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는 어디에 있는가

2010. 4. 5. 20:5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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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는 어디에 있는가

 

공부를 해 나가다 보면 가끔씩 생기는 의문이 있다.

우리의 삶은 즐거운 것인가, 고통스러운 것인가?

우선 즐거운지, 고통스러운지, 이도 저도 아닌지를

분명하게 체득해 알고 있는 이에게는 인생이 즐거운 것이다.

그러나 그 즐거움은 일희 뒤의 일비가 없어서 변화가 없이 고른 감정이고

따라서 중생이 보기엔 무덤덤한 감정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것을 고요한 상태로 표현하고 한자로는 ‘적寂’ 또는 ‘멸滅’이라는 말로 나타낸다.

이는 ‘명(明=밝음=앎) - 무명(無明=어두움=어리석음)’이 없음의 상태에서 오는 감정인 것이다.

 

그렇다면 붓다는 왜 삶을 고통이라고 했을까?

그것은 중생들이 밝지 못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변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변화하는 것들에 대해 자연스럽게 적응하지 못해 괴롭고,

나와 내 것이 아닌 존재를 나와 내 것이라고 착각하고 살기 때문에

삶은 괴롭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를 바로 알고 살면

우리가 궁극적으로 누리려고 하는 고요한 기쁨의 삶,

즉 열반적정涅槃寂靜을 얻을 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한편으로 이도 저도 아닌 것에 대한 오해가 있을 수 있는데,

이도 저도 아닌 것 같은 정서를 일관되게 유지하고 살 수 있다면

그것은 밝음에 의해서만 가능하기에 결과적으로 좋은 삶이다.

 

그러나 잠시 그러한 무덤덤한 삶을 살다가도 어떤 기쁜 일에는 좋아서 날뛰고

슬픈 일에는 괴로워서 곤두박질친다면,

그것은 밝음에 의한 무덤덤한 삶이 아니다.

어리석음에 의해 감정이나 행동 양식을 결정하지 못해서

마음이나 몸이 움직이지 않는 삶이다.

그러한 삶은 고통의 삶이고 결국 어리석음을 이끌어들이는 삶이 된다.

 

이 모든 것이 깊이 사량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보는 대로 듣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라.

흐르는 것은 괴롭고 현상은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음을 인식한다면

그것은 팔정도의 삶으로 자연스럽게 영위되어

기쁨 혹은 고요함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 삶을 살게 된다.

그것이 바로 니르바나(열반)인 것이다.

 

부처를 이루었다고 해서 무엇이든 다 알고

어떤 일이나 다 할 수 있는 무소부지와 전지전능의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부처는 멀리 있는 신적인 존재가 아니다.

부처는 자신이 자리하고 있는 시간과 공간에서 하고자 하는 일과

그 주변에 전개되는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거나,

그렇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우리 이웃을,

나를 말하는 것이다.

 

 

 

연기법(緣起法)과 동체대비(同體大悲) / 청화스님

우리가 연기법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바로 부처를 아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대로 '연기법을 알면 나를 아는 것이고 연기법을 모르면 부처란 나를 모른다.'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럴 정도로 연기법은 불교의 대강령(大綱領)입니다.

실은 연기법이라 하는 우주의 대법(大法) 위에 불교가 이루어져 있습니다.

연기법이 바로 우주의 대법입니다.

 

따라서 우주가 바로 인연·연기이므로 다른 종교나 다른 철학도 표현은 좀 달리한다

하더라도 모두가 연기법에 포섭되고 특히 불교는 연기법으로 체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동체대비(同體大悲)라는 말을 많이 쓰지 않습니까. 불교에서 '동체대비'라는

것은 남하고 나하고 같은 몸이기 때문에 참다운 사랑과 참다운 자비가 나온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불보살(佛菩薩)은 일체 중생을 동일체로 관찰하기 때문에

대자비심(大慈悲心)이 나오는 것입니다.

 

어째서 다른 사람과 나와 같을 것인가? 분명히 현상적인 세계에서는 뿔뿔이 있는 것인데

왜 한 몸, 한 마음일 것인가? 이것에 대해서 명확한 답을 내린 것이 이른바 바로

연기법(緣起法)입니다.

이 우주(宇宙)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하는 참다운 생명자체(生命自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생명자체는 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분열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우주 자체가

바로 한 덩어리 생명(生命)입니다. 이것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분할(分割)할 수가 없습니다.

한계가 없는 우주가 하나의 부처님 덩어리입니다. 하나님 덩어리입니다.

따라서 거기서 인연 따라 잠시간 이렇게 저렇게 전변무상(轉變無常)한 모양만 나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은 같다 하더라도 한 번 모양을 나투면 뿔뿔이 다르지 않겠는가? 이렇게

보통은 의심을 품습니다. 그러나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불교의 어려운 말로 원융무애

(圓融無碍)한 조금도 한계가 없는 순수생명(純粹生命)이기 때문에 바늘구멍만큼 적은

현상적인 존재나 히말라야 산같이 큰 존재나 부처님의 정기(精氣)라는 뜻에서는 원래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대(相對)가 되지 않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우주는 빈틈도 없이 부처님 진여불성이란 한 생명만으로 충만(充滿)해

있기 때문에 어떻게 구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서 나한테 있는 불성(佛性)이나 너한테 있는, 예수한테, 공자한테, 석가모니한테

있는 불성이나 다 똑같습니다. 다만 개발하고 못하고 하는 그 차이 뿐입니다.

 

그러기에 석가모니 부처님 말씀도 아시이성불(我是已成佛)이요,

나는 이미 부처를 성취한 사람이요. 나 아(我)자, 바로 시(是)자, 이 시자는 옳을 시, 바로 시,

그렇게도 쓰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나는 바로, 이미 이(已)자, 이룰 성(成)자,

부처 불(佛)자, 나는 이미 부처를 성취한 사람이고, 여시당성불(汝是當成佛)이라.

그대는 바로 당성불(當成佛)이라. 마땅 당(當)자, 앞으로 그대 역시 필히 부처가 될 사람이다.

이렇게 차이만 있을 뿐이지 원래 갖추고 있는 진여불성이라 하는 생명 자리는 호리(豪釐)도

차이가 없습니다. 어두워서 겉으로는 나같이 보이고, 남같이 보인다 하더라도

우리가 근본 성품 자리, 근본 본질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똑같습니다.

넓은 바다에서 바람 따라 천파만파(千波萬波) 파도(波濤)가 친다 하더라도 똑같은 물이듯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하는 순수한 생명자리에서 나온 너나, 나나 일체의 존재는

털끝만큼도 차이가 없습니다.

 

진여불성을 깨달은 분이 도인이고 진여불성을 깨닫지 못하면 제아무리 무엇을 분별지로

많이 안다 하더라도 도인이 아닙니다. 생명 자체를 깨달아 체증(體證)해야 도인(道人)입니다.

따라서 그 자리를 성취한 분들은 그때는 나와 남을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나한테 들어 있는 것이나 너한테 들어 있는 것이나 조금도 차이가 없는 진여불성이 들어

있으므로 어떻게 남을 무시하고 다르게 구분 지어서 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동체대비(同體大悲)라는 말은 그런 자리에서 나온 말입니다. 따라서 참다운 도덕(道德)이라는

것도, 우리가 이제 자기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해야 참다운 도덕이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나와 남을 구분하기 때문에 아무리 남을 돌본다 해도 항시 자기가

중심이 돼 있단 말입니다. 누구한테 재물을 보시하고 어디다 봉사를 하나 항시 자기라는 것이

전제가 돼 있고 자기라는 흔적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른바 상(相)을 떠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보통은 쉽게 상을 떠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

이런 말을 누구나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 중생들은 언제나 위선(僞善)이 깔려 있습니다.

자기라는 것을 미처 못 떠났기 때문에 위선을 미처 떨쳐 버릴 수가 없단 말입니다.

나나, 너나, 모든 존재의 근본 생명자리, 그 자리를 체험을 해버려야 비로소 위선을 떠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견성오도(見性悟道)를 하지 못하면 조금 양심이 더 있고 덜 있고 하는

상대적인 차이 뿐이지 온전히 상을 떠나서 조금도 흐림 없는 베풀음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기독교나 카톨릭 계통에서도 하고 있는 한마음 한 몸 운동, 그런 것도 참

굉장히 좋은 운동이지요. 그러나 그네들로 해서는 한마음 한 몸을 제대로 해석을 못합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창조했고, 한 번 창조한 사람들은 뿔뿔이 있고, 하나님과 나는 완전히

다른 존재이고, 이런 이론 체계로 해서는 한마음이나 한 몸이 성립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저 상대적으로 될수록 나와 남을 구분하지 않고서 남을 돕는다는 그런 의미인 것이지

불교와 같이 바로 철학적으로 온전히 나와남이 본래로 둘이 아니다. 이렇게는 안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