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윤회

2010. 8. 17. 22:0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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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윤회

 

해탈을 설하기 위해 먼저 윤회 설명

 
“항상 바로 지금 여기만 존재”

불교 윤회설은 현재지향적

 

쌍계사 십리벚꽃은 볼 만하다. 전라도와 경상도가 만나는 화개장터에서 쌍계사까지 십리가 벚꽃터널을 이루고 있다. 물론 벚꽃으로 유명한 곳이 여러 군데지만, 쌍계사 십리벚꽃은 벚꽃터널 한 편으로 지리산의 맑은 계류가 흘러내려 더욱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게 된다. 게다가 근래에는 섬진강변의 벚꽃까지 터널을 이루어 일대 장관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꽃이 피고 지는 것이지만 벚꽃은 특히 한꺼번에 화려하게 피어났다 일시에 져버리는 특징이 있다. 말 그대로 모든 존재는 변화한다고 하는 무상(無常)법문을 설해주고 있다. 어제까지 아름답기 그지없었던 하얀 꽃들이 한 바탕 바람 불고 비온 후에는 일시에 꽃비 되어 흩어져 버리는 것이다. 매화꽃 피어 봄이 오는가 싶더니 벚꽃도 지고 배꽃이 피어난다. 얼마 안 있어 배꽃마저 지면 여름이 성큼 다가설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겨울이 봄으로 바뀌고, 봄이 여름으로 바뀐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다. 봄은 봄으로서 절대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봄인 것이다. 여름은 여름으로서 절대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여름이다. 생(生)과 사(死)도 마찬가지이다. 생은 생으로서 절대이고 사는 사로서 궁극이다. 생이 변해서 사가 되고, 사가 변해서 생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보자면 궁극적으로 윤회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항상 바로 지금 여기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업식이 있는 자에게는 윤회가 있다. 하지만 업식이 없는 이에게 더 이상 윤회는 없다. 윤회의 주체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어떤 불자가 큰스님을 찾아왔다. 윤회에 대해서 질문하기 위해서였다.

“스님, 어떤 분은 윤회가 있다고 설하고, 어떤 분은 윤회가 없다고 설하는데, 도대체 어떤 게 맞는 것입니까?”

“하하하, 윤회가 없다고 설하는 그 스님에게는 부인이 있던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대에게는 부인이 있는가?” “예,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 이치이니라. 윤회도 있는 이에게는 있는 것이고, 없는 이에게는 없는 것이니라.” “??”

불교라 하면 먼저 윤회사상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불교는 윤회로부터의 해탈을 설하는 종교이다. 궁극적으로 해탈을 설하기 위해서 먼저 윤회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똑같이 윤회를 설한다 해도, 예컨대 힌두교의 윤회설과 불교의 윤회설은 입각점이 다르다.

힌두교의 윤회설은 다분히 과거지향적이다. 과거에 지은 업으로 인해 현재 이러한 모습, 이러한 환경에 처하게 되었으니, 어쨌든 수긍하면서 살아가야만 한다는 데에 주안점이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인해 사성계급이 아직도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달리 불교의 윤회설은 다분히 현재지향적이다. 현재의 이 모습은 과거 나 자신의 작품이다. 그런 만큼 미래의 내 모습은 현재의 나 자신의 작품이 될 것이다. 과거보다 중요하고 미래보다 소중한 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나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출신에 의해서 귀천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에 의해서 귀천이 결정된다고 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윤회는 없지만, 해탈하기 전까지는 있다. 그러므로 꾸준히 닦아야 한다. 또한 보살은 중생제도를 위해서 일부러 윤회의 세계에 머물러있다. 닮아야 하지 않을까.

 
 
- 월호스님의 불교란 무엇인가 / 불교신문 -
 

    

 

 

여산연우(廬山煙雨)  - <소동파(蘇東坡)>

 

 


廬山煙雨浙江潮 未到千般恨不消  

여산연우절강조 미도천반한부소

 

到得歸來無別事 廬山煙雨浙江潮  

도득귀래무별사 여산연우절강조


 

여산의 안개비와 절강의 물결이여

가보지 못했을 땐 천만가지 한이었는데


가서 보고 돌아오니 별다른 것은 없고

여산의 안개비와 절강의 물결이었네.

 

 

<해설>

 

이 글은 중국 북송 때의 시인이자 정치가며 시문서화(詩文書畵) 모두에 훌륭한 작품을 많이 남겼던 소동파(蘇東坡 : 1036-1101)의 시다. 본명은 소식(蘇軾)인데 호가 동파거사이다. 아버지는 소순(蘇洵)이며 동생은 소철(蘇轍)로서 모두가 당송팔대가에 든다. 또 전하는 바에 의하면 누이동생 소소매(蘇小妹)는 불교의 유명한 의식문인 관음예문(觀音禮文)을 지었다고 한다.


 집안이 모두 문장에 뛰어날 뿐만 아니라 불교에도 남다른 안목을 지녔다. 동파거사는 깨달음을 노래한 오도송도 있다. 여기에 소개하는 이 시도 깨달음의 경지를 노래하였다.


 그러나 깨달음의 경지란 한마디로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으며 마음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경지다. 그러므로 세존도 일생을 자신이 깨달은 경지를 설하시고도 마지막에는 한 마디도 설한 적이 없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깨달음의 경지는 실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뜻이다. 다만 깨달은 사람만이 아는 자리다. 그래서 도가 같아야 안다[同道可知] 라는 말도 있다. 소동파는 이러한 사정을 신비한 풍광을 보았을 때의 심정으로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중국에는 땅도 넓으려니와 아름다운 산과 강과 풍경이 무수히 많다. 계림의 아름다움을 말하면서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계림이 있다.”라고 하여 계림을 천당과 겨루는 표현을 한다든지 또 단하산에는 “중국에 계림이 있다는 것만 알고 단하산이 있는 줄을 모르면 견문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 받는다.”는 등의 표현을 하여 계림보다 못하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들은 바에 의하면 계림보다 더 아름답고 신비한 곳이 많다고 한다.


 여산에 안개비가 내릴 때의 풍광과 절강에 조수가 들어오고 밀려가는 모습과 그 소리는 어떤 말로도 표현할 길이 없다고 하였다. 실로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으로 헤아려 짐작할 수 없는 경치라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경치를 전해 듣기만 하고 가보지 못하면 그 한이 천 가닥 만 가닥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


 그러다가 직접 그곳에 가서 그 풍광을 보니 “별다른 것은 없고 여산의 안개비와 절강의 물결이었네.”라고 할 수 있을 뿐이었다.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그러나 이 말은 여산의 안개비와 절강의 물결은 한마디도 표현하지 못했다. 마치 세존이 팔만대장경을 설하고도 자신의 깨달음의 경지는 한마디도 설하지 못했다고 한 것과 꼭 같다.


 그래서 결국은 가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한만 더욱 깊게 만들뿐이며 하루빨리 가보고 싶게 만든다. 팔만대장경이란 것도 결국은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더욱 깨달음에 대한 의혹을 불러일으킬 뿐이며 하루빨리 깨닫고 싶게 할 뿐이다. 깨달음이란 직접 자신이 체험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을 절묘하게 표현하였다.


“여산의 안개비와 절강의 물결이여,

가보지 못했을 땐 천만가지 한이었는데

가서 보고 돌아오니 별다른 것은 없고

여산의 안개비와 절강의 물결이었네.” 

  

 

 

 


 01. 차의 향기  02. 나무끝에 연  03. 대숲에 홀로 앉아  04. 하늘정원
05. 산속에 부는 바람  06. 산야초  07. 초향 08. 다래헌  09. 차한잔의인연

10. 홀로 있으면 내 모습이 보인다 11. 이밤을 어디서 쉬나 12. 차한잔에 담긴 향기

 명상음악 : 초심>님이 올린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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