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5. 4. 20:36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제15장
위빠사나 수행과 알아차림의 확립[念處]
1. 위빠사나주해1) 수행주해2)
알아차림을 확립주해3)하는 ������염처경(念處經)������주해4)은 불교도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경전이다. 네 가지의 염처는 마치 탑으로 올라가는 네 곳의 계단과 같다. 어느 계단으로 올라가든 탑에 이를 수 있다.
위빠사나 수행의 네 가지 알아차릴 대상은 다음과 같다.
몸에 대한 알아차림[身念處. Kāyānupa-ssa-nā]주해5)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受念處. Vedanānupa-ssa-nā]주해6)
마음에 대한 알아차림[心念處. Cittānupassa-nā]주해7)
법에 대한 알아차림[法念處. Dhammānupassa-nā]주해8)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 만일 몸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신념처 수행을 하는 경우라도 나머지 세 가지의 알아차림을 제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들 네 가지 대상을 이렇게 구별하는 것은 한 대상을 좀 더 강조하거나 분명하게 주의를 기울여 알아차리는 것을 의미한다. ������염처경������의 각 장 끝에서 두 번째 단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일어나는 대상[法]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
사라지는 대상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대상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
위의 세 가지 요점이 위빠사나 수행의 중요한 핵심이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이들 세 가지 요점들을 확실하게 숙지하기 전까지는 단지 ‘알아차림’을 의미하는 염처(念處. Satipatthāna)에 불과할 뿐이며, 단지 이런 알아차림만으로는 위빠사나의 좀 더 높은 단계로 발전할 수 없다. 많은 수행자들이 훌륭한 의도를 가지고 진지한 노력을 하고도 알아차림이나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는 집중의 상태에 머물러 헤매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일정 단계인 집중을 이루는 데까지는 분명히 이러한 마음의 상태가 필요하다.
������염처경������ 각 장의 마지막 단락에는 염처에 따라 다음과 같이 동일한 구절이 있다.
“몸에 대하여 몸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주해9)
이는 수행자가 몸의 호흡을 알아차릴 때 들숨 날숨에 대한 알아차림을 확립한다는 의미이다.
또 이런 구절도 있다.
“더 높은 지혜와 알아차림을 위해 필요한 정도까지 알아차림이 확립된다. 이제 그는 갈망과 그릇된 견해에 의하여 어떤 것에 의존하지 않고 지낸다.”
이는 수행자가 통찰력을 점차 계발시켰다는 의미이다. 수행자는 이 시점에서 위빠사나의 단계에 도달한다. 그리하여 그는 몸[身], 느낌[受], 마음[心]과 마음의 대상[法]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또 ‘나는 수행한다’ 혹은 ‘수행하는 것은 나다, 내 집중력은 매우 좋다, 날숨과 들숨에 대한 알아차림이 매우 만족스럽다’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집착의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의 세상에서 그는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제 수행자는 더 이상 몸, 느낌, 지각과 행 그리고 의식에 대해서 ‘나’, ‘나의 몸’, ‘나의 느낌’ 또는 ‘나의 마음’이라고 집착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 대하여 몸을 알아차리며 지낸다.” 이것이야말로 수행자가 몸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는 신념처 수행을 하는 바른 길이다.
오늘날의 위빠사나 수행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면 대부분의 수행자들이 위빠사나 수행을 완성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절반에도 이르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염처경������의 가장 중요한 핵심인 “일어나고 사라지는 대상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알아차림의 확립[念處]
대장로 모곡 사야도께서는 알아차림의 확립[念處]을 다음 세 가지 단계로 나누었다.
(1) 알아차림의 확립 : 알아차릴 대상에 마음을 보내 알아차림을 실행함
(2)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수행 : 대상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아차림
(3) 알아차림의 확립으로 이끄는 길 : 일어남과 사라짐이라는 업의 형성[行]을 소멸로 이끄는 길
위의 세 가지를 보다 명료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어떤 일어난 대상, 예를 들면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이나 몸과 마음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것에 마음을 집중하여 고정시키는 것을 알아차림의 확립이라고 한다.
(2) 몸, 느낌, 마음, 법이 일어났다가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일어나고 사라지는 법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림)을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수행이라고 한다. 알아차림과 함께 알아차림을 지속시키는 것이 수행이다.
(3) 조건 지어진 현상에 대한 지혜, 즉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혐오스럽다고 아는 것이 알아차림의 확립으로 이끄는 길이다. 이 길은 일어남과 사라짐이라는 업의 형성[行]을 소멸로 이끄는 길이다.
빨리어 아누사띠(Anussati)는 기억, 알아차림을 말하는 것으로 사마타로 분류되는 반면, 아누빠사나(Anupassanā)는 알아차림, 지속적으로 알아차려서 통찰하는 수관(隨觀)으로 위빠사나로 분류된다. 이와 같은 통찰을 통하여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무상, 고, 무아로 아는 지혜가 없으면 결코 위빠사나에 이를 수 없다.
붓다께서 전법 수행자인 수시마(Susima)에게 말씀하셨다.
“수시마여, 도과를 성취하는 것은 집중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위빠사나의 지혜로 인하여 도과를 성취하는 것이다. 위빠사나만이 열매를 맺을 수 있고, 바람직한 결과를 이룰 수 있으며, 오로지 이를 통해서만 도과를 성취할 수 있다.”
붓다께서 계속하여 말씀하셨다.
“실로 수시마여, 진리 안에 머무는 지혜[法住智]주해10)가 먼저이고 이후에 열반에 대한 지혜가 있다.”
이 말은 “실로 수시마여, 있는 그대로를 아는 지혜[如實智見. 항상 일어났다 사라지고 있는 우리 존재의 실재에 대한 통찰 지혜]가 먼저 오고 다음으로 열반에 대한 지혜가 뒤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자면 수행자는 꿰뚫는 통찰력으로 처음에는 일어남과 사라짐의 현상이 바로 고통일 뿐이라는 사실을 먼저 깨닫고, 그다음으로 조건 지어진 현상[有爲法]주해11)은 불쾌하며 혐오스럽고 전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붓다께서는 두 단계의 통찰을 거쳐 마지막 단계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명백히 가르치셨다. 한편 ������초전법륜경������에서는 세 단계의 지혜, 즉 진리의 지혜(Sacca-Ñāṇa), 실행의 지혜(Kicca-Ñāṇa), 수행의 지혜(Kata-Ñāṇa)를 통해 이를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셨다.
그러므로 길고 지루한 길을 따라가지 말고 붓다께서 가르치신 지름길로 가고자 노력할 것을 초보 수행자에게 권하는 바이다.
<주해 1> 위빠사나(Vipassanā) : 빨리어 위빠사나(Vipassanā)는 위(vi)와 빠사나(passanā)의 합성어이다. 위(vi)는 접두사로 분리, 다르다, 구별 등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빠사나(passanā)는 주시, 수관(隨觀), 지속적인 알아차림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위빠사나는 대상을 분리해서 알아차리는 수행이며, 올바른 직관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렇게 분리해서 알아차리면 존재하는 것들의 속성인 무상․고․무아의 법을 통찰하게 된다.
위빠사나는 붓다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수행방법이다. 붓다가 출현하기 이전에는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고 고유한 특성이 없는 관념을 대상으로 하는 사마타(samatha) 수행밖에 없었다. 그러나 붓다께서는 자신의 몸과 마음의 고유한 특성을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으셨다. 사마타는 멈춤을 뜻하는 지(止) 수행이며, 위빠사나는 직관을 하는 관(觀) 수행이다. 사마타 수행의 집중은 근본 집중을 하며, 위빠사나 수행의 집중은 찰나 집중을 한다.
<주해 2> 수행(修行. Bhāvanā) : 빨리어 바와나(Bhāvanā)는 수행, 명상, 마음의 계발이라는 뜻이다. 선하다는 것은 세 가지를 말하는데, 첫째, 관용이 있어야 하고, 둘째, 지계로 계율을 지켜야 하고, 셋째, 수행을 해야 한다. 이상 세 가지 조건을 성숙시켜야 선하다고 말할 수 있다. 선한 것의 조건인 수행은 크게 나누어서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이 있다. 수행방법에 따라 먼저 사마타 수행을 한 뒤에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방법과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을 병행하는 방법이 있으며, 처음부터 위빠사나 수행으로 시작할 수도 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위빠사나 수행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주해 3> 알아차림의 확립[念處. Satipaṭṭhāna] : 빨리어 사띠빠타나(Satipaṭṭhāna)는 사띠(sati)와 빠타나(paṭṭhāna)의 합성어이다. 사띠는 기억, 알아차림을 뜻하며 빠타나는 현존하는, 인식하고 있는, 확립하는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띠빠타나는 ‘알아차림의 확립, 알아차림이 튼튼하게 머무는 것, 염처(念處) 등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붓다께서 알아차림의 확립만이 깨달음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선언하셨다.
<주해 4> ������염처경(念處經. Satipaṭṭhāna Sutta)������ :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수행과 수행 방법을 설하신 경전이다. 빨리어 경전에는 두 가지 ������염처경������이 있다.
첫째, ������맛지마니까야(Majjima Nīkāya)������의 열 번째 경에 사띠빠타나 수따(Satipaṭṭhāna Sutta)라는 ������염처경������이 있다.
둘째, ������디가니까야(Digha Nīkāya)������의 스물두 번째 경인 마하 사띠빠타나 수따(Mahā Satipaṭṭhāna Sutta)라는 ������대념처경(大念處經)������이 있다. ������대념처경������에서는 법념처(法念處)의 사성제(四聖諦)를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염처경������의 네 가지 알아차릴 대상은 신(身. 몸), 수(受. 느낌), 심(心. 마음), 법(法. 마음의 대상)이다. 이상 네 가지는 알아차림의 근본 대상으로서 사념처(四念處)라고 한다. ������대념처경������은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다양한 방법들이 제시되어 있다.
<주해 5> 신념처(身念處. Kāyānupassanā) : 빨리어 가야(kāya)는 신체, 몸이란 뜻이며 아누빠사나(anupassanā)는 알아차림, 지속적인 알아차림 또는 수관(隨觀)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알아차림을 말할 때는 반드시 지속적인 알아차림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빨리어 경전의 전편에서는 몸과 마음이라고 말하지 않고 정신과 물질이란 표현을 쓴다. 이것을 빨리어로 나마 루빠(nāma rūpa)라고 한다. 그러나 사념처(四念處) 수행에서는 몸, 신체라는 뜻의 가야(kāya)를 사용한다.
신념처의 여섯 가지 대상은 다음과 같다.
(1)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
(2) 몸의 자세에 대한 알아차림
(3) 분명한 앎을 지닌 알아차림
(4) 몸에 대해서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킴에 대한 알아차림
(5) 네 가지 물질의 요소에 대한 알아차림
(6) 묘지에서 시체의 아홉 가지에 대한 알아차림
<주해 6> 수념처(受念處. Vedanānupassanā) : 위빠사나 수행에서 차지하는 느낌의 비중은 매우 높다. 실제로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느낌으로 안다. 그러므로 느낌이 없으면 아는 것이 성립될 수 없다. 특히 위빠사나 수행은 관념이 아닌 몸과 마음의 실재하는 성품을 아는 것으로, 이것들이 모두 느낌이다.
수념처의 세 가지 대상은 다음과 같다.
(1) 맨 느낌 : 안․이․비․설․신․의에 대한 기본 느낌
(2) 육체적 느낌 : 좋은 느낌, 싫은 느낌
(3) 정신적 느낌 : 정신적으로 좋은 느낌, 정신적으로 싫은 느낌, 덤덤한 느낌
모곡 사야도께서는 위빠사나 수행자가 알아차려야 할 느낌을 열두 가지로 분류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제22장 수념처(受念處)에서 밝히기로 한다.
<주해 7> 심념처(心念處. Cittānupassanā) : ������염처경������에 있는 알아차릴 마음의 대상은 8가지를 쌍으로 한 16가지이다.
심념처의 16가지 대상은 다음과 같다.
(1) 탐욕이 있는 마음․탐욕이 없는 마음
(2) 성냄이 있는 마음․성냄이 없는 마음
(3)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어리석음이 없는 마음
(4) 위축된 마음․위축되지 않은 마음
(5) 커진 마음(선정 수행을 한 마음)․커지지 않은 마음
(6) 향상된 마음(색계․무색계 선정 수행을 한 마음)․향상되지 않는 마음
(7) 집중된 마음․집중이 안 된 마음
(8) 자유로워진 마음(해탈한 마음)․자유롭지 않은 마음
이상의 마음이 있을 때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심념처 수행이다. 이상은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에서 일어나는 모든 마음을 종합한 것이다.
모곡 사야도께서는 위빠사나 수행자가 알아차려야 할 마음을 열세 가지로 분류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제19장 심념처(心念處)에서 밝히기로 한다.
<주해 8> 법념처(法念處. Dhammānupassanā) : 법(法)은 마음이 알아차릴 대상을 말한다. 수행 중에 나타나는 육체적․정신적 현상이 모두 법이며 알아차릴 대상에 속한다. 특히 장애가 일어나는 것도 알아차릴 대상으로 법이라고 한다.
법념처의 다섯 가지 대상은 다음과 같다.
(1) 5가지 장애[五蓋] : 감각적 욕망, 악의, 해태와 혼침, 들뜸과 회한, 회의적 의심
(2) 오취온(五取蘊) : 색․수․상․행․식에 대한 집착
(3) 십이처(十二處) :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
(4) 칠각지(七覺支) : 알아차림. 법에 대한 탐구, 정진, 기쁨, 평온, 집중, 평등
(5) 사성제(四聖諦) : 고(苦)․집(集)․멸(滅)․도(道)
<주해 9> “몸에 대하여 몸을 알아차리며 지낸다”라는 구절은 ������대념처경������에서 각 염처의 마지막 단락에서 동일하게 반복되는 내용이다. 이 의미는 몸을 알아차릴 때는 오직 몸이 있다고 하는 알아차림을 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념처, 심념처, 법념처의 마지막 단락에서도 동일 내용이 반복된다.
“느낌에 대하여 느낌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
“마음에 대하여 마음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
“법에 대하여 법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
이상은 어떤 것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더라도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탐진치가 개입되지 않게 그냥 단순한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몸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게 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져 그냥 몸으로 보게 된다.
둘째, 몸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나의 몸’이라고 하는 유신견이 생기지 않는다.
셋째, 몸 이외의 것을 대상으로 하지 않아 집중력을 기르게 된다.
넷째, 몸의 움직임을 알아차릴 때 모든 움직임은 마음의 의도에 의해 움직인다는 원인과 결과를 알게 된다.
다섯째, 이렇게 알아차릴 때 대상을 어리석음 없이 알 수 있게 된다.
위 본문에 ‘지낸다’라는 단어는 빨리어 위하라띠(vihārāti)를 번역한 것이다. 위하라(vihārā)는 거처, 머무는 곳, 사원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알아차리며 머문다’라고 번역될 수도 있다.
몸을 알아차릴 때 몸의 대상은 여러 가지가 있다. 몸의 호흡, 자세, 분명한 앎 등등이 있는데, 주석서에 의하면 몸의 자세를 알아차릴 때는 지속시간에 따라서 세 가지 자세로 분류한다.
첫째, 오래 지속되는 자세는 가는 것, 서 있는 것, 앉아 있는 것, 누워 있는 것으로 행주좌와(行住坐臥)가 있다.
둘째, 중간으로 지속되는 자세는 앞으로 뒤로 가는 것, 앞으로 옆으로 바라보는 것, 구부리고 펴는 것이다.
셋째, 짧게 지속되는 자세는 걷고, 서고, 앉고, 잠들고, 깨어나고, 말하고, 침묵하는 것이다.
이상 몸을 알아차릴 때 어느 자세이거나 지속되는 시간에 따른 자세를 모두 알아차려야 한다. 말할 때도 말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침묵할 때도 침묵하는 것을 알아차린다.
<주해 10> 진리 안에 머무는 지혜[法住智. Dhammṭṭitiñāna] : 대상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려서 얻는 지혜를 말한다.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어떤 고정관념을 갖지 않고 탐진치 없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지혜이다.
<주해 11> 조건 지어진 현상[有爲法] : 유위법(有爲法)은 원인과 결과가 있고 조건 지어진 현상을 말하는데 마음, 마음의 작용, 몸을 말한다. 이는 오온을 뜻한다.
무위법(無爲法)은 원인과 결과가 없는 것으로, 열반을 뜻한다. 이상 유위법과 무위법을 합친 것을 빠라마타 담마(Paramattha Dhamma) 또는 궁극적 진리, 최승의 법이라고 한다.
南極과 北極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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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엔 펭귄이 사는데, 북극에는 왜 펭귄이 없을까?
왜 북극곰은 있는데, 남극 곰은 없는 걸까?
재미있는 상식의 세계, 최근 지근 온난화로 화두에 오르고 있는
남극과 북극에 대해서 알아보자.
1) 남극은 대륙, 북극은 바다
남극과 북극의 가장 큰 차이는 남극은 얼음으로 덮인 거대한 땅이고
북극은 유라시아 대륙과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둘러쌓인 바다라는 사실이다.
남극해에 둘러싸여 있는 남극대륙의 면적은 약 1,440만 제곱키로미터로
지구 육지면적의 9.2%에 해당하며 남극대륙의 약 98%가
평균두께 2,160m나 되는 빙산과 같은 두꺼운 얼음으로 덮여 있다.
반면, 북극은 지구 북극점 근처의 지역으로 총 면적 약 3,000만 제곱키로미터 중
북극해가 약 약 1,400만 제곱키로미터를 차지한다. 흔히 북극을 의미하는
'북극권'에는 캐나다와 러시아, 미국 알래스카의 북쪽지역, 노르웨이 북쪽해안,
그린란드, 아이슬란드, 스발바르 같은 북쪽 섬들이 포함되어 있다.
2) 남극과 북극은 어디가 더 추울까?
남극이 훨씬 춥다. 북극은 주변에 있는 바다와 저위도에서
흘러 들어오는 따뜻한 해류의 영향을 받는다.
얼음 덩어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온도가 높은 바다에서 상승하는
따뜻한 공기의 흐름으로 겨울에는 최저 영하 30~40도 까지 내려가지만,
여름에는 영상 10도 정도로 비교적 따뜻한 편이다.
한편 남극은 가역과 냉각이 쉽게 이루어지는 지각이 아래쪽에 있기 때문에
한겨울에 해당하는 8월 말 무렵이면 내륙의 고원 지대에서는
기온이 영하 70도 가까이 내려간다고 한다.
역사상 최저 기온은 영하 89도였다.
3) 왜 펭귄은 남극에서만 살고, 북극곰은 북극에 살까?
남극에 서식하는 펭귄의 경우, 남쪽 대륙의 조류에서 진화된 것으로 추정되며,
주 먹이가 바다 생물로 남극의 얼음과 추위에도
무난히 견딜 수 있는 적응력을 갖추고 있다.
반면에 북극곰의 경우에는 대륙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즉, 북극은 얼음바다이지만 대륙과 붙어 있기 때문에
북극곰이 넘어가 살게 된 것이고,
남극은 바다에 둘러쌓여 있는 거대한 대륙이기 때문에 조류가 진화하여
펭귄이 살게 된 것이라고추정한다.
남극생물로는 펭귄이외에도 바다표범과 고래 등이 있으며,
북극 생물로는 북극곰 이외에 북극여우, 철새, 순록, 사향소, 레밍등이 서식한다.
4) 북극엔 이누이트족, 남극엔 세종기지가 있다.
남극에는 원주민이 없다. 선사시대에 원주민이 살았던 흔적도 없다.
현재 남극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문명세계에서 들어가
남극에서의 연구 활동을 수행하는 비상주 방문객들이다.
그곳은 오로지 추위에 적응한 동식물만이 살아갈 뿐인데,
나무는 전혀 없고 지의류가 남극에 있는 식물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반면 그린란드와 알래스카 등 북극권에 속하는 여러 지역에는
흔히 에스키모라고 불리는이누이트족이 살아간다.
이들은 자신들의 고유하고 독특한 문화와 역사가 있는
북극의 원주민으로 주로 사냥을 하면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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