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3.왜 우리는 보현행원으로 가야 하는가?(1)

2010. 3. 7. 20:4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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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3.왜 우리는 보현행원으로 가야 하는가?(1)

 

보현행원의 확대가 화엄경, 무한 확대가 화엄 세계

 

기존 화엄은 화엄경을 십지나 십바라밀의 측면에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면 제가 볼 때는 화엄의 극히 일부밖에 볼 수 없습니다.
화엄의 근본은 십지나 십바라밀이 아니라, 바로 보현행원입니다. 보현행원의 눈을 가지고 화엄을 바라볼 때, 화엄의 모든 품, 모든 가르침이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십지품은 화엄의 여러 품 중 입법계품과 함께 가장 초기에 성립된 것이라, 그래서 십지를 많이 연구하고 지론파도 생기고 나중에 화엄종의 기초가 되었겠지만, 십지만 가지고, 또는 십지품을 중심으로 화엄을 이해하려면 화엄의 깊은 뜻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게 제 개인 생각입니다.

 


화엄은 어디까지나 보현행원으로 보아야 하고 보현행원의 소식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보현행원의 소식을 알고 화엄경을 보면, 화엄경은 처음부터 끝까지가 모두 보현행원뿐입니다. 각 품마다 무슨 이야기가 나오든, 십신이 나오고 십회향이가 나오고 십지가 나오고 십인이 나오든, 방편이 나오든 서원이 나오든 무엇이 나오든 모두 보현행원의 자기 표현, 자기 확대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지로 화엄경 자체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화엄경의 시작 자체가 부처님 공경, 부처님 찬탄, 부처님 공양, 부처님 청법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내용은 화엄경이 끝날 때까지 정도의 차이만 있지 거의 모든 곳에서 설해집니다. 제 말씀을 보고 지금 당장 화엄경을 한번 펼쳐 보십시오.

 


보현행원을 통해, 화엄의 모든 소식이 펼쳐집니다.

신해행증의 문제, 서원의 문제, 회향, 방편, 바라밀행, 지혜의 성취, 자비의 전개 등등이, 그 작은 보현행원품 속에 근본 소식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마치 보조 지눌 스님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셨던 여래출현품에 나오는 ' 미진경권유'의 비유처럼,  그 티끌같은 경전에 이 깊은 소식이 모두 들어 있었을 줄 누가 감히 알았겠습니까? 그런데 실지로 방대한 화엄경에 비하면 얼마 되지도 않는 그 작은 보현행원품 속에, 화엄경의 모든 근본 소식이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모르니 보현행원을 평가절하하는 말씀들이 나오는 것이라 저는 봅니다. 즉, 보현행원이 별 게 아니다, 라고 말씀하시는 분은, 당신 스스로 '저는화엄이나 보현행원에 대해서는 모릅니다'라는 말씀을 고백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보현행원을 누가나 다 아는, 그리고 누구나 다 하는 단지 착한 일 하는 것 정도로만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그렇게 알면 보현행원은 선인선과의 유위법이지 수행, 우리를 깨달음으로 이끄는 무위법은 되지 못합니다.

 

 

 

 

여기서 많은 분들의 오해가 생기는데, 보현행원은 단지 선인 선과의 선업일 뿐 아니라, 그래서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복을 받고 행복하게 사는 가르침일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생사를 뛰어넘는 무위의 세계로 이끌어주는 가르침입니다.

 

 

 

일심에 심진여문, 심생멸문이 있듯, 보현행원도 유위의 세계인 선인 선과의 선업과, 무위의 세계인 생사를 뛰어넘는 도업의 두 가지 측면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도업의 면을 보시지 못하여 단지 선업의 측면만 보고 보현행원은 수행이 아니다, 깨침과는 상관없다, 보현행원이 좋기는 하지만 그것 가지고는 안 된다 등등의 나름대로의 결론을 지으시는 듯합니다.

 

 

보현행원에는 세속(속제)의 측면인 선업 복덕의 가르침과, 출세속(진제)의 측면인 도업, 공덕의 가르침이 함께 공존합니다. 따라서 진속이 자유로울 뿐 아니라 속제, 진제가 같이 무애 원융하게 조화되고 어울리는 가르침임을 꼭 명심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보현행원을 하면 세속적 삶에서도 뛰어나고 진리의 세계에서도 밝아지는 것입니다.

 

 

 


 

 

어떤 마음을 갖고 사는가?-밝은 마음 어두운 마음

 

 

 

우리의 삶은 어떤 특정 행이 아니라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삶을 사는가에 따라 밝고 어둠이 갈라집니다. 삶 그 자체에 어떤 고정불변의 밝고 어둠이 있는 게 아니라, 어떤 마음을 갖고 사느냐에 따라 똑같은 행이 밝은 행이 되기도 하고 어두운 행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교 수행도 예외가 아니라, 똑같은 기도, 똑같은 수행을 하더라도 마음가짐에 따라 밝아지는 수행이 되기고 하고 오히려 어둠만 더하는 수행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마음이 밝은 삶이고 어떻게 살면 어두워지는가?

 

 

 

첫째, 밖으로 향하는 마음은 모두 어두운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것은 밖을 향하는 삶은 삶의 주체가 내가 되지 못하기에 남의 삶을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며, 그 속성이 끝이 없기에 끝없는 욕망의 갈증을 유발합니다.

 

 

 

또한 밖에서 오는 것은 모두 허망하니, 그것은 내 안에서 솟아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연이 다하면 허망하게 홀연히 사라집니다.  기독교가 그렇게 금기시 하는 우상 숭배는 삶의 가치를 밖에서 구하는 대표적인 어두운 행입니다. 진리를 밖에서 찾는 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둘째,구하면 어두워집니다.

구하면 집착하게 되고, 집착하면 아무리 밝은 눈도 흐려집니다. 이것은 깨달음도 마찬가지라, 깨달음도 구하면 어두워집니다.

 

 

 

셋째,불성(佛性)을 부정하면 어두워집니다.

업보 중생, 죄인, 원죄...이런 개념들은 모두 우리의 밝은 불성을 부정하는 말들입니다. 이런 삶은 필히 어둠을 초래할 수밖에 없습니다.

 


 

넷째,남을 치면 어두워집니다.

내가 제일이다, 내 수행법만이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 우리 종교만이 진리이다, 너는 깨닫지 못했다...등등의 말들 역시 어둠을 초래합니다.

 


다섯째, 조건을 붙이면 어두워집니다.

조건을 붙이는 순간, 본래 무한한 우리의 삶이 그 조건에 갇혀 버리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싫어하는 마음을 내면 어두워집니다.

 

물론 좋아하는 마음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싫어하는 마음, 싫증내는 마음을 내는 순간 모든 인연은 그 즉시 어둠으로 변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승찬대사는 신심명에서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네, 오직 버릴 것은 간택심뿐. 좋고 싫은 마음 모두 버릴 때, 모든 것은 그대로 통연 명백하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근세의 고승 금타선사는, 전자 양자 그리고 지수화풍을 만드는 것이 금진의 회전이라 말씀하십니다. 즉, 본래 고요하던 우리 마음에 한 마음 좋은 마음 싫은 마음이 일 때 금진이 회전하여 전자 양자가 탄생하며, 이러한 전자 양자가 서로 끌고 배척하여 삼라만상이 탄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불교는 한 마음, 그 중에 특히 싫고 좋아하는 마음을 경계합니다.

 

 

 

보현행원은 이런 어둠을 초래하는 일과는 거리가 멉니다.

 언제나 긍정과 밝음 속에 보현행은 전개되며, 보현행 자체가 긍정과 밝음을 가져오기 때입니다.

 

 


보현행원은 밝아지는 가르침입니다. 밖을 향하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습니다. 오로지 내 생명에 깃든 부처님 무량 공덕을 감사하고 찬탄하고 심길 뿐입니다.

 

 

남을 치지도, 누구에게나 깃들 불성을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행원이 모든 분을 부처님처럼 공경하는 것인데 어찌 남을 치거나 불성을 부정하는 마음이 티끌만큼이라도 있을 수 있겠습니까?

 

 


또 무유피염이라, 가르침 자체에 싫어하는 마음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행 자체에 조건이 없습니다.

보현행원은 깨달음을 얻거나 업장을 해소하려거나 정토에 태어나거나 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내 본래 모습이 보현행원이요, 내 본래 생명이 보현행원이기에 나는 행원을 하는 것이요 내 본래 생명의 노래를 부르는 것뿐입니다.

 

 

 


그러니 한없이 밝습니다.

보현행원을 하면 나도 모르게 기쁨이 일고 감사하는 마음이 북받쳐 오는 것은 이런 원리 때문입니다.

 

 

아무 조건이 없는 행, 아무 것도 구하지 않는 행! 그저 부처님 진리 생명으로 가득 차 오르는 행! 광덕스님은 이것을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이란 말씀 한 마디로 요약하셨습니다.

 

 

내 생명이 부처님과 똑같다!

나는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나와 부처님 사이에는 한치의 간격도 없다!

 

 

 

이것이 스님의 활구에 담긴 내용인데, 이런 관점에서는 주객의 분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분법이 생기지 않으며, 그야말로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요 번뇌가 보리가 둘이 아니며 범부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닌 그런 경지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註

1.마음이 밖을 향하지 않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가령 미움, 증오 같은 것은 마음이 밖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미움과 증오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더 큰 문제만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됩니다.

 

 

 

그 반면, 용서는 안으로 향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니 그 자체로 모든 문제가 끝나게 됩니다. 권력, 부, 명예 등이 무한하지 않은 것도 그런 것들이 밖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불교는 부처도 밖에서 구하지 말라, 네 안의 부처를 보라고 그렇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권력, 명예, 지식, 부가 높아도, 이웃을 섬기고 공경할 줄 모른다면?

 

 

우리 주위에는 권력도 높고 지식도 풍부하며 가진 재산도 많은 분들이 꽤 많이 계십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이, 그 많은 재산, 그 많은 지식, 그 높은 명예와 권력에도 불구하고 이웃을 섬기고 공경할 줄 모른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니, 오히려 그 때문에 이웃에 군림하고 이웃을 힘들게 한다면 과연 그러한 부, 권력, 명예, 지식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는 흔히 '완장 차더니 사람이 달라졌다'라는 말을 합니다. 소박하고 순박하던 분들이, 감투 하나를 쓰면서부터 천지 차이로 달라지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인데, 그러한 감투가 나와 남을 이익되게 하고 성장하게 하는 일이 되지 못하고 서로 반목하고 대립하는 결과를 가져와서야 그런 일들은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섬기고 공양하는 것은 모든 일의 최우선 덕목입니다. 권력, 명예, 부 등의 세속적 공덕을 넘은 곳의 소식인 것입니다.

 

 


수행하면 공경, 공양은 저절로 되는가?

 

 


수행하면 공경, 공양은 저절로 되는 줄 아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수행과는 별 개의 문제입니다. 수행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절을 많이 하면 절만 잘할 뿐이며 화두를 타파하면 화두만 타파 잘 할 뿐, 이웃을 섬기고 공양하는 것은 그 너머의 소식인 것입니다. 섬기고 공양하는 것은 범부, 성자 할 것 없이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우리 모두의 본래 소식인 것입니다. 즉, 유위의 자리가 아니라 '무위의 자리'인 것입니다.

 

 

 

 

공부가 깊어도 보현의 마음이 없으면 문제된다는 것은 육조스님께 법을 물으러 간 법달스님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법달스님은 법화경을 삼천독이나 한 분으로 육조스님께 법을 구합니다. 그러나 절을 할 때 머리가 땅에 닿지 않습니다. 그래서 육조로부터 '절이란 본래 아만을 꺾자는 것인데 어찌 머리가 땅에 닿지 않는가? 나라는 게 있으면 허물이 생기고, 제 공덕 잊으면 복이 한량없는 것을...' 라는 게송을 듣습니다.

 

 

그리고 법명을 '법달(法達)'이라 여쭙자 여기서도 육조스님으로부터 '네가 무엇을 벌써 통달했다고 이름을 법달이라 하느냐?'며 핀찬을 또 듣습니다. 그러자 법달스님은 비로소 뉘우치고 '앞으로 모든 것을 공경하겠다'고 육조스님께 맹세를 하며 가르침을 듣고 크게 께우칩니다.

 


이런 것을 보면 절을 많이 못 해서 하심이 안 되는 것도 아니며, 화두를 타파하지 못해 어리석은 것도 아닙니다. 단지 안 하기 때문에 못하는 것뿐입니다. 내 안에 가득한 본래 밝은 소식을, 수행 안해서 못한다, 나는 깨치지 못해 못한다며 스스로 한계를 짓고 스스로 눈을 가리는 것입니다.

 


부처님 품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괴로움은 소멸되지 않는다

 

 

우리는 수행을 많이 하고 혹은 깨치면 모든 괴로움, 고는 소멸되는 줄 알고 있으나, 현실은 결코 그렇지 못합니다.

 

 

 

아무리 수행을 많이 하고 아무리 한 소식 이루었다 하더라도, 부처님 품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괴로움은 결코 소멸되지 않습니다. 부처님과 따로 떨어져서 홀로서는 아무 것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한사코 부처님 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부처님 품속에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공부가 됩니다.

 

◐중국의 서쪽 천서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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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족의 티벳문화권지역.여전히 청정한 자연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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