參禪이란 ?/청화스님

2010. 7. 4. 19:5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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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禪이란 ?
 
2000년 8월 27일 성륜사 설법전에서 淸華스님 법회 법문 
참선법회란 이름으로 열린 淸華스님 법회.  
 
지난 해, 서옹스님을 모신 이후 두번째로 선지 식을 모시고 여는 유불동 전국 선법회이다.
우리들은 이 법회에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
버스를 타고 가는 법우들의 표정이 자못 진지하다.
이 법회에 참여하지 못한 법우들의 마음까지 담으면 더욱 그러하다.
불법을 향한 우리 중생들의 간절하고 사무친 갈증을 40 년 동안 장좌불와를 하신 청화스님께서는 무엇으로 어루만져 주실까?
거센 바람과 비를 헤치면서 전국에서 모인 우리 법우들은 아마도 청화스님의 말씀 만을 들으러 모였다기보다는 한 수행자가 평생 수행한 모습을 직접 보고 체험하기 위한 마음이 더 간절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화동(花童) 종원이와 정안이가 청화스님이 사자좌에 정좌하시는 동안 꽃 공양을 올리니 청화스님의 청아한 목소리, 맑은 미소로 법문이 시작된다.
 
「불교는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인생의 불안스러운 고통 즉 人生苦를 여의는데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 있습니다.
따라서 특히 초기불교 즉 근본불교, 위빠사나의 근본 가르침이 모두가 다 인생고의 해탈을 가장 주장된 목적으로 했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차원은 다르지만 이른바 대승불교에 와서도 역시 인생고라 하는 인생의 근본적인 고뇌를,
그 주체성을 우리가 확립함으로 해서 떠나는, 그러한 공부 쪽에다 관심을 둔 것이 이른 바 대승불교 아니겠습니까?
부처님 당시에는 여러 중생들의 근기가 낮아서 근원적인 문제는 별로 다루지를 않으셨습니다.
스스로의 본래 면목이 무엇인가?
또는 우주의 그 자체는 어떤 것인가?
이런 근원적인 문제는 별로 안 다루셨습니다.
그러나 차근차근 중생의 근기가 수습되어서 대승불교에 와서는 이른바 대승불교는 근원적인 문제를 다루게 되었습니다.
  
마명대사(馬鳴:불멸 후 600년경의 스님. 옛부터 이 분을 대승불교의 시조라 한다)는 부처님의 정통조사 가운데 열 두번째 분입니다.
정통조사하면 (마하가섭부터) 육조 혜능스님까지 33분을 말하는데 마명스님은 열두번 째 분입니다.
마명스님은 대승불교의 할아버지라고 그래요.
 
열 네번째 분이 용수보살(龍樹:불멸 후 600년∼700년경 남인도 사람, 마명대사 이후에 대승불교를 크게 선양)인데 용수보살은 대승불교의 아버지라고 합니다.
마명대사와 용수보살, 이 두 분으로부터 대승불교의 기초가 이루어졌단 말입니다.
 
대승불교에 와서 차원 높은 고도한 부처님 가르침이 그대로 선양 되었습니다. 가령 아까 말씀한것 같이 우리 생명이 대체로 어떠한 것인가?
어떠한 것이기에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우리 삶의 본래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이런 문제를 말씀하셨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는 오늘날에도, 이 불안한 세대에 있어서 지극히 중요하고 거기에 따라서 우리가 공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인생고 라는 것은 이 몸뚱이에 국한된 것이지만 생로병사가 얼마나 주체하기 어려운 것입니까?
하물며 이 또 번뇌망상이 얼마나 또 많습니까?
번뇌망상 때문에 항시 우리가 불안한 가운데 시달리고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달마스님의 安心法門이라, 편안할 安 字, 마음 心 字.
우리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법문이란 말입니다.
안심법문도 우리의 마음의 불안을 해소시켜 주기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안심 되려면은 대체로 내 마음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고,
어떤 방법을 취해야 우리 마음이 안심할 것인가?
이런 것이 우리들에게 부처님이나 조사스님네들 이 주신 가르침이란 말입니다.
 
 
중국 始황제 政이 있지요.
춘추전국시대에 몇 백년동안 싸우고, 다투고 한 그런 시대에 중국이 통일국가가 됐단 말입니다.
통일시킨 주인공이 진시황 인데 서기 전 200년의 사람입니다.
상당히 오랜시대 전에 산사람 아닙니까?
진시황은 그 영웅적인 기품은 늠름하고 위대한 분인데, 하도 사람이 표독스러워서 그 때 통일국가를 만들면서 참으로 비참한 일을 많이 했단 말입 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과 같이 분서갱유라 사상적인 통일을 위해서, 지금 같은 사회는 민주적인 사회라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그 때는 독재적인 사회 이기때문에 정치하는데 반대하니까 귀찮아졌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한 구덩이에 묻어 죽였단 말입니다.
焚書坑儒라, 정치에 관한 책도 몽땅 불살라 버리고 사백육십명의 학자를 한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고 그래요.
얼마나 그것이 표독한 일입니까?
  
만리장성이 그 전에도 흔적이 없는 것이 아니었지만 만리장성이라는 이름이 붙어지도록까지 만든 것은 진시황입니다.
북쪽에서 오는 외적을 막기 위해서 쌓은것 아닙니까?
만리장성을 쌓는데 일반 인민 대중들이 얼마나 많이 고생이 되었겠습니까.
여름에도 추운 겨울에도 징발을 시켜서 무수한 사람들이 죽기도 하고 아파서 돌아오기도 하고 했겠지요.
 
그 때 한 남자가 아내와 행복하게 사는데 만리장성을 축조하는데 징발당해서 갔습니다.
겨울이다 보니까 아내가 자기 남편을 생각하니 아주 마음이 애틋해졌겠죠.
그래서 두툼한 솜옷을 만들어 가지고 갔단 말입니다.
갔는데 남편은 이미 만리장성을 축조하는 공사를 하면서 그냥 아퍼서 죽어버렸단 말입니다.
피로하고 하니까 죽어버렸겠죠.
남편 옷을 가져간 아내가 얼마나 슬펐겠습니까.
장성의 바윗돌에 몸을 기대고서 통곡을 했단 말입니다.
남편을 사무치게 그리워한 정성과 그런 애통하여 통곡하는 정성이 얼마나 사무쳤던지 기대고 있던 장성이 그냥 허물어 졌단 말입니다.
허물어지면서 그와 동시에 자기 남편 해골이 그 안에서 나온단 말입니다.
그걸 거두어다 장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 정신이라는 것은 그와 같이 사무치면
그 신비 不思議한 힘을 내는 것입니다.
그런 사무쳐서 부사의한 힘을 내는 것은 옛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법을 공부하는 데도 그렁저렁 이론이나 생각하고 또는 무슨 법문이나 조금 외고, 그런 정도로 해서는 우리 정성이 사무치질 못해요.
어떻게 사무치면 그러한 위대한 힘을 낼수 있는 것인가?
영험담이 많습니다만 이 시간에 다 할수는 없고, 아무튼 사무치면, 우리 마음이 철저하여 정신일도하면 하사불성이 되고, 안 될 일이 없단 말입니다.
우리가 되고 안되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안 될일이 없다고 한다면 사치지 않느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안 될 일이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부처님 가르침 특히 부처님 가르침은 一切唯 心造라,
모두가 다 마음으로 되어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적에 고생스럽다, 불행하다 하여 우리 인생을 좌절하는 것이 많지 않습니까?
그러나 어떻게 되어있든지 간에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가 다 우리 마음으로 이루 어지지 않은 것이 없단 말입니다.
우리 불교를 믿는 분들이나 우리 스님들 가운데도 불경 다 배워 놓고서도,
무슨 일을 하는데 있어서는 일체유심조란 말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단 말입니다.
 
일체유심조를 확실히 안다고 생각할 때는 사실은 우리가 비관할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모두가 다 마음으로 됐다는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좀 부족하겠지요.
그 마음이라 하는 것이 아주 그야말로 참 부사의한 마음의 자리란 말입니다.
자비도, 지혜도, 능력도, 모두가 다 그 원만무변하게 갖춘 것이 이것이 우리 마음의 공덕상입니다.
 
그 마음이 바로 이른바 불심이 아닙니까?
이 우주의 근본성품이다,
이럴 때는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인 것이고,
그것이 바로 우리 마음, 우리 인간존재, 원래 존재의 마음이다,
이럴 때는 부처 불(佛)자 마음 심(心)자, 불심(佛心)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 불심은 방금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보통 마음이란 차원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들어있는 공덕이 한도 끝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 범부 중생은 그런 자비를 일절 깨닫지 못하고,
성자에 있어서는 그런 자리를 깨달았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을 담는, 마음을 닦아서 마음을 다잡는 방법도 통명선이라 하는 그런 방법이 있습니다.
통할 통(通)자, 밝을 명(明)자,
그리고 참선 이라는 고요할 선(禪)자, 통명선(通明禪)이라고 합니다.
이 통명선이란 무엇인고 하면
우리 마음을 닦으면 삼명육통(三明六通)이 나온단 말입니다.
 
삼명육통이라.
우리 불자님들 삼명육통이라하면 생소하게 들리시겠죠.
삼명육통이라 하는 것은 석삼(三)자, 밝을 명(明)자,
과거에 통달하고, 또는 미래에 통달하고 말입니다.
또는 현재에 모든 번뇌를 소멸을 시켜버린 것 이것이 삼명통(三明通)입니다.
 
육통(六通)은 무엇인가?
육(六)은 삼명(三明)까지 포함해서
다른 사람 마음을 훤히 아는 그런 타심통(他心通)이 있고
또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하는 신족통(神足通)이 있고 말입니다.
또는 우주의 모든 소리를 다 들어서 아는 이른바
하늘 천(天)자, 귀 이(耳)자 천이통(天耳通)이 있단 말입니다.
 
이런 것이 있는데 아까 그 삼명통하고,
방금 말한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있고,
우주의 모든 음성, 사람 음성이나 다른 짐승음성이나
바람소리나 이런 것을 듣고도 일단 읽을 수가 있단 말입니다.
정말로 바르게 깨달은 사람은
새소리를 들으면 새가 무슨 뜻으로 지저귀고 있구나 다 안단 말입니다.
 
이러한 삼명육통을 우리가 본래는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본래는 갖추고 있는데 ,
본래 갖추고 있다고 그런다면
얼마나 소중한 보배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셈입니까?
 
그러나 우리가 제대로 잡지를 못하면 소용이 없단 말입니다.
현대란 사회는 굉장히 바쁜 시대 아닙니까.
바쁜 시대이기 때문에
말로만 얼핏 알아두고 그대로 덮어두고 말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한테 갖추고 있는 그런 보배가 우리한테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보배를 전혀 쓰지 못하고 우리가 금생을 하직하고 말아버린단 말입니다.
그럼 그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무진보화라. 무진보화가 우리 한테 있는 것인데,
우리 마음이 바로 보배인데 그 보배를 잔뜩 싸 안고서 쓰지를 못하고
그대로 묵혀 버린단 말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세 차원으로 나눈 것이 삼법인(三法印)입니다.
여러분들이 많이 듣고 불교책에서도 보고 알겠지만
그때그때 얼른 봐 버리면은 보자마자 다 잊어버린단 말입니다.
 
여러분들 기억을 환기시키기 위해서 제가 재차재차 설명을 합니다.
삼법인이란 석삼 三자, 법 法자, 도장 印 자 입니다.
삼법인이 있으면 불교이고 삼법인이 없으면 불교가 아닙니다.
따라서 (내가) 불교인(佛敎人)인가 아닌가
자기 스스로 자성해 본다고 할 때
삼법인을 내가 아는가 모르는가 이렇게 자문을 해봐야 되겠지요.
 
하나는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이라,
간단하게 그냥 무상인(無常印)이라 고 하기도 합니다.
제행(諸行)은 모든 제(諸)자, 행할 행(行)자,
모든 존재의 행상, 이것이 무상이라 덧이 없단 말입니다.
 
어째서 무상인가?
우리 중생은 언제나 변하고, 생멸(生滅)이라,
낳고 죽고, 금방금방 변하고 하는 것에 대하여
굉장히 허망하게 느끼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어찌)할 수 없단 말입니다.
일체 존재가 無常 아님이 없습니다.
어째 무상인고 하면 인연을 따라서 잠시간, 잠시간 모양을 갖춘단 말입니다.
그 기본적인 무상에 대해서 우리가 깊이 느껴야 됩니다.
어느 것도 고여 있는 것이 없단 말입니다.
어느 공간에서도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은 없습니다.
어느 시간 내에서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은 없습니다.
 
존재라는 것은 시간 공간, 아까 말씀한 존재가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언제 생각해 본다고 했을 적에
모든 존재라는 것은 사실은 시간성, 공간성이 없단 말입니다.
왜 없는가 하면은 방금 말씀한 바와 같이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존재라고 하는 것은
그때그때 순간 찰나 일초의 몇 억 분의 1동안도
쉬지 않고 변하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자기 몸을 생각해볼 때도
어제 몸, 오늘 몸 똑같거니 이렇게 생각 합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우리 몸을 구성한 세포가 어느 순 간도 머무름 없이
그때그때 변하고, 또 묵은 세포는 소멸되고,
새로운 세포 는 소생되고
이른바 신진대사를 어느 순간도 머무름 없이 일어납니다.
 
지금 우주는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제행무상이라, 우주의 모든 것은 그때그때 변화무쌍(無常)하단 말입니다.
변화 무쌍한 것은 우리 인간이 어리석게도, 아 그대로 가만 있으면 좋은 것을, 한 번 젊었으면 젊은 대로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까?
 
그러나 어언간 이십이고 삼십이고 사십이지 않습니까?
저같은 경우도 지금 사십이나 삼십대가 꼭 어제 같아요.
어제 같은데 죽음 앞에 다달아서 어서 빨리 갑시다 그런 셈 아닙니까?
그래서 제행무상이라 모든 것이
그때그때 머무름이 없이 생멸변화해마지 않는 것이 제행무상입니다.
따라서 제상무상을 긍정해야
비로소 불교 의 가르침에 대해서 첫발을 디딘 것이 되겠지요.
 
그 다음은 諸法無我라,
모든 제(諸)자, 법 법(法)자, 없을 무 (無)자, 나 아(我)자,
원래 나라는 것이 없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이 여기까지 오신 것은
자기가 소중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오신 것이지,
자기가 소중하지 않으면 여기 까지 오시겠습니까?
이렇게 비오는 날에…
그런데 無我라, 우리가 굉장히 허무를 느낀단 말입니다.
그러니 허망하지 않습니까?
분명히 존재하는데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니까 말입니다.
 
중생의 어두운 눈으로 해서는 명명백백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성자의 깨달은 눈으로 본다고 생각한다면
명명백백히 존재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증도가(證道歌)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증도가는 영가 현각스님이 도를 깨달았을 때의 게송입니다.
한문을 말씀 드려서 좀 그러실런가 모릅니다마는
제가 말씀 드리는 정도는 외워 두시면 참 좋습니다.
아주 주옥같은 말씀 이니까요.
 
몽리명명유육취(夢裏明明有六趣) 각후공공무대천(覺後空空無大千)라.
우리 중생은 사실은 꿈 속입니다.
꿈속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유육취(有六趣)라,
육취(六趣)라는 것은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입니다.
우리가 육도 윤회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 중생은 육도,
즉 지옥이나 인간이나 천상이나 이 여섯 가지를 항시 윤회합니다.
윤회도 꼭 믿으시길 바랍니 다.
사실이니까 말입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윤회고(輪廻苦)를 떠나서, 해탈로 가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고(苦)를 떠나기 위해서는 윤회고를 꼭 떠나야 됩니다.
지금 금생에 받는 고난은
과거 전생에 모두가 닦아서 우리가 그걸 받는단 말입니다.
 
또한 금생에서 몸뚱이가 사라지면은 우리 생명이 그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금생에 우리가 지은 대로, 금생에 생각하고, 금생에 생활한 대로 미래 내생에도 그리 닮은 생을 산단 말입니다.
금생에 받은 자기 몸이라든가, 자기 눈이나 코나 입이나 모두가 다
전생 에 어떻게 살았던가에 따라서 산단 말입니다.
내생도 역시 금생에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그와 같이 생을 탄단 말입니다.
 
우리 생명이라는 것은,
생명자체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 처음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불생불멸 (不生不滅)이라, 우리 생명은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것입니다.
다만 그 모양만 그때그때 변화가 있을 뿐이란 말입니다.
분명히 깊이 느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절대로 죽음이 없습니다.
우리 몸뚱이 이렇게 살다 죽어지면,
이 금쪽같은 몸뚱이가 사라졌으면 그만 아닌가?
그러나 몸뚱이 죽자마자 1초의 시차도 없이
그냥 생명을 우리가 다시 받습니다.
알고보면
우리가 가까운 사람이 돌아가신다고 해서 울고불고할 필요가 없어요.
죽자마자 바로 생을 받으니까 말입니다.
 
단지 원통한 것은 우리가 우리 눈이 어두워서,
아까 말한 삼명육통이 모자라놔서 과거도 못보고 미래도 못 보니까,
안 보이는 것은 없다 하지만은 우리 중생이 안 보인다고 다 볼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형체 이상의 것은 아무 것도 못 보지 않습니까.
 
그러나 형체 이상의 것이 없다고 하면 종교를 믿을 필요도 없지요.
석가무니 부처님이 나오시고 안 나오시고 상관없이
참다운 부처님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언제나 영원히 존재하신단 말입니다.
석가무니 부처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이나 석가무니 부처님 마음이나 말이죠.
 
석가무니 부처님은 성자니까 그 마음은 순수하고 높을 것이고
우리 마음은 별것이 아니니까 낮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불법(佛法)이 아닙니다.
 
석가무니 부처님 마음이나, 예수 마음이나, 공자 마음이나,
우리 마음이나 똑같은 마음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공부를 좀 더하고, 덜 하고 그런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그런 것은 후천적으로 좀 보탠 것이지
본래 마음 쌓는 공부를 좀 더 했다고 해서 마음이 더 불어나고
공부를 좀 못했다고 해서 마음이 줄어지고 그런것도 아닙니다.
 
배우고 안배우고 상관없이 도둑놈 마음이나,
누구 마음이나, 개 마음이나, 소 마음이나,
우리 인간 마음이나, 석가모니 마음이나 똑같은 마음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아까 말한것 같이 일체유심조라,
천지우주라는 것은 모두가 다 마음 뿐이란 말입니다.
 
제행무상... 모든 것이 다 덧이 없다, 허망하다 하는 제행무상..
그 다음에 는 제법무아라... 나라는 것이 없단 말입니다.
그때그때 깊이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자기 몸뚱이가 얼마나 소중하고 귀합니까?
몸뚱이를 위해서 남한테 구박도 하고, 
자기가 남한테 돋보이기 위해서 자기만 살고,
남은 죽든지 말든지 상관없다는 그런 점에서 모든 범죄와 죄악이 따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끼는 몸뚱이가 본래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 허무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정말로 이치로 보면 없단 말입니다.
어찌 없느냐 하면 제행 무상이니까,
모두가 다 그때그때 어느 순간도 머무름이 없이 변화해마지 않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우리가 나라고 하여 고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 니다.
우리 몸뚱이도 우리 생각도 순간 찰나도
그때그때 고여 있지 않단 말 씀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연생이니까,
모두가 인연 따라서 잠시간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지
실제로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제가 아까
영가 현각 스님이 도를 깨달을 때의 게송을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몽리명명유육취라,
꿈 속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지옥이나 아귀나 인간이나 분명히 명명 백백히 존재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각후공공무대천이라,
깨달은 뒤에는 무대천이라,
삼천대천세계가 다 모두가 텅 비어 있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 들은 오늘 여기에 오셔서
내 몸과 더불어서 이 우주가 다 텅텅 비어있다,
이런 소식을 좀 알고 가셔야 됩니다.
참말로 빈 것인데 우리가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제행이 무상하고, 제법이 무아인지라,
나라고 할 것도 없고, 너라고 할 것도 없고,
또는 산이라고 할 것도 없고, 물이라고 할 것도 없고,
산이나 물이나 모두가 다 우리 중생의 의식 차원에서
하나의 반영이 되어서, 우리가 산으로 보고 물로 보고 한단 말입니다.
 
같은 물도 사람이 보면 먹는 물이고, 용수(用水)로 쓰는 물이 되겠지오.
그러나 거기 사는 물고기가 본다고 할 땐
물고기는 물을 자기 집으로 본단 말입니다.
그럼 귀신은 어떻게 볼 것인가,
우리가 귀신도 안 보이니까 안 믿는 사람은 안 믿겠지요.
그러나 없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돌 아가시면 영가 천도 하시지 않습니까?
귀신도 분명히 존재하는 생명이란 말입니다.
인간의 제한된 안목으로 귀신이 안보일 뿐입니다.
 
그런데 귀신이 본다고 생각할 대는 이 물을 불로 봅니다.
불로 말입니다.
그럼 천상사람들은 물을 어떻게 볼 것인가?
천상사람 들은 물을 유리같은 영롱한 유리같은 보배로 봅니다.
 
그럼 부처님은 어떻게 볼 것인가.
부처님은 불심으로 봅니다.
다 부처로 본단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부처가 보면 부처로 보이고,
돼지가 보면 돼지로 보인다는 그런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그와 똑같아요.
우리 중생들의 차원에서 보는 것이 절대가 아니란 말입니다.
상대적인 하나의 가상인 것입니다.
이렇게 항시 바로 봐야 합니다.
 
假想을 가지고 고집하면 그 때는 아집(我執), 법집(法執) 그래요.
집착하면 하나의 독단, 누구나 혼자 앉아서 자기 주장을 내세우겠지요.
우리가 안다는 것은,
어린애가 금생에 나와서 이것 배우고,
저것 배우고 듣고 보고 생각하고 그런 것이
우리가 안다는 지식 아니겠습니까.
 
그런 것 가지고 자랑 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제 아무리 그런 지식을 많이 축적한다고 해도
참다운 지혜는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반야의 지혜, 반야바라밀의 참다운 지혜입니다.
 
假定을 떠난 근원적인 지혜가 반야의 지혜란 말입니다.
반야의 지혜가 있어야 우리가 중생을 떠나서 성자가 됩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영가 현각스님이란, 그분은 위대한 도인입니다.
그 분이 깨달아서 게송 을 읊은 것이 증도가라 말씀드렸지요.
몽리명명유육취,
즉 꿈 속에서 생각 할 때는 지옥이나 아귀나 인간 이런 것이 분명히 있지마는, 각후공공무대천이라, 깨달음의 뒤에는 모두가 텅텅 비어있단 말입니다.  
 
어찌 비어있는 것인가?
이른바 무상이고 무아이기 때문에 어느 것도 고여 있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 중생이 지금 잘못보고 있다고 보는 것이지
모두가 다 무상이고 무아이기 때문에
그것을 실존적으로 있다고 볼 수가 없단 말입니다.
하나의 假裝에 불과한 것입니다.
 
내가 아플때, 되게 아프면 참기가 곤란스럽지 않습니까?
주사도 맞고 약을 먹고 우리가 법석을 많이 떨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실은 몽원(마취) 시키면 아프다는 것도 아프지 않단 말입니다.
아프다는 그것도 우리 인간의 오관(五官)이 아프다고 느끼는 것이지
아픔이 본래로 있는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달마스님한테 혜가스님이 『스승이시여, 제가 지금 마음이 불안스럽습니다. 제 마음을 불안에서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하니까 달마스님께서 『그 럼 네가 불안스럽다는 마음을 가져오너라. 그럼 내가 너를 안심을 시켜 주 리라』라고 말했단 말입니다.
 
(혜가스님이) 아무리 아무리 불안한 마음을 찾아봐도 어디에도 없습니다.
불안한 마음이나 불안하지 않은 마음이나 마음이라는 것이 존재가 있습니까? 그래서 혜가스님이 『아무리 불안한 마음을 찾아봐도 어디에도 없습 니다』
그러니까 달마스님이 혜가스님한테 하시는 말씀이 그러면 『나는 이미 그대를 안심시켜 줬느니라』
이 마음이라는 것이 어디에 있어서, 모양이 있어서 아프네, 어쩌네 불안해 한단 말이지, 본래 없는 것을 우리가 있다고 가정하고서 스스로 번뇌를 만들어서 괴로워한단 말입니다.
 
마음은 그와 같이 바로 불심입니다.
우주라는 것은 모두가 다 불심 뿐이라, 이른바 마음 뿐입니다.
우주라는 것은 마음 뿐입니다.
 
형상이란 것은 그 마음이 잠시간,
마음의 활동으로 잠시간 이렇게 보이고, 인연 따라서 모양 을 나툰 것이지
모양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행무상, 제법무아라.
모든 형상은 무상한 것이고 실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야말로 하나의 假想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망상으로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제법무아라...
그러기 때문에 나라고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제행무상이고 제법무아라,
모두가 다 허무하고 덧이 없고 나라고 할 것도 없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인생이 살 필요가 무엇이 있는가,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행복하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 부처님 가르침,
성자의 가르침은 그와 같이 허무로 끝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
번뇌를 다 없애 버린 자리에는 적정의 행복이라.
 
우리의 몸이나 마음이나 조금도 그 때는 모두가 다 고통이 없이
영생의, 영원히 행복을 누리는 그런 자리가 이른바 열반적정입니다.
열반이라는 것은
모든 번뇌가 다 소멸되어서
완전무변(完全無邊)의 행복의 자리가 이것이 열반입니다.
그런 것도 역시 있다, 없다 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멸(滅)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불교에서 상징적인 의미로 할 때는
극락세계나 극락정토 그런 세계가 열반의 세계가 되겠지요.
 
따라서 우리 불교가 다른 가르침에 비교해서
불교가 불교인 점은
방금 제가 말씀 드린 세 가지의 진리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진리의 확실한 보장,
이것이 이른바 모든 것은 다 무상하다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것이든지 존재하는 것은 다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변화해서 마지않는다.
 
제행무상하고 뒤따라서 무상하기 때문에 나라고 할것도 없이,
일체 존재는 나라고 고집할 것도 없이
제법이 무아라, 모두가 다 내가 없단 말입니다.
 
일체존재가 다 무상하고 무아인데
이런 자리를, 우리 중생들은 못 느끼는 것인데,
우리는 제아무리 얻은 여러가지 학문을 공부했다 하더라도
중생인 한에는 항시 무상과 무아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냥 다행히 깨달은 성자의 가르침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 따라서
비로소 우리가 영원히 변치않는
참다운 한도 끝도 없는 행복의 자리가 열린
이른바 열반이고 열반적정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이와같이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 이것이 이른바 삼법인이라, 이것이 세가지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진리란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서 열반적정이라 하는 영원한 진리를 터득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겠지요.
 
기독교는 기독교대로 주기도문이나 여러 가지의 기도하는 법들이 많이 있고, 이슬람교도들은 이슬람교도대로, 유교도(儒敎徒)는 유교도대로 마음을 깨달아서 성자가 되는 길이 있지 않습니까?
불교도 너무나 수행방법이 많단 말입니다.
많아서 우리가 과연 어느 것을 취할 것인가?
또 말씀하는 사람들은 자기 법이 제일 좋다고 역설을 해야 되겠지요.
 
또 공부를 하다보면 무엇을 얻은 바가 있어 놓으면
내가 한 것이 제일 좋다 이렇게 고집할 수가있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작은 가르침은 그때그때 한가지 밖에는 없겠지요.
 
길도 산중에 어디로 가는데 목적지까지 가는 데는 한길만 빤히 있지만은
대도무문이라, 참 다운 대도로 가는 큰길은 길이 많단 말입니다.
서로 가도 되고 동으로 가도 되고 한단 말입니다.
 
어느 스님이 중국 조주스님한테 가서
『조주가 어디 있습니까?』 물었습 니다.
조주라는 것은 조주스님이 사는땅 이름인데
『조주가 어디 있습니 까?』라 물으니
조주스님이 대답한 말씀이
『북문 남문 서문 동문이라, 그 조주에 들어가는 길은 어느 한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동문이나 북문이나 남문이나 서문이나 다 통일이라.
 
즉 어떤 길을 가던 간에 부처님께서 하신 법문은 다 통합니다.
우리가 주문을 외나, 염불을 하나, 또는 화두공안을 참구하나,
부처님께서 하신 법은 다 통합니다.
 
안 통했으면 그 위대한 도인들이 이런 법 저런 법을 내세웠겟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공부하는 수행법을 배울 때도
꼭 자 기가 인연 따라서,
자기가 존경하는 스님네 한테 받으시면
이 법이 최고다 하고 공부하는 것은 좋은데,
다른 것은 별로 신통치 않다하면 그런것도 논쟁이 되고 혼란스럽게 되겠죠.
 
따라서 아까 말씀한 바와 같이 대도무문이라...
그 大道라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 같은 그 가르침은
하도 광대무변하기 때문에
부처님 가르침은 어디가 있고 어디가 없는것이 아니라
우주 자체 어느곳도 부처님 가르침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불심이나 불성이나 이런것은 어디가 있고 어디가 없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고 지옥에도 있고,
부처님 그 불심, 불성은 충만해 놔서
지옥도 불성으로 되어있고 아귀도 불성으로 되어있고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일 좋다는 극락도 불성으로 되고 어느것도 불성으로 안된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부처님 법은 어디나 다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팔만사천 법문은 모두다 無門可入이라,
팔만사천법문은 문마다 다 통하는 법이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의 방법에 집착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法執이다,
집착하는 그 자체가 벌써 우리 마음을 우매하게 합니다.
 
다 털어 버리고서 부처님 법은 팔만사천법문이 다 해탈이라 하는 대도로 통하는 문이지만은 나한테는 내 성격이 지성적이니까 지성적인 걸 택하면 되겠구나 이럴 수가 있고 말입니다.
내 성격은 감성적이니까 그리움과 황홀한 그야말로 戀慕, 欽慕하는 그러한 방법을 취해야겠구나 이런 것은 자기 스스로 판단해서 택하면 되겠지요.
 
그러나 대체로 여러 가지 수행법이 많이 있지만
몇가지만 여러분께 모형 적으로 말씀 드려야 되겠지요.
 
참선이라는 것은
일반 다른 법하고 무엇이 어떻게 다른 게 참선이라 할 것인가?
그리고 또 여러분들이 생각하실 때도
참선은 가장 고도한 고차원의 법이라고 하는데
기왕이면 나도 고차원의 법으로 공부를 해야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서 자료도 뒤지고 그러겠지요?
 
어떻게 내가 공부해야 참선을 하게 될 것인가?
참선은 참 상당히 까다롭고 어려운 것이 아닌가?
 
스님도 출가해서 몇 십년을 닦아도 안 되는 것이고,
어떤 사람은 참선하다 하다 그만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런 참선을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렇게 의문을 품으시겠지요.
 
참선을 하려면 先悟後修가 되야 참선이 됩니다.
잘 기억해 두 십시오.
 
먼저 선(先), 깨달을 오(悟), 뒤 후(後), 닦을 수(修),
선오후수가(先 悟後修) 되야 참선이 되는 것이지,
선오후수가 못되면 애만 쓰고있지 사실은 참선이 못돼요.
 
그러면 선오후수라는 것은 무엇인가?
 
방금 말한 바와같이 먼저 깨달은 뒤에 닦는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깨달음에 있어서는,
이런 것도 개념을 확실히 구분해서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깨달음에 있어서는 이치로 깨닫는,
이론적으로 깨닫는 그런 것을 해오(解悟)라 그래요.
풀 해(解), 깨달을 오(悟).
 
그런데 이치로 깨닫는 이것은 이론적인 분야이기 때문에
그걸로 해서는 우리 마음의 불안의식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길을 가는데 있어서 길을 모르면 길을 갈수가 없겠죠.
그러나 길을 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실천으로 뚜벅뚜벅 걷지 않는다면 못 간단 말입니다.
 
우선은 길이 어디로 해서 어디로 간다는 수를 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해오(解悟)라 합니다.
이치로 안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치로 아는 것과 또는 우리가 실천해서 아는것이 있습니다.
실천은 불교말로 실참실구 (實參實求)라.
참말로 자기 스스로 온 힘을 다해서 닦는단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아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증오(證悟)라 해요.
 
그래서 우리가 아까 말한
해오(解悟)하고 증오(證悟)하고 구분을 확실히 하셔야 됩니다.
 
보통사람들은 재주가 있어서 조금만 공부하다 좀 알면 내가 다알아 버렸다, 이런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아는 것을 참선하는 분 중 에선 문자선(文字禪)이라 하지요.
참답게 아는 것이 아니란 말이지요.
이것 은 참다운 선(禪)은 못됩니다.
참다운 선은 못되나 우선은 선행적으로 우선 이치를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이렇게 이치를 알아야 바른 깨달음으로 나갈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 이치를 아는 것을 보고 선오(先悟) 그래요.
그리고 후수(後修)라.
먼저 이치를 알고 닦아야 참다운 참선이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치를 모르고서
그냥 덮어놓고서 참선한다고 앉아 있다고 참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은 이치를 안다는 것은 어떻게 안다는 것인가?
이렇게 의문을 품 을 수가 있지요.
 
이치를 안다는 것은 아까도 대체로 말씀드렸습니다만
그 우주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이론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물질은
물질 따로 있고, 마음은 마음 따로 있고 이렇게 분열 해서 보지 않습니까?
그러나 분열해서보면 그 때는 이치를 안다고 못하는 것입니다.
이치를 안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가 이치를 안다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삼천대천세계 이것은 불교우주관인데,
이 우주가 나와 더불어서 모두가 다 하나의 불심이다...
다 하나의 불성이다...
이렇게 알아야 이치를 안다는 것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참선이라는 것은
그 본체, 모든 존재 근원적인 본체를 안 떠나야 비로소 참선이 돼요.
 
근원적인 뿌리, 근원적인 그 본체, 근원적인 바탕을 떠나 버리면
그 때는 참선이라고 말을 붙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참선한다고 앉아서 애를 많이 쓰는 것은 아주 가상하게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참선이 되는 것이 아니예요.
 
그 모든 것이 나와 더불어서 하나의 생명이다,
또 그와 동시에 하나의 생명은 만물의 자유다,
자비도 원만하고, 지혜도 원만하고 ,능력도 원만하고,
행복도 원만하고 말입니다.
 
모두가 다 원만 무결하게 갖추고 있는 자유다, 이렇게 되야 한단 말입니다.
이렇게 알아야 先悟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 분들이 다 인연 따라서
가령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든
또는 옴마니반메훔 주문을 외든
또는 화두공안을 해서 문자화두를 하든
이뭣꼬 화두를 하든 뜰 앞의 잣나무 화두를 하든
그것은 인연 따라서 다 좋습니다.
 
다 좋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방금 말씀 드린 것처럼 선오후수라.
모든 존재가 오직 진여불성(眞如佛性)뿐이다.
진여를 보면 진여라고 말하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의 생명이니까 그 때는 불성 그렇게 부른단 말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항시 생명적으로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야 내 마음하고 무관하지 않고 하나란 말입니다.
우주란 것은 어느것이나 다름없이 하나의 생명입니다.
하나의 생명인것을
우리 중생이 무명 때문에 가리워서,
무지에 가리워서 느끼질 못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불교 신앙인이 됐다고 생각할 때는,
불교를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불교를 믿는 종교로 해서
방금 제가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우주를 일원적인 하나의 생명이다,
이렇게 확신이 되야 비로소 불교신도라 할 수가 있어요.
부처님이 그와 같이 한도 끝도 없는 생명 자체니까 말입니다.
 
따라서 참선이라는 것은
그 자리, 바로 실체 자리, 그 바탕자리를 우리가 떠나지 않아야 참선이 됩니다.
이뭣고 화두를 하고, 다른 문자화두를 한다고 하더라도
덮어놓고 해서 의심한단 말입니다.
덮어놓고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면 틀림없이 억지로 하고있는 것이지요.
억지로하면 상기병이 걸립니다.
상기병 걸리면 저는 여러사람 봤습니다만 그것이 잘 안 낫습니다.
참선공부해서 시원스러운 서늘한 기운이 위로 올라가고,
뜨끈뜨근 기운이 아래로 내려가야 그래야 그것이 정상입니다.
항시 가슴이나 머리가 시원하고 눈도 그러면 빛나고 그러겠죠.
그렇게 그 뜨거운 기운이 좋지않은 기운이 아래고 쑥 내려가서
단전 저아래 머무르고
그리고 맑은 기운이 올라가서
등골이 시원하고 눈도 시원하고 머리도 시원 스럽단 말입니다.
 
그때는 저절로 혼침이 올수가 없습니다.
꾸벅꾸벅하는 것은 모두가 다 그만치 참선이 공부가 잘못되어서 그래요.
 
공부가 잘되면 방금 말마따나 등골이 시원하고 머리가 시원한데
어떻게해서 혼침이나 꾸벅꾸벅하는 것이 우리한테 붙을수가 있습니까.
부처님 공부는 특히 참선공부는 제일 편한 것입니다.
부처님 공부는 제일 편한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가 느끼셔야 됩니다.
부처님공부 어렵다고 절대로 생각하지 말으십시오.
 
왜 제일 편한 것인가?
그 우주의 근원적인 도를 따른단 말이예요.
우리 중생이 그 우주의 도리,
우주의 그 자연적인 도리에 빗나가니까
자꾸만 고생을 스스로 사서 한단 말입니다.
 
부모님한테 효성하는 것이나
남한테 베푸는 것이 왜 우주의 도리에 따르는 것인가.
본래로 본다고 생각할 때 나와 남이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닌데
우리 중생이 잘못 봐서 나는 나고, 너는 너다 이런단 말입니다.
 
그래서 네 것이니 좋던가 말던가 상관 안 해 버린단 말이예요.
그러나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무아라,
본래 내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저 사람이나 나나 결과는 하나의 똑같은 생명이란 말입니다.
하나의 생명이다 이렇게 생각할때
우리가 함부로 다른 사람을 취급을 하겠습니 까?
 
하나의 생명이라 생각할 때
우리가 돼지고기나 소고기를 먹기를 좋아 하겠습니까?
재가불자님들도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부처님 법을 그렁저렁 말로 읽고 말려면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 생명적으로 있다고 생각할 때는
부처님 말씀을 철저히 믿어야 됩니다.
 
사람 사람만이 가진 생명이 아니란 말입니다.
돼지나 소나 닭이나 뭐나 다 같은 생명 입니다.
 
단지 인연 따라 잠시간 입장이 돼지가 되고, 소가 되고 한 것이지
우리가 잘못 살면은 내생에는 틀림없이 소가 되고, 개가 되고 하겠지요.
 
생명은 절대로 그와 같이 구분이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주적인 하나의 생명인데
우리가 어떻게 사는가에 따라서
잠시간 이렇게 저렇게 모양을 달리 할 뿐이지
하나의 생명 이라 할 때는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이라 절대 변동이 없단 말입니다.
 
그렇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가 잘되기 위해서 남한테 함부로 하겠습니까?
 
또 아까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자기가 좀더 잘먹기 위해서,
정력을 좀더 내기 위해서 고기를 많이 먹으려고 애쓰지 않습니까?
재가불자님들도 좀 어려우실 테지만 가급적이면 먹지 마십시오.
나중에 공부가 되면 그 때는 먹으래도 못 먹지만,
가급적이면 육식을 안 하셔야 됩니다.
 
그것이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돼지나 소나 죽을 때 그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그렇게 하는 것 보십시오.
그렇게 비명을 지르고 죽을 때에
그 독한 진심(瞋心)이 돼지고기 소고기 하나하나의 세포에 묻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무슨 까닭으로 먹을 것인가?
말이 좀 빗나갔습니다는
아까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참선법,
이것이 세상 에는 제일 쉬운 법입니다.
 
그 우주의 도리를 따라서 생활한단 말입니다.
우주가 바로 부처님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고서,
문자화두를 들고 또는 나무아미타불 화두를 들고,
이렇게 하면은 그 때는 공부가 상당히 잘 되어간단 말입니다.
 
그러나 우주와 나와 이것을 한계를 짓고, 구분을 짓고,
내가 저 사람 저 사람이 나한테 별로 기분 좋게 안하는데
저놈이 없으면 될 것인데...
이렇 게 생각하면 어떻게 공부가 잘 될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옆에 사람이 좋으나 나쁘나 다 부처님인데,
어느 것도 부처님 아닌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에게 가장 좋은 대접이 무엇인가?
그 사람을 부처님 같이 대접한단 말입니다.
주 생긴대로 우주의 법, 도리가 그렇습니다.
 
말하자면 그와 같이 자기 남편한테나, 자기 아내한테나,
자기 부모님한테나,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공대인가?
이것도 역시 부처님같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같이 생각하는 것이 가장 좋은 대접이고,
그것이 우주의 법대로 사는 도리이고,
가장 순탄하고 평화와 모든 행복을 보장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길 가운데 참선하는 것이 가장 고도의 수행법이 아닙니까?
고도의 수행법이라는 것은
그냥 어렵고 까다로워서 고도의 수행법이라고 해서가 아닙니다.
가장 쉽단 말입니다.
 
우주 생긴대로, 진리 그대로 공부하는 이것이 바로 참선이란 말입니다.
보통 공부로는
우리가 따로 있고, 내가 따로 있고, 너와 남이 따로 있고 그러지만은
참선 공부라는 것은 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본단 말입니다.
 
참선 공부라는 것은 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보고,
내가 그 가운데 들어가서 모 두가 다, 너와 나가 없는 부처님 뿐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염불도 하고 화두도 참구하고 그래야 참다운 공부가 됩니다.
 
가령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왼다 하더라도
그냥 나무아미타불 외운 다면 부처님이 와서 나한테 가피를 주신다...
이런 정도는 타력신앙입니다.
사실 이것은 아직은 방편신앙입니다.
 
참다운 염불이라는 것은
나나 너나 부처님이나,
우주와 모두가 다 하나의 모두가 다 부처님이다,
원형의 원만한 하나의 부처님이다,
그 만공덕을 갖춘 하나의 부처님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염불을 해야 참다운 염불입니다.
 
여기에는 타력(他力)과 자력(自力)이 다 들어 있습니다.
화두를 의심한다 하더라도, 화두를 참구한다 하더라도
문자화두를 하나, 이뭣고 화두를 하나
또는 그냥 아미타불 화두를 하나 다 똑 같은 것이지만
의심하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그 본래 자리 근원적인 자리를 안 떠나야 참다운 참선입니다.
 
그렇게 해서 근원자리를 안 떠나고서
일체 존재가
그 만능을 갖춘,
행복이나 지혜나 자비나 모든 걸 갖춘 불성뿐이다,
나도 본래 부처인데,
내가 잘 못 살아서 잠시간 범부가 됐는데
그 佛性으로 가는 것은 내 고향으로 가는 길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참선한다고 생각할 때에
화두를 의심하거나 무엇을 하거나 다 공부가 순탄하게 풀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셔서 방편적인 공부를 하지 말으시고서,
우주 생긴대로, 진리 그대로 공부하는 것이
참다운 참선이고 참다운 염불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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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있으시면 하시지요.」
 

임진강 황포돛배 / 두지나루 -백야님 촬영

 

두지나루 황포돛배 선착장에 도착하면서 그 옛날 이곳에서 황포돛배가 출발하여

서울 마포나루까지 오가며 상거래가 이루어 졌다는 것을 생각해도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지만 황포돛배를 타고 고랑포까지 40여분간을 내리고 오르는 동안

잠시 그 옛날 임진강을 오르내리던 황포돛배를 생각해보는 상상의 나래를 펴 봅니다.

강의 넓이는 별로 넓지 않지만 수심이 10m가 넘고 유속이 빠르기가 대단하다는

임진강의 5km남짓한 두지나루와 고랑포 사이를 오가며 좌우측으로

'자장리 적벽(赤壁)'이 나타나는데, 윗부분은 책을 꽂은 듯 수직으로 층이 났고,

아랫부분은 시루떡처럼 수평으로 층층이 돌이 쌓여

60만년 전쯤 용암이 흘러 형성된 현무암 석벽(石壁)을 보는 즐거움도 함께 합니다.

 

황포돛배의 반환점은 고랑포구.

6.25전에는 북한의 개성과 서울의 마포나루를 오가는 상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화신백화점까지 있었던 활기찬 포구였다고 하지만 지금은 숲이 우거지고

남방한계선인 군사지역이 되여 있어 그 옛날 흔적은 찿아 볼길이

없고 68년 김신조 무장공비들이 수심이 앝은 고랑포구를

통해 임진강을 건너 왔기에 김신조 무장공비

침투로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은 동력으로 운항을 하는 황포돛배지만 그 옛날의 황포돛배를 본따서

만든 돛배를 타고 민간인들이 출입 할수 없던 임진강을

돌아 보는 기분은 북녘이 고향인 백야에게는 또 다른 의미 있는 시간들이였습니다.

황포돛배의 유람을 끝내고 조금전 배를 타고 반환점을 돌아 왔던 고랑포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능을 돌아 보기 위해 장남교를 건너 3km 정도 떨어진 경순왕능

으로 향합니다.장남교 교각엔 지난해 여름 북한에서 갑자기 땜을 방류 하여

피서객 6명이급류에 사고를 당한 장소의 기억을 말해주는 듯 교각에 걸린 나뭇가지가

그대로 걸려 있어 안타까움을 더합니다.

 

고랑포구엔 옛 번화하던 흔적은 간곳이 없고 잡초만 무성하고...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이 인접해 있어 경순왕능 주위엔 지뢰조심이란 팻말이

최전방 지대임을실감나게 합니다.

신라의 마지막 왕(56대)으로서 즉위8년만에

신라왕조를 고려의 왕건에게 평화적으로 넘겨줬던 경순왕능을 돌아 보면서

신라의 천년 왕조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경주 밖의 머나먼 이곳 파주 땅에

묻혀 있는 경순왕의 심정은 어떻했을까를 생각 해 보며 귀가길 마지막 코스로

잡혀 있는 원당의 종마공원으로 발길을 지쵹 합니다.

 

 

 

 

 

 

 

 

 

 

 

 

 

 

 

 

 

 

 

 

 

 

 

 

 

 

 

 

 

 

 

 

 

 

 

 

 

 

 

 

 

 

 

 

 

 

 

 

 

 

 

 

 

 

 

 

 

 

 

 

 

 

 

 

 

 

 

 

 

 

 

 

 

 

 

 

 

 

 

 

 

 

 

 

 

 

 

 

 

 

 

 

 

 

 

 

 

 

 

 

 

 

 

 

 

 

 

 

 

 

 

 

 

 

 

 

 

 

 

 

 

 

 

 

 

 

 

 

 

 

 

 

 

 

 

 

 

 

 


  신나는 현철 노래모음   

01. 내마음 별과같이   02. 앉으나 서나 당신생각  03. 사랑은 나비인가봐

04. 못난 내 청춘       05. 청춘을 돌려다오         06. 사랑의 배신자

07. 추억의 테헤란로   08. 울어라 열풍아           09. 황포돗대

10. 무정한 그사람      11. 첫사랑 마도로스        12. 쌍고동우는 항구

13. 아메리칸 마도로    14. 살아있는 가로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