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밝아야 눈 귀 정신 밝게 돼/무공 스님

2010. 4. 26. 20:1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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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서 뵌 큰스님】 무공스님 <가평 청오사 주지>

 


“마음 밝아야 눈 귀 정신 밝게 돼”

왜 두리번 거리는가

마음이 밖으로 달아나면

망상 일어나 안돼요

아무리 높은 진리도

실천 불가능하면

공론에 불과해요

◇30여년 동안 군포교에 앞장서온 무공스님. 14일 군법당 호국 연호사에서 스님은 지혜와 자비로 평화를 이룩하자고 호소했다.

◇대중포교는 개개인의 신심과 수행의지를 북돋는데 역점을 둬야 한다는 무공스님.

10월 14일 경기 가평의 모 사단 군법당인 호국 연호사.

부대 밖 경치 좋은 야산에 자리한 이 군법당은 넓은 부지에 아기자기한 성물들이 조성되어 있지만, 상대적으로 법당은 아담해 보였다. 모처럼 휴일을 맞은 장병들이 법당 밖에서 잡담을 나누다 큰스님이 오신다는 말에 서둘러 군화를 벗는다. 법당안에는 100여명의 장병들과 10여명의 민간 신도들이 법회를 봉행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윽고 오늘의 초청법사인 무공 스님이 자비스런 미소를 띠고 법당에 들어오셨다.

무공스님은 법문에 앞서 장병들이 입정에 들 것을 지시했다.

“죽비 한번 칠 때 몸이 삼매에 들고, 죽비 두 번에 마음이 삼매에 들며, 죽비 세 번에 일체만물이 삼매에 듭니다. 불자들은 지금 좌선에 든 ‘이게 뭐꼬’ 하는 의문을 내어보세요.“

한 장병이 입정에 들지 않고 몸을 움직이자, 스님이 벼락같은 호통을 친다.

“저 법우는 왜 두리번 거리고 있어! 마음이 밖으로 달아나면 망상이 일어나 안 돼요!”

진리와 하나되는 공부

벽력같은 할에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10여분의 시간이 흐른 후 죽비 소리가 들리자 게송과 함께 스님의 법문이 시작됐다.

“약인욕료지 삼세일체불(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인데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니라. 나무아미타불.”

무공스님은 절에서 도량석 칠 때 부르는 종성게로 법문을 여셨다.

“대방광불화엄경은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서 깨달은 인간 마음 속의 주체가 되는 소식을 전하고 있어요. 이 게송은 과거, 현재, 미래세의 부처님을 알려거든 응당 마음이 모든 것을 지어 만드는 법계를 관조하라는 뜻입니다.”

이날 ‘무공 큰스님 초청법회’의 법문 주제는 지혜와 자비로 평화를 이룩하자는 내용이 주였다. 요즘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모으고 있는 미국의 테러사태와 아프간에 대한 보복전쟁이 법문의 배경이 된 듯 스님은 특히 “불교는 마음의 평화 즉, 열반을 얻는 것이예요. 마음이 밝아야 눈도, 귀도, 정신도 밝게 됩니다”라고 강조하셨다. “불교가 얻고자 하는 지혜는 ‘반야(般若)’라고 하지요. 반야의 어원은 씨뿌려 경작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어요. 즉 마음 바탕을 갈고 닦아 지혜의 씨앗을 뿌리고 자비의 감로를 얻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법문(心地法門)이라고 하는 거예요.”

스님은 하나하나 장병들을 둘러보며 이같이 자상하게 설명하며 ‘반야바라밀’을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와 대비시키며 풀이해 주었다. “‘지혜에 대한 사랑’(愛智)이 서양철학이라면 불교는 ‘바른 깨달음’(正覺)을 강조하고 있어요. 서양철학이 단순히 진리를 아는 것이 목적이라면 불교는 진리와 하나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눈, 귀, 코, 혀, 몸, 의식을 통해 순간순간 다가오는 사물을 바로 그 때 분명히 직관해 바로 보고 바로 생각하고 바른 말하고 바른 행동을 하고 바른 생활과 노력을 하도록 평소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고 말했다. 마음과 사물이 일체가 될 때, 내 마음과 네 마음이 하나가 될 때 지혜가 생기므로 밖으로 깨달음을 구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때문에 도를 구하다 땅에 엎어진 사람은 ‘하늘’이 아닌, ‘마음’에 의지해서 일어서야 한다. 이때 또다시 터져나온 스님의 일갈(一喝).

“꾸벅꾸벅 졸고 있는 법우, 고개 들어! 꿩새끼처럼 졸거야? 스님 눈 뚫어지도록 쳐다봐. 안그러면 몽둥이로 30방이야.”

추상같은 질타에 모든 청중들이 허리를 곧추 세운다.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목숨까지도 바치겠다는 절박한 구도심으로 수행하는 이가 오늘날 있습니까?”스님은 선종의 2조 혜가스님이 팔을 잘라 달마스님으로부터 법을 구한 것(斷臂求法)과 부처님께서 나찰에게 ‘제행무상 시생멸법(諸行無常 是生滅法)’이란 법문을 얻기 위해 낭떠러지에 몸을 던진 일화를 들며 서원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간절한 구도심을 얻기 위해서는 세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첫째는 계정혜 3학을 공부해 물러서지 않겠다는 견고한 신심. 둘째는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 자정기의(自淨其意) 하겠다는 원력. 셋째는 국가와 사회를 살리는 지혜와 지비의 힘이다. 불자들의 원은 부처가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번뇌가 없는 행복한 마음으로 세계평화에 헌신해야 한다는 게 스님의 지론이다.

스님은 세계가 소용돌이칠 때는 우리 민족도 예외가 될 수 없기에 마음을 열고 세계를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우선 내 발밑부터 비추어 보는(照顧脚下) 자기반성과 화합, 격려, 용기를 당부했다. 법회가 끝난 후 무공스님은 장병들과 함께 점심공양을 한 후 호국연호사 법당 증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77년 창건된 호국연호사는 법당이 좁고 낡아 증축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100여명 남짓밖에 들어갈 수 없어,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많은 장병들이 법회에 참석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는 것을 무공 스님은 늘 가슴아파 하셨다. 하지만 국방부의 군종예산은 턱없이 부족해, 법당 신축 및 증축시 공사비의 3분의1 정도가 시주금 등으로 확보되어야만 불사가 가능하다.

무공 스님은 30여년간 군포교 일선에 서왔다. 77세인 지금도 어느 군법당에서건 법문을 요청하면 한번도 거절하지 않고 먼 곳이든 가까운 곳이든 한달음에 달려가 군불자들의 수행을 격려한다.

스님은 매주 하루, 이틀을 제외하고는 매일 군법당을 순회하며 군인들의 마음공부와 정서순화를 위해 촌음을 아끼지 않고 있다. 스님이 이렇게 군포교에 애정을 보이는 것은 스님도 지난 6.25 전쟁때 학도병으로 징집돼 군에 있다가 전역하고 출가했기 때문이다. 스님은 동족끼리 서로 죽이는 전쟁에서 전쟁의 처참함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폭력과 전쟁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음을 느끼게 되었고, 부처님의 비폭력정신과 생명존중사상의 본원을 따라 정토세계를 구현해야 한다는 열망은 더해만 갔다.

작은 욕심도 업 짓는법

스님은 지난 62년 범어사에서 전 조계종 종정 고암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이후, 범어사 송광사 등 제방 선원에서 열심히 정진했다. 바람 떠도는대로 운수납자의 길을 걷다가 충청도의 이름없는 깊은 산에서 8년간 토굴정진도 했다. 정부의 산림보호정책으로 나중에 산에서 쫓겨 내려오게 되었지만, 스님은 그 때 가장 치열하게 정진했었다고 말한다. 8년간의 토굴생활은 말로 하기 힘든 두타행의 기간이었다. 엄동설한에 길을 걸을 때면 눈썹까지 얼어 얼굴을 감고 다닐 정도였다. 찬 공기를 마시면 가슴이 따가워지는데, 젊은 시절 무모한 고행은 몸을 상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토굴생활에서 가장 어려운 수행은 단식을 하면서 ‘이 뭣고’ 화두를 드는 것이었다. 1주일째가 힘들고, 2주일째가 더욱 힘이 들었다. 된장과 밥 냄새가 절로 나고, 이가 떨리고 배가 너무 고프면서 갈증이 났다. 무엇이든지 먹고 싶다는 욕망만이 간절했다. 하지만 이 고비를 넘자 힘이 덜 들었다. 다음 단계부터는 물 마저도 끊고, 한달 보름의 단식을 이겨냈다. “단식을 하고 화두를 들면 굉장히 머리가 맑아집니다. 바로 무심에 들 수 있어요.”

스님은 이때의 토굴수행을 늘 잊지 않고 있다고 하신다. 외부의 여건이 어려울수록 내부를 들여다보는 힘이 생긴다고 하신다. 수행자가 편안한 생활을 하게 되면 망상이 들끓고 화두가 순일할 수 없다. 화두라는 하나의 의심 덩어리를 깨기위한 정신집중에 있어, 무(無)에 집착하는 것은 더 큰 병을 낳는다. 즐겁고 좋은 모든 생각과 망상을 끊는 방편에 단식보다 좋은 방편은 없다. 철야정진을 하다보면 어느 때는 스님도 모르게 저절로 졸게 되는데, 이때의 찰나처럼 짧겨 느껴지는 1시간은 마치 영원처럼 길게 느껴지기도 했다. 온갖 유위법(有爲法)이 곧 망상임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생사가 두렵지 않다. 늑대 같은 산짐승이 나타나도 ‘내가 나쁜 짓을 않는데 네가 날 어떻게 하겠느냐’는 믿음이 절로 생겨나고 이미 사람과 짐승이라는 구별도 안 생긴다. 그저 친근한 마음만 들 뿐이다. 새들이 좁쌀을 먹기위해 다가올 때는 동물의 예민한 영감을 실감하게 된다고 하신다. 오직 두려워 해야 하는 것은 짐승이 아니라, 망상과 탐욕.

무공 스님은 1970년경, 가평 청우산으로 가 한국전쟁 때 폐사가 된 청오사를 중건, 30여년간 주석하며 중생포교에 적극 나서고 있다.

“포교는 사람들이 마음의 도리를 깨닫도록 열심히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시시각각 일어나는 망념을 끊어 무심에 들도록 도와야 합니다. 생사가 없는 마음 도리를 경험하면 진공(眞空)이 곧 마음이며, 묘유(妙有)가 대비심임을 깨달아요. 깨달음과 실천은 결코 둘이 아닙니다.”

스님은 포교활동도 결국은 불자 개개인에 대한 신심과 수행의지를 높이는데 귀결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노구를 이끌고 군법당을 비롯 각 법회에서 마음공부를 쉼없이 당부한다.

“불가설 불가득(不可說 不可得)의 이 마음은 조그마한 욕심도 업을 짓는 원인이 됩니다. 형태가 없는 이 마음은 보고 듣고 느끼는 한계를 넘어 본질적으로 존재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무한한 이 능력을 써먹을 줄 모릅니다. 그래서 각자의 근기에 맞도록 심신을 개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높은 진리도 실천이 불가능하면 공론에 불과하다. 배고픈 이가 밥부터 먹어야 하듯이 이론과 실천이 합일되어야만 힘을 얻는다고 강조하시는 스님은 불자들부터 사회문제를 잘 알고 이를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해석해 불교의 진리로 귀의토록 해야 한다고 역설하셨다. 스님은 요즘 사람들이 지나치게 경제나 투기에 큰 관심을 갖고 오로지 돈 돈 만을 부르짖으며 돈 벌기만을 바라지만 결국 돈을 버는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보이는 것은 바른 마음을 견지하고 신뢰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신다.

“옛날 시장에 5명의 떡장사가 나란히 떡을 팔았는데, 유독 한 사람만이 모든 떡을 일찍 팔고 집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이를 보고 다른 떡장사들이 이곳저곳 장소를 바꿔보았지만 역시 결과는 마찬가지였어요. 그렇다면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 떡장사는 마음이 항상 밝았습니다. 파는 떡도 정갈하고 먹음직스러웠어요. 별다른 재주가 있었던 것이 아니예요. 단골에게 친절하고 정직하며, 큰 이익 생각지 않고 떡을 판 것이 비결아닌 비결이었던 거죠. 결국 남이 벌어다 주는 돈은 즉 마음 씀씀이에 달린 것입니다.”

어떤 이유로도 전쟁 안돼

옛날 개성상인의 고사를 또 들려주셨다.

“어느날 한 상인은 아들에게 유언하기를, ‘아들아, 돈을 벌고 싶거든 목돈이 아닌 푼돈을 벌어라. 돈을 쓸 때는 푼돈을 쓰지 말고 목돈을 써라’고 했어요. 돈의 효율성을 말한 이 유언은 분수밖의 돈으로 과잉투자하지 말 것과 남을 도울 때는 고기 보다는 그물을 사줄 것 즉, 소비재 보다는 생산재를 투자해야 된다는 것을 일깨우고 있어요.”

돈은 사람을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는 물건이기에 젊을 때 돈 버는 일에만 몰두하다가는 수행이나 공부할 때를 놓치게 된다는 가르침이다. 따라서 마음공부는 무시무처(無時無處)에서 평생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 마음공부는 계(戒), 정(定), 혜(慧) 3학을 닦는 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세간살이 역시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 자정기의(自淨其意) 시제불교(是諸佛敎)라는 칠불통계의 가르침에서 한치도 어긋나지 않습니다. 악한 자를 보고 동정심을 내고 나는 악행을 저지르지 않아야 겠다 새로 마음을 추스리면 악인이 나의 스승이 될 수 있어요. 선한 자를 보고 존경심과 함께 더욱 선행을 해야겠다는 분발심을 내어 나의 스승으로 삼아야 합니다.”

김재경 기자 jgkim@buddhapia.com

무공스님은?

제방선원·토굴서 정진

30여년 군포교 매진

77세의 노구에도 군포교에 대한 정열이 식지 않고 있는 무공스님은 1950년 부산 동아대 정치경제학부에 재학중 학도병으로 징집돼 62년 대위로 전역, 출가한 이력을 갖고 있다. 동기생중에는 정호근 육군 대장 등 많은 장성이 배출될 정도로 군내 서열도 높다.

스님은 62년 범어사에서 前 조계종 종정 고암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이후, 범어사 송광사 등 제방선원에서 정진했다. 이후 6.25때 폐사가 된 청우산 청오사를 중건, 30여년간 불사에 매진하면서 군불교진흥회 이사를 맡는 등 군포교에 대한 원력을 늦추지 않아 왔다.

6.25 때 학도병으로 전쟁에 참가했었기에 전쟁의 참혹상을 누구보다도 생생히 겪은 스님은 그래서 자주 이렇게 말씀하신다. “우리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지만 불과 20년만에 남들이 200년 걸려 이룩한 경제재건을 이룩했어요. 세계인들이 자유민주주의를 구현한 우리 민족을 찬양하고 대통령에게 노벨평화상까지 선사하지 않았던가요? 우리 민족은 원래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입니다. 우리 민족부터 원융화합하고 인류 전체의 평화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베풀기만 한 당나라 때 포대화상을 존경해 절 곳곳에 포대화상을 모시고 있다. 무공스님은 종교를 떠나 군내 마을회관을 돌며 연탄과 먹을거리를 보시하고 천주교 복지시설인 가평 꽃동네에도 들러 정기적으로 도움을 주고 계시다.

 


  
봄 햇살에
잠시 멈춘 반달이
아빠를 돌려 달라는 어린 소녀의
손을 잡아 준다.
소녀야! 아빠는 아주 훌륭한 대한민국의
해병이셨단다. 그만 울고 아빠를
엄마 가슴에 묻게 두어라
그리고 넌 열심히 살아라
그래야만 네 아빠가 천국에서 기뻐하신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