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중생이 망상으로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제법무아라...
그러기 때문에 나라고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제행무상이고 제법무아라,
모두가 다 허무하고 덧이 없고 나라고 할 것도 없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인생이 살 필요가 무엇이 있는가,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행복하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 부처님 가르침,
성자의 가르침은 그와 같이 허무로 끝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
번뇌를 다 없애 버린 자리에는 적정의 행복이라.
우리의 몸이나 마음이나 조금도 그 때는 모두가 다 고통이 없이
영생의, 영원히 행복을 누리는 그런 자리가 이른바 열반적정입니다.
열반이라는 것은
모든 번뇌가 다 소멸되어서
완전무변(完全無邊)의 행복의 자리가 이것이 열반입니다.
그런 것도 역시 있다, 없다 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멸(滅)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불교에서 상징적인 의미로 할 때는
극락세계나 극락정토 그런 세계가 열반의 세계가 되겠지요.
따라서 우리 불교가 다른 가르침에 비교해서
불교가 불교인 점은
방금 제가 말씀 드린 세 가지의 진리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진리의 확실한 보장,
이것이 이른바 모든 것은 다 무상하다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것이든지 존재하는 것은 다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변화해서 마지않는다.
제행무상하고 뒤따라서 무상하기 때문에 나라고 할것도 없이,
일체 존재는 나라고 고집할 것도 없이
제법이 무아라, 모두가 다 내가 없단 말입니다.
일체존재가 다 무상하고 무아인데
이런 자리를, 우리 중생들은 못 느끼는 것인데,
우리는 제아무리 얻은 여러가지 학문을 공부했다 하더라도
중생인 한에는 항시 무상과 무아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냥 다행히 깨달은 성자의 가르침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 따라서
비로소 우리가 영원히 변치않는
참다운 한도 끝도 없는 행복의 자리가 열린
이른바 열반이고 열반적정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이와같이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 이것이 이른바 삼법인이라, 이것이 세가지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진리란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서 열반적정이라 하는 영원한 진리를 터득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겠지요.
기독교는 기독교대로 주기도문이나 여러 가지의 기도하는 법들이 많이 있고, 이슬람교도들은 이슬람교도대로, 유교도(儒敎徒)는 유교도대로 마음을 깨달아서 성자가 되는 길이 있지 않습니까?
불교도 너무나 수행방법이 많단 말입니다.
많아서 우리가 과연 어느 것을 취할 것인가?
또 말씀하는 사람들은 자기 법이 제일 좋다고 역설을 해야 되겠지요.
또 공부를 하다보면 무엇을 얻은 바가 있어 놓으면
내가 한 것이 제일 좋다 이렇게 고집할 수가있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작은 가르침은 그때그때 한가지 밖에는 없겠지요.
길도 산중에 어디로 가는데 목적지까지 가는 데는 한길만 빤히 있지만은
대도무문이라, 참 다운 대도로 가는 큰길은 길이 많단 말입니다.
서로 가도 되고 동으로 가도 되고 한단 말입니다.
어느 스님이 중국 조주스님한테 가서
『조주가 어디 있습니까?』 물었습 니다.
조주라는 것은 조주스님이 사는땅 이름인데
『조주가 어디 있습니 까?』라 물으니
조주스님이 대답한 말씀이
『북문 남문 서문 동문이라, 그 조주에 들어가는 길은 어느 한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동문이나 북문이나 남문이나 서문이나 다 통일이라.
즉 어떤 길을 가던 간에 부처님께서 하신 법문은 다 통합니다.
우리가 주문을 외나, 염불을 하나, 또는 화두공안을 참구하나,
부처님께서 하신 법은 다 통합니다.
안 통했으면 그 위대한 도인들이 이런 법 저런 법을 내세웠겟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공부하는 수행법을 배울 때도
꼭 자 기가 인연 따라서,
자기가 존경하는 스님네 한테 받으시면
이 법이 최고다 하고 공부하는 것은 좋은데,
다른 것은 별로 신통치 않다하면 그런것도 논쟁이 되고 혼란스럽게 되겠죠.
따라서 아까 말씀한 바와 같이 대도무문이라...
그 大道라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 같은 그 가르침은
하도 광대무변하기 때문에
부처님 가르침은 어디가 있고 어디가 없는것이 아니라
우주 자체 어느곳도 부처님 가르침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불심이나 불성이나 이런것은 어디가 있고 어디가 없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고 지옥에도 있고,
부처님 그 불심, 불성은 충만해 놔서
지옥도 불성으로 되어있고 아귀도 불성으로 되어있고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일 좋다는 극락도 불성으로 되고 어느것도 불성으로 안된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부처님 법은 어디나 다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팔만사천 법문은 모두다 無門可入이라,
팔만사천법문은 문마다 다 통하는 법이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의 방법에 집착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法執이다,
집착하는 그 자체가 벌써 우리 마음을 우매하게 합니다.
다 털어 버리고서 부처님 법은 팔만사천법문이 다 해탈이라 하는 대도로 통하는 문이지만은 나한테는 내 성격이 지성적이니까 지성적인 걸 택하면 되겠구나 이럴 수가 있고 말입니다.
내 성격은 감성적이니까 그리움과 황홀한 그야말로 戀慕, 欽慕하는 그러한 방법을 취해야겠구나 이런 것은 자기 스스로 판단해서 택하면 되겠지요.
그러나 대체로 여러 가지 수행법이 많이 있지만
몇가지만 여러분께 모형 적으로 말씀 드려야 되겠지요.
참선이라는 것은
일반 다른 법하고 무엇이 어떻게 다른 게 참선이라 할 것인가?
그리고 또 여러분들이 생각하실 때도
참선은 가장 고도한 고차원의 법이라고 하는데
기왕이면 나도 고차원의 법으로 공부를 해야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서 자료도 뒤지고 그러겠지요?
어떻게 내가 공부해야 참선을 하게 될 것인가?
참선은 참 상당히 까다롭고 어려운 것이 아닌가?
스님도 출가해서 몇 십년을 닦아도 안 되는 것이고,
어떤 사람은 참선하다 하다 그만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런 참선을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렇게 의문을 품으시겠지요.
참선을 하려면 先悟後修가 되야 참선이 됩니다.
잘 기억해 두 십시오.
먼저 선(先), 깨달을 오(悟), 뒤 후(後), 닦을 수(修),
선오후수가(先 悟後修) 되야 참선이 되는 것이지,
선오후수가 못되면 애만 쓰고있지 사실은 참선이 못돼요.
그러면 선오후수라는 것은 무엇인가?
방금 말한 바와같이 먼저 깨달은 뒤에 닦는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깨달음에 있어서는,
이런 것도 개념을 확실히 구분해서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깨달음에 있어서는 이치로 깨닫는,
이론적으로 깨닫는 그런 것을 해오(解悟)라 그래요.
풀 해(解), 깨달을 오(悟).
그런데 이치로 깨닫는 이것은 이론적인 분야이기 때문에
그걸로 해서는 우리 마음의 불안의식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길을 가는데 있어서 길을 모르면 길을 갈수가 없겠죠.
그러나 길을 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실천으로 뚜벅뚜벅 걷지 않는다면 못 간단 말입니다.
우선은 길이 어디로 해서 어디로 간다는 수를 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해오(解悟)라 합니다.
이치로 안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치로 아는 것과 또는 우리가 실천해서 아는것이 있습니다.
실천은 불교말로 실참실구 (實參實求)라.
참말로 자기 스스로 온 힘을 다해서 닦는단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아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증오(證悟)라 해요.
그래서 우리가 아까 말한
해오(解悟)하고 증오(證悟)하고 구분을 확실히 하셔야 됩니다.
보통사람들은 재주가 있어서 조금만 공부하다 좀 알면 내가 다알아 버렸다, 이런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아는 것을 참선하는 분 중 에선 문자선(文字禪)이라 하지요.
참답게 아는 것이 아니란 말이지요.
이것 은 참다운 선(禪)은 못됩니다.
참다운 선은 못되나 우선은 선행적으로 우선 이치를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이렇게 이치를 알아야 바른 깨달음으로 나갈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 이치를 아는 것을 보고 선오(先悟) 그래요.
그리고 후수(後修)라.
먼저 이치를 알고 닦아야 참다운 참선이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치를 모르고서
그냥 덮어놓고서 참선한다고 앉아 있다고 참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은 이치를 안다는 것은 어떻게 안다는 것인가?
이렇게 의문을 품 을 수가 있지요.
이치를 안다는 것은 아까도 대체로 말씀드렸습니다만
그 우주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이론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물질은
물질 따로 있고, 마음은 마음 따로 있고 이렇게 분열 해서 보지 않습니까?
그러나 분열해서보면 그 때는 이치를 안다고 못하는 것입니다.
이치를 안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가 이치를 안다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삼천대천세계 이것은 불교우주관인데,
이 우주가 나와 더불어서 모두가 다 하나의 불심이다...
다 하나의 불성이다...
이렇게 알아야 이치를 안다는 것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참선이라는 것은
그 본체, 모든 존재 근원적인 본체를 안 떠나야 비로소 참선이 돼요.
근원적인 뿌리, 근원적인 그 본체, 근원적인 바탕을 떠나 버리면
그 때는 참선이라고 말을 붙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참선한다고 앉아서 애를 많이 쓰는 것은 아주 가상하게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참선이 되는 것이 아니예요.
그 모든 것이 나와 더불어서 하나의 생명이다,
또 그와 동시에 하나의 생명은 만물의 자유다,
자비도 원만하고, 지혜도 원만하고 ,능력도 원만하고,
행복도 원만하고 말입니다.
모두가 다 원만 무결하게 갖추고 있는 자유다, 이렇게 되야 한단 말입니다.
이렇게 알아야 先悟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 분들이 다 인연 따라서
가령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든
또는 옴마니반메훔 주문을 외든
또는 화두공안을 해서 문자화두를 하든
이뭣꼬 화두를 하든 뜰 앞의 잣나무 화두를 하든
그것은 인연 따라서 다 좋습니다.
다 좋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방금 말씀 드린 것처럼 선오후수라.
모든 존재가 오직 진여불성(眞如佛性)뿐이다.
진여를 보면 진여라고 말하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의 생명이니까 그 때는 불성 그렇게 부른단 말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항시 생명적으로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야 내 마음하고 무관하지 않고 하나란 말입니다.
우주란 것은 어느것이나 다름없이 하나의 생명입니다.
하나의 생명인것을
우리 중생이 무명 때문에 가리워서,
무지에 가리워서 느끼질 못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불교 신앙인이 됐다고 생각할 때는,
불교를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불교를 믿는 종교로 해서
방금 제가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우주를 일원적인 하나의 생명이다,
이렇게 확신이 되야 비로소 불교신도라 할 수가 있어요.
부처님이 그와 같이 한도 끝도 없는 생명 자체니까 말입니다.
따라서 참선이라는 것은
그 자리, 바로 실체 자리, 그 바탕자리를 우리가 떠나지 않아야 참선이 됩니다.
이뭣고 화두를 하고, 다른 문자화두를 한다고 하더라도
덮어놓고 해서 의심한단 말입니다.
덮어놓고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면 틀림없이 억지로 하고있는 것이지요.
억지로하면 상기병이 걸립니다.
상기병 걸리면 저는 여러사람 봤습니다만 그것이 잘 안 낫습니다.
참선공부해서 시원스러운 서늘한 기운이 위로 올라가고,
뜨끈뜨근 기운이 아래로 내려가야 그래야 그것이 정상입니다.
항시 가슴이나 머리가 시원하고 눈도 그러면 빛나고 그러겠죠.
그렇게 그 뜨거운 기운이 좋지않은 기운이 아래고 쑥 내려가서
단전 저아래 머무르고
그리고 맑은 기운이 올라가서
등골이 시원하고 눈도 시원하고 머리도 시원 스럽단 말입니다.
그때는 저절로 혼침이 올수가 없습니다.
꾸벅꾸벅하는 것은 모두가 다 그만치 참선이 공부가 잘못되어서 그래요.
공부가 잘되면 방금 말마따나 등골이 시원하고 머리가 시원한데
어떻게해서 혼침이나 꾸벅꾸벅하는 것이 우리한테 붙을수가 있습니까.
부처님 공부는 특히 참선공부는 제일 편한 것입니다.
부처님 공부는 제일 편한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가 느끼셔야 됩니다.
부처님공부 어렵다고 절대로 생각하지 말으십시오.
왜 제일 편한 것인가?
그 우주의 근원적인 도를 따른단 말이예요.
우리 중생이 그 우주의 도리,
우주의 그 자연적인 도리에 빗나가니까
자꾸만 고생을 스스로 사서 한단 말입니다.
부모님한테 효성하는 것이나
남한테 베푸는 것이 왜 우주의 도리에 따르는 것인가.
본래로 본다고 생각할 때 나와 남이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닌데
우리 중생이 잘못 봐서 나는 나고, 너는 너다 이런단 말입니다.
그래서 네 것이니 좋던가 말던가 상관 안 해 버린단 말이예요.
그러나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무아라,
본래 내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저 사람이나 나나 결과는 하나의 똑같은 생명이란 말입니다.
하나의 생명이다 이렇게 생각할때
우리가 함부로 다른 사람을 취급을 하겠습니 까?
하나의 생명이라 생각할 때
우리가 돼지고기나 소고기를 먹기를 좋아 하겠습니까?
재가불자님들도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부처님 법을 그렁저렁 말로 읽고 말려면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 생명적으로 있다고 생각할 때는
부처님 말씀을 철저히 믿어야 됩니다.
사람 사람만이 가진 생명이 아니란 말입니다.
돼지나 소나 닭이나 뭐나 다 같은 생명 입니다.
단지 인연 따라 잠시간 입장이 돼지가 되고, 소가 되고 한 것이지
우리가 잘못 살면은 내생에는 틀림없이 소가 되고, 개가 되고 하겠지요.
생명은 절대로 그와 같이 구분이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주적인 하나의 생명인데
우리가 어떻게 사는가에 따라서
잠시간 이렇게 저렇게 모양을 달리 할 뿐이지
하나의 생명 이라 할 때는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이라 절대 변동이 없단 말입니다.
그렇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가 잘되기 위해서 남한테 함부로 하겠습니까?
또 아까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자기가 좀더 잘먹기 위해서,
정력을 좀더 내기 위해서 고기를 많이 먹으려고 애쓰지 않습니까?
재가불자님들도 좀 어려우실 테지만 가급적이면 먹지 마십시오.
나중에 공부가 되면 그 때는 먹으래도 못 먹지만,
가급적이면 육식을 안 하셔야 됩니다.
그것이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돼지나 소나 죽을 때 그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그렇게 하는 것 보십시오.
그렇게 비명을 지르고 죽을 때에
그 독한 진심(瞋心)이 돼지고기 소고기 하나하나의 세포에 묻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무슨 까닭으로 먹을 것인가?
말이 좀 빗나갔습니다는
아까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참선법,
이것이 세상 에는 제일 쉬운 법입니다.
그 우주의 도리를 따라서 생활한단 말입니다.
우주가 바로 부처님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고서,
문자화두를 들고 또는 나무아미타불 화두를 들고,
이렇게 하면은 그 때는 공부가 상당히 잘 되어간단 말입니다.
그러나 우주와 나와 이것을 한계를 짓고, 구분을 짓고,
내가 저 사람 저 사람이 나한테 별로 기분 좋게 안하는데
저놈이 없으면 될 것인데...
이렇 게 생각하면 어떻게 공부가 잘 될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옆에 사람이 좋으나 나쁘나 다 부처님인데,
어느 것도 부처님 아닌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에게 가장 좋은 대접이 무엇인가?
그 사람을 부처님 같이 대접한단 말입니다.
우주 생긴대로 우주의 법, 도리가 그렇습니다.
말하자면 그와 같이 자기 남편한테나, 자기 아내한테나,
자기 부모님한테나,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공대인가?
이것도 역시 부처님같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같이 생각하는 것이 가장 좋은 대접이고,
그것이 우주의 법대로 사는 도리이고,
가장 순탄하고 평화와 모든 행복을 보장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길 가운데 참선하는 것이 가장 고도의 수행법이 아닙니까?
고도의 수행법이라는 것은
그냥 어렵고 까다로워서 고도의 수행법이라고 해서가 아닙니다.
가장 쉽단 말입니다.
우주 생긴대로, 진리 그대로 공부하는 이것이 바로 참선이란 말입니다.
보통 공부로는
우리가 따로 있고, 내가 따로 있고, 너와 남이 따로 있고 그러지만은
참선 공부라는 것은 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본단 말입니다.
참선 공부라는 것은 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보고,
내가 그 가운데 들어가서 모 두가 다, 너와 나가 없는 부처님 뿐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염불도 하고 화두도 참구하고 그래야 참다운 공부가 됩니다.
가령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왼다 하더라도
그냥 나무아미타불 외운 다면 부처님이 와서 나한테 가피를 주신다...
이런 정도는 타력신앙입니다.
사실 이것은 아직은 방편신앙입니다.
참다운 염불이라는 것은
나나 너나 부처님이나,
우주와 모두가 다 하나의 모두가 다 부처님이다,
원형의 원만한 하나의 부처님이다,
그 만공덕을 갖춘 하나의 부처님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염불을 해야 참다운 염불입니다.
여기에는 타력(他力)과 자력(自力)이 다 들어 있습니다.
화두를 의심한다 하더라도, 화두를 참구한다 하더라도
문자화두를 하나, 이뭣고 화두를 하나
또는 그냥 아미타불 화두를 하나 다 똑 같은 것이지만
의심하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그 본래 자리 근원적인 자리를 안 떠나야 참다운 참선입니다.
그렇게 해서 근원자리를 안 떠나고서
일체 존재가
그 만능을 갖춘,
행복이나 지혜나 자비나 모든 걸 갖춘 불성뿐이다,
나도 본래 부처인데,
내가 잘 못 살아서 잠시간 범부가 됐는데
그 佛性으로 가는 것은 내 고향으로 가는 길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참선한다고 생각할 때에
화두를 의심하거나 무엇을 하거나 다 공부가 순탄하게 풀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셔서 방편적인 공부를 하지 말으시고서,
우주 생긴대로, 진리 그대로 공부하는 것이
참다운 참선이고 참다운 염불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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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있으시면 하시지요.」
임진강 황포돛배 / 두지나루 -백야님 촬영
두지나루 황포돛배 선착장에 도착하면서 그 옛날 이곳에서 황포돛배가 출발하여
서울 마포나루까지 오가며 상거래가 이루어 졌다는 것을 생각해도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지만 황포돛배를 타고 고랑포까지 40여분간을 내리고 오르는 동안
잠시 그 옛날 임진강을 오르내리던 황포돛배를 생각해보는 상상의 나래를 펴 봅니다.
강의 넓이는 별로 넓지 않지만 수심이 10m가 넘고 유속이 빠르기가 대단하다는
임진강의 5km남짓한 두지나루와 고랑포 사이를 오가며 좌우측으로
'자장리 적벽(赤壁)'이 나타나는데, 윗부분은 책을 꽂은 듯 수직으로 층이 났고,
아랫부분은 시루떡처럼 수평으로 층층이 돌이 쌓여
60만년 전쯤 용암이 흘러 형성된 현무암 석벽(石壁)을 보는 즐거움도 함께 합니다.
황포돛배의 반환점은 고랑포구.
6.25전에는 북한의 개성과 서울의 마포나루를 오가는 상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화신백화점까지 있었던 활기찬 포구였다고 하지만 지금은 숲이 우거지고
남방한계선인 군사지역이 되여 있어 그 옛날 흔적은 찿아 볼길이
없고 68년 김신조 무장공비들이 수심이 앝은 고랑포구를
통해 임진강을 건너 왔기에 김신조 무장공비
침투로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은 동력으로 운항을 하는 황포돛배지만 그 옛날의 황포돛배를 본따서
만든 돛배를 타고 민간인들이 출입 할수 없던 임진강을
돌아 보는 기분은 북녘이 고향인 백야에게는 또 다른 의미 있는 시간들이였습니다.
황포돛배의 유람을 끝내고 조금전 배를 타고 반환점을 돌아 왔던 고랑포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능을 돌아 보기 위해 장남교를 건너 3km 정도 떨어진 경순왕능
으로 향합니다.장남교 교각엔 지난해 여름 북한에서 갑자기 땜을 방류 하여
피서객 6명이급류에 사고를 당한 장소의 기억을 말해주는 듯 교각에 걸린 나뭇가지가
그대로 걸려 있어 안타까움을 더합니다.
고랑포구엔 옛 번화하던 흔적은 간곳이 없고 잡초만 무성하고...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이 인접해 있어 경순왕능 주위엔 지뢰조심이란 팻말이
최전방 지대임을실감나게 합니다.
신라의 마지막 왕(56대)으로서 즉위8년만에
신라왕조를 고려의 왕건에게 평화적으로 넘겨줬던 경순왕능을 돌아 보면서
신라의 천년 왕조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경주 밖의 머나먼 이곳 파주 땅에
묻혀 있는 경순왕의 심정은 어떻했을까를 생각 해 보며 귀가길 마지막 코스로
잡혀 있는 원당의 종마공원으로 발길을 지쵹 합니다.
신나는 현철 노래모음
01. 내마음 별과같이 02. 앉으나 서나 당신생각 03. 사랑은 나비인가봐
04. 못난 내 청춘 05. 청춘을 돌려다오 06. 사랑의 배신자
07. 추억의 테헤란로 08. 울어라 열풍아 09. 황포돗대
10. 무정한 그사람 11. 첫사랑 마도로스 12. 쌍고동우는 항구
13. 아메리칸 마도로 14. 살아있는 가로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