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견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2010. 5. 3. 20:4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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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장

유신견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1. 유명소경(有明小經. Cūḷa Vedalla Sutta)

根本五十(Mūlapannāsa)

붓다께서 왕사성의 죽림정사에 계셨을 때 그곳에는 위사카(Visākha)라는 이름의 부자(富者)와 후에 비구니가 된 아내 담마디나(Dhammadinnā)가 살고 있었다. 위사카는 매일 저녁 붓다께서 하시는 법문을 들으려고 죽림정사를 방문하였다. 그리고 법문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사랑스런 아내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 그들은 팔짱을 끼고 집 안으로 들어가곤 했다.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담마디나는 문 앞에서 남편을 기다렸다. 그러나 평소보다 다소 위엄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 남편은 부인에게 팔을 내밀지 않았고 담마디나는 남편의 이러한 태도에 마음이 편치 못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이 들 무렵이 되어 담마디나는 남편에게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기에 그의 태도가 그토록 심각하고 평소와는 다른지를 물어보았다. 남편은 그 자신이나 아내가 어떤 잘못을 한 것이 아니라 그가 좀 더 높은 통찰력(아나함과)주해1)을 얻었기 때문에 그의 태도가 심각해 보이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는 담마디나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줄 것이며 만일 그녀가 원하면 다른 사람과 재혼해도 좋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담마디나는 질문하였다.

“부군이시여, 당신은 높은 지혜에 대해 말하십니다. 이 법은 남자에게만 허락된 것입니까? 여자는 높은 법을 얻을 수 없는 것인가요?”


남편은 대답하였다.

“아니오. 부인이시여, 붓다의 법은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말했다.

“그렇다면 제가 가서 법을 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며칠 후 담마디나 자신도 비구니가 되어 비구니 승가에 들어갔으며 그녀는 결국 아라한과를 얻었다.


다음은 아나함과를 얻은 위사카와 아라한이 된 비구니 담마디나 사이에 오고 간 몇 가지 질문과 답변이다.


위사카가 질문했다.

“스님이시여, 붓다께서 가르치신 ‘몸이 있다[有身]’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아라한인 담마디나는 답하였다.

“보시 수행자 위사카시여, ‘몸이 있다’는 유신(有身)은 오온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유신견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위사카시여, 오온을 잘못 이해하고, 오온을 실재라고 믿으며, 자아 혹은 나라고 그릇되게 파악할 때 유신견이 일어납니다.”


“스님이시여, 그렇다면 왜 그리고 무엇 때문에 유신견이 일어나는 것인지 다시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위사카시여, 붓다의 성스런 질서에 따르면 첫째로, 속세의 무지한 범부는 성자(聖者)의 법을 받아들이지 않아 성자의 법에 밝지 못하기 때문에 진리와 조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둘째로, 범부는 덕 있는 자나 성자를 가까이 하기를 원치 않아 법문을 쉽게 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물질[]이 나 또는 자아다, 나는 물질이다, 물질 안에 나 또는 자아가 있다, 나 또는 자아 안에 물질이 있다’라고 그릇되게 이해합니다.

그리고 느낌[], 지각[], 행(行), 의식[]을 같은 방식으로 받아들여서 나, 자아 등으로 잘못 이해합니다. 즉 의식이 나 또는 자아를 가지고 있으며, 의식 안에 나 또는 자아가 있고, 나 또는 자아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위사카시여, 이는 마치 타오르는 불과 불빛을 구분하지 못하고 타오르는 불을 불빛으로 오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법문을 들을 기회가 없어 그것에 정통하지 못하고, 무지해서 가르침을 받지 못한 범부는 ‘물질이 나 또는 자아다, 느낌이 나 또는 자아다, 지각이 나 또는 자아다, 행이 나 또는 자아다, 의식이 나 또는 자아다’라고 보고 이해하며 잘못 믿게 됩니다. 이것이 유신견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2. 야마까경(Yamaka Sutta)

상윳따니까야(Saṁyutta-Nikāya)

붓다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였다. 야마까(yamaka)라는 이름의 어떤 비구에게 문득 아라한이 죽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다만 망각 속으로 사라져버릴 뿐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이런 이해와 믿음으로 다른 비구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퍼뜨렸다.


그가 하는 말을 들은 다른 비구들은 붓다께서 가르치지 않은 것이니 법에 어긋나는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충고해 주었다. 그러나 야마까는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모순되고 불경스런 자신의 견해를 완강하게 고집하면서 계속해서 퍼뜨렸다.


이 불경스런 논리를 펴는 것을 멈추게 할 수 없었던 다른 비구들이 대장로 사리뿌따(Sāriputta)께로 가서 그 사실을 말씀드렸다. 그러자 대장로께서는 크나큰 자비심으로 야마까의 거처로 가서 붓다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그러한 견해를 편 것이 사실인지를 야마까에게 물어보았다.


“오, 야마까여, 그대는 아라한이 죽을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다만 망각 속으로 사라져버릴 뿐이라고 하는 그릇된 견해를 가졌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야마까는 이를 긍정하였다. 그러자 대장로께서 다시 물었다.


“야마까여,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알고 있는 대로 답해 주기 바랍니다. 물질[]은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느낌[]은 언제나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지각[]은 언제나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행(行)은 언제나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의식[]은 언제나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그렇다면, 야마까여, 그대는 물질을 영원하지 않으며 변하는 것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느낌, 지각, 행과 의식을 영원하지 않으며 변하고 매순간 사라지는 것으로 봐야만 합니다.”


그러고 나서 사리뿌따 대장로께서 다시 말했다.


“이제, 야마까여, 다시 질문을 할 것이니 생각하는 바대로 말해 주기 바랍니다. 그대는 물질을 아라한(실재하는 존재)주해2)이라고 여기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그대는 느낌, 지각, 행 과 의식을 아라한이라고 여기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그대는 오온을 아라한으로 여기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그렇다면 야마까여, 오온을 제외한 다른 어떤 것을 아라한이라고 여기는 것입니까? 야마까여, 물질을 제외한 다른 어떤 것을 아라한이라고 여기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그렇다면 야마까여, 느낌을 제외한 다른 어떤 것을 아라한이라고 여기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그리고 야마까여, 지각과 행을 제외한 다른 어떤 것을 아라한이라고 여기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그리고 야마까여, 의식을 제외한 다른 어떤 것을 아라한이라고 여기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그렇다면 야마까여, 위대하신 스승께서 번뇌가 완전히 소멸하고 뿌리 뽑힌 아라한이 죽을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다만 망각 속으로 사라질 뿐이라고 가르치셨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적절하고 바람직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제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적절하고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누군가가 아라한이 죽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고 질문하면 무엇이라고 답하겠습니까?”


“존자시여, 물질이란 일시적이고 무상하며 변하기 마련이고 영원하지 못한 것이며, 느낌과 지각, 행 또한 일시적이고 무상하며 변하기 마련이고 영원하지 못한 것이라고 답하겠습니다. 또 의식은 일시적이고 무상하며 변하기 마련이고 영원하지 못한 것입니다. 오온은 일시적이고 무상하며 변하기 마련이고 영원하지 못한 것입니다.”


대장로께서 말씀하셨다.


“좋습니다. 야마까여. 이제 그대는 정견을 얻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삿된 견해가 있을 때는 두 가지 측면에서 그릇된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첫째로 아라한을 실재하는 개체로 그릇되게 보는 것은 유신견에 해당되며, 둘째로 아라한이 죽을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다만 망각 속으로 사라질 뿐이라는 또 하나의 견해는 단견에 해당된다. 거기에다 야마까는 열반을 헛된 것으로 간주한 것이다.


따라서 유신견을 가진 자는 열반에 들 수 없다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아라한의 임종 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으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견해는, 열반이란 모든 것이 소멸되고 헛된 상태라고 하는 단멸론자의 견해와 같다.


유신견을 가지는 것은 너무도 두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엄격하게 열심히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자라도 결코 최후의 해탈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견들은 연기법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없을 때 뚜렷하게 나타난다.

3. 찬나 장로

찬나(Channa) 장로는 왕궁의 시종이었는데 싯달타 왕자가 진리를 찾아 왕궁을 떠날 때 왕자를 따라 나왔다. 찬나는 싯달타 왕자가 붓다가 되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비구가 되었다.


그는 위빠사나 수행을 매우 열심히 했지만 이상하게도 도과의 첫째 단계인 수다원에도 이를 수가 없었다. 찬나는 다른 비구들에게로 가서 무상과 고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도과를 얻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무려 40년 이상이나 노력하면서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는 통찰력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도과의 첫째 단계에조차 이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찬나는 물질이 무상하며 느낌과 지각, 행과 의식 또한 무상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무아를 대상으로 할 때면 마치 높은 절벽의 가장자리에 서서 어느 순간이라도 곧 떨어질 것만 같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더욱이 오온이 무아라면 그 자신을 도대체 누구로 여겨야 하며, 도대체 무엇을 피난처로 의지하겠느냐고 물었다. 찬나는 자아 개념이 너무나 확고하여 무아에 대해 명상할 때면 마치 절벽의 가장자리에 서 있는 듯한 위기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렇게 40여 년의 세월이 흘러 붓다께서는 반열반에 드셨다. 낙심과 후회에 젖은 찬나 비구는 이 사원 저 사원으로 옮겨 다니며 다른 비구들에게 가르침과 충고를 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아난다(Āananda) 장로야말로 자기를 바른 길로 이끌어 주실 분이라는 생각이 든 찬나는 자신이 머물던 수행처를 떠나 아난다 장로가 계시는 꼬삼비(Kosambhi)로 갔다.


찬나의 이야기를 들은 아난다 장로께서는 그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바로 연기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라는 것을 간파하셨다.


아난다께서는 찬나를 위로하고는 붓다께서 만타니(Mantāni)의 아들인 까짜야나(Kaccāyana)를 가르치신 방식으로 연기법에 대해 설명하셨다.


연기법에 대해 충분히 숙지한 찬나 비구는 드디어 유신견과 상견, 단견을 완전히 뿌리 뽑고 종식시킬 수 있었다. 그러자 첫 번째 도와 과의 깨달음이 그에게 왔다.


분명한 것은 찬나 비구가 지난 40여 년 동안 도과의 첫 번째 단계조차 얻지 못한 것은 바로 연기법에 대한 무지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연기법은 위빠사나 수행을 열심히 하는 수행자에게 있어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만일 수행자가 연기법을 숙지하지 못한다면 오온에 대한 참된 지식을 얻을 수가 없다. 또 일어남과 사라짐이라는 오온에 대한 참된 지식을 알지 못하기에 오온에 착 달라붙어 있는 사견들을 제거하고 종식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이들 사견이 있는 한 사견과는 한시도 떨어질 수 없는 동반자인 무명과 갈애가 일어나 지배할 것이다.


이미 거론한 바와 같이 사견은 무명과 갈애보다 더 해롭고 더 나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고귀한 도와 과가 시작되는 수다원의 첫 번째 단계로 가는 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견은 사악도로 가는 확실한 토양이 된다. 그러나 갈애는 좋은 세계로 가는 것을 가로막지는 않는다.


사견은 무명과 갈애보다 더 무섭고 위험하다. 왜냐하면 모든 무명과 갈애가 사악도로 떨어질 위험을 초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라한의 도를 얻어야만 무명을 완전히 뿌리 뽑고 종식시키는 반면, 갈애는 그보다 낮은 단계에서 뿌리 뽑을 수 있다. 무명이 있을지라도 아라한보다 낮은 세 단계의 도와 과는 얻을 수가 있다.


화원정사의 기증자로 잘 알려진 보시 수행자 위사카주해3)는 수다원을 얻었다고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손자가 죽었을 때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위사카에게 일어난 그러한 정신적 괴로움과 절망은 사악도로 떨어지는 위험을 초래하는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4. 비구 사띠는 어떻게 사견을 가지게 되었는가

이 이야기는, 의식은 영구불변하고, 변화하는 것은 오직 몸뿐이라는 사견을 가졌던 사띠(Sāti)라는 비구에 관한 것이다. 그는 이러한 생각이 붓다께서 가르치신 바와 일치한다고 다른 비구들에게 말하였다.


붓다께서 설하신 열 개의 본생담(Jātaka)주해4)에 나와 있는 떼미야, 자나까, 수안나사마, 부릿다, 짬뻬야, 위두라, 마호사다, 니미야, 나라다, 웨산따라의 이야기를 들은 후 사띠 비구는 떼미야로부터 웨산따라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존재들이 동일하고 항상하는 존재로 다만 몸만이 변화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의식은 하나로서 동일하며 영구불변한 것이라고 믿었다.


사띠 비구가 이러한 잘못된 견해를 퍼뜨리자 비구들은 위대한 스승께서 설하신 참된 법을 그릇되게 이해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충고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띠 비구는 고집스럽게 자신의 그릇된 믿음을 계속해서 퍼뜨렸고 이를 말릴 수 없었던 비구들이 붓다께 가서 이 사실을 말씀드렸다.

붓다께서는 사띠 비구를 불러 그러한 견해를 확신하고 있는 것이 사실인지의 여부를 물어보셨다. 사띠 비구는 그릇된 사견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였다.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여, 너는 누구로부터 내가 그러한 법을 설했다고 들었는가? 내가 모든 의식의 조건 지어진 성질주해5)에 대해 다양한 방법으로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았던가? 적합한 원인이 없이는 어떠한 의식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내가 반복해서 보여주지 않았던가? 다른 모든 법과 마찬가지로 의식은 지속되지 못하고 일시적이며 무상하고 항상 변하며 똑같은 상태로 연속적인 두 순간을 지속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았던가?”


붓다께서 다른 비구들을 향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어떠한 의식이 일어나든 간에 그것은 오직 어떤 원인에 의해 일어난다. 감각기관과 대상이라는 두 가지 것에 의존하여 의식이 일어난다. 눈과 보이는 대상의 접촉이 있을 때 안식이 일어난다. 이와 같이 눈과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부딪침, 마음과 생각에 의존하여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이 각각 일어난다. 이것은 마치 연료로 인해 불이 피어오르는 것과 같다. 오직 이러한 원인을 통해서만 저러한 결과가 일어나는 것이다. 만일 나무가 타고 있다면 그것을 장작불이라고 한다. 만일 소똥이 타고 있으면 그것을 소똥불이라고 한다. 대나무나 풀이 타고 있다면 그에 따라 이름 지어질 것이다. 똑같은 방식으로 의식은 그 대상과 감각기관에 따라 일어난다. 그러므로 이것이 존재하므로 저것이 존재하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멈추면 저것 또한 멈춘다.

이것이 연기에 따라 현상들이 인과적으로 연관되어 일어나는 모습이다.”


현생의 의식은 죽는 순간의 마음인 사몰심(死沒心)주해6)으로 종결되고 내생에서의 새로운 의식은 재생연결식(再生連結識)주해7)으로 일어난다. 떼미야 왕자의 의식은 그가 죽을 때 사몰심으로 종결되었으며, 새로운 의식이 다음 존재에서 재생연결식으로 나타났다. 이와 같이 자나까 위두라, 수안나사마와 웨산따라 왕자의 의식도 각자의 생에서 사몰심으로 종결되었으며, 새로운 생에서 재생연결식으로 다시 시작되었다.


도표를 참고하면 부분 2에서 업의 형성과 의식이 연결되는 첫 번째 연결고리를 볼 수가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 개구리 한 마리가 붓다의 설법인지 알지 못하고 그저 듣기가 좋아서 즐거운 마음으로 듣고 있다가 목동의 뾰족한 지팡이에 찔려 우연히 죽음을 맞게 되었다. 이 개구리는 천계의 33천(三十三天)주해8)에 천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여기서 분명히 이해해야 할 것은 개구리의 의식이 천인의 몸을 따라간 것도, 몸 안으로 들어간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오직 인과법에 따른 것이었다.


불교에서는 영혼이 옮겨 간다는 것은 없다. 환생이라는 것도 불교에서는 철저히 부정된다. 실제로 일어난 것은 개구리라는 과거 생의 사몰심이 선행하는 원인이 되어 천인의 재생연결식이란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천인의 재생연결식은 개구리의 사몰심을 원인으로 하여 일어났다. 어떠한 영혼이나 의식이 한 존재와 다음 존재에서 일치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천인의 의식과 개구리의 의식이 하나이거나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숙지해야 한다. 다른 의식으로 옮겨 가는 영혼이나 의식은 없다. 왜냐하면 이미 말했듯이 의식은 일시적이며 무상하고 항상 변하며 동일한 상태로 연속적인 두 순간을 지속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와 똑같이 화원정사의 기증자로 알려진 위사카는 죽어서 도솔천(兜率天)주해9)의 왕비인 수니미따(Sunimmita)가 되었다. 앞에 든 예와 같이 위사카의 의식은 도솔천의 왕비인 수니미따의 몸을 따라간 것이 아니었다. 다만 선행한 위사카의 사몰심으로 인하여 태어남이라는 결과를 받아 새로운 생에서 재생연결식으로 일어난 것이다.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넘어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말한다. 이는 단지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의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만일 현생의 의식이 다음 생의 의식과 동일한 것이라는 그릇된 믿음이나 견해가 있다면 그것은 상견(常見)에 해당된다. 한 존재의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그릇된 견해를 가지는 것은 단견(斷見)에 해당된다. 이들 두 가지 극단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로지 도와 과로 인도하는 중도(中道) 뿐이다. 사견이라는 형태로 장애와 방해물이 있으면 결코 도과를 성취할 수 없다. 위빠사나 수행을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도과의 첫 번째 단계조차도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주해(註解)

<주해 1> 아나함과[不還果. Anāgāmi Phala] : 아나함과는 성인의 4과(四果) 중에 세 번째에 해당하는 과이다. 아나함과를 불환과(不還果)라고 하는데, 죽은 뒤에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고 천상의 정거천(淨居天)에 태어나서 그곳에서 아라한이 되어 윤회가 끊어진다. 천상에서는 괴로움이 없어 수행을 하지 않는다. 다만 아나함이 머무는 정거천만이 천상에서 유일하게 수행을 하여 윤회를 끊는다.

인간으로 살면서 아나함의 도과를 성취하면 가족과 함께 살 수가 없어 출가를 하거나 독립하여 수행을 해야 한다. 만약 가족과 함께 살면서 부부생활을 할 경우에는 일주일 이내에 죽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해 2> 아라한(阿羅漢. Arahant) : 열 가지 족쇄가 불타 버려서 탐진치가 완전하게 끊어진 성인(聖人)을 말한다. 공양 받을 자격이 있어서 응공(應供)이라고도 한다. 아라한은 다시 윤회하지 않는다. 아라한은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정신적 지위를 말하는 것으로 아라한은 있어도 아라한을 얻은 자는 없다.

오온은 무상하며 자아가 없기 때문에 아라한을 관념적인 인격체, 즉 실재하는 개체로 보는 유신견은 잘못된 것이다. 오온은 매순간 조건에 의해 생멸하기 때문에 조건에 의해 소멸될 뿐이다.


<주해 3> 위사카(Visākhā) : ������유명소경������에서 나오는 담마디나의 남편 위사카가 아니고 화원정사를 기증한 위사카이다.


<주해 4> 본생담(本生談. Jātaka) : 붓다가 되기 전 수많은 생애 동안 윤회를 거듭한 전생의 삶을 기록한 내용이다. 그중 10개의 본생담에 나오는 인물들이다.

<주해 5> 조건 지어진 성질 : 원인과 결과의 법으로 유위성(有爲性)을 말한다. 마음과 마음의 작용과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조건 지어진 성질을 가지고 있다.


<주해 6> 사몰심(死沒心. Cuti Citta) : 죽을 때의 마음을 말한다. 모든 생명들은 태어날 때 재생연결식(再生連結識)이라는 태어나는 마음이 있어서 태어난다. 그 뒤 죽을 때의 마음인 사몰심이 일어나서 사라짐으로 인해 일생을 마감한다.

이 사몰심이 생멸하면서 즉시 다음 생의 재생연결식이 일어난다. 이 과정을 윤회한다고 말한다. 사몰심과 재생연결식은 일생에 한 번 있는 마음이다. 재생연결식으로 정신과 물질이 생긴 뒤에 사몰심으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마음은 몸을 떠날 수 없다.

사몰심이 몸을 떠날 때가 사망을 한 것이며, 사몰심이 몸을 떠나는 정확한 순간은 부처의 혜안으로밖에 알지 못한다. 죽을 때의 마음인 사몰심의 상태에 따라 다음 생의 마음이 결정된다. 예를 들어 죽을 때의 마음이 선하고 사람으로 태어나는 조건의 마음이 되었을 때 마음의 종자가 다음 생인 재생연결식으로 전해져서 사람으로 태어난다. 같은 예로 죽을 때 지옥의 마음이면 지옥에 태어난다.


<주해 7> 재생연결식(再生連結識. Paṭisandi Viññāna) : 다시 태어날 때의 마음을 말한다. 이를 결생심(結生心)이라고도 한다. 사몰심을 원인으로 하여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며, 이때 한 일생이 시작된다. 인간의 경우는 재생연결식에 의해 입태를 하는 과정이 생긴다.

생애 최초의 재생연결식에 의해 한 생의 몸과 마음이 결정되며, 재생연결식은 한순간에만 존재하고, 다음 마음인 바왕가로 연결된다.


<주해 8> 33천(三十三天. Tāvatiṁsa) : 욕계(欲界)의 천상(天上)은 6개인데, 첫 번째가 네 개의 지역으로 이루어진 사천왕천(四天王天)이고, 두 번째가 33천(三十三天)이다. 33천은 천상의 종류가 33개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욕계 천상에 있는 33명의 천인들의 영역을 말한다. 욕계 천상은 믿음․보시․지계의 공덕으로 태어나는 곳이다.


<주해 9> 도솔천(兜率天. Tusita) : 도솔천은 욕계 천상의 네 번째 세계이다. 도솔천을 뜻하는 빨리어 뚜시따(Tusita)는 만족, 기쁨이란 뜻으로 행복한 세계를 말한다. 고따마 붓다께서 붓다가 되기 위해 머무시던 곳도 도솔천이며, 미래에 출현하실 붓다가 머무시는 곳도 도솔천이다.

 

    해변의 노래-미샤 마이스키

 

 

 

  

 Mischa Maisky (라트비아 1948~)

 

미샤 마이스키는 1948년에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서 태어났고,
유년기를 채 다 보내기도 전에 첼로 연주를 시작했다.
그는 처음에는 고향의 음악원에서 공부하다가
후일 레닌그라드(당시 명칭)로 옮겨왔다.

 

 1966년에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그는,

역시 대가로서의 자질을 타고난 천재 연주가다.

 

지금 연주되고 있는 해변의 노래는

일본인 작곡가 타메쪼 나리타가 작곡한 곡으로

서정성과 깊은 뉘앙스, 애수적인 곡으로 첼로의 개성이 잘 표현된 

감미롭기로 이름난, 잘 알려진 곡 입니다.

 

작곡가가 해변을 거닐면서 지난일들, 그리운 친구를

떠 올리며 영감을 받아 작곡된 곡 이랍니다.


님 들이시여! 계절의 여왕 5월,

4월의 아픔은 떠나는 봄에 실어 보내시고

좋은 일만 가득 하시길 빕니다.

 

-초 립-

 

 

 

 

 

미샤 마이스키 / 첼로 소품곡

 

 

1. Etude Op,25 No,7 / Chopin

 

2. Elegie / Massenet

 


3.Menuett-Boccherini

 

 

 

   

 

5월의 시 

-이해인-

 

 

풀잎은 풀잎대로 초록의 서정시를 쓰는 5월

하늘이 잘 보이는 숲으로 가서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게 하십시오

피곤 하고 산문적인 일상의 짐을 벋고 당신의 샘 가에서 눈을 씻게 하십시오

 

물오른 수목처럼 싱싱한 사랑을 우리네 가슴속에 퍼 올리게 하십시오

은총을 향해 깨어있는 지고한 믿음과 어머니의 생애처럼 겸허한 기도가

우리네 가슴속에 물 흐르게 하십시오

 

구김살 없는 햇빛이 아낌없는 축복을 쏟아내는 5월의 어머니

우리가 빛을 보게 하십시오

 

욕심 때문에 잃었던 시력을 찾아

빛을 향해 눈뜨는 빛의 자녀 되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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