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법에 맞는 기도(祈禱) /정인스님

2011. 12. 17. 05:0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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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과 예수님의 차이

 

- 연기법에 맞는 기도(祈禱) -

 

 

 

 

 

부처님은 누가 들어도 이치에 타당한 말씀으로

    항상 둥글고 부드러운 말로 상대를 감복시켰습니다.

   이를 부처님의 원음(圓音)이라 합니다.

 

 

  부처님도 예수님도 성인이십니다. 그러나 두 분의 삶은 태어남과 죽음에서 큰 차이를 보입니다.

부처님은 고대 인도의 농경국의 왕자로 태어났으며 도를 이룬 후에도 모든 친족들의 축하과 후원을 받았으며, 열반에 드실 때에도 많은 제자와 사람들의 존경 속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막지방의 나라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한 깨침을 이룬 후에도 친족들의 비웃음 속에 고향을 떠나 전도하다가 그들의 동족에 의해 도둑의 누명을 쓰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부처님은 사람들에게 설법하거나 이해를 시킬 때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가장 이해하기 쉬운 말로 알맞게 이야기하며, 결코 독설을 하거나 상대를 일방적으로 무시하거나 기분 나쁘게 하지 않았습니다. 초기경전이나 대승경전 어디를 보아도 부드럽고 법에 맞게 처음도 중간도 끝도 모두 누가 들어도 납득이 가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이해를 못하였던 사람들도 결국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감복하고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깨침을 한 후 그들의 동족인 이스라엘을 어둠의 자손으로 몰아 세웠습니다. ‘구약의 여호와는 오직 이스라엘 백승만을 위한다는 것은 극히 부당하다. 하느님은 온 세상 사람들을 다 사랑하신다. 이러한 하느님을 거부하는 이스라엘 자손을 영원히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그의 동족들을 화나게 하고 결국 그들에 의해 도둑의 누명을 쓰고 십자가에 매달리게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부처님은 원음(圓音)의 법문을 하셨기에 누가 들어도 합당하고 모나지 않는 둥근 말로 상대를 감복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보통사람들과 같이 모가 나는 말이나 감정이 실린 말로 이야기를 하였으므로 상대에 큰 반발을 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중도의 가르침은 더욱 빛이 나고 언제 어디서 들어보아도 감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그런데 금년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인 선언’ 소위 ‘21세기 아쇼카선언’과 관련해서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쪽과 반대를 하던 쪽 모두 부처님과 같은 원음(圓音)의 법문에서 상대편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잘 표현하였는지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상대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받는 자체가 바로 불교적이지 못합니다. 서로 업을 짓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불교인은 상대에게 깊은 상처를 주지 않고도 서로 이해하고 잘 사는 그러한 법을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배우고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부처님제자로 살면서 극단적으로 주장하는 모습들이 일반 중생들의 치고받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아, 동시대를 사는 부처님제자로서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낍게 됩니다. 그것은 중도의 도리에 맞지 않은 행동이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불교를 원색적으로 공격하듯 지금 일부 불교도가 자신의 이념과 생각이 다르다고 무차별적으로 상대를 무시하는 것은 지극한 아상과 법집에 빠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좋은 대화를 통해서 부처님과 같은 원음(圓音)으로 이야기할 수 없다면 먼저 스스로 부처님과 같은 원음(圓音)으로 세상 사람을 설득할 수 있을 때까지 마음수행을 많이 하여야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생각이 제각기 다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주장과 똑 같지 않다고 성난 짐승처럼 날뛰는 것은 원음(圓音)이 아닙니다.

 

 

 

  불자님들

  오늘은 기도와 발원에 대하여 조용히 생각해보기로 합니다.

  우리나라 불자님들의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생활화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가 누가 나타나 이 기도란 엉터리요, 기복이요, 기독교와 같다고 주장하면 대부분의

불자들이 그 주장하는 말에 동조를 하지 않고 오히려 반발심을 낼 것입니다.

 

 

  왜냐하면 벌써 그 주장하는 사람이 부처님과 같은 원음(圓音)으로 이야기 하지 않고 자신의 개인적인 주장이나 믿음에 빠져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그의 주장이 타당해도 부처님과 같은 원음(圓音)으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 기도(祈禱)와 발원(發願)

 

   부처님께서는 생사해탈을 위해 출가하셨습니다. 그리고 6년간의 수행을 통하여도 최상의 깨달음에는 도달하지 않으셨고, 이후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서 더 이상 고행을 못할 정도가 되어서 하나의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극심한 고행을 해야 해탈을 할 수 있다.’라는 그릇된 믿음과 바라는 마음 때문에 생사를 해탈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몸이 완전히 망가지면 결코 바른 생각도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수자타가 준 우유죽을 드시고 힘을 차리시고 네란자강 가 보리수 아래서 바라는 바 없는 명상에 드셨습니다.

 

   그리고 몸을 학대하는 고행이나 세속적인 쾌락과 집착에서 벗어나야 중도의 자리인 해탈의 경지에 들 수 있음을 깨달으셨고, 연기법과 사성제의 도리를 깨우치신 것입니다. 드디어 생사해탈의 경지인 열반에 드신 것입니다.

 

 

  근대 인도의 민족운동 지도자 간디는 번뇌가 많고 일이 안 되면 지하에 내려가서 혼자 조용히 단식을 했습니다. 사람을 만나지 않고 일주일이나 열흘 동안 단식을 합니다. 이렇게 단식하면서 명상을 하면, ‘내가 욕심을 내면서 하려고 했던 일, 어리석음으로 하려고 했던 일, 성질을 내면서 했던 일들이 모두 사라집니다. 그리고 나면 정말 해야 될 일, 배고픔 속에서 놓아지지 않는 일이 뚜렷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일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을 원(願)이라 합니다.

 

 

◇ 부처님은 생사윤회를 벗어나려는 대원(大願)을 세우셨습니다. 이를 발심(發心)이라 합니다.

이를 위해 탐심도 성냄도 어리석은 마음도 모두 내려놓으시고 오직 깊은 명상에 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명상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신 것입니다.

 

● 연기법을 발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욕심도 성냄도 어리석음도 다 내려놓고 맑은 마음, 밝은 정신, 밝은 눈으로 기도하면 그 기도는 영험이 있습니다.

 

 

  기도할 때 ‘뮈 해주세요,’라고 하는 욕심을 붙이면 안 됩니다. 그저 욕심을 내려놓고 마음을 고요히 하여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다보면 결국 자신이 꼭해야할 일이 떠오릅니다.

 그것이 영감이고 아이디어입니다.

 

  즉 인과의 법에도 맞는 이치가 저절로 마음의 수면위로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피인 것입니다.

 

 

◇ 현대의 고 정주영 회장이 서산 간척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 바닷물을 막을 방법이 없어 큰 곤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서해안은 간만의 차이가 심해서 댐 물막이용 돌을 아무리 많이 넣어도 바닷물에 다 휩쓸려가고 맙니다.  깊은 시름에 빠져 고민하다가 인근 바닷가 절에 가서 부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 빌었습니다.

  “부처님, 저가 저 댐을 막는 것은 나의 개인적인 욕심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배고프지 않게 할 식량을 구할 땅을 만들고자함입니다. 저에게 저 댐을 막을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이렇게 간절히 빌었습니다.

 

 

  탐심도 성냄도 어리석음 마음도 내려놓고 오직 기도만 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고요해졌습니다. 이윽고 법당 앞에서 무심히 자신의 물막이 공사를 하는 바다 위를 보니 큰 기선 한척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 순간 번개같이 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 바로 저와 같은 큰 배를 가라앉혀 그 위에 돌을 넣어 물막이로 삼겠다.”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고 정주영은 즉시 그 방법을 실천에 옮겨 물막이 공사를 성공적으로 하여 큰 간척지를 만들어 그 곳에서 많은 식량을 얻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기도입니다.

 

 

  기도의 성취는 ‘뭐 해주세요.’라고 욕심을 붙이면 안 됩니다. 탐심을 내려놓고 고요한 마음이 들어 그 일을 성취할 좋은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생각건대 인류가 시작된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통해서 자신의 의지를 다지고 자신의 신념을 굳건히 하고 또 기도하는 삶 속에서 자신을 갈고 닦고 좋은 지혜를 내어 훌륭한 일을 한 사람이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기도(祈禱)를 절대자인 신에 매달리는 것이라는 사전적 해석에 자신의 생각을 묶어두는 사람은 결코 부처님의 바른 법을 볼 수 없을 것이며, 종교의 순기능인 ‘인류에 희망과 용기 그리고 행복을 가져다주는 일’에 크게 보탬이 되지 못합니다.

 

 

◇ 기도(祈禱)를 이제는 부처님이나 하느님이나 신에게 ‘무엇을 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기도 속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방법과 지혜를 찾아야 합니다. 그 방법과 지혜를 찾으려면 탐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부처님이 하셨듯이 마음을 고요하게 하여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에 집중하여야 합니다. 그 일에 집중하는 자체가 명상이요, 생활 속에서 수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그 일을 성취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연기법에 맞는 기도요 수행인 것입니다.

 

 

◇ 해탈 열반의 길이 되는 기도(祈禱)

이러한 의미에서 해탈 열반의 길이 되는 기도(祈禱)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도는 말은 기도라고 하지만 사실은 수행(修行)입니다.

 

수행(修行)이란 ‘행’을 닦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행(行)은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기에 결국 ‘마음을 닦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마음’이라 할 때 그 마음은 경건한 마음을 뜻합니다. 뭔가 욕심을 내고 이루려고 하는 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하게 자기를 돌아보고 성찰을 하는 마음이 진정으로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는 중에 ‘음 내가 지금 욕심이 지나쳤구나.’ ‘내가 내 생각에 빠져 있구나!’ 이렇게 자기를 돌아보고 뉘우치고 조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욕심도 내려놓고 화내는 마음도 내려놓고 오직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면 됩니다.

 

그 때 자신이 바라보는 대상이 부처님이 되었던 자연이 되었던 자기 자신의 마음이 되었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기도(祈禱)라고 하는 말에 매이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마음을 고요하게 하면 됩니다.

 

 

 

◇ 그러나 이 때 원(願)은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누구에게 의지하여 ‘뭐 해 달라.’라는 구걸하는 기도는 인과의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해야겠다.’라는 스스로의 원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부처님께서 ‘생사해탈을 하고야 말겠다.’라고 하신 것이나, ‘만 중생을 제도해야 되겠다.’는 의지는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조차 없다면 불교가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이 최초의 의지가 원(願)입니다. 이 원(願)이 클수록 좋습니다.

 

 

   이 원(願)이 생사해탈과 전 인류의 행복을 위하거나, 전 인류를 깨닫도록 인도하고 봉사하겠다는 뜻을 가지고 꾸준히 정진하다보면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이를 위해서는 탐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내려놓아야 함은 물론입니다.

 

 

  마치 큰 열매를 맺기 위해 열심히 농사 짓다보면 중간에 푸른 잎도 구경하고 멋진 꽃도 구경하는 이치와 같습니다.

 

 

◇ 이런 의미에서 대승불교가 한편으로는 자신을 닦고 한편으로는 만 중생의 이익과 행복 그리고 성불을 위해서 큰 원을 세우고 중생제도를 하는 것은 인과의 법에도 맞고 부처님의 말씀과도 부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자님이나 북방불교 수행자나 남방불교 수행자 모두 이러한 기도의 의미를 잘 살펴서 이제는 내가 바라는 바가 성취되는 것이 ‘기도’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시기를 간절하게 바랍니다.

 

 

  내가 원하는 바가 성취되느냐 아니 되느냐가 아니라, 고요한 마음으로 탐심도 성냄도 어리석은 마음도 다 내려놓고 오직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며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바랍니다. 그 속에서 진리에 부합한 자신의 할 바를 찾는 것입니다. 그 길이 방편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비록 기복을 바라는 바 때문에 기도를 했지만, 점차 부처님의 가르침과 연기의 도리를 배우면서 많은 불자님들이 오직 마음을 비우고 탐심을 내려놓는 기도를 하는 불자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님은 대승경전에서 나온 불보살입니다. 비록 대승경전이 역사적인 이유로 부처님 입멸 이후에 성립되었다하더라도 이들은 한결 같이 중생을 제도하려는 부처님 마음의 한 분상으로 본 것입니다. 대승불교는 부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려는 운동에서 태동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자구하나하나에 매달리고 계율하나하나에 매달리는 교조주의요, 아집 덩어리인 부파 불교가 보여준 작태에 실망하고 뼈아픈 경험을 한 이들이 부처님의 마음으로 다가간 것이 대승불교 아닙니까? 그것이 북방에 있는 각 나라의 민족 신앙을 흡수하면서 태동한 대승불교는 부처님의 근본 사상인 연기법과 무아사상을 그대로 섭수하고 있습니다.

 

 

   부처님도 깨달음을 여신 후 수많은 방편법문을 설하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생존해 있을 당시 그 시대에 맞는 법문을 설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시대와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만일 부처님이 이 시대에 태어나셨다면 방편설법이 과거 인도 때와는 매우 달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고 인간의 삶의 형태가 달라져도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와 연기의 이치인 진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기도도 이법에 맞는 것이 진실한 기도입니다.

 

 

 

◇ 그러므로 이제 내가 바라는 바가 성취되는 것이 ‘기도’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탐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마음을 벗어나 마음을 고요히 하여 내면의 소리,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종교나 종파에 관계없이 더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는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참고로 이글의 일부는 법륜스님의 ‘기도’란 책에서 인용하였습니다. 법륜스님은 원음(圓音)에

     가깝게 설법하시기에  이글을 인용하였습니다.)

 

 

 

 

불자여러분~

 

세월이 무상(無常)하여

이제 금년의 마지막과 새해를 맞아 달리고 있습니다.

올해 한해 내 마음속의 묵은 때(번뇌)를 내려놓고

새해에는 더욱 밝은 몸과 마음과 말로서 나와 이웃을 밝히고

세상을 밝히기 위해 다짐하며

일체유심조라는 말을 다시 되새기며

우리 모두 기도(祈禱)합시다.

 

 

감사합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정인(正印)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