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객 떨친 일갈은 천지 울리는 소리/혜국스님

2010. 7. 7. 19:0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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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객 떨친 일갈은 천지 울리는 소리
 
 
혜국 스님
 

 

 

 

 
 
 
 "아는 것은 천하의 마구니요, 모른다고 하는 화두는 천하의 스승"
 
수행은 게을리하며 선어록만 보고 "다 알았다"고 하는 '착각'을 경계

“지금 이 자리에서부터 자신의 마음을 깨닫기 위한 화두를 잡고 실천하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인을 만나면 “안녕하세요?”하며 인사를 했습니다. 그동안 몸과 마음이 편안했느냐는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요즘엔 “부자 되십시오”한다면서요? 단순한 일상에서의 인사말이라 하지만 곱씹어 보아야 합니다. ‘부자 되세요’라는 말은 이전과 비교해 가치관과 세계관이 얼마나 달라져 있는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단서입니다. 나와 남이 경쟁하는 회사에서 남보다 더 많이 갖고 남보다 더 많이 가져야만 행복이 오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식과 재물을 많이 소유할수록 행복합니까?

우리는 모든 것을 주관과 객관으로 나누어 보고 있습니다. 나는 주관이고 보이는 대상은 객관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나와 남을 항상 둘로 나누어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족 중에서 누가 아프면 온 집안이 울지 않습니까? 가족의 건강이 내 건강이고 내 건강이 가족의 건강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와 아들이 둘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불이(不二)의 철학 정신으로 살아왔습니다. 서양 철학에서는 ‘이성’을 중시합니다. ‘이성주의’는 주관과 객관을 나눈 이원론을 원칙으로 하는 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이성주의는 ‘내가 사유하는 정신은 우월하고 저 대상인 물질은 내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만 봅니다. 그러니 하인주의와 지배주의, 개발의식이 이원론에서 싹트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영화 ‘서편제’를 관람하며 저도 좀 울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눈물을 흘렸다는 것은 화면에 나오는 필름을 비춘 그림자를 보고 울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그림자를 삼라만상 즉 객관이라고 보고 필름을 주관이라고 보는데, 그 필름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울고 웃었지만 실제로 그 그림자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은 어디에 있습니까? 주관이라 하는 필름에 있습니까, 아니면 객관이라 하는 화면에 있습니까? 모두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주관과 객관은 무엇입니까?

화두참선법에서는 주관과 객관이 떨어져 나가야 합니다. 모두 그림자일 뿐입니다. 어제 저녁 꿈에서 주관이니 객관이니 하던 것이 아침에 눈을 딱 뜨고 보면 결국은 주관도 객관도 꿈이었을 뿐입니다. 이원론이라는 것도 인간의 생각에서 만든 것일 뿐입니다. 일원론, 이원론을 생각하는 순간 그 이름이 갖는 구속력이 곧 나를 구속하고야 맙니다. 그 구속은 결국 물질만능과 경쟁만을 조장할 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주의 이치를 홀연히 깨달으시고서는 하시는 말씀이 ‘참으로 아름답구나. 부처 아닌 사람이 하나도 없구나’ 하셨습니다. 주관과 객관을 나누어 보지 않으셨기에 고구정녕한 말씀을 하신 겁니다. 중생은 자기 나름대로 판단한 번뇌망상에 의해 자신이 부처인 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저 태양광명이 이 도량을 비추고 있지만 문을 닫고 커텐을 쳐 버리면 빛이 들어올 수 없듯이, 번뇌망상이라는 커텐을 탁 쳐서 나는 나고 너는 너, 주관과 객관으로 나누어보기 때문에 자신이 부처인 줄 모르는 겁니다. 광명을 가로 막고 있는 커텐을 버리고, 나와 남이라는 벽을 부수고 마음의 눈만 뜨면 일체 유정무정이 다 불성임을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유정무정 개유불성’(有情無情 皆有佛性)이라는 말씀을 바로 듣고 알면 정말 춤을 덩실덩실 추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무릎을 베며 들었던 중용과 중도의 지혜 이야기를 어릴 때부터 지금의 영어, 수학 배우듯 듣고 행동으로 옮겨 체험을 했다면 지금 바로 이 자리서 알아들을 소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저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만 합니다. 말길이 끊어진 자리와 마음길이 끊어진 자리를 보여주기 위해 조사어록을 인용하는 겁니다. 부처를 구하면 부처를 잃고, 조사를 구하면 조사를 잃고, 도를 구하면 도를 잃는다는 말은 그냥 뜬 구름 잡는 소리가 아닙니다. 주관과 객관이 탁 떨어져 나간, 천지를 울리는 소리인 것입니다.

‘일체유심조’라 하지 않았습니까? 섬진강, 낙동강도 바다가 되면 짠 맛 하나로 통합니다. 순간순간 변해가는 지금의 ‘마음’만을 쫓아 가는 강이 되지 말고 바다가 한번 돼 보라 이 말입니다.

강에서 바다가 되어가는 이야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동산 양개의 은사는 운암 당산 스님인데 그 스님이 돌아가시려 하자 동산스님이 물었습니다. “스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어떤 사람이 묻기를 화상의 초상을 누가 그릴 수 있겠는가 하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을 하겠습니까?” “그저 그런 늙은이였다고 해라.” 동산 스님은 여기서 꽉 막혔습니다. 동산 스님이 머뭇머뭇하고 있으니 스승이 한 말씀 더했습니다. “이것은 밤송이와 같아서 삼켜도 넘어가지 않느니라. 천생만겁토록 쉬어야 하느니라. 그대가 한 생각만 일으켜도 물이 한길 깊을 터인데 하물며 말로 표현하겠는가?” 천생만생을 쉬라는 이 말씀, 밤송이와 같다고 하는 이 말씀, 한 생각만 일으켜도 물이 한길이 깊어지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는 이 말씀에 동산 스님은 아무 말도 못하고 망설였습니다. 이 때 스승이 한 말씀 더 하시려 하자 “스승님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저 저는 사람 몸 잃지 않길 원할 뿐이니 오직 이것은 제가 공부해서 깨우치겠습니다.”하고 일어섰습니다.

인생 문제는 내가 해결해야 한다는 자세를 분명하게 하고, 다음 생, 몇 백 생 후에라도 언젠가 해결하겠다는 원력을 세워야 합니다. 이왕 할 일이라면 인간 몸 받아서, 그것도 부처님 법 따르는 불제자 되어 참선법 믿는 이 때 바로 지금 안하면 다시는 못 한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합니다.

스승이 열반 들자 동산 스님은 스승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사형과 함께 길을 떠났습니다. 사형과 길을 걷다가 개울물에 자기 그림자가 비치는 것을 보고는 박장대소하며 게송을 읊었습니다. 주관과 객관이 떨어진 견처니 한 번 들어보세요.

남에게서 찾는 일 절대 조심해야 하니
나와는 점점 더 멀어 아득해질 뿐이다.
나 이제 홀로 가지만
가는 곳 마다 그를 만나네.
그는 지금 진짜 나이건만
나는 이제 그가 아니네.
진실로 이렇게 깨달아야
여여 하게 되었다 하리라.

자신이 갖고 있던 의심이 일순간 풀린 것입니다. 스승이 그 당시 ‘이래 이래 한다’고 답을 말해 버렸으면 동산 양개 스님이 오늘날 있었겠습니까? 없었습니다. 답을 말해줘 버리면 상식화 되고 그 상식만 알아서는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아는데 뭘 깨닫습니까? 모르는 게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꽉 찰 때 모르는 게 터지는 겁니다. 안다고 하는 것은 천하의 마구니요, 모른다고 하는 화두는 천하의 우리 스승입니다. 몰라야 터지지 안다면 그냥 아는 것일 뿐입니다.

여러분들은 평생 품을 수 있는, 아무도 답을 알려주지 않는 화두를 가까이 할 수 있는 분들입니다. 참으로 행복한 줄 알아야 합니다. 연속극 시청률이 10% 넘어가면 그 나라 절대 안 됩니다. 청소기를 돌리면서도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놈이 뭔고?’ 해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부처와 같이 일어나고, 저녁에도 부처와 같이 잠을 자고, 한 발짝 한 찰나까지 당당한 부처로서 행복한 평화로움을 느껴보는 삶을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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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의 응 답]

“세속 삼매는 ‘대상’에 머물러 있을 뿐”


Q: 간화선과 조사선에 대한 동질성에 대해 답변해주셨으면 합니다.

A: 부처님의 염화미소를 이어받은 가섭에서 중국 혜능까지 33조사와 당대에 도를 깨친 분들을 조사라 하고 그분들이 한 참선을 조사선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달정 스님이 죽은 후 다시 태어나 조주스님을 찾아가 “개는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물은 후 “무(無)”라는 조주 스님의 대답에 바로 깨친 것이 조사선이다.

그런데 송나라 대혜 스님이 깨치지도 못하고 말만 흉내는 것을 막고자 조사 스님들의 말을 글자로 정형화해서 “어째서 무라고 했는고?”라며 의심하게 했다. 이것을 화두라고 한다. 먼저 분들은 글자로 안 써줘도 바로 믿었고 뒤에 분들은 글자로 문제를 내서 “이렇게 하라”라며 분별을 지어준 것뿐이지 조사선과 간화선은 깨닫는 방법이나 목적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Q: 일반에서 말하는 삼매와 간화선에서 보는 정견의 삼매에 대해서 정의해주셨으면 합니다.

A: 차원부터 다르다. 먼저 독서삼매, 일삼매 등을 보면 일도 대상이고 삼매에 들어간다는 사람도 대상이다. 주관과 객관으로 나누어 보면 주관이 대상에 빠져서 주관의 그림자 속으로 숨어버린 것을 일반적인 삼매라고 한다.

그런데 시간을 초월한 삼매를 지나서 완전히 의식까지 없어지고 화두덩어리가 되어서 내가 완전히 깨져 버린 자리가 간화선에서 말하는 삼매이다. 화두삼매는 내가 없어져버려서 진리 자체가 되어 버린 것이다.

Q: 간화선 수행을 하는 사부대중에게 지침이 될 수 있는 정견을 챙겨주셨으면 합니다.

A: 중국불교는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종교를 아편이라고 하여 유명무실해졌다. 일본은 화두를 거의 수학공식을 풀듯 ‘사다리 참선’으로 흐르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조선조 5백 년간 배불숭유정책을 쓸 때도 산중으로 들어가 선의 뿌리가 오히려 강인해졌다.

글이 없으면 공부를 못하지만 화두 참선법은 모르는 곳으로 돌아가 “어째서?” 하는 것이니 어려울수록 오히려 간절한 신심이 났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때 가장 힘들었지만 경허, 용성 스님 등 대 종장들이 나와 선맥이 이어졌다. 한국 간화선 참선법은 세계 석학들이 가장 부러워할 하는 학문이자 수행법이다. 여러분들이 그 길을 앞장 서 가야 한다.


“연기법이 중도이고 중도가 화두다”


Q: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연기법과 선사들의 절대당처에서 말씀하신 내용은 상호모순처럼 보입니다. 어떻게 아는 것이 바른 것입니까?

A: 만약 시계를 다 풀어놓으면 고철덩어리에 불과하다. 판과 기계가 서로 물려서 인연을 만들 때만 시계가 된다. 사과나무도 지, 수, 화, 풍, 씨앗, 인간들의 노력, 비료 등 모든 것들이 모여야 사과가 나올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의 인연이라고 하는 것은 실질적으로는 변해가는 과정이고 이 모양이 있을 때만, 즉 의지해 있는 동안만 시계, 사과나무라고 한다. 그런데 의지하는 것은 시시각각 변하는 ‘무아’이다. 무아의 원리를 깨닫는 것을 ‘중도’라 하고 그 중도를 ‘연기법’이라 한다. 무아로서의 연기법을 바로 보면 조사스님들이 보라고 하는 바로 그 자리다. 연기법이 중도요, 중도는 바로 ‘부처님이 말한 화두’라고 정리하면 조금도 다르지 않다.

Q: 수행하는 스님과 포교하는 스님, 어떤 스님이 참다운 모습입니까?

A: 수행과 포교는 결코 둘이어서는 안 된다. 수행하는 삶 자체가 포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이다. 단 한 가지 요구하고 싶은 것은 말로 대중을 선동하는 것이 포교라는 생각은 반드시 고쳐야 하다. 멀리서 수행하는 삶을 보고 정말 신심을 내게 하는 것, 수행자의 뜨거운 눈물을 느끼면서 나도 한번 수행해봐야겠다는 원력을 세우게 하는 것도 포교이다.

Q: 『선가귀감』에 이르기를 참선자가 갖춰야 할 세 가지는 대신심, 대분심, 대의정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있으나 의심이나 의정이 부족한 초보자들은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합니까?

A: 익은 것은 설게 하고 선 것은 익게 하라. 부처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눈을 뜨면 된다. “눈을 뜨면 허공을 볼 것이라는 확실한 희망으로 천생만생이 가도 내 부처를 깨닫고야 말겠다.”라는 믿음을 ‘신’이라고 한다. ‘신’만 서면 그다음에는 “그렇다면 왜 나는 부처가 안 된다는 말인가?”(분심), “부처가 되려면 이놈 속으로 들어가야 된다.”(의심)는 반문이 안날수가 없다.

TV 보는 것, 남과 싸우는 것은 줄여 나가고, 앉아서 정말 모르는 놈을 가까이 하고 “어째서?”라는 것에 익어 나가기 위한 길은 오직 노력밖에 없다. 단 5분을 하더라도 전력으로 해야 한다. 신심, 의심 분심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신심만 확실하면 분심과 의심이 안날 수가 없다.

 

 

 

- 법보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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