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여연기(청화스님)모두가 한몸이다(광덕스님)

2010. 9. 16. 22:5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728x90

 

진여연기(眞如緣起)

 

청화큰스님

 부처님 가르침의 대요를 살펴보면, 먼저 상식적인 차원, 세간의 인간들이 보통 느끼는 그런 차원으로는 나도 있고, 너도 있고,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고, 모든 현상계가 우리 중생이 보는 그대로 존대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즉 불교 술어로 말하면 이것을 유교(有敎)라.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을 그대로 긍정하는 이러한 유교입니다. 그러나 중생이 보는 차원, 이런 유교만 가지고서는 우리가 제대로 근본 뿌리를 알 수가 없습니다.

현대 유물주의 사회, 이 물질 지상주의 사회, 이런 사회는 모두가 이른바 '있다, 없다' 하는 그런 것에 근거된 사회가 되지 않습니까? 자본주의도 마찬가지고 사회주의 공산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물질은 물질 그대로 존재한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다. 이런 차원입니다.

그러한 현상 세계만 전부고 우리 중생의 눈에 안 보이는 세계는 없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만 생각할 때는 있는 것만 가지고 서로 많이 가질려고 하고, 또 눈에 보이는 것이 화려하면 좋은 것이고, 눈에 보이는 것이 빈약하면 나쁜 것이고, 이렇게 됩니다. 따라서 이런 차원에서는 방금 제가 말씀드린 모든 것은 우리 중생들이 보는 그대로 존재한다. 이런 유교(有敎) 차원에서는 인생의 참다운 행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욕계(欲界)도 고생뿐이고, 또 더 올라가서 색계(色界)도 고생뿐이고, 무색계(無色界)도 고생뿐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중생들이 눈에 보이는 세계, 눈에 보이는 그러한 존재, 이런 것이 전부다. 그런 견해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우리 중생들이 있는 것에 집착하는 한 고생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일체종지(一切種智)라, 모든 존재의 근본 뿌리를 훤히 알으십니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이것은 연기법(緣起法)으로 해서 인연법(因緣法)으로 해서 잠시간 나온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설하셨습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대체로 아시겠습니다만 아함경(阿含經)같은 부처님 근본 불교의 초기 법문에서 연기를 보는 사람은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사람은 부처를 본다고 설하셨습니다.

불교에서 법(法)이라 할 때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우주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 하는 그런 법과 만법이라 하는 제법의 법, 그런 두 가지 개념(槪念)이 있습니다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려고 생각할 때는 '먼저 연기를 보아라, 그리고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우주의 근본 도리를 보고, 법을 보는 자는 부처를 본다.' 즉 석가모니, 세존인 나를 본다. 이런 말씀입니다. 따라서 사실은 연기를 모르면 우주의 도리, 법도 모르는 것이고 또 부처님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연기는 어떠한 것인가? 불교를 믿는 여러분들은 인연법, 연기를 모르시는 분은 없으시겠지요. 그러나 가만히 보면 연기를 낮은 차원의 연기는 제법 아시는 분들이 많지만 본질적인 연기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시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기회에 꼭 그런 본질적인 연기법을 알으셔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또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런 식의 연기법은 보통 차원의 연기법이 아닙니까. 이런 식의 연기법으로 우리 인생고를 인생의 본질적인 병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연기법의 도리 가운데도 이런 연기법은 소승적인 연기법인 것이고, 부처님께서 꼭 말씀하시고자 하는 대승적인 본래 연기법의 뜻은 아닙니다. 현대 과학적으로 말하면 소승적인 연기법은 마치 상대성 원리같은 그런 범주를 미처 못 벗어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근본 도리에서 이뤄지는 연기법은 이것은 진여연기(眞如緣起)라. 또는 법계연기(法界緣起)라. 우리 중생의 때묻은 마음에서는 미처 모른다 하더라도 삼천대천 세계, 우주에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하는 우주의 참다운 생명(生命)이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부처님 법에 대해서 신(信:믿음)을 갖지 않으면 부처님 법을 닦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경험도 못하고 우리의 때묻은 눈으로 안 보인다 하더라도 우주의 청정법계(淸淨法界)에는 진여불성이라 하는 우주의 참다운 생명 자체가 충만해 있습니다. 어디에는 있고 어디에는 없는 것이 아니며, 우리 개체적인 인간도 머리카락 끝부터 발끝까지 진여불성이 충만해 있습니다. 여기 계시는 우리 불자님들도 다 그렇습니다. 모두가 진여불성이라 하는 순수 생명, 현대적인 말로 하면 순수 에너지 이것이 충만해 있습니다.

그리고 진여불성이라 하는 그 자리는 다른 말로 바꿔서 말하면 법성(法性)이고, 불성(佛性), 참 나(眞我)고, 본래면목(本來面目)이고, 열반(涅槃)이고, 또 도(道)고, 진리(眞理)입니다. 표현은 다르나 모두가 진리의 별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한 진여불성은 경(經)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불생불멸(不生不滅) 본래 낳지 않고 죽지 않고, 불구부정(不垢不淨) 더러운 것도 없고 청정할 것도 없는, 부증불감(不增不減)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는 자리입니다. 하여튼 어떠한 차원으로 보나, 즉 능력으로 보나 지혜로 보나 자비심으로 보나, 또는 행복으로 보나, 어떤 면으로 보나 완벽한 자리, 충만한 생명 자체가 바로 진여불성입니다.

이 자리에서 인연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 산이고 냇이고 인간이고 또는 삼천대천 세계의 별이고 달이고 해이며 이들 모두가 다 우주에 본래로 충만한 진여불성으로부터 인연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아야 그래야 대승적인 연기법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법계연기(法界緣起)라. 또는 진여연기(眞如緣起)라.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한몸이다/광덕스님

 

 

우리를 행복으로 인도하는 진리인 청정한 깨달음의 모양,
세번째는 동일자성(同一者性)입니다.
부처님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나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특별히 지혜를 닦으신 분만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똑같이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완전히 동일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내 심장에서 흐르는 피가 손과 발을 통해서 온 몸을 다 돌아서
심장에 갑니다. 부모님의 한 핏줄을 타고 나온 형제들의 몸속에
똑같은 부모의 피가 흐르는 것처럼, 우리들의 본성이 부처님의
온전하신 본 모습이 자기 자신에게 하나로 이어져 있는 것입니다.

 

남이 아니라, 또 미워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와 대립하고 다투는
사람이 아니라 원래는 하나입니다.
저와 더불어 한 몸을 이루고 있는데 내가 그것을 남으로 보고
대립하므로 남이지 실제로는 하나입니다.
하나이기 때문에 저 사람이 잘 되어야지 내가 행복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사람이 잘못 되어야 내가 잘 된다.'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내 오른손에 병이 나야 내가 행복하다는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오른손이나 왼손이나 왼발이나 오른발이나 모두가 내 한 몸인 것처럼
저 사람 이 사람이 남이 아니라 하나이며 동일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의 옛 조사(祖師)들은 "장공흘주(張公吃酒)에
이공취(李公醉), 술은 장서방이 마셨는데 취하기는 이서방이
취했다." 고 했습니다. 본래 하나의 진리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를 미워하면서 '잘 되게 해 주십시오.' 하는
것은 제 몸뚱이 한 군데를 찍으면서 건강하게 해 달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이 행복하고 다른 사람이 행복하게
해달라고 해야 내가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건강해야 내 손과 발이 건강해지고, 손과 발이 건강
해야 내가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평소 "모든 사람들이 남이 아니다. 한 몸이다. 동일자다." 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동일자성이 그대로 진리에 비추어본 바
청정각상의 한 면모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진리 본연의 완전한 것을 받아서 쓰려면 아무하고도 척지고
대립하지 말아야 합니다.
미워하고 대립하는 사람, 척진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이 잘 되면
내 배가 살살 아프고, 그런 식으로 마음 먹어서는 그 배가 늘 아프지
편안할 날이 없습니다.

 

본래 내가 잘 되려면 먼저 베풀어 주어야 합니다.
저 사람을 남이라고 보더라도 우선 베풀어 주어서 대립상이 끊어져야
내게 복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주는 것이 받는 것이고, 주는 자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준다고 하는 것은 바로 받는 마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꼭 닫아 놓으면 받으려고 아무리 기도해도 안 됩니다.
기도해서 무엇을 받으려고 하면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하고, 마음의
문을 열었다는 것은 자기에게 있는 무엇인가를 아낌없이 조건 없이
베풀어야 합니다.

 

힘이나 지혜, 돈이나 재물을 베풀든지, 베푸는 마음이 중심이 되어
자기 문을 꽁꽁 닫고 있는 상태에서부터 복의 문을 여는 것이 그야말로
뜨거운 열풍 속에서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게
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대립하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조금이라도
남을 시기하거나 미워하는 것이 있으면 기도 성취가 되지 않습니다.
원래 진리 그대로가 나타나는 것이 기도 성취이기 때문에 진리와
어긋난 상태로는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 광덕스님의 법문

 

 
 
빈 손이 주는 행복



당신이 진정으로 누군가의 손을 잡길 원한다면
움켜쥔 것들을 모두 버리셔야 합니다

한 사람의 손을 잡으려면 한 사람의 가슴을 품으려면
빈 손일수록 더 깊게 밀착할 수 있는 것

당신이 진정으로 영원한 사랑을 만들고 싶다면
집착도 욕심도 모두 버리셔야 합니다

당신의 손에 묻은 땟국물로 인해
당신의 손에 남은 찌꺼기로 인해
보석같은 사람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행복은 먼데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오래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당신이 찾지 않았을 뿐입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아름다운 삶을 엮고 싶다면
빈 손이 주는 행복을 잊지 마세요..


- 김민소의 행복이야기 중에서-

                                                             
                                                             ♬배경음악::I understa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