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3. 11. 23:20ㆍ일반/금융·경제·사회
법정(法頂) 스님 11일 입적, 다비식은 13일 순천 송광사
법정(法頂) 스님 11일 입적, 다비식은 13일 순천 송광사
폐암으로 투병중이던 법정(法頂) 스님이
3월 11일 오후 1시52분께 서울 성북2동 길상사에서 입적했다.
세수 78세.법랍 54
법정스님의 다비식은 3월 13일 전남 순천 송광사에서 엄수된다.
그러나 법정스님의 평소 유지대로
특별한 추모행사는 없을 것으로 알려졌다.
평소 가르침대로 일체의 장례의식을 치르지 말고,
사리를 찾으려 하지 말고 탑도 세우지 말라는 내용의 유언을 남겼으며
그냥 입던 승복차림으로 다비해달라고 당부했습니다.
“절대로 다비식 같은 것을 하지 말라.
이 몸뚱아리 하나를 처리하기 위해 소중한 나무들을 베지 말라.
내가 죽으면 강원도 오두막 앞에
내가 늘 좌선하던 커다란 넙적바위가 있으니
남아 있는 땔감 가져다가 그 위에 얹어 놓고 화장해 달라.
수의는 절대 만들지 말고,내가 입던 옷을 입혀서 태워 달라.
그리고 타고 남은 재는 봄마다 나에게
아름다운 꽃공양을 바치던 오두막 뜰의 철쭉나무 아래 뿌려달라.
그것이 내가 꽃에게 보답하는 길이다.
어떤 거창한 의식도 하지 말고,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다.
1932년 10월 8일 = 전남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 출생
1955년 통영 미래사로 입산 출가했다. 은사는 효봉(曉峰) 스님이다.
1956년 7월 사미계를 수지한 뒤
1959년 3월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자운(慈雲)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1959년 4월 해인사 전문강원에서
명봉(明峰) 화상을 강주로 대교과를 졸하고
지리상 쌍계사와 가야산 해인사, 조계산 송광사 등
선원에서 수선안거(修禪安居) 했다.
보현행원
1. 내 이제 두손-모아 청하옵나-니
시방세계 부처-님 우주대-광-명
두눈어둔 이내몸 굽어살피-사
위없는 대법-문을 널리여-소-서
(후렴)
허공계와 중생-계가 다할지라-도
오늘-세운 이-서원은 끝없아-오-리
2. 내 이제 엎드-려서 청하옵나-니
영겁토록 열반-에 들지맙-시-고
이세상에 중생을 굽어살피-사
삼계화택 심한-고난 구원하-소-서
(후렴)
허공계와 중생-계가 다할지라-도
오늘-세운 이-서원은 끝없아-오-리
정치권 "큰 어른이 잃었다" …법정스님 입적 '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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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 | 황의영 | 입력 2010.03.11
【서울=뉴시스】김은미 황의영 기자 = 여야는 11일 법정스님의 입적과 관련, "이 시대의 큰 어른이자 참스승을 잃었다"며 일제히 깊은 애도를 표했다.
한나라당 조해진 대변인은 이날 오후 논평을 통해 "대립과 갈등, 탐욕이 팽배한 세상에서 스님이 남긴 무소유와 화합의 정신은 모든 더러운 것을 맑게 씻어내는 정화수로 흐를 것"이라고 밝혔다.
조 대변인은 또 "일찍이 스님은 맑은 샘이셨다"며 "큰 어르신을 보내는 마음은 아쉽고 슬프지만, 풍경소리 같은 맑은 여운이 우리 속에 계속 남아서 화합하고, 공존하고, 또 비우면서 충만해지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민주당 노영민 대변인도 이날 오후 국회 정론관에서 브리핑을 갖고 "이제 스님의 가르침을 더 이상 직접 듣지 못함에 진한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느낀다"며 스님은 이 시대의 참 현인"이라고 밝혔다.
노 대변인은 이어 "혹독한 독재의 시대에는 몸소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실천자셨고 중생들에게는 '비움'의 진정한 가치를 가르쳐 주셨던 참스승"이라며 "스님의 입적을 애도하며 명복을 빈다"고 추모했다.
자유선진당 박선영 대변인은 이날 국회 정론관에서 브리핑을 통해 "또 한 분의 큰 어른을 잃었다는 허탈감과 슬픔에 목이 메여온다"며 말문을 열었다.
박 대변인은 또 "'소유'이기보다는 '존재'로서의 삶을, 구도자의 자세로 끊임없이 추구해 오신 법정스님은 물질 만능주의에 도취된 우리 중생들에게 깊은 가르침을 주셨다"며 "이제 스님의 말씀을 따라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민주노동당 우위영 대변인도 이날 논평을 내고 "종교와 무관하게 시대의 잘못은 날카로이 꾸짖고, 세상살이의 고달픔을 느끼는 대중에게는 더없는 위로와 가르침을 주시던 참 귀한 스승 한 분을 잃고 말았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우 대변인은 또 "우리가 몸담은 세상과 마음을 맑고 향기롭게 가꾸도록 만들어주신 스님의 거룩한 일생에 깊은 존경을 표하며 다시 한번 애도의 마음을 전한다"고 말했다.
진보신당 심재옥 대변인은 "법정 스님은 평생 무소유로 살아오셨고 종교화합에도 실천적인 노력을 기울이셨던 분"이라며 "어렵게 현실을 살아가는 국민들에게 정신적으로 큰 울림과 힘을 주셨다"고 강조했다.
심 대변인은 또 "무소유 정신은 개인적 차원이기보다 사회적으로 나눔 공동체를 만드는 큰 밑거름이 됐다"며 "스님의 정신을 기려서 사회적 화합과 공동체를 만들어 가도록 진보신당도 함께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kem@newsis.com
무소유’ 온몸으로 실천한 법정스님의 생애
헤럴드경제 | 입력 2010.03.11
11일 입적한 법정(法頂)스님은 탁월한 문장력을 바탕으로 한 산문집을 통해 일반 국민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은 '스타' 스님이다. 불자나 스님들 사이에서도 1993년 열반한 성철 스님에 이어 인지도가 높은 스님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평생 불교의 가르침을 지키는 출가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았고, 산문집의 제목처럼 '무소유'와 '버리고 떠나기'를 끊임없이 보여줬다. 스님은 자신이 창건한 길상사의 회주를 한동안 맡았을 뿐, 그 흔한 사찰 주지 한번 지내지 않았다.
법정스님은 1990년대 초반 "나는 아마 전생에도 출가수행자였을 것이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직관적인 인식만이 아니라 금생에 내가 익히면서 받아들이는 일들로 미루어 능히 짐작할 수 있다"고 한 적이 있다.
박근혜 "어서 일어나시겠지 생각했는데..."
오마이뉴스 | 입력 2010.03.11 21:41 | 수정 2010.03.11
[오마이뉴스 박혜경 기자] [2신 : 오후 10시 25분] 유인촌 "법정스님 본 따라가야 할 사람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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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8시 10분 경,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서울 성북구 길상사에 도착했다. 박 전 대표는 법정스님을 모신 '행지실'에 들러 "위독하시다는 보도가 났길래 어서 일어나시겠지 생각했는데…"라며 말 끝을 흐렸다. 박 전 대표는 행지실을 나와 "법정스님은 불교계의 큰 어른으로, 말씀하신 것에 대한 보도가 나오면 빼놓지 않고 읽었다"며 "인생의 지침이 되는 큰 가르침을 주셨다"고 추모했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행지실을 찾았다. 오후 8시 55분경 도착해 분향을 한 유 장관은 "(법정스님이) 주무시는 것 같으시네, 이불만 간단하게 덮어놓으셨어"라며 "돌아가신 것 같지가 않다"고 소감을 말했다. 이어 유 장관은 "법정스님은 큰 어른으로서 평소 종교간 화합에 대해 말씀하셨고 이를 행동으로도 옮겼다"며 "무소유에 대해서도 말씀하신 법정스님의 본을 보고 따라가야 할 사람이 너무 많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나도 그렇게 하겠다"고 덧붙였다. 유 장관이 잠시 후 도착한 이상득 한나라당 의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정세균 민주당 대표가 이광재·김진표 의원과 함께 길상사에 도착했다. '리틀 MB'라 불리는 유 장관과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인 이 의원, 그리고 '민주당 3인방'이 마주친 몇 초 동안 미묘한 기류가 맴돌았다. 목례를 나눈 '민주당 3인방'은 행지실로 향했다. 정 대표는 "법정스님은 불교계 큰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국민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으셨는데, 가슴이 아프고 빈 자리가 크다"면서 "애통하고 슬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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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신 : 3월 11일 오후 9시 20분] "입적 소식 듣는 순간, 가슴이 내려앉아"
길상사에 하얀 연꽃 등이 달렸다. 날이 어두워지자 길상사 법당에 불이 하나둘씩 켜지고 있다. 분향소가 마련된 설법전 앞으로는 분향하기 위해 길상사를 찾은 사람들이 계단 밑까지 길게 늘어섰다. 설법전 안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는 수십 켤레의 신발들이 쌓여 있다.
산문집 < 무소유 > 등의 저자인 법정 스님의 입적 소식을 듣고 길상사를 찾은 이들의 것이다. 법정스님은 현재 길상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상석에 해당되는 방인 '행지실'에 모셔져 있다.
조계종 대변인인 원담 스님은 길상사 극락전 앞에서 "스님이 살아생전 행한 자신에 대한 엄격함과 사물에 대한 사랑은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 것 같다"며 "오랫동안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으신 큰 스님의 극락왕생을 다 같이 기원하겠다"고 말했다.
현재 길상사에서는 전체적으로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분향이 이뤄지고 있다. 이날 오후 7시 30분부터 일반인들의 분향이 가능해지고 퇴근시간이 지남에 따라 길상사를 찾는 이들의 수도 점차 늘고 있다. 처음엔 10명씩 모듬을 만들어 분향했지만, 분향 인파가 늘면서 모듬의 수를 30명으로 늘렸다.
분향을 마친 홍정자(69, 수필가)씨는 "(법정 스님의) 입적 소식을 듣는 순간 가슴이 내려앉았다"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홍씨는 "나의 지주였고, 부처님처럼 마음속에 모신 분이었다"고 법정 스님을 추모했다. 그는 "스님과 신도들이 불편할까 봐, 길상사에 오셔서도 한 번도 주무시지 않았던 법정 스님이었다"며 "돌아가신 스님의 뜻에 따라 살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조계종 총무원장인 자승 스님과 전 총무원장인 지관 스님 등 많은 스님들이 법정 스님이 모셔진 행지실을 찾았다.
손학규 "민주화와 인권에 앞장섰던 법정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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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는 이날 오후 7시 40분경 길상사를 방문해 분향했다. 손 전 대표는 "법정 스님은 스님으로서 우리 사회의 정의를 가르쳐주신 분이고, 70년대 유신 시절 불교계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앞장섰다"며 "스님이 가르쳐주신 자비의 정신은 국민들 가슴 속에 남아 있다"고 말했다.
성북동 길상사와 순천 송광사 등에 마련된 분향소는 49재 동안 유지될 예정이며, 길상사는 스님의 뜻에 따라 조화 등은 일체 받지 않고 있다.
앞서 법정 스님은 11일 오후 1시 50분경 세수 78세, 법랍 55세로 입적했다. '맑고 향기롭게 살자'며 97년에 자신이 세운 길상사에서 였다. 3~4년 전부터 폐암 투병을 해온 법정 스님은 올해 들어 병세가 악화돼 삼성서울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입적 직전 자신이 세운 길상사로 옮겼다.
한편 법구는 12일 오전 12시 전남 순천 송광사로 운구될 예정이며, 법정 스님의 다비식은 13일 송광사에서 치르게 된다. 모든 일정은 법정 스님의 유지에 따라 진행될 예정이다.
[☞ 오마이 블로그]
1932년 10월8일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법정 스님은 한 핏줄끼리 총부리를 겨눈 한국전쟁을 경험하면서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 앞에서 고민한다. 그는 대학 재학중이던 1955년 마침내 입산 출가를 결심하고 싸락눈이 내리던 어느날 집을 나선다.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오대산으로 가기 위해 밤차로 서울에 내린 스님은 눈이 많이 내려 길이 막히자 서울의 안국동 선학원에서 당대의 선승 효봉스님(1888~1966, 1962년 조계종 통합종단이 출범한 후 초대 종정)을 만나 대화한 후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는다. "삭발하고 먹물 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훨훨 날아갈 것 같았다.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나는 그 길로 밖에 나가 종로통을 한바퀴 돌았었다"
다음날 통영 미래사로 내려가 부목(負木ㆍ땔감을 담당하는 나무꾼)부터 시작해 행자 생활을 했다. 당시 환속하기 전의 고은 시인, 박완일 법사(전 조계종 전국신도회장) 등이 함께 공부했다. 법정스님은 이듬해 사미계를 받은 후 지리산 쌍계사에서 정진했다. 28세 되던 1959년 3월 양산 통도사에서 자운 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고, 1959년 4월 해인사 전문강원에서 명봉스님을 강주로 대교과를 졸업했다.
1960년 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통도사에서 운허 스님과 함께 '불교사전' 편찬에 참여하다 4.19와 5.16을 겪은 스님은 1960년대 말 서울 봉은사 다래헌에서 운허 스님 등과 함께 동국역경원의 불교 경전 번역 작업에 참여했다.
이 시절 함석헌, 장준하, 김동길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결성과 유신 철폐운동에 참여했던 법정스님은 1975년 인혁당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후 반체제운동의 의미와 출가수행자로서의 자세를 고민하다 다시 걸망을 짊어진다.
출가 본사 송광사로 내려온 법정스님은 1975년 10월부터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홀로 살기 시작했다. 1976년 산문집 '무소유'를 낸 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불일암 생활 17년째 되던 1992년 다시 출가하는 마음으로 불일암을 떠나 강원도 화전민이 살던 산골 오두막에서 지금까지 혼자 지내왔다.
스님은 건강이 나빠지면서 지난해 겨울은 제주도에서 보냈다가 건강상태가 악화하면서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했지만, 의식을 또렷하게 유지하면서 "강원도 오두막에 가고 싶다"고 거듭 말했다는 것이 주변의 전언이다.
법정스님은 평소에는 강원도 산골에서 지냈지만 대중과의 소통도 계속했다. 특히 1996년 고급요정이던 성북동의 대원각을 시인 백석의 연인으로 유명했던 김영한 할머니(1999년 별세)로부터 아무 조건없이 기부받아 이듬해 12월 길상사로 탈바꿈시켜 창건한 후 회주로 주석하면서 1년에 여러차례 정기 법문을 들려줬다. 법정스님은 2003년 12월에는 길상사 회주 자리도 내놓았다. 하지만 정기법문은 계속하면서 시대의 잘못은 날카롭게 꾸짖고 세상살이의 번뇌를 호소하는 대중들을 위로했다.
산문인으로서 법정스님은 뛰어난 필력을 바탕으로 우리 출판계 역사에도 기록될 베스트셀러를 숱하게 남겼다. 스님은 해인사에 살 당시 팔만대장경이 있는 장경각을 가리켜 "빨래판같이 생긴 것이요?"라고 묻던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아무리 뛰어난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이라도 알아볼 수 없는 글자로 남아있는 한 한낱 빨래판에 지나지 않으며, 부처의 가르침을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쉬운 말과 글로 옮겨 전할 방법을 고민했다.
또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망각한 채 전통과 타성에 젖어 지극히 관념적이고 형식적이며 맹목적인 수도생활에 선뜻 용해되고 싶지 않았다"고 회고한 적도 있다. 스님의 이런 원력은 스님의 이름과 동의어처럼 불리는 산문집 '무소유'의 모습으로 꽃을 피운다. '무소유'는 1976년 4월 출간된 후 지금까지 34년간 약 180쇄를 찍은 우리 시대의 대표적 베스트셀러다.
법정스님은 다른 종교와도 벽을 허물었던 것으로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법정스님은 길상사 마당의 관음보살상을 독실한 천주교신자 조각가인 최종태 전 서울대교수에게 맡겨 화제를 모았고, 1997년 12월 길상사 개원법회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방문했다. 법정스님은 이에 대한 화답으로 이듬해 명동성당에서 특별 강론을 하기도 했다.
법정스님은 이밖에 조계종단과 사회를 위한 활동도 활발히 했다. 법정스님은 대한불교 조계종 기관지인 불교신문 편집국장, 송광사 수련원장, 보조사상연구원장 등을 지냈고 1994년부터는 환경보호와 생명사랑을 실천하는 시민운동단체인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를 만들어 이끌어왔다.
헤럴드생생뉴스(online@heraldm.com)
소유의 감옥에서 해방” 글처럼 살다간 법정스님
헤럴드경제 | 입력 2010.03.11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을 쓰게 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있다는 뜻이다"('무소유' 중에서)
법정스님이 1970년대 초반부터 쓴 글을 모아 1976년 펴낸 대표적인 산문집 '무소유(범우사)'를 비롯해 수십권의 책에서 한결같이 설파한 무소유의 정신은 무한경쟁과 탐욕의 시대에 우리가 지녀야 할 마음의 등불이다. 스님이 말한 '무소유'는 불교의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즉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가지고 온 것도 없고 세상을 하직할 때 가져가는 것도 없다는 가르침에서 비롯됐다.
1971년의 글 '무소유'에서 법정스님은 당시 3년 째 난초 화분 둘을 애지중지 길렀다는 스님은 장마 후 쏟아지는 햇볕 아래 화분을 놓고 왔다는 생각에 허둥지둥 거처로 돌아간 일화를 소개하며 자신의 집착을 뉘우친다.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所有史)처럼 느껴진다…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려 든다…제 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1992년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한번 출가하는 마음으로 강원도 화전민이 버리고 떠난 산골 오두막으로 들어간 스님은 1995년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에 이어 새 천년을 앞둔 1999년 12월에 수상집 '오두막 편지'를 내놓는다. '오두막 편지'에서 스님은 "현재 내가 몸담아 사는 산중 오두막은 여러가지로 불편한 환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곳에서 단순하고 간소하게 내 식대로 살 수 있기 때문에 일곱 해째 기대고 있다"고 썼다.
스님은 2008년 11월 길상사 소식지에 기고했던 수필을 모아 '아름다운 마무리'를 펴내 삶의 마지막에 선 노승의 마음을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길상사를 드나들면서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얻어간다…늙은 중이 욕심 사납게 주는대로 꾸역꾸역 가지고 가는 꼴을 이만치서 바라보고 있으면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면서 "삶의 종점인 섣달 그믐날이 되면 누구나 자신이 지녔던 것을 모두 놓아두고 가게 마련이다. 우리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나그네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스님이 말하는 '아름다운 마무리' 는 역시 "스스로 가난과 간소함을 선택해 소유의 비좁은 감옥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언제든 떠날 채비를 갖춘다…아름다운 마무리는 낡은 생각, 낡은 습관을 미련없이 떨쳐 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마무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스님은 평생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며 자신의 말처럼 '아름다운 마무리'로 이생의 삶을 마쳤다.
헤럴드생생뉴스(online@heraldm.com)
<"법정스님 빈자리 책으로" 저서에 관심>(종합)
연합뉴스 | 입력 2010.03.11 21:17 | 수정 2010.03.11
서점들 추모 코너 마련..주문량 크게 늘어
(서울=연합뉴스) 김지연 기자 = 탁월한 문장력과 무소유 철학, 소탈한 내용이 담긴 책들로 일반 국민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은 법정(法頂)스님이 11일 입적하면서 생전에 남긴 책들에 대한 관심도 늘었다.
법정스님은 산문집과 여행기, 법문집, 명상집, 어린이책, 불교 서적, 불경 번역서 등 다양한 분야에서 50여 종을 냈으며, 그 가운데 상당수가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며 사랑받았다.
법정스님의 책들은 일상과 개인적인 일화를 그릴 때는 서정적이고 소탈한 입담을 자랑해 대중에게 친화력을 가졌으며 물질적인 세상과 사회를 풍자할 때는 지혜롭고 본질을 꿰뚫는 말들로 사람들을 이끌었다.
특히, 황금만능주의를 경계하고 검소하며 단순한 삶을 권하는 대표 산문집 '무소유'는 1976년 출간됐으나 1996∼2000년 5년 동안이나 교보문고 연간 베스트셀러 20위 안에 들 정도로 꾸준히 인기를 끈 최고 베스트셀러로, 첫 출간 이후 쇄와 판을 거듭하며 290만 부나 팔려나갔다.
맑고 깊은 영혼의 세계를 소개하는 명상집 '산에는 꽃이 피네'도 1998년 금융위기로 고통받던 국민을 위로하며 교보문고 연간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다.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서 개울물을 길어 밥을 하고 손수 만든 땔감으로 불을 지피며 살면서 세상을 향해 쓴 편지를 모은 책 '오두막 편지'도 2000년 14위에 오른 인기 도서이며, '버리고 떠나기'(1993년 19위), '산방한담'(1983년 11위),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2006년 9위) 등도 연간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른 인기 도서다.
교보문고는 이날 오후 법정스님의 입적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광화문점 문학 섹션에 스님의 무소유 정신을 기리는 추모 코너를 마련해 '일기일회', '아름다운 마무리', '무소유', '산에는 꽃이 피네', '인도기행' 등을 모아놓았다.
또, 인터넷 교보문고는 메인 화면에 "시대의 정신적 스승 법정스님 입적, 무소유 정신에서 아름다운 마무리까지 스님의 발자취를 따라갑니다"라는 추모글을 올렸으며, 작가들을 소개하는 '인터넷 교보문고 문학관' 페이지에 '법정스님 문학관'을 열어 스님의 대표 저서들을 소개하고 있다.
반디앤루니스 종로점도 오후부터 '무소유', '법정 스님의 내가 사랑한 책들', '오두막 편지', '인연 이야기' 등을 모은 추모 코너를 마련해 독자들을 맞고 있으며 코엑스점은 12일 특별 코너를 열 예정이다.
책으로 안타까움을 달래려는 독자들의 문의가 이어지면서 출판사들에도 주문이 크게 늘었다.
'일기일회', '아름다운 마무리',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 등 법정스님의 최근작을 낸 출판사 문학의숲에는 법정스님의 병세가 깊다는 소식이 전해진 이후 각각의 책에 대해 평소보다 훨씬 많은 수준인 6천∼1만부의 주문이 몰려 법정스님이 역시 '스타 스님'이었음을 실감하게 했다.
출판사 관계자는 "문의도 많고 주문도 크게 늘었다"며 "법정스님의 책은 평소에도 인기가 많아 다량 찍었기 때문에 일단은 소화가 가능하지만, 부족해질 것 같아 추가 인쇄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cherora@yna.co.kr
무소유’ 법정스님 주요 연표
헤럴드경제 | 입력 2010.03.11
▲1932년 10월 8일 = 전남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 출생
▲1954년 = 통영 미래사에서 효봉 선사를 은사로 입산 출가
▲1956년 7월 15일 = 효봉 선사를 은사로 사미계 수계
▲1959년 3월 15일 =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자운율사를 계사로 비구계 수계
▲1959년 4월 15일 = 해인사 전문강원에서 명봉화상을 강주로 대교과 졸업, 이후 지리산 쌍계사와 가야산 해인사, 조계산 송광사 등 선원에서 수선안거(修禪安居)
▲1960?1961년 = '불교사전' 편찬 작업에 동참
▲1967년 동국역경원 편찬부장
▲1972년 첫 저서 '영혼의 모음' 출간
▲1973년 불교신문사 논설위원, 주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민주수호국민협의회와 유신 철폐 개헌 서명운동 참여
▲1975년 10월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충격, 송광사 불일암으로 돌아감
▲1976년 대표 저서인 '무소유' 출간
▲1984?1987년 송광사 수련원 원장
▲1985년 경전공부 모임 법사
▲1987?1990년 보조사상연구원 원장
▲1992년 강원도 산골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고 홀로 수행정진
▲1993년 8월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준비위원회 발족
▲1993년 10월 10일 프랑스 최초의 한국 사찰인 파리 길상사 개원
▲1994년 1월 1일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창립
▲1994년 3월 26일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창립 기념 첫 대중법문을 서울, 부산, 대구, 전주 등지에서 하며 지부 발족
▲1995년 김영한(법명 길상화)씨의 대원각 시주를 받아들여 송광사 말사 '대법사'로 조계종에 등록
▲1997년 1월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 이사장 취임
▲1997년 12월 14일 대법사를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바꾸고 창건 법회
▲1998년 2월 24일 명동성당 축석 100돌 기념 초청 강연
▲2003년 10월 '맑고 향기롭게' 창립 10주년 기념 강연, 파리 길상사 개원 10주년 기념 법문
▲2003년 12월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 회주에서 스스로 물러남
▲2010년 3월 11일 길상사에서 법랍 55세, 세수 78세로 입적
입적’ 법정스님, 무소유의 삶 되짚어보다(MBC스페셜)
뉴스엔 | 입력 2010.03.11
[뉴스엔 이언혁 기자]
법정스님의 입적에 따라, 3월 13일 다비식에 앞서 그 삶을 되짚어보는 특별방송이 편성됐다.
3월 12일 방송되는 MBC스페셜은 '법정스님의 아름다운 마무리'라는 제목으로 무소유의 삶을 살았던 법정스님의 삶이 현대인들에게 주는 깨달음을 되새겨본다.
올 봄, 법회에서 "봄꽃처럼 맑고 향기로운 삶을 피워야한다"고 강조한 법정스님은 3월 11일 오후 1시 50분 무소유의 삶을 뒤로하고 입적했다.
법정스님은 "아름다운 계절에 여러분이 어떤 꽃을 피울지 생각해 달라...", "오늘처럼 눈부신 날에 다시 만나 반갑다. 언젠가는 이 자리를 비울 텐데 그래서인지 더 고맙고 다행스럽다", "무엇보다 남을 믿을게 아니라 자신과 불법(佛法)에 의지해 씨앗을 뿌리고 꽃을 피워야한다..."고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법문 곳곳에서 암시했다.
무소유, 단순함과 간소함, 홀로 있음, 침묵, 진리에 이르는 길 등 아름다운 마무리에서 삶은 순간 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자 새로운 시작이다. 법정스님은 모두가 한 때일 뿐, 그 한 때를 최선을 다해 살아야한다고 일러왔다.
온 사회가 경제 위기를 비롯한 우울하고 절망적인 뉴스들로 들끓고 있는 이 때, 법정 스님은 오히려 가진 것을 더 비워내야 행복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어지러운 세상에 휘둘리는 것은 바로 마음에 중심이 없어서라는 것이다.
외부적인 현상에서 눈을 돌려 조금만 더 자기 자신을 읽을 수만 있다면 나날이 새로워질 수 있다는 법정 스님의 말씀은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희망을 주는 귀중한 지침서가 될 것이다.
"무소유란 아무 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는 법정 스님은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1955년 출가해 수행하다 불일암에서 홀로 산 17년과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서 자연과 더불어 17년 생활하면서 맑은 가난의 행복함과 소박함의 가치를 세상에 알린 큰 스님이다.
한편 "다비식 같은 것은 하지 말고 사리도 찾으려 하지말라"고 했던 법정스님의 다비식은 3월 13일 오전 11시 송광사에서 거행된다.
3월 12일 오후 10시 55분 방송.
법정 입적> 길상사 분향소, 추모 발길 이어져
연합뉴스 | 입력 2010.03.11 20:53 | 수정 2010.03.11
법심(法心)으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서울=연합뉴스) 권영전 기자 = 11일 입적한 법정스님의 법구가 있는 서울 성북동의 길상사에는 불교계 인사들은 물론이고, 정치인들과 불자들, 시민들까지 많은 조문객들이 몰려들었다.
이날 오후 3시께부터 입적 소식을 듣고 모여든 불자들과 시민들은 극락전 앞에서 조용히 합장을 했지만, 곧이어 가슴을 치는 등 아픈 마음을 드러냈다. 길상사를 찾은 스님들도 모두 마음이 무거운 듯 엄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길상사의 불자들은 자율적으로 자원봉사단으로 나서 조문객들의 안내를 도맡기도 했다.
오후 5시30분께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스님이 50여명의 스님들과 함께 길상사를 찾아 법정스님이 입적한 행지실(行持室)에서 묵념을 하는 등 조문했고, 전 총무원장인 지관스님도 곧이어 길상사 행지실을 찾았다.
지관스님은 "법정스님과 나는 이 세상에 올 때 같은 해에 왔는데, 그분이 먼저 가신 데 대해 무어라 말씀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묵언으로 조의를 표할 뿐"이라면서도 "다만 법정스님이 육신은 버렸어도 그분의 법심(法心)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이끌어주시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조계종 대변인 원담스님은 "법정스님이 살아생전에 가졌던 자신에 대한 엄격함과 사물에 대한 따뜻함은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며 "국민들의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으신 법정스님의 극락왕생을 기원한다"고 밝혔다.
정치인들의 조문 행렬도 이어졌다. 이계진 한나라당 의원도 이날 길상사를 찾아 "엊그제 스님을 마지막으로 뵈었는데 잠시 지방에 내려간 사이 돌아가셨다"며 안타까워했다.
이 의원은 또 "17년 전 아내와 송광사 불일암에서 법정스님께 계를 받았다"며 "당시 향적(香積)이라는 법명도 받았는데, 아마 좋은 향기를 세상에 쌓으라는 뜻이셨던 것 같다"고 스님과의 인연을 회상하기도 했다.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도 "'무소유' 정신을 설파하신 법정스님이 입적하셔서 아쉽다"며 "우리 사회의 큰 등불이 지셨다"고 말했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도 길상사를 찾아 "우리 사회에 깨달음을 준 큰어른이 가셨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표했다.
도올 김용옥 전 고려대 교수도 조문 행렬에 동참했다.
저녁이 되면서 길상사에는 일반인 조문객들이 더 몰렸다. 설법전에 마련된 분향소에는 불자들과 시민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조문객들은 차례로 8~10명씩 법정스님의 영정 앞에서 향을 피우며, 스님의 극락왕생을 기원했다.
이어 한 스님이 치는 죽비 소리에 맞춰 분향대 앞에서 절을 하며 애통한 마음을 내비쳤다.
길상사 신도인 허성춘(55.여) 씨는 "스님의 입적 소식을 듣고 머리가 하얘지고 가슴이 멍해졌다"며 "지난번 동안거 해제일에도 스님이 혹시 나오시나 하고 찾아갔다가 못 뵈어 무척 안타까웠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다른 조문객도 "지난해 김수환 추기경이 돌아가시고 또 종교계의 큰어른이 돌아가셔서 걱정"이라며 "슬픈 마음을 안고 조문하러 왔다"고 말했다.
법정스님의 다비준비위원회는 이어지는 조문객들을 맞이하기 위해 12일 오전 4시께 극락전 앞에 분향소를 하나 더 마련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comma@yna.co.kr
법정 스님 ‘무소유’마저도 ‘소유’ 말라
한겨레 | 입력 2010.03.11 14:40 | 수정 2010.03.11
[한겨레] 열반한 법정 스님 "내 모든책 더 이상 출간말라"
"일체의 장례의식 말라" 유언
산문집 < 무소유 > 의 작가로 친숙한 법정 스님이 11일 오후 1시52분께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입적했다. 법랍 55살. 세수 78살.
지난 2007년 10월 폐암 진단을 받고 제주도 서귀포 등에서 요양해오다 최근 삼성서울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아온 법정 스님은 이날 열반 직전 길상사로 옮겨졌다.
법정 스님은 불교계의 현실 참여가 전무하다시피했던 '씨알의소리' 편집위원으로 씨알의 소리가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도록 활기를 불어넣었고, 1970년대에 장준하, 함석헌 등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해 민주화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또 지난해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과도 깊은 교분을 나누었다. 1994년부터는 순수 시민운동단체 '맑고 향기롭게'를 만들어 마음과 삶을 맑히는 운동을 펼치며, 고독한 수행 생활을 해왔다. 1997년엔 서울 성북동에 길상사를 창건했고 2005년 강원도 산골 오두막으로 내려가 무소유의 삶을 살면서 가끔씩 길상사에서 법문을 해왔다.
법정 스님은 입적하기 전날 밤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내가 금생에 저지른 허물은 생사를 넘어 참회할 것이다. 내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해 사용해 달라.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 "법정스님은 머리맡에 남아 있던 책을 저서에서 약속한 대로 스님에게 신문을 배달한 사람에게 전해줄 것을 상좌에게 당부했다.
아울러 법정스님은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주기를 간곡히 부탁한다"는 말을 남겼다. 법정 스님은 맑고 정갈한 필치의 산문인 < 무소유 > < 오두막 편지 >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 < 산방한담 > < 텅빈 충만 > < 아름다운 마무리 > < 일기일회 > <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 > 등의 책을 남겼다.
법정스님은 평소에 번거롭고, 부질없으며, 많은 사람에게 수고만 끼치는 일체의 장례의식을 행하지 말고, 관과 수의를 따로 마련하지도 말며,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없이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해주고,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 말며, 탑도 세우지 말라고 상좌들에게 당부했다.
이에따라 조계종과 송광사, 길상사 등은 이런유지를 받들어 별도의 공식적인 장례위원회를 구성하지 않기로 했으며, 다비식 이외 일체의 장례의식을 치르지 않기로 했다.
또 조화나 부의금도 접수하지 않기로 했으며 조문객을 위해 길상사와 송광사, 스님이 17년간 머물렀던 송광사 불일암 등 3곳에 간소한 분향소만 마련했다. 다비식은 13일 오전 11시 전남 순천 송광사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 '무소유' 법정 스님 입적 추모게시판 바로 가기
▲1932년 10월 8일 = 전남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 출생
▲1954년 = 통영 미래사에서 효봉 선사를 은사로 입산 출가
▲1956년 7월 15일 = 효봉 선사를 은사로 사미계 수계
▲1959년 3월 15일 =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자운율사를 계사로 비구계 수계
▲1959년 4월 15일 = 해인사 전문강원에서 명봉화상을 강주로 대교과 졸업, 이후 지리산 쌍계사와 가야산 해인사, 조계산 송광사 등 선원에서 수선안거(修禪安居)
▲1960∼1961년 = '불교사전' 편찬 작업에 동참
▲1967년 동국역경원 편찬부장
▲1972년 첫 저서 '영혼의 모음' 출간
▲1973년 불교신문사 논설위원, 주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민주수호국민협의회와 유신 철폐 개헌 서명운동 참여
▲1975년 10월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충격, 송광사 불일암으로 돌아감
▲1976년 대표 저서인 '무소유' 출간
▲1984∼1987년 송광사 수련원 원장
▲1985년 경전공부 모임 법사
▲1987∼1990년 보조사상연구원 원장
▲1992년 강원도 산골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고 홀로 수행정진
▲1993년 8월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준비위원회 발족
▲1993년 10월 10일 프랑스 최초의 한국 사찰인 파리 길상사 개원
▲1994년 1월 1일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창립
▲1994년 3월 26일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창립 기념 첫 대중법문을 서울, 부산, 대구, 전주 등지에서 하며 지부 발족
▲1995년 김영한(법명 길상화)씨의 대원각 시주를 받아들여 송광사 말사 '대법사'로 조계종에 등록
▲1997년 1월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 이사장 취임
▲1997년 12월 14일 대법사를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바꾸고 창건 법회
▲1998년 2월 24일 명동성당 축석 100돌 기념 초청 강연
▲2003년 10월 '맑고 향기롭게' 창립 10주년 기념 강연, 파리 길상사 개원 10주년 기념 법문
▲2003년 12월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 회주에서 스스로 물러남
▲2010년 3월 11일 길상사에서 법랍 55세, 세수 78세로 입적
(서울=연합뉴스)
cherora@yna.co.kr
세상을 보는 정직한 눈 < 한겨레 >
산문집으로 되새기는 법정의 '무소유'
연합뉴스 | 입력 2010.03.11 14:46 | 수정 2010.03.11
(서울=연합뉴스) 조채희 기자 =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을 쓰게 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있다는 뜻이다"('무소유' 중에서)
법정스님하면 떠오르는 단어 '무소유'. 법정스님이 1970년대 초반부터 쓴 글을 모아 1976년 펴낸 대표적인 산문집 '무소유(범우사)'를 비롯해 수십권의 책에서 한결같이 설파한 무소유의 정신은 무한경쟁과 탐욕의 시대에 우리가 지녀야 할 마음의 등불이다.
법정스님의 여러 산문집은 스님 특유의 담백하면서도 격조있는 필치로 고된 일상에 지친 일반인을 위로했고, 불교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스님이 말한 '무소유'는 불교의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즉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가지고 온 것도 없고 세상을 하직할 때 가져가는 것도 없다는 가르침에서 비롯됐다.
이런 청백가풍(淸白家風)의 무소유의 정신을 일상에서 실천하라고 권한 스님의 글은 종교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에게 호응을 얻었다.
산문집 '무소유'에 수록된 1971년의 글 '무소유'에는 법정스님이 평생 수십권의 책을 통해 반복해 강조했던 무소유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당시 3년 째 난초 화분 둘을 애지중지 길렀다는 스님은 장마 후 쏟아지는 햇볕 아래 화분을 놓고 왔다는 생각에 허둥지둥 거처로 돌아간 일화를 소개하며 자신의 집착을 뉘우친다.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을 통해 무소유(無所有)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所有史)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소유욕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다. 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려 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는 끔찍한 비극도 불사하면서. 제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스님은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담요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 이것뿐이요"라고 했던 마하트마 간디의 어록에서 크게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쓴다.
1992년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한번 출가하는 마음으로 강원도 화전민이 버리고 떠난 산골 오두막으로 들어간 스님은 1995년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에 이어 새천년을 앞둔 1999년 12월에 수상집 '오두막 편지'를 내놓는다.
'오두막 편지'에서 스님은 "현재 내가 몸담아 사는 산중 오두막은 여러가지로 불편한 환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곳에서 단순하고 간소하게 내 식대로 살 수 있기 때문에 일곱 해째 기대고 있다. 어디를 가보아도 내 그릇과 분수로는 넘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어, 나는 이 오두막을 거처로 삼고 있다"고 썼다.
또 "'소욕지족(少慾知足)', 작은 것과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작은 것과 적은 것 속에 삶의 향기인 아름다움과 고마움이 깃들어 있다"고 가르치기도 했다.
스님은 강원도 산골 생활 17년째가 되던 2008년 11월에는 길상사 소식지 '맑고 향기롭게'에 기고했던 수필을 모아 '아름다운 마무리'를 펴내 삶의 마지막에 선 노승의 마음을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스님은 2007년 한차례 병으로 입원하면서 이미 많이 쇠약해진 상태였다.
"길상사를 드나들면서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얻어간다. 그때마다 마음이 개운치 않고 아주 무겁다. 말로는 무소유를 떠벌리면서 얻어 가는 것이 너무 많아 부끄럽고 아주 부담스러웠다. 늙은 중이 욕심 사납게 주는대로 꾸역꾸역 가지고 가는 꼴을 이만치서 바라보고 있으면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그러면서 스님은 "놓아두고 가기! 때가 되면, 삶의 종점인 섣달 그믐날이 되면, 누구나 자신이 지녔던 것을 모두 놓아두고 가게 마련이다. 우리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나그네이기 때문이다. 미리부터 이런 연습을 해두면 떠나는 길이 훨씬 홀가분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스님이 말하는 '아름다운 마무리' 는 역시 "스스로 가난과 간소함을 선택해 소유의 비좁은 감옥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언제든 떠날 채비를 갖춘다. 그 어디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순례자나 여행자의 모습으로 산다. 우리 앞에 놓은 이 많은 우주의 선물도 그저 감사히 받아 쓸 뿐, 언제든 빈손으로 두고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한다…아름다운 마무리는 낡은 생각, 낡은 습관을 미련없이 떨쳐 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마무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법정스님의 첫 법문집인 '일기일회(一期一會, 2009년 6월 출간)'에도 무소유의 마음이 잘 나타나있다. 스님은 2008년 5월24일 여름안거 결제를 맞아 했던 법문에서도 '버리고 떠나기'를 강조했다.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아야한다. 모든 것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되지 않아야한다. 모든 것을 가지려면 어떤 것도 필요로 함 없이 그것을 가져야한다. 버렸더라도 버렸다는 관념에서조차 벗어나라. 선한 일을 했다고 해서 그 일에 묶여 있지 말라.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가듯 그렇게 지나가라"
chaehee@yna.co.kr
그가 남긴 名文들…<무소유><아름다운 마무리><내가 사랑한 책>
매일경제 | 입력 2010.03.11 17:47 | 수정 2010.03.11
◆법정스님 입적
법정 스님의 문명(文名)을 널리 알린 작품은 무엇일까. 누구도 주저없이 '무소유'(1976년)를 꼽을 것이다. 소유와 집착에 대한 깨달음을 기록한 '무소유'를 비롯해 35편의 수필을 모은 이 책은 현대 한국 수필의 대표격으로 평가받는다. 인기도 많아 34년 동안 180쇄를 찍었고, 지금까지 330만부가 팔렸다.
책의 표제작이기도 한 '무소유'는 스님이 평생 동안 강조했던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ㆍ이 세상에 태어날 때 가지고 온 것도 없고 세상을 하직할 때 가져가는 것도 없다는 가르침)'의 정신을 고스란히 담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마하트마 간디가 남긴 명언에서 시작한 글은 당시 스님이 애지중지했다는 난초에 관한 이야기로 옮겨간다. 장마 후 쏟아지는 햇볕 아래 화분을 놓고 왔다는 생각에 허둥지둥 거처로 돌아갔다는 스님. 그는 이 일화를 회상하며 "'소유가 인간을 싸우게 하며, 소유에 대한 집착이 인간을 괴롭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을 통해 무소유(無所有)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所有史)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소유욕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스님은 그 이후에도 무한경쟁과 탐욕의 시대에 우리가 지닐 마음의 자세에 대해 논한 명문을 많이 남겼다.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오두막 편지' 등은 출간되자마자 각박한 세상살이에 찌든 현대인들의 마음을 어루만졌고, 모두 큰 인기를 얻었다. 2007년 한 차례 병으로 입원한 후 쇠약해진 자신을 돌아보며 느낀 심정을 담담하게 표현한 '아름다운 마무리'(2008년)도 또 다른 대표작. 그는 "놓아두고 가기! 때가 되면, 삶의 종점인 섣달 그믐날이 되면, 누구나 자신이 지녔던 것을 모두 놓아두고 가게 마련이다. 우리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나그네이기 때문이다. 미리부터 이런 연습을 해두면 떠나는 길이 훨씬 홀가분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법정 스님의 글들은 불교의 가르침을 담았으면서도, 종교적 색채를 강하게 띠지 않았다는 특징이 있다. 한 문학평론가는 "스님 특유의 담백하면서도 격조 있는 필치도 감동에 백 배 힘을 보탰다"고 말했다.
스님은 폐암으로 힘든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끝까지 책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은 '애서가'였다. 최근에도 '내가 사랑한 책'을 펴냈고, 이 책이 결국 법정 스님의 유작이 되고 말았다. '내가 사랑한 책'은 스님이 여러 곳에서 언급했던 300여 권의 책 중에서 50권의 책을 직접 골라 소개한 것으로, 종교 관련 서적 외에도 동서양 문학작품과 환경 서적 등 다양한 책을 담았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 사티쉬 쿠마르의 '끝없는 여정' 등 현대문명의 효율성에 이의를 제기하며 보다 본질적인 삶이 무엇인지 질문을 제기한 책들이 대부분이다.
스님은 출가할 당시를 떠올리며 "넉넉하지 못한 집안에서 어렵사리 모은 책들을 버리고 떠나는 게 못내 망설여졌다. 그것이 나의 유일한 소유물이었기 때문"이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손동우 기자]
말과 글로 지은 그의 큰 집에서 편안하게 몸을 의지했는데…
매일경제 | 입력 2010.03.11 17:41 | 수정 2010.03.11
영혼의 성불이 돌아가셔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시인 정호승)
마음을 비우고 더불어 사는 삶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준 법정 스님의 가르침은 입적 후에도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주고 있다. 그의 말과 글에 인생 방향을 바꾸고 삶을 성찰했던 각계각층 사람들이 그의 입적에 애도를 표하고 있다. 법정 스님이 종교계를 넘어 문화예술계 등 다방면으로 수많은 인사들과 교류했기 때문에 그 추모 물결이 깊고 높다.
이명박 대통령은 조전에서 "살아생전 빈 몸 그대로 떠나셨지만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남겨주셨다. 많이 갖고 높이 올라가기를 욕심 내는 현대인들에게 비우는 삶, 베푸는 삶의 소중함을 보여주셨다"고 회고했다.
이 대통령은 법정 스님 저서를 항상 추천도서 1호로 꼽았으며 외국 순방 또는 휴가 시 항상 법정 스님 수필집을 가지고 다녔다. 수필집 '무소유'는 여러 번 읽은 것으로 알려졌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은 11일 "고통 받는 중생들에게 많은 위로와 사랑을 주셨던 법정 스님 원적은 불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에게 큰 슬픔"이라며 "스님께서 부디 극락왕생하시기를 기원하며 애도의 뜻을 표한다"고 말했다.
'무소유'에 깨달음을 얻어 고향인 전남 장흥으로 낙향한 소설가 한승원 씨는 "법정 스님 말씀과 삶은 엄청나게 큰 너울(바람에 일어난 물결)이자 커다란 집이었다"며 "말과 글로 지은 그의 큰 집에서 편안하게 몸을 의지할 수 있었으며 답답할 때 꺼내 마시는 생명수와도 같은 존재였다"고 추모의 마음을 전했다.
이어 "법정 스님은 고 김수환 추기경과 더불어 우리 사회가 의지하는 큰 어른이었다"고 덧붙였다.
정호승 시인은 입적 소식을 듣고 "아이고…"라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법정 스님과 여러 차례 만난 적이 있는 정 시인은 "우리 시대 스승이 결국 이렇게 떠나시는구나"라며 애도했다.
소설가 박완서 씨는 "정말 서운하다. 스님 생전에 몇 번 교유가 있었고 멀리서 흠송하는 마음으로 봤다"며 "나는 가톨릭 신자지만 그분은 타 종교에 배타적이지 않아 존경했으며, 큰 어른이 돌아가셔서 마음으로 애도한다"고 말했다.
국악인 안숙선 씨도 법정 스님과 인연이 있다. 안씨는 "여러 어른들과 함께 만나 법정 스님을 지켜본 적이 있다"며 "사람은 뭐든지 채우려고만 해서 고통을 겪는데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사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비구니 출신 재즈가수 웅산 씨는 "법정 스님은 '인간의 목표는 풍요롭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존재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며 "음악을 하다 보면 물질적 욕심도 나지만 법정 스님 책을 읽은 후 음악인이 가야 할 올바른 길을 성실하게 가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법정 스님은 다른 종교와도 벽을 허물어 큰 발자취를 남겼다. 길상사 마당에 있는 관음보살상을 독실한 천주교신자 조각가인 최종태 전 서울대 교수(김종영미술관장)에게 맡겨 화제를 모았고, 1997년 12월 길상사 개원법회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방문했다. 법정 스님은 이에 대한 화답으로 이듬해 명동성당에서 특별 강론을 하기도 했다.
최종태 관장은 "관음상을 조각해보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예전부터 많이 했는데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법정 스님이 연락을 해와 그 뒤로 10여 년간 가깝게 지냈다"며 "깨끗하고 향기로운 품격을 갖고 있던 분"이라며 고인을 추억했다.
법정 스님 수필집 '아름다운 마무리'에 등장하는 소녀 '봉순이' 그림을 그린 박항률 화백은 "열흘 전쯤 병원을 찾았지만 주무시고 계셔서 직접 이야기는 나누지 못하고 돌아왔다"며 "당시 주변에서 좀 더 좋아지실 것이라 했는데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고 슬퍼했다.
[전지현 기자 / 이진명 기자]
해남 태생 '무소유' 법정스님 애도 분위기 고조
뉴시스 | 구용희 | 입력 2010.03.11 16:12 | 수정 2010.03.11
【광주=뉴시스】구용희 기자 = "한 걸음, 한 걸음 삶을 내딛습니다. 발걸음을 떼어 놓고 또 걷고 걷고….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지만 짊어지고 온 발자국은 없습니다. 그냥, 가 버리면 그만인 것이 우리 삶이고 세월입니다."
길상사 회주 법정 스님이 11일 입적한 가운데 그가 열었던 '무소유'의 삶이 고향인 전남 해남과 17년 동안 깨달음을 구했던 순천 송광사 불일암에서부터 시작됐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스님의 입적 소식이 알려지자 광주 지역 주요 사찰들도 평소 스님의 삶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애도하는 분위기다.
11일 송광사 말사 증심사 등에 따르면 법정스님은 1932년 산세가 수려한 전남 해남군 문내면에서 태어났다.
이후 목포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전남대 상과대학에서 3학년을 수료한 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이 되고 싶다'며 1954년 출가를 결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1972년 유신철폐 개헌 서명운동에 뜻을 함께 하기도 했던 스님은 1975년 10월 송광사 불일암 터에서 토굴을 짓고 17년이라는 긴 시간을 수행으로 보냈다.
1980년 초반에는 송광사 수련원장을 맡아 부처님의 진리를 대중에게 설파하기도 했다.
이후 강원도 산골로 행적을 옮긴 스님은 지난 2003년 광주를 방문, '맑고 향기로운 삶'을 주제로 시민들 앞에 서기도 했다.
증심사 한 관계자는 "많은 불자들의 요청에 따라 법정 스님을 모시고 광주에서 강연회 등을 가지려 했으나 스님의 건강상태 등 여건이 여의치 않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고 말했다.
한편 송광사 말사인 증심사와 광주 서구 치평동 무각사에는 스님의 입적 소식을 접한 지역 불자들의 발걸음이 속속 이어지고 있다. 사찰 측도 13일 순천 송광사에서 열릴 다비식 준비로 분주한 모습이다.
무각사에서는 스님의 입적을 애도하는 시민들을 위해 분향소를 마련할 계획이다.
persevere9@newsis.com
법정스님과 절이 된 요정 '대원각'
머니투데이 | 김태은 기자 | 입력 2010.03.11
머니투데이 김태은 기자]
↑고 김영한ⓒ길상사 |
법정(法頂·78)스님이 11일 자신이 창건한 길상사에서 입적했다.
지병인 폐암으로 투병해온 법정은 이날 낮 입원중이던 삼성서울병원에서 길상사로 옮긴직후인 오후 1시51분께 열반에 들었다. 서울 성북2동에 위치한 길상사는 1997년 세워졌다.
길상사는 본래 고급요정 '대원각'이었다. 80년대말까지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3대요정으로 꼽히며 밀실정치에 이용됐던 곳이다.
대원각의 주인이었던 고 김영한(1916~1999)이 법정에게 시주해 절을 만들어주기를 청하면서 길상사가 탄생했다. 16세때 조선권번에 들어가 '진향'이라는 기생이 됐던 그는 대표적 근대시인 백석(1912~1995)의 연인이기도 했다. 백석에게 자야(子夜)라고 불리웠던 그는 '백석,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내 사랑 백석' 등의 저술을 냈다.
김영한은 법정의 대표적인 산문집 '무소유'를 읽고 감명받아 당시 시가 1000억원에 달했던 7000여평 절터와 전각을 내놓았다. 사양하는 법정을 10년에 걸쳐 설득해 그 뜻을 이루었다고 한다.
97년 12월14일 길상사가 개원하던 날, 김영한은 법정으로 부터 염주 하나와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만을 받았다. 수천 대중 앞에서 단 두 마디를 남겼다.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99년 11월14일 타계한 그는 하루 전날 목욕재계하고 절에 와 참배하고 길상헌에서 생애 마지막 밤을 묵었다고 전해진다. 다비후 유골은 유언대로 길상헌 뒤쪽 언덕바지에 뿌려졌다.
한편 '무소유'를 비롯 '버리고 떠나기', '산에는 꽃이피네' 등 대중서 20여권으로 깊은 울림을 남긴 법정은 한동안 길상사의 회주를 맡았다. 그외에는 그 흔한 사찰주지 한번 지내지 않으며 '무소유'를 실천한 삶을 살았다.
↑길상사에 위치한 고 김영한을 기리는 공덕비ⓒ길상사 편히 가소서!"...추모객 줄이어 YTN | 입력 2010.03.11 앵커멘트] 법정스님 입적] 홍라희씨, 병원비 6000만원 기부 한국경제 | 입력 2010.03.11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의 부인인 홍라희씨가 11일 입적한 법정 스님의 병원비 6000만원 상당을 기부했다. 법정스님은 누구인가 "연꽃과 같은 영혼의 스승"머니투데이 | 김태은 기자 | 입력 2010.03.11 16:35 | 수정 2010.03.11 머니투데이 김태은 기자]
(사)시민모임 맑고향기롭게 중앙사무국은 11일 법정(法頂)스님의 행장(사람이 죽은 뒤에 그의 행적을 적은 글)을 발표했다. '불교계 거목' 법정스님 입적 ‥ 생전에 추천한 50권의 책은?한국경제 | 입력 2010.03.11 15:02 | 수정 2010.03.11 11일 폐암 투병끝에 입적한 법정(法頂)스님(78)은 탁월한 문장력을 바탕으로 한 산문집을 통해 일반 국민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은 '스타' 스님이다. 법정 스님은 평소 "산중 오두막 생활에서 가장 행복한 때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책을 읽을 때,즉 독서삼매에 빠졌을 때"라고 말해 왔다. 출가를 결심한 뒤 단박에 삭발하고 입은 승복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지만 유일한 '소유물'이었던 책만큼은 끊기 힘든 인연이었다고 말했을 정도로 그는 애서가였다. 법정스님이 번역한 불경연합뉴스 | 입력 2010.03.11 16:25 | 수정 2010.03.11 서울=연합뉴스) 김윤구 기자 = '무소유' 등 여러 산문집을 남긴 것으로 유명한 법정스님은 불교 경전 번역에도 많은 자취를 남겼다. 번역서 가운데 1988년 출간된 '신역 화엄경'은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가운데 '보살문명품', '정행품', '십행품', '십회향품', '십지품', '여래출현품', '이세간품', '입법계품' 등 주요 내용을 간추려 번역하고 주석을 단 책이다. 법정 스님 "하루 한가지씩 버려야…" 한평생 청빈한 삶 설파서울경제 | 입력 2010.03.11 무소유' 법정 스님 입적
정승양기자 schung@sed.co.kr 세계일보 | 입력 2010.03.11 18:20 | 수정 2010.03.11 마지막 가는 길 지킨 류시화 시인 법정스님 가로되…뉴시스 | 신동립 | 입력 2010.03.11 서울=뉴시스】신동립의 잡기노트 < 174 > =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법정 스님에게 물어봄 직하다. 11일 입적한 고승은 매우 고맙게도 아주 많은 책을 남겼다. '무소유' '영혼의 모음' '서 있는 사람들' '말과 침묵' '산방한담' '텅빈 충만' '물소리 바람소리' '버리고 떠나기' '인도 기행'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산에는 꽃이 피네' '오두막 편지' 등이다. 지난해에는 1992년 8월부터 2009년 4월까지의 법문을 모은 '일기일회'와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을 펴냈다. 법정의 마지막 산문집은 '아름다운 마무리'다. 동백·매화 꽃잎 매만지며 하루전 ‘열반 대화’한겨레 | 입력 2010.03.11 18:10 | 수정 2010.03.11 한겨레] [마음산책] 법정 스님의 사촌 누이인, 현장 스님의 속가 어머니와 법정 스님의 유일한 형제인 여동생 박정란씨와 함께 지난 9일 법정 스님을 찾았던 전남 보성 대원사 주지 현장 스님은 "불자들보다 더 냉정하게 대하며 가까이하지 않던 (법정스님의)친여동생에게 '굳굳하게 살아라'고 했고, (현장 스님의)어머니가 사촌간인 법정 스님에게 '빨리 가서 나도 데려가라'며 '이게 마지막이겠지'라고 말하자 법정 스님이 '마지막이 아니다'고 했고, 어머니가 다시 '그럼 어디가면 스님을 볼 수 있느냐'고 하자, 불일암으로 찾아오라'고 했고, 어머니가 '다리가 아파서 불일암에는 못올라간다'고 하자, '그럼 길상사로 찾아오라'고 했다"고 전했다. 봉은사 다례헌에 머물며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송광사로 내려가 불임암을 짓던 법정 스님을 시봉하면서 불일암 낙성식날 수계를 받은 현장 스님은 "스님은 부엌에 '먹이는 간단 명료하게'라는 말을 써붙여두고, 일체 3가지 반찬 이상을 상에 올리지 못하게 했고, 음식들을 손수 하고, 워낙 정갈했기 때문에 여자들도 스님의 부엌에 들어가길 겁나했을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법정 스님은 평소 책에서도 할머니에 대해 자주 회고하곤 했다. 어린시절 할머니로부터 늘 옛날얘기를 들으며 자라 자신의 문재는 할머니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했다. 어린시절 워낙 가난해서 책과 원고지도 살 수 없었던 스님은 국민학교 때 소풍에서 보물찾기를 해 원고지를 상으로 탔는데, 그때부터 할머니 얘기를 원고지에 쓰며 문재를 키워갔다고 간다. 법정 스님은 그토록 좋아했던 할머니의 기일을 하루 앞두고 열반해 속가 가족들은 "할머니를 따라가신 것"이라고 추모했다. 법정 스님은 지난 2일 자신을 찾아온 송광사 선원 한주 영선 스님과 영명 스님, 지현 스님들을 맞으며 종이에 '조계종풍을 지켜줘서 고맙다'고 썼다. 지현 스님은 "조계종풍이 선(禪)이므로, 영선 스님에게 선원을 지켜줘서 고맙다는 뜻을 전한 것 같다"고 말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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