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이름입니다/청화스님

2011. 10. 14. 23:0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728x90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이름입니다”


조계종 원로의원 청 화 스님 특별인터뷰



 기화요초 만발한 5월 초 어느날 청화 스님(곡성 성륜사 조실, 조계종 원로의원)을 찾아뵈었다.

 스님은 출가 이후 40년 동안을, 하루 한 끼만 취하고 밤이건 낮이건 방바닥에 등을 대지 않는 강인한 수행력을 유지하여 조계종 원로의원이라는 어마 어마한 직함과 거리가 멀 때부터 그 명성이 이미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던 대선사이시다.

 그런 분의 진면모를 직접 확인하러 가는 발걸음에는 기쁨과 부담이 동행했다. 사실 스님과의 만남은 10년전부터 꿈 꿔 오던 일이였지만 막상 인터뷰를 하게 되고 보니 스님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었고 무엇보다 내 공부가 너무 부족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에 그나마 심신을 의지한 채 일주문을 들어섰다.

 스님은 정갈한 작은 방에서 불자들을 맞이하고 계셨다. 듣던 대로 스님은 매우 자애로우셨다. 음성조차 부드러웠으나 말씀의 내용은 시종 강건했다. 그리고, 그 어떤 멍청한 질문에도 결코 짜증냄이 없이 끈기 있게 답변해주셨다.


 * 스님 뵙기를 오랫동안 기다려왔습니다. 건강은 좋으신지요. (이런 천편일률적인 질문을 나는 안하겠다고 다짐했는데 세수 여든에 이르신 어른, 게다가 하루 한끼니만 취하시는 분을 뵈니 자동적으로 이 말이 튀어 나왔다)


 - 감기에 걸려 한 동안 고생했습니다. 아무래도 나이가 있으니 기력이 많이 떨어집니다. 특별히 아픈 곳은 없습니다.


탐욕이 있으면 깨달은 못 이뤄 


 * 스님께서는 한때 미국에 여러 절을 세우고 이국의 불자들을 상대로 불법을 펼치셨는데 어떠셨습니까.


 - 그곳에서 한 6년간 지내다 3년전에 돌아왔습니다. 힘이 많이 부쳐서 쓰러졌었지요. 외국어에 능하지 못하니 아무래도 한계가 많았습니다.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겪다보니 해외포교는 철저한 준비 끝에 나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그것이 얻었다면 얻은 바입니다. 또 일본이나 대만의 경우는 절을 짓는데 정부 차원이라 할 만큼 투자와 지원이 많아 한국불교와 여러모로 비교가 됐습니다. 그래도 다인종-다종교 사회인 미국이야말로 회통적 한국불교가 꼭 필요한 곳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국제포교사를 많이 양성해야겠습니다.


 * 스님께서는 40년간 일일일식 장좌불와 하셨습니다. 무슨 연유로 그러한 결심을 세우고 실천하시게 되었는지, 또 그러한 것이 누구나 가능한 일인지 궁금합니다.


 - 지금은 다 지킨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장좌불와는 부처님 당시부터 이룬 분들이 많았지만 부처님의 수행론은 중도를 취하고 있으므로 장좌불와나 일종식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출가수행자를 위한 청규에 의하면 오후에는 먹지 말아야 하고 병자가 아닌 이상에는 한 번 일어나면 취침 시간까지 앉아 있으라고 되어 있습니다.

 누구나 다 꼭 이와같이 하라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공부하는 이라면 해봐야 할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욕계 번뇌 때문입니다. 음식과 이성, 수면 이 세가지 욕망 때문에 우리 중생은 번뇌에서 못벗어나고 있습니다.

 깨달음은 탐욕이 있으면 결코 못 이룹니다. 세가지 욕망에서 다 떠나 어떻게든 꼭 조복을 받아야 도를 이룰 수 있습니다.

 

 * 이처럼 권하시는 것 보니 그로 인해 얻은 바가 많으신 듯 여겨집니다.


 - 조복을 다 받은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지금은 원칙만 세워 놓고 젊은 사람 모양 어거지로 지키려하지 않고 또 그렇게도 못합니다. 몸이 못 따라가겠다는데 우기는 것도 상을 내는 것이다 싶구요.


 * 스님께서는 『능엄경』의 ‘중생의 마음은 본디 부처이기 때문에 항상 잊지 않고 부처를 생각하면 금생과 내생에 반드시 부처를 볼 수 있으리’라는 부분을 자주 강조하시는데 이 내용이 큰스님께서 지난 수십년간 펼치신 법문의 요체인가요?


 - 『화엄경』에 ‘심불급중생 시삼무차별(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이라하여 부처와 중생이 모두 차별이 없다’고 했습니다. 부처가 따로 있고 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부처와 나는 둘이 아니라는 말씀이지요. 단 중생의 마음이 번뇌에 가려서 하나임을 모를 뿐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듣는 상대방을 보고 그 근기에 맞게 설하신 대기설법이라서 표현은 늘 같지 않지만 그 뜻은 한가지입니다. 어떻든 간에 우리 중생은 본래 부처라 어느 누구나 꼭 부처가 돼야하고 또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윤회를 몇 천번 한다해도 언젠가는 부처될 것입니다.


정토와 예토는 따로 있지 않아


 * 큰스님께서 주창하시는 정토수행이란 무엇입니까?


 - 정토란 것은 청정한 국토를 이르는 것입니다. 번뇌의 탐진치가 사라진, 참으로 부처님 세상, 자비와 지혜 공덕만 충만한 사회를 이르는 것입니다.

 정토의 반대는 예토라 하는데 그 둘은 따로 있지 않습니다. 부처님 안목에서 보면 현재 우리가 사는 바로 이곳이 극락세계인데 마음이 오염되어 모르는 것일 뿐입니다. 중생의 마음이 부처님의 성품에 못이르러 현상만 보는 때문입니다. 내가 있고 네가 있다며 상(相)을 버리지 않으면 절대로 참다운 행복-깨달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깨달음에는 해오(解悟) 증오(證悟)가 있습니다. 해오란, 이론적으로 체용성상을 다 안다는 것이고 증오는 염불을 하든 화두를 들든 마음을 오직 하나로 모아서 다른 생각 없이 부처님의 정견에 이른 것을 말합니다. 삼매에 들어서 증명이 되어야 증오입니다. 이에 이르러야 도인이고 성인이며 이치로 아는 것은 도인이 못된 현자일 뿐입니다.

 업이라는 습기를 녹이고 삼매를 이뤄야 무량공덕을 발휘할 수 있지요. 우리 중생의 마음이 하나씩 맑아지면 정토가 하나씩 온다는 것, 극락이 한 개씩 생긴다는 것을 알고 지혜를 밝히려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 스님께서는 그동안 수많은 불자를 제접하셨습니다. 요즘의 초발심자는 아무래도 지난 시대의 불자들과 많이 다릅니다. 초발심자를 위해 좋은 수행방법을 일러주십시오. 어떤 길이 가장 효과적인지 궁금합니다.


 - 현재는 못된 일도 하고 잠도 많이 자는 삶이라 할지라도 먼저 자기가 부처님을 아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부처란 것은 바싹 마른 논리가 아니라 생명입니다. 천지 우주가 생명 뿐입니다. 부처란 것은 하나의 생명이며 우리의 본래면목도 불성 그 자체입니다.

 현대물리학으로도 측정이 안된다는 소립자는 에너지의 파동이며 공의 알맹이, 순수에너지의 파동입니다. 일체의 존재를 구성하는 근본요소인 소립자의 본체가 바로 불성입니다. 밝히지 못한다고 해서 빈 자리가 아닙니다.

 우주는 실상으로, 광명으로 불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진여불성은 비어 있는 듯한 그 자리에 충만해 있습니다. 현대과학이 지금껏 연구한 것은 모든 것이 변화무쌍하고 허망한 것이라는 점을 밝힌 것일 뿐입니다. 변화하고 생멸하는 현상계는 가상이며 실상의 그림자입니다. 안보이는 경계에서는 마음만 존재합니다.

 눈이라는 한계에서 볼 수는 없으나 우주에 가득한 것, 바로 그것이 불성임을 알아야 합니다. 부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생명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아미타불은 극락세계의 교주이시며 법신 보신 화신의 삼신을 겸비한 삼세 일체불의 본체입니다. 일체 만유의 근본 자성이 아미타불입니다. 수많은 부처님의 명호 중에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은 그 명호들이 아미타불과 동일한 공덕의 이름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고 죽지 않는 우주의 생명 그 자체, 영생의 생명이기 때문에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고도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아미타불을 외우십시오.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은 나의 참이름인 동시에 우주의 참 이름을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오랫동안 남이 나를 불러주어 내가 바로 그 이름이 되듯이 아미타불을 염불하면 바로 내 이름임을 알고 부르는 것이요 부처임을 아는데 도움이 되는 일이겠습니다.

 불이불(不二佛)이라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위해 염불하십시오.


방편염불 경계해야 


 * 염불선과 염불은 다른 것인가요?


 - 염불에는 방편염불과 참다운 염불이 있습니다. 명호를 외우더라도 명호의 주인공과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 부처가 내 밖에 계신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참다운 염불이며 염불선입니다. 부처를 자기 밖에서 구하는 것은 방편염불입니다.

 ‘천지우주가 부처님이시고 내 마음도 부처이고 내 마음의 바탕도 부처이다’고 느끼면서 하는 것이 바로 염불선입니다. 마음으로는 우주 전체가 하나의 부처라는 경계에 머무른 채 입으로는 부처님 명호를 외우십시오. 나의 생명, 우주의 모든 생명이 본래 부처 아님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될 것입니다.

 여러 공부 중에서 염불공부 하기가 제일 쉬워요. 용수보살도 ‘받기도 쉽고 이루기도 쉬운 것이 염불’이라고 하셨습니다. 염불은 부처님을 한없이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임해야 합니다. 번뇌에 빠져 살고 있는 우리 중생들이 하루빨리 부처가 되려면 부처님을 그리워하는 갈앙심을 갖고 빨리 정화돼야 합니다. 고향을 떠나서 고향을 그리워하듯이, 낳아준 부모님을 그리워 하는 그런 마음, 맑은 마음으로 마음의 고향인 부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하겠습니다.

 떠나온 고향도 그 곳, 돌아갈 곳도 그곳임을 알 듯 명호 그대로가 부처님의 진신이요 바로 나의 참 이름임을 알아야 합니다.


 * 참선 화두는 어떻게 들어야 합니까.

 

 - 본체를 열지 않고 공부하면 그것이 바로 상입니다. 화두를 드는 것은 본체를 떠나지 않기 위해서 인데 화두를 참구한다해도 본체를 떠나면 죽은 화두가 될 것입니다.


부처님 정법 절실한 정보화시대 

 

 * 요즘과 같은 시대에도 도인이 나올 수 있을까 의문입니다. 또 이 몸 그대로 성불을 이룰 수 있을지 회의해왔습니다.


 - 이런 때 일수록 공부의 중요성이 큽니다. 정보화 시대라 하여 너무나 많은 것들이 우리 곁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안심이 안되고 마음은 늘 바쁘고 떠 있을 것입니다. 불안을 해소하고 안심입명(安心立命)하여 안정을 취하고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하나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굉장히 필요한 시대가 된 것입니다.

 부처님 법이 더욱 절실한 시대가 되었음을 알고 번뇌에 가려 구분하고 자타시비를 일으키지 않도록 공부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 스님의 말씀이 바다처럼 깊고도 넓습니다. 스님의 깨달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을 몇 가지 알려주십시오.


 - 부처님 제자로서 살아온 것이 가장 큰 밑거름이 되었겠지만 훌륭한 스승을 만났기 때문이라고도 여기고 있습니다. 동서철학을 다 훑어보고 불교철학은 물론 어떤 신학자, 철학자가 어떤 주장을 했는지도 공부해 보았습니다만 명상에 잠겨있거나 참선만 했다면 훨씬 더 공부가 빨랐을텐데 하는 후회도 하고 있지요. 칸트철학이다 신학연구에 세월이 가 버린 것이 아쉽고, 박학다식한 말은 할 수 있지만 빨리 도인이 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는 할 수 없겠습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많이 아는 것과 상관이 없고 오직 삼독심을 없애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중생을 제도하려면 많이 알아야겠지만 공부할 때는 무엇보다 계율을 잘 지켜야 합니다. 계율을 지키지 않고서는 절대로 바른 공부가 안됩니다. 수행자는 도덕적으로 한없이 청정해야 합니다. 재가 불자들도 채식을 실천해야합니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아보세요. 그처럼 편하고 쉬운 것이 없습니다.

 

 

글 김민경 기자 · 사진 남수연 기자

 

부처님 말씀과 마음공부

자신의 소유가 아닌 것은 집착하지 말고 다 버려라.
내 것이 아닌 것을 모두 버릴 때 세상을 소유할 수 있다.
만약 어떤 이가 뒷동산에 있는 나뭇잎을 가지고 간다고 했을 때
왜 나뭇잎을 가졌느냐고 그와 싸우겠는가.

수행하는 사람들도 그와 같아서
자기 소유가 아닌 물건에 대하여 애착을 버려야 할 것이니
버릴 것을 버릴 수 있어야 마음이 평온하다.

- 잡아함경 - 

 



본래부터 '내 것'이 어디에 있는가.
'나'라는 존재 또한 잠시 인연따라 왔다가
인연 따라 가는 무상한 존재인데,
하물며 '내 것'이라고 붙잡아 두고 집착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뒷동산의 나뭇잎이 어찌 '내 것'일 수가 있으며,
땅에 금을 그어 놓고 돈을 지불한다고 어찌 '내 땅'일 수가 있겠는가.
그것은 인간의 오만한 생각일 뿐.
이 세상에서 내가 영원히 가질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고 일체의 모든 소유를 다 버리고
완전한 거지가 되라는 말은 아니다.
인연 따라 자연스럽게 나에게로 온 것까지는
억지로 다 버릴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자기 소유물들의 특성을 알 필요는 있다.
내 소유물들은 인연 따라 잠시 쓸 뿐이다.
잠시 스쳐가는 것들은 스쳐가지 못하게 '나'라는 틀 속에
가두게 되면 나를 중심으로 우주적인 에너지는 정체되고 만다.

세상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이 끝없는 여행에 있지 어느 한 곳에 정착하는데 있지 않다.
바로 그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사실은 '내 것'이 아니라 여행길 위에서 잠시 들른 간이역일 뿐이다.
그 어떤 것도 종착역으로써 나에게로 온 것은 없다.
내가 그렇게 믿고 싶을 뿐이지.

그러니 내 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시했다 하더라도
사실은 보시가 아니라 그저 가야할 곳에 갔을 뿐인 것이다.
그것이 그것의 다음역이었 던 것이지
'내가' '무엇을' '누구'에게 준 것이 아니다.
'내가' '무엇을' '누구'에게 주고 받았다는
그 생각이 바로 집착이다.

-부처님말씀과 마음공부에서-

 

 

 

 

 

꿈 속에서

 

 

너를 만나고

불현듯 잠을 깨니

멀리 닭 우는 소리만 들린다

 

못 보는 날은

애써 외면 하려도

꿈 속에서 생시처럼 보이네

 

아직 하늘은

별이 흐르는 삼경

보고픈 이 새벽을 어이할꼬

 

잠을 청하여

다시 꿈으로 들까....

그리움으로 열리는 또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