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실상 (서암스님)

2010. 5. 3. 20:5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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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의 실상 (서암스님)

      우리 인생이란 것이 백년인생 하나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무시無始이래로 영원히 흘러가는 생명체의 인생입니다.

      그렇게 흘러가는 이 세상 모든 생명체가 병이 나고 잘살고 못사는
      것은 전부 이 마음에 달린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모진 병이 들어 아무리 좋은 약을 먹는다고 해도
      환자의 마음에 그 약을 먹고 낫지 않을 것이라는 의심이 가득하면
      약효가 잘 안 납니다. 그런가 하면 약으로도 치료가 어렵다는 병에도
      한번 마음을 가다듬어 한 생각으로 낫는 이치도 있습니다.

      지옥 중생은 ‘하루 동안 만 번을 삶과 죽음을 거듭한다
      一日一夜 萬死萬生’고 합니다.
      그러면 만 번 죽고 만 번 사는데 무슨 약이 필요하겠는가 말입니다.
      다 제가 지은 업력으로 일일일야에 만사만생인 것이지요.

      우리가 이 세상에 나는 것도 전생의 업력으로 일어나고,
      내 몸에 병이 생기는 것도 업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업력에 끄달리는 마음을 바로 잡아서 이 병 일으킨
      업력만 고쳐 버리면 병이 낫는 것이 당연하지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라 해서 마음먹기 달렸다는 말이 이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비하고 오묘한 생명의 실상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기계처럼 보아 몸 어딘가에 조금만 이상이 있다고
      느껴도 병원에 쫓아가면서도 자신의 정신세계를 돌아 볼 줄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란 사실 모든 것에 작용되고 있습니다.
      화가 났을 때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둔한 사람일지라도 성을 낸 얼굴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성내는 얼굴을 보면 대번 압니다.

      그럼 무엇이 화를 낸 것입니까?
      빛도 모양도 냄새도 없는, 바로 이 마음에서 성이 난 것이지요.
      그런데 성을 내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고 입술이 벌벌 떨리게
      되는 것은 다 생각이 움직여서 그렇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움직여서
      이 몸에 그만한 파도를 일으켰다는 것이 증명이 되지요.

      가령 놀랬다고 합시다. 놀라면 눈이 동그래지고 눈썹이
      뻗뻗해 지지요. 그럼 놀라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이것이 얼마나 신기합니까?

      또 우리가 기뿐 생각을 하고 있어도 금방 표시가 나서
      상대방이 먼저 알아챕니다.
      “저 사람 무슨 좋은 일이 있는가 봐, 얼굴에 쓰여 있는 걸.”
      또 무슨 걱정이 있어 우수가 서려 있으면,
      “자네, 요새 근심이 있는 모양이지?” 하면서 곧 알아챕니다.

      이것이 모두 마음을 따라 일어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을 몸에
      塗獎치고 삽니다.
      그렇게 과거 다생에 걸쳐 착한 마음을 쓴 사람이라면 그 얼굴에
      유덕함이 보입니다.
      그래서 초면에도 인상이 좋음을 대번 느낄 수 있지요.
      반면에 악덕을 지은 사람은 독해 보이고 마주 대하기조차
      싫어집니다.
      전생에 닦은 것이 몸에 도장을 쳐서 그 모습이 현재에 나타나기
      때문이지요.
      이런 것을 보더라도 우리의 위대한 마음의 작용이 얼마나 큰가가
      증명이 되지 않습니까?

      중병에 걸려서 기도하는 도중에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아픈 곳을
      만지니 병이 다 나았다고 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그 관세음보살이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닙니다. 자기 속의 관세음보살이
      싹을 트고 나와 내 병을 고친 것이지, 어디 다른 바깥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 속에는 시방세계가 함축되어 있어요.

      우리는 흔히 명산대찰을 찾아가서 기도를 해야 도를 깨친다고
      생각들을 하는데 아주 모자라는 생각입니다. 태양빛이 어디나
      고루 비치듯 불심이 충분한 곳은 다 수행도량이 됩니다.
      부처님이 안 계신 곳이 어디 있는지 생각해 보세요.
      부처님이 어디 다른 성지에만 있다면 그 부처님을 어디다 쓰겠어요.
      이 세상에 부처님 안 계신 곳은 하나도 없어요.
      우리 마음이 어두워서 못 보고 못 찾을 뿐이지요.

      아무리 성지에 가 있더라도 마음이 그곳에 없이 떠다니면 그곳은
      시장바닥이요, 시장바닥에서도 마음을 가다듬으면 그곳이 바로
      청정한 도량이 되고 성지가 되는 겁니다.

      이러한 마음을 우리가 개척해서 쓰지 않고 사장시켜 버리고 있어요.
      이 법의 위대한 힘을 깨닫지 못하고 간직만 해 놓고 바깥으로 헤매어
      몇 푼어치 안 되는 데에 매여 쩔쩔매는 삶이 또한 중생들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만법이 전부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원리를 알면
      우리는 세상 천하의 갑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마음 하나를 잘 쓰자는 것이 참선수행의 목적이지요.
      우리 삶이 그 마음을 잘 쓰지를 못해 늘 불안하고 불쾌한 것이지요.
      이렇게 마음이 불안하고 불쾌하면 아무리 좋은 보약을 먹고
      좋은 환경에서 백년을 산다 해도 그 삶에는 사는 멋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리 영양가 있는 음식도 마음이 괴로울 때 먹으면 살로 안 가고
      오히려 독소로 변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 농사를 바로 지으면 설사 남이 세 끼 따뜻한
      밥을 먹을 때 내가 하루 한 끼 죽을 먹더라도 가족끼리 서로 웃고
      동조하며 원만하게 화합하여 사는 진리가 그 삶에서 나오는 겁니다.
      이 마음이 그렇게 위대한 것입니다.

      이렇듯 마음 따라 흘러가는 우리 인생에 있어서 행복의 기준은
      어디에 있을까요?
      김용사라는 절에 살던 어느 봉사 부부의 이야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어느 비 오는 날, 남자 봉사가 비를 피하여 들어 간곳에 마침
      여자 봉사도 들어오게 되어 그 인연으로 부부가 되었고 아들을
      낳았는데 다행히 아들은 눈동자가 둘이었어요.
      그래서 이들 가족이 거리를 다닐 때에 아버지는 어깨에 아이를
      얹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들고 있는 지팡이를 잡고 뒤에서 쫓아갑니다.
      아들은 위에서 “여기는 도랑이에요.”, “여기로 가세요.”, “저리로
      가세요.” 하며 부모의 눈이 되어 길을 갑니다.
      그런데 한 일본사람이 밥을 얻으러 온 이들을 보고서 아들 욕심을
      냈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주면 두 내외가 편안히 먹을 수 있는
      충분한 재산을 주겠다고 제의를 했어요.
      그러나 두 내외는 모두 고개를 내저으며 안 된다고 했지요.
      호의호식하며 잘 사는 것만이 복이 아니며, 비록 문전걸식을
      한다 해도 서로 도우며 화목하게 살고 이 아이 하나 키우는 데에
      행복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그럼 행복의 기준을 어디에다 둘 것이냐? 외부 조건이 좋다고 해서
      그 사람이 행복하게 산다고 할 수 없지요. 행복을 껍데기로 계산하려
      한다면 어리석은 일입니다. 아무리 신체가 불오나전하고 가난한 환경의
      조건 속에서도 그 삶을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있고, 껍데기는
      화려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 같아도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있어요.
      행복은 자기 마음 속에서 현존하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마음의 위대성을 찾을 수 있지 않겠어요?
      이런 생명의 실상을 잃어버리고 항상 바깥으로 물질계에서 헤매고
      살기 때문에 불행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마음으로 참 행복을 건설하라고 합니다.
      비록 금생에 좋은 조건에 있다 하더라도, 마음 하나 잘못 일으켜서
      금방 눈 한번 감아 버리면 지옥이나 육도중생계에 헤매게 되는
      이치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은 참다운 인생을 사는 길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이러한 이치를 우리가 24시간 반영하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가르침을 따라 위대한 생명의 실상을 살려서
      밤낮으로 정진하며 살아야 합니다.

      공부를 하면 어떠한 불행도 다 제거할 수 있어요.
      제일 좋은 방법을 참선입니다. 일념정좌로 앉아서 ‘이 뭣고?’하는
      그 자리에는 어떠한 생각도 침투해 오지 못합니다.
      어떻게 똑같은 위치에 똑같은 물건을 놓을 수 있겠습니까?
      어느 하나를 밀어내든가 포개어지지 않는 이상, 같은 위치에
      똑같은 물건을 놓을 수 있겠느냐는 말이지요.

      망상번뇌가 점령한 그 자리에는 공부의 힘이 들어가지 못하고,
      공부를 하고 있는 자리에는 망상번뇌가 침범하지 못해요.
      이치가 그럴 것 아니예요? 그 둘은 서로 대치를 합니다.
      공부를 안 하면 마구니가 점령하고 공부하면 마구니가 달아나
      버립니다. 그러니까 한 생각 돌이킨 데서 내 인생이 근본적으로
      달라진다는 것이 이 이론 아니겠어요?

      공부를 놓치면 그 사람은 이미 생명이 끊어진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왜 끊어지느냐 하면 지옥에 갈지 극락에 갈지 전혀 모르거든요.
      공부를 하고 있으면 그 사람의 생명은 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죽어도 그 정신 가지고 가게 되니 끊어짐이 없지요.

      처음에는 공부가 잘되지 않고 끊기지만 계속 노력을 한다면
      저절로 안 될래야 안 되어질 수 없습니다.
      이처럼 계속 노력하여 이러한 법이 천하에 퍼진다면
      모든 근심걱정 하나 없게 되어 그야말로 정토가 이룩됨을 알고
      모두 일념정진하시길 바랍니다.
      오늘이 가장 중요한 날
      나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지금 이 순간이 모여서 만들
      어진다
      그 한 순간에 집중하고 충실하지 않으면 
      나의 하루 한달 일년 그리고 삶 전체가
      충실함과는 거리가 멀어질 수 밖에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기웃거리느라
      오늘이라는 귀중한 시간을 허비할 때가 많다
      그리고 뒤늦게 깨닭고 허둥거릴 때는
      이미 인생의 반이 지나간 다음인 것을 어찌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