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계율수행의 실제

2010. 4. 28. 19:1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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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계율수행의 실제


 1)수계


  계율 수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수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계율수행에 있어서 원칙적으로는 계를 받고 받지 않고 보다도 스스로의 행이 어떠하냐가 더 중요하다. 그러나 계를 받아 지니겠다는 마음 속의 굳은 결의가 우선되어야 지속적인 실천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계를 받을 때 모든 악을 막고 모든 선을 실천하고자 하는 계의 의미를 몸과 마음으로 깊이 받아 들임으써 이를 실천하게 되기 때문이다.

  수계란 바로 계를 실천할 수 있도록 마음 속에 힘을 실어 준다. 따라서 처음 발심하였을 때 뿐만아니라 계율을 어겼거나 계심이 약해졌을 때는 다시 계를 받아 계체가 마음 속에 자리잡도록 하여야 한다. 수계할 때 계를 받는 사람의 마음에는 보리의 마음과 중생교화의 서원이 바르게 세워져 있어야 하고 계를 주는 사람은 또한 계를 몸과 마음으로 잘 수지하는 사람이여야 하며 계의 조문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절차는 부처님 앞에서 위의있게 치뤄져야 한다.


  ①수계의 의미

  불자여, 만약 일체 중생이 처음으로 삼보의 바다로 들어감에 믿음으로써 근본을 삼고, 부처님 가문에 머물러 사는 데 있어서는 계로써 근본을 삼느니라. 불자여, 처음 수행하는 보살은 혹은 믿음이 있는 남자나 혹은 믿음이 있는 여자 가운데 모든 근이 갖추어지지 않은 황문, 음남, 음녀, 노비, 변화의 사람이라도 계를 받게 해야 하나니 모두 마음이 있어서 진리의 길로 향할 수 있기 때문이니라. 처음으로 발심 출가하여 보살의 위 잇기를 원하는 이는 마땅히 먼저 정법계를 받을지니라. 계는 일체행의 공덕장의 근본이며, 바로 불과의 길을 행하는 일체행의 근본이니라.<보살영락본업경 대중수학품>


  계를 받는다는 것은 삼보에 대한 믿음을 내었고 불법을 배우고자 한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범망경 보살계서에서는 이 계를 지니면 어두운 곳에서 불빛을 만난 듯하고, 가난한 이가 보배를 얻은 듯하고, 병난 이가 쾌차함과 같고 갇혔던 죄수가 풀려남과 같고 멀리 집 떠난 이가 돌아온 듯하리라 하였으니 계가 얼마나 소중하고 기쁘고 환희로운 것인가? 계에 대하여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는가 없는가는 바로 삶을 이끌어 줄 바른 지표로써 믿고 받아들이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그 판단은 다른 누가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계를 받는 의미는 이것만이 나를 피안으로 인도하는 바른 길임을 확실히 알고 믿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두운 곳에서 빛을 만난 듯,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서 구명선를 만난 듯 그렇게 반갑고 간절한 마음으로 받아 지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계를 오히려 두려워하고 멀리하니 안따까운 심정 금할 길이 없다.

  밤길을 갈 때에는 등불에 의지하는 것과 같이 아직 지혜가 밝지 않은 초심자는 계율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만일 부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하는 이는 누구나 계를 받을 수 있으며 받아야 한다. ‘나는 근기가 안됐어, 다음에 받지‘하고 물러설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이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상락아정의 열반의 세계로 이끌어가는 길이라는 믿음이 있고 또 그 길에 함께 하고 싶다면 먼저 수계하고, 주의의 사람에게도 수계를 권해야 한다.


  ②수계의 중요성

  수계에 의해 방비지악의 힘이 생기고 수계를 바탕으로 계율 수행이 시작되고 계율 수행에 의해 범부에서 성인으로 삶이 전환될 수 있으므로 수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불자여, 만약 과거 미래 현재의 일체 중생 가운데 이 보살계를 받지 않는 이는 지각이 있는 이라고 하지 않으며 축생과 다를 바가 없으며 사람이라고도 하지 않으며 항상 삼보의 바다를 여의게 되나니 보살이 아니니라. 이름하여 축생이라고 하고 사견이라고 하고 외도라고 하나니 인정에 가깝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보살계는 受法은 있으나 捨法은 없느니라. 그러니 범하는 일이 있더라도 잃어버리지는 말지니라. 그러므로 마땅히 받아야 하나니, 있으면서 범하는 것은 없으면서 범하지 않는 것보다 수승하나니, 범하는 일이 있어도 계를 받은 이는 보살이라고 이름하고 범하는 일이 없어도 계를 받지 않은 이는 외도라 하느니라. <보살영락본업경 대중수학품>


  보살계를 받지 않으면 인간이라 하지 않는다는 극단적인 표현을 하면서까지 수계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계를 받지 않으면 삼보의 바다를 여의게 되니 계를 받을 것이며 만일 범하는 일이 있더라도 계를 마음 속으로 버리지만 않으면 잃지 않는다 하였으니 계를 다 지키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받지 않는 어리석음을 짓지 말아야 할 것이다.


  ③받지 않는 어리석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를 받지 않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불자들이 있다. 그들은 계를 지킬 수 없기 때문에 받지 않겠다고 한다. 그러나 계는 결과보다는 동기, 즉 의도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듯이 처음부터 지키지 못할 것이라고 단정하고 한 번도 지킬 마음을 내지 않는 쪽과 계를 어길 때 어기더라도 받는 순간만은 정말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마음 먹는다면 어느 쪽이 부처님 제자다운 모습인가. 


  옛날에 한 어리석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몹시 목이 말랐으므로 물을 찾아 헤맨 끝에 큰 강물에 이르렀는데 멍청하니 물을 대하고 선 채 정작 마시려고는 안했다. 옆에 있던 사람이 물었다.

“그대는 목이 마르다 해서 물을 찾더니 이제 물 있는 곳에 왔는데도 안 마시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사람이 대답했다.

“그대가 이 물을 다 마실 수 있다면 나도 마시겠다. 이 물이 너무 많아 그대나 나나 다 마실 수가 없게 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마시지 않는다.”

그때 이 말을 들은 여러 사람들은 다 크게 비웃었다고 한다. 비유컨대 외도가 그 그릇된 이론을 편벽되게 취해 지닌 다음, 자기네로는 불계(佛戒)를 다 지켜 낼 힘이 없다는 이유로 그것 받기를 외면함으로써, 미래에 득도하리라는 결정이 없는 채 윤회를 계속하고 있는데, 이는 저 어리석은 사람이 물을 보고도 마시지 않아서 일시의 웃음거리가 된 것과 같다 할 것이다. <백유경>


  우리 주변에 이와같은 어리석은 사람을 흔히 볼 수 있다. 누가 처음부터 완벽하게 계를 지켜야 한다고 했던가. 물이 갈증을 씻어주리라는 것을 안다면 그것을 마시면 그만이다. 누가 그에게 그 물을 다 마시지 않았다고 탓하겠는가. 아예 제멋대로 살겠다는 사람은 어쩔 수 없지만 어떻게 살아야 할지 삶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주저 말고 계를 받아야 할 것이다.


  ④수계의 방법

  수계의 방법은 크게 두가지로 자기 스스로 받는 것과 스승을 모시고 받는 경우가 있다. 스스로 받는 계를 자서수계라 하는데 부처님 앞에서 자기 스스로 목욕제계하여 청정한 몸으로 참회하고 맹세하여 받는 것을 말한다. 스승으로부터 받는 경우 계의 종류에 따라 별수계와 통수계가 있다. 별수계는 5계나, 사미10계, 구족계 등 재가, 사미, 비구 등의 처지에 따라 정해진 계를 받는 것이고, 통수계란 재가나 출가가 같이 통해서 받는 계라는 뜻으로 보살계와 삼취정계가 여기에 해당한다. <보살영락본업경 대중수학품>에서는 계를 받는 방법을 세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각각의 받는 방법을 간략하게 설하고 있다.


  불자여, 계를 받는 것(受戒)에 세가지가 있나니, 첫째 모든 불보살이 현재 하시는 앞에서 받으면 진실상품의 계를 얻으며, 둘째는 모든 불보살이 멸도한 후 천리 안에 먼저 계를 받은 보살이 있으면 법사로 삼아 계를 받으면 정법계를 얻나니 중품의 계이니라. 셋째는 부처님 멸도후 천리안에 법사가 없을 때에는 마땅히 불보살의 형상 앞에서 두 무릎을 땅에 대고 두 다리를 세워 합장하며 스스로 서원하여 계를 받을지니 이것이 하품의 계이니라.


  수계의 순서는 대략 예경, 사귀의(불·법·승·계), 참회(삼업청정), 수계 순이다. 이 외에도 수계작법의 구체적인 예는 유가사지론, 우바새계경 등에 있다. 이들 경전을 통해 살펴보면 수계를 받기 전에는 먼저 삼귀의와 발보리심이 우선되어야 하고, 지난날의 잘못에 대한 참회와 앞으로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서원이 있어야 한다.

  <우바새계경 수계품>에서는 먼저 선생이 우바새계를 받고자 하는 재가보살은 어떻게 계를 받을 수 있는지를 묻자 부처님께서 먼저 육방에 공양할 것을 설하는데 육방이란 부모, 스승, 처자, 선지식, 노비, 사문·바라문이다. 여기서는 인간관계 속에서 서로 서로의 역할에 대한 말씀으로 재가자들이 먼저 세속에서의 생활을 잘 해야함을 말한다. 이는 아함경의 <선생경> 또는 <육방예경>과 관련이 있는 부분이다. 또 삼보에 귀의할 수 있겠는지, 모든 중생에게 무포외를 베풀겠는지를 물은 연후에 그러겠다고 하면 5계를 지키지 않았을 때의 과보를 설한다. 그리고 나서 이 사람으로 하여금 만 6개월 동안 출가한 지자를 받들어 섬기게 하고, 지자는 또 지극한 마음으로 그의 몸의 4위의(앉고 눕고 서고 움직이는 모습으로 일상의 모든 행동을 의미함)를 살펴 만약 이 사람이 능히 가르치는 대로 하는 것을 알았거든 6개월이 지나서 여러 승려와 화합하여 만 20인으로 백갈마를 짓는다.

  이와같이 재가자라 할지라도 수계의 과정이 엄격함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수계의식 가운데 삼귀의와 참회 등이 들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고 그러한 서원을 분명히 세웠는지, 참회는 깊이 했는지, 계를 받을 자세가 되어있는지 등 수계의 자격을 묻는 절차는 생략되어 있다. 현재 수계 전에 교육과정을 두고 이것을 마치고 나면 수계의식을 갖는 사찰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수계는 스스로 계를 받겠다는 의지가 있고 그 사람이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자타가 인정할 때 받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⑤수계의 공덕

  계를 바르게 받음으로 참회하는 마음을 내게 되고 받은 바 시라를 잘 막아 보호하며 계를 잘 막아 보호함으로 모든 나쁜 것을 여의게 된다고 하였으니 계를 바르게 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수계를 계생(戒生) 또는 계력(戒力)이라 한다. 계생이란 계를 생한다는 말로 계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계율수행이 시작됨을 의미하고, 계력이란 계를 받음으로써 계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의미이다. <불설계소재경>에는 계의 수지와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어떤 남자가 삼자귀와 오계와 십선을 받아 일심으로 정진하여 감히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부처님이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는 부처님을 뵈러 가는데 역말을 지나게 되었다. 마침 해가 저물었으므로 하룻밤 머물고자 하였다. 거기에 한 여인이 단정하게 있었는데 그 여인은 사람을 잡아먹는 귀신의 부인이었다. 여인은 머물지 말라고 하였으나 남자는 삼자귀와 5계 십선을 받고 해태하지 않았으므로 두려워하지 않고 머물렀다. 사람을 잡아 먹는 귀신은 계의 위엄을 호위하는 신이 그 곁에 있는 것을 보고는 사십리 떨어진 곳에서 묵고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날 남자가 길을 가는데 해골이 널려 있는 것을 보고는 털이 곤두서고 마음이 두려워 후회하며 물러나 생각했다. ‘내가 본국에 있는 집에 있으면 의식이 매우 쾌적하고 풍부했을텐데 공연히 부처님이 사위국에 계시다는 말에 감회되어, 아직 기묘한 것은 보지도 못했는데 도리어 해골이 널려 있는 것을 보았으니,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저 여인을 본토로 데리고 돌아가 함께 살면 어떨까, 또한 즐겁지 않을까?

  그리고는 즉시 길을 돌려 다시 역말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마음이 다시 미혹되어 음욕이 생기고 부처님의 삼자귀의 덕과 오계 십선의 마음을 다시 믿지 않으니 천신이 곧 가버리고 다시는 보호하지 않았다. 귀신이 돌아오자 여인은 남자를 항아리 안에 숨겨 주었다. 귀신이 사람의 냄새를 맡고 아내에게 고기를 달라고 했다. 여인은 어젯밤에 왜 오지 않았냐고 묻자, 귀신은 부처님의 제자가 있어 천신이 나를 쫓아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인은 부처님 계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귀신은 내가 감히 말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 여인이 계를 설하여 주면 고기를 주겠다고 하며 재촉하자, 먹고 싶은 욕망을 그칠 수 없어 삼자귀와 오중계를 설했다. 귀신이 처음 하나의 계를 설할 때 아내가 문득 받았으니, 다섯가지 계를 마음에 간직하고 입으로 외웠다. 남자도 항아리 안에서 따라서 받았다. 하늘의 제석이 이 두 사람이 마음으로 스스로 부처님께 귀의한 것을 알고, 곧 선신 50명을 뽑아 두 사람을 옹호하니 귀신이 마침내 달아나 버렸다.


  계를 받아 지니면 선신이 지켜준다는 이야기로 수계의 공덕을 일깨워준다. 선신이 와서 귀신을 물리쳤다는 이야기는 실제로 계를 받는 즉시 우리 마음 속에 악을 물리치는 힘이 생긴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2)현대 사회에서 계율의 실천


  앞에서 보았듯이 계율 수행은 단순히 계목 하나를 어기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고 삼취정계의 총체적인 견지에서 모든 생활을 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보살계에서 언급되고 있는 환자를 간호하고 장애인을 돌보고 하는 것 등은 오늘날 사회복지의 측면과 많이 결합되어 있다. 따라서 사회복지활동이나 자원봉사 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도 계율 수행의 중요한 부분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계율수행의 구체적 범위를 말할려면 끝이 없다. 다만 현대사회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극복하는 것도 계율 수행의 일부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며, 5계를 통해 대략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①불살생

  불살생계는 생명존중을 근본이념으로 하는 불교 계율의 대표적인 계문이다. 그 중에서도 살인은 가장 중한 죄이며 세간법에서도 가장 큰 죄가 된다. 율장에서는 악의를 가지고 일부러 죽인 경우뿐만 아니라 잘못된 판단으로 직 간접적으로 살인을 하게 되는 경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경계하였다. 이러한 일은 현대사회에도 남은 과제로 낙태, 자살, 사형제도, 안락사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낙태

  가장 심각한 생명유린의 현실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 명의 태아가 생명을 빼앗기고 있다. 유엔인구기금의 97년 세계인구현황 보고서에서는 매년 최소한 7천 5백만명이 원치 않은 임신을 하고 있고, 이들 중 4천 5백만명의 산모가 낙태시술을 받고 있으며 또 이들 중 6만 7천명이 숨진다고 한다. 또한 성차별이 심한 아시아에서만 지금까지 성감별을 통해 낙태된 여아와 출생 뒤 살해당한 여아가 6천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됐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낙태반대운동엽합의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는 1년에 1백 50만여명이나 되는 생명체가 ‘임신중절’로 ‘제거’된다는 것이다. 20초당 한 명 꼴에 해당된다. 이 수치가 얼마나 정확한지는 모르지만 우리사회에서 임신중절은 결코 낯선 이야기가 아닌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 일은 법적으로도 금지되어 있는 일이다. 그러나 정부의 소극적인(방임적인) 태도 때문일까? 아니면 너무나 많이 행해지고 있기 때문에 그 일이 얼마나 엄청난 일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일까? 타종교에서는 조직적인 낙태반대운동을 펼치고 있으나 불교 쪽에서는 아직까지 이 일에 대해 무관심하다.

  불교에서는 임신을 부모들만의 문제로 보지 않고 태에 들 때 능동적으로 입태하는 주체가 있다고 본다. 그것은 중지 또는 중음이라하여 사람이 죽으면 업의 종자가 남게 되는데 그 상태를 말한다. 이것이 죽은지 7일 내지 49일 동안에 지은 업력에 따라 부모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아는 나의 소유가 아니며 이미 독립된 생명체인 것이다. 감히 다른 사람의 생명을 누가 마음대로 할 자격이 있단 말인가. <불설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에 보면 다섯가지 참회하기 어려운 죄가 있다. 첫째, 아버지를 죽이는 것, 둘째 어머니를 죽이는 것, 셋째 태아를 죽이는 것, 넷째 부처님 몸에 피내는 것, 다섯째 화합승을 파함이다. 낙태가 이렇게 중한 죄이므로 과보 또한 크다.

  살생죄를 비롯하여 갖가지 죄로 인해 현재 고통 받고 있는 아귀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아귀보응경>에 낙태죄를 받고 고통스러워하는 아귀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아귀가 와서 물었다.

  “나는 이 몸을 받았으나 손발이 없으므로 마치 한 덩어리 고기와 같습니다. 넒은 들에 있으면 범, 이리, 여우, 표범, 새, 매, 독수리, 뭇 개와 짐승이 다투어 와서 쪼아 먹으니 고통을 말할 수 없습니다. 무슨 죄 때문이옵니까.”

  “너는 사람이었을 때 나쁜 방편을 부려 스스로 남이 임신한 때에 약을 주어 태가 녹아지게 하였느니라. 이 까닭에 이러한 고통을 받는 것이니 이제는 꽃피는 갚음을 받거니와 열매는 지옥에 있느니라.”


  경전에서는 스스로 낙태했거나 다른 사람을 낙태시킨 과보로 한량없는 고통을 받는다고 하였고 율장에서도 낙태, 자살 등을 살인에 해당된다고 보고 중한 죄로 취급했다. 현재 교계에서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시작된 일이 낙태아 천도에 관련된 일이다. 이것도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일은 이 일을 예방하는 것이다. 심각한 낙태의 현실을 방관한 채 낙태아의 천도에 매달린다면 오히려 일종의 면죄부를 주는 것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불살생계를 받아 지닌 불교인들의 보다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노력이 절실히 필요한 일이다.


*자살

  생명을 지키는 계율과 관련하여 또하나 관심을 갖아야 할 문제가 자살에 대한 것이다. 세계 각국에서 높은 자살률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이에 대한 대책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일본은 자살 증후군, 기력쇠진 징후군이라는 신조어로 불리는 중고년층 자살이 이미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다고 하고, 프랑스는 「자살 방지의 날」을 정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자살방지의 날을 제정했을까 싶다. 우리 나라에서도 최근에 하루 25.4명 꼴로 자살하여 교통사고사망자수를 앞질렀다고 하니, 이제 자살은 개인적인 판단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으로 함께 관심을 기울여야 할만큼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불교적 관점에서 말하면 자살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며 또 하나의 무거운 업을 쌓는 결과가 될 뿐이다. 현재의 어려움이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모두 자신의 업이니 자신이 감당하지 않으면 대신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죽는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어떠한 일이 닥치더라도 그것을 의연하게 해쳐나갈 수 있는 것이 불교인의 자세일 것이다. 피하면 두려움이 더욱 커져서 실제보다 더 큰 고통을 당한다. 담담하게 받아들임으로써 고통은 최소화된다. 아무리 큰 고통도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없다. 어떤 것도 영원한 것은 없으니 그 고통이라는 것도 어느 순간에는 그칠 때가 있지 않겠는가. 이러한 사상적인 캠패인과 더불어 실제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여러 가지 구호사업들을 함께 펼쳐나가야 할 것이다.


*인권

  불살생이란 궁극적으로 생명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하나뿐인 생명은 존귀한 것이며 평등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완전한 인권 보장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으며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내포하고 있다. 미국에서의 백인과 흑인 사이의 불평등은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해결되지 못한 숙제로 남아있다. 또한 일본은 제일교포를 비롯 제일 외국인에 대한 뿌리깊은 사회적 차별관행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인권하면 양심수나 정치범을 떠올리기 쉽지만 그 외에도 성차별, 지역차별, 학력차별, 장애인차별, 외국인 차별, 동성애 차별 등 각종 불합리한 차별이 만연해 있다. 이런 차별들이 얼마나 각자의 마음을 멍들게 하고 사회를 거칠게 하는지 모른다. 일상생활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서는 우선 이러한 차별부터 없애고 타인을 존중하는 풍토를 조성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인권문제는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매우 낙후되어 있다. 이는 남북분단이라는 특수상황 하에서 개인의 인권보다 국가의 안보를 우선시하게 되었고 이것을 악용한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더욱 사회 깊숙히 뿌리 내렸다. 또한 근본적 인권의 상실은 산업화로 인한 인간성 상실에 기초한 것이기도 하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을 것이다. 나의 가족, 나의 친구에만 국한된 사랑이 아닌 모든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자비의 마음이 절실한 때이다. 앞에서 자비는 수행의 근본임을 강조하였다. 자비의 마음이 없다면 깨달음을 향해 한발작도 옮지지 못한 것이니 자비의 마음을 크게 갖고 그 에너지로 이 사회를 불평등과 인권유린이 없는 맑고 깨끗한 땅(정토)으로 만들기 위해 다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사형제도

  사형제도에 대한 각국의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우리나라에서는 97년 12월 30일 사형수 23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에 천주교 측에서는 즉각적인 반대성명과 시위가 있었다. 그러나 불교 측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불교적 입장에서 볼 때 죄는 죄 자체일 뿐 그 죄로 인하여 사람이 부당하게 취급되어서는 안된다. 더구나 생명을 빼앗는 일은 사형을 당하는 당사자에게는 물론 이 사회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죄를 지었다면 스스로 참회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하고 참회한 후에 그 죄업을 갚기 위해 더욱 헌신하며 살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형이라는 것으로 그의 죄가 소멸될 수 있을까? 이러한 안타까운 일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될 것이다. 더구나 23명의 사형수 중 5명은 시신과 안구를 기증해 우리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하였다.

  천수경에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 죄망심멸양구공(罪亡心滅兩俱空) 시즉명위진참회(是卽名爲眞懺悔) 죄의 자성 본래없어 마음따라 일어나니 마음 만약 없어지면 죄도 또한 사라지네, 죄와 마음 모두 없애 두 가지다 공해지면 이를 일러 진실한 참회라 하네”라고 하였다. 마음으로 진정 참회하였으면 그 죄는 사라진다 하였으니 몸이 없어진다고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사형제도에 대한 논란이 많은 것은 사실이나 어떤 극악무도한 죄인도 스스로 참회하면 그 죄는 사라지는 것이며 그 목숨을 빼앗는 것으로 죄를 사할 수 없음이 분명하니 불살생계를 지키는 불자로써 사형제도를 용납할 수는 없으리라 생각된다.


만약 임금이 죽일 것을 명령할 제 모시는 신하가 잘 한다고 칭송하면 이 왕과 신하는 죄가 다를 것이 없느니라. <우바새계경>


*놔사와 장기기증


  만약 임종에 이르러서 그 목숨이 남은 것이 한 생각만큼이라도 있는데 칼을 대어서 죽인다면 이것도 죽인 죄를 얻느니라. 만약 목숨이 이미 다했으면 칼을 내려도 죽인 죄를 얻지 않느니라. <우바새계경>


  사형제도와 더불어 뇌사에 대한 죽음 인정 여부와 안락사 문제가 세계적 이슈가 되고 있는 가운데 97년 6월 26일 미 연방대법원은 안락사를 금지하는 최종판결을 내렸다. 이 문제는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지만 미국 내에서는 안락사 옹호론자도 상당수 활동하고 있으므로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안락사란 있을 수 없다. 생명에 대해 인위적인 해를 가하는 것은 모두 불살생의 계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죽고 사는 문제는 그의 업에 달려 있는 것, 그가 고통스럽게 죽어간다면 그 또한 그가 받아야할 고통인 것이므로 그것을 인위적으로 대신할 수는 없다. 다만 그가 그 고통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돕는 것뿐이다.

  안락사의 문제보다 한층 복잡한 문제가 뇌사의 인정 문제이다. 뇌사를 죽음으로 인정할 것인지는 의학계는 물론 사회 전체적으로 매우 논란의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뇌사의 죽음 인정 여부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으나 현재 뇌사시 본인 또는 가족의 의사에 따라 장기기증이 이루어지고 있다.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에 따르면 97년 현재 장기기증 희망자는 1만 4천 65명으로 91년 설립당시 3천 6백 92명에 비해 4배 가까이 늘어났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하면 아직 걸음마 수준이라고 할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전국민에 대한 사후 각막기증을 제도화하였는데 거부한 사람은 15%뿐이라고 한다. 즉, 국민의 85%가 사후 각막기증을 하는 샘이다. 불교국가인 스리랑카에서는 각막기증률이 높아 이웃나라에까지 기증할 정도이다.

  불교는 다른 종교에서처럼 시신을 보존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다. 오히려 화장이 전통적으로 행해져 왔으므로 사후 각막기증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까 싶다. 각막은 안구에서 각막만 제거하는 것이므로 외형적으로도 전혀 손상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로 생각된다. 다음으로 사후 시신기증이 있다. 불교의 입장에서는 사후 시신기증도 아무런 문제가 없겠으나 살아있는 사람의 생각으로는 끔찍한 일로 생각될 수도 있으므로 각별한 결단이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교계의 생명나눔실천회에 장기기증의사를 밝힌 사람은 1천 5백여명으로 3천건 정도 된다. 건별로는 사후각막기증이 가장 많고 다음으로 뇌사시 장기기증서약, 사후 시신기증 순이고 신장기증도 102명이 신청했으며 이중 21건이 이루어졌다. 신장기증과 골수 기증은 현재 상태로 하는 것이어서 자신의 건강을 염려할 터인데 이런 마음을 내주신 분들께 존경하는 마음이 절로 난다.

  뇌사에 대한 죽음 판정여부는 아직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더 논란을 거듭할 문제이겠으나 수행자들 중에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낭떨어지에서 떨어져 독수리 밥이 되었다거나, 배고픈 맹수의 밥이 되었다는 이야기들이 있다. 따라서 자신의 몸을 던져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은 거룩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뇌사를 어떻게 보느냐를 떠나 뇌사시 장기기증이라는 본인의 결의는 훌륭한 일이다. 불상생계를 받아지닌 계율수행자라면 사후 각막이식 정도는 당연히 해야 할 사항이 아닌가 생각된다.


*환경

  또하나 심각한 생명파괴 현실은 환경문제이다. 지금도 도처에서 땅과 물과 공기가 총체적으로 오염되고 있으며 그 속에서 무수한 생명들이 죽어가고 있다. 이러한 심각한 환경파괴는 조만간에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고 지구의 존립자체가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에 대해 연구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이 불살생과 관련된 또 하나 해야 할 일이다.

  환경오염으로 인한 장기적 피해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겠지만 보다 직접적인 영향으로만 현재 수백만명이 죽어가고 있다. 유엔 환경 계획(UNEP)의 한 보고서에 따르면 전세계 수백만명이 환경요인 탓으로 숨지고 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세계 곳곳에서 이상기후 현상으로 인한 피해가 속출하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이러한 심각한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사후 처리의 문제가 아니라 문명에 대한 사고의 전환이 요구되고 있다는 주장이 설들력을 갖는다. 즉, 자연에 대하여 인간은 지배자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은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하나의 생명체, 유기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며, 개발과 발전이라는 물질적 풍요 대신에 소욕지족과 정신적 만족을 행복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운동이 실질적인 환경운동과 결합되어야만 전지구적인 환경파괴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일에 불교가 가장 적합한 사상과 전통을 가지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불교인의 새로운 자각과 관심과 실천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하겠다.


*방생

  우리는 생존 자체가 다른 생명체의 생명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므로 완전한 불살생이란 불가능하다. 우리가 채식주의자라고 하더라도 식물을 죽이는 것이며, 물 한모금을 마셔도 그 안에 무수한 미생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 한 모금 마시고, 걸음 한 발자욱 내닫는 데서도 생명의 경외감을 가질 수 있다면 불살생계를 지키는 것이다.

  한편 이렇게 원천적으로 저질러지는 불살생계에 대한 대치법으로 방생이 있다. 방생이란 잡히어 죽을 목숨을 살려주는 것으로 죽어 가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몸을 바친 이야기는 경전에 무수히 나온다. 그리고 그 공덕에 대해 설한 경도 무수히 많다. 모든 생명을 자신의 생명과 같이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방생의 의미가 아닌가 싶다.


  ②불투도와 관련하여

  오늘날 우리나라는 각종부정부패가 사회전반에 걸쳐 펴져있으면서 이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이러한 부정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불교인이 앞장서야 할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사회적 기류에 영합하여 어쩔 수 없이 저지른 잘못이 있다면 이 자리에서 참회할 것이요, 다른 사람도 참회하게 할 것이며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자신이 처해져 있는 조건에 맞게 노력할 것이다.

  보살계에는 가축이나 노비나 생명있는 것을 사고 팔지 않으며 눈금을 속혀 이득을 보지 않는 것 등 불투도와 관련된 계목들이 있다. 이것은 건전한 기업행위에 관한 계율로 볼 수 있는데 나의 이익을 위해 누군가가 손해를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아야 한다. 우리나라가 현재 겪고 있는 경제적 어려움도 건전한 기업행위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 위에 나의 부가 축적된다면 이는 불투도를 어긴 것임과 동시에 불상생의 계를 어긴 것이다. 그의 소중한 생명을 뺏은 것이기 때문이다. 불투도의 실천법은 마음이 재물에 대한 탐욕으로부터 떠나는 것이고 적극적으로 보시를 베푸는 것이다. 보시의 공덕은 말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며, 보시란 재보시뿐만아니라 법보시와 무외시가 있으니 무엇으로나 자신이 가진 것은 널리 베풀어야 한다.


  ③불사음과 관련하여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점들이 있으며 그 중에서 청소년 문제는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그러나 문제 아동 뒤에는 문제 부모가 있다는 말도 있듯이 부모들이 건전한 가정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가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리라 생각된다. 한 가정이 바로 서면 이 사회가 바로 선다. 가정에서의 화합은 사랑과 이해가 근본이며 부부간의 정절이 필수적이다. 베트남 출신의 세계적인 평화운동가 틱낱한 스님은 ������살아계신 붓다 살아계신 그리스도������에서 다음과 같이 현대사회에서 불사음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 어린아이들, 부부들, 가족들이 성적 비행 때문에 파멸되고 있습니까? 이 셋째 계율을 실행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치유하고 우리사회를 치유하는 것입니다. 고독감은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우리는 성관계를 맺으면 덜 고독하게 되리라는 소박한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마음과 정신이 통하는 차원에서 맺어지지 않는 성관계는 서로 간의 사이를 더욱 넓혀 주고 양자에게 모두 해로운 것입니다. 우리는 이 계율을 어기는 데서 오는 심각한 문제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것을 심각하게 실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부부가 정절을 지키지 않으면, 질투와 분노와 절망이 어쩔 수 없이 뒤따라 오기 마련입니다. 자녀들이 자라면 그들도 이런 실수를 반복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이 계율을 범하는 것이 신문, 잡지, 텔레비전 쇼, 영화, 책  등에서 계속 권장되고 있는 형편입니다. 우리는 쉴새없이 성욕을 촉발하는 것들과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또 폭력을 주제로 하는 이야기와 맞물려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의 집단적 의식이 이렇게 폭력적인 성의 씨앗으로 가득한 현실에서, 어찌 어린이들에 대한 성적 학대, 강간, 기타 포악한 행동이 생기는 것을 놀라워할 수 있겠습니까.


  음란물이 범람하고 각종 성범죄가 판을 치는 사회에서 불사음은 자기만의 순결을 의미할 수 없다. 우리는 음란물의 홍수 속에서 간간히 눈요깃거리를 제공받을지 모르나 진실로 자기 자신이 피해자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이 부분만큼은 특히 적극적인 노력과 실천이 요구되는 사항이다.

  경전에서는 모든 여인은 어머니같이 누이같이 본다고 하였다. 생명을 존중하고 자비심을 가진 사람이 사음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인신매매, 미성년자 윤락행위, 매매춘, 불법 음란물의 범람, 각종 성범죄 등을 감시하고 예방하기 위한 노력과 그로 인해 상처받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치유하는 일이 필요하다. 가정의 행복과 건전한 사회, 그리고 청소년을 보호하고 인간을 존중하는 사회를 위해 이 계율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며, 이를 위한 보다 적극적인 사회적 실천활동이 필요한 때이다.


  ④불망어와 관련하여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불신풍조를 해결하는 방법은 진실한 말을 하는 것이다. 남을 속이지 않는 것, 진실을 말하는 것이 지켜진다면 우리사회의 많은 문제들 중 상당부분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계율은 개인과 개인간에 집단과 집단간에 나라와 나라 사이에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또한 과장하지 않고 두 말하지 않고 더러운 말하지 않는 것은 공동체의 화합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계율이다. 특히 언론의 힘이 유래 없이 강해진 지금, 공정보도는 진실을 향해 우리 사회가 한 걸음을 나아갈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또한, 우리는 거리에서 사소한 시비로 욕설과 폭력이 오가는 것을 종종 본다. 사랑스런 말, 위로와 힘이 되는 말이 어느 때 보다 절실한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불교인들은 다른 사람에 대해 무관심하며 친절하지 않은 경향이 있다. 친절한 말 한마디가 그 어떤 것보다 큰 힘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사섭법 중에 애어가 있는 것이다. 친절한 말, 사랑을 담은 말, 안온한 말은 이 사회의 어두운 곳을 비추는 불빛이 되고 갈증을 식혀주는 청정수가 될 것이다.

  한편 상대방의 말을 잘 듣는 것도 이 계를 지키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대충 자기 판단대로 짤라 듣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수다떠는 것는 것도 주의해야할 사항이다. 대화가 상호 이해와 화합을 증진시켜주는 것임에 반해 수다는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 자기의 말을 일방적으로 하는 것이다. 말은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전달하는 소중한 매개이다. 이 매개가 진정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진실한 말과 주의 깊게 듣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말을 이해와 사랑의 매개체로 적절히 사용하고 있는가. 그저 공허한 메아리를 울리고 있지는 않은가. 혹 상대방에게 독을 먹이고 있지는 않은가.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깊이 생각하여 생명을 살리는 말을 하여야 할 것이다. 이 계율이 지켜진다면 이 사회는 다툼이 없고 오해가 없고 비방이 없고 루머가 없고 화합과 사랑과 이해가 있는 평화로운 사회가 될 것이다.


  ⑤불음주와 관련하여

  불음주계는 우리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해치는 모든 것들을 배격하고 중독과 의존성에서 탈피하여 건강하고 자유로운 육체적, 정신적 상태를 유지하며 그런 환경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틱낱한 스님은 우리 몸은 단지 나 개인의 소유물이 될 수 없으므로 우리의 건강을 지키는 것은 우리 조상과 부모님, 그리고 후손을 위한 예의이자 당연한 의무라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자기들의 몸이 자기들의 것이고, 그래서 자기들의 몸을 가지고 자기가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마음대로 하도록 법률이 이를 뒷받침해 줍니다. 이것이 개인주의 현상들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것은 독립된 실체가 없다는 공의 이론이라든가, 무아의 교설이라든가, 어울려 있음(interbeing)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 몸은 우리만의 것일 수 없습니다. 우리 몸은 조상들, 부모님들, 후손들, 그리고 모든 생명체들의 것입니다. 생명체뿐만 아니라 나무나 구름 등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함께 어울려 우리의 몸이라는 것을 이루어 낸 것입니다.

  우리가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은 온 우주에, 우리들의 조상들에게 우리의 고마음을 표시하고, 우리 후손들을 배신하지 않는 최선의 길입니다. 우리가 이 계율을 지키는 것은 이처럼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건강하면 모두가 거기에서 유익을 얻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조그만 자아의 조개껍질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세상 도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세상 모든 사물에 상호 연관되어 있고,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가 온 인류와 우주에 관계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1)


*음주

  음주의 폐해에 관해서는 경전에서도 누차 강조하고 있지만 요즘 뉴스를 보면 음주로 인한 범죄 및 교통사고가 증가하고 있다는 보도를 접하게 된다.

  미국에서 일어나는 폭력범죄의 가장 큰 원인이 음주인 것으로 미법무부 통계국이 발표한 보고서에서 밝혀졌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96년 미국에서 일어난 7백 70만 건의 폭력범죄 가운데 37%가 술에 취하거나 술과 마약에 같이 취한 상태에서 일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음주폭력은 가까운 사이일수록 많아 배우자나 이혼한 배우자, 여자친구, 남자친구에 대한 폭력의 40%가 술을 마신 상대로부터 폭행을 당한 것으로 나타났고, 특히 배우자 폭력의 경우는 75%가 음주상태에서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보고서는 음주폭력으로 부상당한 경우 의료비가 평균 1천 5백달러에 달했고 연간 50만명이 음주폭력으로 4억달러이상의 금전적인 손실을 보았다고 밝혔다. 한편 96년 미국에서 음주운전으로 구속된 운전자는 1백 46만 7천 3백명에 달했다.2)

  미국의 폭력범죄의 가장 큰 원인이 음주라는 것이다. 불음주계가 왜 중요하며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려주는 내용이다. 또 다른 신문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음주 교통사고로 인한 연간 손실액이 6천 6백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보도했다.3)

  이러한 통계에 의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음주로 인한 가정 내에서의 폭력을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으며 만취하여 길에서 잠을 자거나 온갖 추태를 부리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또한  우리 나라 성인 남녀의 알콜 의존도는 37%, 외국의 10배 정도이다. 이는 광범위한 알콜중독자 예비군이 형성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알콜중독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가족구성원 모두에게 씻기 어려운 상처를 준다. 처음부터 알콜중독자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처럼 술 권하는 문화 자체가 다수의 알콜중독자를 만든다. 그래서 범망경에서는 술한잔 권한 죄로 5백세 동안 손 없는 과보를 받았다고 하였으니 한치도 틀림이 없는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 특히 남성이 술을 안하면 사회생활을 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어렵게 술을 끊은 사람도 도처에서 한잔의 유혹을 받게 된다. 그래서 알콜중독증은 영원히 고칠 수 없으며 오직 한잔도 마시지 않는 길 밖에 없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술 한잔이 주는 넉넉함과 부드러움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그로 인해 이사회가 많은 알콜중독자를 양산하고 가정파괴를 부추긴다면 단호히 거부해야 할 것이다. 이제 불교계에서는 “술 한잔 대신에 차 한잔”운동을 해야하지 않을까.


*마약

  불음주계는 음주뿐만 아니라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헤치며 타인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것들 즉, 중독성 물질과 문화 등 우리의 몸과 마음을 피폐하게 하고 사회적으로 악영향을 끼지는 모든 것들로부터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만취상태나 히로퐁·마약 등 환각상태에서 저질러진 끔찍한 사건들을 언론보도를 통해 접하곤 한다. 또한 노름으로 인한 가정파괴와 각종 범죄에 대해서도 흔히 들을 수 있다. 1997년 경찰청은 마약류사범 2,525명을 검거하여 1,729명을 구속조치하였고, 본드·부탄가스 등 유해환각물질 흡입사범은 5,426명을 검거하여 2546명을 구속조치하였다. 과거와 달리 이제 이러한 문제는 특수한 몇몇의 문제가 아닌 누구나 그 유혹에 빠져들 수 있을 만큼 만연된 사회에 살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마약사범에 대한 치료실적도 미미한 수준. 지난해 적발된 마약사범 6천9백47명 중에서 전문치료기관에서 보호치료를 받은 사람은 고작 43명에 지나지 않았다.4) 그 이유는 처벌을 두려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속과 처벌 보다는 예방과 홍보를 위한 노력에 더욱 힘써야 할 것이며, 매매에 관여하지 않은 단순중독자에 대해서는 처벌보다는 치료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담배

  담배는 그동안 기호식품으로 취급되었으나 그것이 개인의 건강에 치명적이고, 중독성이 매우 강하며 사회적으로 미치는 악영향이 심각하므로, 미국·프랑스 등에서는 이미 마약류로 분류하였으며, 대대적인 금연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흡연인구는 갈수록 늘어  한 사람이 연간 4천 1백 53개비의 담배를 피워 세계에서 가장 담배를 많이 피우는 나라가 되었다. 특히 여성과 청소년들의 흡연이 늘어나고 있어 더욱 안타깝게 한다.

  앞서도 말했듯이 우리의 몸은 우리 개인의 것이 아니다. 자신의 건강을 지키는 것은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하는 것임과 동시에 모든 존재들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다. 따라서 불음주계를 받아 지닐 것이며, 마약퇴치운동과 금주금연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쳐 나가 우리사회의 건강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또한 술, 마약, 담배 등 물질적 중독뿐만아니라 도박도 매우 심각한 중독증이다. 이외에도 특별히 사회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TV중독은 가족간의 대화의 장을 차단하고 건전한 의식활동의 장애하는 요소이다. 이와 비숫한 문화적 중독현상으로 성중독, 스포츠중독, 컴퓨터중독 등도 건강한 인간관계를 해치는 것들이다. 특히, 수행자에게는 자유롭고 걸림없는 삶을 살아가는데 장애가 되는 모든 중독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불음주계를 지키는 것이다.


 3)참회

  참회의 의미는 총설편에서 간략히 다루었으나 계율수행과의 관계에서 따로 다루고자 한다.


  모든 보살은 다른 이로부터 바르게 받음으로 말미암아 배울 바 계율에 대하여 만약 어기거나 범함이 있으면 곧 바깥으로 다른 이를 자세히 살피면서 깊이 부끄러움을 낸다. 착하고 계끗하게 하려는 뜻으로 배울 바 계율에 대하여 만약 어기거나 범함이 있으면 곧 안으로 자신을 돌이켜 보면서 깊이 부끄러움을 낸다. 모든 보살은 모든 배운 것에 대하여 범한 뒤에 도로 깨끗이 함과 깊이 공경하고 생각을 오로지하여 처음부터 어기거나 범함이 없는 이 두가지 인연으로 말미암이 모든 나쁜 것을 여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보살은 다른 이로부터 바르게 받음과 착하고 깨끗하게 하려는 뜻을 의지로 삼기 때문에 제 부끄러움과 남 부끄러움을 내며 제 부끄러움과 남 부끄러움으로 말미암아 받은 바 시라를 잘 막아 보호한다. 받은 바의 계율을 잘 막아 보호함으로 모든 나쁜 짓을 여의게 된다.<유가사지론>


  계율수행에서 참회가 빠지면 계율수행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계를 받기 전에 반드시 먼저 참회를 통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잘못의 뿌리를 끊고 새로운 각오로 다시 태어나야 계를 받을 수 있다. 또한 계율을 받은 후에 조금이라도 어긴 것이 있다면 바로 참회하고 다시금 계심을 유지해야 한다. 만일 참회하지 않는다면 그 잘못을 다시 고쳐지지 않을 것이며 결국은 계를 받은 의미가 사라지고 말 것이다. 뿐만아니라 어긴 계는 진정한 참회를 통해서만 사라질 수 있는데 참회하지 않는다면 죄는 더욱 불어나 결국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기약이 없게 될 것이다. 따라서 참회는 계율수행의 전 과정에서 항상 함께 해야 할 파트너이다. 그러면 계율수행을 하면서 참회가 어떻게 결합되는지 살펴보자.


  선남자여, 이 인연으로 만일 죄를 짓더라도 한 찰라 가운데도 덮어 감추지 못하거든 하물며 한낮 하룻밤이며 많은 시일일까보냐. 만일 범하였다가 깨끗함을 구하려거든 마음에 부끄러운 생각을 품고 오는 세상에 반드시 나쁜 과보 있음을 믿고 큰 무서운 생각을 내어서 마땅히 이렇게 참회하여라. 마치 사람에게 불이 붙어 머리가 타고 옷이 탈 적에 빨리 끄려고 서두르듯이, 불을 끄지 못하면 마음이 불안하니라. 사람이 범죄했을 때 또한 이렇게 해야 하며, 즉시 꼭 참회하여 빨리 죄를 멸해 없애버려라.<금광명최승왕경 멸업장품>


  참회는 자신의 잘못을 드러내어 뿌리를 뽑는 행위이다. 그런데 가능하면 잘못을 안 즉시 그 자리에서 참회해야 한다. 감추려하면 그 동안에 더욱 죄가 증장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율 수행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살피는 힘이다. 자기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한 언행이나, 순간적인 화(짜증) 등은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어렵다. 이런 경우 자신도 모르게 계율을 어기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을 투철하게 관찰하여 한 순간이라도 계를 파했을 때는 곧 스스로 참회하고, 상대방을 향해 잘못을 고백하거나 그렇지 못한 경우라면 부처님 앞에 나아가 자기 귀에 들릴 정도의 말로 잘못을 참회한다.

  어떤 수행이건 뜻이 바르지 않으면 삿된 길로 빠지기 쉽다. 이것을 지켜주는 것이 계율이다. 그리고 참회에 의해 계심이 유지된다. 따라서 계율을 받은 후에 추호라도 파계한 것이 있으면 곧 참회하여 계심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참회에 대한 구체적인 절차와 방법은 기도에서 살펴보자.

 

 4)포살과 자자


  참회는 개인적인 형태에서 국한되지 않고 집단적으로 행해지기도 한다. 집단적으로 행해지는 참회가 포살과 자자이다. 포살은 월 2회 바라제목차를 강설하는 의식이고 자자는 1년에 한 번 안거가 끝나는 날 대중들에게 자신의 잘못을 묻고 다른 사람이 지적해 주는 잘못을 인정하고 참회함으로써 화합과 청정의 승가공동체를 굳건히 유지하는 뛰어난 제도라 하겠다.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총림에서만 그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으니 아름다운 이 전통을 현대에 맞게 더욱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①포살

  앞에서 재일의 유래를 설명하면서 포살에 관하여 함께 언급했었다. 포살은 보름마다 이루어졌으며 이때에는 현전 승가에 속한 모든 출가인이 다 모인다. 포살은 먼저 함께 계법을 외우고 한 계목을 외울 때 마다 어긴 적이 있는 이는 스스로 대중 앞에서 참회하는 의식이다. 세 번을 거듭 물었을 때 모두 가만히 있으면 모인 대중이 그 계에 대하여 청청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포살의 목적은 정기적으로 계목을 낭송함으로써 계를 잊지 않고 계에 의지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포살은 너무 길지 않은 간격으로 정기적으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 포살이 재대로 되려면 상호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하며 대중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드러낼 수 있는 용기와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할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하며 타인의 잘못을 약점으로 삼지 않고 받아주는 사랑과 관용이 있어야 한다.


  ②자자(自恣)5)

  자자는 안거가 끝나는 날 자신의 허물을 대중에게 묻고 대중은 그를 위하여 그것을 말해주는 참회법으로 1년에 1번 있었던 제도이다. 그러나 자자는 매우 신중하게 다루어야 할 제도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잘못을 지적해 줄 때 분노나 서운함 없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고 또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할 때도 공격이나 비난이 아닌 애정과 관심을 바탕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자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겸손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허물을 물을 수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이 지적해 주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며, 지적하는 사람 또한 나와 너의 대립감없이 바로 자신에게 말하듯이 자비의 마음으로 잘못을 일깨워 주어야 한다. 이는 상호 신뢰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제도이다.


  장로께서는 억념하소서. 오늘은 스님들이 자자하시는 날이니, 저 아무개 비구가 장로 및 스님들께 자자하여 말씀드리오니, 만약 저에게 허물이 있어 스님들께서 목격하셨거나, 이를 들으셨거나, 의심품은 죄가 있다면 저에게 말씀하여 주십시오.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만약 스님들께서 목격하신 죄가 저에게 있다면 반드시 법답게 이를 다스려 주십시오......

  이같은 순서대로 모든 스님들이 자자를 하여 마침내 모든 스님들이 자자를 마치고, 또 스님들을 대신하여 자자인의 소임을 맡은 비구도 함께 자자를 작지하여 드디어 자자를 마쳤다면, 반드시 상좌비구의 앞에가서 ‘스님들이 일심으로 자자를 작지하여 마쳤습니다’라고 창어하여라.<십송률>

      

  포살과 자자는 상호신뢰와 공동체생활이라는 기반위에서 이루어진 제도이므로 출가수행자들만 하던 참회법으로 포살일에는 재가자도 승원에서 함께 수행할 수 있었다는 정도이다. 그러나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생활하고 있는 재가자들은 정기적으로 자신의 생활을 점검할 필요가 있으며, 수행이 출가만의 전유물일 수는 없으므로 제적사찰 신도회를 바탕으로 재가자들의 수행공동체를 더욱 강화시켜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수행공동체의 바탕 위에서 포살과 자자를 수행방편으로 재창조해야 할 것이다.


 5)계율수행시 유의할 점


  ①타협하지 말라

  계율은 적당히 타협하거나 양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죄의 허물은 큰 것이니 목숨 걸고 지켜야 한다. 삿된 것과는 결코 타협하지 않아야 한다. 사소한 것이라 가벼히 여긴다면 그 결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계심을 잃게 되어 결국은 수행을 파하게 된다. 계율은 나침반과 같고 안내자와 같다고 했는데 이것이 흔들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선남자여 어떤 사람이 구명부대를 몸에 달고 바다를 건너려할 때 바닷속에 있던 나찰이 이 사람에게 구명부대를 달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듣고 생각하기를 ‘이것을 주면 나는 반드시 물에 빠져 죽을 것이다.’하고 대답하였다. “네가 차라리 나를 죽일 지언정 구명부대는 줄 수 없다”하였더니 나찰이 또 말하기를 “그대가 만일 전부를 줄 수 없거든 반이라도 갈라 달라”한다. 그 사람이 그래도 주지 않으려 하였다. 나찰은 또 “그대가 반도 줄 수 없거든 3분의 1이라도 달라”하였으나 그래도 주지 않았다. 나찰은 또 “그것도 할 수 없으면 손바닥만큼 달라”하나 그것도 주지 않았다. 나찰은 다시 말한다. “그대가 만일 손바닥 만큼도 줄 수 없으면 내가 배가 고프고 고통이 심하니 티끌만큼이라도 달라”하였다. 그 사람은 또 이렇게 말하였다. “지금 네가 달라는 것은 얼마 되니는 않는다마는 내가 지금 바다를 건너가려 하는데 앞길이 얼마나 먼지 모르는 터에 조금이라도 네게 준다면 거기에서 기운이 점점 새어나올 것이니 드넓은 바다를 어떻게 건너가며 물에 뻐져 죽는 일을 면할 수 있겠느냐”하였다.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이 계율을 수호하고 지니는 것도 그와 같아서 바다를 건너가는 사람이 구명부대를 사랑하고 아끼는 것과 같느느라. <대열반경 11권 성행품>


  열반경의 비유는 계율수행자가 가져야할 태도를 잘 표현해 준다. 바다에서 배에 물이 샌다면 그것이 아무리 작은 구멍이라 하더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결국 그 배는 침몰하고 말 것이다. 계율도 이와같다. 계율을 어기고도 자기 편리할 때로 합리화시키며 이것은 사소한 것이니까 괜찮을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면 이는 계의 뿌리를 파괴하는 것이요, 결국은 전부를 잃게 될 것이다. 따라서 결코 계율수행에 있어서 적당한 타협은 없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②지범개차를 배우라

  계를 지킬 때는 열반경의 구명부대의 비유처럼 목숨같이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 그러나 지키는 것만 알고 파하는 것을 모르면 또한 계에 얽메임을 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때에는 더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어떤 것에 의하여 계를 파해야만 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을 잘 알아서 열고 막는 법을 행하는 것이 지범개차이다. 쉬운 예로 도망 온 사슴을 감춰 주고 사냥군에게 어디로 갔는지 못보았다고 거짓말을 하는 경우 그 나무꾼은 복을 받는 것처럼 계율수행에서도 지켜야할 때와 어겨야 할 때가 있다는 말이다.

  불교의 핵심사상은 중도에 있다. 어느 것이나 한 쪽에 치우치면 불교 수행이 아니다. 계율 수행도 마찬가지이다. 문자에 치우쳐 근본 뜻을 잃는다면 바른 수행이라 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계율 수행에서 지범개차라고 하는 불교 특유의 실천법이 나오는 것이다. 즉 문자에 얽메이지 말고 계의 정신을 바로 세우고 자유롭게 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이 자의적으로 빠질 때에는 자칫 방종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분명한 원칙이 필요한데 <보살선계경>에서는 보리심이 기준이 됨을 밝히고 있다.


  두가지 인연이 있으면 보살계를 잃게 되나니, 첫째는 보리에서 물러나는 것이고, 둘째는 상악심을 갖는 것이다.


  계율수행은 삿된 것을 버리고 근원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인데 이것을 재대로 분별하여 실천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기준을 명확히 해야 하는데 첫째는 보리심에서 물러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항상 나쁜 마음을 갖는 것이다. 계율수행자가 항상 나쁜 마음을 가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보리심에서 물러나지만 않으면 보살계를 잃지 않는다. 마음이 잘 따르고(행동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하나되어 행함) 지혜로써 분별해야(어떻게 하는 것이 삿됨을 버리고 근본으로 돌아가는 길인지, 어떤 것이 진정한 이타인지 등을 잘 알아서 계를 지킴) 계율수행을 바르게 해나갈 수 있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계를 열고 막음에 걸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즉, 언제나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는 근본 뜻에 비추어 현실의 상황에 즉해서 그것을 구현하는 것이 계율 수행의 바른 태도이다.


  ③타인과 비교하지 말라

  계율수행을 하면서 가장 유의해야 할 것은 나는 계를 지킨다는 상을 가지고 교만한 마음을 내어 계를 지키지 않는 사람을 미워하고 업신여기는 것이다. 이는 공동체의 화합을 깨치며 자비심을 없앰으로 오히려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의 상이 본래 없으며 나와 내 것이 없으므로 계를 지켰다거나 어겼다고 할 만한 정해진 모양이 없는 것이니 겉모양을 가지고 시비를 논할 일이 아닌 것이다. 계율 수행을 할 때에는 오직 자신을 관찰하고 한치도 어긋남이 없게 하는 데 힘쓸 것이지 다른 사람을 보고 시비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집에 있는 보살이 계율을 깨뜨린 비구를 보면 성을 내거나 업신여겨서는 안되고 가엾이 여기며 이롭게 하려는 마음을 내면서 이런 생각을 해야 한다

‘애닯구나, 사람 몸은 얻기 어려워서 큰 바다 가운데서 어느 애꾸눈인 거북의 머리가 판자 구멍으로 들어간 것과 같으며, 인간 안에 살고 있음은 이보다 갑절이나 더 어렵다. 이미 부처님의 법을 들었는지라 모든 악을 없앨 수 있고 모든 괴로움을 건지며 바른 지혜에 이르게 되어 살림의 온갖 크고 작은 것들을 버리고 영원히 친척을 끊어 사모한 바가 없으며 부처님의 말씀을 믿은 까닭에 집을 떠날 수 있었으리라. 언제나 계율 깨뜨린 죄를 듣는데 스스로를 천하게 하고 지혜로운 이의 꾸지람을 받으며 악한 이름이 널리 퍼져서 항상 의심과 뉘우침을 품게 되고 죽으면 나쁜 길에 떨러지리라. 이런 일을 듣게 되면서도 오히려 계율을 깨뜨리는구나. 열가지 선한 도를 행해야 비로소 사람 몸을 얻는 것인데 법답게 잘 쓰고 자신을 이롭게 할 수 없으니 애닯구나’

  만약 도무지 성내거나 업신여기는 마음을 여읠 수 없다면 스스로 생각하라. 경전 중에서 말씀한 것과 같이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약 사람이 다른 이를 헤아리면 곧 자신의 몸을 상하는 것이요, 오직 자기만은 헤아릴 수가 있고 중생이 나와 평등하면 역시 헤아릴 수 있다고 한다. <십주비바사론 입사품>


  지혜가 부처님의 지혜와 같지 않고 중생에 대해 동체대비심을 가질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해 평가하거나 판단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 어떤 시비를 논한다면 그것은 어느 한 부분만을 보고 했거나 자신의 편견이 개입된 것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에 대해 거슬리는 부분이 생기거든 먼저 자신의 내면을 살펴 자신이 만들어낸 인상이 아닌지 잘 봐야 할 것이다.

 

 

 

 

 

    함께 가는 길
    인생길 가노라면 누구나 힘이 들고 지칠 때가 있습니다. 그 힘든 길 동반자가 있다면 조금은 위안이 되겠지요 그대 위해 동행하며 말벗 되는 친구가 되어줄께요 잠시 쉬었다가 힘내어 갈 수 있도록 내 어깨를 내어 주겠습니다.
    때로는 인생의 여정이 험난하여 포기하고 싶어질 때 손 내밀어 잡아주는 따뜻한 가슴으로 다가가 동반자가 되어주겠습니다. 그대 위해 무거운 짐 다 짊어지고 가더라도 함께라면 웃음 머금고 불평하지 않는 걸음으로 그 길을 동행하는 인생길 묵묵히 가겠습니다.
    서로 바라보고 웃을 수 있는 마음 있다면 비바람 불고 눈보라가 몰아쳐도 그대와 함께하는 길이라면 거뜬히 헤쳐나갈 것입니다. 그것 만으로도 참 좋은 동행이지 않습니까. 가끔 어두운 벼랑으로 떨어진다 해도 그것이 우리의 길이라면 다시 오를 수 있도록 주저함 없이 내등을 내어드리겠습니다.
    같이 웃고 우는 인생길입니다. 서로를 아끼는 마음으로 뜨거운 눈물 한 방울 흘릴 수 있는 따뜻한 가슴 하나 간직하면 그삶이 행복한 삶이지 않습니까. 서로가 서로를 감싸 안는 사랑하나 있으면 함께가는 인생길, 서러운 것도 힘든 것도 헤쳐나가지 않겠습니까.
    우리 그길을 함께 할 수 있으면 크나큰 행복이요 좋은 인연 아닐런지요. 마지막 죽음의 다리 건널 때 당신과 함께했던 길 당신이 있어 행복했다는 말한마디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 좋은 글 中에서 -

                좋아서 좋은 사람 / 오광수 

                 

                커피 한 잔을 나누어도

                그냥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눈빛은 따뜻한 커피와 같아서

                함께하면 햇살이 가득 모인 창가에 앉아 있는 것 같고

                커피잔을 든 두 손을 통해서는

                그 사람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화만 가볍게 주고받아도

                그냥 좋은 기억으로 남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말 속에는 진솔함이 담긴 예의가 있어

                통화하는 시간에는 나로 하여금 귀한 사람이 되게 하고

                조용하고 또렷한 음성을 통해서는

                그 사람도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에 댓글만 봐도

                그냥 반갑고 고마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글 속에는 힘을 주는 진지한 관심이 있어

                마냥 부끄러웠다가 깨닫게 하기도 해서 그저 고맙고

                짧은 글이지만 그 글을 통해서는

                그 사람같이 또 다른 나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네 사는 생활 속에

                그냥 좋아서 좋은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따스한 눈길 한 번이 서로에게 힘이 되고

                예의 바른말 한 마디가 서로에게 귀함이 되며

                짧은 글이지만 그 댓글로 더 정겨운 나눔이 많아진다면

                얼마나 좋은 세상이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