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문각지의 주체도 견문각지의 대상도 모두 없는 것입니까?

2011. 11. 25. 13:2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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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견문각지(見聞覺知)함에 있어서 견문각지만 있을 뿐,

견문각지의 주체도 견문각지의 대상도 모두 없는 것입니까?  

 

< 답변 >

연생(緣生)은 무생(無生)이라고 수도 없이 반복하지만 그 뜻을 깊이 참구하지 않고

있어요.· · · 모든 지각작용이 전혀 남이 없는 겁니다. 온갖 것이 의타기성(依他起性)

이니 그 무엇도 자체성이 없는 거요. 자체성이 없으니 '나'라고 할만한 '나'가 없는

것이고,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이것'이라고 지칭할만한 것이 없는 겁니다.

 

인무아(人舞我)요, 법무아(法無我)니 사람(人)이 바깥의 법(法)을 관찰해서 이러쿵

저러쿵 하는 일이 본래 있을 수가 없는 거요. 능·소(所能)가 다 빈 것이라 소리요.

그런데 중생이 미혹해서 이 '나'가 바깥의 '저 것' 때문에 어떻다 저떻다 하고 늘 사단을

벌이고 있는 겁니다.· · · 만법이 성품이 없소. 그럼 안으로 '나'라고 할 '나'도 없고,

바깥으로 상대할 티끌 만한 한 법도 없어서, 안팎이 텅 트여 허공 같으면 누가 무엇을

알려고 하고 누가 무엇을 깨닫겠다는 소리겠소?· · · 모름지기 철저해야 합니다. 단 한

마디라도 투철히 바닥을 사무쳐야지, 세속의 상식을 가지고 적당한 선에서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하면 전혀 공부의 진척이 있을 수 없는 거요.

 

"견문각지 할 때에, 견문각지만 있고 견문각지 하는 자도 견문각지 하는 법도 전부

없는 것이고,· · · " · · · 그런 골치 아픈 말들을 뭐 하러 기억하고 다녀요? 그 신령한

마음, 그대로 두세요. 알 일이 있으면 '그 놈'은 저절로 환히 알아요. 인간이 겹겹이

겹겹이 만들어놓은 환영의 영향을 전혀 안 받아요. 그 스스로 아는 신령한 마음을

그대로 두세요. 기왕에 알았던 알음알이로 쓸어 덮지 말고.· ·

 

 

 

-현정선원 법정님의 법문-

 

재선인(才禪人)에게 주는 글

구지(俱 )스님은 납자들과 문답할 적에는 한 손가락을 세웠을 뿐인데, 이는

위 아래로 철저히 통달하여 의심없이 깨달아, 병을 치료함에 많은 약이 필요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인들은 그 본뜻을 모르고 그저 겉모습만을 따라

손가락을 세우면서 전혀 흑백을 분간하지 못한다.

이는 제호(醍 )를 가지고 독약을 만드는 격이니 참으로 불쌍하다.

 참되고 정확한 견해로 꿰뚫은 사람이라야 비로소 신중하여 결코 소홀하지 않을

줄을 안다. 이른바 천균(天鈞) 무게의 활[弩]은 생쥐를 잡기 ㎸漫??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정수리 위에 눈을 갖추어야만 바야흐로 쓸 수 있게된다.

 뒷날 현사(玄沙)스님이 이 인연을 가지고 거론하였다.

"구지스님이 알아차린 곳은 거칠었으니 한 기틀, 한 경계만을 인식하였을 뿐이다.

어떤 눈 먼 놈은 말을 따라 알음알이를 내어 구지스님을 억누르고는 실답다고

말한다. 이야말로 구운 벽돌이 바닥까지 얼어붙었음을 전혀 몰랐다 하리라.

여기에 이르러선 자세히 살펴야지 바보짓은 금물이다. 구지스님은 죽음에 임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천룡(天龍)스님의 한 손가락[一指頭禪]을 얻어서 일생

사용했는데도 다 쓰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어찌 괜한 말이겠는가."

조계 대감(曹溪大鑑)스님이 신분이 미천하였을 땐 신주(新州)의 땔감장수였다.

보잘 것 없이 수십년을 지내다가 하루 아침에 나그네가 경전 외우는 소리를 듣고

그 본원(本願)을 세우고는 어머니를 버리고 고향을 떠나 멀리 황매산의 스님을

찾아갔다. 처음 뵙고 몇 마디 대화 사이에 기연이 투합하여 자취를 숨기고 8개월

동안 방아를 찧었다.

이윽고 신수(神秀)대사와 함께 게송을 바치고서야 비로소 칼끝을 드러냈더니,

황매산의 스님은 드디어 가사와 바리때를 그에게 전수하였다.

이때 여러 대중들이 쫓아가 다투어 빼앗으려 하였다. 몽산(夢山)이 먼저 대유령

(大庾嶺)에 이르러서 의발을 들려했으나 들지 못하고 비로소 힘으로 빼앗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머리를 숙이고 약을 내려 주기를 빌었다.

대감께서 "착함도 생각하지 말고 악함도 생각하지 말라. 이런 때 상좌의 면목이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을 던지자, 그는 곧바로 귀착점을 알았다.

 

시절인연이 아직 이르지 않아 대감스님은 다시 사회(四會)의 사냥꾼 속에

오랫동안 은둔한 뒤에야 번우(番 )로 나와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는 말을 토로하였다.

이 말을 들은 인종(印宗)법사는 스승으로 모시는 예의를 갖추고 머리를 깎아

주고 구족계단(具足戒壇)에 오르게 하였다. 그러자 즉시 큰 법요(法要)를 여시고

2천의 대중을 격발시켜 명성이 대궐에까지 알려졌다. 천자는 가까운 신하에게

명령하여 가사와 발우를 하사하였으나 스님은 끝내 받지 않았다. 용상(龍象)

대덕 수십 사람을 제도하였는데 모두가 대종사였으니, 어찌 그리도 위대하신지!

성현이 세상에 나와 존망진퇴하며 사람을 지도함에 빠뜨림이 없었다곤 하나

걸을 때는 달렸던 취향이 저 미천함으로부터 저명한 데까지 이르렀다.

이것을 가만히 살펴보자면 세상의 인연을 끊지 않고 오묘한 풍규(風規)를

보였으니, 오랜 세월이 지나다 하더라도 그와 함께 비교할 자가 없다.

지금까지 온 세상이 모두 그의 자손이니 커다란 규범을 매번 우러러볼 때마다

털끝만큼이라도 헤아려보려 하지만 되질 않는다. 역량 있는 후학들에게 힘쓸

것을 바라면서 부족하나마 대략을 기술하노라.

현재 나타난 견문각지(見聞覺知)가 그대로 법이지만 법은 견문 각지를 떠나 있다.

그러므로 견문각지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그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이지

법을 통달함은 아니다. 대체로 법에 통달한 사람은 견문각지를 뛰어넘어

견문각지를 수용하면서 견문각지에 안주하지 않고 똑바로 당장에 투철히

벗어나서 전체가 그대로 법이다. 이 법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으며 말도

아니고 침묵도 아니다. 그러나 있음도 나타내고 없음도 나타내며 말을 나타내고

침묵을 나타내어 오랜 세월 속에서도 항상하여 바뀌지 않는다.

그러므로 운문(雲門)스님은 "말할 땐 있다가 말하지 않을 땐 없으며, 생각할

땐 있다가 생각하지 않을 땐 없다고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곧바로 이 법을 오묘하게 통달하여 대용을 얻도록 하면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무엇을 하든간에 영원히 반야가 눈앞에 나타날 터인데, 거기서 다시 선지식에게는

가까이 있고 농부에게는 멀리 있다고 논할 필요가 있겠는가!

 한 번만 뚫고 나가보면 자연히 부딪치는 곳마다 그를 만나리라.

옛부처님과 조사들은 이 한 명백한 일을 우러르고 귀중하게 여기면서도 여러

중생들 속에 베풀어서, 높고 낮음, 귀하고 천함을 조금도 가리지 않고,

어디나 천진 분명하고 원만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새삼스레 불법이 현묘하다는 견해를 내면 잘못이며,

만일 견해를 일으키지 않으면 그대로 적나라하여 완전하게 드러난다.

때문에 말하기를, "숲에 들어가도 풀을 건드리지 않고 물에 들어가도 물결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하였다. 산은 산, 물은 물, 스님은 스님, 속인은 속인이며

주장자를 보면 주장자라고 부를 뿐이니, 이를 두고 체(體)를 본다고 한다.

 만약 여기에서 철저히 보아 내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실낱

만큼도 빈 틈이 없어 전체가 나의 활용이 되고, 하나 하나가 분수 밖이 아닌,

 모두 본분의 일인 것이다. 서 있는 자리에서 아직 체득하지 못했다면 털끝

만큼도 움직여서는 안되니, 어찌 그대로 완성된 분명한 기요(機要)가 아니랴!

단도직입하여 요점을 깨닫는 데 현성공안(現成公案)을 사용할 분이다.

널리 작위(作爲)하면서 밤낮으로 십자로에서 어묵동정과 전체의 움직임을

일시에 간파하여 애초부터 가려 나가니, 참으로 통쾌하도다.

이 일이 만일 말 속에 있다면 합당한 한 마디 말이 고정불변의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천 마디 만 마디를 말한들 결국 끝이 없음을 어찌하랴.

그러므로 이 일이 말 속에 있지 않고 다만 말을 빌려 이 일을 드러내려 할

뿐임을 알라. 영리한 자라면 당장에 이 뜻을 체득하여 말을 초월하여 철저히

증득할 것이다.
그리하여 활발히 살아 움직이는 경지, 그것에서 한 구절을 가지고 백천 구절로

만들어 쓰게하며, 백천 구절을 가지고 한 구절로 만들어 쓰게 한다.

그러니 '마음 그대로가 부처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며 물건도 아니다' 나아가서는 '마음은 부처가 아니고 지혜는 도가

아니다'는 것과 '동쪽산이 물 위로 간다' '한 낮에 삼경(三更)의 종을 친다'

'후원에서 나귀가 풀을 먹는다' '북두성 속에 몸을 숨긴다'하는 말들이 모두

 하나로 관통해 있음을 어찌 의심하랴!

엄양존자(嚴陽尊者)가 조주스님에게 물었다.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았을 땐 어찌합니까?"
"놓아버리게."
"저는 한 물건도 가져 오질 않았는데 무엇을 놓아버리라 하시는지 잘 모르겠군요."
"보아하니, 아직 놓아버리질 못했군" 엄양존자는 그 말 끝에 크게 깨달았다.

그 후 황룡(黃龍)스님이 이렇게 송(頌)하였다.

한 물건도 가져 오지 않았음이여!
양 어깨에 걸머지고 일어나질 못하는도다
눈 밝은 사람은 속이기 어렵나니
말 끝에 잘못을 단박 안다해도
뒷걸음질에 깊은 구덩이로 떨어지리라
가난한 사람 보배 얻은 듯
독악(毒惡)을 잊어 마음 속에 전혀 두지 않으면
뱀과 호랑이를 친구삼고
이류(異類)를 평등하게 생각하네
쓸쓸한 천백 년에
맑은 바람 아직 그치질 않는구나
놓아버리게.

一物不將來
兩肩擔不起
明眼人難 
言下忽知非
退步墮深坑
心中無限如貧得寶
毒惡旣忘懷沒交涉
蛇虎爲知已異類等解
寥寥千百年淸風猶未己
放下著

이를 상식적으로 논한다면 그가 "한 물건도 가져오질 않았다"고 하였는데,

무엇 때문에 대뜸 그에게 "놓아버리게"라고 말하였을까?

이것은 법안으로 미세한 곳까지 비추어 그를 위해 큰 병통을 끄집어내어

부끄러움을 알도록 해준 것임을 알겠다. 그는 그래도 깨닫질 못하고 다시

질문하므로 거듭 점검해 주었더니 그대로 기왓장 부서지듯 얼음 녹듯 하였다.

비로소 밑바닥이 뒤집어지면서 일시에 벗어나 이윽고 사나운 호랑이를

조복받고 독사를 길들이는데 이르렀다.

이 어찌 안으로 느끼고 밖으로 감응함이 아니겠느냐,

방거사(龐居士)의 식구들이 모두 불을 쪼이고 있었다. 거사가 말하기를

 "어렵구나, 어려워! 열 섬의 유마(油麻)를 나무 위에 펴기가"라고 하자,

방거사 부인이 말하기를 "쉽다, 쉬워! 모든 풀 끝에 조사의 뜻이 있다"하였다.

그러자 딸인 영조(靈照)는 "어렵지도 않고 쉽지도 않다.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잔다"라고 말했다.

보통 때 사람들에게 이 화두를 거량하면, 영조가 한 말이 힘을 던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며, 방거사와 그 부인이 '어렵다' 혹은 '쉽다'한 것은

 싫어한다. 그러나 그것은 말을 따라 이해한 것일 뿐, 그 근본 뜻은 전혀

살피지 못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말의 자취가 일어나면 다른 길들이 그것으로부터 생기게 된다.

말을 잊고 뜻을 체득할 수 있다면 비로소 이 세 사람이 각각 한 솜씨에서

나와 밑 빠진 대바구니를 함께 들고 새우도 건지고 조개도 건지면서,

닿는 곳마다 살인의 기틀이 있고 곳곳마다 몸을 벗어날 길이 있음을

보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