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사 방장 설정스님께 여쭌 '인생을 잘 사는 비결'

2011. 10. 21. 09:0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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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인생은 정말 뭘까요? 잘 사는 방법은 뭘까요? 삶 속에 있으면서도 삶을 모르겠습니다. 알 것 같기도 하다가 다시 깜깜해집니다.”

 

서울에서 수덕사까지 두 시간 만에 달려가 삼배를 올리고 다짜고짜 드린 질문에 수덕사 덕숭총림의 방장이신 설정스님께선 빙그레 미소부터 지으신다. 스님의 푸근한 미소에 마음이 편해진다.

 

“인생이 무엇이냐고 의문을 갖는 자체가 인생이지.”

“의문을 갖는 것이 좋은 것이죠?”

“의문을 갖지 않는 인생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죠. 어떠한 노력을 하며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야하는 것일까 묻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한 과정이겠죠.”

“알 것 같아 안심이 되기도 하다가 어느 날 보면 다시 아무 것도 모르겠는 원점에 와 있습니다.”

“부처님을 비롯해 모든 역대 선지식들의 출가는 인생에 대한 큰 의문, 즉 과연 이 삶이란 무엇인가, 대체 나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하는 물음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확실히 아는 사람을 부처라 하고 선지식이라 합니다. 모르는 사람을 어리석은 중생이라고 하는데 그걸 모르면 헤맬 수밖에 없죠. 중생의 입장에서는 삶과 죽음이 분명히 다른데 선사들은 둘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둘이 아닌 것을 깨달은 사람은 모든 것을 해결한 사람이죠. 이를 생사를 초월했다고 합니다.”

 

낮은 톤의 말씀에 조금 느리면서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가 살짝 배어난다. 미리 연락을 드리긴 했지만 사실상 불쑥 찾아뵌 셈인데도 말씀이 오래 준비하신 듯 정성스럽다.

 

“사람들은 오욕이라고 하는 소위,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 살아가죠. 돈이나 명예나 이성 등을 추구하는 안일한 삶을 가치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에 매달려 있는데 실제 그 오욕으로 나의 생을 채우려고 해봐도 채워지지 않잖아요. 돈이나 명예가 있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고요. 물론 기본적으로 먹고 살아야죠. 그러나 많이 먹고 편하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니예요. 결국 오욕이라는 자체도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죠. 그림자 같고 물거품 같은 거예요. 그럼 이런 것들이 아닌 진짜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선禪의 시발점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부의 시발점이죠. 그런데 출발점을 떠나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조갑상토爪甲上土, 즉 손톱 위에 흙을 올려놓은 것처럼 그 수가 적습니다. 인생의 생사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는 것이 저렇게 어렵기 때문에 보통의 마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노력이 필요한 걸까. 스님의 말씀이 조용히 그러나 간곡하게 이어진다.

 

“고도의 극기와 자제, 그리고 인내가 아니면 이 공부를 성취할 수 없습니다. 세상사에 있어서도 성취를 하려면 저것들을 다해야 하는데, 세상 사람들이 하는 그런 정도 가지고는 안 돼요.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정말 목숨과 맞바꾸겠다는 철저한 의지와 신심, 발심이 아니면 불가능해요. 세간과 출세간을 막론하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태도는 정성스러운 것입니다. 정성으로 삶에 올인해야 그것이 사람을 아름답게 하고 일을 성취하게 하죠. 적당히 어설프게 도전해서는 도저히 안 돼요.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겉 껍데기만 두드리다 말죠.”

 

진지한 말씀을 하시면서도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그런데 나는 적당히 살고 있는 나를 꿰뚫어보시고 하시는 말씀 같아 따라 웃을 수가 없다.

 

“그래서 선사들이 하신 것처럼 모기가 무쇠솥을 뚫으려는 가당찮은 그런 무모한 용기로 붙어야 돼요. 그 약한 모기의 부리가 솥을 뚫는 도리가 있단 말이죠. 그것은 생명을, 모든 정성과 의지를 다하는 것인데, 이것을 일심불란이라 하죠. 일심불란으로 올인하면 그 문제는 해결이 될 수 있어요.”

“공부를 해야 한다는 자각을 해도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알면 알수록 첩첩산중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첩첩산중이죠. 그러나 미리 겁을 내고 뒤로 물러나 도전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남녀노소 누구나 성취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업력이 지중한 사람은 소리와 모양이라고 하는 뜬 구름 같은 것에 얹혀서 자신도 모르게 떠내려가며 평생 중생놀음을 합니다. 자기를 잃어버리고 주체적인 삶이 아닌 객관적인 상황에 얹혀 흘러가기 때문에 자기를 망각하고 사는 거지요.”

 

중심이 서지 않으면 시시각각 우리 앞에 마주한 대상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며 사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스님은 이를 중생놀음이라고 하신다.

 

“잃어버린 자기를 바로 보는 것이 공부예요. 나라는 존재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것을 바로 보고 있다 보면 나라는 것도 없어져요. 나라고 의식하는 그 놈마저도 없어질 때 자기의 본 모습이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중생들은 오히려 ‘나’라고 하는 것이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불교에서 최고 목표로 하는 것이 안심입명安心立命입니다. 마음이 편안해서 자기의 생명이 바로 된 상태를 말하죠. 중생의 생명은 어느 곳에 부딪쳐 없어질지 몰라 항상 위태위태해요. 돈, 명예, 이성을 쫒아가다가 부숴지곤 하죠. 모든 생각이 쉬어져서 가장 편안한 마음을 안심이라고 하죠. 어디를 가도 즐겁고 편안합니다. 그 경계를 법열이라고 하고 대우주와 내가 혼연일치된 상태라고 합니다. 그 상태야 말로 어떤 상황에서도 걸림이 없는 자유자재한 경지죠. 원효선사는 이를 ‘일체무애인’이라고 하셨어요. 돈이나 명예, 이성 등 어떤 소리와 모양에도 걸림이 없는 것을 생사를 초월했다고 하고 그런 사람을 일컬어 생사가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공부하는 사람의 궁극적 목표는 생사가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입니다. 생사가 없는 곳은 너와 내가 둘로 나눠진 게 아니라 대우주와 내가 혼연일치가 된 상태입니다. 그 상태를 현실적 해탈이라고 합니다. 다시 어떤 특별한 법이 있어서 추구할 대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 해탈이죠. 그런 상태가 되었을 때 공부인의 이상적 경지인 열반, 또는 해탈이라고 얘기하죠. 그런 상태가 되면 천상락을 즐길 일도 없고 지옥의 고통을 받을 것도 없는 거예요. 지옥고가 있다고 생각했을 때 고를 받을 공포와 두려움이 생기는 거죠. 그 상대가 다 소멸되어 버렸는데 굳이 천상에 가야할 이유도 없고 지옥에 가서 괴로워야 할 이유도 없는 거죠. 이를 현실적 해탈이라고 하는 겁니다. 정성스럽다는 것은 어떤 일을 하던 정성스럽게 올인하는 것인데 이 공부를 그렇게 해나가게 되면 해결이 납니다. 인생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해답이 나온단 말입니다. 그동안 사대육신이 나라고 생각하고, 오욕이 나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한 꺼풀 훌렁 벗어지면서 수처작주하는 참나가 생기는 거죠. 그 자리가 해탈이고 열반이고 그 자체가 그대로 법열입니다.”

 

“그렇다면 날마다 저희들에게 닥치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수처작주가 되니까 별 문제가 없지요. 이른바 공부를 하면 네 가지 큰 지혜가 나오게 되어 있어요. 정말 텅텅 비어서 아무 것도 없는 대원경지大圓鏡智가 그것입니다. 거울에 한 점의 티끌도 없이 삼라만상이 그대로 비추어 모자람이 없는 것과 같이, 원만하고 분명한 지혜이기 때문에 대원경지라고 합니다. 거울은 사람이 오면 사람을 비추고 달이 오면 달을 비추고 물이 오면 물이 비춰도 흔적이 남지 않아요. 그런데 중생들은 흔적을 남기죠. 찌꺼기를 남기기 때문에 괴롭고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평등성지平等性智가 생겨요. 일체 유정 무정의 모든 존재가 평등 일여한 진리를 관하고 대자대비한 마음을 일으키는 지혜를 말합니다. 세상과 내가 둘이 아닌 평등성을 알기 때문에 자비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죠. 그와 동시에 묘관찰지妙觀察智가 생깁니다. 사물 하나하나에 대해 분명한 이치를 아는 것입니다. 사물의 이치를 환히 아는 지혜죠. 그 다음 성소작지成所作智가 생겨요. 만들고 이뤄지고 없어지게 하는 모든 도리를 다 알게 되는 지혜를 말합니다.

불교의 근본은 지혜와 자비입니다. 네 가지 지혜가 드러난다는 것은 내가 우주법계와 혼연일치가 되어 둘이 아니라는 이치를 아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지혜가 드러나면 저절로 자비희사慈悲喜捨와 효순孝順이라고 하는 여섯 가지 기능의 중생을 위하는 길이 생겨요, 불교의 매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만 공부를 이뤄 극락세계에 이르는 것이 끝이 아니고 우주와 혼연일치가 되어 둘이 아닌 경계가 되었을 때는 자신이 어떤 데도 홀리거나 매이질 않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자비희사와 효순이 구족되어져요. 그때 비로소 중생을 위할 수 있는 철저한 기능이 발현되어지죠.

나를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예뻐하거나 원망하거나 상관없이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처럼 어떤 중생도 다 예쁘게 보이죠. 그게 자慈예요. 그리고 중생의 아픔과 괴로움이 내 아픔과 괴로움이 되어서 연민의 정이 나오는 것이 비悲예요. 꽃이 꺾여도 내 마음이 아픈 것이 비입니다. 희喜는 어렵고 힘든 일을 유정이든 무정이든 상대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어떻게든 그 사람이 나의 모습을 보고 기뻐하고 좋아하게 하는 거죠. 거역하지 않고 기쁨을 주는 겁니다. 사捨는 희생봉사를 말하는 것으로 요즘 말로 하면 봉사정신이죠. 내 것을 전부 버려서 봉사하는 거죠, 중생의 이기심에서 나오는 옹졸하고 좁은 삶이 아니라 내 것을 다 버린 큰 삶을 사는 거죠.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아무 것도 없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우주 법계가 다 제 물건이기 때문에 끝도 없이 자기 것을 버려서 중생을 봉사함에 다함이 없단 말입니다. 그것이 부처님의 무한한 공덕입니다. 마지막, 효와 순은 무조건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오셔서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뿐 아니라 모든 중생이 저 네 가지 지혜와 자비희사라는 공덕을 가지고 있는데 그걸 놓아두고 엉뚱한 짓을 해서 스스로 헤매고 괴롭고 힘들어하니까 자신에게 이미 갖춰진 보물을 찾아 쓰라고 한 것입니다.”

 

“저희 중생들의 문제는 이해는 하겠는데 확연히 깨치질 못해서 인생에 활용이 안 된다는 겁니다.”

 

‘오욕 속에 앉아서 오욕을 처단하려고 하면 그게 처단이 되나?’ 하시면서 웃으시는 스님의 모습이 마치 자식의 앞날을 걱정하는 어버이의 모습처럼 따스하게 느껴진다.

 

“오욕을 철저히 처단하겠다는 그 생각을 일심으로 하기 위해서 주력, 염불, 참선 등의 수행을 하는 거지요. 번뇌망상이 걷혀야 해요. 자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수행을 하는 것이고 자성만 확실하게 드러나면 그때부터 아하 내가 헛살았네, 보물단지가 여기 있었네 하고 느끼는 겁니다. 엉뚱한 짓을 하고 산 것을 알게 되는 거지요 인간은 오욕락을 추구하는 것에 자신의 전부를 쏟아붓고 살고 있지만 그건 마치 불나비가 불빛을 보고 쫓아가서 결국 목숨을 잃는 것처럼 화려한 것 같지만 내 것이 아니거든요.”

“스님 말씀을 듣고 있으니까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다!’ 하는 자각을 크게 한 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잘 못되었다는 자각 없인 정성스럽게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일단 큰 자각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걸 발심이라고 합니다. 사실은 우린 얼마 안가서 다 죽습니다. 끝났을 때를 생각하면 깜깜하잖아요. 자신을 모르면 깜깜한 거예요.”

 

“이렇게 아무 것도 모른 채 죽음을 맞는다면 정말 큰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큰일 났다고 하면서도 관념적으로만 받아들이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질 않아요. ‘내일도 모레도 있으니까 그냥 천천히 생각해보지’ 하면서 살아가지요.”

 

그러면서 스님께선 ‘발심수행장’에 나오는 원효스님의 말씀을 전하신다.

 

 

오늘도 그지없이 나쁜 짓은 많이 해도

내일내일 미루면서 착한 일은 얼마 없네

 

금년 일 년 미루면서 번뇌 속에 한량 없네

내년 후년 미루면서 도 닦는 일 못하누나

 

찰나찰나 잠깐 흘러 낮과 밤이 금방 가고

하루하루 번개처럼 보름 한 달 훌쩍 가니

 

한 달 두 달 쉬지 않고 홀연 일 년 지나가서

한 해 두 해 거듭하여 문득 죽음 닥쳐오네

 

깨진 수레는 가지 못하고 늙은 몸은 닦지 못한다

누워 게으름 앉아 혼미 망상만이 어지럽네

 

얼마나 살겠기에 낮과 밤을 헛되이 보내며

살 날이 얼마라고 평생토록 닦지 않나

 

이 몸은 반드시 죽음이 있으니 다음 생을 어찌하나

생각하면 급하구나 생각할수록 급하도다

 

 

 

원효스님이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해 쓰셨다는 저 말씀을 들으면서 설화 한토막을 떠올린다. 히말라야 설산에 한고조寒苦鳥라는 새가 산다. 그는 둥지를 틀지 않고 살기 때문에 밤만 되면 사나운 눈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온몸이 얼어붙는 괴로움을 겪는다. 그래서 그는 밤이면 '날이 밝으면 꼭 아늑한 둥지를 지으리라' 하고 다짐한다. 그러나 날이 밝으면 따스한 햇살과 설산의 화려한 풍광에 눈이 팔려 날이 새면 집을 지어야지 하고 밤새 다짐한 결심을 잊어버린다. 그리곤 또 다시 밤이 되면 똑같은 다짐을 하며 추위에 떨다가 일생을 마감한다. 중요한 문제를 차일피일 미루고 어리석음과 게으름 속에서 윤회하는 우리의 삶도 저와 무엇이 다를까 하는 생각이 스치는데, 스님께서 일침을 가하신다.

 

“불교를 믿는다 하더라도 관념적으로 믿죠. 철저하게 발심해서 믿질 않으니까 공부를 해도 진척이 없어요. 내일 죽는다고 생각하면 잠이 오나요?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발심해서 그 마음이 참선 염불 등의 수행으로 향했을 때 얻어지는 게 있지, 관념적인 신앙으로는 얻어지는 게 없어요. 무엇인가 좀 얻어지고 참나가 드러날 때 ‘아하 바로 이거였구나, 이것 밖에 없구나’ 하는 깨달음이 오죠.”

 

 

스님을 모시는 시자 스님과 약속한 시간이 지나고 있다. 시자 스님은 찾아간 나를 대하고는 한 걱정을 했다. 칠십이 넘은 노인이신데다 건강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시고 또 며칠 후 미국에 가실 일이 있어 좀 쉬셔야 하는데 사람들이 끝도 없이 찾아온단다. 건강해보이신다고 했더니, 스님께선 찾아온 모든 이들에게 결코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대하셔서 사람들이 잘 모른다고 했다. 정말 스님께선 최선을 다해 객을 맞고 계셨고 나는 스님의 말씀에 푹 빠져 ‘30분만 뵙고 나올께요’ 한 약속을 잊고 있었다. 시자 스님께서 짐짓 방에 들어왔다 나간다. 그만 끝내라는 신호인 것 같아 조금 불안해진다.

 

 

“이 세상을 떠나갈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것 하나도 없어요.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처자권속을 비롯해 명예나 재산, 그건 것들을 가지고 갈 수 있나요? 오로지 자신이 지은 업 덩어리만 짊어지고 가는 거예요. 그래서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철저하게 공부를 해서 깨치지 못했다 하더라도 좋은 업을 지어야 돼요.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 새로운 시작을 잘 하려면 업을 바로 하고 가야 돼요. 탁하고 악하고 독하고 추한 업을 짓지 말고 가야 돼요. 가능하면 좋은 업을 짓고 가야 다음 생이 근사해지지 않겠어요?”

 

“철저한 발심을 하는 데엔 스승의 존재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공부하는 데 믿고 따를 수 있는 스승이 있으면 공부에 진척이 좀 있을 것 같습니다.”

 

“스승도 중요하죠. 그러나 나를 깨우쳐서 이끌어줄 스승을 찾기 전에 내가 이 생명을 버리고 공부를 해야겠다고 하는 강한 의지가 제일 중요하죠. 혜가스님이 달마스님을 찾아가 ‘어떤 것이 대도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네가 그 어줍잖은 생각으로 여기서 대도를 찾겠다고 하는가? 택도 없는 소리! 과거의 모든 불보살들이 수많은 생을 살면서 생명을 버렸다. 그렇게 도를 닦았는데 너는 알량하고 눈 속에서 하루 저녁 서 있던 것을 가지고 나한테 대도를 묻겠다고 하는가’ 하고 꾸짖으시잖아요. 그때 혜가스님이 그 말씀을 듣고 칼로 팔을 잘라 바치잖아요. 그냥 슬슬 적당히 하는 게 아닙니다. 구도에 대한 철저한 열정이나 신심을 가지고 시작해야지, 좋은 스승을 만나서 말 엉덩이에 파리 붙어가듯 공짜로 묻어가겠다고 한다면 잘 못된 생각입니다. 공부를 하겠다는 철저한 의지와 신심이 있으면 좋은 스승을 만날 수 있는 인연이 만들어집니다.”

 

이 공부는 스스로 닦아야지 누가 대신 해 줄 수 없는 길이라고 하신다. 그것이 스승일지라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겐 아무리 훌륭한 스승이 곁에 있어도 소용이 없다 하신다.

 

“총림의 제일 어른이신 방장 스님께선 어려운 일이 있을 땐 어떻게 해결하시나요?”

위로받을 수 있는 질문을 해본다. 스님이라고 어려운 일이 없으시겠는가.

 

“절 집안이라고 해서 세상을 떠나있는 게 아니예요. 어려운 일은 어느 곳에도 있어요. 그러나 해결하는 방법은 다르지요. 어려운 일이 생기면, ‘아 내가 전생에 어려움을 당할 원인을 지었구나’ 하고 생각하죠. 그러니까 어려움이 닥치면 닥치는 대로 누굴 원망하거나 회피하기보다는 수용해서 거기에 최선을 다해버리는 거죠. 중생심을 발동하면 발동한 만큼 힘들고 어려워서 견디질 못하겠죠. ‘이건 내 것이다’ 생각하니까 그냥 무난하고 자연스럽게 해결이 되죠. 또 시간이 해결해 주고요. 개인적인 문제도 있지만 집단적인 것도 있잖아요. 하루하루 거기에 최선을 다하면 되요. 결과에 대해선 연연해하지 않아요.”

 

“늘 위기에 서 있는 게 중생의 삶인데, 그때그때 최선을 다해서 살면 되지 따로 닦을 필요가 있느냐 하고 묻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사람들은 얼굴이 더러우면 세수를 하고 옷이 더러우면 빨아 입습니다. 껍데기는 잘 챙기지만 마음이 더러워지고 탁해지면 세탁을 하려고 하지 않아요. 마음을 그냥 놓아두면 탁한 잡초가 우거지고 죄의 벌레가 우글거리게 되어 있어요. 죄의 벌레라던가 탁한 잡초를 없애려면 항상 마음 세척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염불이고 주력이고 참선이예요. 마음 세척을 해야 좋은 지혜를 가지고 맑은 정신으로 잘 살 수가 있어요.”

 

탐진치를 그냥 내버려 둔 채 성질나는 대로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고 살다보면 어느 쓰레기통에 쳐박힐지 모른다고 쐐기를 박으신다.

 

“그래서 인생을 잘 살아가는 비결은 수심修心과 용심用心에 있어요. 어떻게 마음을 닦고 어떻게 마음을 쓸 것인가가 중요하죠. 그냥 마구잡이로 막 살면 안 돼요. 사람과 사물에 대해서 어떻게 좋은 마음, 아름다운 마음을 가질 것인가, 깨끗한 마음을 가질 것인가, 넉넉한 마음을 가질 것인가, 항상 마음의 준비를 하고 닦아가는 것이 수심이예요. 쓸데없이 성질내고 원망하고 미워하고 시기질투하면서 그렇게 탁하고 옹졸하게 살아야 되겠어요? 결국 세상에서도 잘 사는 길이 수심과 용심에 있는데,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게 안 살잖아요? 바쁘다고 하는데 뭐가 바빠요? 바쁜 놈은 밥 안 먹고 사나요? 밥 먹는 시간이면 그 생각 다해요.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사니까 인생을 실패하는 겁니다.”

 

“불자는 수심과 용심을 하는 데 수행이라는 도구가 있지만 일반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될까요?”

 

“수심을 해야죠. 반성해야지요. 죄에 휩쓸리지 않아야겠다, 굳은 의지를 가져야겠다, 남을 배려해야 되겠다, 남을 위해 헌신해야겠다, 남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겠다, 남을 불편하게 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수심이고 발심입니다.”

 

“늘 내 마음이 어떻게 쓰이고 있나 살펴야겠습니다.”

 

“그렇죠. 자기를 비추어봐야지요. 지금 내가 어떤 자세로 있는가, 온전한가 비뚤어졌는가, 비틀어졌는가 바른가, 자신을 되돌아보는 게 수심입니다. 그것이 인생을 잘 사는 길이지 반드시 염불이나 참선만 하는 길이 전부가 아닙니다. 일반사람들도 그렇게 살아야 돼요. 그러면 별로 낭패가 없어요.”

 

“그간 살아오던 인생의 패턴을 달리해 인생의 시나리오를 다시 한 번 써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 좀 들려주세요.”

 

“인생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걱정이 적습니다. 요행수를 바라서는 안 됩니다. 인생은 요행수에 있는 게 아닙니다. 철저하게 자기를 되돌아보고, 매사 적극성을 띄어야 돼요. 요즘 청년실업률이 높고 타의에 의해 일자리에서 빨리 물러난 중년 가장들도 많은데 무엇이든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 일자리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꼭 자기가 하려고 하는 일만 생각하고 있으니까 일자리가 없는 거예요, 자신을 낮추고 일할 준비와 능력과 자질을 갖추고 있으면 일자리 때문에 어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남을 원망할 필요가 없어요, 자기가 지은 대로 사는 겁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말라리아나 에이즈 같은 병도 결국 인간이 만들어 놓은 작품이예요. 그래서 개선하는 길은 인간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 집안의 구성원 하나하나가 멋진 인생 작품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가지면 어떤 상황에서도 잘 돼요. 기업도 노사가 함께 좋은 생각으로 힘을 합치면 망하지 않고 일어나지는 겁니다. 나와 너, 개인과 집단이 둘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불이적인 가치관가지고 살면 반목이 없어요.”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사느냐가 중요할 것 같습니다.”

 

“덕을 베풀고 살면 자손이 융성하고 잘 돼요. 좀 있다고 목에 힘주고 다니는 것은 가장 못난 인간이 하는 짓거리예요. 정치하는 사람이던 기업을 하는 사람이던 이 사회를 이끌고 가는 사람들은 가치관이 분명하고 훌륭해야 돼요. 노블레스 오불리주(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은 자신을 희생할 줄 알아야 하고 역할을 잘 해야 돼요. 기업인은 직원들의 생명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수행할 줄 알아야 하고 그런 사람이 대접받을 때 아름다운 사회가 되죠. 나만 잘 먹고 잘 살겠다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들, 요샛말로 하면 쪼다들이 하는 짓이죠. 착취하고 도둑질한 녀석들은 저 지구의 오지 한 구석에 태어나 골병드는 거예요. 그리고 축생보를 받는 거예요. 나중에 혼때기 나는 거예요. 이기적인 사람들은 옹졸해서 나중에 자동폐기물로 전락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런 자손들은 펴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재물 있는 사람들이 돈을 물려주지 말고 잘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이제 마무리를 져야할 것 같다. 어느덧 저녁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공양주보살님의 도마질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오고 있다.

 

“일찍 절에 들어오셔서 어느덧 칠십이 넘으셨어요, 한평생 돌아보시면 어떤 소회가 드시는지요.”

스님께서 지금까지 말씀하신 것을 한 마디로 정리라도 하시듯 짧고 간단하게 답하신다.

“불교를 더 발전시키는 것에 더 좀 정성들여 살았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정말 이제 그만 물러나와야 하는데, 못말리는 나의 이기심이 발동한다.

 

“스님 저는 게으른 편인데요. 게을러서 어떡하죠?”

“아침 저녁으로 108 참회하세요. 마음속으로 ‘과거 전생에 잘못한 모든 중생에게 참회합니다. 나로 인해서 억울함을 당했던 모든 생명에게 참회합니다. 나태와 방일로 세상을 살았던 것을 참회합니다.’ 이렇게 참회를 하면서 정진을 해요.”

 

마지막 질문까지 진심을 다해 친절한 말씀으로 답하시는 스님을 뵙고 나오면서 크고 푸르른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있다 나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마침 스님께서 주석하시는 집의 이름이 취송당이다. 인사를 드리고 잘 빗질된 마당을 가로질러 차로 걸어가고 있는데 스님께서 마루문을 열고 말씀하신다.

 

“그러고 보니 차 한 잔도 대접 못했네. 내가 이렇게 인정머리가 없는 사람이여.”

 

처음 뵐 땐 산신령 할아버지 같으셨는데 돌아오는 길 인사를 드릴 땐 청년 산신령 같은 느낌이 든 것은 무엇 때문일까.

 

“세속에 살아도 사람을 대하거나 일을 하거나 정성을 다하는 것 그것이 성공하는 비결이고 잘 사는 비결이여. 또 불교공부를 하려면 발심해서 거기에 올인하는 거여. 그러면 자기라는 게 드러나게 되어 있어!”

 

돌아오는 길, 스님의 간곡한 말씀이 덕숭산 너머 가을바람에 실려 들려온다. 행복한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사람 잡는 15가지

 

반드시 진실을 확인하라....

 

 

미리 대비해야 한다.....

 

 

칭찬은 신중히 하고, 칭찬을 받을 때에 교만하지 말라.

 

 

선물은 받되, 뇌물은 받지 말라.

 

 

따뜻한 정과 함께 냉철한 이성을 가져라.
 

 

 

호의에 담겨진 의미를 파악하고, 반드시 은혜로 받으라.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지금 결단하라

 

 

세상에는 안 괜찮은 일들이 많이 있다.

 

 

반드시 댓가를 지불하라.

 

 

남을 무시하면, 그를 둘러싼 기룬 님들을 무시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소중하다. 별 것 아닌 것은 없다.
 

 

 

기다리게 해 놓고 변하는 사람도 많다.
 

 

한 번이 열 번, 백 번이 된다.
 

 

세상 모든 사람이 다해도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

 

 

                

♥너와나의 오솔길☜ 편지 왔어요.
 요즘 어디를가나 국화,코스모스등 풍성한 가을 꽃들이 반겨주니
멋진여행 즐기시구여...다녀오신 흔적을 사진이나 글로 올려주셔서
함께 정겨움 나누시면 보는이와  받는이의 기쁨도 더하겠지요.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