민주노동당 우위영 대변인도 이날 논평을 내고 "종교와 무관하게 시대의 잘못은 날카로이 꾸짖고, 세상살이의 고달픔을 느끼는 대중에게는 더없는 위로와 가르침을 주시던 참 귀한 스승 한 분을 잃고 말았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우 대변인은 또 "우리가 몸담은 세상과 마음을 맑고 향기롭게 가꾸도록 만들어주신 스님의 거룩한 일생에 깊은 존경을 표하며 다시 한번 애도의 마음을 전한다"고 말했다.

진보신당 심재옥 대변인은 "법정 스님은 평생 무소유로 살아오셨고 종교화합에도 실천적인 노력을 기울이셨던 분"이라며 "어렵게 현실을 살아가는 국민들에게 정신적으로 큰 울림과 힘을 주셨다"고 강조했다.

심 대변인은 또 "무소유 정신은 개인적 차원이기보다 사회적으로 나눔 공동체를 만드는 큰 밑거름이 됐다"며 "스님의 정신을 기려서 사회적 화합과 공동체를 만들어 가도록 진보신당도 함께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kem@newsis.com
무소유’ 온몸으로 실천한 법정스님의 생애

헤럴드경제 | 입력 2010.03.11

11일 입적한 법정(法頂)스님은 탁월한 문장력을 바탕으로 한 산문집을 통해 일반 국민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은 '스타' 스님이다. 불자나 스님들 사이에서도 1993년 열반한 성철 스님에 이어 인지도가 높은 스님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평생 불교의 가르침을 지키는 출가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았고, 산문집의 제목처럼 '무소유'와 '버리고 떠나기'를 끊임없이 보여줬다. 스님은 자신이 창건한 길상사의 회주를 한동안 맡았을 뿐, 그 흔한 사찰 주지 한번 지내지 않았다.

법정스님은 1990년대 초반 "나는 아마 전생에도 출가수행자였을 것이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직관적인 인식만이 아니라 금생에 내가 익히면서 받아들이는 일들로 미루어 능히 짐작할 수 있다"고 한 적이 있다.

박근혜 "어서 일어나시겠지 생각했는데..."

오마이뉴스 | 입력 2010.03.11 21:41 | 수정 2010.03.11

[오마이뉴스 박혜경 기자] [2신 : 오후 10시 25분] 유인촌 "법정스님 본 따라가야 할 사람 많다"






분향을 위해 11일 오후 길상사를 찾은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 홍현진


오후 8시 10분 경,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서울 성북구 길상사에 도착했다. 박 전 대표는 법정스님을 모신 '행지실'에 들러 "위독하시다는 보도가 났길래 어서 일어나시겠지 생각했는데…"라며 말 끝을 흐렸다. 박 전 대표는 행지실을 나와 "법정스님은 불교계의 큰 어른으로, 말씀하신 것에 대한 보도가 나오면 빼놓지 않고 읽었다"며 "인생의 지침이 되는 큰 가르침을 주셨다"고 추모했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행지실을 찾았다. 오후 8시 55분경 도착해 분향을 한 유 장관은 "(법정스님이) 주무시는 것 같으시네, 이불만 간단하게 덮어놓으셨어"라며 "돌아가신 것 같지가 않다"고 소감을 말했다. 이어 유 장관은 "법정스님은 큰 어른으로서 평소 종교간 화합에 대해 말씀하셨고 이를 행동으로도 옮겼다"며 "무소유에 대해서도 말씀하신 법정스님의 본을 보고 따라가야 할 사람이 너무 많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나도 그렇게 하겠다"고 덧붙였다. 유 장관이 잠시 후 도착한 이상득 한나라당 의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정세균 민주당 대표가 이광재·김진표 의원과 함께 길상사에 도착했다. '리틀 MB'라 불리는 유 장관과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인 이 의원, 그리고 '민주당 3인방'이 마주친 몇 초 동안 미묘한 기류가 맴돌았다. 목례를 나눈 '민주당 3인방'은 행지실로 향했다. 정 대표는 "법정스님은 불교계 큰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국민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으셨는데, 가슴이 아프고 빈 자리가 크다"면서 "애통하고 슬프다"고 말했다.





분향을 위해 길상사를 찾은 유인촌 장관과 이상득 한나라당 의원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홍현진






법정스님 분향을 위해 길상사를 찾은 정세균 민주당 대표와 이광재, 김진표 의원.


ⓒ 홍현진


[1신 : 3월 11일 오후 9시 20분] "입적 소식 듣는 순간, 가슴이 내려앉아"

길상사에 하얀 연꽃 등이 달렸다. 날이 어두워지자 길상사 법당에 불이 하나둘씩 켜지고 있다. 분향소가 마련된 설법전 앞으로는 분향하기 위해 길상사를 찾은 사람들이 계단 밑까지 길게 늘어섰다. 설법전 안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는 수십 켤레의 신발들이 쌓여 있다.

산문집 < 무소유 > 등의 저자인 법정 스님의 입적 소식을 듣고 길상사를 찾은 이들의 것이다. 법정스님은 현재 길상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상석에 해당되는 방인 '행지실'에 모셔져 있다.

조계종 대변인인 원담 스님은 길상사 극락전 앞에서 "스님이 살아생전 행한 자신에 대한 엄격함과 사물에 대한 사랑은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 것 같다"며 "오랫동안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으신 큰 스님의 극락왕생을 다 같이 기원하겠다"고 말했다.

현재 길상사에서는 전체적으로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분향이 이뤄지고 있다. 이날 오후 7시 30분부터 일반인들의 분향이 가능해지고 퇴근시간이 지남에 따라 길상사를 찾는 이들의 수도 점차 늘고 있다. 처음엔 10명씩 모듬을 만들어 분향했지만, 분향 인파가 늘면서 모듬의 수를 30명으로 늘렸다.

분향을 마친 홍정자(69, 수필가)씨는 "(법정 스님의) 입적 소식을 듣는 순간 가슴이 내려앉았다"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홍씨는 "나의 지주였고, 부처님처럼 마음속에 모신 분이었다"고 법정 스님을 추모했다. 그는 "스님과 신도들이 불편할까 봐, 길상사에 오셔서도 한 번도 주무시지 않았던 법정 스님이었다"며 "돌아가신 스님의 뜻에 따라 살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조계종 총무원장인 자승 스님과 전 총무원장인 지관 스님 등 많은 스님들이 법정 스님이 모셔진 행지실을 찾았다.

손학규 "민주화와 인권에 앞장섰던 법정 스님"





길상사를 찾은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 박혜경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는 이날 오후 7시 40분경 길상사를 방문해 분향했다. 손 전 대표는 "법정 스님은 스님으로서 우리 사회의 정의를 가르쳐주신 분이고, 70년대 유신 시절 불교계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앞장섰다"며 "스님이 가르쳐주신 자비의 정신은 국민들 가슴 속에 남아 있다"고 말했다.

성북동 길상사와 순천 송광사 등에 마련된 분향소는 49재 동안 유지될 예정이며, 길상사는 스님의 뜻에 따라 조화 등은 일체 받지 않고 있다.

앞서 법정 스님은 11일 오후 1시 50분경 세수 78세, 법랍 55세로 입적했다. '맑고 향기롭게 살자'며 97년에 자신이 세운 길상사에서 였다. 3~4년 전부터 폐암 투병을 해온 법정 스님은 올해 들어 병세가 악화돼 삼성서울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입적 직전 자신이 세운 길상사로 옮겼다.

한편 법구는 12일 오전 12시 전남 순천 송광사로 운구될 예정이며, 법정 스님의 다비식은 13일 송광사에서 치르게 된다. 모든 일정은 법정 스님의 유지에 따라 진행될 예정이다.

[☞ 오마이 블로그]

1932년 10월8일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법정 스님은 한 핏줄끼리 총부리를 겨눈 한국전쟁을 경험하면서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 앞에서 고민한다. 그는 대학 재학중이던 1955년 마침내 입산 출가를 결심하고 싸락눈이 내리던 어느날 집을 나선다.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오대산으로 가기 위해 밤차로 서울에 내린 스님은 눈이 많이 내려 길이 막히자 서울의 안국동 선학원에서 당대의 선승 효봉스님(1888~1966, 1962년 조계종 통합종단이 출범한 후 초대 종정)을 만나 대화한 후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는다. "삭발하고 먹물 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훨훨 날아갈 것 같았다.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나는 그 길로 밖에 나가 종로통을 한바퀴 돌았었다"

다음날 통영 미래사로 내려가 부목(負木ㆍ땔감을 담당하는 나무꾼)부터 시작해 행자 생활을 했다. 당시 환속하기 전의 고은 시인, 박완일 법사(전 조계종 전국신도회장) 등이 함께 공부했다. 법정스님은 이듬해 사미계를 받은 후 지리산 쌍계사에서 정진했다. 28세 되던 1959년 3월 양산 통도사에서 자운 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고, 1959년 4월 해인사 전문강원에서 명봉스님을 강주로 대교과를 졸업했다.

1960년 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통도사에서 운허 스님과 함께 '불교사전' 편찬에 참여하다 4.19와 5.16을 겪은 스님은 1960년대 말 서울 봉은사 다래헌에서 운허 스님 등과 함께 동국역경원의 불교 경전 번역 작업에 참여했다.

이 시절 함석헌, 장준하, 김동길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결성과 유신 철폐운동에 참여했던 법정스님은 1975년 인혁당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후 반체제운동의 의미와 출가수행자로서의 자세를 고민하다 다시 걸망을 짊어진다.

출가 본사 송광사로 내려온 법정스님은 1975년 10월부터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홀로 살기 시작했다. 1976년 산문집 '무소유'를 낸 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불일암 생활 17년째 되던 1992년 다시 출가하는 마음으로 불일암을 떠나 강원도 화전민이 살던 산골 오두막에서 지금까지 혼자 지내왔다.

스님은 건강이 나빠지면서 지난해 겨울은 제주도에서 보냈다가 건강상태가 악화하면서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했지만, 의식을 또렷하게 유지하면서 "강원도 오두막에 가고 싶다"고 거듭 말했다는 것이 주변의 전언이다.

법정스님은 평소에는 강원도 산골에서 지냈지만 대중과의 소통도 계속했다. 특히 1996년 고급요정이던 성북동의 대원각을 시인 백석의 연인으로 유명했던 김영한 할머니(1999년 별세)로부터 아무 조건없이 기부받아 이듬해 12월 길상사로 탈바꿈시켜 창건한 후 회주로 주석하면서 1년에 여러차례 정기 법문을 들려줬다. 법정스님은 2003년 12월에는 길상사 회주 자리도 내놓았다. 하지만 정기법문은 계속하면서 시대의 잘못은 날카롭게 꾸짖고 세상살이의 번뇌를 호소하는 대중들을 위로했다.

산문인으로서 법정스님은 뛰어난 필력을 바탕으로 우리 출판계 역사에도 기록될 베스트셀러를 숱하게 남겼다. 스님은 해인사에 살 당시 팔만대장경이 있는 장경각을 가리켜 "빨래판같이 생긴 것이요?"라고 묻던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아무리 뛰어난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이라도 알아볼 수 없는 글자로 남아있는 한 한낱 빨래판에 지나지 않으며, 부처의 가르침을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쉬운 말과 글로 옮겨 전할 방법을 고민했다.

또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망각한 채 전통과 타성에 젖어 지극히 관념적이고 형식적이며 맹목적인 수도생활에 선뜻 용해되고 싶지 않았다"고 회고한 적도 있다. 스님의 이런 원력은 스님의 이름과 동의어처럼 불리는 산문집 '무소유'의 모습으로 꽃을 피운다. '무소유'는 1976년 4월 출간된 후 지금까지 34년간 약 180쇄를 찍은 우리 시대의 대표적 베스트셀러다.

법정스님은 다른 종교와도 벽을 허물었던 것으로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법정스님은 길상사 마당의 관음보살상을 독실한 천주교신자 조각가인 최종태 전 서울대교수에게 맡겨 화제를 모았고, 1997년 12월 길상사 개원법회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방문했다. 법정스님은 이에 대한 화답으로 이듬해 명동성당에서 특별 강론을 하기도 했다.

법정스님은 이밖에 조계종단과 사회를 위한 활동도 활발히 했다. 법정스님은 대한불교 조계종 기관지인 불교신문 편집국장, 송광사 수련원장, 보조사상연구원장 등을 지냈고 1994년부터는 환경보호와 생명사랑을 실천하는 시민운동단체인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를 만들어 이끌어왔다.

헤럴드생생뉴스(online@heraldm.com)

소유의 감옥에서 해방” 글처럼 살다간 법정스님

헤럴드경제 | 입력 2010.03.11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을 쓰게 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있다는 뜻이다"('무소유' 중에서)

법정스님이 1970년대 초반부터 쓴 글을 모아 1976년 펴낸 대표적인 산문집 '무소유(범우사)'를 비롯해 수십권의 책에서 한결같이 설파한 무소유의 정신은 무한경쟁과 탐욕의 시대에 우리가 지녀야 할 마음의 등불이다. 스님이 말한 '무소유'는 불교의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즉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가지고 온 것도 없고 세상을 하직할 때 가져가는 것도 없다는 가르침에서 비롯됐다.

1971년의 글 '무소유'에서 법정스님은 당시 3년 째 난초 화분 둘을 애지중지 길렀다는 스님은 장마 후 쏟아지는 햇볕 아래 화분을 놓고 왔다는 생각에 허둥지둥 거처로 돌아간 일화를 소개하며 자신의 집착을 뉘우친다.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所有史)처럼 느껴진다…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려 든다…제 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1992년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한번 출가하는 마음으로 강원도 화전민이 버리고 떠난 산골 오두막으로 들어간 스님은 1995년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에 이어 새 천년을 앞둔 1999년 12월에 수상집 '오두막 편지'를 내놓는다. '오두막 편지'에서 스님은 "현재 내가 몸담아 사는 산중 오두막은 여러가지로 불편한 환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곳에서 단순하고 간소하게 내 식대로 살 수 있기 때문에 일곱 해째 기대고 있다"고 썼다.

스님은 2008년 11월 길상사 소식지에 기고했던 수필을 모아 '아름다운 마무리'를 펴내 삶의 마지막에 선 노승의 마음을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길상사를 드나들면서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얻어간다…늙은 중이 욕심 사납게 주는대로 꾸역꾸역 가지고 가는 꼴을 이만치서 바라보고 있으면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면서 "삶의 종점인 섣달 그믐날이 되면 누구나 자신이 지녔던 것을 모두 놓아두고 가게 마련이다. 우리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나그네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스님이 말하는 '아름다운 마무리' 는 역시 "스스로 가난과 간소함을 선택해 소유의 비좁은 감옥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언제든 떠날 채비를 갖춘다…아름다운 마무리는 낡은 생각, 낡은 습관을 미련없이 떨쳐 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마무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스님은 평생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며 자신의 말처럼 '아름다운 마무리'로 이생의 삶을 마쳤다.

헤럴드생생뉴스(online@heraldm.com

<"법정스님 빈자리 책으로" 저서에 관심>(종합)

연합뉴스 | 입력 2010.03.11 21:17 | 수정 2010.03.11

서점들 추모 코너 마련..주문량 크게 늘어
(서울=연합뉴스) 김지연 기자 = 탁월한 문장력과 무소유 철학, 소탈한 내용이 담긴 책들로 일반 국민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은 법정(法頂)스님이 11일 입적하면서 생전에 남긴 책들에 대한 관심도 늘었다.

법정스님은 산문집과 여행기, 법문집, 명상집, 어린이책, 불교 서적, 불경 번역서 등 다양한 분야에서 50여 종을 냈으며, 그 가운데 상당수가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며 사랑받았다.

법정스님의 책들은 일상과 개인적인 일화를 그릴 때는 서정적이고 소탈한 입담을 자랑해 대중에게 친화력을 가졌으며 물질적인 세상과 사회를 풍자할 때는 지혜롭고 본질을 꿰뚫는 말들로 사람들을 이끌었다.

특히, 황금만능주의를 경계하고 검소하며 단순한 삶을 권하는 대표 산문집 '무소유'는 1976년 출간됐으나 1996∼2000년 5년 동안이나 교보문고 연간 베스트셀러 20위 안에 들 정도로 꾸준히 인기를 끈 최고 베스트셀러로, 첫 출간 이후 쇄와 판을 거듭하며 290만 부나 팔려나갔다.

맑고 깊은 영혼의 세계를 소개하는 명상집 '산에는 꽃이 피네'도 1998년 금융위기로 고통받던 국민을 위로하며 교보문고 연간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다.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서 개울물을 길어 밥을 하고 손수 만든 땔감으로 불을 지피며 살면서 세상을 향해 쓴 편지를 모은 책 '오두막 편지'도 2000년 14위에 오른 인기 도서이며, '버리고 떠나기'(1993년 19위), '산방한담'(1983년 11위),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2006년 9위) 등도 연간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른 인기 도서다.

교보문고는 이날 오후 법정스님의 입적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광화문점 문학 섹션에 스님의 무소유 정신을 기리는 추모 코너를 마련해 '일기일회', '아름다운 마무리', '무소유', '산에는 꽃이 피네', '인도기행' 등을 모아놓았다.

또, 인터넷 교보문고는 메인 화면에 "시대의 정신적 스승 법정스님 입적, 무소유 정신에서 아름다운 마무리까지 스님의 발자취를 따라갑니다"라는 추모글을 올렸으며, 작가들을 소개하는 '인터넷 교보문고 문학관' 페이지에 '법정스님 문학관'을 열어 스님의 대표 저서들을 소개하고 있다.

반디앤루니스 종로점도 오후부터 '무소유', '법정 스님의 내가 사랑한 책들', '오두막 편지', '인연 이야기' 등을 모은 추모 코너를 마련해 독자들을 맞고 있으며 코엑스점은 12일 특별 코너를 열 예정이다.

책으로 안타까움을 달래려는 독자들의 문의가 이어지면서 출판사들에도 주문이 크게 늘었다.
'일기일회', '아름다운 마무리',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 등 법정스님의 최근작을 낸 출판사 문학의숲에는 법정스님의 병세가 깊다는 소식이 전해진 이후 각각의 책에 대해 평소보다 훨씬 많은 수준인 6천∼1만부의 주문이 몰려 법정스님이 역시 '스타 스님'이었음을 실감하게 했다.

출판사 관계자는 "문의도 많고 주문도 크게 늘었다"며 "법정스님의 책은 평소에도 인기가 많아 다량 찍었기 때문에 일단은 소화가 가능하지만, 부족해질 것 같아 추가 인쇄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cherora@yna.co.kr 

무소유’ 법정스님 주요 연표

헤럴드경제 | 입력 2010.03.11

▲1932년 10월 8일 = 전남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 출생

▲1954년 = 통영 미래사에서 효봉 선사를 은사로 입산 출가

▲1956년 7월 15일 = 효봉 선사를 은사로 사미계 수계

▲1959년 3월 15일 =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자운율사를 계사로 비구계 수계

▲1959년 4월 15일 = 해인사 전문강원에서 명봉화상을 강주로 대교과 졸업, 이후 지리산 쌍계사와 가야산 해인사, 조계산 송광사 등 선원에서 수선안거(修禪安居)

▲1960?1961년 = '불교사전' 편찬 작업에 동참

▲1967년 동국역경원 편찬부장

▲1972년 첫 저서 '영혼의 모음' 출간

▲1973년 불교신문사 논설위원, 주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민주수호국민협의회와 유신 철폐 개헌 서명운동 참여

▲1975년 10월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충격, 송광사 불일암으로 돌아감

▲1976년 대표 저서인 '무소유' 출간

▲1984?1987년 송광사 수련원 원장

▲1985년 경전공부 모임 법사

▲1987?1990년 보조사상연구원 원장

▲1992년 강원도 산골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고 홀로 수행정진

▲1993년 8월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준비위원회 발족

▲1993년 10월 10일 프랑스 최초의 한국 사찰인 파리 길상사 개원

▲1994년 1월 1일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창립

▲1994년 3월 26일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창립 기념 첫 대중법문을 서울, 부산, 대구, 전주 등지에서 하며 지부 발족

▲1995년 김영한(법명 길상화)씨의 대원각 시주를 받아들여 송광사 말사 '대법사'로 조계종에 등록

▲1997년 1월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 이사장 취임

▲1997년 12월 14일 대법사를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바꾸고 창건 법회

▲1998년 2월 24일 명동성당 축석 100돌 기념 초청 강연

▲2003년 10월 '맑고 향기롭게' 창립 10주년 기념 강연, 파리 길상사 개원 10주년 기념 법문

▲2003년 12월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 회주에서 스스로 물러남

▲2010년 3월 11일 길상사에서 법랍 55세, 세수 78세로 입적 

입적’ 법정스님, 무소유의 삶 되짚어보다(MBC스페셜)

뉴스엔 | 입력 2010.03.11

[뉴스엔 이언혁 기자]
법정스님의 입적에 따라, 3월 13일 다비식에 앞서 그 삶을 되짚어보는 특별방송이 편성됐다.

3월 12일 방송되는 MBC스페셜은 '법정스님의 아름다운 마무리'라는 제목으로 무소유의 삶을 살았던 법정스님의 삶이 현대인들에게 주는 깨달음을 되새겨본다.

올 봄, 법회에서 "봄꽃처럼 맑고 향기로운 삶을 피워야한다"고 강조한 법정스님은 3월 11일 오후 1시 50분 무소유의 삶을 뒤로하고 입적했다.

법정스님은 "아름다운 계절에 여러분이 어떤 꽃을 피울지 생각해 달라...", "오늘처럼 눈부신 날에 다시 만나 반갑다. 언젠가는 이 자리를 비울 텐데 그래서인지 더 고맙고 다행스럽다", "무엇보다 남을 믿을게 아니라 자신과 불법(佛法)에 의지해 씨앗을 뿌리고 꽃을 피워야한다..."고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법문 곳곳에서 암시했다.

무소유, 단순함과 간소함, 홀로 있음, 침묵, 진리에 이르는 길 등 아름다운 마무리에서 삶은 순간 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자 새로운 시작이다. 법정스님은 모두가 한 때일 뿐, 그 한 때를 최선을 다해 살아야한다고 일러왔다.

온 사회가 경제 위기를 비롯한 우울하고 절망적인 뉴스들로 들끓고 있는 이 때, 법정 스님은 오히려 가진 것을 더 비워내야 행복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어지러운 세상에 휘둘리는 것은 바로 마음에 중심이 없어서라는 것이다.

외부적인 현상에서 눈을 돌려 조금만 더 자기 자신을 읽을 수만 있다면 나날이 새로워질 수 있다는 법정 스님의 말씀은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희망을 주는 귀중한 지침서가 될 것이다.

"무소유란 아무 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는 법정 스님은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1955년 출가해 수행하다 불일암에서 홀로 산 17년과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서 자연과 더불어 17년 생활하면서 맑은 가난의 행복함과 소박함의 가치를 세상에 알린 큰 스님이다.

한편 "다비식 같은 것은 하지 말고 사리도 찾으려 하지말라"고 했던 법정스님의 다비식은 3월 13일 오전 11시 송광사에서 거행된다.

3월 12일 오후 10시 55분 방송. 
법정 입적> 길상사 분향소, 추모 발길 이어져

연합뉴스 | 입력 2010.03.11 20:53 | 수정 2010.03.11

법심(法心)으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서울=연합뉴스) 권영전 기자 = 11일 입적한 법정스님의 법구가 있는 서울 성북동의 길상사에는 불교계 인사들은 물론이고, 정치인들과 불자들, 시민들까지 많은 조문객들이 몰려들었다.

이날 오후 3시께부터 입적 소식을 듣고 모여든 불자들과 시민들은 극락전 앞에서 조용히 합장을 했지만, 곧이어 가슴을 치는 등 아픈 마음을 드러냈다. 길상사를 찾은 스님들도 모두 마음이 무거운 듯 엄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길상사의 불자들은 자율적으로 자원봉사단으로 나서 조문객들의 안내를 도맡기도 했다.
오후 5시30분께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스님이 50여명의 스님들과 함께 길상사를 찾아 법정스님이 입적한 행지실(行持室)에서 묵념을 하는 등 조문했고, 전 총무원장인 지관스님도 곧이어 길상사 행지실을 찾았다.

지관스님은 "법정스님과 나는 이 세상에 올 때 같은 해에 왔는데, 그분이 먼저 가신 데 대해 무어라 말씀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묵언으로 조의를 표할 뿐"이라면서도 "다만 법정스님이 육신은 버렸어도 그분의 법심(法心)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이끌어주시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조계종 대변인 원담스님은 "법정스님이 살아생전에 가졌던 자신에 대한 엄격함과 사물에 대한 따뜻함은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며 "국민들의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으신 법정스님의 극락왕생을 기원한다"고 밝혔다.

정치인들의 조문 행렬도 이어졌다. 이계진 한나라당 의원도 이날 길상사를 찾아 "엊그제 스님을 마지막으로 뵈었는데 잠시 지방에 내려간 사이 돌아가셨다"며 안타까워했다.

이 의원은 또 "17년 전 아내와 송광사 불일암에서 법정스님께 계를 받았다"며 "당시 향적(香積)이라는 법명도 받았는데, 아마 좋은 향기를 세상에 쌓으라는 뜻이셨던 것 같다"고 스님과의 인연을 회상하기도 했다.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도 "'무소유' 정신을 설파하신 법정스님이 입적하셔서 아쉽다"며 "우리 사회의 큰 등불이 지셨다"고 말했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도 길상사를 찾아 "우리 사회에 깨달음을 준 큰어른이 가셨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표했다.

도올 김용옥 전 고려대 교수도 조문 행렬에 동참했다.
저녁이 되면서 길상사에는 일반인 조문객들이 더 몰렸다. 설법전에 마련된 분향소에는 불자들과 시민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조문객들은 차례로 8~10명씩 법정스님의 영정 앞에서 향을 피우며, 스님의 극락왕생을 기원했다.

이어 한 스님이 치는 죽비 소리에 맞춰 분향대 앞에서 절을 하며 애통한 마음을 내비쳤다.
길상사 신도인 허성춘(55.여) 씨는 "스님의 입적 소식을 듣고 머리가 하얘지고 가슴이 멍해졌다"며 "지난번 동안거 해제일에도 스님이 혹시 나오시나 하고 찾아갔다가 못 뵈어 무척 안타까웠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다른 조문객도 "지난해 김수환 추기경이 돌아가시고 또 종교계의 큰어른이 돌아가셔서 걱정"이라며 "슬픈 마음을 안고 조문하러 왔다"고 말했다.

법정스님의 다비준비위원회는 이어지는 조문객들을 맞이하기 위해 12일 오전 4시께 극락전 앞에 분향소를 하나 더 마련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comma@yna.co.kr 

법정 스님 ‘무소유’마저도 ‘소유’ 말라

한겨레 | 입력 2010.03.11 14:40 | 수정 2010.03.11

[한겨레] 열반한 법정 스님 "내 모든책 더 이상 출간말라"

"일체의 장례의식 말라" 유언

산문집 < 무소유 > 의 작가로 친숙한 법정 스님이 11일 오후 1시52분께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입적했다. 법랍 55살. 세수 78살.

지난 2007년 10월 폐암 진단을 받고 제주도 서귀포 등에서 요양해오다 최근 삼성서울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아온 법정 스님은 이날 열반 직전 길상사로 옮겨졌다.

한국 불교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법정 스님은 193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목포상고를 거쳐 전남대 상과대를 다니다 1956년 당대의 고승인 효봉 스님을 은사로 비구가 됐으며, < 불교신문 > 편집국장, 송광사 수련원장, 보조사상연구원장 등을 지낸 뒤 1970년대 이후 조계산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직접 지어 홀로 살았다.

법정 스님은 불교계의 현실 참여가 전무하다시피했던 '씨알의소리' 편집위원으로 씨알의 소리가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도록 활기를 불어넣었고, 1970년대에 장준하, 함석헌 등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해 민주화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또 지난해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과도 깊은 교분을 나누었다. 1994년부터는 순수 시민운동단체 '맑고 향기롭게'를 만들어 마음과 삶을 맑히는 운동을 펼치며, 고독한 수행 생활을 해왔다. 1997년엔 서울 성북동에 길상사를 창건했고 2005년 강원도 산골 오두막으로 내려가 무소유의 삶을 살면서 가끔씩 길상사에서 법문을 해왔다.

법정 스님은 입적하기 전날 밤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내가 금생에 저지른 허물은 생사를 넘어 참회할 것이다. 내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해 사용해 달라.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 "법정스님은 머리맡에 남아 있던 책을 저서에서 약속한 대로 스님에게 신문을 배달한 사람에게 전해줄 것을 상좌에게 당부했다.

아울러 법정스님은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주기를 간곡히 부탁한다"는 말을 남겼다. 법정 스님은 맑고 정갈한 필치의 산문인 < 무소유 > < 오두막 편지 >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 < 산방한담 > < 텅빈 충만 > < 아름다운 마무리 > < 일기일회 > <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 > 등의 책을 남겼다.

법정스님은 평소에 번거롭고, 부질없으며, 많은 사람에게 수고만 끼치는 일체의 장례의식을 행하지 말고, 관과 수의를 따로 마련하지도 말며,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없이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해주고,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 말며, 탑도 세우지 말라고 상좌들에게 당부했다.

이에따라 조계종과 송광사, 길상사 등은 이런유지를 받들어 별도의 공식적인 장례위원회를 구성하지 않기로 했으며, 다비식 이외 일체의 장례의식을 치르지 않기로 했다.

또 조화나 부의금도 접수하지 않기로 했으며 조문객을 위해 길상사와 송광사, 스님이 17년간 머물렀던 송광사 불일암 등 3곳에 간소한 분향소만 마련했다. 다비식은 13일 오전 11시 전남 순천 송광사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 '무소유' 법정 스님 입적 추모게시판 바로 가기
▲1932년 10월 8일 = 전남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 출생

▲1954년 = 통영 미래사에서 효봉 선사를 은사로 입산 출가

▲1956년 7월 15일 = 효봉 선사를 은사로 사미계 수계

▲1959년 3월 15일 =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자운율사를 계사로 비구계 수계

▲1959년 4월 15일 = 해인사 전문강원에서 명봉화상을 강주로 대교과 졸업, 이후 지리산 쌍계사와 가야산 해인사, 조계산 송광사 등 선원에서 수선안거(修禪安居)

▲1960∼1961년 = '불교사전' 편찬 작업에 동참

▲1967년 동국역경원 편찬부장

▲1972년 첫 저서 '영혼의 모음' 출간

▲1973년 불교신문사 논설위원, 주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민주수호국민협의회와 유신 철폐 개헌 서명운동 참여

▲1975년 10월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충격, 송광사 불일암으로 돌아감

▲1976년 대표 저서인 '무소유' 출간

▲1984∼1987년 송광사 수련원 원장

▲1985년 경전공부 모임 법사

▲1987∼1990년 보조사상연구원 원장

▲1992년 강원도 산골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고 홀로 수행정진

▲1993년 8월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준비위원회 발족

▲1993년 10월 10일 프랑스 최초의 한국 사찰인 파리 길상사 개원

▲1994년 1월 1일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창립

▲1994년 3월 26일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창립 기념 첫 대중법문을 서울, 부산, 대구, 전주 등지에서 하며 지부 발족

▲1995년 김영한(법명 길상화)씨의 대원각 시주를 받아들여 송광사 말사 '대법사'로 조계종에 등록

▲1997년 1월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 이사장 취임

▲1997년 12월 14일 대법사를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바꾸고 창건 법회

▲1998년 2월 24일 명동성당 축석 100돌 기념 초청 강연

▲2003년 10월 '맑고 향기롭게' 창립 10주년 기념 강연, 파리 길상사 개원 10주년 기념 법문

▲2003년 12월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 회주에서 스스로 물러남

▲2010년 3월 11일 길상사에서 법랍 55세, 세수 78세로 입적

(서울=연합뉴스)

cherora@yna.co.kr
세상을 보는 정직한 눈 < 한겨레 >

산문집으로 되새기는 법정의 '무소유'

연합뉴스 | 입력 2010.03.11 14:46 | 수정 2010.03.11

(서울=연합뉴스) 조채희 기자 =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을 쓰게 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있다는 뜻이다"('무소유' 중에서)

법정스님하면 떠오르는 단어 '무소유'. 법정스님이 1970년대 초반부터 쓴 글을 모아 1976년 펴낸 대표적인 산문집 '무소유(범우사)'를 비롯해 수십권의 책에서 한결같이 설파한 무소유의 정신은 무한경쟁과 탐욕의 시대에 우리가 지녀야 할 마음의 등불이다.

법정스님의 여러 산문집은 스님 특유의 담백하면서도 격조있는 필치로 고된 일상에 지친 일반인을 위로했고, 불교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스님이 말한 '무소유'는 불교의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즉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가지고 온 것도 없고 세상을 하직할 때 가져가는 것도 없다는 가르침에서 비롯됐다.

이런 청백가풍(淸白家風)의 무소유의 정신을 일상에서 실천하라고 권한 스님의 글은 종교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에게 호응을 얻었다.

산문집 '무소유'에 수록된 1971년의 글 '무소유'에는 법정스님이 평생 수십권의 책을 통해 반복해 강조했던 무소유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당시 3년 째 난초 화분 둘을 애지중지 길렀다는 스님은 장마 후 쏟아지는 햇볕 아래 화분을 놓고 왔다는 생각에 허둥지둥 거처로 돌아간 일화를 소개하며 자신의 집착을 뉘우친다.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을 통해 무소유(無所有)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所有史)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소유욕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다. 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려 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는 끔찍한 비극도 불사하면서. 제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스님은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담요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 이것뿐이요"라고 했던 마하트마 간디의 어록에서 크게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쓴다.

1992년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한번 출가하는 마음으로 강원도 화전민이 버리고 떠난 산골 오두막으로 들어간 스님은 1995년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에 이어 새천년을 앞둔 1999년 12월에 수상집 '오두막 편지'를 내놓는다.

'오두막 편지'에서 스님은 "현재 내가 몸담아 사는 산중 오두막은 여러가지로 불편한 환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곳에서 단순하고 간소하게 내 식대로 살 수 있기 때문에 일곱 해째 기대고 있다. 어디를 가보아도 내 그릇과 분수로는 넘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어, 나는 이 오두막을 거처로 삼고 있다"고 썼다.

또 "'소욕지족(少慾知足)', 작은 것과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작은 것과 적은 것 속에 삶의 향기인 아름다움과 고마움이 깃들어 있다"고 가르치기도 했다.

스님은 강원도 산골 생활 17년째가 되던 2008년 11월에는 길상사 소식지 '맑고 향기롭게'에 기고했던 수필을 모아 '아름다운 마무리'를 펴내 삶의 마지막에 선 노승의 마음을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스님은 2007년 한차례 병으로 입원하면서 이미 많이 쇠약해진 상태였다.

"길상사를 드나들면서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얻어간다. 그때마다 마음이 개운치 않고 아주 무겁다. 말로는 무소유를 떠벌리면서 얻어 가는 것이 너무 많아 부끄럽고 아주 부담스러웠다. 늙은 중이 욕심 사납게 주는대로 꾸역꾸역 가지고 가는 꼴을 이만치서 바라보고 있으면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그러면서 스님은 "놓아두고 가기! 때가 되면, 삶의 종점인 섣달 그믐날이 되면, 누구나 자신이 지녔던 것을 모두 놓아두고 가게 마련이다. 우리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나그네이기 때문이다. 미리부터 이런 연습을 해두면 떠나는 길이 훨씬 홀가분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스님이 말하는 '아름다운 마무리' 는 역시 "스스로 가난과 간소함을 선택해 소유의 비좁은 감옥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언제든 떠날 채비를 갖춘다. 그 어디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순례자나 여행자의 모습으로 산다. 우리 앞에 놓은 이 많은 우주의 선물도 그저 감사히 받아 쓸 뿐, 언제든 빈손으로 두고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한다…아름다운 마무리는 낡은 생각, 낡은 습관을 미련없이 떨쳐 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마무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법정스님의 첫 법문집인 '일기일회(一期一會, 2009년 6월 출간)'에도 무소유의 마음이 잘 나타나있다. 스님은 2008년 5월24일 여름안거 결제를 맞아 했던 법문에서도 '버리고 떠나기'를 강조했다.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아야한다. 모든 것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되지 않아야한다. 모든 것을 가지려면 어떤 것도 필요로 함 없이 그것을 가져야한다. 버렸더라도 버렸다는 관념에서조차 벗어나라. 선한 일을 했다고 해서 그 일에 묶여 있지 말라.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가듯 그렇게 지나가라"

chaehee@yna.co.kr 

그가 남긴 名文들…<무소유><아름다운 마무리><내가 사랑한 책>

매일경제 | 입력 2010.03.11 17:47 | 수정 2010.03.11

◆법정스님 입적

법정 스님의 문명(文名)을 널리 알린 작품은 무엇일까. 누구도 주저없이 '무소유'(1976년)를 꼽을 것이다. 소유와 집착에 대한 깨달음을 기록한 '무소유'를 비롯해 35편의 수필을 모은 이 책은 현대 한국 수필의 대표격으로 평가받는다. 인기도 많아 34년 동안 180쇄를 찍었고, 지금까지 330만부가 팔렸다.

책의 표제작이기도 한 '무소유'는 스님이 평생 동안 강조했던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ㆍ이 세상에 태어날 때 가지고 온 것도 없고 세상을 하직할 때 가져가는 것도 없다는 가르침)'의 정신을 고스란히 담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마하트마 간디가 남긴 명언에서 시작한 글은 당시 스님이 애지중지했다는 난초에 관한 이야기로 옮겨간다. 장마 후 쏟아지는 햇볕 아래 화분을 놓고 왔다는 생각에 허둥지둥 거처로 돌아갔다는 스님. 그는 이 일화를 회상하며 "'소유가 인간을 싸우게 하며, 소유에 대한 집착이 인간을 괴롭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을 통해 무소유(無所有)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所有史)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소유욕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스님은 그 이후에도 무한경쟁과 탐욕의 시대에 우리가 지닐 마음의 자세에 대해 논한 명문을 많이 남겼다.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오두막 편지' 등은 출간되자마자 각박한 세상살이에 찌든 현대인들의 마음을 어루만졌고, 모두 큰 인기를 얻었다. 2007년 한 차례 병으로 입원한 후 쇠약해진 자신을 돌아보며 느낀 심정을 담담하게 표현한 '아름다운 마무리'(2008년)도 또 다른 대표작. 그는 "놓아두고 가기! 때가 되면, 삶의 종점인 섣달 그믐날이 되면, 누구나 자신이 지녔던 것을 모두 놓아두고 가게 마련이다. 우리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나그네이기 때문이다. 미리부터 이런 연습을 해두면 떠나는 길이 훨씬 홀가분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법정 스님의 글들은 불교의 가르침을 담았으면서도, 종교적 색채를 강하게 띠지 않았다는 특징이 있다. 한 문학평론가는 "스님 특유의 담백하면서도 격조 있는 필치도 감동에 백 배 힘을 보탰다"고 말했다.

스님은 폐암으로 힘든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끝까지 책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은 '애서가'였다. 최근에도 '내가 사랑한 책'을 펴냈고, 이 책이 결국 법정 스님의 유작이 되고 말았다. '내가 사랑한 책'은 스님이 여러 곳에서 언급했던 300여 권의 책 중에서 50권의 책을 직접 골라 소개한 것으로, 종교 관련 서적 외에도 동서양 문학작품과 환경 서적 등 다양한 책을 담았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 사티쉬 쿠마르의 '끝없는 여정' 등 현대문명의 효율성에 이의를 제기하며 보다 본질적인 삶이 무엇인지 질문을 제기한 책들이 대부분이다.

스님은 출가할 당시를 떠올리며 "넉넉하지 못한 집안에서 어렵사리 모은 책들을 버리고 떠나는 게 못내 망설여졌다. 그것이 나의 유일한 소유물이었기 때문"이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손동우 기자] 

말과 글로 지은 그의 큰 집에서 편안하게 몸을 의지했는데…

매일경제 | 입력 2010.03.11 17:41 | 수정 2010.03.11

영혼의 성불이 돌아가셔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시인 정호승)

마음을 비우고 더불어 사는 삶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준 법정 스님의 가르침은 입적 후에도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주고 있다. 그의 말과 글에 인생 방향을 바꾸고 삶을 성찰했던 각계각층 사람들이 그의 입적에 애도를 표하고 있다. 법정 스님이 종교계를 넘어 문화예술계 등 다방면으로 수많은 인사들과 교류했기 때문에 그 추모 물결이 깊고 높다.

이명박 대통령은 조전에서 "살아생전 빈 몸 그대로 떠나셨지만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남겨주셨다. 많이 갖고 높이 올라가기를 욕심 내는 현대인들에게 비우는 삶, 베푸는 삶의 소중함을 보여주셨다"고 회고했다.

이 대통령은 법정 스님 저서를 항상 추천도서 1호로 꼽았으며 외국 순방 또는 휴가 시 항상 법정 스님 수필집을 가지고 다녔다. 수필집 '무소유'는 여러 번 읽은 것으로 알려졌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은 11일 "고통 받는 중생들에게 많은 위로와 사랑을 주셨던 법정 스님 원적은 불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에게 큰 슬픔"이라며 "스님께서 부디 극락왕생하시기를 기원하며 애도의 뜻을 표한다"고 말했다.

'무소유'에 깨달음을 얻어 고향인 전남 장흥으로 낙향한 소설가 한승원 씨는 "법정 스님 말씀과 삶은 엄청나게 큰 너울(바람에 일어난 물결)이자 커다란 집이었다"며 "말과 글로 지은 그의 큰 집에서 편안하게 몸을 의지할 수 있었으며 답답할 때 꺼내 마시는 생명수와도 같은 존재였다"고 추모의 마음을 전했다.

이어 "법정 스님은 고 김수환 추기경과 더불어 우리 사회가 의지하는 큰 어른이었다"고 덧붙였다.

정호승 시인은 입적 소식을 듣고 "아이고…"라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법정 스님과 여러 차례 만난 적이 있는 정 시인은 "우리 시대 스승이 결국 이렇게 떠나시는구나"라며 애도했다.

소설가 박완서 씨는 "정말 서운하다. 스님 생전에 몇 번 교유가 있었고 멀리서 흠송하는 마음으로 봤다"며 "나는 가톨릭 신자지만 그분은 타 종교에 배타적이지 않아 존경했으며, 큰 어른이 돌아가셔서 마음으로 애도한다"고 말했다.

국악인 안숙선 씨도 법정 스님과 인연이 있다. 안씨는 "여러 어른들과 함께 만나 법정 스님을 지켜본 적이 있다"며 "사람은 뭐든지 채우려고만 해서 고통을 겪는데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사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비구니 출신 재즈가수 웅산 씨는 "법정 스님은 '인간의 목표는 풍요롭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존재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며 "음악을 하다 보면 물질적 욕심도 나지만 법정 스님 책을 읽은 후 음악인이 가야 할 올바른 길을 성실하게 가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법정 스님은 다른 종교와도 벽을 허물어 큰 발자취를 남겼다. 길상사 마당에 있는 관음보살상을 독실한 천주교신자 조각가인 최종태 전 서울대 교수(김종영미술관장)에게 맡겨 화제를 모았고, 1997년 12월 길상사 개원법회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방문했다. 법정 스님은 이에 대한 화답으로 이듬해 명동성당에서 특별 강론을 하기도 했다.

최종태 관장은 "관음상을 조각해보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예전부터 많이 했는데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법정 스님이 연락을 해와 그 뒤로 10여 년간 가깝게 지냈다"며 "깨끗하고 향기로운 품격을 갖고 있던 분"이라며 고인을 추억했다.

법정 스님 수필집 '아름다운 마무리'에 등장하는 소녀 '봉순이' 그림을 그린 박항률 화백은 "열흘 전쯤 병원을 찾았지만 주무시고 계셔서 직접 이야기는 나누지 못하고 돌아왔다"며 "당시 주변에서 좀 더 좋아지실 것이라 했는데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고 슬퍼했다.

[전지현 기자 / 이진명 기자] 

해남 태생 '무소유' 법정스님 애도 분위기 고조

뉴시스 | 구용희 | 입력 2010.03.11 16:12 | 수정 2010.03.11

【광주=뉴시스】구용희 기자 = "한 걸음, 한 걸음 삶을 내딛습니다. 발걸음을 떼어 놓고 또 걷고 걷고….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지만 짊어지고 온 발자국은 없습니다. 그냥, 가 버리면 그만인 것이 우리 삶이고 세월입니다."

길상사 회주 법정 스님이 11일 입적한 가운데 그가 열었던 '무소유'의 삶이 고향인 전남 해남과 17년 동안 깨달음을 구했던 순천 송광사 불일암에서부터 시작됐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스님의 입적 소식이 알려지자 광주 지역 주요 사찰들도 평소 스님의 삶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애도하는 분위기다.

11일 송광사 말사 증심사 등에 따르면 법정스님은 1932년 산세가 수려한 전남 해남군 문내면에서 태어났다.

이후 목포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전남대 상과대학에서 3학년을 수료한 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이 되고 싶다'며 1954년 출가를 결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1972년 유신철폐 개헌 서명운동에 뜻을 함께 하기도 했던 스님은 1975년 10월 송광사 불일암 터에서 토굴을 짓고 17년이라는 긴 시간을 수행으로 보냈다.

1980년 초반에는 송광사 수련원장을 맡아 부처님의 진리를 대중에게 설파하기도 했다.
이후 강원도 산골로 행적을 옮긴 스님은 지난 2003년 광주를 방문, '맑고 향기로운 삶'을 주제로 시민들 앞에 서기도 했다.

증심사 한 관계자는 "많은 불자들의 요청에 따라 법정 스님을 모시고 광주에서 강연회 등을 가지려 했으나 스님의 건강상태 등 여건이 여의치 않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고 말했다.

한편 송광사 말사인 증심사와 광주 서구 치평동 무각사에는 스님의 입적 소식을 접한 지역 불자들의 발걸음이 속속 이어지고 있다. 사찰 측도 13일 순천 송광사에서 열릴 다비식 준비로 분주한 모습이다.

무각사에서는 스님의 입적을 애도하는 시민들을 위해 분향소를 마련할 계획이다.

persevere9@newsis.com 

법정스님과 절이 된 요정 '대원각'

머니투데이 | 김태은 기자 | 입력 2010.03.11

머니투데이 김태은 기자]






↑고 김영한ⓒ길상사

법정(法頂·78)스님이 11일 자신이 창건한 길상사에서 입적했다.
지병인 폐암으로 투병해온 법정은 이날 낮 입원중이던 삼성서울병원에서 길상사로 옮긴직후인 오후 1시51분께 열반에 들었다. 서울 성북2동에 위치한 길상사는 1997년 세워졌다.

길상사는 본래 고급요정 '대원각'이었다. 80년대말까지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3대요정으로 꼽히며 밀실정치에 이용됐던 곳이다.

대원각의 주인이었던 고 김영한(1916~1999)이 법정에게 시주해 절을 만들어주기를 청하면서 길상사가 탄생했다. 16세때 조선권번에 들어가 '진향'이라는 기생이 됐던 그는 대표적 근대시인 백석(1912~1995)의 연인이기도 했다. 백석에게 자야(子夜)라고 불리웠던 그는 '백석,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내 사랑 백석' 등의 저술을 냈다.

김영한은 법정의 대표적인 산문집 '무소유'를 읽고 감명받아 당시 시가 1000억원에 달했던 7000여평 절터와 전각을 내놓았다. 사양하는 법정을 10년에 걸쳐 설득해 그 뜻을 이루었다고 한다.

97년 12월14일 길상사가 개원하던 날, 김영한은 법정으로 부터 염주 하나와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만을 받았다. 수천 대중 앞에서 단 두 마디를 남겼다.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99년 11월14일 타계한 그는 하루 전날 목욕재계하고 절에 와 참배하고 길상헌에서 생애 마지막 밤을 묵었다고 전해진다. 다비후 유골은 유언대로 길상헌 뒤쪽 언덕바지에 뿌려졌다.

한편 '무소유'를 비롯 '버리고 떠나기', '산에는 꽃이피네' 등 대중서 20여권으로 깊은 울림을 남긴 법정은 한동안 길상사의 회주를 맡았다. 그외에는 그 흔한 사찰주지 한번 지내지 않으며 '무소유'를 실천한 삶을 살았다.





↑길상사에 위치한 고 김영한을 기리는 공덕비ⓒ길상사

편히 가소서!"...추모객 줄이어

YTN | 입력 2010.03.11

앵커멘트]

법정스님의 입적 소식에 많은 시민들이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기 위해 분향소로 모이고 있습니다.

쉽고 정갈한 언어로 일깨움을 주었던 법정스님의 업적을 기리며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분향소가 마련 중인 서울 길상사에 중계차 나가 있습니다. 양일혁 기자!

추모객들 행렬이 시작되고 있는 것 같은데, 분향소가 차려졌나요?

[중계 리포트]

아직 아닙니다.

지금 이곳은 분향소를 마련 하기 위한 준비로 한창 바쁜 모습입니다.

분향소는 제 뒤로 보이는 극락전 앞 마당과 옆에 있는 설법전 안에 마련될 예정인데요, 적어도 한 시간 이상 지나야 분향이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아직 분향이 시작되기 전이지만, 지금 이곳은 법정 스님의 입적 소식을 듣고 찾아온 불교 신자와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분향소 대신 극락전에서 절을 올리며 고인의 업적을 기리면서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특히, 평소 강조했던 대로 무소유의 정신을 실천했다며 고인의 행적을 기리고 있습니다.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 등 각계각층 인사들 발걸음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잠시 뒤 분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더욱 많은 신자와 시민들이 분향소를 찾을 것으로 보입니다.

더욱이, 내일 정오면 법구가 다비식을 위해 전남 순천에 있는 송광사로 운구되기 때문에 추모 행렬은 밤새 계속될 전망입니다.

길상사 측은 오는 길이 좁은데다 주차 공간이 협소해 교통 혼잡이 예상된다며 가급적 대중교통을
이용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또, 고인의 뜻에 따라 조화와 조의금은 일체 받지 않기로 했다며 경건한 마음만 감사히 받겠다고 전했습니다.

지금까지 서울 길상사에서 YTN 양일혁[hyuk@ytn.co.kr]입니다

법정스님 입적] 홍라희씨, 병원비 6000만원 기부

한국경제 | 입력 2010.03.11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의 부인인 홍라희씨가 11일 입적한 법정 스님의 병원비 6000만원 상당을 기부했다.

11일 삼성에 따르면 홍씨는 '무소유'를 실천해 온 법정 스님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사비로 병원비를 냈다. 독실한 원불교 신자인 홍씨는 오래 전부터 법정 스님을 흠모해 왔다는 게 삼성 안팎의 전언이다.

홍씨는 불교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는 조계종 불교여성개발원이 지난 1월 선정한 '여성불자 108인' 중 한 명이다. 불교여성개발원은 2003년부터 2년마다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하는 여성 불자 108명을 선정해 발표하고 있다.

송형석 기자 click@hankyung.co,

법정스님은 누구인가 "연꽃과 같은 영혼의 스승"

머니투데이 | 김태은 기자 | 입력 2010.03.11 16:35 | 수정 2010.03.11

머니투데이 김태은 기자]






(사)시민모임 맑고향기롭게 중앙사무국은 11일 법정(法頂)스님의 행장(사람이 죽은 뒤에 그의 행적을 적은 글)을 발표했다.

산문집 '무소유'로 널리 알려진 법정스님은 이날 오후1시51분께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입적했다. 세수 78세. 법랍 55세.

사무국이 공개한 '법정 스님은 누구인가-이 시대의 연꽃과 같은 영혼의 스승' 전문은 다음과 같다.
'맑음은 개인의 청정을, 향기로움은 그 청정의 메아리를 뜻한다.'
맑고 향기로운 세상을 가꾸는데 앞장 선 법정 스님은 193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다. 스님은 목포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전남대 상과대학 3학년을 수료한 뒤 진리의 길을 찾아 출가를 결심했다.

"난 그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인이 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휴전이 되어 포로 송환이 있을 때 남쪽도 북쪽도 마다하고 제3국을 선택, 한반도를 떠나간 사람들 바로 그런 심경이었다."

출가에 대한 스님의 변이다.
1954년 통영 미래사에서 효봉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스님은 1959년 해인전문강원을 수료하고 비구계를 수지하셨다. 그 뒤 스님은 < 불교사전 > 편찬 작업, 동국대 역경원 역경위원 등 불교계 언론과 출판 분야에서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1970년 초반 대한불교신문(현 불교신문의 전신) 논설위원과 주필을 맡아 날카로운 필력을 드러내셨다. 1972년 첫 에세이 집 < 영혼의 모음 > 을 동서문화원에서 출판, 장안의 화제를 모았다. 1973년 6월에는 함석헌이 주도했던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으로 합세하면서 씨알의 소리에 큰 활력을 불어넣기도 한다. 스님은 또 장준하 선생과 함석헌 선생을 가까이하면서 민주수호국민협의회와 유신철폐 개헌서명운동에 참여했다. 이때 기관원이 절에 살다시피 하면서 감시하고 걸핏하면 연행해 가 괴롭혔다.

"피해자 처지에서 군사독재 당사자들을 향한 적개심과 증오심을 품게 되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핍박을 받는 처지였음에도 당시의 심정을 스님은 이렇게 회고하셨다.

1964년 박정희 정권은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 시위로 위기에 봉착하자 41명의 혁신계 인사와 언론인·교수·학생 등이 인민혁명당을 결성하여 국가전복을 도모했다고 조작 발표한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1972년 12월 독재 정권 연장을 위한 유신 헌법이 발효된다. 이에 학생, 시민, 민주계 인사 등의 유신 철폐 개헌 서명 운동이 일어났고 여기에 스님도 뜻을 함께 하였다. 그러자 독재 정권은 또다시 1975년, 이른바 제2 인혁당 사건(일명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라 불리는 정치 조작극을 벌인다. 도예종 등 사회주의 성향을 보이는 한 무리의 인사들을 또 다시 국가전복 기도 혐의로 구속, 재판에 회부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사형이 언도되고 그에 대한 대법원 상고가 기각된 지 채 20시간도 지나지 않은 바로 그 이튿날 여덟 사람 전원을 사형시키는 사법사상 유래가 없었던 만행을 저지른다. 이를 목격한 법정 스님은 큰 충격을 받는다.

"죄 없는 그들을 우리가 죽인 거나 다름이 없다고 자책했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독재자들에게 조작극이라고 가장 아픈 곳을 찌르자, 보란 듯이 서둘러 사형을 집행한 것이다."

그 사건을 계기로 생때같은 젊은이들을 하루아침에 죽게 만든 이와 같은 반체제운동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곰곰이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는 법정 스님은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산으로 들어가신 까닭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민주화 운동을 할 때 박해를 받으니까 증오심이 생기더군요. 내 마음에 독을 품는 게 증오심인데 그때 '이래선 수행에 도움이 안 되겠구나'하고 느꼈어요. 순수한 마음에서 이탈하는 게 괴롭고. 중노릇하는 내 본분이 뭐냐고 스스로 물었지요. 본래 자리로 돌아가자. 해서 산으로 들어갔어요. 하지만 지금도 세상일에 관심을 안 가질 수는 없지요."

무슨 운동이든지 개인 인격형성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스님은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 무엇 때문에 출가수행자가 되었는가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씀하신다.

"이웃에 불이 났을 때 소방관이고 누구고 할 것 없이 모두 나와서 급한 불을 꺼야 한다. 하지만 일단 불이 잡힌 뒤에는 각자 원위치로 돌아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몫을 다해야 한다."

75년 10월 스님은 거듭 털고 일어서는 각오로 미련 없이 서울을 등지고 송광사로 돌아 가셨다.

부도만 남아있던 불일암 터에 스님은 토굴을 다시 짓고 홀로 있으면서도 대중과 함께 수행하듯 철저한 자기 질서 속에 독서와 수행에 힘쓰셨다. 이 무렵인 1976년 발간된 저서가 바로 34년 세월이 흘렀건만 오늘에도 많은 이들에게 큰 울림을 주는 < 무소유 > 이다.

1984년 스님은 송광사 수련원장을 맡는다. 4박 5일 일정으로 수련생들이 1,080배를 하게 하고, 윤좌 모임을 열어 참선 실수실참을 하게끔 매년 여름 실시되던 여름 선 수련회 기틀을 잡았다. 매년 7월과 8월, 불과 두 달간 열리는 수련회 연 참가 인원은 평균 500여 명으로 불자는 물론 타종교인들에게까지 큰 호응을 받았다. 송광사 수련회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그 뒤 웬만한 큰 사찰들은 거의 여름철 선 수련회를 실시할 정도로 반향을 일으켰다.

어느 날 스님은 다시 한 번 버리고 떠나신다. 17년 간이나 살았던 정든 불일암을 끊임없이 찾아드는 사람들 등쌀에 그조차 뒤로 하시고 화전민이 살다가 버리고 간,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 드셨다. 1992년 일이다.

1993년 7월 연꽃이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라는 까닭 하나만으로 독립기념관, 경복궁, 창덕궁 연못의 연꽃을 모두 없어지는 기막힌 사실과 마주선다. 나라 지도자가 신앙하는 종교에 앞서 충성하려는 너무나 얄팍한 몇몇 사람 처사였음을 접한 스님은 아연실색하셨다. 그 어이없는 심정을 '연못에 연꽃이 없더라'는 글로 발표하신다.

이 일을 계기로 스님은 다시 한 번 세속 일에 관여하시게 된다. 날로 각박해져만 가고 메말라만 가는 우리 심성을 마음과 세상과 자연을 두루 맑고 향기롭게 가꾸면서 살아가자는 순수 시민운동을 주창하신 것이다. 주변 친지들의 권유와 시주의 은혜로 살아온 출가사문으로 작은 역할이나마 하시겠다며 1993년 8월 스님은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준비 모임'을 발족 시키고 1994년 1월에는 연꽃을 로고로 한 스티커 10만장을 무료 배포하며 서울과 부산 이어 대구, 광주, 경남, 대전 등지에서 스님 최조의 대중 강연을 하시며 모임을 만들고, 여기에 뜻을 함께 하겠다는 회원들을 오늘까지 17년 째 이끌어 주고 계시다.

한편 법정 스님이 늘 강조하고 실천했던 무소유 사상에 감동한 길상화(고 김영한) 보살이 성북동 대원각 터 7천여 평을 스님께 시주함에 따라 1997년 12월, '맑고 향기롭게' 근본 도량인 길상사가 개산되었다.

법정 스님의 이와 같은 발자취에 따라 오늘날 대중들은 법정 스님을 무소유(無所有)를 몸소 실천하는 스님으로, 맑고 향기롭게 운동을 펼치는 불교계의 어른 스님으로, 주옥같은 글로 대중을 감동시키는 온 국민의 스승으로, 한평생 청정하고 올곧게 수행하며 대중들 영혼을 맑히는 이 시대의 큰 스님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처럼 법정 스님하면 떠올리게 되는 용어들이 많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 낱말은 무소유다.

법정 스님은 "우리는 필요에 따라 소유한다. 하지만 그 소유 때문에 마음이 쓰이게 된다. 따라서 무엇을 갖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에 얽매이는 일, 그러므로 많이 가지면 그만큼 많이 얽매이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무소유는 단순히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을 뜻한다"고 정의하셨다.

세속 명리와 번잡함을 싫어했던 법정 스님은 송광사 불일암 이래 최근까지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서 은둔하는 삶을 사셨다. 수많은 상좌와 지인들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홀로 땔감을 구하고 밭을 일구시며 청빈을 실천하셨다. 이렇게 맑은 삶을 스님은 주옥같은 산문으로 풀어내 대중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셨다.

무엇보다 스님의 간결하면서도 쉬움 말씀은 일반 독자들이 불교에 가까이 다가서게 하는데 큰 발자국을 남기셨다. 1976년 범우사에서 펴낸 < 무소유 > 는 초판 발행 한 뒤 지금까지 꾸준하게 사랑받는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으며 명 에세이로 손꼽히고 있다. 그 밖에 < 산에는 꽃이 피네 > , < 일기일회 > 들은 수십만 독자가 찾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불교계 거목' 법정스님 입적 ‥ 생전에 추천한 50권의 책은?

한국경제 | 입력 2010.03.11 15:02 | 수정 2010.03.11

11일 폐암 투병끝에 입적한 법정(法頂)스님(78)은 탁월한 문장력을 바탕으로 한 산문집을 통해 일반 국민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은 '스타' 스님이다.

불자나 스님들 사이에서도 1993년 열반한 성철 스님에 이어 인지도가 높은 스님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평생 불교의 가르침을 지키는 출가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았고, 산문집의 제목처럼 '무소유'와 '버리고 떠나기'를 끊임없이 보여줬다.

법정 스님은 평소 "산중 오두막 생활에서 가장 행복한 때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책을 읽을 때,즉 독서삼매에 빠졌을 때"라고 말해 왔다. 출가를 결심한 뒤 단박에 삭발하고 입은 승복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지만 유일한 '소유물'이었던 책만큼은 끊기 힘든 인연이었다고 말했을 정도로 그는 애서가였다.

그런 법정 스님이 평소 법회 등에서 언급한 책 중 50권을 골라 소개한 《내가 사랑한 책들》(문학의숲)이 출간됐다. 법정 스님이 평소 법회나 기고문에서 언급한 책 가운데 300권을 고르고 2년여에 걸쳐 스님과 대화하며 이 중 50권을 추려냈다는 게 출판사 측의 설명.추천된 책의 주요 내용과 법정 스님이 인용하거나 언급한 내용 등을 소개하고 있다.

평소 "좋은 책은 세월이 결정한다. 베스트셀러에 속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던 법정 스님은 병중에도 원고를 꼼꼼히 읽고 문장을 바로 잡아주었다고 한다.

50권 중에는 종교책,명상서적,동서고금의 문학작품,환경 책,인권 관련서 등 다양한 장르와 주제의 책이 포함돼 있다. 법정 스님이 경전이나 그 주석서 못지않게 자주 봤다는 《어린왕자》 《꽃씨와 태양》 같은 동화부터 소유에 대한 개념을 배웠다는 《톨스토이 민화집》,읽은 뒤 직접 현장을 찾았던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와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창간호부터 줄곧 구독해 온 《녹색평론》,인도 철학의 꽃이라 불리는 《바가바드기타》까지 일독을 권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 예찬》,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제러미 리프킨의 《음식의 종말》 등도 추천목록에 올랐다. 국내서로는 윤구병의 《가난하지만 행복하게》,김태정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꽃 백가지》,허균의 《숨어사는 즐거움》 등 고금의 명저를 망라했다.

한편 최근 수년간 몇 차례 수술과 치료를 받은 법정 스님은 지난 겨울 제주도에서 요양해 왔으나 병세가 악화돼 삼성서울병원에 입원 중 끝내 입적했다.

한편 법정스님에 대한 다비식은 오는 13일 전남 순천 송광사에서 치러질 예정이다.

다비식이란 시체를 화장하여 그 유골을 거두는 의식을 말한다.

뉴스팀 newsinfo@hankyung.com

법정스님이 번역한 불경

연합뉴스 | 입력 2010.03.11 16:25 | 수정 2010.03.11

서울=연합뉴스) 김윤구 기자 = '무소유' 등 여러 산문집을 남긴 것으로 유명한 법정스님은 불교 경전 번역에도 많은 자취를 남겼다.

법정스님은 1960년대 말 동국대 동국역경원 편찬부장을 지내며 불경 번역 작업에 참여했으며 여러 종의 불경 번역서를 출간했다.

시중 서점에서 찾아볼 수 있는 법정스님의 경전 번역로는 '신역 화엄경'(동국대출판부), '숫타니파타', '진리의 말씀 법구경'(이상 이레)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번역서 가운데 1988년 출간된 '신역 화엄경'은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가운데 '보살문명품', '정행품', '십행품', '십회향품', '십지품', '여래출현품', '이세간품', '입법계품' 등 주요 내용을 간추려 번역하고 주석을 단 책이다.

화엄종 근본 경전인 '대방광불화엄경'은 흔히 '화엄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설파해, 대승불교의 근간을 이루기도 한다.

1999년 나온 '숫타니파타'는 불교경전 가운데 가장 초기에 속하는 것으로 중요성이 큰 '숫타니파타'를 번역한 것이다.

'숫타니파타'는 '말의 모음집'이란 뜻으로 부처의 제자들이 스승의 가르침을 추려 간결한 산문 형태로 암송하기 쉽게 해 구전했다.

"뱀의 독이 몸에 퍼지는 것은 약으로 다스리듯, 치미는 화를 삭이는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듯"과 같은 구절이 실렸다.

'진리의 말씀 법구경'은 수많은 불교 경전 가운데 가장 널리 읽히는 '법구경'을 번역한 책이다. 1984년 불일출판사에서 처음 출간했으며 1999년에 출판사를 바꿔 재출간했다.

'법구경'은 원래 이름이 '담마파다'로 '진리의 말씀'이란 뜻이다. '법구경'은 다른 경전처럼 일정한 장소와 시대에 한 주제 아래 만든 경전이 아니라 불교 초기에 여러 가지 형태로 전해내려온 시를 모아 엮은 불교 잠언 시집이다.

법정스님은 또 '무량수경'과 '관무량수경', '아미타경'으로 구성되는 이른바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을 번역했다. 조선시대 휴정스님이 수행 지침서로 지은 '선가귀감'을 번역하기도 했다.

요컨대 법정스님은 역경가(譯經家)이기도 했다.
kimyg@yna.co.kr

법정 스님 "하루 한가지씩 버려야…" 한평생 청빈한 삶 설파

서울경제 | 입력 2010.03.11

무소유' 법정 스님 입적
타 종교와 벽 허무는데도 큰 발자취
4·19등 겪으며 유신철폐운동 참여도
76년 산문집 '무소유'로 대중 사랑 받아

입적한 법정(法頂) 스님은 불교계의 큰스님이다.

탁월한 문장력으로 적어내려간 산문집을 통해 일반 국민들에게도 큰 사랑을 받았고 불자나 스님들 사이에서는 지난 1993년 열반한 성철 스님 다음으로 널리 알려진 스님이다.

평생 불교의 가르침을 지키는 출가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았고 자신이 창건한 길상사의 회주를 한동안 맡았을 뿐 그 흔한 사찰 주지 한번 지내지 않았다.

스님은 또 다른 종교와 벽을 허물었던 것으로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법정 스님은 길상사 마당의 관음보살상을 독실한 천주교 신자 조각가인 최종태 전 서울대 교수에게 맡겨 화제를 모았고 1997년 12월 길상사 개원 법회에는 고(故) 김수환 추기경을 초대하기도 했다. 법정 스님은 이에 대한 화답으로 이듬해 명동성당에서 특별강론을 하기도 했다.

1932년 10월8일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법정 스님은 한핏줄끼리 총부리를 겨눈 한국전쟁을 경험하면서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 앞에서 고민한다.

그는 대학 재학 중이던 1955년 마침내 입산출가를 결심하고 싸락눈이 내리던 어느 날 집을 나섰고 서울의 안국동 선학원에서 당대의 선승 효봉(1888~1966ㆍ조계종 통합종단 초대 종정) 스님을 만나 대화한 뒤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았다. 그 다음날 통영 미래사로 내려가 땔감을 담당하는 부목(負木)부터 시작해 행자생활을 했다. 28세 되던 1959년 3월 양산 통도사에서 자운 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고 1959년 4월 해인사 전문 강원에서 명봉 스님을 강주로 대교과를 졸업했다.

4ㆍ19와 5ㆍ16을 겪은 스님은 1960년대 말 서울 봉은사 다래헌에서 운허 스님 등과 함께 동국역경원의 불교 경전 번역작업에 참여 하기도 했다. 이 시절 함석헌ㆍ장준하ㆍ김동길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고 유신 철폐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1975년 인혁당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뒤 반체제운동의 의미와 출가수행자로서의 자세를 고민하다 다시 걸망을 짊어졌다.

1975년 10월부터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홀로 살며 1976년 산문집 '무소유'를 냈고 그 뒤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불일암 생활 17년째 되던 1992년 그곳마저 떠나 강원도 화전민이 살던 산골 오두막에서 지금까지 혼자 지내왔다. 스님은 평소에는 강원도 산골에서 지냈지만 대중과의 소통은 계속했다. 특히 1996년 고급 요정이던 성북동의 대원각을 시인 백석의 연인으로 유명했던 김영한(1999년 작고) 할머니에게 기부 받아 이듬해 12월 길상사로 탈바꿈시켜 창건했고 1년에 여러 차례 정기 법문을 해왔다.

법정 스님은 2003년 12월에는 길상사 회주 자리도 내놓았다. 하지만 정기 법문은 계속하면서 시대의 잘못은 날카롭게 꾸짖고 세상살이의 번뇌를 호소하는 대중을 위로했으며 뛰어난 필력을 바탕으로 우리 출판계 역사에 기록될 베스트셀러를 숱하게 남겼다.

스님은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망각한 채 전통과 타성에 젖어 지극히 관념적이고 형식적이며 맹목적인 수도생활에 선뜻 용해되고 싶지 않았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법정 스님은 조계종단과 사회를 위한 활동도 활발히 했다. 법정 스님은 대한불교 조계종 기관지인 불교신문 편집국장, 송광사 수련원장, 보조사상연구원장 등을 지냈고 1994년부터는 환경보호와 생명사랑을 실천하는 시민운동단체인 사단법인 '맑고향기롭게'를 만들어 이끌어왔다.

주위 사람들은 건강이 좋지 않은 스님이 지난해 겨울을 제주도에서 보냈다가 건강 상태가 더욱 악화돼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한 뒤에도 계속해서 "강원도 오두막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 법정의 '무소유'


"태어날때 가지고 온것 없고 하직할때 가져가는 것 없다"


법정 스님과 연관돼 떠오르는 단어는 '무소유'다.

법정 스님은 지난 1976년 출간한 산문집 '무소유(범우사 펴냄)'를 비롯해 수십권의 책에서 한결같이 무소유의 정신을 설파했다. 그가 말한 '무소유'는 불교의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가지고 온 것도 없고 세상을 하직할 때 가져가는 것도 없다'는 가르침에서 출발한다.

청빈을 일상에서 실천하라고 권한 스님의 글은 종교를 불문하고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71년 쓴 글 '무소유'에는 법정 스님이 평생 수십권의 책을 통해 반복해 강조했던 무소유의 정신이 담겨 있다. 당시 3년째 난초 화분을 애지중지 길렀다는 스님은 장마 후 쏟아지는 햇볕 아래 화분을 놓고 왔다는 생각에 허둥지둥 거처로 돌아간 일화를 소개하며 자신의 집착을 뉘우친다.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볜?다짐을 했다. 난을 통해 무소유(無所有)의 의미 같은 것을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所有史)처럼 느껴진다. …… 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지를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려 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는 끔찍한 비극도 불사하면서. 제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 같은 무소유 철학은 수많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공감을 얻었다.




정승양기자 schung@sed.co.kr



육신벗고 눈 덮인 산으로 가셨을 것”

세계일보 | 입력 2010.03.11 18:20 | 수정 2010.03.11

마지막 가는 길 지킨 류시화 시인

"서귀포를 떠나기 전 죽음이 무엇인가 하고 묻자 법정 스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레와 같은 침묵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아마 육신을 벗고 맨 먼저 강원도 눈 쌓인 산을 보러 가셨겠지요."

11일 법정 스님의 마지막 길을 지킨 류시화 시인은 자신의 공식 홈페이지(www.shivaryu.co.kr)를 통해 깊은 애도의 뜻을 전했다. 법정 스님과 '산에는 꽃이 피네' 등의 책을 함께 내기도 한 류 시인은 스님과 각별한 인연을 쌓아 왔다.

류 시인은 스님이 서울의 병원에 입원해 있던 때 "강원도 눈 쌓인 산이 보고 싶다"고 했다면서 지난해 스님의 폐암이 재발한 이후부터 "이 육체가 거추장스럽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전했다. 시인은 "스님이 산소호흡기에 의지하다 11일 오전 의식을 잃고 입적한 사실을 두고 법정 스님과 어울리지 않는 마무리라고 하실 분들도 있겠지만 그것이 한 인간의 모습이고 종착점입니다. 어디에서 여행을 마치는가보다 그가 어떤 생의 여정을 거쳐왔는가가 더 중요함을 우리가 알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류 시인은 스님이 입적 며칠 전에 한 "만나서 행복했고 고마웠다"는 말을 그대로 스님에게 돌려주며 "사람은 살아서 작별해야 합니다. 그것이 덜 슬프다는 것을 오늘 깨닫습니다"라는 말로 글을 맺었다.

김은진 기자

법정스님 가로되…

뉴시스 | 신동립 | 입력 2010.03.11

서울=뉴시스】신동립의 잡기노트 < 174 > =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법정 스님에게 물어봄 직하다. 11일 입적한 고승은 매우 고맙게도 아주 많은 책을 남겼다.

'무소유' '영혼의 모음' '서 있는 사람들' '말과 침묵' '산방한담' '텅빈 충만' '물소리 바람소리' '버리고 떠나기' '인도 기행'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산에는 꽃이 피네' '오두막 편지' 등이다. 지난해에는 1992년 8월부터 2009년 4월까지의 법문을 모은 '일기일회'와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을 펴냈다. 법정의 마지막 산문집은 '아름다운 마무리'다.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와 떠남, 이별 이야기
"아름다운 마무리는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일의 과정에서, 길의 도중에서 잃어버린 초심을 회복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근원적인 물음 '나는 누구인가?'하고 묻는 것이다. 삶의 순간순간마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하는 물음에서 그때그때 마무리가 이루어진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내려놓음이다. 내려놓음은 일의 결과, 세상에서의 성공과 실패를 뛰어넘어 자신의 순수 존재에 이르는 내면의 연금술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이다. 채움만을 위해 달려온 생각을 버리고 비움에 다가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이고 그 비움이 가져다주는 충만으로 자신을 채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살아온 날들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것, 타인의 상처를 치유하고 잃어버렸던 나를 찾는 것, 수많은 의존과 타성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홀로 서는 것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용서이고, 이해이고, 자비이다. 삶은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며 새로운 시작이어야 한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지나간 모든 순간들과 기꺼이 작별하고 아직 오지 않은 순간들에 대해서는 미지 그대로 열어 둔 채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낡은 생각, 낡은 습관을 미련 없이 떨쳐 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마무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22~26쪽)

"삶은 과거나 미래에 있지 않고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살고 있음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삶의 비참함은 죽는다는 사실보다도 살아 있는 동안 우리 내부에서 무언가 죽어간다는 사실에 있다. 가령 꽃이나 달을 보고도 반길 줄 모르는 무뎌진 감성, 저녁노을 앞에서 지나온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줄 모르는 무감각, 넋을 잃고 텔레비전 앞에서 허물어져 가는 일상 등, 이런 현상이 곧 죽음에 한 걸음씩 다가섬이다. 나이가 어리거나 많거나 간에 항상 배우고 익히면서 탐구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누구나 삶에 녹이 슨다. 깨어 있고자 하는 사람은 삶의 종착점에 이를 때까지 자신을 묵혀 두지 않고 거듭거듭 새롭게 일깨워야 한다. 이런 사람은 이다음 생의 문전에 섰을 때도 당당할 것이다." (78~90쪽)

"돌이켜 보면 언제 어디서나 삶은 어차피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그 순간들을 뜻있게 살면 된다. 삶이란 순간순간의 존재다." (41쪽)

"행복할 때는 행복에 매달리지 말라. 불행할 때는 이를 피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라. 그러면서 자신의 삶을 순간순간 지켜보라. 맑은 정신으로 지켜보라." (57쪽)

◇병상에서의 사유
"어쩌다 건강을 잃고 앓게 되면 우리 삶에서 무엇이 본질적인 것이고 비본질적인 것인지 스스로 알아차리게 된다. 무엇이 가장 소중하고 무엇이 그저 그런 것인지 저절로 판단이 선다.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삶의 자취가 훤히 내다보인다. 값있는 삶이었는지 무가치한 삶이었는지 분명해진다. 언젠가 우리에게는 지녔던 모든 것을 놓아 버릴 때가 온다. 반드시 온다! 그때 가서 아까워 망설인다면 그는 잘못 살아온 것이다. 본래 내 것이 어디 있었던가. 한때 맡아 가지고 있었을 뿐인데. 그러니 시시로 큰마음 먹고 놓아 버리는 연습을 미리부터 익혀 두어야 한다. 그래야 지혜로운 자유인이 될 수 있다." (33쪽)

"흔히 이 육신이 내 몸인 줄 알고 지내는데 병이 들어 앓게 되면 내 몸이 아님을 비로소 인식하게 된다. 내 몸이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병을 치료하면서 나는 속으로 염원했다. 이 병고를 거치면서 보다 너그럽고, 따뜻하고, 친절하고, 이해심이 많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고자 했다. 인간적으로나 수행자로서 보다 성숙해질 수 있는 계기로 삼고자 했다. … 앓게 되면 철이 드는지 뻔히 알면서도 새삼스럽게 모든 이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일었다. 그리고 나를 에워싼 모든 사물에 대해서도 문득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혼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주고받으면서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것이 인생사임을 뒤늦게 알아차렸다."(39~40쪽)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때가 되면 그 생을 마감한다. 이것은 그 누구도 어길 수 없는 생명의 질서이며 삶의 신비이다. 만약 삶에 죽음이 없다면 삶은 그 의미를 잃게 될 것이다. 죽음이 삶을 받쳐 주기 때문에 그 삶이 빛날 수 있다." (162쪽)

"사람에게는 저마다 고유한 삶의 방식이 있듯이 죽음도 그 사람다운 죽음을 택할 수 있도록 이웃들은 거들고 지켜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일찍부터 삶을 배우듯이 죽음도 미리 배워 둬야 할 것이다. 언젠가는 우리들 자신이 맞이해야 할 엄숙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164쪽)

◇진정한 부와 행복에 이르는 방법
"내 삶을 이루는 소박한 행복 세 가지는 스승이자 벗인 책 몇 권, 나의 일손을 기다리는 채소밭, 그리고 오두막 옆 개울물 길어다 마시는 차 한 잔"(1쪽)이라는 법정은 "늘 모자랄까 봐 미리 준비해 쌓아 두는 마음이 곧 결핍"(71쪽)이라며 두 개를 갖게 되면 하나만을 지녔을 때의 그 풋풋함과 살뜰함이 소멸돼 버린다고 가르친다. 동시에 소유와 발전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세상이 잘못 알고 있는 진정한 가치와 부의 개념을 바로 잡는다.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을 부라고 잘못 알아서는 안 된다. 부는 욕구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차지하거나 얻을 수 없는 것을 가지려고 할 때 우리는 가난해진다. 그러나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한다면 실제로 소유한 것이 적더라도 안으로 넉넉해질 수 있다. 우리가 적은 것을 바라면 적은 것으로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남들이 가진 것을 다 가지려고 하면 인생이 비참해진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몫이 있다. 자신의 그릇만큼 채운다. 그리고 그 그릇에 차면 넘친다. 자신의 처지와 분수 안에서 만족할 줄 안다면 그는 진정한 부자이다." (123~124쪽)

◇이웃에 대한 배려, 나눔과 공덕의 의미
"살아오면서 이웃으로부터 받은 따뜻함과 친절을 내 안에 묵혀 둔다면 그 또한 빚이 될 것이다. 어느 날 내가 누군가를 만난다면 그 사람이 나를 만난 다음에는 사는 일이 더 즐겁고 행복해져야 한다. 그래야 그 사람을 만난 내 삶도 그만큼 성숙해지고 풍요로워질 것이다. 우리가 살아온 날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그때그때 만나는 이웃들을 어떻게 대했느냐로 집약될 수 있다. 남보다 앞질러 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못 된다. 흐름을 함께 이룰 수 있어야 한다."(86~87쪽)

"내가 지니고 있는 것들을 아낌없이 나누는 일에 보다 적극성을 띠려고 한다. 내가 한때 맡아 가지고 있는 것들을 새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원래 내 것이란 없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이 몸도 내 것이 아닌데 그 밖의 것이야 더 말할 게 있겠는가." (86쪽)

"이 세상에 가장 위대한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친절이다. 이웃에 대한 따뜻한 배려다. 사람끼리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모든 존재에 대해서 보다 따뜻하게 대할 수 있어야 한다. 만나는 대상마다 그가 곧 내 '복밭'이고 '선지식'임을 알아야 한다. 그때 그곳에 그가 있어 내게 친절을 일깨우고 따뜻한 배려를 낳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110쪽)

"세상살이란 서로 주고받으며 살아가게 마련인데 주고받음에 균형을 잃으면 조화로운 삶이 아니다. 주고받는 것은 물건만이 아니다. 말 한 마디, 몸짓 한 번, 정다운 눈길로도 주고받는다. 따뜻한 마음이 따뜻하게 전달되고 차디찬 마음이 차디차게 전달된다. 마지못해 주는 것은 나누는 일이 아니다. 마지못해 하는 그 마음이 맞은편에 그대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사람의 덕이란 그 자신의 행위에 의해서라기보다도 이웃에게 전해지는 그 울림에 의해서 자라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 덧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언젠가 자신의 일몰 앞에 설 때가 반드시 온다. 그 일몰 앞에서 삶의 대차대조표가 드러날 것이다. 그때는 누군가에게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다. 그때는 이미 내 것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살다가 간 자취를 미리 넘어다 볼 줄 알아야 한다."(215쪽)

◇나이 듦의 의미
"우리는 자신의 꿈과 이상을 저버릴 때 늙는다. 세월은 우리 얼굴에 주름살을 남기지만 우리가 일에 대한 흥미를 잃을 때는 영혼이 주름지게 된다. 그 누구를 물을 것 없이 탐구하는 노력을 쉬게 되면 인생이 녹슨다. 명심하고 명심할 일이다. 세상물정 모르는 철없는 소리일지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을 자신의 분수에 맞게 제대로 살고 있다면 노후에 대한 불안 같은 것에 주눅 들지 않을 것이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은 과거도 미래도 없는 순수한 시간이다. 언제 어디서나 지금 이 순간을 살 수 있어야 한다." (15~16쪽)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보다 성숙해져야 한다. 나이 들어서도 젊은 시절이나 다름없이 생활의 도구인 물건에 얽매이거나 욕심을 부린다면 그의 인생은 추하다. 어떤 물질이나 관계 속에서도 그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고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며 즐길 수도 있어야 한다. … 인생의 황혼기는 묵은 가지에서 새롭게 피어나는 꽃일 수 있어야 한다. 이 몸은 조금씩 이지러져 가지만 마음은 샘물처럼 차오를 수 있어야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을 무가치한 일에 결코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나이가 어리거나 많거나 간에 항상 배우고 익히면서 탐구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누구나 삶에 녹이 슨다. 깨어 있고자 하는 사람은 삶의 종착점에 이를 때까지 자신을 묵혀 두지 않고 거듭거듭 새롭게 일깨워야 한다. 이런 사람은 이다음 생의 문전에 섰을 때도 당당할 것이다." (89~90쪽)

◇소박하고 맑은 오두막에서의 삶
"어느 날 아침 내 둘레를 돌아보고 새삼스레 느낀 일인데, 내 둘레에 무엇이 있는가 하고 자문해 보았다. 차와 책과 음악이 떠올랐다. 마실 차가 있고, 읽을 책이 있고, 듣고 즐기는 음악이 있음에 저절로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오두막 살림살이 이만하면 넉넉하구나 싶었다. 차와 책과 음악이 곁에 있어 내 삶에 생기를 북돋아 주고 나를 녹슬지 않게 거들어 주고 있음에 그저 고마울 뿐이다. 오두막 살림살이 중에서 가장 행복한 때를 들라면 읽고 싶은 책을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쾌적한 상태에서 읽고 있을 때, 즉 독서삼매에 몰입하고 있을 때 내 영혼은 투명할 대로 투명해진다."(119쪽)

"자다가 저절로 눈이 떠진다. 어김없이 새벽 한 시에서 한 시 반 사이. 이때 내 정신은 하루 중에서도 가장 맑고 투명하다. 둘레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개울은 두껍게 얼어붙어 흐름의 소리도 멈추었다. 자다가 뒤채는지 이따금 뜰에 가랑잎 구르는 소리만 바스락거릴 뿐. 이것은 적적 요요한 자연의 본래 모습이다. 창문을 열면 새벽하늘에 별들이 오들오들 떨고 있다. 밤을 지키는 이런 별들이 없다면 이 우주는 너무 적막하고 삭막할 것이다." (133쪽)

"오후로는 대지팡이를 끌고 마른 숲길을 어슬렁거린다. 묵묵히 서 있는 겨울나무들을 바라보고 더러는 거칠거칠한 줄기들을 쓰다듬으며 내 속에 고인 말들을 전한다. 겨울나무들에게 두런두런 말을 걸고 있으면 내 가슴이 따뜻하게 차오른다."(134쪽)

"머리 무겁고 귀찮은 철 지난 옷가지들을 치우고 겨울철에 걸칠 옷들을 꺼내 놓았다. 중노릇 중에서 가장 귀찮고 머리 무거운 일이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지체 없이 철따라 옷가지를 챙기는 일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누더기 한 벌로만 한평생을 지냈다는 옛 수행자의 그런 저력이 부럽고 부럽다." (144쪽)

"산중에서 홀로 사는 우리 같은 부류들은 뭣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철저한 관리와 함께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 게으름이란 무엇인가. 단박에 해치울 일도 자꾸만 이다음으로 미루는 타성이다. 그때 그곳에서 그렇게 사는 것이 그날의 삶이다. 그와 같은 하루하루의 삶이 그를 만들어 간다. 이미 이루어진 것은 없다. 스스로 만들어 갈 뿐이다." (145쪽)

◇'일기일회'에 담긴 10대 메시지
▲언젠가 세상에 없을 모두를 위하여
"삶에서 가장 기특하고 기억할 만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놀라운 신비이고 가능성이다. 모든 것은 삶에서 시작되고 삶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살아 있기 때문에 행복도 불행도, 기쁨도 슬픔도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행복은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56쪽)

"앓으면서 생각했다. '그날그날을 즐겁게 살자.' 내일은 기약할 수 없다. 오늘 우리가 만나서 이렇게 마주 앉아 오랜만에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지만 내일 일은 누구도 알 수 없다. 하루하루를 잘 살고, 후회 없이 살아야 한다. 우리는 영원히 사는 존재가 아니다. 언젠가는 이 세상과 작별할 것이다." (84~85쪽)

"살 만큼 살다가 세상과 작별하게 될 때 무엇이 남는가? 홀로 있는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면 무엇을 가지고 가는가? 평소에 지은 업을 가지고 간다. 좋은 업이든 나쁜 업이든 평소에 지은 업만 그림자처럼 따라간다. 하루하루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떤 말과 행위를 하는가가 곧 다음의 나를 형성한다. 누군가가 그렇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다. 매 순간 스스로가 다음 생의 자신을 만들고 있다." (173~174쪽)

"언젠가 자기 차례가 오면 누구나 이 세상을 떠난다. 싫든 좋든 찾아오면 받아들여야 한다. 피할 수 없다. 모든 생명의 현상이다. 죽음을 나쁘게 생각하지 말라. 1막의 끝이다. 2막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무언가 맺어짐이 있어야 한다. 죽음을 어두운 것으로, 괴로운 것으로, 두려운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매듭을 짓는 일이다. 영혼은 태어나거나 죽지 않는다. 본래 그렇게 있는 것이다. 늘 인연 따라 새로운 몸을 받았다가 버리고 또다시 받을 뿐이다. 죽음도 살아가는 모습으로 생각하라. 다음 생은 하나의 새로운 시작이다. 죽음을 두려워 말라. 대신 순간순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새롭게 챙기라." (289~290쪽)

"내일 죽게 된다면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남기겠는가? 한번 정리해 보라. 당장 내일이 아닐지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그때가 온다. 저마다 섣달 그믐날이 온다.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 있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이런 기적 같은 삶을 헛되이 보낸다면 후회할 때가 온다. 죽음을 어둡고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라. 삶의 한 모습이다. 삶의 한 과정이다. 죽음이 없다면 삶은 무의미해진다. 죽음이 받쳐 주고 있기 때문에 삶이 빛날 수 있다." (306쪽)

"언제 어디서 자기 생의 섣달 그믐날을 맞이할지 알 수 없다는 자각을 잃지 않아야 한다. 모든 하루를 자기 생애 최후의 날인 것처럼 그렇게 살아야 한다. 미루면 후회가 남는다. 그날 할 일은 그날 하면서, 마치 내일이면 이 세상에 없을 것처럼 후회 없이 살라는 것이 앞서 간 모든 사람들의 교훈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한때를 아무렇게나 보내서는 안 된다. 그 한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313쪽)

▲삶은 길고도 힘든, 그러나 가장 행복한 수행의 길
"내 마음이고 내가 하는 생각이지만 삶을 통해 그 마음과 생각을 어떻게 갖는가가 중요하다. 생각을 밝게 가지면 내 삶이 밝아지고, 무언가에 휩쓸려 한순간 생각을 어둡게 가지면 삶이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진다. 마음은 먼 데서 찾아지지 않는다. 내 안에 늘 깃들어 있다. 우리가 마음을 밖에서 찾고, 다른 대상에서 찾기 때문에 그 마음이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한다. 한 생각을 어떻게 먹는가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 (77쪽)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 삶이 학교이고 배움이다. 우리는 그 목적을 위해 이곳에 왔다. 어제 몰랐던 것을 오늘 배우게 된다. 그때 삶의 묘미를 스스로 터득하게 된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 순간순간 살고 있다. 이 매 순간을 깨어서 활짝 열린 마음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또 사는 일 자체가 즐겁고 기뻐야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타인과의 관계도 매듭이 풀리고 더 깊어질 수 있다." (87쪽)

"기도하고 수행하는 도량이 따로 있지 않다. 우리가 처한 삶의 현장이 곧 도량이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가정이나 일터가 진정한 도량이 되어야 한다. 어수선하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이 혼돈스러운 세상에서 분별과 집착을 떠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곳이면 모두 도량이다. 이상적인 도량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 그대가 있는 바로 그 자리!" (130쪽)

▲소유의 의미와 진정한 부자되는 법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되지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을 가지려면 어떤 것도 필요로 함 없이 그것을 가져야 한다. 버렸더라도 버렸다는 관념에서조차 벗어나라. 선한 일을 했다고 해서 그 일에 묶여 있지 말라.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가듯 그렇게 지나가라." (63~64쪽)

"세상은 우리의 필요를 위해서는 풍요롭지만 탐욕을 위해서는 궁핍한 곳이다. 자연은 우리가 필요한 만큼 공급하지만, 분수에 넘치는 탐욕 앞에서는 궁핍해진다. 어떤 물질의 더미 앞에서도 우리는 충만해질 수 없다. 마음이 안정되고 평화로워야 행복의 움이 튼다. 물질은 한때에 불과할 뿐 우리를 영원히 행복하게 해 줄 수는 없다. 행복은 조화로운 삶에 있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알맞은 상태, 자기 분수에 맞는 상태이다." (116쪽)

"우리에게는 그립고 아쉬운 삶의 여백이 필요하다. 무엇이든 가득 채우려고 하지 말라. 포만 상태는 곧 죽음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불필요한 말을 쏟아 내고 있다. 이것들은 우리 영혼에 공해와 같다. 이 생각 저 생각 온갖 근심을 미리 가불해서 쓰느라 밤잠을 못 이루고 있다. 그 결과 왜소하고 무기력해져서 인간으로서의 기상을 지니지 못하게 되었다. 이런 때일수록 본질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하찮은 생각을 제쳐 두고 삶의 본질에 눈을 돌려야 한다. 그래야 인간으로서 당당하게 살 수 있다." (122~124쪽)

▲삶에 다가온 고난의 의미
"불행도 행복도 피하려 하지 말고, 삶 자체가 되어 살아가라. 흔히 세상 밖 어딘가에 천국이 있을 거라 믿고 있지만, 바로 이 현실에서 천국을 이룰 수 있지 이곳을 떠나서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번뇌 밖에 깨달음이 있지 않다. 일상의 삶을 떠나 열반이 있는 것이 아니다." (34~35쪽)

"때때로 자신의 삶을 바라보라. 자신이 겪고 있는 행복이나 불행을 남의 일처럼 객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삶을 순간순간 맑은 정신으로 지켜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행복과 불행에 휩쓸리지 않고 물들지 않는다. 이 세상은 참고 견뎌 나가야 하는 사바세계이다. 거기에 삶의 묘미가 있다. 모든 일이 우리 뜻대로 흘러간다면 좋을 것 같지만 오히려 결과는 좋지 않다. 그렇게 되면 어려움을 모르게 되고, 삶에서 영적인 깊이가 사라진다." (39쪽)

"어려운 일 없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 어려운 일을 피하려 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이라.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것이 이 삶이다. 모든 것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다. 남들은 앓는데 나만 앓지 않는다면 더없이 오만해진다. 이 몸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면 언젠가는 다 병을 앓게 마련이다.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생각은 마음을 여유롭게 한다." (86쪽)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삶에 아름다움이 없으면 너무나 삭막하고 건조하다. 오늘 우리들은 돈과 관계된 것에만 눈을 파느라, 경제 생각만 하느라 삶의 가장 내밀한 영역인 아름다움을 등지고 산다. 아름다움이야말로 삶의 기쁨이고 행복에 이르는 길목이다. 아름다움을 만나지 못한다면, 우리들 삶이 아름다움으로 채워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행복은 아름다움이 그 삶을 받쳐 주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다." (90쪽)

"진정한 아름다움은 샘물과 같아서 아무리 퍼내도 다함이 없다. 그러나 가꾸지 않으면 솟아나지 않는다. 내 안의 샘에서 아름다움이 솟아나도록 하라. 남과 나누는 일을 통해 수시로 자신을 가꾸라. 나눔의 삶을 살아갈 때 내 안에 들어 있는 자비의 아름다움이 샘솟듯 생겨난다. 아름다움은 시들지 않는 영원한 기쁨이다." (95~96쪽)

"그날이 그날인 것처럼 지내지 말라. 이 가을은 다시 만날 수 없는 일기일회, 생애 단 한 번뿐인 가을이다. 누구도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 이 가을날, 그저 대상만 보고 즐길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도 샘솟는 아름다움이 있어야 한다. 아름다움은 남과 나누는 데서 움이 튼다." (96쪽)

"마음의 문을 열고 보면 어디에든 아름다움이 있다. 사소한 것이라도 둘레에 있는 아름다움을 찾아내 삶에서 꽃피어 나게 하라. 그래야 그 삶이 아름다워진다. 종교적인 생활의 꽃은 마치 모든 꽃이 지고 난 다음에 피는 차꽃 같은 것이다. 남들이 시시하게 여기고 돌아보지 않는 상황에서도 꽃을 피울 수 있어야 한다." (310~311쪽)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본질적인 삶의 의미
"병을 심하게 앓으면 모든 게 시들해진다. 내 몸조차도 주체스러울 때가 있다. 그 밖에 책이며 찻그릇이며 이것저것 챙겼던 모든 것들이 다 시시해진다. 평소에는 거기 얽매여 있으니까 소중하게 느껴졌는데, 이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물음을 던지게 된다. 어떤 것이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인가? 어떤 것이 본질적인 것이고 어떤 것이 비본질적인 것인가?" (64~65쪽)

"우리가 살 만큼 살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반드시 찾아온다. 그때 가서 아까워하며 망설일 것 없이, 내려놓는 일을 미리부터 연습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다." (65쪽)

"누구나 자기 삶에 개성이 있어야 한다. 일상의 삶은 무료하다. 무언가 변화가 있어야 한다. 자기 삶을 보다 심화시키기 위해 비본질적인 것과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거듭거듭 털고 일어서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진정한 내면이 활짝 꽃피어 날 수 있다. 사소한 인정에 얽매이지 말고 크게 생각하라." (109쪽)

"부처님은 어디서 왔는가? 이 꽃과 잎과 새들은 어디서 오는가? 이 나무와 공기와 구름은 어느 곳에서 오는가? 별과 모래와 행성들은 어느 곳에서 오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디서 오는가? 다시 한 번 묻는다. 부처님은 어디서 왔는가? 무엇을 위해 왔는가? 각자 자신의 일로 물으라." (225쪽)

▲나는 내 한 몸이 아니다, 공생과 나눔의 의미
"공덕이라는 것은 물질적으로 베푼다는 의미만이 아니다. 말 한 마디, 눈빛 하나도 공덕이 되어야 한다. 물질이 없어도 맑은 눈빛, 다정한 얼굴, 부드러운 말을 나눌 수 있다." (151쪽)

"베푸는 것을 수직 관계로 생각하지 말라.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무엇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저 수평적으로 나누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은혜를 입고 있다. 수많은 관계 속에서 눈에 보이고 보이지 않는 무수한 은혜를 입으며 살아간다. 그런 도리를 안다면 스스로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성숙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순간순간 나누어 가질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이치에 맞게 살아가는 길이다." (153~154쪽)

"살 만큼 살다가 작별할 때 한 생애에서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나도 가끔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것은 본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남은 사람들에 의해 평가된다. 생전에 그가 얼마나 많은 존재와 세상에 자비심을 베풀었는가, 선행을 했는가, 덕행을 쌓았는가가 결정한다. 결국 한 생애에서 남는 것은 얼마만큼 사랑했는가, 얼마만큼 나누었는가 뿐이다. 그 밖의 것은 다 허무하고 무상하다.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다." (227~228쪽)

"나는 내 한 몸이 아니다. 온 세상의 보이고 보이지 않는 많은 인연들이, 여러 조건과 상황들이 우리를 이루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잘못 생각을 하거나 함부로 행동하면 내 한 몸에 그치지 않고 세계 곳곳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 사람이 잘 살면, 그 기운이 온 우주에 긍정적으로 퍼져 나간다. 그런데 한 사람이 잘못 살면, 그 사람을 위해 거들고 있는 온 우주에 나쁜 기운을 퍼트리게 된다. 이것이 이 세상의 구조다.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홀로 독립된 존재는 어디에도 없다." (244쪽)

▲어제도 오늘도 없고 늘 지금이다, 지금 이 순간을 살라
"진리는 과거나 미래에 있지 않다.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자리에 있다. 삶 역시 그렇다. 다음 순간의 일은 누구도 알 수 없다. 한 번 숨 들이쉬었다가 내쉬지 못하면 굳어지는 것이 육신이다. 공부하는 사람에게 내일은 없다. 어제도 없고 늘 지금이다. 지금 이 자리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179~180쪽)

"삶은 과거나 미래에 있지 않다. 지금 이 순간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살 줄 알아야 한다. 순간순간 그날그날 내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업을 익히면서 사는가에 따라 삶이 달라질 것이다. 개인의 삶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나와 관계된 사람들의 삶도 달라진다. 누가 나를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나를 만들어 간다." (209쪽)

"진정한 행복은 먼 훗날에 이룰 목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다. 과거를 묻지 말라. 이미 지나가 버린 세월이다. 그것은 전생의 일이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가 살아 있는 곳은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이다." (269~270쪽)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살든 한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매 순간이 마음을 맑히는 일로 이어져야 한다. 한숨 내쉬고 들이쉴 때마다 마음을 맑히는 일이 되어야 한다. 그 한순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한순간이 바로 생과 사의 갈림길이다." (317쪽)

▲오늘은 어제의 연장이 아니다, 날마다 새로운 날
"언제나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오늘은 어제의 연장이 아니다.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른다. 그날그날을 새날로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새롭게 움틀 수 있다." (74쪽)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은 날마다 새로운 날을 맞이하는 것이다. 오늘은 어제의 연장이 아니다. 새로운 날이다. 묵은 시간에 갇힌 채 새로운 시간을 등지지 말아야 한다. 내 마음이 활짝 열리면 닫혔던 세상의 문도 따라서 활짝 열리게 된다. 열린 세상에서 열고 살아가라." (263쪽)

"새잎이 펼쳐지는 이 눈부신 계절에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살아야 한다. 그래야 내 안에 잠재된 좋은 기운이 새잎처럼 펼쳐질 수 있다.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으면 설령 내 안에 아무리 좋은 잠재력의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잠들어 버리고 만다. 무거운 짐을 부려 놓고 가볍게 살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그렇게 살라." (291쪽)

▲침묵과 자기 존재의 시간
"지난여름, 내게 있어 가장 보람되고 즐거웠던 시간을 꼽으라면, 아침저녁으로 개울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묵묵히 앉아 있던 그 시간이다. 책 읽고 밖에 나가 일하는 시간은 부수적인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묵묵히 개울물 소리에 귀를 맡기고 조용히 앉아 있을 때가 가장 기쁜 시간이다. 이때는 순수한 자기 존재의 시간, 자기 충전의 시간이다. 선의 기쁨으로 밥을 삼는 이 같은 자기 중심의 시간을 통해 이 험난한 세상을 무난히 헤쳐 나갈 수 있다." (215쪽)

문화부장 reap@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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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매화 꽃잎 매만지며 하루전 ‘열반 대화’

한겨레 | 입력 2010.03.11 18:10 | 수정 2010.03.11

한겨레] [마음산책]

해남 미황사 스님이 음악가 노영심 통해 전해줘

마지막까지 의식 또렷…'먹이는 간단 명료' 철칙

법정스님은 오랜 투병으로 힘든 나날을 보냈지만 열반 전날까지도 또렷한 의식을 지니며 꽃과도 대화를 나눴던 것으로 전해졌다. 열반 하루 전인 10일 법정 스님의 고향인 전남 해남에 있는 미황사에서 금강 스님이 음악가 노영심씨 편을 통해 눈맞은 동백꽃과 매화 꽃송이들을 보내드리자 꽃잎들을 하나하나씩 만지면서 꽃들을 향해 "올라오느라고 고생했다"는 메시지를 남겼다고 한다.

이에 앞서 지난 7일엔 금강 스님이 직접 동백꽃과 매화를 법정 스님에게 드리면서 "스님 고향엔 봄이 와서 동백꽃이 만발하고, 매화가 막 꽃망울을 터트렸습니다. 스님도 어서 쾌차하셔야지요"라고 말하자, 말을 하지 못한 채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법정 스님은 이날은 봄기운을 받은 것처럼 미음과 반찬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호전됐다고 한다.

법정 스님의 사촌 누이인, 현장 스님의 속가 어머니와 법정 스님의 유일한 형제인 여동생 박정란씨와 함께 지난 9일 법정 스님을 찾았던 전남 보성 대원사 주지 현장 스님은 "불자들보다 더 냉정하게 대하며 가까이하지 않던 (법정스님의)친여동생에게 '굳굳하게 살아라'고 했고, (현장 스님의)어머니가 사촌간인 법정 스님에게 '빨리 가서 나도 데려가라'며 '이게 마지막이겠지'라고 말하자 법정 스님이 '마지막이 아니다'고 했고, 어머니가 다시 '그럼 어디가면 스님을 볼 수 있느냐'고 하자, 불일암으로 찾아오라'고 했고, 어머니가 '다리가 아파서 불일암에는 못올라간다'고 하자, '그럼 길상사로 찾아오라'고 했다"고 전했다.

봉은사 다례헌에 머물며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송광사로 내려가 불임암을 짓던 법정 스님을 시봉하면서 불일암 낙성식날 수계를 받은 현장 스님은 "스님은 부엌에 '먹이는 간단 명료하게'라는 말을 써붙여두고, 일체 3가지 반찬 이상을 상에 올리지 못하게 했고, 음식들을 손수 하고, 워낙 정갈했기 때문에 여자들도 스님의 부엌에 들어가길 겁나했을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법정 스님은 평소 책에서도 할머니에 대해 자주 회고하곤 했다. 어린시절 할머니로부터 늘 옛날얘기를 들으며 자라 자신의 문재는 할머니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했다. 어린시절 워낙 가난해서 책과 원고지도 살 수 없었던 스님은 국민학교 때 소풍에서 보물찾기를 해 원고지를 상으로 탔는데, 그때부터 할머니 얘기를 원고지에 쓰며 문재를 키워갔다고 간다. 법정 스님은 그토록 좋아했던 할머니의 기일을 하루 앞두고 열반해 속가 가족들은 "할머니를 따라가신 것"이라고 추모했다.

법정 스님은 지난 2일 자신을 찾아온 송광사 선원 한주 영선 스님과 영명 스님, 지현 스님들을 맞으며 종이에 '조계종풍을 지켜줘서 고맙다'고 썼다. 지현 스님은 "조계종풍이 선(禪)이므로, 영선 스님에게 선원을 지켜줘서 고맙다는 뜻을 전한 것 같다"고 말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