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말하는 소통은 무엇인가

2010. 6. 29. 18:5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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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말하는 소통은 무엇인가
 
 
 
“처음도 좋고 중간도 끝도 좋을 法 설하라”
 
대화·토론으로 수행정신 함양…공동체 구현해야
 
 

 

소통(疏通)은 철학ㆍ사회학 용어다. 하지만 의미를 따져보면 아주 간단하다. 사전적 의미는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함’,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이다. 차량(車輛) 소통 정도의 의미로 쓰이다 언제부터인지 사회 병리현상을 치유하는 대안으로 널리 쓰이게 됐다. 심지어 청와대가 ‘사회통합위원회’라는 기구를 만들고, 조계종단도 ‘소통과 화합’을 정책의 기조로 내걸게 됐다. 그만큼 소통이 사회문제 해결의 중요한 대안으로 부상한 것이다. 사전 의미처럼 소통은 ‘뜻이 서로 통함’을 말한다. 뜻은 무엇으로 통하는가. 바로 말과 글 즉 언어(言語)다. 그래서 소통이 된다는 것은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오해나 갈등이 없는 상태다. 반대로 소통이 막혔다는 것은 아예 말을 하지 않거나 말을 해도 상대방이 이해를 못하고 혹은 알지만 받아들이지 않아 불편한 상태를 말한다.

 

‘소통’을 사회병리현상의 해결책으로 제시한 이론가는 독일 철학자이며 사회이론가인 위르겐 하버마스다. 그는 1980년 출간한 <의사소통행위이론>에서 20세기 들어 비판을 받았던 인간 인식의 합리성을 되살리는데 한 사람의 머리가 아닌 두 사람 이상의 의사소통 행위에서 대안을 찾는다. 인간 인식 즉 이성은 근대 철학 과학의 출발을 가져온 토대인데 20세기 들어 양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이성의 합리성은 폐기된다. 그에 따르면 의사소통 합리성은 고독한 주체가 객관 세계의 어떤 것을 성공적으로 인식하고 조작할 때 성립하는 합리성이 아니라 언어 및 행위능력이 있는 주체들이 어떤 것에 관해 서로 이해를 도모할 때 성립하는 합리성이다.

 

두 사람 이상 사이에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 행위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버마스는 ①다른 사람이 자기 말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이해가능하게 말을 할 것(이해가능성) ②상대방에게 진짜인 무엇인가를 알려주려고 한다는 점을 상대방이 믿을 수 있는 방식으로 말을 할 것(진리성) ③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있는 올바른 규범과 가치에 맞게 말을 할 것( 규범적 정당성) ④상대방이 믿을 수 있게끔 진정한 마음에서 할 것(진정성) 등 네 가지를 제시했다. 이 기준에 합당하면서 비판을 허용할 수 있어야 진정한 의사소통이 성립된다는 것이 하버마스의 견해다.

 
 
부처님은 대화·토론의 ‘달인’…문답·비유로 바른 사상 인도
 
충고할 때 정확한 사실 기반…자비심 갖고 부드럽게 말해야
 
편 가르고 상대방 비하·폄하하면 口業 짓고 소통 영영 불능
 
 

이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언어행위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불교에서 말과 행동을 어떻게 할 것인지 전범(典範)은 부처님의 전도선언(傳導宣言)에 잘 나와 있다. “비구들아, 길을 떠나라. 여러 사람들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세상을 동정하여, 인간과 천신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마라. 비구들아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의미와 문장을 갖춘 법을 설하라. 아주 원만하고 청정한 행을 드러내 보여라.”

 

<불본행집경> <잡아함경> 등 많은 경전에 나오는 전도선언의 일부다. 부처님은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의미와 문장을 갖춘 법을 설하라’고 했다. 무슨 뜻인가. 간단하다. 문법과 논리를 갖추고 아름다운 말로 상대방이 알아듣도록 말하라는 뜻이다. ‘모든 이들의 이익을 위하라’는 뜻은 바로 진정성 진실성을 말한다. 즉 말에 진실함이 담겨야 한다는 뜻이다. 부처님의 말씀은 분명하고 간단하다. 말을 할 때 앞 뒤 중간이 모두 좋다는 것은 말의 어법 내용 문법이 맞고 의도가 옳아야 함을 말한다. 그리고 내용을 갖춰야 한다. 내용은 논리를 말한다. 억지와 견강부회,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는 뜬금없는 주장 등은 소통을 가로막는 장애다. 그리고 올바른 사상과 규범에 맞아야 하며, 당대 문화와 역사를 반영해야 한다. 자기 종교만이 옳다고 주장한다든지, 이 쪽 저쪽 편을 가르고, 원망과 미움이 가득한 말을 하거나, 약자를 비하하거나 폄하하는 내용, 상대방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내용 등은 옳지 않다.

 

예전과 달리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고 인식이 달라졌는데 여전히 ‘여자는 집에서 밥하고 애 길러야한다’고 강조하면 받아들이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사랑과 자비 인류애 화합과 공동체 정신 등과 반대되는 말 역시 잘못된 언어다.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쓰나미 재앙을 입었다’든지 ‘좌파 주지’ 발언 등은 사회적 갈등만 더 초래했다.

 

올바른 언어구사를 보여주는 대표적 이론이 업(業)론이다. 인간이 몸과 마음과 말로 짓는 10가지 업(惡業) 중에서 언어와 관련된 업이 네 가지다. 거짓말인 망어(妄語), 입에 발리거나 꾸며서 하는 기어(綺語), 서로를 이간질 하는 양설(兩舌), 상대방을 험담하고 욕하는 악구(惡口)가 그것이다. 진실을 가리거나 사실을 숨기는 것이 거짓말이다. 있는 그대로 밝히지 않는 것도 거짓에 속한다. 자신의 생각은 그렇지 않으면서 상대방에게 잘 보이기 위해, 혹은 높은 사람에게 아부하는 말도 악업(惡業)이다. 여러 사람을 오가며 서로 다른 말로 멀어지게 하고 오해를 불러일으켜 싸움에 이르게 하는 것 역시 잘못된 언어 행위다.

 

바르고 정확한 언어 사용을 통해 타인(他人)과 교류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바로 대화와 토론이다. 부처님은 대화와 토론의 ‘달인(達人)’이었다. 부처님의 원음이 담겨있는 <아함경>은 대화와 토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부처님은 특히 비유와 문답을 즐겨했다. 이는 상대방을 설득해 올바른 진리로 인도하는 방편이다. 그리고 질문을 통해 상대방이 저절로 깨닫게 했다. 아주 민주적이며 자발성을 강조하는 방식이다. ‘빈자일등’ 이라든지, ‘불타는 집’ 등 풍부하고 다양한 비유를 통해 부처님은 상대방이 진리를 깨닫도록 인도했다. 경전을 보면 거의 묻고 답하는 형식을 띠고 있는데 이를 사기답(四記答)이라고 한다. 즉 네가지 방식의 문답법이다.

 

첫째 일향기(一向記)이다. 이는 질문이 응답자의 생각과 합치하는 경우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을 말한다. “세존(世尊)께서는 여래(如來), 응공(應供), 정변지(正等覺)이십니까?”라고 질문하면 “그렇다”고 긍정하는 것이 여기에 속한다. 두 번째는 분별기(分別記)다. 질문자의 물음에 대해 분해하고 시비를 분별하여 답변하는 것을 말한다. “일체(一切) 죽은 것은 모두 차후에 살아납니까”라는 질문에 이를 분석하고 해부해서 “번뇌(煩惱)가 있는 자는 살아나고, 그 외는 그렇지 않다”는 등으로 긍정 혹은 부정으로 답한다. 세 번째는 반힐기(反詰記)다. 묻는 이가 말한 것에 대해 바로 대답하지 않고 되물어 그 뜻을 분명하게 하거나 깨닫게 하는 대답 방법이다. 부처님은 질문자가 토론을 즐기려 할 때나 설득이 필요할 때 이 방법을 썼다고 한다. 네 번째는 무기(無記) 즉 침묵이다. 대답할 가치가 없는 질문이나 대답할 일이 아닌 물음에 대해 대답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질문이 이치에 합당하지 않고 아무런 쓸모도 없는 경우 대답하지 않고 침묵해 버리는 것이다. 가령 부처님은 사후(死後)를 묻는 질문에 침묵했다.

 

그리고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자비심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남에게 충고하려면 정확한 사실관계에 기반해서 때를 맞추어, 부드러운 말과 자비심으로 충고하라.” 아무리 좋은 말도 때가 맞지 않으면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고 효과도 없다. 자비심 없는 충고는 비난으로 흐른다.

 

이처럼 불교식 언어 구사, 대화법을 통해서 엿볼 수 있는 것은 불교의 대화와 소통은 궁극적으로 수행정신의 함양과 공동체 구현이라는 것이다. 대화를 통해 설득하고 묻고 답하면서 상대방에게 깨우쳐주려 하는 것은 올바른 사상 즉 정견(正見)이다. 부처님의 대화는 온통 여기에 집중돼 있다. 또한 묻고 답하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 잘못을 깨닫도록 해 서로가 도반임을 함께 지켜야 할 규칙이 있음을 알고 지키게 한다.

 
 
- 불교신문 -  

 



♣  돌에 새긴 우정 

                                  

 

                                   

 

두 사람이 사막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여행중에 문제가 생겨 서로 다투게 되였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뺨을 때렸습니다

 

 

뺨을 맞은 사람은 기분이 나빴지만

아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래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의 뺨을 때렸다."

 


 

그들은 오아시스가 나올 때까지 말없이 걸었습니다.

마침내 오아시스에 도착한 두 친구는

그 곳에서 목욕을 하기로 했습니다.

뺨을 맞았던 사람이 목욕을 하러 드러가다

늪에 빠지게 되였는데

그때 뺨을 때렸던 친구가

그를 구해 주었습니다

  

 

늪에서 빠져 나왔을때 이번에는 돌에 이렇게 썼습니다.

"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의 생명을 구해 주었다."

그를 때렸고 또한 구해준 친구가의아 해서 물었습니다.

가 너를 때렸을때는 모래에다 적었는데

왜. 너를 구해준 후에는 돌에다 적었지.? 

 

 

 

친구는 대답 했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괴롭혔을때

우리는 모래에 그 사실을 적어야 해.

용서의 바람이 불어와

그것을 지워 버릴수 있도록.

  

 

 

그러나 누군가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하였을 때는

 그 사실을 돌에 기록해야 해.

그래야 바람이 불어와도 영원히 지워 지지 않을 테니까.

"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겨라."라는

 우리 속담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인데

가만 돌아보면 우리는 그것을

꺼꾸로 할때가 많습니다.

잊어서는 안될 소중한 은혜는

물에 새겨 금방 잊어 버리고

마음에서 버려야 할 원수는

돌에 새겨 두고두고

기억 하는 것이지요.

 

 

 

은혜를 마음에 새기면

고마움이 마음에 남아

누구를 만나도

무슨 일을 만나도

 즐겁기 마련 입니다.

  

 

하지만 마음에 원수를 새기고 나면

그것응 괴로움이 되어 마음 속에

 쓴뿌리를 깊이 내리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은하나여서

은혜를 새기든 원수를 새기든

둘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한번 내 마음을 조용히 돌아 봅시다.

 

지금 내 마음속에 새겨져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돌아 봅시다.

 

내 마음 가득히 원수를 새기고

쓴뿌리를 키우고 있는것은 아닌지....

은헤를 새기고 늘 감사하며 살아 가는지.....

돌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모셔온 글-

 

 

왜 사람들은 고마운 마음은 잘 잊고

상처받은 일은 가슴에 묻고 사는 것일까요?

이 글을 읽으면서 많이 반성을 합니다.

은혜도 잊지 않고 상처 받은 일도 모두 잊지 못하는 형임을 알기에

제발

은혜는 간직하고 상처는 잊고

살아 갈 수 있다면 오죽 좋으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