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수보살의 중관사상

2011. 8. 13. 11:5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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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보살의 중관사상

 "중관사상"이라는 것은 즉 중도 사상,  용수, 인도어로는 나가르쥬나의 사상입니다.
반야경을 중심으로 해서, 초월적인 불교사상을 정립하는 과정입니다.
공을 중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초기 불교는 본래 경험적인 것이었습니다.
석가는 형이상학적인 우주적 질서, 혹은 그러한 존재를 상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인간의 현실적 감각경험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있는 그대로의 질서를 포착하려 하지요.
물론 이것이 다 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중도라는 것은 불상견과 손익견 사이의 중간자를 취함입니다.
용수에게 있어 네 가지 인과관계의 개념을 다루고, 그것이 존재한다는 실체론과,
 그것이 형이상학적인 질서 속에 존재한다는 관념론 모두를 반박하기 위함입니다.

 

용수의 개념화가 초월적이라는 것은 그가 비경험적인 형이상학적 실재를

논하는 것이 목표여서가 아니라 절대적인 유일한 실재를 나타내는 변증법적인

개념적  장치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현실의 경험계, 즉 관습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인과관계는 존재하는 것 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입장, 형이상학적인 실재에서 보자면 인관관계는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지요.  이처럼 현실적인 입장과, 형이상학적인 입장 모두를 취하는 관점이

바로 나가르쥬나(용수)의중도 사상입니다.

 

만물의 원인은 인과적으로 얽혀있되 그것은 인과적인 실체가 아니라,
모든 것이 상대적, 의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죠.
고로 이것이 의타기성이라는 것입니다.

 

이른바  "팔부중도"란

"불생불멸(不生不滅) 불상부단(不常不斷) 불일불이(不一不異) 불래불거(不來不去)"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중도의 이치는 모든 법이 본래부터 자성이 없이 갖가지 인연을 통해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연기법(緣起法)에 근거하여 설해진 내용입니다.

인연에 의해서 나타난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는 공한 것으로 양변을 여의었고.

그러므로 중도는 곧 연기의 법이며 공한 법이며 일체의 차별과 대립을 떠난 적멸의 법입니다.
여기에 근거해서 우선 불생불멸은 지혜로운 자의 입장에서 볼 때 모든 법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질계건 정신계건 망념된 중생의 차원에서 볼 때에는 일어남이 있고 사라짐이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상은 거짓모습이라 생멸이 끊어졌다고 말합니다.


다음의 불상부단은 모든 법은 영원함도 끊어짐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생각하기에 이 세상에는 영원히 지속되는 것들이 있고 반대로 순간적으로 끝나는

것들이 있다고 여기기 쉽지만 그 역시 치우친 견해로 망념된 마음의 소산일 뿐 이라고 합니다.


다음의 불일불이는 모든 법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서로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이 본질적으로는 하나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또 서로서로는
완연히 다르다고 주장하기도 하지요.
그 또한 잘못된 소견들로 중도의 이치를 등졌기 때문에 이같은 편견을 짓는다고 합니다.


마지막 불래불거는 모든 법은 어디로부터 온 바도 없고 어디를 향해 간 바도 없다
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왔다가 저곳으로 가는 것이 모든 존재들의 흐름같지만 그것 역시 형상에
집착하는 망념된 마음에서 그렇게 보일 뿐 실지로는 움직임이 없다고 합니다.
이렇게 설명은 했지만 이와같은 팔부중도를 우리들로서는 상당히 이해하기 힘듭니다.


비유를 든다면 바다와 거품에다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체적인 바다의 입장에서 볼때 한 방울의 거품이 생겨나고 없어지지만 바다 자체
에서는 생겨나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습니다.
또 거품은 항상 흰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 거품의 물이 아주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또 거품과 바다가 같은 것 인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것이 바닷물이 인연을 만나

거품이라는 다른 현상을 일으 킨 것입니다. 그럼 반대로 거품과 물이 아주 다른 것이냐

하면 절대 그럴수는 없습니다. 거품은 물로부터 일어났기 때문이지요. 이는 거품이

왔다거나 갔다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바다의 입장에서 볼때 거품은 가고 온 곳이 없습니다. 바람을 따라 왔건 바람을 따라

갔건 그것은 하나의 허망한 현상이지 바닷물은 그대로인 것입니다.
이렇게 바닷물처럼 그대로인 법이 중도법이라면 우리들이 일으키는 차별의 법은

어떻게 소멸될 수 있을까요. 자기 마음속에서 파생되는 인연의 법을 발견해 보는 일이

그 열 쇠라 생각됩니다.

 

 

성불하십시요._()_

 

 

 

 

있는 그대로가 '나'이다. / 숭산 큰스님 


    春來草自生
    봄이 오면 풀은 저절로 나는 것이고
    靑山自不動
     청산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며
    白雲自去來
    백운은 바람따라 이리저리 흘러가는 것이다.


    봄이 오면 풀이 저절로 나므로 중생이 오면
    근기를 따라 대접하고, 청산은 동요가 없으므로
    마음은 동요가 없다.
    동요 없는 마음이 바람을 만나면 흰구름처럼
    인연따라 동서로 윤회한다. 

    옛날에는 가고 싶지 않은 곳에 억지로 끌려 다녔고
    나고 싶지 않은 곳에도 억지로 나서 살고 싶지 않은
    삶을 살았는데 이제는 그 입을 마음대로 돌리고
    다니면서 삼계의 귀한 손님 노릇을 한다.

    굴리느냐 구르느냐,
    그대들은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가?

    마장동 도살장에 가보면 수없는 소들이
   “음매 음매” 소리를 지르고 눈물을 흘리며 들어온다.
    일평생 여물죽을 먹고 논과 밭들을 다니며 갖은
    고통을 겪었던 소들이 이제 마지막 몸 바칠 곳을
    향해 보보등단(步步登壇)한다. 


    그러나 어떤 소는 대담하게 매를 맞을 필요도 없이
    제발로 걸어 들어가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
    죽지 않으려 몸부림 쳐도 죽지 않는 것이 아닌데
    죽는 마음, 그것 하나 때문에 공포의 눈물이
    육신을 적신다.
    가련한 인생. 돌아보아야 할 일이다.

    과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문자에 팔리고 이름에 팔리고 재산에 목 메인
    인생들은 분별 속에서 죽어간다.
    그러므로 조주스님은 불법을 물어오는 사람에게
    차나 마시고 가라고 하였다.

   “스님, 부처가 무엇입니까?”
   “차나 마시고 가게(喫茶去).”
   “스님, 마음이 무엇입니까?”
   “차나 한 잔 마시고 가게.”
   “도가 무엇입니까?”
   “차나 한 잔 마시게.”

    아니면 불법을 물을 때마다,
   “다리 밑을 내려다보라” 고 하였던 것이다.

    네 앞도 모르는 놈이 부처를 알아 무엇하며
    불성을 알아 무엇하려는 것이냐는 말이다.
    돌아볼 일이다. 나의 다리 밑을.
    인생은 어느 곳으로부터 와서 어느 곳으로 가느냐
    하는 문제는 동서고금 모든 사람들의 화제였다.
    그러나 우리의 고인 가운데 나옹 스님의
    누님이 있었다. 동생에게 염불을 배우고 난 후
    스스로 한 글귀의 시를 읊으니 다음과 같다.

    空手來空手去是人生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여
    生從何處來
    날 때는 어느 곳으로부터 왔고
    死向何處去
    갈 때는 어느 곳으로 가는가

    生也一片浮雲起
    나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일 듯하고
    死也一片浮雲滅
    죽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지는 것 같네

    浮雲自體本無實
    뜬구름은 자체가 실이 없나니
    生死去來亦如然
    생사 거래도 모두 이와 같도다

    獨有一物常獨露
     홀로 한 물건이 있어 항상 홀로 드러나
    淡然不隨於生死
     담연히 생사를 따르지 않는다네.


    참으로 명시다.
    나는 것을 한탄하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을 슬퍼하지도 않고,
    오고 가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또한
    그 가운데 생사 없는 도리를 보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시를 보고 잘 되었다,
    못 되었다 평가할 것이 아니라 이 속에 들어 있는
    문제 하나를 풀지 않으면 안 된다.

   ‘홀로 한 물건이 있어 항상 드러나 생사를
    따르지 않는다.’ 하였는데
    ‘그 생사를 따르지 않는 담연한 한 물건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를 아는 자는 뜬구름을 원망하지 않으리라.
    만나고 헤어짐을 기약하지 않으리라.

    기약이 없는 세계에 나아가려면 바로 그것을 보라.
    그것을 보는 자가 곧 부처님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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