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난득(人生難得)이요, 불법난봉(佛法難逢)이로다. /성수스님

2011. 4. 8. 18:1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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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난득(人生難得)이요, 불법난봉(佛法難逢)이로다.

 

나무 아미타불! 우리는 참으로 만나기 어려운 이 몸을 만났습니다. 또 불법도 진짜 만나기 어렵고 어렵습니다. 이렇게 만나기 어려운 몸 받았을 때 불교를 만났으면, 부처가 어떻게 해서 부처가 되었는지 한 번 물어보고 알고 가야 됩니다.

 

싯다르타 태자는 네 가지 죄를 짓고 야반도주했는데도 삼천 년을 존경받고 있습니다. 네 가지 죄란 나라 일을 안 본 역적죄, 부모 말 안 들은 불효죄, 태자로서 만인 앞에 혼인하고 삼 년도 안 살고 야반도주한 마누라 배신죄, 자식은 낳아놓고 한 살도 안 키우고 일곱 달만에 도주한 자식 버린 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합니까.

 

공자도 모르는 것과 아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묻고 배우기를 좋아했고, 우리 부처님은 확실히 모르고, 분명히 모르고, 크게 몰랐기 때문에 크게 깨달았어요. 안 늙어 죽는 것을 배우려고 해도 그것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걱정하다가 6년을 넘어버렸어요. 정신은 일념이 되어서 도취가 되는데 몸은 6년을 입히지도 먹이지도 않고 물도 한 방울 안 주니 간시궐(마른 똥막대기)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부처되는 과정도 어려운 과정을 많이 겪었습니다.

 

 

해지기 전 자신을 한 번 만나보라

 

살 때 살 줄 알고 살아야, 갈 때 갈 줄 알고 갑니다. 오늘부터 해지기 전에 자신이 자신을 한 번 만나보세요. 뭐가 바쁜가? 죽자 살자 일하는 것이 늙어 죽는 것밖에 하는 것이 없어요. 늙으면 간다고 하지만 갈 곳도 안 찾아놓고 한 치 앞 갈 길도 모릅니다. 또 갈 놈이 누군지도 모르고 간다고 하니 전부 남의 다리 긁고 수박 겉핥고 살아요.

 

오늘부터 정말 ‘내가 누구냐?’ 한 번 물어서 대답 안 하고 두 번 물어서 답이 없으면, 세 번 만에 죽여야 됩니다. 자기가 자기 말 안 듣는 놈에게 밥 주고 물 주고 하겠습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살면 ‘하나 둘 셋’ 할 때 나와서 서로 끌어안고 춤을 덩실덩실 추며 노래를 부릅니다.

 

천하만물은 무비선(無非禪)이요, 세상만사는 무비도(無非道)로다. 나무 아미타불! 내가 나를 한 번 만나서 끌어안고 보면 지금 부른 노래처럼 천하만물은 진리 아님이 없고 세상 만 가지 일이 도 아님이 없습니다. 네 탓이니 내 탓이니 늙었다고 원망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해지기 전에 등은 땅에 붙이지 말고 눈 붙이지 말아야 합니다. 등을 땅에 붙이면 뱀의 몸을 받고, 눈 붙이면 장님 연습하는 겁니다. 나는 90세가 다 되었는데도 눈이 초롱초롱합니다. 아직까지 낮에 등을 땅에 붙인 일도, 눈 붙인 일도 없어요. 눈을 붙이고 흐리멍덩하게 살면 피가 탁해집니다.

 

여러분 오늘부터 부처님 흉내 내야 됩니다. 여러분이 불교 믿는다고 할 때 믿을 ‘신(信)’자 하나라도 똑똑히 알고 믿어야 합니다. 절에는 뭐 하러 가느냐고 하면 안 늙어 죽는 법 배우러 가야 됩니다. ‘불살생’이 파리나 모기도 죽이지 말라는 뜻도 있지만, 사실은 생사고뇌에 죽지 말라는 말입니다. 죽는 일하며 산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나는 아직 47년째 병원에도 안 가고 약도 안 먹고 밥도 다섯 숟가락밖에 안 먹어요.

 

절에 와서 복 지으려고 부처님께 실컷 절하고 나가다가 신에 흙이 묻었다고 남에게 욕하면 절한 복을 다 쏟아버리게 됩니다. 심보를 잘 써야 합니다. 알고 살아야 할 것이 참 많습니다. 하루에 한 마디씩 내가 본 세상을 쓰면 좋습니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이 밝은 시간을 정말 금쪽같이 아껴야 합니다. 밝은 기운을 가지고 앞을 내다보며 여유 있게 살아야 됩니다. 그러려면 남은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하루에 한 마디씩 써야 합니다.

 

눈도 보배고, 귀도 보배고, 코도 보배고, 입도 보배고, 손도 보배고, 발도 보배입니다. 이 여섯 가지를 관리 잘해서 잘 쓰면 존경받고 잘못 쓰면 자기 아들딸에게도 밟힙니다. 정말 받기 어려운 사람 몸을 받았을 때 기와집 짓고 자가용 타면서 잘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 집주인을 만나봐야 합니다. 남의 집에서 몇 십년씩 살면서 집주인도 안 물어보고 만나볼 생각도 안 하고 전부 허탕으로 살고 있어요. 하루 한 마디씩 쓰면서 눈에게 귀에게 코에게도 물어보면 대화가 됩니다.

 

 

죽을 각오로 묻고 또 물으라

 

참나가 뭔지도 모르고 ‘선(禪)’자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참선하라고 해도 안 됩니다. 참선을 위해서 참선하는 것이 아닙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늙어 죽는 것이 억울해서 벼르다가 야반도주하여 고생고생하여 깨달아서 세계 인류를 꿈에서 깨게 한 겁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 물어볼 것이 참 많은데도 하나도 물어보지 않고 절만 꾸벅꾸벅하는 걸 보면 참 장관입니다.

 

바른 스승을 만나 올바로 묻고 닦는 것이 순리인데, 참선의 ‘참(參)’자 ‘선(禪)’자도 모르면서 가르치고 닦으려고 하니 안타깝습니다.

 

나는 원효 같은 도인이 되겠다고 출가해 당대의 내로라하는 선지식들을 찾아다니며 많이도 괴롭혔어요. 총림을 이룬 해인사에 큰스님이 있다고 해서 ‘도’를 물으러 갔는데 당시 도감이었던 구산 스님이 공양주부터 하라는 거예요. “나는 도를 배우러 왔지 공양주 살러 온 것이 아니다”고 구산 스님, 도총섭 청담 스님, 부조실 인곡 스님 등을 곤혹스럽게 하던 끝에 조실 효봉 스님에게 불려갔어요.

 

효봉 스님은 한참 입을 다물고 있다가 “도를 깨치려면 7일 안에 해결해야지 7일 안에 해결하지 못한 놈은 나한테 맞아 죽어도 괜찮다”라는 서약서를 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서약서에 지장까지 찍고 나니, 시자를 불러서 서옹 스님이 입승 살던 곳에 데려다줬어요. 그 곳에서 “도야, 네가 나오면 내가 살고 네가 안 나오면 내가 죽는다. 빨리 나오너라.” 하며 삼일 동안 속으로 고함지르고 물도 안 마시니 몸 전체가 빨갛게 달았어요.

 

서옹 스님이 그때 나보다 11살 더 드신 어른인데 밥을 가지고 와서 입에 퍼 넣어도 안 넘기니까, 다른 스님에게 시켜서 손가락으로 밀어 넣었지만 그래도 안 넘기니까 안 넘어가더라고요. 지대방에 끌고 나와서 이불 덮어놓고 한 스님에게 지키라 하고, 스님들은 선방에 좌선하러 갔어요. 20분 되니까 나를 지키던 스님이 꾸벅꾸벅 조는 틈을 타서 후다닥 일어나 선방에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입승 스님이 “저 수좌 쉬라고 했는데 왜 들어왔느냐?”고 해서, “이 자식아, 네 걱정이나 해라.”라며 고함을 질렀습니다.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서 스님들이 손도 못 내리고 입도 다물지 못합니다. 그때부터 죽을 날이 사흘밖에 안 남았으니 바빠서 해인사가 떠나가도록 “도야, 네가 나오면 내가 살고 네가 안 나오면 내가 죽는다. 내 죽는 것 네가 볼래? 어쩔래?” 하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천하만물은 무비선이요, 세상만사는 무비도라

 

3일 되니까 열이 쑥 내려가고 효봉 스님에게 가서 “도 가지고 왔습니다.” 했어요. 그러자 “그건 아닐세.”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수 내 것은 아닌 것이 도이거니와, 효봉 네 것 내놔라.” 하니까, 효봉 스님이 “그러면 못 쓴다.”고 했습니다. 이어서 “천하 만물은 무비선(無非禪)이요 세상만사는 무비도(無非道)라, 여기에 쓰고 못 쓰고 할 게 어디 있느냐.”고 했습니다. 한 달 동안 하루에 세 번 들어가서 “성수 것은 못 쓰는 게 도이지만, 쓰는 도 좀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 것을 사자새끼라고 합니다. 스승을 잡아먹고 쥐고 흔들 수 있는 힘이 있어야 됩니다.

 

그때 효봉 스님 덕택에 철이 좀 들었어요. 여러분이 정말 선지식하고 싸워야 불교를 좀 알지 안 싸우면 불교를 모릅니다. 죽는다 싶은 생각이 있으면 안 싸울 수가 없어요. 여태껏 살아봐야 죽는 것밖에 안 게 없어요. 죽는 것도 죽을 줄 알고 죽어야 합니다. 숨 들이쉬고 내쉬지 못하면 끝장나는데, 갈 곳도 모르지 갈 길도 모르지 갈 놈이 누군지도 모르고 하루하루를 삽니다.

 

‘하나 둘 셋’ 할 때 깨달아야 됩니다. 알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으면 1분 1초 말 떨어질 때 척 알아 챙겨야 합니다. ‘삼일수심천재보(三日修心千載寶, 3일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다)’라고 했어요. 사흘만 닦으면 되는데 도를 알고 닦아야지, 모르고 닦으면 남의 다리 긁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만나는 것이 도랑 건너가서 만나는 게 아닙니다. 숨 쉴 것도 없고 생각 낼 것도 없이 ‘하나 둘 셋’ 할 때 척 만나보세요. 만나보면 그게 살아있는 부처, 활불(活佛)입니다. 자기 활불은 밟아 문질러놓고 남의 부처한테 가서 복 달라 돈 달라고 해도 소용없어요. 자기 부처부터 만나는 것을 약속하고 오늘 법문 끝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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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性壽) 스님 _ 1923년 경남 울주 출생. 1944년 내원사 조계암에서 성암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48년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한 후 전국 선원을 찾아 정진했다. 조계사, 범어사, 해인사, 고운사, 표충사 주지, 총무원장 소임을 맡아 가람수호와 불교발전에 노력을 기울이는 과정에서도 수행자의 길에 소홀함이 없었다. 올해 세수 여든일곱으로 전계대화상을 역임하였으며, 1994년 원로의원으로 선출된 최고령 원로의원이다. 서울 법수선원에 이어 함양 황대선원, 산청에 해동선원을 개설하여 평생을 명안종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다.

 

 

 

 

 

흙이 타 도자기가 되듯이 수행해야 성불한다

 

흙은 번뇌요 가마속은 정진이라. 자기를 태워 옥으로 태어남이여

 

스님은 말씀하셨다.

“진흙이 흙이 되는 과정이 도자기다.

진흙은 물들지만 백옥은 진흙 속에 던져 놓더라도

물들지 않고 색이 바래지 않는다.

이를 성불이라고 한다.

용광로를 거치기 전은 중생이요,

거치고 나면 부처다.

그래서 중생이 곧 부처라고 하는 것이다.”

 

더 이상의 이야기나 설명이 필요치 않았다.

스님은 손에 주장자를 들었던 흙을 묻혔든 아니면 호미를 들고 밭을 맸던

상황이나 공간에 상관없이 늘 한가지만을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허상일 뿐.

스님은 흙을 빚고 불을 지피면서도 늘 수행자였다.

 

용광로의 불빛 속에서도, 그릇을 만드는 물레질을 하면서도 늘 화두일념이었다.

그런데도 우매한 중생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줄 알고 웃고 운다.

하나 하나 짚어가며 설명하지 않으면 도대체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왜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느냐고 역정을 낸다.

 

기자가 꼭 그 꼴이다.

스님이 한가지 설명을 해주자 그제서야 알았다는 듯

“그러니까 수행이란 자기부정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라며 반색을 했다.

스님은 연민을 가득 담은 눈을 하면서도 예의 웃음을 거두지 않고

“그냥 그렇다는 것이지 무슨 해석을 하든 어떻게 받아 들이든

그건 기자님 자유고….”

 

부처님께서도 말씀 하셨다. 당신이 보시기에 세상이 그렇더라고.

봄이면 꽃이 피고, 여름이면 열매맺고 가을이면 수확하더라.

해는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지더라. 그걸 꼭 말해줘야 아는가.

그래서 스님도 말씀하셨다.

“부처님이나 조사님들이 말은 하지만 답답해서 하는 것이지. 비유도 드는 것이고.”

답답하기는 스님이나 기자나 마찬가지다.

 

“이왕 시작하신 것 우매한 중생을 위해 하나 더 들려주시죠.”

이번에는 밤나무 이야기를 꺼내셨다.

 

“밤나무를 겨울에 처음 본 아이들은 밤이 다시 열릴 거라고 믿지 않아.

그런데 한번이라도 사계절 순환을 본 사람은 봄에 꽃만 피어도 알지,

저기에 밤이 있다는 것을. 직접 경험한 사람과 안한 사람은 그렇게 달라.”

 

스님의 밤나무 비유는 계속됐다. 이번에는 수행과 성불에 대한 비유를 들었다.

 

“알밤이 열매를 맺기전 비 바람을 견디지 못하면 떨어져 썩게돼.

열매를 맺지 못하고 떨어지면 그걸로 끝나. 싹을 못 틔우게 되지.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비 바람을 이겨내고 성과(成果)를 맺게되면,

즉 알밤이 되고 나면 밤술도 껍질도 필요없어져. 오히려 거추장스럽지.

그래서 저절로 밤송이에서 분리돼 나오잖아. 과(果)를 증득한 것이지.

과를 증득하기 전에는 어떻게 해서든 밤송이에 꼭 붙어 있어야 되는데

그것이 곧 수행의 과정이야.

 

열매를 맺고 나면 무애(無碍)인 것이지.

열매를 맺은 뒤 떨어지는 것을 백척간두 진일보에 비유할 수 있어.

천길 낭떠러지에서 손을 놓는 현애살수(縣崖撒手)할 때

비로소 성불의 길에 들어서는 거야.”

 

스님의 설법은 거침없었고 도무지 막힘이 없었다,

비유는 머리에 쏙쏙 박힐 정도로 간결하고도 분명했다.

‘토불은 물을 지나지 못하고’(土佛不渡水), 금불은 불을 지나지 못한다(金佛不渡火).

내가 토불인데도 물을 건너가다 빠지고 내가 금불인줄 알면서도 불을 건너다 사라진다.

치열한 정진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 옮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