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법과 관법(觀法,;위빠사나)의 차이점 - 上/송담스님

2010. 11. 14. 13:1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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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참선법과 관법(觀法,;위빠사나)의 차이점 - 上

 

 

得至在心應之在手

이것을 마음에 얻으면 손에 응하게 되니라.

 

雪月風花天長地久

눈 휘날리는 밤, 달은 휘엉청 밝고 봄바람이 불면 꽃이 휘날려

그러기를 하늘과 땅이 오래되었다.

 

朝朝鷄向五更啼

아침마다 닭은 오경에 울고

 

春來處處山花秀

봄이 오면 곳곳마다 산에 꽃이 아름답게 피더라.

   

방금 녹음법문을 통해서 조실스님(故전강스님)의 법문을 경청했습니다. 활구참선법문을 들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설산(雪山)에서 견성성불하시고 40여년간을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셨습니다. 어느 경전이나 다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서 여러가지 방편을 통해서 중생의 지혜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온갖 방편법을 설하셨습니다. 어느 경전이고 한 말씀 한 마디도 버릴 것이 없고 금쪽보다도 더 소중한 말씀일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실 때 부처님을 시봉하던 아란존자, 그 아란존자는 조달(調達, 데바닷타)의 동생이며 부처님의 사촌동생입니다. 출가해가지고 주욱 부처님을 시봉했는데 스승으로서 정말 여법하게 목숨바쳐 시봉하면서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모든 법문을 한 마디, 한 구절도 놓치거나 잊어버리지 않고 주욱 그대로 기억을 해서 열반하신 뒤에 결집을 할 때에 아란존자가 법상에 올라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일대시교를 다 외워서 5백 성승(聖僧)이 증명함으로써 제1회 결집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 아란존자가 부처님이 열반하시자 얼마나 비통하던지 몸을 들어서 통곡을 했다. 하늘과 땅이 딱 붙어버리는 느낌. 캄캄한 밤에 등불을 놓쳐버린데다 비교를 할까. 보통 세속의 자식이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사랑하고 존경하던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도 이렇게 슬픔을 표현하지만, 여러 제자 가운데도 유독 아란존자는 앉았다 섰다 이마를 땅에 부딪쳤다. 고대로 나뒀다가는 죽어버릴 정도로 몹시도 슬퍼했어.

 

그때 곁에 있던 한 구참제자가 아난존자를 달래서 "지금 부처님께서는 곧 열반에 드실 텐데 그렇게 슬퍼하기만해서 되겠느냐. 열반에 드시기 전에 꼭 여쭈어 볼 일에 대해서 여쭈어봐라."

 

첫째,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 차익(車匿)을 어떻게 처치해야 되겠습니까? 차익은 부처님 첫 출가하실 때 모시던 마부였습니다. 상전이 출가했으니까 저도 따라서 출가했는데 자기가 말고삐 잡고 출가했다 그것을 코에다 걸고 행패가 심했습니다. 아무 말도 듣지 않고 대중법계도 지키지 않고 부처님만 쪼금 무서워하고 그밖에는 누구도 무서워 않고 저 하고 싶은데로 대단히 처치곤란한 존재였던 것입니다.

 

"부처님 열반하신 뒤 어떻게 할까요?"

"묵빈대처(默擯對處)라."

 

 대중 전체가 그사람과 말을 주고받지 않고 있는 것이나 없는 것이나 그대로 내버려둬라. 이것은 대중생활에 대단히 엄중한 벌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는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 누구를 의지하고 누구를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을 할까요? 그것을 여쭈어봐라.

   

"계를 스승으로 삼아라. 계에 의지해서 수행을 해라."

 

세 번째 질문은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 저희들은 어디에 머무를까요? 그것을 여쭈었어. 부처님께서

 

 "사념주(四念住)에 마음을 머물러라."

 

그러면 사념주는 무엇이냐? 몸뚱이는 부정(不淨)한 것이다. 더럽고 추접한 것이다. 그렇게 관(觀)을 해. 왜 몸뚱이가 부정하냐? 피와 고름과 오줌과 똥이 가득차 있으니까 부정하다고 볼 수 밖에 없는 거고, 아홉 구녕에서 나오느니 드러운 것만 꾸역꾸역 기어나와. 속에 더러운 게 가득 찼으니 구녕에서 나오는 게 더러운 것 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러니 몸뚱이는 더럽고 부정한 것이다 이렇게 관을 하라.

 

두 번째 감수(感受)작용. 눈으로 무엇을 척 본다던지 귀로 척 듣는다든지 코로 냄새맡고 몸으르 느끼고 생각으로 탁 받아들인 자체는 괴로운 것이다. 생각이 일어나서 받아들임으로 해서 그것이 온갖 고통으로 연결이 되고 그것으로 인해서 생사윤회가 벌어지기 때문에 그것이 괴로운 것이다 이렇게 관하라.

 

세 번째 우리 마음은 무상(無常)한 것이다 이렇게 관해라. 무슨 생각이 일어나도 그 생각이 고대로 있는게 아니라 금방 딴생각으로 변해가지고 없어져. 없어지자마자 생각이 일어나자마자 생각이 이러저리 변해가지고 없어져.

 

마지막 일체법은 무아(無我)인 것이다. 산이나 강이나 돌이나 풀이나 사람이나 짐승이나 하늘에 태양이나 별이나 달이나 일체가 다 자성이 없는 것이다. 무아인 것이다. 이렇게 관하라.

 

그래서 신수심법(身受心法) 이것을 하나씩 하나씩 몸뚱이는 부정한 것, 수는 괴로운 것, 마음은 무상한 것, 일체법은 무아인 것이다. 이렇게 처음에 항상 거기에다 마음을 머무르는 거, 그것이 잘되면 그 다음 단계에 가서는 신수심법을 따로 하는게 아니라 싸잡아서 신수심법을 한번에 관하라는 것이야.

 

부처님 생존 시에 많은 제자들이 사렴주관에 의해 수행을 하도록 지도를 하셨어. 물론 그것은 삼현(三賢)에 있어서 오정심관(五停心觀) 다음으로 닦아가는 수행과정이지만, 그 제자의 근기와 공부해나가는 단계에 따라서 백골관(白骨觀)을 하기도 하고, 수식관(數息觀)을 하기도 하고, 사렴주관을 하기도 하고 여러가지 절차에 따라 관해가는 관법이 다 차제가 있지만, 그래도 그 많은 관 가운데 이 사렴주관은 아주 중요한 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 이 사렴주관에 머물르라 하신데 큰 뜻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 上 끝 

 

  < 1989년 5월 7일, 첫째 일요법회 >

어린왕자의들꽃사랑마을

 

 

 

마음자리- 진흙소의 울음

 

 

무릇 현묘한 이치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마음자리를 돌이켜 비추는 공부를 세밀히 하고

분명하게 알아 착실히 공부해야 한다.

아무렇게나 용심을 부려서는 안된다.

수행이란 수행의 공력이 깊어지면

실상의 이치는 스스로 자기 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모기의 주둥이가 소의 등을 뚫는 것과 같아서

주둥이를 박을 데가 없는 곳에 온몸이 들어간다'

하였으니 화두를 들고 참구하는 이들은

이말을 깨달음의 지침으로 삼아야 한다.

이를 우리 일상생활에 빗대어 말하면

가슴속이 텅 비어 아무것도 없으며

육근이 텅 비어서 너그럽고 넓은  게 바로 보시이다.

 

이와 같이 깨끗한 것이 지계이며

이와같이 비어 있고 부드러운 것이 인욕이며

이와 같이 본래 맑고 항상 나타나서 어둡지 않은 것이 정진이며

밝고 고요해서 어지럽지 않은 것이 선정이니

이와같이 밝고 고요하며 명료하게 법을 깨달아

비우는 것이 본래의 어리석음이 없음이며

모든 법의 모양을 분별함이 바른 생각이다.

 

그렇듯이 세상 인연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바로 장애가 없는 바른 지혜이다.

 

 

- 경허집을 만해스님이 엮은 글 중에서

(벽암님이 올린 글)

 

 

..Serenade To Spring S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