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이라는 것은 불교에서만 나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 인도, 미얀마, 일본에서 모두 ‘선’이란 말을 쓰고 수행을 하고 있어요. 여러 강들이 궁극에는 바다로 흘러 들어가듯 각 나라마다 수행방법은 틀리지만 목적은 같습니다. 그렇다면 선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
우리는 깨달은 자를 부처님이라고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인생무상 생로병사를 이미 출가하기 전에 목격했고, 생사가 없는 무엇이 있지 않겠는가 하고 출가해서 결국 깨달음을 성취했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깨달았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여러분들이 경전과 여러 책자를 통해서 말로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어요. ‘자기 마음을 깨달았다’ 이 말 아닙니까?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 미물, 곤충까지도 부처님과 동일한 똑같은 불성, 즉 마음을 갖추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마음이야 말로 영원히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차를 마시고 밥을 먹고 일하고 있는 속에서 조금도 자신의 마음을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선지식의 말 한마디를 듣고 각자가 사로잡혀 있는 생각에서 해방된다면 부처님과 똑같은 깨달음의 지혜가 열린답니다. 깨달은 마음자리에서 볼 때 모든 것이 자기의 마음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입니다. 삼라만상이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실제 자신의 근본 마음은 생기지도,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옛날의 선지식들에게 제자들이 찾아왔을 때는 요즘 우리가 문제 삼고 있는 “어떤 선이 옳습니까? 간화선이 옳습니까? 묵조선이 옳습니까?”라는 문제가 없었어요. 예를 들면 달마대사에게 어떤 제자가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불법이 마음이라고 하는데 도대체 어떤 것을 마음이라고 합니까?” 달마대사는 “자네가 나에게 질문했을 때 그것이 너의 마음이요, 내가 너에게 답을 했을 때 이것이 나의 마음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선문에서는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하든 바로 마음을 가리키면서 “이것을 바로 보라, 이것밖에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면 당시 사람들은 순박했기 때문에 듣자마자 바로 알아 차렸어요.
그런데 시대가 흐르고 사람들의 생각이 많이 복잡해졌습니다. 이런 책, 저런 책을 많이 보고 이 법문, 저 법문을 많이 듣다 보니 아는 것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알기는 많이 아는데 생각이 굉장히 많아졌습니다. 사량분별의 구름이 너무 두껍게 끼어있는 것입니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자네가 말하고 있는 그것이 무엇이냐?(시심마)”하고 되물어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우리나라에서는 간화선, 화두공안이라고 합니다.
자기의 마음이라는 것이 어떤 특정한 수행을 통해서만 깨칠 수 있겠어요? 반드시 어떤 수행을 통해서 깨쳐지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좋은 인연을 만나고 싶어하는 한 여자가 부모님의 권유로 불상을 모셔놓고 밤낮 잠을 자지 않고 기도를 열심히 하고 경전도 열심히 독송을 했어요. 그런데 하루는 불상을 집어 던지고 경전도 깔고 앉아 “반야가 반야를 깔고 앉아있는데 무슨 상관이 있느냐, 깜깜한 밤중에 까마귀 소리를 들으니 나기 전에 어머니가 그립다.”라고 했답니다. 그 뒤 그 딸은 백운 선사가 일러주는 말을 듣고 일주일 만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죽을 각오로 공부하면 이룬다
또 다른 비유를 들자면, 『법화경 신해품』에 궁자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잣집 아들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거지 행세를 하는 한 아이가 다시 부잣집의 아들이 되려면 자신이 원래 이 집 아들이었다고 알아차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그것은 수행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하지만 믿지 않기 때문에 머슴살이부터 시작해서 가까워 졌을 때 “사실 자네가 내 아들이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말해주고 싶었지만 믿지 못한단 말입니다.
다시 비유를 들어 설명하면, 물고기가 물속에 있으면서 물을 찾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물속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되는 것이지 물 밖에 있다가 차차 수행을 해서 물속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래부터 물속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수십 년 동안 애를 써서 자기 마음을 깨닫는 것이나 말 한마디를 듣고 깨닫는 것이나 깨닫는 것은 똑같습니다. 경전에 ‘일초직입 여래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단계를 밟아서 깨닫는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있어서는 깨달아지지가 않습니다. 몸부림을 쳐야하고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염불도 좋고, 관법도 좋습니다. 한 가지에 매달려서 지극정성으로 열심히 하다보면 자기 모습이 보인다는 거지요. 그런데 여기서 “내가 도대체 왜 이러는가?, 내가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질문 하는 것이 자기를 돌아보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그것이 화두공안이라는 말입니다. 화두공안을 열심히 하다보면 깨달음이라는 것은 닦는데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물을 찾으려고 애를 썼기 때문에 물속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그것과는 관계없이 본래부터 물속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닦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깨달음이라는 것은 닦는데 있지 않다.”라는 말은 일반 사람들이 처음부터 공부도 하지 않고 방일하게 생활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질 의 응 답]
진짜 화두는 화두가 없는 것
Q: 중국 당대의 조사선에서는 모든 사람은 본래 청정한 자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수행할 필요 없이 단지 쉬기만 하면 된다는 주장을 합니다. 이 점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 즉 화두공안을 참구해야 한다는 간화선의 입장과 모순이 됩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보십니까?
A: 당대 조사선에서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하는 그것이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청정한 마음자리를 오염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조차도 하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바로 달을 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달을 보라고 하면 못 알아듣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더니 여러 해 동안 손가락만 열심히 보고 있다. 그런데 참된 것은 손가락이 아니라 달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진짜 화두는 화두가 없는 것이다.
전에는 화두밖에 몰랐던 나도 이제 법문할 때 화두공안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화두공안을 손가락으로 비유하면, 옛날 조사들은 그것을 제쳐놓고 답을 바로 가르쳐 준 것이다. 동산 스님도 “정말 영리한 사람은 평상시 말 한마디로 깨닫는다.”고 했다. 찾고자 하는 보배는 눈앞에 항상 있는데 생각이 가리니까 실체가 안 보이는 것뿐이다.
임제선사가 3년간 수행을 하다가 목주선사의 권유로 황벽 선사에게 “어떤 것이 불법의 가장 적절한 뜻입니까?”하고 물었는데 방망이만 두들겨 맞고 황벽 선사의 회상을 떠나 대우 선사를 찾아갔다. 그 때 “늙은 노파가 손자를 다루듯이 황벽선사니까 그대를 위해 그렇게 해줬다.”라는 말에 임제 선사는 깨달았다고 한다.
그런데 깨닫지도 못한 사람이 닦을 것이 없다고 해서는 안 된다. 닦을 것이 없다는 그 말에 정말 알고자 하는 사람은 의심이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부를 해야 하는데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해보라. 이 공부는 일주일, 한 철, 1년, 늦어도 3년만에는 깨달아야 한다. 3년이 지나면 그냥 앉아 있는 것뿐이다. 10여 년 쯤 되면 된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다.
모르는 것에 화가 나고(대분심), 알고 싶고(대의심), 또 이렇게 하면 틀림없이 된다는 믿음(대신심), 이 세 가지를 칠일이면 된다. 분통이 터져서 자살해 죽을 정도로 하라는 말이다. 병이 나든지 공부를 성취하든지 둘 중 하나이다.
어느 것이든 하나만 잡고 매달려라
Q: 위파사나, 염불, 간화선, 묵조선 등 여러 수행방법 중에서 재가신자들은 어느 수행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좋습니까?
A: “위파사나가 옳다, 화두가 옳다.”라고 하는 그런 것은 없다. 공부는 절대 두 가지가 될 수 없다. 일을 하면 공부가 안 되니까 불안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면 일이 안 된다는 것은 진짜 공부가 아니다. 공부는 결국 마음을 닦는 것이다. 마음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을 해야 한다. 하고 있는 자신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벽을 대하고 있을 때 자기가 자기를 돌아봐서 자기 정체가 어떻게 생겼는지 내어 보라고 했다. 내가 안 보이는 것은 형체가 없기 때문이다. 형체도 소리도 아닌, 내 속에 참다운 내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은 이 말이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물밑의 뿌리까지 갔다가 아무것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올라와야 하는 것이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무언가 들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깨달은 사람은 애초에 그런 것이 없다. 일상생활, 행주좌와 어묵동정 전체가 공부 아닌 게 없다. 법문 잘 알아들으면 바람소리에 진짜 법문이 설해지고 있는 것이다.
Q: 화엄사상(교)과 선사상(선)에 대해서 어떻게 봐야 할지요?
A: 경이라고 하니까 화엄경, 금강경, 이렇게 책으로만 알고 있다. 옛날에 이런 법문이 있다. “나에게 한권의 경전이 있다. 종이나 먹으로 된 것이 아니다. 아무리 펼쳐도 한 글자도 없지만 항상 빛을 내고 있다. 이것이 진짜 경이다.”
화엄 따로 있고 선 따로 있고 염불 따로 있고 주력 따로 있는가? 동서남북의 강물이 흐르는 모습은 다르지만 바다로 흘러 들어가면 한 물이듯이 따로 있지 않다. 염불이라고 하면 부처님을 생각한다는 말이다. 부처는 마음이다. 그러니 마음의 정체를 발견했을 때 그것이 염불이다. 진짜 염불은 소리가 없다.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 이것이 진짜 법문이다. 화엄사상 따로 있고 선사상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