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이 들기전에, 둑카아리야삿짜(Dukkha Ariya Sacca, 苦聖諦)

2011. 3. 4. 19:5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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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이 들기전에,

둑카아리야삿짜(Dukkha Ariya Sacca, 苦聖諦)

 

 

말 못할 사연이

 

이른 아침 일터로 가는 길에 어떤 사람이 쭈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 하였다. 머리가 희끗 희끗한 노인으로 보였는데 고개를 숙여 얼굴을 두 무릎에 파 묻고 있었다. 주변에 서민들이 즐겨 찾는 술집과 카페가 많아 일명 카페거리로 불리고 있는 길거리에 앉아 있는 그는 술취한 취객으로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 말 못할 사연을 안고 있는듯 거의 절망적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더구나 나이도 많이 들어 아무런 희망도 없는 듯이 보였다.

 

  

 

 

요즘 도시의 하천은 잘 정비 되어 있다. 하수관을 하천 바닥에 파 묻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물이 흐르도록 만든 생태 하천은 이제 공원이나 다름없다. 그런 하천의 양옆에는 달리기나 자전거가 다닐 수 있는 보행자 전용 도로가 만들어져 있다. 그런 도로는 때로 다리 밑을 관통하여 이어져 있기도 하다. 그런데 다리 밑에 어떤 사람이 쓰러져 있다. 주변을 보니 술병이 나 뒹굴고 있다. 아마도 말 못할 사연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주택단지 입구나 등산로 입구 또는 재래시장의 한 쪽 켠에 좌판을 벌여 놓고 하염 없이앉아 있는 나이 든 노인들을 볼 수 있다. 취급하는 물건이라고 해 보았자 찬 거리용 채소나 즉석에서 먹을 수 있는 간단한 먹거리가 대부분이다. 그런 노인 중에 머리가 허연 할머니가 연꽃으로 유명한 어느 단지에서 맛있게 식사를 하고 있다. 반찬이라고는 김치 한가지에 불과하지만 숟가락으로 가득 퍼서 한 입 맛있게 떠 먹는 장면은 생존을 향한 의지처럼 보인다.

  

 

 

  

삼류 딴따라

 

방송에서 연예인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무명시절의 서러웠던 시절에 대하여 자주 이야기 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어떤 가수는 현재와 같이 인기 절정에 이르기 전까지 10년을 무명으로 보냈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거의 20년 동안 밤무대만 전전 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다가 부른 곡이 방송을 타기 시작 하고 히트 함에 따라 하루 아침에 스타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흔히 연예인들을 딴따라라고 말한다. 이는 연예인을 얕잡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가장 듣기 서러운 말이 삼류 딴따라라 한다. 딴따라라고 불리우는 것도 서러운데 거기에다 삼류 딱지까지 붙여서 일컫는 말이다. 그들은 나이트 클럽이나 라이브 무대, 산사음악회등 찾아 주는 곳이라면 가리지 않고 무대에 서는데, 그들이 부르는 모습을 보면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 같다.

 

혼신의 힘을 다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비록 그가 아직 잘 알려져 있고, 알아주지도 않는 삼류에 속한다고 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 한다면 언젠가 일류로 도약할 날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일류와 삼류는 종이 한장 차이에 불과 하다. 단지 기회행운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지금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알려져 있지 않더라도 자신의 할 바를 다 하면 미래는 보장 되어 있는 것과 다름 없다.

 

그와 같은 현상은 연예인들에게만 국한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스포츠계에서도, 정치계에서도, 문학계에서도, 회사에서도, 심지어 종교계에서도 지금 아무도 알아 주지 않고, 또 알려져 있지 않는 무명의 미천한 존재일 지라도 자신의 할 바를 다하고 있다면 그는 이미 승리자라고 볼 수 있다.

 

 

 

산사 음악회

20105월 청계사

 

 

잊혀진 존재

 

그런데 삼류딴따라 보다 더 서러운 것은 잊혀진 존재들이다. 더 이상 무대에 설수 없을 정도로 나이가 먹어서 또는 정열이 식어서 노래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과거의 화려하였던 일을 떠 올리지만 형편없이 쭈굴해진 모습을 결코 대중에게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부분 세상에 모습을 보이지 않고 철저히 은둔생활로 일관하다 생을 마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 수록, 늙어지면 늙어질수록 서러움을 느끼는 것은 사람들의 공통적인 심리이다. 거기에다 병이라도 들면 가족들 마저 하찮게 여긴다. 더구나 망령까지 들면 더 할 것이다. 이처럼 늙어가는 것도 괴로움이고 고통이고 비탄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늙어 가는 것만 괴로움일까.

 

부처님은 늙어감 뿐만 아니라 병드는 것도 고통이고, 죽는 것도 고통이고, 심지어 태어 나는 것 자체가 고통이라고 말하였다. 이 뿐만이 아니다. 부처님은 생노병사와 같은 네가지 고통 외에 근심, 탄식,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도 있고, 싫어 하는 자들과 만나는 것도 고통이고, 반면에 좋아 하는 자들과 헤어짐도 고통이라고 하였다. 또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고통이라 하였다. 결국 나 등으로 취착하는 다섯가지 무더기 자체가 괴로움이라 하였다.

 

오온을 내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으로 부터 모든 고통이 발생하였는데 이를 오취온(五取蘊, pañca-upādāna-kkhandā)이라 한다. 이처럼 12가지 괴로움이 있는데 그 중 태어 나는 것이 왜 고통일까.

 

 

이유 없이 흐르는 눈물

 

사람들은 아기가 태어 나면 모두 기뻐한다. 그러나 태어난 아기는 정작 울음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 났음을 신고 한다. 이 세상에 태어 났다면 기뻐해야 할 아기는 왜 울면서 나올까.

 

간혹 시간역행에 대한 영화를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영화가 현재 시점에서 미래로 진행하지만, 시간역행영화는 거꾸로이다. 즉 현재 시점 부터 과거로 시간을 거슬러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런 대표적인 영화가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일 것이다.

 

박하사탕에서 주인공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눈물을 흘린다. 이유 없이 흐르는 눈물이다. 군대 가기 전 20대 초반 친구들이 강변 철교 밑에서 신나게 디스코를 추며 놀고 있는데, 주인공은 철교를 바라보며 하염없이이유 없는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다. 그런데 그 흘린 눈물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박하사탕

1999년 이창동 감독작품, 설경구 주연

 

 

영화를 보면 시간역행 되기 전 까지 그가 살아온 수십년 동안 수 없는 일이 일어 났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하였음을 보여 준다. 광주 민주화 운동당시 진압군으로 차출 되기도 하고, 형사가 되어 범죄자를 주어 패기도 하고, 그 사이 결혼도 하고 아이도 갖고 또 이혼하고 하는 등 수 많은 일들이 그를 중심으로 하여 벌어진 것이다.

 

민요풍 노래 중에 갑돌이와 갑순이의 노래가 있다. 그런데 가사 중에 시집간 날 첫날밤에 한없이 울었더래요라는 말이 있다. 갑순이는 왜 한 없이 울었을까. 물론 사랑하는 갑돌이와 맺어지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일 수 있지만 앞으로 살아갈 인생이 한심해서 일 것이다. 이런 류의 눈물은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아들을 군대에 보낸 어머니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 역시 군대에서 벌어질 여러 일들을 예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더구나 요즘 군대에서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아 아들을 군대에 보낸 부모들이 안절부절한다 하니 그 눈물의 의미를 알만 하다.

 

마찬가지로 이제 갓 태어난 아기가 힘차게 울어 제끼는 모습이 마치 앞으로 자신의 일생동안 벌어질 수 많은 일과 사건 사고를 예견 하는 듯한 울음으로 비추어 진다면 지나친 판단일까.

 

 

괴로움의 본질

 

부처님이 말씀하신 12가지 괴로움 중에 태어남도 괴로움이라 하였다. 그래서일까 태어나는 아기는 울음으로서 이 세상에 신고하지만 불교에서 태어남은 과거생으로 부터 여기에 출현함을 의미한다.

 

어떤 변치 않은 영혼이 몸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생의 죽음의 마음에서 조건지워져 정신과 물질의 무더기들이 형성된 것으로 본다. 이 무더기들을 보통 오온(五蘊)’으로 부른다. 그런데 태어남이 왜 괴로운 것일까.

 

청정도론에서는 태어남이 갖가지 괴로움의 토대가 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괴로움의 본질은 무엇일까.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일곱가지를 들고 있다.

 

 

1. 고통에 기인한 괴로움(dukkha-dukkha,苦苦)

2. 변화에 기인한 괴로움(viparinama-dukkha, 壞苦)

3. 형성됨에 기인한 괴로움(sankhara-dukkha, 行苦)

4. 감춰진 괴로움(paticchanna-dukkha)

5. 드러난 괴로움(appaticchanna-dukkha)

6. 간접적인 괴로움(pariyana-dukkha)

7. 직접적인 괴로움(nipariyana-dukkha)

 

 

고고(苦苦)

 

이 중 첫번째의 고통에 기인한 괴로움을 빠알리로 둑카둑카(dukkha-dukkha)’라 하고, 이를 한자어로 고고(苦苦)’라고 한다. 이 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으로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육체적고통과 정신적 고통에서 기인한 괴로움의 고유한성질이다.

 

이런 고통은 몸과 마음을 직접적으로 타격하기 때문에 가장 강력한 괴로움으로서 우리말로 옮기면 고통(苦痛, suffering)’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괴고(壞苦)

 

두번째로 변화에 기인한 괴로움을 빠알리어로 위빠리나마둑카(viparinama-dukkha)’라는 하는데 이를 한자어로 무너질 ()’자를 사용하여 괴고(壞苦)’라 한다. 대체 무엇이 무너진다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즐거운 느낌은 그것이 변할 때 괴로운 느낌이 일어 날 원인이 되기 때문에 변화에 기인한 괴로움이라 한다.

 

 

괴고는 느낌에 관한 것이다. 보통 느낌은 세가지 종류가 있다. 즐거운 느낌(樂受)과 괴로운 느낌(苦受)무덤덤한 느낌(不苦不樂受, 평온)이다. 괴로운 느낌은 괴로운 것임에 틀림 없지만 불교에서는 즐거운 느낌마저 괴로운 것으로 본다. 왜 그럴까. 그것은 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래 지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괴로움은 느낌과 관련된 것으로서 중급정도의 괴로움이고 불만족(不滿足, unsatisfaction)’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행고(行苦)

 

세번째의 형성됨에 기인한 괴로움을 빠알리어로 상카라둑카(sankhara-dukkha)’라 하고, 한자어로 행고(行苦)’라 한다. 이 것은 형성되어진 모든 것들(유위법)은 모두 괴로운 것이라고 본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펑온한 느낌과 나머지 삼계에 속하는 상카라들은 일어나고 사라짐에 대한 압박되기 때문에 형성됨에 기인한 괴로움이라 한다.

 

 

무위법인 열반을 제외한 삼계에 형성되어 있는 모든 유위법(상카라들)의 특징은 일어나고 사라진다. 따라서 항상 고정되어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없어서 일어나면 반드시 사라진다라는 생멸현상에 대하여 느끼는 미묘하고, 잔잔하고, 미세한 괴로움이라 볼 수 있다.

 

이를테면 늙어 가는 것, 자연의 변화등은 오래 지속되지 않아 발생하는 것이다. 이뿐만이라 마음 또한 순간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진다. 이처럼 생주이멸 하는 마음, 생노병사하는 인간, 성주괴공하는 우주는 조금도 멈추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거듭한다.

 

이처럼 나와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현상에 대하여 존재 하는 것 자체는 언젠가 무너지고야 만다는 무상함을 느끼고, 때로는 가슴아프게 생각하고, 슬퍼지고, 불편하고, 불쾌하게 느껴지는 감정을 상카라둑카(sankhara-dukkha,행고)’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태어남이 왜 고통인가

 

위의 일곱가지 괴로움의 본질이 왜 태어남이 고통인가에 대한 답이다. 그렇다면 태어남 자체는 어떤 것일까.

 

흔히 법문에서 사람몸 받기가 힘들다고 말한다. 이를 맹구우목(눈 먼 거북盲龜遇木)'비유를 들어 설명하기도 한다. 그런데 태어남이 사람에게만 있을까. 이 삼계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수 많은 태어남이 있다. 그런 태어남 중에 일시에 수천 수만의 생명도 탄생된다.

 

봄 날 물이 가득찬 웅덩이를 보면 올챙이로 바글거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것이 진정한 태어남일 것이다. 그에 비하면 인간의 태어남은 큰 바다의 눈 먼 거북이가 우연히 널판지의 구멍에 머리를 넣을 정도로 희유한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태어 날 때 홍련과 백련과 같은 연꽃속에서 탄생하는 것일까.

 

청정도론에서 태어남에 대한 설명은 매우 리얼하다. 입태된 존재는 어머니의 자궁속에서 자라는데, 거기는 위장막과 척추 중간에 위치해 있고, 아주 좁고 어두울 뿐만 아니라 몸의 갖가지 냄새가 퍼져 있어 심한 악취가 통풍구를 통하여 순환하고, 마치 썩은 생선과 썩은 죽과 오물구덩이 속의 벌레처럼 태어난다고 묘사 하고 있다.

 

열달동안 자궁에서 생긴 열로 자루에 넣어져 구워진 과자처럼 구워지고경단처럼 쪄져서, 구부리거나 펴는 것도 없이 극심한 괴로움을 겪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입태에 따른 고통이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비틀거리거나 앉거나 일어설 때 위로 끌리고, 아래로 끌리며, 위아래로 흔들리면서 극심한 괴로움을 겪는다. 또 어머니가 찬물을 마실 때 마치 차디찬 지옥에 떨어지는 것 같고, 뜨거운 죽을 삼겼을 때 숯불의 비가 쏟아 지는 것 같고, 짜거나 신것을 삼킬 때 마치 도끼로 몸을 찍는 것 같은  괴로움을 겪는다. 이 것이 임신에 따른 고통이다.

 

어머니가 출산할 때 어떠할까. 업으로 생긴 바람에 의해 거꾸로 틀어 자궁으로부터 마치 지옥의 낭떠러지와 같은 너무나 무서운 통로에 내던져진다. 마치 열쇠구멍으로 커다란 큰 코끼리를 끄집어내듯이매우 좁은 자궁의 입구를 통해 끄집어 내어질 때, 마치 지옥의 중생이 굴러떨어지는 바위에 의해 몸이 부서질 때 고통이 일어 나듯이 커다란 고통이 따른다. 이 것이 분만에 따른 고통이다.

 

이제 아기가 태어 났다. 그런데 아기 몸은 매우 예민하고 연약하다는 것이다. 손으로 들거나, 목욕을 시킬 때 천으로 문지를 때 마치 바늘 끝으로 찌르고 칼날로 상처를 내는 것처럼 고통이 따른다.  이것이 모태로 부터 나옴에 따른 고통이다.

 

다음으로 살아 가면서 자신을 혹사하거나 나체의 서계등으로 고행과 금욕행위를 하거나 화가 나서 단식을 하는자 들에게도 고통이 일어 난다. 이것을 자기폭력에 따른 고통이라 한다.

 

또 타인으로 부터 매질을 당하거나 투옥등을 경험하기도 하는데 이를 타인의 폭력에 따른 고통이라 한다. 이처럼 태어남 자체가 모든 고통의 토대라고 말하였다.

 

 

늙는것도 괴로움일까

 

늙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 고통일까. 불교에서는 그렇게 본다. 청정도론에서 늙음에 대하여 두가지로 설명한다. 하나는 형성된 것으로서의 늙음과 또 하나는 한 생에서의 무더기들의 늙음이다. 보통 늙음이라 하면 두 번째 것이다.

 

사람이 늙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이는 몸이라는 무더기가 성숙해 가는 것을 말한다. 또 죽음으로 인도하고 젊음을 파괴하는 역할을 한다. 때 늙음은 세가지 본질적 괴로움 가운데 가장 미세한 행고(行苦)속한다.

 

사람이 늙어지면 어떤 현상이 발생될까. 사지가 무력하고, 감각기능이 쇠하고, 몸은 말라 비틀어지며 젊음 또한 사라지고, 기력과 기억력이 감퇴 될 뿐만 아니라 타인으로 부터 경멸까지 받기도 하고 심지어 자신의 가족까지 하찮은존재로 여긴다.

 

 

죽을까봐 항상 겁내는

 

늙으면 결국 죽게 된다. 죽는다는 의미는 크게 두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형성된 것의 특징으로서 죽는 것을 말하고, 또 하나는 한 생에 있어서 생명기능이 끊어지는 것을 말한다. 전자는 순간의죽음을 말하고, 후자는 보통 사람이 죽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죽을까봐 항상 겁낸다고 한다. 그에 대한 이야기가 숫따니빠따에 있다.

 

 

결국 익은 과일처럼 떨어져야하는 두려움에 처합니다.

이처럼 태어난 자들은 죽어야 하고 항상 죽음의 두려움에 떨어집니다.

(Sn.576, 숫따니빠따 화살의 경-salla sutta 3번 게송, 전재성님역)

 

 

과일이 익으면 아래로 떨어질 수 밖에 없듯이 태어난 자들 또한 반드시 죽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항상 죽을까봐 두려워 하며 사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삶의 행복에 맛에 빠져

 

이처럼 태어나고 늙어 병들어 죽는 것 외에 삶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근심, 탄식,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 싫어 하는 자와 만나는 것, 좋아 하는 자들과 헤어지는 것, 원하는 것을 얻지 못 하는 것, 다섯가지 무더기에 취착 하는 것(오취온) 모두가 괴로움이고 고통이라 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우주는 누가 만들었고 어떻게 형성되었을까와 같은 의문 대신 오로지 나의 몸과 마음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에 대하여만 말하였을까. 그 것도 지금 당면한 12가지 고통에 대한 이야기 위주로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 부처님이 사성제를 설한 많은 이유 중에 순서에 따라 설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삶의 행복한 맛에 빠져 있는 중생들에게 분발심을 일으키게 하기 위해서 첫번째로 괴로움을 말씀하셨다. 짓지 않은 것이 스스로 오는 것이 아니며, 신 등이 만들었기 때문에 있는 것도 아니며, 오직 이 원인으로 부터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그 다음으로 일어남을 말씀하셨다.

 

 

부처님이 사성제를 설한 이유 중의 하나가 지금 즐거움과 세속적 행복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래서 가장 먼저 설한 것이 고통에 관한 것이고, 이어서 고통의 일어남 등의 순서로 설하신 것이다.

 

 

늙는다는 것

 

사람이 나이를 먹어 늙게 되면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된다. 그러면서 이 다음 생에 태어 날 때 좀 더 나은 곳에 태어나기만을 바란다. 그러나 자신의 처지를 보면 한심스럽기 그지 없다.

 

신체와 정신이 모두 늙어서 주의력도 떨어지고, 몸도 무겁게 된다. 걷기도 힘들고, 앉아 있는 것도 어렵고, 서 있는 것 조차 고된 노동을 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신체가 약해지면 정신기능 또한 노쇠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것 저 것 잊어 버리고 정신 또한 나태해진다.

 

80이나 90이 되었다면 누가 훈계해 주지도 않을 것이다. 너무 늙어서 젊은이들과 어울리기도 쉽지 않고, 거부당하면 소외되었다고 생각한다. ‘2의 아동기로 접어드는 것이다.

 

이런 생활이 계속되면 자신은 쓸모 없는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포자기 하게 된다. 이런 행위는 결과적으로 불선업을 짓는 행위이기 때문에 죽어서 결코 좋은 곳에 태어 나기 힘들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현자들이 말하기를 수행을 하라고 권한다.

 

비록 나이가 들었을지라도 지금부터 열심히 수행을 하면 좀 더 나은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한다. 비록 젊은이들 보다 수행의 성취도는 떨어질 지 모르지만 주변의 경멸이나 가족들의 하찮아보이는 듯한 태도를 시정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수행을 하면 자녀들도 존경심을 가지고 부모를 찾게 될 것이고, 깨달음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버려진 쓰레기처럼

 

수행은 젊었을 때 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정신적 신체적으로 건강하기 때문에 수행의 집중이나 성취도가 훨씬 빠르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을 허비하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보낸다. 또 그런 기회를 놓쳐 버리게 된다. 그 결과 몸은 늙어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고,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에 대한 적절한 비유가 법구경 155번 게송일 것이다.

 

 

Acaritvā brahmacariya            아찌리뜨와 브라흐마짜리양

aladdhā yobbane dhana        알랏다 욥바네 다낭

jiṇṇakoñcāva jhāyanti                진나꼰짜와 자얀띠

khīamaccheva pallale.            킨아맛체와 빨랄레.

 

그들은 젊었을 때 청정한 생활을 한 것도 아니었고

재산을 모은 것도 아니었다.

가진 재산을 모두 낭비한 지금 실의에 잠긴 모습은

마치 날개 부러진 왜가리가

물고기 없는 마른 연못에 있는 것과 같다.

 

(법구경 155번 게송, 거해스님역)

 

 

후회하는 늙은이(Regrets In Old Age)

그림 http://www.buddhanet.net/dhammapada/d_oldage.htm

  

 

젊은 시절을 감각적욕망에 휘둘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다라는 단멸론을 가진채 , 되는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온 인생실패자에 대한 이야기라 볼 수 있다. 마치 날개 부러진 왜가리가 아무 먹을 것 없는 마른 연못에 서있는 것과 같이 아무런 희망이 없는 것이다.

 

젊은 시절 도와 과를 성취하기 위한 수행도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해서 모아 놓은 재산조차 없어서 마치 버려진 쓰레기처럼 살아 가는 늙은이를 말한다.

 

 

최소한 발판이라도

 

사람 몸 받기가 힘들다고 한다.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 자체가 희유한 일이라 하는데 이 생에서 (, Magga)’(, Phala)’를 성취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한다. 그렇다면 더 나이 먹기 전에, 더 늙기 전에 부지런히 수행하여 부처님이 몸소 보이셨던 그 길(Nibbana)’로 가야 하는 것이 진정한 부처님의 제자일 것이다. 그 길을 이 번 생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다음 생을 위하여 최소한 발판이라도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2010-11-22

진흙속의연꽃

 

 

진흙속의연꽃 - 이 고뇌의 강을 건너 

 

 

 

 

 

죽으면서 태어나라  - 법정 스님 잠언집에서 -

 


우리가 날마다 죽으면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만일 죽음이 없다면 삶 또한 무의미해 질 것이다

 

삶의 배후에 죽음이 받쳐 주고 있기 때문에 삶이 빛날 수 있다.
삶과 죽음은 낮과 밤처럼 서로 상관관계를 갖는다.

 

영원한 낮이 없듯이 영원한 밤도 없다.
낮이 기울면 밤이 오고 밤이 깊어지면 새날이 가까워진다.

이와같이 우리는 순간순간 죽어 가면서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살 때는 삶에 전력을 기울여 뻐근하게 살아야하고
일단 삶이 다하면 미련없이 선뜻 버리고 떠나야 한다.

 

열매가 익으면 저절로 가지에서 떨어지듯이
그래야 그 자리에서 새로운 움이 돋는다.

순간 순간 새로 태어남으로써
날마다 새로운 날을 이룰 때
그삶에는 신선한 바람과 향기로운 뜰이 마련된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나그네인지

매순간 살펴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