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법과 관법(觀法,;위빠사나)의 차이점 - 中/송담스님

2010. 11. 14. 13:1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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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참선법과 관법(觀法,;위빠사나)의 차이점 - 中

 

 

어느 경전이던지 그 관법에 관한 근본을 알고보면 이 관법과 연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태삼관이 있고, 화엄경에 법계삼관이 있고, 원각경에는 원각삼관이 있고, 유식삼관이 있어. 조사에 말씀에도 "마음을 반조해서 관하지 않으면, 아무리 대장경을 종으로 횡으로 외고 해석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셨어.

 

그런데 관도 여러가지 관이 있지만,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지 않고 자기 멋대로 관법을 해간다고 하는 것은 매우 위험천만한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이 사렴주관을 열심히 하다보니까 이 몸뚱이는 더러운 것, 괴로운 것이요, 무상한 것이요, 무아인 것이요 하다보니까 대관절 우리가 살아갈 목적이 무엇이냐. 무슨 소용이 있으며 이렇게 괴로운데 살냐고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으며 살아봤자 뭐할 것이냐 이래가지고 바른 정관을 버리고서 점점 사견으로 치우쳐 쏠리기 시작해.

 

그래서 집장(執杖)범지라고 목련존자를 패서 죽인 외도가 있었는데, 사렴주관을 닦던 부처님 제자들이 범지 외도를 찾아가서 자기가 가진 바리때와 좋은 것을 가지고 가서 범지에게 바치고 무릎을 꿇고 합장하고 '제발 나를 때려죽여주시라'고 빌었습니다. 그렇잖아도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는 집장외도는 몽둥이로서 여지없이 쳐죽이고 쳐죽이고 한해 여름에 60명 대중이 없어졌어.

 

그래서 부처님께서 물어보시니까 집장 외도에게 모두 맞아죽었습니다. 한해 여름에 사렴주관을 하다가 60명이 집장범지에게 가서 자진해서 맞아죽었다 이거여. 그래서 부처님께서 사렴주관에 대해 바른법을 닦기에 이르지 못한 사람에게 수식관을 가르치셨어. 이 사렴주관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여. 하는 사람이 잘못하면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 사렴주에 머무르라 하실 정도로 불자들의 의지처가 될만한 성스러운 수행방법이지만 잘못하면 얼토당토한 사견에 얽매여서 빠져서 정도를 이탈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도 여러가지 관법이 많은 도인들, 조사들에 의해서 자꾸 개발이 되고 발전이 되온 것입니다. 천태삼관이라던지, 법계삼관이던지, 원각삼관, 유식삼관, 율종삼관 다 나름대로 훌륭한 관법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관법을 전부 다 합해서 가마솥에 너어가지고 푹 고아서 골수를 추출해놓은 거 거기서 한 걸음더 발전시킨 관법이 뭐냐면 활구참선법이라 하는 것이여. 그러면 어떤 점에서 앞에 든 여러가지 관법보다 활구참선이 그렇게 수승하냐 하면은, 앞에 말한 사렴주관 등은 전부 말 길(言路)이 있고, 이치 길이 있고, 문이 있고 더듬어 들어갈 곳이 있어.

 

한마디로 말해 다 좋은 관법이고 소중한 것이고 근기에 따라서는 그러한 관법을 올바로 지도하는 스승이 계시다면 그 관법을 해서 나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관법을 통해서 바른 깨달음을 얻은 분의 지도가 없이 자기 나름대로 경을 보고 그런 관법을 해보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도 그렇거늘 하물며 오늘날은 위험천만인 것입니다.

 

근자에 와서 많은 사람이 산승에게 와서 관법에 대한 질문을 해옵니다. 저 남방에 세일론이나 버마, 태국 등 남방에서는 아직도 그러한 관법을 통해서 많은 스님네들이 수행하고 계신 모양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유학하고 온 스님네에 의해서 사람들에게 선전이 된 모양입니다. 그 관법 자체가 나쁘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관법은 꼭 할려면 반드시 바른 스승에 의지해서 해야할 것이고, 이미 최상승 활구참선에 입문을 해가지고 활구참선을 하신 법보제자는 그러한 관법보다 관법의 골수가 다 활구참선 속에 포함되어 있으니, 더구나 한걸음 더 나아가 발전시킨 무언어(無言語). 말 길이 끊어지고, 이치 길이 끊어지고, 생각 길이 끊어지고, 더듬어 들어갈 길이 끊어진 경절문(徑切門, 지름길) 활구참선, 일단 이 문중에 들어왔다가 다시 물러가 다른 관법에 귀를 기울이고 물러선다고 하는 것은 너무너무 가련하고 가련한 생각이 들어서 관법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경전은 말 있음으로 시작해사 차츰차츰 말 없는데 들어가는 길입니다. 활구참선법은 처음부터 말과 이치를 떠난 방법으로 해서 말없는 궁극의 진리를 깨닫게 하는 길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뭣고, 어째서 무라 했는고,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부득이해서 알래야 알 수 없고 도저히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맛없는 한마디 말을 주워서 참구하되 이치, 말길,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무조건하고 '이뭣고?' 이렇게 해라 이거여.

이뭣고 한마디에 말길이 끊어져버리고, 이치길이 끊어저버리고, 일체 번뇌와 망상, 선, 악, 무기(無記)가 다 끊어저버려. 부처다 중생이다 마음이다 하는 것도 거기서 다 끊어져버려. 그래서 이것을 경절문이다 그러고 최상승법이라 그래.

 

이 법은 숙세의 선근, 이 정법에 선근을 심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들을 수 있는 인연도 가질 수 없고, 이것을 듣고 할려고 하는 마음 내기는 더 어렵고, 시작해 가지고 끝까지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밀고 나가기도 어렵습니다.

 

참선, 이 활구참선은 육조(六祖)스님께서 "이뭣고, 한 물건이 있는데 밝기는 해보다 더 밝고 검기는 옻칠보다 더 검고, 뭐라고 이름붙일 수도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고 이 소소영령한 이놈이 뭣이냐?" 벌써 그게 시심마 화두여. 화두라는 이름은 붙이지 않았지만 제자들에게 심마물 임마래(甚麽物 恁麽來). 벌써 화두를 주셨어.

 

그 제자이신 신회(神會) 대사는 "모든 부처님의 본원이며 신회의 불성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해.

육조스님께서 "뭐라고? 이름붙일래야 붙일 수 없고 모양도 그릴 수 없다 했는데 왜 불성이니 본원이니 그런 이름을 붙이는고. 니가 앞으로 일가를 이룬다해도 지해종사(知解宗師)밖에 못되겠구나." 이론으로 교리를 분석하고 따지는 불교학자밖에 못되겠구나.

 

나중에 남악(南岳) 선사가 절을 하니까 "심마물 임마래?" 이렇게 물었어. 그 말에 남악회양선사는 꽉 맥혀가지고 몸둘 바를 몰랐어. 그 길로 물러나와 8년만에서 확철대오를 했어. 육조스님을 찾아가

 

"설사 일물(一物)이라도 맞지 않습니다."

"도리어 닦아 증(證)할 것이 있느냐?"

 

"닦아 증할 것은 없지 않지만 오염(汚染)은 얻을 수 없습니다."

"너도 또한 그렇고 나도 또한 그렇다."

 

쾌히 인가를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참선이 언하대오(言下大悟), 확철대오(廓徹大悟) 구체화된 한 장면인 것입니다. 그 뒤로 육조스님 밑에 5대 법손, 남악회양 선사, 마조도일 선사, 백장회해 선사, 황벽희운 선사, 임제의현 스님인데 육조스님은 서기 713년에 열반하셨고 그때가 8세기 경이고 임제스님은 열반하신 해가 867년이니까 9세기 중엽에 열반하셨는데 임제의현 선사 때 와서 간화선, 화두를 가지고 참선해가도록 간화선을 적극적으로 제창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당송시대에 활구참선이 대단히 중국천지에 널리 선양이 되고 임제스님의 11세 법손이신 대혜선사는 1087년에 탄생하셔서 1163년에 열반하셨는데 이 분에 의해 활구참선이 완성을 봤습니다.

 

간화선(看話禪)! 그 당시 조동종(曹洞宗)에서는 묵조선(默照禪)을 아주 적극 선양을 하고 임제종(臨濟宗)에서는 간화선을 제창을 해서 조동종의 묵조선과 임제종의 종사끼리 대단히 공박을 하고 신랄한 비평을 하고 그랬지만, 이 간화선은 조동종에서 비방한 거와 같은 사량분별로 공안(公案)을 따져가지고 빨리 깨닫기를 바라고 있다고 삿된 참선이라고 비방을 하고,

임제종에서는 흑산귀굴에서 살림살이를 한다고 신랄하게 비난을 했습니다마는, 조동종에서는 화두를 참구하는 참선은 아니지만 거기에도 역시 육조스님의 제자이신 청원행사 선사 밑으로 많은 도인들이 배출이 되었습니다.

 

화두를 들지 아니하고도 공부하는 참선법이 있습니다만 화두를 참구해가지고 참선하는 법. 우리 말세에 우리 중생들에게 중근기, 하근기로 올바르게 공부해나갈 수 있는 아주 훌륭한 수행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막연하게 어떻게 아무 생각도 없이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을 해라. 생각없는 생각으로 생각없는 것을 생각해라. 묵조선 조동종에서는 그렇게 가리키는데, 생각없는 것으로 어떻게 생각없는걸 생각하라는건지 참 어렵거든.

 

그런데 이 간화선은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다니는 이 소소영령한 것이 무엇인고? 아, 국민학교 학생도 할수가 있고, 일반사회 남녀노소 누구나 할수가 있다 그 말이여. 자꾸 법문을 들으면서 바른 호홉을 하면서 다못 이뭣고? 자꾸 하다보면 반드시 자기의 본래면목 자성을 깨달을 수 있게 되어있는 공부방법이 <선가귀감>에도 있고 <몽산법어>에 아주 구체적으로 자상하게 법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 마디 속에 앞에 말한 사렴주관, 천태삼관, 법계삼관, 유식삼관 다 그 속에 포함되어 있으면서 한걸음 더 나간 훌륭한 수행법이여. 자꾸 하다보면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일(總攝第一)이다.

이 알 수 없는 이뭣고, 이 한마디 속에 일체 8만대장경에 있는 법이 다 포함되어 있다. 일체 관법이 다 들어있어. 우리가 아무리 머리가 좋기로서니 8만대장경을 죽을 때까지 다 읽어서 요점을 추려서 실천할라고 해 보십시오. 거의 불가능하다 할 것입니다. 이 활구참선을 우리는 무조건 믿고 올바른 방법으로 철저하게 단속을 해갈 뿐인 것입니다.

 

관법, 관법하는데 그 관이라는게 대관절 무엇이냐? 관이라는게 우리 생각 일어나는 마음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중생 생각, 중생이 무슨 생각이든 일어났다 하면 그것은 망념이여.

그 망념이 일어난 뿌리는 진리요 진여(眞如)인 그 본체에서 나오지만, 이미 거기서 한 생각 일어났다 하면 그것은 망념인 거요. 천하없이 좋은 생각 일어나도 그것이 망념이여. 경전 속에 쓰여있는 생각이 일어났다 해도 그것이 망념이여.

그 망념을 탁 관조해보세요. 관조해가지고 그 망념이 일어난 뿌리로 돌아가는 것이 관이라. 관심이라고도 하고 관법이라고도 하고.

   

한마디로 말해서 한 생각 그놈에 즉해서 마음을 관한다. 마음이 무엇인줄 알아야지. 마음에서 우러나는 망념은 알 수가 있지만, 망념이 일어난 본체는 생각으로 알 수 없고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붙잡을 수 없어.

 볼래야 볼 수 없고 알래야 알 수 없는 그것을 바로 보는 방법이 이뭣고거든. 사량분별, 망념이 일어나 생사와 죄가 거기서 일어나는데 생각을 일으켜 그놈을 알려고 한다고 보여질 거냐 그 말이여.

 

마치 물은 때로는 얼음이 되기도 하고 수증기가 되기도 하고 그 기후와 상태에 따라서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 물 형태는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본체는 뭐냐면 습성(濕性)이라 하는 거야. 얼음이라 있을 때도 습성은 변함이 없고 기체로 있을 때도 습성은 변함이 없고 물로 있거나, 우박으로 되었거나 그 물의 습성은 변함이 없는거야.

  

그런데 그 습성은 우리가 볼 수가 없어. 일어나는 파도를 아무리 헤젓고 봐도 습성은 보이지 않어. 얼음을 가루로 뽀개도 그 습성은 볼수가 없어. 어느 형태로 있어도 그 본체는 변함이 없지만 중생의 소견으로는 볼 수가 없는 거야.

 

 

- 계속 中

 

< 1989년 5월 7일, 첫째 일요법회 >

 

 

 

걸림돌과 디딤돌

 

"길을 가다가 돌이 나타나면
약자는 그것을 걸림돌이라 하고
강자는 그것을 디딤돌이라고 말한다"
토머스 칼라일의 말입니다
 
걸림돌과 디딤돌은 신부님들의

강론주제로도 자주 등장을 하는 말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수많은 삶의 돌을 만납니다.
 
그때마다 그 돌을 대하는 마음가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집니다.
그 돌을 어떤 사람은 걸림돌이라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디딤돌이라고 말합니다
 

삶에서 오는 모든 장애를 불평과

원망의 눈으로 보는 것과 또 그것을 발판으로

재기와 도약의 발판으로 삼는 것과는

분명히 큰 차이가 있을 겁니다
 
오늘도 장애의 요소와 같은 돌을
곳곳에서 만나게 되겠지요
그런 돌들은 생활에 무수히 널려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깔린 돌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자세가 아닐까 싶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고 뒤처지게
하는 것들이라고 생각해온 모든 걸림돌을
오늘부터는 역으로 발판을 삼아서

디딤돌로 생각할 수 있다면

편안하고 행복할 수 있겠지요
 
 
- 좋은 글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