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 집착하는 자/우두(牛頭) 화상

2010. 3. 29. 20:3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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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두(牛頭) 화상
 
4조(도신조사)가 우두산 유서사에 이르니 스님이 수백 명 앉았는데
아무도 도기(道氣)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어떤 스님을 보고 물었다.
"대중이 모두 몇이나 되는가? 그리고 그 가운데는 도인이 있는가?"
  스님이 대답했다.
  "스님은 사람을 너무나 얕보시는군요.
출가한 사람이라면 어느 누가 도인이 아니겠습니까?"
 
  4조가 물었다.
  "그러면 누가 도인인가?"
  스님이 대답이 없더니, 이어 말했다.
  "산꼭대기에 나융이라는
스님이 있는데 몸에는 베옷 한 벌만 걸쳤으며,
스님을 보아도 합장도 할 줄 모르는 특이한 사람이니,
선사께서 가 보십시오."
 
  4조가 암자 앞으로 가서 왔다갔다하면서 말했다.
  "선남자(善男子)야, 심심삼매(甚深三昧)에만 들어 있지 말라."
  이에 나 법융이 눈을 뜨니 4조가 물었다.
  "그대의 배움은 구함이 있어서인가, 구함이 없어서인가?"
  나융이 대답했다.
  "저는 『법화경』에서
'열어 보이고 깨달아 들게 한다'고 한 말에 의해
도를 닦습니다."
 
  4조가 말했다.
  "연다 함은 누구를 연다는 것이며,
깨닫는다 함은 무엇을 깨닫는다는 말인가?"
  나융이 대답이 없으니, 4조가 말했다.
  "서천(西天)에서는 28조사께서 부처님의 심인을 전하셨고,
그리고 달마(達摩) 대사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서로 전하여 4조에 이르렀는데,
그대는 모르는가?"
 
  나융이 언뜻 이 말을 듣고 이내 말했다.
  "저는 항상 쌍봉산을 바라보고 정례하면서 직접 가서 뵙지 못한 것을
한탄하고 있는 중입니다."
 
  4조가 말했다.
  "4조를 알고자 하느냐? 바로 내가 4조니라."
  나융이 벌떡 일어나 발에 머리를 대며 절하고 말했다.
  "스님께서 무슨 인연으로 여기까지 왕림하셨습니까?"
 
  4조가 말했다.
  "특별히 방문차 왔노라."
  그리고는 다시 물었다.
  "여기 말고 다른 거처가 따로 있는가?"
  나융이 손으로 암자 뒤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다른 암자가 더 있습니다."
 
  그리고는 조사를 인도해서 암자 앞으로 가니,
범과 이리가 암자 앞뒤로 둘러 있고, 사슴 떼가 사방에 뛰고 있었다.
 
  4조가 두 손으로 두려운 시늉을 하면서 "으악" 했더니,
나융이 말했다.
  "스님에겐 아직 그런 것이 남아 있습니까?"
  조사가 물었다.
  "아까 무엇을 보았는가?"
 
  나융이 이 말씀에 의해 현묘한 이치를 깨달았으나 대답은 없었다.
 
그래서 조사가 다음과 같은 설법을 해주었다.
  "대저 백천 가지 묘한 법문은 모두가 마음으로 돌아가고,
항하의 모래같이 수많은 묘한 공덕은 모두가 마음 자리에 있다.
일체 선정과 온갖 지혜가 모두 본래부터 구족하고
신통과 묘한 작용이 모두 그대의 마음에 있다.
번뇌와 업장이 본래부터 비었고, 온갖 과보가 본래부터 갖추어 있다.
 
벗어날 삼계도 없고 구할 보리(菩提)도 없으며,
사람과 사람이 아닌 것[非人]의 성품은 같은 것이다.
대도(大道)는 비고 넓어서 생각과 분별이 끊겼나니,
이러한 법을 그대가 이제 이미 얻어서 더는 모자람이 없으므로,
부처와 다름이 없고, 더 이상 성불할 다른 법 따위는 없다.
 
그대는 다만 마음이 이끄는 대로 자재하되
 관행(觀行)도 짓지 말고, 마음을 모으지도 말고,
탐(貪)·진(瞋)·치(癡)를 일으키지도 말고,
근심을 품지도 말라.
 
  완전히 텅 비어 걸림이 없고 뜻에 맡겨 자재하니,
온갖 선을 지으려 하지도 말고, 온갖 악을 지으려 하지도 말라.
 
다니고, 서고, 앉고, 누울 때와 눈에 띄고 만나는 인연이
모두가 부처의 묘한 작용이어서
즐겁고 근심 없는 까닭에 부처라 하느니라."
 
  나, 융이 물었다.
  "마음에 이미 모두가 구족하다면
  어떤 것이 마음이며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4조가 대답했다.
  "마음이 아니면 부처를 묻지 못할 것이요,
  부처를 물으면 마음이 아닌 것이 아니니라."
 
  또 물었다. 
  "관행을 허락하지 않으셨으니,
경계가 일어날 때엔 어떻게 대치(對治)하리까?"
 
  조사가 말했다.
  "경계의 반연에는 좋고 나쁜 것이 없다.
좋고 나쁨은 마음에서 일어난다.
마음에 굳이 이름짓지 않으면 망정(妄情)이 어디서 일어나랴?
망심(妄心)이 일어나지 않으면
참마음이 마음껏 두루 알아서 마음을 따라 자유자재할 것이요,
더 이상 처음도 끝도 없으므로
상주법신(常住法身)은 아무런 변역(變易)도 없다 하느니라.
 
  내가 나의 스승 승찬(僧璨) 화상에게서
이 돈오법문(頓悟法門)을 받았는데 이제 그대에게 전하나니,
그대는 잘 받아 지녀서 나의 도를 실현시켜라.
이 산에 살기만 하면
뒷날엔 다섯 사람이 그대의 뒤를 이어 끊이지 않게 되리니라,
잘 간직하라. 나는 떠나리라."
 
  이 말씀에 선사(나,법융)는
옥의 티 같은 번뇌가 갑자기 몽땅 없어지고,
모든 상이 영원히 없어지니,
이로부터는 신령스런 귀신이 공양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이것으로써 살피건대
여래의 비밀한 뜻이
어찌 닦아 증득함으로써
능히 조사의 뒤를 이어 나란히 하겠으며,
현묘한 문에 어찌 고요함만으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말을 여의고 이치에 계합하여 현요(玄要)에 집중한다는 것도
하늘과 땅 차이고,
고요한 생각으로 근원으로 돌아가 선추(禪樞)를 바람도
초(楚)와 월(越)과 같이 멀기만 하다.
 
  나융이 다시 여쭈었다.
  "대저 성인은 어떤 법을 끊었으며,
어떤 법을 얻었기에 성인이라 불리웁니까?"
  조사가 대답했다.
  "한 법도 끊지 않고 한 법도 얻지 않나니,
이것을 성인이라 하느니라."
 
  다시 여쭈었다.
  "끊지도 않고 얻지도 않으면 범부와 무엇이 다릅니까?"
 
  "다름이 있느니라.
왜냐 하면 범부는 모두가 끊어야 할
허망한 계교[妄計]가 있다고 여기고,
얻어야 할 참마음이 있다고 여기지만,
성인은 본래 끊을 것도 없고,
또 얻을 것도 없다고 여기니, 그러므로 다르니라."
 
  또 여쭈었다.
  "어째서 범부는 얻을 것이 있다 하고,
성인은 얻을 것이 없다 하십니까?
얻음과 얻지 않음에 어떠한 차별이 있습니까?"
 
  "차이가 있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범부는 얻을 것이 있으니 허망함이 있고,
성인은 얻을 것이 없으니 허망함이 없다.
허망함이 있으면 차별이 있고, 허망함이 없으면 차별이 없느니라."
 
  다시 여쭈었다.
  "차별이 없다면 성인이란 이름이 어찌하여 생겼습니까?"
  조사가 말했다.
  "범부와 성인 둘 모두가 거짓 이름이다.
거짓 이름에 둘이 없다면 차별이 없는 것이니라.
마치 거북의 털이나 토끼의 뿔이라 하는 것과 같으니라."
 
  또 여쭈었다.
  "성인이 거북의 털이나 토끼의 뿔 같다면 마땅히 없는 것이리니,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을 배우게 합니까?"
  조사가 말했다.
  "내가 말한 것은 거북의 털이지 거북까지 없다고 한 것은 아닌데,
그대는 어째서 이런 질문을 하는가?"
 
  나융이 다시 말하였다.
"그렇다면 거북은 무엇에 견주고, 털은 무엇에 견주었습니까?"
  조사가 말했다.
  "거북은 도에 견주었고 털은 나[我]에 견주었느니라.
그러므로 성인은 나가 없고 도만 있으며,
범부는 도는 없고 나만 있다.
나에 집착하는 자는 마치 거북의 털이나 토끼의 뿔과 같으니라."
 

                                     -  조당집  -
 
아내의 수고를 칭찬하면....

아내들은 대체로 가사 일에 부담감도 가지고 있지만 자부심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집안 일에 대해 남편이나 아이들로부터 칭찬을 받으면 무척이나 기뻐한다. 
하지만 집안 일이라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특히 음식을 만드는 일은 힘들다. 
또 단순히 힘이 든다기보다는 평생동안 해내야 되는 것이기 때문에 지겹다. 
이것이야말로 지겹다. 하지만 이러한 수고를 헤아려주는 남편이 얼마나 될까? 
내가 아는 분의 아내는 다른 것은 잘하는데 음식 솜씨가 형편이 아니다. 
한번은 온 식구들의 평가회가 진행됐다. 
아이들이 “엄마, 맛이 왜 이래요” 
엄만 왜 맨날 하는 반찬만 계속해요 하며 불평이 이어졌다. 
그때 아버지가 버럭 화를 냈다. “너희들 그렇게 반찬 투정하려면 밥 먹지 마라. 
평생을 먹고 산 내가 괜찮은데  너희들이 뭐가 어쩼다는 거냐. 
맛만 좋구만. 여보, 여기 한 그릇 더 줘요. 
그리고 앞으로 반찬 투정하는 녀석들은 밥 주지 말아요” 
그리고 식사 후에는 항상 “잘 먹었어요. 고마워요.” 칭찬까지 했다. 
그런 아버지의 가르침과 분위기 때문인지  그 다음부터는 아이들도 
모두 식사 후엔  “ 잘 먹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까지 하게 되었다고 한다. 
가장은 아내가 잘 못하는 부분이 있다하더라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인정해주고  체면을 세워주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아내는 계속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아내가 만든 음식을 칭찬하고 집안 일에 대해 감사의 표시를 해 보자. 
음식이 맛있는 식탁은 못 되어도 행복이 넘치는 식탁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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