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보에 대한 명상과 지혜로운 불자

2011. 8. 20. 10:1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당신이 주인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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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여러분과 삼보에 대한 명상을 주제로 오늘 이 시간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삼보(三寶)는 바로 붓다(Buddha)이며, 담마(dharma)이며, 상가(sangha)입니다.

삼보라 함은 바로 이 세 가지가 세상에서 가장 큰 보배이자 무량한 복전이라는 말입니다.

때문에 지혜로운 불자라면 ‘삼보에 대한 명상’을 항상 마음속에 깊이 담아놓아야 합니다.

 

삼보가 최상의 보배라면 탐욕, 분노, 어리석음은 최악의 독(毒)입니다.

이를 두고 우리는 삼독(三毒)이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론상은 알지만 실천은

그 반대로 하고 있습니다. 만약 진실로 삼보를 최고의 보배로 생각한다면 법회가 언제,

어디서 봉행될지라도 사람들은 열일을 제쳐두고라도 그곳에 모여 문전성시를 이룰 것인데

그것은 사람들이 법회와 법문을 최상의 가치로 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법회에 가자고 하면 별 핑계를 다 댑니다. 불자에게 있어

많은 배움이 있지만 삼보에 대한 가치 인식은 가장 중요한 대목입니다.

 

“삼보(三寶)가 최상의 보배요, 삼독(三毒)이 최상의 독이다.”

이것만 확실히 알아도 우리의 가치관은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고 이러한 변화와 성장이

로 불교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대부분은 반대로 살아갑니다.

보가 최상이 아니라 삼독을 최상의 보배로 삼고 있습니다.

 

또 여기에 한몫 더하는 것이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어리석은 생각은 인과법(因果法)을

모르는 것입니다. ‘콩을 심든 팥을 심든 무엇이 날지는 신(神)에게 달려 있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신만이 알 수 있다.’  이러한 것은 신을 숭배하는 종교에서 말하는

가치관이자 그들의 믿음입니다. 그들에게 모든 가치 권한은 신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으로 마음은 너무나 편해질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신께서 다 알아서 해주시

니까요. 그러나 명백히 말하자면 이는 우리를 유치원 수준에서 머물게 할 뿐입니다.

 

모든 것을 알아서 신이 해준다는 것은 궁극에 가서는 나의 성장을 막는 장애 요소가 됩니다.

그러나 불교는 다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출현을 ‘해방’이라 말하는 것은 바로 나의

성장의 멈춤이 아니라 시발점이 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삼보의 인연은 무엇보다 소중한 것입니다.

 

불교는 올바른 가치관을 형성하는 가르침이다. 때문에 불교에서 가치관은 주식이며

복덕은 그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부식에 불과하다. 절에 다니는 것은 부처님한테 복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가치관을 올바르게 형성하여 확립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진실한 마음으로 삼보에 대한 명상을 하는 이유이다. 삼보가 우리 마음에 있다면

세상의 두려움과 고뇌는 더 이상의 장애가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공양을 받을 만한 분이시며, 바르게 모두 아시는 분이시며, 지혜와 실천을

구족하신 분이시며, 피안으로 잘 가신 분이시며, 세상을 잘 아는 분이시며, 가장 높은

분이시며,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이시며, 신과 인간의 스승이시며, 깨달은 분이시며,

가장 존귀한 분이시다.”

 바로 여래십호입니다. 부처님을 칭하는 말로 여래, 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 세존을 알기 쉽게 쭉 풀이한 것입니다.

 

부처님을 공양을 받아 마땅한 분이라 하여 ‘응공(應供)’이라 합니다. 이것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면 반드시 10배, 100배 그이상의 감응(感應)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부처님을 ‘정변지(正遍知)’라 합니다. 모든 것을 바르게 다 알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금강경』에서 ‘여래는 실지실견(悉知悉見)’이라 하였습니다. 이는 여래께서는 우리들의

거수일투족을 다 알고 다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선업(善業)이건 악업(惡業)이건

부처님께서는 다 알고 다 보고 계십니다.

 

또 부처님을 ‘천인사(天人師)’라 하였습니다.

‘신과 인간의 스승이시다’는 뜻입니다. 부처님은 인간만의 스승이 아니고 신들의 스승이

시기도 하십니다. 불교를 비신론이라 하기도 하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불교가 신을 인정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들도 마찬가지로 니르바나, 즉 해탈에 이르지

못하고 있기에 중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인사는 부처님과 신과의 관계가 스승과 제자의

관계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부처님과 우리의 관계도 스승과 제자의 관계입니다.

때문에 신과 우리의 관계는 자연스레 도반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반이지만 상당한

수준과 능력이 있는 도반입니다. 왜냐하면 죽어서 천신으로 태어나려면 살아생전에 최소한

수다원과 이상을 증득했거나 혹은 엄청난 복덕을 증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같은 도반일지라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다음은 법(法)에 대한 명상입니다.

법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인도하고,

지혜로운 자들이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으로 담마(dharma)라 합니다.

담마는 부처님에 의해서 잘 설해졌습니다.

 

부처님 제자 중에 ‘사리풋드라’가 있었습니다. 이 제자는 지혜제일로서 부처님의 상수제자

였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리풋드라’ 같은 지혜제일 제자도 만약에 담마를 만나지

못했다면 수다원과도 얻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담마를 만났기 때문에

아라한과 같은 지혜를 얻어 성인의 대열에 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문(聲聞), 즉 소리‘성(聲)’자에, 들을‘문(聞)’자로 부처님의 음성을 듣고 깨달은 성인이

바로 이러한 경우입니다. 사리풋드라 같은 수제자도 그런데 우리 같은 중생들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지요.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출현하시기 전에 인류는 신본주의(神本主義) 시대를 살았기 때문입니다.

신(神)이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사상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새도

그러한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제는 산업이 발달하고 자본주의가 발달하니까

돈을 중심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른바 자본주의 시대가 그것입니다. 

자본주의(資本主義)는 말 그대로 재물을 근본으로 삼는 시대를 말합니다. 때문에 돈을 주인

으로 섬기고 돈의 노예가 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시대에 부처님께서

오시어 ‘너의 주인은 누구다? 너다!

나의 주인은 바로 나 자신이다’라고 사실을 일깨워주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담마’를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주인임을 알게 되었고, 행복도 불행도

모든 것이 다름 아닌 내 작품인 것을 비로소 일깨우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주인 된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나의 행복과 불행의 이유를 다른 곳에 두어 핑계를

댑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꾸 자기가 주인 노릇은 하지 못하고 행복과 불행의 열쇠를 자기가

쥐지 못한 채, 자꾸 남한테 쥐어주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내가 열쇠가 없으니까, 항상 남만

쳐다만 보고 기대며 구걸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자 함께 따라 해보겠습니다.

 

“행복도 불행도 내 작품이다! 내가 인(因)이요, 남이 연(緣)이다.” 

“과거의 인(因)이 현재의 연(緣)이다. 현재의 인(因)이 미래의 연(緣)이다.”

 

바로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를 말합니다. 현재 여러분들의 주변 사람들, 그리고 주변의

모든 상황들은 바로 과거에 여러분들이 선택하여 지은 인(因)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과거에 지은 인 때문에 현재의 연을 이렇게 만나게 된 것입니다. 또 현재 짓는 인(因)이 미래의

연(緣)이 됩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은 연을 받으면서 새롭게 인을 짓는 순간입니다. 지금 현재하는 이러한

것들이 과거에 의한 연이 되는 동시에 미래의 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매 순간을

잘 살피고 인연을 잘 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과거에 내가 이런 인(因)을 지어 지금

현재 이런 연(緣)을 만났을지라도 바로 내 작품이며 지금부터 내가 새로운 마음을 먹고

새롭게 행동하면 얼마든지 팔자는 고쳐질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불교의 윤회설입니다. 내 주인은

바로 나입니다. 이거 하나 제대로 기억하고 있어도 우리의 생활은 일취월장 할 것입니다.

 

우리는 가치관을 가져야 하고 그 기준을 불법에 두어야 합니다. 일단 법당에 가서 법문부터

듣는 것을 우리 생활의 제1순위에 두어야 합니다. 내가 불법을 후순위로 미룰 때, 불법도

나를 후순위로 미루는 것이고, 내가 불법을 영순위에 앉힐 때 불법도 나를 영순위에 놓는

것입니다. 내가 부처님을 일순위에 모실 때, 부처님도 나를 일순위로 생각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인과법이요, 당연의 진리입니다.

 

내가 삼보를 일순위로 모실 때, 삼보도 나를 일순위로 택하는 법입니다. 이것만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어도 부처님의 가피는 항상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실지실견, 즉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올바른 가치관을 형성하는 가르침입니다. 때문에 불교에서 가치관은 주식이며

복덕은 그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부식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요즘 불자들이 이 부식을

불교의 전부인양 바라보고 있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진실한 마음으로

삼보에 대한 명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삼보가 항상 우리 마음에 있다면 세상의 두려움과

고뇌는 여러분들께 더 이상의 장애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점 항상 각인하시어 오늘도

정진하는 불자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글은 대한불교진흥원(이사장 민병천)이 매월 실시하는 다보법회 중에서 월호 스님의

법문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 불교문화 -

 

       들국

       - 박두진

     

     

    오오 별이 내려 앉았다. 바람 울부짖고 폭우 몸부림 치는 곳 쓸쓸하여 별도 호접(胡蝶)도 오지 않는 벌판에 활짝 핀 한 포기 들국화 샛노란 화심(花心)에 무궁화(花) 빛 꽃잎파리 삽분! 꽃잎 위에 앉고 싶어 호접 아닌데도 오오 외로이 고웁거라 수집은 꽃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