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문관 72 오조 '너는 누구냐'

2010. 7. 5. 18:1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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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門關] 72. 오조 ‘너는 누구냐’

- 밝고 신령스러워 나지도 죽지도 않고 -
- 이름·모양도 지을 수 없는 ‘한 물건’-

* 동산(東山)의 오조법연(五祖法演)이 물었다.
“석가와 미륵이 모두 그의 노복이다. 어디,  말해보라. 그는 대체 누구냐.” 
 

* 나 혜개가 말한다.

“만일 그를 분명히 알아본다면, 가령 네거리에서 아버지와 맞닥뜨린 것같아,
다른 사람에게 긴지 아닌지를 물어볼 필요가 없다.
 

* 송하여 가로되,

“남의 활은 당기지 말고, 남의 말은 타지 말며, 남의 험은 들추지 말고,
남의 일은 간섭하지 말라.”

 

他是阿誰:
東山演師祖曰, 釋迦彌勒, 猶是他奴. 且道,
他是阿誰. 無門曰, 若也見得他分曉,
譬如十字街頭撞見親爺相似, 更不須問別人,
道是與不是. 頌曰, 他弓莫挽, 他馬莫騎.
他非莫辯, 他事莫知.


당말 이후 선의 종풍은 임제에 연원을 둔 양기와 황룡이 이어가게 된다.
오조법연은 양기파의 걸물이다. 그의 제자로 선의 화두를 집약한
‘벽암록’의 저자 원오극근이 있다. 무문관의 저자 혜개 또한 이 인물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61강 천녀유혼과, 62강 외나무다리, 그리고 65강
쇠꼬리의 주인공이 바로 그였다.
이번까지 벌써 네번째인 것을 보면, 후기 선에서 그가 점하는 위치와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물음은 간단하다. 여기 누군가가 있다.
그런데 그는 석가와 미륵을 아랫 것으로 부리고 있다.

 

대체 그는 누구인가. 불교는 거두절미하고 바로 ‘그’를
만나러 가는 도정이고 방법이다.
그의 이름은 여럿이다. ‘부처(佛)’라기도 하고, ‘여래(如來)’라기도 하며,

‘불성(佛性)’이라기도 하고, ‘법신(法身)’이라고도 한다. 그뿐인가.
‘대승(大乘)’이라고도 하고, ‘일심(一心)’이라기도 하고, 또한 ‘공(空)’

이라고도 한다. 선은 여기에 수많은 리스트를 더했다.

육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남전의 ‘평상심(平常心)’. 조주의

‘무(無)’와 ‘개’, ‘잣나무’ 그리고 ‘차 한잔’. 구지의 ‘손가락’에 청세의 ‘술’,
서암의 ‘주인공’과 남전의 ‘고양이’. 운문의 ‘똥막대기’와 동산의

‘삼베 세 근’. 덕산의 ‘몽둥이’와 수산의 ‘죽비’와 파초의 ‘지팡이’ 등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체(體)는 하나이지만 상(相)은 여럿인 까닭이다.

그렇다고 그렇게 어지럽거나 번다하지 않다. 원효도 그리 말했다.
“무한정 펼친다고 근본을 다치는 것은 아니다<宗要>.”
그런데 누구도 그의 얼굴을 본 사람이 없다.

릴케였지,  ‘얼굴을 가린 나의 신부여’라고 읊은 사람이. . . 

공주의 마곡사에서 이런 주련을 보았다.
“옛 부처가 태어나기 전에, 둥두렷한 한 둥근 원.
석가도 만나지 못했거니, 가섭이 어떻게 전할 수 있었겠는가
(古佛未生前, 凝然一圓相. 釋迦猶未會, 迦葉豈能傳).

그러고 보니 서산대사의 ‘禪家龜鑑’이 생각났다.
대학시절 법정 스님의 정확한 번역과 자상한 주해로 한 시절 푹 젖었던

그 책. 선의 이념과 방법, 그리고 유의점을 골자만 적은 가위 선의 매뉴얼.
구성은 연역적이다. 구원의 궁극인 그 절대의 모습을 서두의 표제로 삼았다.

 

“여기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 없이 밝고 신령스러워 일찍이 나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았다. 이름지을 길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다.

 

(有一物於此, 從本以來, 昭昭靈靈, 不曾生不曾滅, 名不得, 相不得).

사찰의 곳곳에서, 혹은 편지나 문집에서 종종 둥그런 빈 원이 하나 우리를

응시하고 있는 것을 본다. 스님네들이 그리는 서화의 단골 메뉴이기도 하다.
혹은 낙관으로 새겨지고 혹은 아예 법명으로 쓰인다.
원불교는 이 빈 원을 절대의 상징으로 삼고 새로운 불교를 열었다.
대체 이 동그라미는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 것일까.

 육조 혜능이 물었다.

 “나에게 한 물건이 있다.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다.

너희들은 이게 무엇인지 알겠느냐.

이 물음에 문자속깊은 하택(荷澤)의 신회(神會)가 나섰다.
“여러 부처님들의 본원(本源)이자, 신회의 불성(佛性)입니다.

혜능선의 정통성을 지키자고 북종선과 대치하느라 정작 본래의 공부에는

소홀했나 보다. 혜능은 입맛을 다시며 그를 서자(庶子)의 자리에 앉혔다.
나중에 남악(南嶽)의 회양(懷讓)이 찾아오자 육조는 이렇게 물었다.

 “대체 무슨 물건이 이렇게 오는고(什마物伊마來).”

회양은 어쩔줄 모르고 진땀을 흘리다가 육조 앞을 물러났다.

8년 후에 돌아온 그는 당당한 어조로 이렇게 대답했다.
“만일 ‘물건’ 운운 하시면 그거 옳지 않습니다(說似一物卽不中)

육조는 그를 적자(嫡子)로 인정했다. 그 아래에서 천하를 달리는 천리마

마조(馬祖)가 나온 것은 앞의 강의에서 짚은 대로이다.

 

나는 늘 ‘이 물건’이 궁금했다. 그래서 어느날 백주대로에서
앞서 가는 여학생의 뒤통수를 두들겨 보기도 했다.
지금도 그게 궁금하기 짝이 없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이제까지 아까운 지면을 갉으며 횡설수설한 것도 그 암중모색의

여적(餘滴)이라면 혓바닥을 남겨 주실지. 대체 그는 누구인가.

남의 활은 그만두고 내 활을 잡아 보자. 대체 나는 누구냐.

세익스피어를 빌리자면,
“내가 누구인지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루를 좋은 날로 만들려는 사람은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가진 사람은 행복의 주인공이  되고 고난에 굴복하고 희망을 품지 못하는 사람은 비극의 주인공이 됩니다 하루를 좋은 날로 만들려는 사람은 행복의 주인공이 되고 나중에 라고 미루는 사람은 불행의 하수인이 됩니다 힘들 때 손 잡아주는 친구가 있다면 당신은 이미 행복의 당선자이고 그런 친구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행복 낙선자입니다 사랑에는 기쁨도 슬픔도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행복하고 슬픔의 순간만을 기억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작은 집에 살아도 잠잘 수 있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작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남의 마음까지 헤아려 주는 사람은 이미 행복하고 상대가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 것만 섭섭한 사람은 이미 불행합니다 미운 사람이 많을 수록 행복은 반비례하고 좋아 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행복은 정비례 합니다. 너는 너, 나는 나라고 하는 사람은 불행의 독불장군이지만 우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 연합군 입니다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하지만 마음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작은 것에 감사 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누구는 저렇게 행복하게 사는데 나만 불행해... 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