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剛經과 禪思想

2010. 4. 20. 21:3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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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剛經과 禪思想
 
-梵水-
 

 


序論
 
 <金剛經>은  <金剛般若波羅蜜經>1卷으로서 鳩摩羅什(348~413)이 漢譯했다.그리고 이외에도 玄裝, 菩提流支 眞諦등의 漢譯本도 여럿 전한다.
 <金剛經>은 般若系統의 經典들 가운데서 <般若心經>과 함께 널리 독송 되고 있는데, 특히 禪宗에서는 慧能 이래로 매우 중요시되었다.
 大乘佛敎 最初期에 成立되어 대승불교 思想이 固定化 되기 以前의 것으로 추측되는 <金剛經>은 空의 思想을 설명하면서도 경전의 文句 속에서 空이라는 말을 전혀 쓰고 있지 않아 般若部 經典이지만 특이한 점이다. 이는 아마도 空이라는 술어가 확립되기 이전에 성립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금강경>은 재래로 32分의 단락으로 구분 지어 그 각각에 제목을 붙이고 있다. 그리고 그 사상의 骨子는 철저한 空의 思想에 立脚한 實踐 즉 空觀에 대한 實踐論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空觀의 實踐思想은 禪宗과 결부되어 禪思想을 이루는 根幹이 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금강경>에 대한 주석은 慧能뿐 만 아니라, 新羅 元曉의 <金剛經疏>를 비롯해서 수 백부를 헤아린다.
  韓國佛敎의 전통을 잇고 있는 大韓佛敎曹溪宗은 이름에서 보듯이 禪佛敎(通佛敎的 禪宗)를 指向하고 있으며, 그러한 禪佛敎 가운데서도 曹溪(慧能)계통을 傳承했음을 標榜하고 있다. 물론 曹溪라는 말이 禪에 대한 일반적인 統稱이지만, 師資相承을 중요시하는 선종에서는 각별한 의미를 가진다.
大韓佛敎曹溪宗이 선불교를 표방하면서도 所依經典으로 <금강경>을 포함시켰는데, <금강경>과 禪佛敎는 어떤 聯關성이 있는지 考察함으로써 禪思想과의 관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금강경」이 禪宗系에 끼친 영향을 조명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필자의 능력 밖이라, 이 小考에서는 내용을 정리하는 수준에서 <금강경>의 중심 사상인 '無相, 無念, 無住'에 대하여 간략히 살피고자 한다.

 

 

 

1 慧能과 <金剛經>
 
1) 見性

 <금강경>을 중시한 慧能 계열은 새로운 사상을 주장하는 대신 실천적(頓悟)인 면을 강조했다. 그것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神秀 계통의 선 수행을 漸修라고 비난하며 전개된 神會의 모습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혜능의 핵심적인 사상인 見性에서도 자세히 알 수 있다. 혜능은 見性을 成佛이라고 하고 <단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我此法門 從一般若 生八萬四千智慧 何以故 爲世人 有八萬四千智慧 若無塵勞 智慧常現
       不離自性 悟此法者 卽是無念 無憶 無着 不起0妄 用自眞如性 以智慧觀照 於一"

 

라 하여 그대로 契合(頓)하는 것 이외의 생각은 불가능한 것이다. '見性'이란 我가 사라져 절대적인 세계 즉 眞如의 속으로 단박에 契合하는 것으로 것으로써 여기에는 兩極端이라고 표현되어지는 有無. 斷常. 生滅. 去來 등의 상대적 境界가 없으며, 또 지속적인 어떤 종류의 인식과 행위를 만들었던 일체의 差別相이 사라짐과 동시에 생각 없이 생각하고, 머무는 바 없이 머무름을 직접 체득할 수 있는 것이다.

 

 

 2) 定과 慧

 우리는 위에서 '見과' '性이' 단순히 보는 行爲와 보여지는 對象이 아니라는 것을 보았는데 이러한 생각은 智慧와 實踐을 다르게 보지 않는 定慧雙修의 사상에서 緣由한다고 할 수 있다. 
 <壇經>에서 見性이라 함은 定慧一致 의 체험으로 볼 수 있으며 이는 깨달음이 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가 된다. 그리하여 般若는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禪定을 통해서만 반야가 얻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부정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반야와 선정이 서로 다른 것을 배제한다거나 어느 것보다도 우선한다는 주장을 경계하며, 정과 혜가 다르지 않는 일행삼매를 설명한다.

 

 

                                       "一行三昧者 於一切處 行住坐臥 常行一直心是也" 

 一行三昧란 行住坐臥 語默動靜時에 純一하게 진행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事物에 집착한다면 도리어 경계에 포섭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올바른 것은 아니라고 한다. 만약 앉아서 반야를 證得할 수 있다면 어째서 기왓장을 갈아 거울을 만드는 것과 같다는 嘲笑 썩인 비난을 받았겠는가 , 우리는 이러한  일행삼매가 가지는 선정의 절대적 의의를 다시 생각하여 수행에 적극 반영해야 할 것이다.

 

 

2  <금강경>과 선사상

 大乘佛敎 초기에 성립된 「금강경」은 대승불교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思想 즉 般若 空思想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는 소승불교의 '我空法有' 주장에 반대하는 입장으로서 '諸法皆空을 역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는 四相 즉, 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을 버리라고 하는 것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四相은 一切의 槪念, 觀念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否定되어져야 할 것이라고 經의 곳곳에서 밝히고 있다.
<금강경>의 선사상에 대한 論議는 慧能을 빼고서는 서술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혜능은 <금강경>에 의거하여 선사상을 무상. 무념. 무주로 정리하였는데 그에 대한 실천방법이나 사상적인 뒷받침은 <금강경>의 반야바라밀로써 잘 설명 되어져 있다. 다음 단락에서 無相. 無念. 無住에 대하여 간략히 살펴보자.

 

 

 

3 無相. 無念. 無住

 

 

1) 無相

 <금강경>은 "離一切諸相 則名諸佛"이라 설하여 "모든 相을 떠난 것이 곧 부처라고 이름한다." 하여 相에 결박 당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리고 왜 離相해야 되는지 또 이상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고 설명하고 있다.
 혜능이 말한 無相도 相(有爲法)의 실체를 여실히 보여줌으로써 相, 非相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경에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이라고 재차 강조하는 것을 보더라도 왜 그가 무상을 주장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第十七究竟無我分에 "實無有法名爲菩薩(중략) 若菩薩通達無我法者 如來說名眞是菩薩" 이란 대목에서 相이란 我와 같은 意味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經에서 설해진 四相이란 見分(主)에 의해 施設되는 것으로써 이런 見分은 相分(客)에 對한 말이다. 결국 相이 있다는 것은 我가 있다는 의미로서 兩空의 이치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我(見分)와 相(相分)을 동시에 파해야 하는 것이다.
我란 根本 佛敎부터 排斥 받던 관념으로서 '諸法無我'는 불교의 기본 사상이다. 이와 같이 연기에 입각한 무아사상은 「금강경」이르러서는 '諸法皆空'(인.법)로 나타났다.

 

 

2) 無念

  慧能의 無念이 <금강경>에 기초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經에서는 無念이라는 말을 찾을 수 없다. 혜능은 無念을 설명하면서 無相의 법을 깨우치기만 한다면 바로 無念의 자리이며, 부처의 경지라고 말한다. 이는 <금강경>의 선사상을 요약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바로 般若에 契合하는 것이다. 따라서 혜능은 無念. 無相. 無住를 말하면서 無念을 宗으로 삼는다고 천명했던 것이다.
 般若를 직접 체득할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無相이고 無念이고 無住이며 見性이고 成佛 解脫인 것이다. 그러면 어떤 것을  無念이라 하는가 대해서는 <단경> 정혜품에 "於諸境上 心不染 曰無念" 이라고  밝히고 있다.

 

 

3) 無住

 <금강경>의 "應無所住 而生其心"은 혜능이 말한 무주에 대한 근간이 되었다고 하 하더라도 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無住란 일체의 相과 念의 분별을 떠난 상태에서 어디에도 결박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상태이다. 이런 뜻은 <금강경>第四妙行無住分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菩薩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 所謂(중략) 不住於相"이라 하여 일체의 見分(我見)이나 相分(我相)과 같은 상대적인 생각에 걸림 없는 마음을 내라는 것이다. 그래서 무주를 체득한다면 바로 다음 第五如理實見分에서 보듯이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의 경지로 直入하는 것이다. 결국 無住란 一切의 有爲法이 實在한다는 固定的인 觀念을 破함으로써 상대적이거나 대립적인 경계 위에서도 오히려 無碍自在함을 나타내는 말이다.

結論
 
<금강경>의 思想은 空觀에 의지해 一切 差別法을 끊음으로써 直接的인 般若의 體得에 있다.
經에서 보았듯이 "依法出生" 즉 "諸佛이 이 經(般若)을 통해서 출생한다"고 한 부분은 혜능을 통해 頓悟와 見性으로 표현 되어졌다. 이런 돈오와 견성의 사상은 이전의 禪修行에 비해 실천적이고 이념적인 전환을 맞게 되었다. 또 한편으로 혜능은 <금강경>에 기초하여 般若三昧를 설하며, 一切法이 無相 無念임을 밝히면서 無相 無住 無念으로 선사상을 定立하였던 것이다.
禪宗 특히 慧能 이후로는 <금강경>이 선사상과 깊숙이 관련되면서 높이 추앙 받게 되었고, 또 經에 대한 論書 내지 疏. 초. 記. 解 등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런 사실은 경에 대한 믿음이 확고한 것을 대변 해주는 것으로써 필자 역시 이와 같은 측면에서 비록 管見이지만 同參하고 싶은 마음에 무지를 무릎서고 천착하였다.
 경에서 말하는 내용을 가만히 보면 그저 환희심이 날 따름이라서 감히 천착할 생각조차 낼 수 없지만, 불교를 학적으로도 공부해야 하는 입장과 경에서 말하였듯이 "於此經中 受持乃至 四句偈等 爲他人說 其福勝彼"하려고 한다면 비록 摸象記(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의 글)라도 나의 지견을 밝혀야 한다는 뜻에서 글을 쓰게 되었지만 관견이라는 것은 우둔한 필자로서도 알 수 있다.

 
 
주고 받는다는 것은 사랑을 나누는 행위 
 
 
미국에서 "돈리"라는 사람이 직업을 잃고 추운 겨울에
죽기보다 싫은 구걸에 나서야만 했습니다.
그는 어느 고급식당에서 한쌍의 부부에게 동정을 구했습니다.
 
"미안하오 .잔돈이 없소." 남편의 말이였습니다.

이말을 들은 부인이 1달러를 주면서 "

음식을 사 잡수시고 기운을 내세요.

그리고 빨리 직업을 찾도록 기도하겠습니다.

 

1달러를 받은 "돈리"는

50센트로 빵을 사서 요기를 하고 있을 때에,

바로 앞에서 한 노인이 자기를 한없이

부러운 듯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머지 50센트로 노인에게 빵을 사 주었습니다.

노인은 조금 떼어 먹고는 종이에 빵을 싸가지고

함께 길가에 신문팔이 소년에게로 가서 빵을 주었습니다.


소년이 미친듯이 빵을 먹고 있는데

길잃은 개 한마리가 다가왔습니다.

소년은 빵 조각을 개에게 조금 나누어 주었습니다.

  

힘을 얻은 소년은 신문을 팔려고 뛰어 갔고,

노인도 일감을 찾아 나섰으며

 

"돈리"는 개의 목에서 주소를 찾아

개 주인에게 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사례금으로 10달러를 받았습니다.

 

"돈리"는 개 주인에게 양심적인 인물로 인정 받고
개 주인이 경영하는 회사에 취직이 되었습니다.

 

"돈리'는 작은 빵속에 담겨있는 주는 사랑

나누는 기쁨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주고 받는다는 것은 사랑을 나누는 행위로서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보상작용입니다. 

 

=짧은얘기 긴 여운:이충호 중에서=

 

 

모두가 이런 사랑 주고 받으며 살 수 있다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워 질까?
오늘 밤
그런 사랑 하나 품고
그 사랑에 묻혀서 잠들고 싶다.--
 

기다린사랑(약속)_이산/장윤정

기억하나요 가슴 아픈 사연을

내님 오실날을 저울질 하나요

한참후에야 그 마음을 알았죠

내가 아닌 곳에 머물러 있다는 걸

 

내게 올 순 없나요 사랑할 순 없었나요

그대 헤일 수 없는 맘 나였던가요

잊지 말아요 가슴 아픈 사랑이

슬퍼하는 날엔 내가 서 있을게요

 

내게 올 순 없나요 사랑할 순 없었나요

그대 헤일 수 없는 맘 나였던가요

이대론 안되나요 돌아올 길 잊었나요

그대 헤일 수 없는 맘 나였던가요

 

잊지 말아요 가슴아픈 사연을

슬퍼하는 날엔 내가 서 있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