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법정스님

2010. 7. 28. 21:4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오매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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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우리 같은 출가 수행자는 세상의 눈으로 보면 모두가
불효자다. 낳아 길러준 은혜를 등지고 뛰쳐 나와
출세간의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해 餠?싸락눈이 내리던 어느 날,
나는 집을 나와 북쪽으로 길을 떠났다.
골목길을 빠져나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뒤돌아 본 집에는 어머니가 홀로 계셨다.
중이 되러 절로 간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어
시골에 있는 친구 집에 다녀온다고 했다.
나는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다.
어머니의 품속에서 보다도 비쩍 마른 할머니의
품속에서 혈연의 정을 익혔을 것 같다.
그러기 때문에 내 입산 출가의 소식을 전해 듣고
어머니보다 할머니가 더욱 가슴 아파했을 것이다.
내가 해인사에서 지낼 때 할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뒤늦게 친구로부터 전해 들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외동 손자인 나를 한 번 보고
눈을 감으면 원이 없겠다고 하시더란다.
불전에 향을 살라 명복을 빌면서
나는 중이 된 후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내가 어린 시절을 구김살없이 자랄 수 있었던 것은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 덕이다.
내게 문학적인 소양이 있다면 할머니의 팔베개 위에서
소금장수를 비롯한 옛날이야기를 많이
들으면서 자란 덕일 것이다.
맨날 똑같은 이야기지만 실컷 듣고 나서도 하나 더
해달라고 조르면 밑천이 다 됐음인지,
긴 이야기 해주랴 짧은 이야기 해주랴고 물었다.
"긴 이야기" 라고 하면 "긴긴 간지때"로 끝을 냈다.
간지때란 바지랑대의 호남 사투리다. "
그러면 짧은 이야기" 하고 더 졸라대면
"짧은 짧은 담뱃대" 로 막을 내렸다.
독자인 나는 할머니를 너무 좋아해
어린 시절 할머니가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 나섰다.
그리고 할머니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선뜻 나서서 기꺼이 해드렸다.
일제 말엽 담배가 아주 귀할 때 초등학생인
나는 혼자서 10리도 넘는 시골길을 걸어가
담배를 구해다 드린 일도 있다.
 
내가 여덟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할머니를 따라 옷가게에 옷을 사러 갔는데,
그 가게에서는 덤으로 경품을 뽑도록 했다.
내 생애에서 처음으로 뽑은 경품은
원고지 한 묶음이었다. 운이 좋으면 사발 시계도
탈 수 있었는데 한 묶음의 종이를 들고 아쉬워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원고지 칸을 메꾸는
일에 일찍이 인연이 있었던 모양이다.
할머니의 성은 김해 김씨이고 이름을 금옥
고향은 부산 초량, 부산에 처음 가서 초량을 지나갈 때
그곳이 아주 정답게 여겨졌다.
 
지금 내 기억의 창고에 들어 있는 어머니에 대한
소재는 할머니에비하면 너무 빈약하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나를 낳아 길러 주신
우리 어머니는 내가 그리는 어머니의 상
즉 모성이 수호천사처럼 늘 나를 받쳐 주고 있다.
한 사람의 어진 어머니는 백 사람의 교사에
견줄 만하다는데 지당한 말씀이다.
한 인간이 형성되기까지에는 그 그늘에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이 따라야 한다.

맹자의 어머니가 자식의 교육을 위해 집을 세 번이나 옮겨
다녔다는 고사도 어머니의 슬기로움을 말해 주고 있다.
나는 절에 들어와 살면서 두 번 어머니를 뵈러 갔다.
내가 집을 떠나 산으로 들어온 후 어머니는 사촌동생이
모시었다. 무슨 인연인지 이 동생은 어려서부터 자기
어머니보다 우리 어머니를 더 따랐다.
모교인 대학에 강연이 있어 내려간 김에 어머니를 찾았다.
대학에 재직 중인 내 친구의 부인이
새로 이사간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었다.
불쑥 나타난 아들을 보고 어머니는 무척
반가워하셨다. 점심을 먹고 떠나오는데 골목 밖까지 따라
나오면 내 손에 꼬깃꼬깃 접어진 돈을 쥐어 주었다.
제멋대로 큰 아들이지만 용돈을 주고 싶은
모정에서였으리라.

나는 그 돈을 함부로 쓸 수가 없어 오랫동안 간직하다가
절의 불사에 어머니의 이름으로 시주를 했다.
두번째는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가는 길에 대전에 들러 만나뵈었다.
동생의 직장이 대전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그때는 많이 쇠약해 있었다.
나를 보시더니 전에 없이 눈물을 지으셨다.
이때가 이승에서 모자간의 마지막 상봉이었다.
어머니가 아무 예고도 없이 내 거처로 불쑥
찾아오신 것은 단 한번뿐이었다.
광주에서 사실 때인데 고모네 딸을 앞세우고
불일암까지 올라오신 것이다.
내 손으로 밥을 짓고 국을 끓여 점심상을
차려드렸다. 혼자사는 아들의 음식 솜씨를
대견스럽게 여기셨다.
그날로 산을 내려가셨는데,
마침 비가 내린 뒤라 개울물이 불어
노인이 징검다리를 건너기가 위태로웠다.
나는 바지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어머니를
등에 업고 개울을 건넜다.
등에 업힌 어머니가 바짝마른 솔잎단처럼
너무나 가벼워 마음이 몹시 아팠었다.
그 가벼움이 어머니의 실체를 두고 두고
생각케 했다.
 
어느 해 겨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아,이제는 내 생명의 뿌리가
꺾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지금이라면 지체없이 달려갔겠지만,
그 시절은 혼자서도 결제(승가의 안거 제도)를
철저히 지키던 때라, 서울에 있는 아는 스님에게
부탁하여 나대신 장례에 참석하도록 했다.
49재는 결제가 끝난 후라 참석할 수 있었다.
단에 올려진 사진을 보니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
나는 어머니에게는 자식으로서 효행을 못했기
때문에 어머니들이 모이는 집회가 있을 때면
어머니를 대하는 심정으로 그 모임에 나간다.
길상회에 나로서는 파격적일 만큼 4년 남짓
꾸준히 나간 것도 어머니에 대한 불효를
보상하기 위해서인지 모르겠다.
나는 이 나이 이 처지인데도 인자하고
슬기로운 모성 앞에서는 반쯤 기대고 싶은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머니는 우리 생명의 언덕이고 뿌리이기
때문에 기대고 싶은 것인가.   
 
*법정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