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즉불(六卽佛):육즉불에는 ① 리즉불(理卽佛) ② 명자즉불(名字卽佛) ③ 관행즉불(觀行卽佛) ④ 상사즉불(相似卽佛) ⑤ 분진즉불(分眞卽佛) ⑥ 구경즉불(究竟卽佛) 을 말함.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것이 천태지의(天台智顗) 선사, 선사의 천태 철학이 불교 철학으로는 제일 높은 철학입니다. 때문에 적어도 불교학도면 꼭 천태학(天台學)을 거쳐야 한다는 그런 말씀도 있습니다.
참선 법문(法門)이나, 무슨 법문이나 하나의 체계로 공부할 때는 천태 학문이 필요합니다. 천태스님의 여러 저서 가운데서 마하지관(摩訶止觀) 이것은 어렵기도 하지만 하나의 위대한 체계적인 작업입니다. 이것은 지관법에 있는 하나의 법문입니다.
육즉불(六卽佛)이라. 여섯 단계가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맨 먼저 리즉불(理卽佛)이라. 원리로 봐서 부처란 말입니다.
다음이 명자즉불(名字卽佛)이라. 다만 이름만 부처입니다. 부처란 이름만 좀 들었지 부처의 옆에는 조금도 가지 못했단 말입니다.
우리가 불교인이라 하더라도 공부를 않고 그냥 지내면 이름만 좀 들었을 뿐이지 조금도 결심도 못하고 부처님께 한 걸음도 못 가 있습니다.
그 다음은 관행즉불(觀行卽佛)이라. 실지로 우리가 닦아서 차근차근 부처가 돼 간단 말입니다. 부처란 생각도 하고 부처의 경계도 관찰하고 염불도 하고 화두도 참구하고 그렇게 공부를 해 나가는 단계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관행즉불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애써 공부하시는 사람들은 세 번째 단계인 관행즉불에 해당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공부가 좀 익혀져서 네 번째 가서 상사즉불(相似卽佛)이라. 거의 닮아 있는 부처란 뜻입니다. 부처가 확실히는 못되었지만 거의 비슷한 부처란 말입니다.
모든 면에서 신통도 못하고 하지만 해석하는 데는 조금도 어긋남이 없습니다. 마음이 바꿔지고 또 도리에 대해서 밝아서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분진즉불(分眞卽佛)이라. 비로소 우리가 닮은 정도에서 용맹정진을 거듭해 가지고서 참말로 진여불성을 증명하는 단계입니다. 진리는 증명했습니다. 증명은 했으나 완벽한 단계는 아직 못됩니다.
따라서 차근차근 진리가 더욱더 익어져서 우리가 습관성(習慣性)을 녹이고서 불교 말로 보임수행(保任修行)이라. 그래서 차근차근 완벽한 부처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완전한 부처가 될 때가 이른바 구경각(究竟覺), 조금도 흠축이 없이 번뇌(煩惱)는 다 떨쳐서 자기 성취도 완벽하고, 다른 사람에게 완벽하게 법문도 하고, 제도도 하고, 이런 경지가 이른바 구경각을 성취한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시 자기 공부를 점검해야 합니다.
리즉불(理卽佛)11)
11) 리즉불(理卽佛):다만 불성(佛性)을 갖춘 자(者) - 외범(外凡)
맨 처음에 리즉불이라. 본래가 부처이기 때문에 우리가 불교라는 말 한번도 안 들어도 이슬람을 믿든 또는 과학을 하든 상관없이 내내야 부처는 부처란 말입니다. 본래는 다 부처입니다.
그와 같이 이치로 봐서는 누구나 다 부처인 단계입니다. 이것은 불교인이 되고 안되고 상관이 없습니다. 아무튼 모든 사람이 다 이치로 봐서는 부처란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다만 불성만을 갖추고 있을 뿐입니다. 원래 갖추고 있으니까 뱀이나 곤충이나 다 갖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즉불 단계는 모두가 다 갖추고 있습니다.
명자즉불(名字卽佛)12)
12) 명자즉불(名字卽佛):다만 불성(佛性)이란 명(名)을 해(解)한 자(者) - 외범(外凡)
그러나 그 다음에 명자즉불이라. 이름이나 문자로 해서 우리가 부처란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 성품, 본래면목은 다 부처다. 우주의 모든 존재의 근본성품은 다 부처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든 번뇌만 다 녹이면 부처가 된다. 이치로만 좀 알고 부처의 이름을 좀 외울 정도입니다. 다만 불성이란 뜻이나 이름을 해석할 정도입니다.
이 리즉불 단계와 명자즉불 단계를 불교 전문술어로 외범(外凡)이라. 외래범부라 합니다. 이 외범은 불교의 문중에 온전히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름만 들어서 상식적으로 알뿐이기 때문에 그것은 외도 범부입니다. 따라서 이름만 듣고 조금도 자기 수행을 안한 분들은 외도 범부의 부류에 속해 있는 셈입니다.
관행즉불(觀行卽佛)13)
13) 관행즉불(觀行卽佛):사가행위(四加行位 : 난(煖), 정(頂), 인(忍), 세제일법(世第一法)) - 내범(內凡)
그 다음에 관행즉불이라.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불교수행을 한다고 볼 수 있지요. 이것은 사가행(四加行), 가행이란 우리의 노력을 가속화 시켜서 온 힘을 경주해서 공부한다는 말입니다. 이른바 불교 말로 하면 가행정진(加行精進)입니다.
우리가 겨울철에 공부할 때 즉, 가행정진을 할 때에는 시간을 훨씬 더 많이 할애해서 쉬지 않고 밀어부칩니다.
지금 나한테 있는 내 본 성품은 부처다. 부처가 되는 것보다 더 위대한 길은 없다. 이렇게 한 번 알고 이해한 다음에는 자기의 온 힘을 경주해서 부처가 되기 위해 노력 정진한단 말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가행위(加行位)입니다.
이 가행위도 역시 네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이른바 사선근(四善根)이라. 우리의 공부함에 따라서 착한 성품은 차근차근 더 깊어집니다. 맨 처음에는 별 것도 아니었다가 참선도 많이 하고, 염불도 많이 하고, 불경이나 바이블도 많이 읽고 그러다 보면 차근차근 우리의 품성은 더 고상해집니다.
첫째 단계가 난법(煖法), 이것은 따뜻할 난(煖)자입니다. 두 번째가 이마 정(頂)자 정법(頂法)이라. 다음이 참을 인(忍)자 인법(忍法)단계고, 마지막 네 번째가 세제일법(世第一法)이라. 이 세계에서는 가장 높은 법이란 뜻입니다. 이것은 도인들 세계는 빼놓고서 세간적인 세계에서는 제일 높은 법이란 뜻입니다.
이 네 가지가 즉, 말하자면 우리의 착한 성품입니다. 이것은 미처 성인이 되기 전에 우리 범부 중생들이 닦아 나아갈 때에 그 닦아 나아가는 품성의 정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제일 낮은 것이 난법인데 난법은 우리가 참선도 많이 하고, 염불이나 주문도 많이 외우고 이렇게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몸도 마음도 시원해 온단 말입니다. 여러분들께서는 대체로 그런 경계를 다 맛보셨겠지요.
몸도 마음도 시원해 와서 별로 부담을 느끼지 않는 단계로 불교 전문 술어로 말하면 그때는 경안(輕安)이라. 몸도 마음도 가뿐하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이제 난법이라 하는 품성이 비로소 발휘가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이런 네 가지 법을 사람들이 별로 말을 잘 안해요. 원래 불경에 다 있는 것인데, 앞으로는 차근차근 올라가는 법을 알아야 ‘내가 지금 어디만큼 갔구나’ 점검을 할 수 있습니다. ‘담박에 성불해 버린다’ 이렇게 말씀하는 분들이 더러 있으니까 우리가 이런 과정을 자칫 무시해 버립니다.
‘난법’ 이것은 우리가 바로 믿어 가지고서 우리 몸도 마음도 가뿐할 정도로 어떠한 고행도 충분히 할 수 있구나 하는 그런 용맹심도 나고 이렇게 되어야 난법이 나한테 발득(發得)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 전문 술어로 발득이라는 말을 씁니다. 이미 내 업장이 녹아져서 선정의 맑은 지혜가 얻어졌단 말입니다.
이런 단계에서도 오히려 공부를 놓치지 않고 더욱더 가행정진하면 정법이라. 그때는 맑아진 기운이 더욱더 맑아 옵니다. 온 전신이 마치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찌르르 할 정도로 아주 개운합니다. 그러면 자기 몸에 대해서 아무 무게도 느끼지 않습니다. 이 정도 되면 불식(不食)이라 해서 안 먹어도 되는 경지입니다.
이렇게 자기 품성이 더 고상하게 되어 가다가 인법(忍法)이라. 인법에 가서는 그렁저렁 살아 버리면 쑥 내려간단 말입니다. 내려가 후퇴하지만 한 번 그런 맑은 기운을 오랫동안 경험을 하고 지속적으로 우리 몸에 딱 베여 버리면 후퇴를 않습니다.
그것이 참일 인(忍)자 인법입니다.
이 단계에서도 공부를 그만 둬 버리면 항시 그 자리에서 제자리걸음밖에 안되겠지요. 그러나 용맹정진이라. 더욱더 애써 공부를 하고 마음을 애써 닦고, 우리 마음을 장사를 한다거나 다른 사업을 하고 집에서 밥을 먹거나 항시 부처님한테 가 있게 한단 말입니다.
이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공부가 한 차원 올라가서 그 때는 세제일법(世第一法)이라. 도인이 미처 못된 단계에서는 이것이 제일 높은 단계입니다.
세제일법이 되면 이때는 부처님의 광명(光明)이, 부처님은 바로 우주에 충만해 있는 생명의 자비 광명입니다. 빛입니다. 불성광명은 눈부신 태양광선과 같은 그런 빛이 아니라 청정광명(淸淨光明)입니다. 생명의 빛, 진리의 빛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도 광명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빛이요, 나는 길이요, 나는 생명이다.’ 기독교 복음서의 이 ‘나’라는 것은 우리 불교적인 의미로 볼 때는 ‘참 나’, 참다운 나라는 뜻입니다. 참 나는 광명이고, 진리고, 그야말로 하나의 순수 생명입니다.
성인(聖人)들의 진리(眞理) 말씀이 이렇게 똑같은 걸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할 때 굉장히 크게 환희심(歡喜心)을 주고 희망을 갖게 합니다. 지금 내 문중, 네 문중 하고 싸우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될수록 각 종교 간의 문호를 타파해야 됩니다.
진리만 가지고서 진리만을 말하고, 하나님도 바로 진리고, 부처님도 바로 진리입니다. 부처님, 하나님은 바로 우주에 충만해 있는 생명이요, 빛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하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서 자기 얼굴도 밝아 온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깊이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그러한 부처님을 생각하고, 우리 마음이 정화 되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자기 몸 전체가 광명으로 차근차근 비춰 옵니다.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자기 몸에 부처님의 광명이 가까이 온다고 생각할 때는 다른 나쁜 것이 침범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천지신명이 지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가 되어서 우리 마음에서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훤한 빛을 보는 것입니다. 실지로 눈을 감아도 그 훤한 빛은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단계가 되면 그때는 세제일법이라. 도인은 미처 못 되었지만 이 인간 세상에서는 가장 높은 지위 즉, 말하자면 성자(聖者)가 못되었어도 현자(賢者)란 말입니다. 현인(賢人)입니다.
이런 자리에서는 나쁜 짓을 하려고 해도 못하는 것입니다. 벌써 정화가 되었단 말입니다. 환골탈태(換骨奪胎)가 되어 가는 것이고 자기 생리(生理)가 바꿔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마다 그냥 쉽게 깊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한계를 알으셔서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열심히 공부해서 난법상에서 자기 몸도 마음도 시원스럽게 조금도 부담이 없는 그런 것을 느끼셔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잔병은 떨어지고 맙니다. 우리가 좌선(坐禪)할 때 다리가 아파서 거북한 것도 역시 이 난법상이 이루어질 때쯤 사르르 풀려 오는 것입니다. 참 묘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예수님 가르침이나 다 신비(神秘)에 차 있습니다. 우리 중생의 분별시비나 중생의 생각을 초월(超越)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원해 오다가 정법상에서는 더욱더 맑아 옵니다. 더욱 더 맑아 와서 어렴풋이 빛이 비춰 옵니다. 그 다음 인법상이 되면 빛이 더욱 더 밝게 비춰 오고 그러다 세제일법이 되면 그야말로 훤한 빛이 비춰 옵니다. 이렇게 되면 별로 후퇴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 관행즉불,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하고 화두를 참고하고, 실지로 기도를 모시고, 기도나 참선이나 다 똑같습니다. 부처님만 떠나지 않으면 다 하나입니다. 참선인 동시에 염불이고 다 같은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이것저것 구분해서 피차 그런 것 때문에 서로 의를 상하고 불화스럽게 될 아무런 필요도 없습니다. 본래 근본 자리에 우리 마음만 두고 산다고 생각할 때는 가장 위대한 공부가 됩니다.
따라서 그렇게 해서 사선근, 난법이라. 우리 마음이, 몸이 정화되어서 마음과 몸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이 맑아지면 몸도 정화가 됩니다. 더 맑아지면 그야말로 시원하고 맑은 기운과 가벼운 기운이 느껴지고, 그때는 정법이라. 삼계(三界)로 말하면 욕계(欲界)의 끄트머리란 말입니다. 욕계 정천입니다.
우리 보통 사람들은 그냥 욕계 내에서 첨벙거리고 지냅니다. 욕심의 바다 가운데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고 고생만 받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다 꿈같이 생각하고 욕심을 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일도 안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서 각자 책임은 다해야 하겠지요. 가사 우리가 음식점을 하면서 남한테 밥을 판다 하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내가 파는 음식을 먹고 마음이 정화되고 건강하게 되어서 빨리 부처가 되소서! 빨리 천국에 가소서!’ 이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에는 그것이 큰 공덕이 됩니다.
그러나 꼭 내가 돈벌어서…, 저 사람들 맛있게 먹던 말던…, 그러면 결국 죄만 짓지요. 어떤 분야나 어느 직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고기 장사를 하나 무엇을 하든지 간에 나와 남이 더불어서 똑같이 빨리 부처가 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이 담겨 있으면 다 옳은 것입니다.
상사즉불(相似卽佛)14)
14) 상사즉불(相似卽佛):육근청정위(六根淸淨位), 무간정위(無間定位) - 내범(內凡)
그 다음은 상사즉불(相似卽佛)이라. 서로 상(相)자, 닮을 사(似)자. 부처와 꼭 닮아 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금생에 태어나서 비록 성불까지는 미처 못 간다 하더라도 적어도 부처님의 가르침, 빤히 길이 다 나 있는 것 말입니다.
우리가 성불의 길을 새로 개척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무수한 도인들이 난행고행(難行苦行) 해가며 못 먹고, 못 입고, 못 자고 이렇게 해서 훤히 길을 내 놨단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길도 못 따라 간다고 생각할 때에는 참 억울한 일입니다.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닙니다. 사실은 제일 쉬운 길입니다.
우리 모두가 꼭 승려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아내가 되든, 남편이 되든, 자기의 위치는 어디가 되든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내 생명의 근본자리가 바로 부처님이고 하나님이다. 그것은 석가나 예수나 나나 똑같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개발 여하에 따라서, 어떻게 개발할 것인가? 개발하기 위해서는 본래로 나나 누구한테나 무한한 공덕이 갖춰져 있다. 대 천재인 예수나 석가나 그런 분들도 나하고 본래로 역량이 똑같다. 이렇게 분명히 믿는 그것이 자기 암시가 되어서 우리 업장이 녹아지고 우리가 차근차근 부처의 길로 영생 해탈의 길로 인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어도 여기까지, 구경각까지는 못간다 하더라도 거의 닮은 정도는 되어야 사람 몸 받은 가치가 있지 않겠습니까? 부지런히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나와서 개나 소나 돼지로 안 태어나고서 또 지옥으로 안 떨어지고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다행히도 한국에 태어났고 부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한국불교가 세계불교 가운데서 제일 빛납니다. 이건 틀림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의 인간으로 해서 정말로 불교 말로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입니다. 우리가 백만 생 동안 헤매다 다행히도 어쩌다 하필이면 한국에 태어나고 부처님 믿게 되었단 말입니다. 사업이 잘 안되고, 무엇을 하다 실패하고, 자기 마음대로 안 되어도 우리가 한국인으로서 한국의 참 불교를 믿는 그것만 가지고도 이미 행복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관행즉불, 정작으로 우리가 닦아 나아가는 그것과 닦아서 거의 부처와 닮아 있는 그런 지위, 이때는 육근 청정이라. 우리의 눈이나 귀나 코나 입이나 몸이나 머리나 모두가 청정한 기운이 돈단 말입니다. 청정기풍(淸淨氣風)이라.
아직 부처가 못 돼놔서 완전한 청정은 못 되었겠지요. 그러나 오염은 받지 않습니다. 이런 정도가 되면 독을 먹여도 독살을 시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약간 무얼 함부로 먹여도 뱃병도 안 난단 말입니다.
육근청정(六根淸淨)이라. 우리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우리 눈이 밝아지고, 귀도 밝아지고, 후각도 밝아지고, 촉각도 맑고 이와 같이 육근청정이 됩니다.
아직 온전한 것은 아니어도, 따라서 부처님 공부라는 것은 내 몸도 좋고 다 좋은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한다고 생각할 때에는 자기 집안에서도 아들이나 딸이나 남편이나 다 자기를 숭배한단 말입니다. 침범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아내나 남편도 되지만 공부해서 부처를 닮아 갈수록 누가 침범을 못하는 것입니다.
저절로 산신(山神)도 숭배하고, 어느 산에 척 들어앉으면 그야말로 산신도 굽어보고서 지켜 준단 말입니다. 사람 정기(精氣)가 우리 마음 아닙니까. 산 정기가 산신입니다. 집 정기가 택신(宅神)이고 물 정기가 용왕(龍王)입니다.
모두가 다 본래로 부처입니다. 부처가 별한테 가 있으면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입니다. 부처가 태양에 있으면, 불성 기운이 태양에 있으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라. 불성기운이 달에 있으면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란 말입니다. 그러는 것입니다.
천지 우주는 모두가 부처님 기운이 여기가 있고, 저기가 있고 그래가지고서 이래저래 현상적인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근본은 다 똑같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 ‘관행즉불’ 정작으로 닦아 나가는 우리 수행 과정, 이렇게 해서 난법상, 우리 마음이나 몸도 개운하고, 더 개운해서 정법상, 빛이 어렴풋이 빛나고, 또 후퇴가 없을 정도로 더욱 더 맑고 개운하고(忍法相), 그러다가 더 나아가서는 훤한 빛이 나온단 말입니다(世第一法). 그 때는 눈이 흐릿한 사람도 눈이 밝아지고 그러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은 육근청정이라. 우리 눈이나 귀나 코나 입이나 몸이나 정신 모두가 청정하게 되어서 그때는 무간정(無間定)이라. 무간정은 무엇인고 하면 없을 무(無)자, 사이 간(間)자. 참선이라는 정(定)자. 나쁜 생각이 우리한테 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사이에 낄 수가 없습니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항시 좋은 생각만 이어 간단 말입니다. 도인들이 나쁜 짓을 할래야 그때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상사즉불(相似卽佛), 이 자리는 아직은 미처 도인이 못 되었다 하더라도 나쁜 생각이 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진여불성을 훤히 볼 정도는 못됩니다.
나쁜 생각은 낄 수 없으니까 무간정이라. 조금도 나쁜 생각이 들어가지 않는 하나의 그야말로 참 삼매에 들어가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관행즉불과 상사즉불의 단계는 내범(內凡)으로 아직은 범부입니다. 성자가 아닙니다.
성자란 것은 범부를 초월해서 분명히 우주의 진여불성 자리를 체험해야 성자입니다.
‘인간(人間)이 태어난 보람은 성자(聖者)가 되는 것이 가장 최고(最高)의 가치(價値)입니다.’
금생에 못되면 그냥 마는 것이 아니라 본래가 부처이기 때문에 몇 만 생이 걸리더라도 꼭 성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학식도 부족한 나 같은 사람이 무슨 성자가 될 것인가? 이렇게 우리가 자기 비하를 할 필요가 조금도 없습니다. 이것은 지식이 많고 적고 상관이 없습니다. 자기 마음이 얼마만큼 선량(善良)한가 그것에 달린 것입니다.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성자가 안되고 배길 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꼭 성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금생에 게으름 부리면 내생에 가서 더욱 더 부지런히 해야 되는 것이고, 금생에 욕심부리고 죄 많이 지으면 내생 가서 오욕을 다 떼어 내야하고 그만큼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몇 만 생을 두고라도 필연적으로 성자가 되는 것입니다.
분진즉불(分眞卽佛)15)
15) 분진즉불(分眞卽佛):보살 초지(初地)에서 십지(十地)까지 - 성위(聖位)
다섯 번째 가서 분진즉불이라. 진리를 증명한다 했는데 여기서도 차근차근 올라갑니다.
보살십지로 말하자면 보살 초지(初地)에서 이지(二地), 삼, 사, 오, 육, 칠, 팔, 구, 십지(十地)까지 성인지(聖人地)까지 올라갑니다.
같은 성인도 그 습관성을 온전히 녹인 분인가? 좀 많이 녹인 분인가? 그 습관성을 녹인 정도에 따라서 일지, 이지…, 그와 같이 구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십지에서 온전히 녹여서 그때는 그야말로 참 불지(佛地)로 구경각(究竟覺)을 우리가 성취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도달하는 것이 물론 어렵겠지요. 어려우나 본래가 부처이기 때문에 우리한테는 벌써 이 자리가 갖춰 있습니다. 갖춰져 있다고 분명히 믿고서 염불(念佛)도 하고 화두(話頭)도 하고 그래야 공부가 빠른 것입니다.
나는 아직 멀었다. 이렇게 공부해서는 자기 암시가 되지 못하고 그러기 때문에 부정적인 생각 때문에 공부가 더딘 것입니다. 따라서 ‘본래 내가 부처다!’ 하는 그 생각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렇게 도인들이 위차(位次)를 말씀해 놓은 것이 무엇인고 하면 이런 자리를 우리가 빨리 알아가지고서 이 자리가 바로 자기 본래면목(本來面目)이니까 그 자리에다 마음을 두고서 공부를 하라는 그런 의미가 다 포함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도 스스로 자기 비하라든가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거지가 된다 하더라도, 아파서 금방 죽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역시 본래가 부처이기 때문에 성불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영웅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신을 속인 죄로 꽁꽁 묶이어 코카사스 큰 바위 위에 놓입니다. 사나운 독수리들이 날아와서 프로메테우스의 눈과 간장을 쪼아먹는단 말입니다. 그러나 때마침 헤라클레스의 구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다고 생각할 때에는 그런 사람도 구제를 받습니다. 몸뚱이 이것은 허깨비인 것입니다. 어느 순간도 우리가 부처님을 믿고 영생 불멸하는 생명 자체를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구제를 받습니다.
지금 한국에서 돈오돈수(頓悟頓修)만을 주장하는 분들은 이와 같이 보살 초지에서 이지, 삼지…, 이렇게 올라가는 것을 부정을 합니다.
‘돈오(頓悟)’라는 것은 성불(成佛)만이 돈오인 것이지 다른 것은 아직 견성(見性)도 못된다. 이렇게 그 분들이 말씀합니다만 사실은 부처님 경전을 뚜렷이 보고 조사 어록을 착실하게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이것은 다 한계가 있습니다. 같은 성인도 똑같은 정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성인도 근본 번뇌는 다 없애 버려서 성인이 되겠지만 습관성은 미쳐 못 여의어 있단 말입니다.
가사 사과의 예를 들어본다고 할 때 사과가 비배(肥培) 관리를 잘해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었지만 아직 갓 선 사과는 먹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것은 상당히 오랫동안 시일이 지나서 익어야 비로소 사과 구실을 한단 말입니다.
그와 똑같이 우리 근본 번뇌를 떼어버리고서 성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아직은 습관성이 남아 있습니다. 금생의 습관성은 빨리 끊어버릴 수 있다 하더라도 과거 전생의 습관성, 우리 인간은 어떤 누구나 과거 전생(前生)에 지옥(地獄)으로, 아귀(餓鬼)로 또는 축생(畜生)으로 다 거쳐왔단 말입니다. 하기 때문에 과거 무수한 생 동안에 지어 내려온 버릇이 우리 마음 잠재의식(潛在意識)속에 꽉 차 있습니다. 즉 과거로부터 묻어 나온 그런 번뇌는 우리가 쉽게 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진여불성은 증명했다 하더라도 상당히 오랫동안 두고두고 이른바 보림수행(保任修行)이라. 여기서 비로소 보림수행이란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보림수행은 견성(見性), 견도(見道) 한 뒤에 차근차근 이지(二地)로, 삼지(三地)로 올라간다는 말입니다.
육조단경(六祖壇經)의 맨 마지막 부촉품(付囑品)에 가서 ‘그대들이 만약 부처의 일체종지(一切種智)이라. 부처의 그런 조금도 흠축 없는 지혜(智慧)를 알려고 생각할 때는 마땅히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를 닦을 지니라.’ 이런 말씀이 있단 말입니다.
육조단경 그러면 참선법으로 해서는 보배 같은 경(經) 아닙니까. 그리고 같은 경에서도 부촉품은 결론적인 것입니다.
돈황본(敦惶本)에는 없고, 덕이본이나 다른 본에서는 다 있습니다만 부촉품에 가서 어떤 말씀이 있는고 하면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육조스님께서 우리 중생한테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이 만약 부처의 무량지혜(無量智慧)를 얻으려고 한다면 마땅히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닦을 지니라.’
일상삼매(一相三昧)는 무엇인고 하면은 한 일(一)자, 서로 상(相)자. 천지 우주가 오직 다 부처뿐이라는 그러한 의미가 일상삼매입니다. 천지우주가 다른 것이 없이 우리 중생은 그렇게 안보이지요. 그러나 성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조금도 구분 없이 우주가 하나의 도리로 봅니다. 우주를 하나의 도리로 보는 이것이 일상삼매입니다. 우리가 본래는 그와 같이 부처이기 때문에 다 갖추고 있는 것인데, 금생에도 우리가 잘 못 배우고, 잘 못 생각하고, 잘 못 듣고, 잘 못 버릇 붙이고, 이것 때문에 그렇게 안 보인단 말입니다. 또는 과거 전생의 나쁜 버릇 때문에 본능적으로 그와 같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 전생의 업장(業障)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극락세계에 벌써 다 가버렸겠지요. 업장이 가벼우면 천상에도 가 버리고, 사람정도 밖에 업장이 안되기 때문에 사람으로 태어났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간 차원에서 업장을 녹여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 죄를 없애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본래가 하나이기 때문에 ‘천지 우주는 오직 하나의 부처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것이 일상삼매입니다.
그러면 일행삼매(一行三昧)는 무엇인가?
우리가 ‘모두가 오직 하나의 부처뿐이다.’ 이렇게 일상삼매를 한다 하더라도 금방금방 또 우리 마음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다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저것 생각하고 순식간에 생각이 다른 데로 달아나고 만단 말입니다. 이런데서 불교말로 ‘우리 범부는 모도범부(毛道凡夫)라’ 터럭 모(毛)자, 길 도(道)자. 마치 터럭이 바람이 없어도 항시 움직이고 있는 것과 같단 말입니다. 그와 똑같이 우리 중생 마음은 항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그 소중한 법문 ‘모두가 다 오직 부처뿐이다.’ 이렇게 생각한다 하더라도 그 생각이 지속(持續)이 잘 안됩니다. 지속이 안되면 우리 버릇은 녹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염주(念珠)를 헤아리고, 철야정진(徹夜精進)도 하고, 정근(精勤)도 하고, 참선(參禪)도 하고, 그러는 것은 다 지속을 시키기 위해서 합니다. 우리 참선하는 스님네가 앉아서 90일 동안 결제(結制)하는 것도 모두가 다 바른 생각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천지 우주가 오직 부처뿐이다.’ 이 생각을 빈틈없이 지속시키는 것이 일행삼매입니다. 한 일(一)자, 행할 행(行)자, 일행삼매(一行三昧)란 말입니다.
부처님 법문은 통틀어서 대의(大義)가 무엇인가? 그렇게 말하면 일상삼매와 일행삼매입니다.
이것이 생소하므로 여러분들이 기억하시기가 곤란스럽겠지요. 다시 바꿔서 말씀드리면 ‘모든 것이 오직 하나의 생명이다.’ ‘오직 하나의 부처뿐이다.’ 이것이 일상삼매입니다. ‘천지 우주는 부처 아님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일상삼매인 것이고, 그리고 그런 생각을 지속을 시킨단 말입니다. 염주를 헤아리고 그런 것도 모두가 부처라는 생각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냥 덮어놓고 이름만 부르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럼 부처님은 무엇인가? 부처님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로 우주에 충만해 있는 생명의 광명입니다. 생명의 빛입니다. 내 몸에도 충만해 있고, 이 공간 속 어디에도 충만해 있습니다. 다만 우리 중생은 어리석어서 그 빛이 안 보인단 말입니다. 공부가 되면 된 만큼 우리는 그 빛과 가까워집니다.
그러다가 우리 업장이 녹아지면, 우리 마음이 정화가 되면 정말로 그 빛이 정작으로 보인단 말입니다.
구경즉불(究竟卽佛)16)
16) 구경즉불(究竟卽佛):묘각(妙覺) 또는 대각(大覺)…성위(聖位)
그러다가 묘각(妙覺)이라. 다 성취해 버리면 그 때는 우리가 이젠 자기 스스로 빛이 되어 버린단 말입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이란 바로 무량광불(無量光佛)입니다. 끝도 갓도 없는 생명의 광명이란 말입니다. 아미타불이라는 것은 우주에 충만해 있는 생명의 광명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요한복음서나 마태복음서의 중요한 대목에서도 다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나는 빛이요, 나는 진리요, 나는 생명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라는 것은 참 나를 의미합니다. 부처님인 나, 하나님인 나, 이것이 참 나란 말입니다.
기독교인들도 예수하고 우리 중생하고 같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뜻에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나 ‘관세음보살’을 외우나 우주에 충만해 있는 부처님의 광명을 상상하셔야 됩니다. 그러면 빨리 광명을 보게 됩니다. 본래가 광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이란 것은 어둠과 광명의 싸움입니다. 남 미워하는 것은 어두운 마음입니다. 욕심내는 마음도 벌써 어두운 마음입니다. 남을 사랑하고 베풀고 자비심(慈悲心)을 내면 이것은 벌써 밝은 마음입니다. 한 평생 동안 광명과 어둠과의 싸움입니다.
그 광명으로 가는 길을 보다 촉진시킨단 말입니다. 보다 더 가속화시킨단 말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염불을 하고 주문을 외우고 하는 것입니다.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다 더듬어 봐도 모두가 이 두 뜻으로 귀일(歸一)이 됩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란 두 뜻으로 귀일(歸一)이 됩니다. 모두가 부처 아님이 없다는 생각, 그와 동시에 그 생각을 밥을 먹으나, 길을 가나, 운전대를 잡으나 항시 그 생각을 놓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은 본래가 부처인지라 걸음걸음 부처가 되어 갑니다.
육조단경의 마지막 대문에 있습니다. ‘그대들이 만약 부처의 무량공덕(無量功德)을 성취하려고 생각할 때에는 마땅히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를 닦을 지니라.’ 마치 땅에다가 종자를 뿌려서 오랫동안 잘 가꾸고 있으면 저절로 열매가 맺어 가듯이 우리가 본래 부처이므로 그와 같이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오랫동안 닦고 있으면 저절로 부처가 되어 간단 말입니다. 끝내는 열매를 맺어 성불(成佛)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뚱이 금생에 하직하고 가는 마당에도 가장 큰 자산은, 아무 것도 가지고 못 갑니다. 자기 몸뚱이도 가지고 못 가는데 다른 무엇을 가지고 가겠습니까. 자기 남편하고 같이 가겠습니까? 누구와 같이 가겠습니까? 다만 우리가 공부한 것, 그 부처님 공부 가지고 갑니다. 업(業)을 지어 놓으면 그 업을 가지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