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대들보도 함께 잘 챙겨라/원철스님

2010. 7. 25. 20:38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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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대들보도 함께 잘 챙겨라

 

                            원철 스님

             

 

 

 무소유가 기본인 사문(沙門)은 본래 ‘집 없는 사람’이란 뜻이 다. 

 노천 내지는 나무 아래, 동굴 속에서 정진한 까닭이다. 그러나 이후 부득이한 사정으로 죽림정사, 기원정사 등 소박한 집에서 살았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절집은 대궐과 버금가는 ‘법의 궁전’을 갖추게 되었다. 중국, 한국, 일본에서는 가람을 지을 때마다 상량식을 중요한 의식으로 경건하게 치렀다. 상량문은 당연히 산중어른의 몫이었다. 글씨는 당대 명필에게 따로 부탁한 경우도 많았다.

 

절집에서 적지 않은 세월을 살다보니 이제 가끔 상량문 쓸 일도 생긴다. 자료를 확인하고 욕심내어 이것저것 집어넣다보면 필요 이상으로 장문이 된다. 너무 길면 붓글씨로 옮길 때 만만찮은 부피가 되기 십상이다. 간명해야 좋은 글이라는 원칙은 상량문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집 지을 때 화룡점정이 상량문이라 하겠다. 상량목 중심에 홈을 파고 상량문을 넣었다. 선사(禪舍)답게 단출하게 짚으로 안을 메웠다. 그래야 한지종이가 오래 보관된다. 상량식이란 바깥 일이 끝나고 내부공사가 시작되는 접점에서 이루어지는 중도(中道) 의식인 셈이다. “상량이오!”라는 큰목소리와 함께 대들보가 올라간다. 그 전에 상량목을 묶은 ‘입이 큰’ 광목주머니에 상량채(上樑債) 봉투인 공양금이 두둑할수록 빨리 올라가는 건 인지상정이다.

 

상량목의 ‘모년모월모일 입주상량(立柱上樑)’이라는 본문 앞뒤로 ‘용(龍)’자와 ‘구(龜)’자로 열고 막는다. 상량목의 머리는 나무뿌리에 해당하는 쪽이므로 용(龍)이라는 글자는 거꾸로 쓰게 된다. 용이나 거북이나 모두 수신(水神)의 역할을 부여받았다. 결국 목조건물은 화재방지가 가장 큰일인 까닭이다. 좀더 ‘아는 체’ 하려면 번거롭지만 ‘해룡(海龍) 낙구(洛龜)’라고도 쓰고, 또 ‘용봉(龍鳳) 기린(龜麟)’으로도 쓴다. 그리고 상량문의 전형적인 문장은 규격화되어 있다시피 하다.

응천상지삼광(應天上之三光)  하늘의 해, 달, 별께서는 감응하시어
비인간지오복(備人間之五福)  우리 인간에게 오복을 내려주시옵소서

궁궐집과 더불어 목조건축의 꽃인 절집의 상량문 기본은 일반 상량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불법(佛法)의 진리가 이 세상에 오래 머물기를 바라는 ‘정법구주(正法久住)’로 매듭을 짓는다. 당연히 화재방지 기원문도 몇 구절 들어가기 마련이다. 해인사중건상량문도 그랬다.

 

해인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이 상량문은 추사 김정희의 30대 시절 글씨로 1818년 작품이다. 재질은 푸르스름한 중국제 비단[紺色絹]인데 가로 약 5m 세로 1m의 길이에, 1행에 20자 글씨가 67행이며, 글자 크기는 3cm 정도 된다. 중후한 해서체로 금물[金泥]을 사용했는데 자신의 개성은 숨기고(물론 추사체 완성 이전의 글씨인 탓도 있다) 옛 법식을 충실하게 따르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지관 대종사께서 해인사 주지시절인 1973년에 큰법당을 중수하면서 발견한 것이다. 경상도 관찰사였던 부친 이노경이 해인사 중창을 후원한 인연으로 그의 아들이 글씨를 남길 수 있었다. 경상감영이 대구에 있던 시절이라 지리적으로도 그리 멀지 않았던 연유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어영차, 대들보를 동쪽으로 들어올려라.”
이어서 동서남북상하 여섯 방향으로 들어올림을 반복하면서 화재예방과 제불보살의 가호를 기원했다. 마지막은 이렇게 마무리했다.

원장주차계(願長住此界)  차해이차인(此海而此印)
이 사바세계의 해인사가 길이 머물기를 원하나이다

당나라 때 약산유엄(藥山惟嚴, 745~828) 선사는 평소에 별다른 말씀이 없는 과묵한 어른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법당이 무너진다’고 외쳤다. 앉아 있던 대중들이 기둥을 붙잡거나 아니면 대들보를 떠받치고 야단이 났다.
그러자 선사는 ‘허허!’ 하고 웃으며 혀를 끌끌 찼다.
“내 뜻을 제대로 모르는구나.”
그리고는 열반에 드셨다.
선사는 ‘입적(入寂)’을 ‘법당이 무너진다’고 표현하셨다. 내 몸을 법당이라고 한 것은 내 마음의 부처인 ‘자성불(自性佛)’을 모신 까닭이다. 그러니 ‘마음의 대들보’도 잘 살펴야 하는 것이다. 항상 내 몸과 내 마음의 상량을 제대로 할 것을 강조하신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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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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