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가 인도에서 왜 사라졌는가?

2010. 4. 30. 20:5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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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인도에서 왜 사라졌는가?

 

 

-불교의 소멸과 자이나(Jaina)교의 생존- 김경철-델리대 불교학과 박사과정
(참고원전: 불교 역사연구(Studdies in History od Buddhism by A.K.Narain),The Decline of Buddhism in India by R.C. Mitra))

 

수수께끼 같은 인도역사에 있어서 가장 풀기 힘든 수수께끼 중의 하나는 7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불교가 인도에서 사라졌다는 문제이다.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많은 이론들이 제시되었는데 R.C Mitra는 ‘The Decline of Buddhism in India’에서 불교가 인도에서 사라진 원인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1. 수명이 다하여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2. 왕권의 후원이 없어졌다.(Ashoka 왕조의 쇠퇴와 운명을 같이했다)
3. 바라문교의 박해
4. 무슬림(이슬람)의 침입
5. 불교내부의 부정부패
6. 불교의 분파주의로 인한 분열
7. 불교교단에서 재가 신도들의 소외.

 

첫번째 원인은 에드워드 콘즈와 같은 몇몇 불교학자에 의해 제시된 이론이지만, 단순히 불교가 자연사 하였다는 논리는 재고의 가치가 별로 없다. 나머지 원인들은 불교의 운명에 대한 상황설명이나, 사건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검토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이론들이다. 그렇지만 이 원인들 중 어느 한가지 혹은 모든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인도 땅에서 불교가 사라졌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위에서 제시된 원인들과 상황들은 불교와 여러 면에서 아주 유사한 자이나교에도 똑같이 작용되었지만, 자이나교는 사라지지않고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가 사라진 원인들이라고 제기된 이론들은 논리성을 잃고 만다. “ 어떻게 갠지즈 강 유역에 Sramana전통에 근거를 둔 자이나교는 살아 남았는데 그것과 유사한 불교는 사라졌는가?” 라는 질문을 통해서 불교가 인도 땅에서 사라지게 된 원인을 살펴보겠다.

 

<참고 : 인도의 종교분포, 언어 분표 >
힌두교(82.8%), 이슬람(회교: 11.7%), 기독교(2.3%), 시크교(2.0%),자이나교(0.4%),
기타(0.8%)

 

힌디(38.7%),텔루구(8.2%),벵갈(7.5%),마라티(7.2%),타밀(7%),우르두(5.1%),
구자라티(4.5%) 말라얄람(3.8%),칸나다(3.8%),오리야(3.4%),펀잡(2.9%),아쌈(1.6%),
마니푸르(1%),콘카니어(1%),네팔(1%),카시미르(0.5%),신디(0.3%),산스크리트(0.1%)


먼저 불교와 자이나교가 비교 대상이 될 만큼 서로 비슷한지를 살펴보자. 두 종교 전통의 스승인 붓다와 마하비라는 둘 다 황족은 아니지만 갠지즈강 유역의 작은 부족왕국의 왕족 출신이다. 둘 다 인생의 황금기에 가정을 떠나 당시 쉬라마나(Sramana) 수행자 들에게는 일반적이었던 금욕과 고행을 수년동안 했고,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선언한 역사상 유일한 인물들이다. 깨달음을 얻은 후, 이 둘은 모두 재가 추종자와 출가 추종자로 구성된 샹가(Shanga공동체)를 만들었으며, 이 새로 만들어진 공동체들은 각각 많은 수의 바라문 계급과 부유층 자제들을 끌어들였다. 마지막으로 이 둘은 대체로 같은 지역을 돌면서 약30년 동안 가르침을 폈고. 마침내 니르바나(열반)에 들었다.

 

크샤트리아 계급 출신의 두 명의 성직자들로부터 시작된 두 종교는 발전과정도 비슷하다. 이새로운 두 종교는 왕권의 후원을 받은 것이나, 방대한 철학적 문헌을 남긴 것이나, 베다의 전통을 반대하는 가르침이라는 비판을 받은 것도 유사하다. 그리고 힌두교의 믿음과 관습이 일반화된 사회에서 자신들의 가르침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던 것도 비슷하다. 불교와 자이나교는 교리의 차이 때문에 가끔 충돌하기도 하지만, 두 종교의 전통이 처했던 비슷한 역사적인 상황을 볼 때, 두 종교는 유사한 종교로 볼 수 있다.

 

왕권의 후원 문제를 살펴보자. 인도의 왕들은 전통적으로 모든 종교를 지원하는 관습을 따랐는데, 왕권의 후원을 받은 종파들은 교세가 확장되었다.왕권의 후원은 일반 대중들을 끌여 들였을 뿐 아니라, 실질적인 물질적인 이익도 가져다 주었다. 붓다와 마하비라는 그들의 활동 초창기부터 마가다왕국의 Srenika왕, 부친을 밀어내고 왕이 된 Ajatasatu의 아낌없는 후원을 받았다. 아자사타사투의 후계자인 Nanda(난다)왕은 자이나교의 추종자이고, 마가다 왕국의 후신인 마우리아 왕조의 찬드라굽다(Chandra Gupta)왕은 자이나교로 개종하였는데, 자이나교는 찬드라 굽타왕이 말년에 자이나교의 승려로 출가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찬드라굽다(Chandra Gupta)왕의 손자인 Ashoka(아쇼카)왕은 불교의 후원자로 잘 알려져 있다. 아쇼카왕의 열성적인 포교로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파되었으며,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불교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마우리아 왕조를 무너뜨리고 일어난 친(親) 바라문 성향의 Sunga왕조의 흥기는 마가다지역에서 비(非)베다 전통의 종파들의 전성기가 끝난 것을 의미하였다. 자이나교의 경우, 초기에는 Saurashtra에 있는 Valabhi와 Girnar로, 후기에는 남인도의 Karnataka(지금의 벵갈로르가 위치한 주)지역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불교도들은 고향을 떠나 자신들에게 호의적인 서쪽의 마투라지역으로 이주하여서 인도스키타이계인 카시니카왕으로부터 많은 후원을 받았다. 자이나교가 친 쉬리마나 전통이 강한 남인도로 이동하는 동안 많은 불교도들은 카시미르를 지나 중앙아시아(간다라 유적지)로 이동하였는데,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왕권의 후원은 불교와 자이나교의 형성에 도움을 준 가장 확실하고 효과적인 요소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불교가 소멸한 원인을 왕권의 후원이 사라졌다는 사실에만 찾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불교와 거의 같은 정도로 왕권의 후원에 의존했던 자이나교의 교단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몇몇 역사학자들은 비(非)베다 전통들에 바탕을 둔 두 종교에 대한 바라문교의 박해를 강조한다. 실제로 힌두 광신도들에 의한 개별적인 박해는 있었지만, 이 사건들이 실제로 이 종교 전통들을 무너뜨릴 만큼 효과적이지도 않았고 많지도 않았다. 힌두교도 들의 근본적인 교리인 아크만의 존재를 불교에서는 거부했던 반면, 마하비라의 자이나교는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자이나교가 불교에 비해 박해를 덜 받았다는 주장이 나올 만 하다. 하지만 바라문교의 반 자이나교 감정이 아크만 교리에 있어서는 불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했다고 하더라도, 자이나교가 바라문교의 동물 희생제를 극렬히 반대했기 때문에 불교에 비해서 바라문교의 박해를 덜 받았다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육식에 대해서 유연한 태도를 보였던 불교가 힌두교의 희생제에 대해서 자이나교 보다 덜 반대했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기 때문에, 두 종교가 바라문의 박해에 같은 정도로 고통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힌두교의 박해가 원인이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주1) 베다(veda)경전 - 시경(詩經)-Rig veda,성례전(聖禮典)-Yajur veda,
성가(聖歌)-Sama veda,주문(呪文)-Atharva veda등 네 종류가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경전은 시경이며 B.C2000-1000사이에
기록되었으며 범어로 1028편의 기도와 찬미의 시를 모은 것이다. 

주2) 바라문교의 개혁운동기에 태동한 두 종교 (B.C600-A.D1917)

 

(1)자이나교 : B.C557년경에 인도의 귀족출신 마하비라가 시작했는데,그의 개혁의
요점은“브라만 계급의 배타적 정신“”지나친 베다경 숭배“”무자비한 동물제사“
”우파니사드 철학의 일월론을 반대한 것 등이다. 여기서 “자이나교”가 창설되었다.


 

(2)불교:B.C548년경 석가모니에 의하여 시작되었으며, 세습적 계급제도, 제사장에게 공물드리고 구원을 얻으려는 것, 철학적 사색을 지나치게 중요시 하는것,의식주의,
알지 못할 고대어로 쓴 경전을 중시함등에 반대하였다. 여기서 불교가 출발되었다

 

12-3세기의 무슬림 침입과 관련된 경우는 쉽게 무시할 수 없다. 자이나교가 많이 퍼져있는 인도서부(구자라트 주)와 데칸고원 쪽은 지리적인 위치 덕분에 다행히 무슬림의 침입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반면, 날란다(세계최초의 종합대학, 부다가야에서 가까운 곳)와 같은 대규모 불교교단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는데, 날란다와 같은 불교학문의 센터가 파괴되었다는 것이 불교에 심각한 타격이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초기의 무슬림의 학살 행위가 끝난 다음 불교 공동체는 왜 불교를 재건하고 재정비 할 수 없었던가? 자이나교의 경우 무슬림 침입 후 구자라트와 라자스탄 지역의 많은 자이나교 사원들이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었지만, 그래도 자이나교는 살아 남아 있을 뿐 아니라, 자이나 교도는 상업과 이슬람 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주, 실제 이름에 Jain이 붙는 사람은 대부분 자이나교도이고, 상업인구 비중이 매우 높음)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외적인 이유에서 이슬람의 침입이 가장 치명적인 타격이었다고는 할 수 있지만, 불교공동체가 완전히 없어지기에는 충분한 원인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Shanga(샹가)내부의 부패라는 원인을 살펴보자. 가장 초기의 불교문헌에서 조차도 샹가내의 게으름과 부패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을 불교가 약화된 것의 중요한 원인으로 보는 것이 옳은 관점일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가 내부적으로 부패할 수도 있지만 내적으로 개혁을 하는 종교들은 이런 단계를 넘어 선다. 예를 들면, 자이나교의 사원에서 행해졌던 형식적이고 극단적인 의식행위와 사원의 행정 수도자들의 권력확장에 대한 일반 신도의 분개가 원인이 되어서 15세기에 한 사원주의 분파가 형성되게 되었는데, 비록 이 새로운 분파인 스타나카바시(Sthanakavasi)들이 추종자를 많이 얻지는 못했지만, 이 운동은 정통 자이나교에 경종을 울렸으며, 주류인 스베탐바라(Svetambara)공동체내에도 개혁을 불러 일으켰다. 종교 내부의 부패, 그자체만으로는 종말이 이어지지는 않는다.


개혁이 필요한 시기에 이 개혁을 수행할 능력이 불교에 없었던 것이 가장 뼈아픈 원인으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교리에 대한 의견차이로 19개 분파로 분리될 정도로 불교 내부에 만연해 있던 분파주의는 종종 불교 내부의 허약함을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하지만 불교의 분파주의는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해석의 차이 때문에 일어난 것이므로, 다양하게 분파들이 일어난 것은 영성적으로나 사상적으로 활발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으로 받아 들여져야 한다. 모든 불교분파들은 Pali 삼장의 권위를 인정하였고, 거의 동일한 계율을 가지고 있었으며, 각 분파들간의 교류도 왕성했다. 이러한 불교쪽의 상황과는 정반대로 자이나교는 주요분파가 2개뿐이었지만, 분리 초창기부터 서로가 소원한 관계였다.

 

디감바라 종파(裸依行派)는 스베탐바라파(白依행파)의 경전들의 유효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자신의 경전들을 새로 만들어 냈다. 따라서 종파분열에 의한 분파주의는 불교보다는 자이나교가 더 심하였다고 말하는 것이 공정할 것이다. 그러므로 분파주의가 불교의 쇠락을 가져온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주) 종종 봄이 되면 자이나교의 나의행파(裸依行派) 구루(Guru,스님)가 정말로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고 거리를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음. 그 뒤에는 신도들이
수십-수백명이 독경을 하면서 따라감

 

이제 미트라(R.C.Mitra)가 제시했던, 불교가 재가 신도들을 돌보는데 실패했다는 점에 대해 살펴보자. 불교 교단이 재가 신도들을 등한시 하는 경향은 불교의 가장 초기부터 나타났던 것으로 보이는데,‘불교도’라는 용어 자체가 가정을 떠나 출가하여 노란색 승복을 입은 탁발 수도자들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에는 재가 신도들을 위한 특별한 서원이나, 사회윤리규범, 제례의식 등이 없었던 반면, 자이나교에서는 성직자들이 항상 재가 신도들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재가 신도들에게 계율을 가르치는 적절한 경전들도 만들었다.


교단에서의 재가 신도들의 역할이나, 종교 신원 의식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불교 재가 신도들이 가장 약한 집단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불교 교단의 문제에서 재가 신도들의 역할이 제외됨으로써 4-5세기경부터 시작된 인도 전역을 휩쓴 박티운동(재가신도들이 참여하는 대중적 신앙운동)에 재가 신도들이 흡수되어 버렸다.

 

이러한 문제는 마하바르타(Mahabharata), Puranas, Jayadeva의 Gitagovinda에서 붓다를 비쉬누(힌두의 신)화신으로 묘사함으로써 더욱 복잡하게 되었다.

 

불교문헌에는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는 힌두신을 불교신화에 끌어 들이거나, 붓다를 화신으로 취급하는 것을 거부하는 시도를 보여주는 문헌은 단 한권도 없는데, 아마도 불교의 승려들은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것 같다. 붓다를 힌두신의 화신으로 묘사한 것을 그대로 묵과한 것은 심각한 문제였는데, 이는 불교에서 이런 흐름을 암묵적으로 용인하였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

 

주1) 비슈누신(힌두의 유지신)-시대에 따라 뱀,석가.예수,풀,보리수나무, 크리슈나로 화신하였다고 믿고 있다.


주2) 박티운동 – 신에 대한 헌신을 통하여 신과 인간의 신비적 합일을 추구하는 일종의 대중적 신앙운동. 카스트제도에 대한 배격뿐만 아니라 제도화되고 관념적인 종교의 형식을 벗어나 여성을 포함한 누구나 사랑 또는 헌신을 통해 신과 하나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종교 대중화에 크게 기여함.

 
중세시대(1200-1750),이 시대는 박티운동이 인도 전역에 확산된 시대이다.
이 박티운동은 기독교의 청교도 운동과도 같은 운동인데 비슈누,크리슈나,라마와
그 배우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났다. 개인적인 종교와,지방어로 찬양, 성직자
중심의 예배 무관심을 보였다.

 

반면, 자이나교의 경우는 힌두교가 자이나교의 마하비라를 비쉬누의 화신이라고 제시하자, 비쉬누의 화신들이 보여준 비도덕적인 행위를 비난하면서, 람과 크리쉬나를 자이나교의 법을 따르는 자이나교의 세속적인 영웅으로 묘사하는 완전히 새로운 버전의 라마야나와 마하바르타를 만들었다.

 

재가 신도들에 대한 세심한 관심이나, 박티운동을 포용한 점 등은 자이나교가 불교보다 재가 신도들과의 내적인 공존에 신경을 많이 썼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이다. 이러한 핵심적인 차이점 때문에 자이나교는 남아 있을 수 있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자이나교가 여전히 생명력을 이어갈 수 있었던 이유로 꼽히는 것 중에서, 불교의 흐름에는 있지만, 자이나교에서는 나타나지 않은 것인 마술적 제의식이 강한 탄드라가 있다. 타드라 불교의 기원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겠다. 7세기에서 12세기 인도에는 대승불교의 변형인 탄드라 불교(㈜밀교의 일종 : 性을 깨달음과 연결시켜 이해하는 상반된 인식을 갖고 있음)가 크게 유행하였는데, 힌두교 안에서도 탄드라 힌두교가 번성하였다.

 

힌두교의 종교문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사회에서 불교의 재가 신도들은 힌두문화를 따라 생활하였고, 여기에 탄드라라는 공동의 문화가 하나 더 생긴 것이다. 대승불교의 보살들은 탄드라불교에서는 신적인 능력을 가진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되었으며, 이 보살신들은 탄드라 불교의 만신전에서는 힌두 탄드라와 거의 동일한 신들을 숭배했다. 이러한 대승불교의 변형은 힌두교와는 구별되는 불교의 특징을 희석 시켜서, 힌두교와 불교의 융합을 더 가속화 시켰다. 반면 자이나교는 탄드라 버젼이 없다.

 

자이나교는 영적으로 가장 발달한 인간을 그 창시자로 삼고 있어서, 인간을 초월적인 존재로 둔갑시키는 시도를 한 적이 없다. 궁극적, 절대적인 어떠한 철학적인 명제도 받아들이지 않는 자이나교의 비절대주의(Anekanta)철학은 인도 사상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지만, 자이나교가 힌두교에 흡수되지 않고, 지금까지 그 전통을 이어 갈 수 있게 하는 힘이 되기도 했다.

 

이상입니다.

 


이논문의 결론으로 인도에서의 불교 교단이 재가 신도들과의 공감대 형성 및
합리적인 재가신도 관리가 없었다는 점을 가장 큰 원인으로 보고 있군요.
즉, 외부 원인보다는 내부에 이유가 있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출처 :한마음회慶佛  글쓴이 : 정안(80李志雲

 

 

한국불교가 어떻게 나가야 할지 윗글에 답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립다는 말은 하지 말자 

詩 배현순 같은 하늘 아래 비록 짧은 호흡일지라도 함께 숨쉬며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립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우연으로라도 가끔 한 번씩 만나지는 행운 얻은 것만으로도 그립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어느 밤하늘 저쯤의 귀퉁이 작은 별 하나 심어 놓고 하루하루 일상을 노래로 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립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생의 중심 깊은 내면의

각기 다른 삶의 형태로 발 담가 놓고 살아가는 운명이지만 서로에게 향한 애정만은 열정을 향하여 질주한다는 믿음만으로도 그립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잠시 멈추어 방향을 점검하라

 

  

 

  지혜로운 사람은 잠시 멈추어 생각 할 줄 안다.
빨리 달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방향이 잘못된 속도는 대단히 위험하다.
특히 돌이킬 수없을 정도의 속도라면 더욱 위험하다.
타이타닉호의 비극은 즉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속도를 내어 달렸다는 것이다
.

 


인간은 방향이 잘못 될 수록 더 빨리 달리는 경향이 있다.
콜로 메이는 "인간은 길을 잃었을 때
더 빨리 뛰어가는 유일한 동물"이라고 말했다.
그 이유는 내면의 불안 때문이다.

 

 

방향이 올바른 사람들은 조금 늦더라도 초초해 하지 않는다.
인생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마라톤이다.
최후에 웃는 자가 최후의 승리자다.
마라톤 경주에서 일등도 좋지만 완주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무조건 일등 하는 것보다 경기 법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사람이 일등을 할 수는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질서에 어긋나는 일이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자기가 선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주연이 될 수는 없다.
아름다운 조연이 무대를 더욱 빛나게 할 수 있다.

 

 

때로는 일상을 멈추고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라.
축구 경기의 하프 타임같이 전반 전 게임을 점검하고
후반전 게임을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잠시 멈추어 침묵을 통해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억력을 주신 것은
과거를 회상하며 교훈을 삼으라는 것이다.

 

 

자동차는 앞으로 나가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자동차에는 브레이크가 있다.
브레이크는 속도를 조절하고 방향을 바꾸기 위한 것이다.
방향을 바꾸기 위해서는 잠시 멈추어 서야 한다

 

 

새 천년은 속도를 중요하게 여기는 시대임에는 틀림없다.
단지 큰것이 작은 것을 이기는 시대는 지나갔다.
큰 것도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만다.

 


 

이제는 빠른 것이 모든 것을 이기는 시대가 되었다.
변화를 읽고, 변화를 이용하고, 변화를 주도해야
이 시대의 승리자가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속도에 민감해야 하고,
순발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속도에서 중요한 것은 올바른 방향이다.
 

 

우리가 얼마나 빨리 가고 있느냐보다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보다
우리가 누구인지가 더욱 중요하다.
성공을 위해 질주하는것을 잠시 멈추고
방향을 점검하라.
질주하는 것보다, 완주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생은 여행이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도 중요하다.
짧은 한 순간의 미소가 아니라
영원한 미소를 가슴에 품을 수 있어야 한다.
잠시 멈추어 서서 방향을 점검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