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법정이 부처님께 드리는 편지

2010. 4. 2. 20:3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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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혼탁한....비구법정이 부처님께 드리는 편지(불교포커스 게재)

머리말[序章] 
   부처님!                                                               

   
아무래도 말을 좀 해야겠습니다. 깊은 산[深山]에 수목처럼 덤덤히 서서 한세상 없는 듯이 살려고 했는데, 무심(無心)한 바위라도 되어 벙어리처럼 묵묵히 지내려했는데, 이렇게 또 입을 열게 되었습니다. 이 울적한 심회(心懷)를 당신에게라도 목소리 하지 않고는 답답해 배기어낼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먼저 저는 당신 앞에 당신을 욕되게 하고 있는 오늘 한국 불교도의 한사람으로서 엎드려 참회(懺悔)를 드립니다. 당신의 제자 된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오히려 당신의 이름을 팔아 무위도식(無爲徒食)하고 있다는 처지에서.

오늘 우리들 주변이 이처럼 혼탁하고 살벌한 것도 저희들이 해야 할 일들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데서 연유(緣由)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이라는 이 헐벗은 땅덩이 안에서 자비하신 당신의 가르침은 이미 먼 나라로 망명해버린 지 오래 되었고, 빈 절간만 남아 있다는 말이 떠돕니다. 그리고 이른바 당신의 제자라는 이름은 마치 투쟁견고(鬪爭堅固)시대의 표본(標本)같은 무리[群像]들로 채워져 있다고도 합니다.

당신의 가사와 발우를 가진 제자들이 오늘날 이 겨레로부터 마치 타락된 정치가들처럼 불신을 받고 있는 점에도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여름이 가고 가을이 짙어지고 있습니다. 가을은 결실과 수획(收獲)의 계절이라고들 하는데, 우리에게는 결실할 밑천도 거두어들일 만한 열매도 없습니다. 기대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이 불모(不毛)의 황무지에 밝은 씨앗이라도 뿌려졌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에서, 저는 이제 제 주변을 샅샅이 뒤져 헤치는 작업이라도 해야겠습니다. 말하자면, 내일의 건강을 위해서 오늘 앓고 있는 자신의 질환에 대한 진단 같은 작업을 - .

   교육에 관하여[敎育의 章]

부처님!
‘대한불교조계종’이라는 깃발[旗幟] 아래에서는 걸핏하면 3대사업이 어떻고 하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마 만큼 그 일은 시급한 저희들의 과업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긴요한 것이 당신의 혜명(慧命)을 이어받을 수 있는 인재를 기르는 교육임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사람이 없다는 이 집안이기 때문에.

그런데 이런 일들은 지금껏 입으로만 축문처럼 외워지고 있을 뿐 실제로는 거의 무시되고 있습니다. 지금 몇몇 절[寺院]에서 벌리고 있는 강당이나 선방이라는 것도 진정한 의미에서 당신의 뜻을 이어받을 눈 밝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한낱 도량 장엄(道場莊嚴) 정도로 차려 놓은 것에 불과한 인상들입니다.

그것은 실로 ‘교육’이라는 말조차 무색하리만큼 전(前)근대적인 유물로서, 박물관 진열장으로나 들어가야 할 쓸모없는 몸짓에 지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타당한 방법론도 구체적인 계획성도 없습니다. 사제. 교육의 기초기관인 강당에서 현재 수행되고 있는 그 방법이란 철저하게 훈화(訓話)적인 그러니까 한문서당에서 상투 틀고 가르치던 그 습속을 소중하게, 너무나 소중하게 물려받고 있습니다.

한 강사가 여러 클라스(class)를 전담해 가지고 강의를 하고 있으니, 전체 학인을 명령 한 마디에 통솔하기는 편리할지 모르지만, 강사 자신의 육체적인 부담과 정신적인 실조(失調), 그리고 강의를 받은 사람들의 섭취할 건덕지가 얼마나 있을는지 뻔한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그 이수[履歷] 과목이라는 것이 조선 중엽에 비롯된 것이라는데, 지금의 형편이나 피(被)교육자의 지능 따위는 전혀 무리하고 또 시대적인 요구도 아랑곳없이 하나의 타성으로서 비판 없이 답습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나마 얼마 동안에 배워 마친다는 정해진 기간도 없이 -. 이처럼 무모한 <교육?>이 어느 다른 사회에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대개의 경우, 가르치는 이나 배우는 사람들이 <종교>가 무엇인지, 혼미한 오늘의 현실에 <종교인>으로서 어떠한 사명을 해야 할 것인지를, 풍문(風聞)으로나마 가르치고 배웠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당신의 깨친 목소리를 듣기위한 훈고적인 문자의 전달도 필요한 일이겠지만, 적어도 그것이 현대라는 시점에서 소위 일체중생의 길잡이가 될 인재를 기르기 위한 종교교육이라면, 생동(生動)할 수 있는 사명감을 불러 일으켜주는 것도 철학이 두뇌의 영역이라면, 종교는 심장의 영역일 것입니다. 메마른 심장으로서야 자신은 고사하고 어떻게 이웃을 울려줄 수 있겠습니까?

또 당신의 제자 된 사람이 당신의 가르침에는 아예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고, 비좁은 자기 나름의 소견에만 사로잡힌 이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선방이란 곳에서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본래 의지(意志)를 곡해한 듯 전혀 당신의 가르침에 대한 기초 교육도 없는 이들을 함부로 받아들여 선 자체에 대한 오해마저 초래케 하는 수가 흔히 있습니다.
선(禪)이 수행의 구경(究竟) 목적이 아니고, 그것이 깨달음(覺)으로 向한 한낱 방편일진대, 보다 탄력 있는 시야쯤은 갖추어도 좋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첫 문에 들어선 초발심자(初發心者)에게 있어서는 -.

<막존지해(莫存知解)>라는 말과 ‘배우지 않아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과는 그 귀(軌)가 분명히 다른 줄 압니다. 흔히 참선자가 선에 <참(參)>하기보다는 선에 <착(着)>하기가 일쑤이고, 따라서 종교인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벽(壁)속에 스스로를 가두면서도, 그것으로서 오히려 자기위안[自樂]을 삼는 것은 모두 이러한 결함에 그 중요한 원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
당신이 만약 오늘 이 사회에 계신다더라도 당신의 제자들을 이렇게 무모한 방법으로 가르치시겠습니까?

   어설픈 화신(化身)들

이러한 교육 이전의 불합리성 때문에 이 나라의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市井]에 있는 절간에 가면 기이한 현상이 있습니다. 젊은 우리 사미승들이 그늘진 표정으로 2중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흔히 목격합니다. 절에서는 승복[緇衣]을 입고 절문 밖에서는 세속 옷[俗衣]를 입는 -. 마치 낮과 밤을 사이하여 치장을 달리하는 박쥐라는 동물처럼. 부처님 앞에서 목탁을 치던 한낮의 손이 해가 기울면 학원[學館]의 문을 열고 있습니다. 배우고 싶은 일념에서 이처럼 어설픈 향학(向學)의 욕구를 절간에서는 채울 수가 없기 때문이랍니다.

또 그들 학비[學資]의 출구[出路]란 것이 대개 떳떳한 것일 수가 없습니다. 3보에 희사한 정재(淨財)가 잘못 유실될 수도 있을 것이며, <낯을 익혀 둔> 신도들이 떨어뜨리고 간 지폐에 의존하는 수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도가 돈을 쥐어줄 때 그것으로서 세속의 업(業)을 익히라고 내놓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순수할 수 없는 조업(造業)으로 그 건전한 회향(廻向)을 바랄 수는 없습니다. 잘못하면 주는 편이나 받는 편이 함께 지옥에 떨어지는 업(業)만 익히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
모처럼 어린 마음으로 구도(求道)의 문안에 들어섰던 그들이 도업(道業; 佛道 修行)을 이루기에 앞서 다시 세속을 기웃거려야 한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산사에서 간신히 이수과정을 마친 학인들이 불교 외부 학문[外典]을 갖추기 위해서라는 명분아래 하산한 뒤로는 거의가 돌아오지 않는 승려[不歸의 僧]가 되고 맙니다. 이러한 숫자는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미래를 기대해야 할 젊은 세대 사이에 -.
이와 같은 유쾌하지 못한 현상이 어찌 그들만의 탓이겠습니까? 이런 일을 언제까지고 모른 체 하고만 지낼 수가 있겠습니까?

   잘못된 너무나 잘못된

부처님!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습니다. 요즘 한국불교계에는 ‘급조 승려[急造僧]’이라는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낱말이 나돌고 있습니다. 승려라면 일반의 지도적인 입장에 서야한다 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상식입니다. 그런데 그 자질 여부는 고사하고 일정한 수업도 거치지 않고 활짝 열려진 문으로 들어오기가 바쁘게 삭발과 의상 교체가 너무나 신속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제자로서의 품위나 처신이 말할 수 없이 진흙탕에 깔리고 말았습니다. 낙후된 경제사회에서 부도가 나버린 공(空)수표처럼 -.
더구나 이들이 절을 주관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으니 그저 한심스러울 뿐입니다. 그들이 언제 수도(修道) 비슷한 거라도 치를 겨를이 있었겠습니까? 그러기에 가출 이전의 세속적인 행동거지가 그대로 남아 있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신문의 사회면에서는 가끔 ‘사이비 승려’라는 기사거리와 더불어 세상의 웃음을 사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 어떤 절에서는 처음 입산하려는 사람의 학력이 대학 출신이거나 좀 머리가 큰 사람이면 더 물을 것도 없이 문을 닫아버립니다. 무슨 자랑스러운 가풍이나 되는 것처럼 -.
거절의 이유인 즉 “콧대가 세서 말을 잘 안 듣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표면적인 구실에 지나지 않고 사실은 다루기가 벅차서일 것입니다. 우선 지적인 수준이 이쪽보다 우세하기 때문에 하나의 열등의식에서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 한 반증으로서 인간적인 기본 교양도 없는 만만한 연소자는, 그나마 노동력이 필요할 때 틈타서 받고 있는 실정이니 말입니다.

부처님!
이와 같이 구도자로서의 자질과 미래상이란 전혀 찾아볼 수도 없는 우매한 고집들이 수도장을 경영하고 있는 동안, 당신의 가르침인 한국불교의 표정은 갈수록 암담할 수밖에 무슨 길이 있겠습니까?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쫓아낸다’는 그레샴의 법칙이 오늘 우리사회에서는 ?賈コ? 비대하게 설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종단의 의결기관인 중앙종회에서는 몇 군데 계획적인 수도장으로서 총림을 두기로 했다지만, 이러한 무질서가 건재하고 있는 소지(素地)에서 우리는 무엇을 더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2신으로 이어집니다]

 

부처님!
세상에는 ‘벽감투’란 말이 있습니다. 설명할 필요도 없이 자격 없는 사람에게 갑자기 얻어 걸린 높은 벼슬을 말한 것입니다. 그것이 세속에서는 다섯 가지 욕망[五慾] 중에 하나라는 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속을 여의었다는 당신의 제자들도 그 ‘높은 자리’에 앉아 버티기를 세속사람들 못지않게 좋아하는 것을 요즈음 흔히 봅니다. 마치 그런 감투나 뒤집어쓰기 위해 이 문안에 들어온 것처럼 -. 한번 그 자리를 차지하면 자기 분수도 돌아보지 않는 채 노랗게 탐착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정권을 탐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저 마키아벨리즘(Machiavellism)의 무리들처럼, 말로라도 세상의 욕락(慾樂)을 떠나 출가 수도한다는 이들에게 무슨 ‘장(長)’이 그리도 많습니까? 그나마도 솔직하지 못한 것은, 그런 일이 전혀 자의(自意)가 아니라 타의(他意)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개중에는 개인의 수업(修業)을 온전히 희생하고 대중의 외호에 전력을 다 하고 있는 보살의 화현(化現) 같은 이도 없지 않습니다. 또 오늘날의 사회구조로 보아 본의는 아니나마 ‘긴 의자’에 걸터앉아야 하고 절의 운영을 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기왕 3보를 외호하는 길에 들어섰으면 어디까지나 부처님 제자 된 분수와 출세간(出世間)적인 입장에서 사심 없이 공정하게 집무해야 할 것임에도 3보의 정재를 함부로 탕진하고 나아가서는 승려로서의 본분을 이탈한 채 사회적으로 불미스런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사례를 우리는 그 동안 드물지 않게 보아오고 있습니다. 기본 재산이 좀 여유 있거나 수풀이 우거진 절은 서로가 차지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날뛰는 꼴을 우리는 불행하게도 많이 보아 왔습니다. 그 저의는 얼마 안가서 결과가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불전함[喜捨凾]을 치워라

부처님!
당신의 거룩한 상[聖像]이 모셔진 법당에 들어서면 맨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이 자비하신 당신의 <이미지>가 아니라, 입을 딱 벌린 채 버티고 있는 불전함[喜捨凾]이라는 괴물입니다. 이 괴물이 있는 곳[番地]은 바로 당신의 코앞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市井]이나 산중에 있는 절간을 가릴 것 없이 그것은 근래 사찰의 무슨 악세사리(accessory)처럼 굳어져 버렸습니다.
당신이 이것을 내려다보실 때마다 얼마나 난처해 하실까를 당신의 제자들은 눈이 어두워 못보고 있는 상 싶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 술 더 떠서 어떤 곳에서는 이런 <간판>까지 내걸고 있습니다.
"돈을 넣고 복을 비는 데"라고 -.
49년 당신의 장광설가운데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단 한번이라도 계셨습니까? 복덕(福德)이라는 게 화폐로써 잴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겠습니까?
당신의 가르침이 사교(邪敎)가 아닌 위없는 정법(正法)임에도 -.
누가 보든지 낯간지러운 이 괴물은 시급히 철거되어야겠습니다. 적어도 당신의 상이 모셔진 코앞을 비켜서만이라도 -.

   극락으로 가는 차표[極樂行 旅券]

부처님!
극락으로 가는 차표를 발급하고 있는 데가 있다면 세상에서는 무슨 잠꼬대냐고 비웃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저 암흑의 계절 중세가 아니라, 오늘 당장 이 자리에 있는 일입니다. 그것도 푸닥거리나 일삼는 <무당 절>에서가 아니라, 이 나라에서도 손꼽는 큰 절들에서 버젓이 벌건 대낮에 거래되고 있으니 어떻게 합니까?
<다라니>라는 것을 찍어서 돈을 받고 팔고 있습니다. 야(夜)시장도 아닌데 이런 넋두리까지 걸쳐서.
“극락으로 가는 차표를 사가시오” 하고 -.
당신의 옷을 입고 당신이 말씀해놓은 교리를 공부하는 이른바 당신의 제자라는 사람들이, 당신을 파는 이런 짓을 얼굴 표정 하나 구기지 않고 뻔뻔스럽게 자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교(邪敎)에서나 있음직한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소행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부처님!
지금이 어느 때라고 이런 샤머니즘이 횡행해야 되겠습니까? 마치 중세 유럽에서 한동안 치부에 여념이 없던 살찐 가톨릭의 성직자들이 <면죄부>라는 부적을 만들어 팔던 것과 너무나 흡사한 짓이 아닙니까?
이것이 그쪽에서는 종교개혁의 한 불씨가 되었다고 하지만, 오늘 이 고장에서는 이 비슷한 일이 하도 많기 때문에 감촉이 마비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일로 말미암아 당신의 가르침이 이 나라에서는 가끔 억울하게도 미신과 같은 계통이라는 푸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실로 낯을 들 수 없는 일입니다.

   불사(佛事)의 정체

불사라는 행사가 요즘에는 왜 그리도 많습니까? 걸핏하면 ‘100일 기도’․ ‘10,000인 동참 기도’․ ‘보살계 살림’․ ‘가사 불사’․ 탑에 물방울 정도 튀기는 ‘세탑(洗塔) 불사’ ․ 아이들 장난도 아닌데 위조지폐까지 발행해 가면서 하는 도깨비놀음 같은 ‘예수재’ 등등 …. 이 밖에도 일찍이 보고 듣지도 못한 별의별 희한한 불사들이 정말 비 뒤의 죽순처럼 여기저기서 잇달아 거행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불국세계가 도래(到來)하는가 싶게 -.

불사라는 본래 뜻은 여러 부처님들의 교화를 가리킨 것으로서 개안(開眼) ․ 상당(上堂) ․ 입실(入室) 등에 주로 쓰인 말인데, 요즘에는 흔히 승려들의 일용사(日用事) 쪽으로 낙착된 감이 없지 않습니다. 물론 지금도 불사의 본래 뜻에 합당한 불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에는 흔히 불사란 이름을 내걸고 실속은 엉뚱한데 있는 불사 아닌 ‘불사(不事: 해서는 안 되는 일)’를 자행하고 있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구도자의 양심에 비추어보아 떳떳할 수 있는 법다운 불사가 얼마나 될는지 지극히 의심스럽습니다.

“중이 돈이 아쉬우면 멀쩡한 축대라도 헌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결코 웃어넘길 수 만 없는 가슴을 찌르는 통정한 아이러니입니다.
그럴듯한 이름을 내건 <법회>라는 모임이 있을 때면, 으레 그 끝은 두둑한 ‘권선책’이 나돌기 마련입니다 한꺼번에 몇 가지씩. 결코 ‘희사’일 수가 없도록 반(半) 강요하는 눈초리를 ….

재화를 다수 내놓으면 흔히 말하기를 “신심이 장하다”고 합니다. 재화가 신심의 바로미터(barometer)일 수가 있겠습니까? 불사라는 그럴 듯한 이름[美名] 아래 신도들은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솔직히 말한다면 오늘날 한국불교의 순진한 신도들은 교화를 입기보다는 경제적으로 출혈적인 혹심한 패탈(敗奪)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돈도 없는 사람은 절에도 나갈 수 없더라”는 비(非)불교적인 서글픈 탄식이 나오는가 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있는 승려의 총수가 얼마나 되는지, 그 가운데서 수도에 전념하는 의젓한 구도자가 몇이나 되는지, 관계 기관인 중앙 총무원에서도 집계를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에 반해서 포교당을 비롯해서 신도들을 자주 접촉하고 있는 절간에서는 신도의 일람 카드가 어느 시청의 호적사무 못지않게 질서 정연히 정비되어 있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극성스러운 곳에서는 카드에 금전출납을 기재하는 난까지 만들어 놓아 보는 이로 하여금 소름이 끼치도록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
이런 짓을 포교의 사명처럼 착각하고 있는 두꺼운 안면 신경을 가진 당신의 제자들이 허다합니다.
불사라고 당신의 이름을 팔아 거행되는 그 표면에는 얼마나 셈 빠른 타산이 오르내리는지, 부처님도 아시게 되면 얼굴을 붉히실 것입니다. 속이 유리 속처럼 빤히 들여다보이는데도 이 어설픈 수작들은 휴일이 없습니다.

부처님!
그리고 이런 무자비한 횡포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市井]에서 어떤 모임을 보면 너무나 세속적인 동작들에 슬퍼지기까지 합니다. 그 숨 막히는 조직사회에 염증이 나서 어쩌다가 당신의 문을 두드린 사람들을, 문안에 들어서기가 바쁘게 다시 조직 속에 얽어매려는 선참(先參)들의 횡포가, 무자비한 횡포가 있습니다.

모처럼 찾아온 피곤한 나그네에게 앉을 자리는 고사하고 트인 길조차 막아버려야 하다니! 싱싱하게 이끌어 주어야 할 구도의 길을 짓눌려버려야 하다니!
더구나 이쪽이 물질적으로 여유 있다는 것을 선참들이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의 탐욕은 왕성하게 동(動)해서 상대방의 의사도 아랑곳없이 감투 뒤집어씌우는 이 노란 술책! 그 잘난 <신심>이라는 코걸이를 미끼로 내세우면서 …. 우리는 그러한 모임에서 어떻게 순수한 종교 활동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또 요즘 항간에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파라독스(paradox)가 떠돕니다. <큰 스님>의 체중이란 법력이나 도덕의 비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돈 많은 신도들을 얼마만큼 확보하고 있느냐에 달렸다고 ….
당신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귀의한 새하얀[純白] 신앙인을 마치 하나의 재원(財源)으로 착각하고 있다니 ….

부처님!
불사만은 더럽혀지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불사(不事)>이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정말로 시급하고 긴요한 불사라면, 한시바삐 이 중생의 탈을 벗고 또한 벗겨주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3신으로 이어집니다.

절이란 곳이 그 어느 특정인의 소유거나 개인의 저택일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상식입니다. 오직 수도자가 도업을 이루기 위해, 한데 모여 서로 탁마(琢磨)해 가면서 정진해야할 청정한 도량임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절이 소수의 특정인에 의해 수도장으로서 빛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이제는 하나의 경향을 이루고 있습니다. 자기네 <패거리>의 식성에 맞는 몇몇이서만 도사리고 앉아 굳게 문을 걸어 닫고 외부와의 소통[交通]을 차단한 채 해져가고 있습니다. 전체 수도자의 광장이어야 할 이 수도장이 -.

따라서 엄연하게 대중이 모인 회상(會上)임에도 대중의 의사가 무시되기 다반사(茶飯事)이며 결코 건전한 것일 수 없는 개인의 좁은 소견이 전체대중의 이름을 사취(詐取)하여 제멋대로 행사되는 수가 많습니다. 종래로 우리의 청백(淸白) 가풍인 <대중공사법>이 날이 갈수록 그 자취를 감추어가고 있으니 이것은 곧 화합과 청백성이 희미해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어디를 가나 구역이 나는 것은 <권속(眷屬; 문중) 관념>이라는 그 세속적인 너무나 세속적인 악취(惡臭) -. 그래서 원융(圓融)한 회중(會中)이어야 할 대중처소가 <독(獨)살이>로 전락되어 버렸습니다.
이른바 세속을 떠났다는 이 출세간에서까지 튼튼한 배경[빽]이 없이는 방부조차 내밀 수 없게 되었습니다. 부처님!

운수(雲水)를 벗하여 훌훌 단신 수도에만 전념하던 납자들이 늙고 병든 몸을 이끌고 정착할 곳이 없어 여기저기 방황하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소위 독신 수도한다는 이 비구승단의 회상에서 정화 이전이나 다름없는 냉대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절은 마땅히 수행하는 이의 집이어야 할 것임에도 -. 개인과 의자(직위)의 한계는 엄연히 구분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법이 선 사회의 질서입니다.

그런데 어떤 부류들은 이 한계마저 무시하고 개인이 의자의 힘을 빌어 권력같은 것을 신경질적으로 휘두르기가 예사입니다. 생각해보면 저녁노을만치도 못한 하잘 것 없는 권세라는것을. 더구나 제행무상(諸行無常)을 뇌이고 하는 이 출세간에서 -.
그래서 대중이 모인 회상에서 공부해보겠다고 마음 내어 모처럼 찾아갔던 초학인(初學人)들도 발붙일 곳이 없어 되돌아가서는 생각을 고쳐먹고 저마다 <독살이>인 자기 영토를 마련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하여 구도의 빛은 바래져 가고 사명감도 내동댕이치게 된 것입니다. 그 길이 가야 할 길이 아닌 줄 알면서도, 아닌 줄을 분명히 알면서도 -.

부처님!
이런 시시한 일들에 탐착하자고 저희들이 문안에 들어선 것이겠습니까? 두골(頭骨)의 크기와는 당치도 않은 감투나 뒤집어쓰고 우쭐거리자고 출가한 것이겠습니까?

   어서 이 혼탁(混濁)을

부처님!
당신에게 올리는 이 글도 이제는 그만 끝을 맺어야겠습니다. 제 목소리가 너무 높아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아무 일 없이 조용하기를 즐기는 이들에게는 좀 시끄러웠을 것입니다. 아마 이 글을 읽은 사람이면 대개가 유쾌한 대열에는 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 자신부터 유쾌한 기분으로 쓸 수는 없었기에.

하지만, 언젠가는 누구의 입을 빌어서든지 이러한 자기비판쯤은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혼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귀촉도(歸蜀途)의 외침이라도 있어야겠습니다.
구도의 길에서 가장 뗄 수 없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부질없는 허세로써 위장할 것이 아니라, 때때로 자기 위치를 돌이켜보는 참회의 작업일 것입니다. 자기 반성이 없는 생활에 밝은 미래를 기약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불교가 종교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현대와 사회에 이바지할 수 없는 종교라면 그것은 하등의 존재가치도 없습니다.
당신의 가르침이 우리 강토에 들어온 지 1,600년! 오늘처럼 이렇게 병든 적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그 까닭은 물을 것도 없이 제자 된 저희들 전체가 못난 탓입니다. 늘 당신에게 죄스럽고 또 억울하게 생각되는 것은 그처럼 뛰어난 당신의 가르침이 오늘날 저와 같은 제자를 잘못 두어 빛을 잃고 또 오해까지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부처님!
이 글의 첫머리에서도 밝혔다시피 저의 이러한 작업이 이웃을 헐뜯기 위해서 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입을 여는 순간 일을 그르친다[開口則錯]>이라는 말을 저는 늘 믿어 오고 있는 터입니다. 그러면서도 굳이 입을 열어 한량없는 구업(口業)을 지은 것, 외람되게나마 진리를 향해서 길을 가고 싶은 저의 신념에서입니다.

   
한국불교의 건강은 저희들 제자의 공통한 비원(悲願)입니다. 무관심처럼 비참한 대인관계는 없다고 합니다. 더구나 그 무관심이 구도자의 주변에 뿌리내릴 때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죄악일 수도 있습니다. 일체 중생에게 주어진 당신의 자비가 무관심의 소산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뜻에서 주제넘게 고성으로 지껄인 것입니다. 이 혼탁을 어서 벗겨야한다는 비원에서 버릇없이 당신에게 호소한 것입니다.
언제인가는 과감한 일대개혁이 없이는 당신의 가르침이 이 땅에서는 영영 질식하고 말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똑똑히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박차고 나섰던 저 혼미한 브라만들에 대한 ‘부정의 결의’가 없고서는 -.

위의 글에서 좀 지나치리만큼 무차별한 사격을 가한 것은 우리들이 당면한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자는 뜻에서였고 또 하나는 그 누구도 아닌 제 자신의 아픈 곳을 향해 자학(自虐)적인 사격을 가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끝으로 한 가지 밝혀드릴 것은, 얼마 전에 이글을 쓰다가 부질없는 짓이라고 스스로 중단해버리고 말았는데 이런 사정을 알아차린 저의 한 고마운 도반이 격려해준 힘을 입어 다시 쓰게 된 것입니다. 비 개인 그 어느 여름날처럼 당신 앞에 가지런히 서서 업(業)을 같이하는 길[道程]의 청정한 인연에 조용히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1964년 [음] 9월 

                                                                                  어리석은 제자[迷弟子] 법정 합장

 

처음가졌던 소중한 마음

 

우리가
무언가에 싫증을 낸다는 것은
만족을 못하기 때문인것 같습니다

처음 가졌던 나름대로 소중한
느낌들을 쉽게 잊어가기 때문이죠

 

내가 왜 이 물건을 사게 됐던가?
내가 왜 이 사람을 만나게 됐던가?
내가 왜 그런 다짐을 했던가?

하나 둘
곱 씹어 생각하다 보면
그 처음의 좋은 느낌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생각은 변화합니다
늘 같을 순 없죠
악기와도 같아요

 

그 변화의
현 위에서 각자의 상념을 연주 할지라도
현을 이루는 악기 자체에 소홀하면
좋은 음악을 연주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늘 변화를 꿈꾸지만
사소한 무관심과 나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에
이따금 불협 화음을 연주하게 되지요

 

현인들은 말합니다
"가장 소중한 것은 언제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가까이 있다"

행복은 결코 누군가에 의해
얻어 지는 것은 아닌것 같아요

 

 

 

지금 눈을 새롭게 뜨고 주위를 바라 보세요
늘 사용하는 구형 휴대폰
어느새 손에 익은 볼펜 한 자루

잠들어 있는 가족들


그리고 나를 기억하는 친구들
사랑했던 사람과 지금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소중한 느낌을 가지려 해 보세요
먼저 그 마음을 되 살리고 주위를 돌아 보세요

 

당신은 소중한데 그들은 그렇지
않다고 속상해 하지 마세요

 

우리가 소중하게 떠올렸던 그 마음
그들로 인해 잠시나마 가졌던 그 마음
볼펜을 종이에 긁적이며 고르던 그 마음
처음 휴대폰을 들구 만지작 거리던 그 마음

 

그 마음을 가졌었던 때를 떠 올리며
엷은 미소를 짓는 자신을 찾을줄 아는
멋진 우리의 모습을
스스로 선물해요

 

잊지 못할 추억들을
만들어 준 사람들에게 감사해요 

 

가까운 사람들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먼저 선물해요

 

오늘 옷 참 잘 어울려요
라고 하면서 먼저 웃으며 인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