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 불가/정우스님

2012. 1. 21. 00:1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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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頂宇) 스님 - 월간붓다 발행인  現.구룡사 회주 / 前,통도사주지


1년은 춘하추동(春夏秋冬) 4계절이 있고 절기로는 24절기가 있습니다.

그 중 하지(夏至)는 낮의 길이가 가장 긴 날이고 동지(冬至)는 밤의 길이가

가장 긴 날입니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 따른 현상입니다. 그래서 북극과

남극은 겨울에는 한없는 밤이고 여름에는 한없는 낮이라 합니다.

우리나라처럼 4계절과 24절기가 명확하게 구분되어진 곳에서 사는 것은

복된 환경과 기후일 것입니다.그런 우리나라는 동지인데, 적도 남쪽나라

호주나 뉴질랜드는 여름이고 우리나라는 한겨울이 되는 것입니다.

 

아침신문에, 두 개의 쌍둥이별에서 지구와 비슷한 크기를 발견했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태양계로부터 950억 광년의 거리가 떨어졌다고 하는데, 1광년의

거리가 9조4천6백70억km라고 하니까, 언뜻 계산이 안 나옵니다.

또 얼마 전 미국 NASA에서 발표한 글에 보면, 우리들이 목격할 수 있는

우주의 크기는 일부분 이지만, 우주에는 1천억 개 이상의 별에 생명체가

살고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시간의 거리를 부처님께서는 『불가설 불가설 불찰극미진수겁(不可說

不可說 佛刹極微塵數劫)』이라는 숫자의 개념으로 이미 2600년 전에 수없는

세상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들의 상식으로 보아도 우주 천체는 항하(恒河)의 모래알 숫자보다 더

많은 별들이 있는데, 어찌 생명체가 지구에만 살겠습니까?
이러한 지구를 볼 때, 하루의 시작은 자시(子時)로 보는 것이며 동지는

1년 중에서 마지막 시간과 한해의 첫 시간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게 정설

입니다. 그래서 동지를 작은설 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매년 동지 때만 되면 월하 종정스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구룡사에서 화엄경산림 백고좌법회를 마치고 노스님께 인사도 드릴 겸

통도사에 내려가서 며칠을 머무르다가 동지 전날 구룡사로 올라왔는데,

동짓날 꼭두새벽에 노스님께서 전화를 주셨습니다.
“잘 올라갔나?”
“예. 잘 올라왔습니다.”
“그러면 들어가라고….”
노스님의 짧은 두 말씀 속에 다겁생(多怯生)으로부터 지어온 깊고깊은 인연과

한없는 보살핌의 가르침이 배여 있었습니다. 어제 헤어졌는데 그 다음날,

그것도 동지 첫날 꼭두새벽에….

 

《죽창수필(竹窓隨筆)》의 저자인 중국의 주굉(侏宏)스님은 말합니다.
‘세상천지의 시주자들에게 시주의 은혜가 일미칠근(一米七斤)인데 폐를

끼치고 있으니 보답할 길이 없다. 어떻게 해야 보답을 하고 어떻게 해야

그 은혜를 갚을 수 있을까.’

이 글은, 언제나 내 자신의 지나온 시간들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늘 생각해보면 미진한 것도 많고, 아쉽고 부족한 것도 많았지만,

그래도 잘 살아보려고 노력했다는 생각을 자문자답하듯 해 봅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때, 외형적으로 이루었던 것들이 있으면,

우쭐 댈 수도 있고, 자기 자신 스스로가 자랑스럽고 벅찰 만큼 괜찮아

보일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이 들면 들수록 더 겸손

하고 겸허한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에 대한 믿음이 너무 지나치거나 인식능력 자체가 오염되면 타락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어느 곳에서 살더라도 자신의 모습을 올곧게 세울 수

있는, 내 모습을 잃어버리지 않을 그런 동지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화엄경(華嚴經)〈입법계품(入法界品)〉에 보면 500명의 동남동녀

(童男童女) 가운데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의 부촉(付囑)을 받은 선재

동자(善財童子)가 선지식(善知識)을 찾아 구법(求法)의 길을 떠납니다.

그렇게 구법행을 하다가 마지막 미륵보살(彌勒菩薩)을 만나, 다시 권해준

선지식을 찾아가고 보니까 처음 만났던 문수보살이었습니다.


“이렇게 만날 바에는 처음에 만났을 때 다 가르쳐주지, 왜 그런 요건

들을 구비해 나가도록 하셨을까?”그런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면 앞날이 캄캄해집니다.
그러나 선재동자는 문수보살을 만났을 때 다시 시작하겠다는 서원을 일으

킵니다. 그곳에서 보현행원(普賢行願)이 이루어집니다.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선재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선남자여, 그대는 나의 신통한 힘을 보았는가.』
『예 보았습니다.』
『선남자여, 그대는 나의 육신을 보라. 만일 중생들이 선근(善根)의 뿌리를

심지 못하거나 선근을 조금 심은 성문(聲聞)이나 보살들로는 나의 이름도

듣지 못하거늘 하물며 나의 몸을 볼 수 있겠느냐.』

 

물론 형상이나 음성에 치우치는 집착을 덜어주기 위해서 《금강경(金剛經)》

에서는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若以色見我 以音聲

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약 형상으로만 보려하거나 음성으로만 판단하려 한다면 여래를 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32상(相) 80종호(種好)의 구덕원만(具德圓滿)한

모습을 관상학적으로 표현할 것은 아니지만, 심성이 곱고 맑고 깨끗하고

향기로우면 외형적인 모습도 맑고 깨끗하고 건강해질 것입니다.

청정법신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선남자야, 만일 중생이 내 이름을 듣기만 하여도 아뇩다라샴먁삼보리에서

물러가지 않을 것이며, 만일 나를 보거나 접촉하거나 맞이하거나 꿈에라도

나를 보거나 들은 이도 그러하리라. 그대는 마땅히 나의 청정한 몸을 보아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는 ‘나를 믿으라. 나를 따르라. 나를 의지해라.’ 이런 식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내 자신의 문제는 내 스스로가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것이 팔만장교(八萬藏敎)의 법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고통 받는 가지가지 종성(種性)을 가진

중생들을 도우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위없는 깨달

음의 이치를 열어 보이시고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들의 행(幸)·불행(不幸)이라는 것, 기쁨과 슬픔이라는 것, 우리 자신이

우리자신의 행동과 그 행동의 결과라는 것을 인과법(因果法)으로 보이신

것입니다.스스로가 자기 마음을 제어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기쁨도,

즐거움도, 슬픔도 괴로움도 겪게 된다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가르쳐 주셨습니다

.
우리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잘 갈무리 칠 수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거기에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기도(祈禱)입니다. 동지, 입춘,

초하루, 보름, 관음재일…, 이런 날에만 절에 와서 기도 정진하는 시간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길거리에서 늦은 밤까지 배회하는 사람들처럼, 그런 모습이나 행동을 변화

시키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충분한 수행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스스로의 행동에 따라 즐기는 인생이 있고, 즐거워하는 인생이

있습니다. 즐기는 인생은 식도락가처럼 음식 잘하는 집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세상의 중심에서 서 있을 자리는 그렇게 찾아가는, 즐기는

인생이 아닐 것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음식을 장만해서 가족들이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모습이 보살행(菩薩行)입니다. 맛있다는 음식점이나 찾아다니는 그런 인생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을 가질 수 있도록 내가 중심에 서줄 수 있는,

그런 보살행이 되었으면 합니다.

기도는 진지한 삶을 통해서 항상 우리들 마음속에 살아있는 힘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체험을 통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형상으로는 안 보이지만

느낄 수 있습니다. 일주일 동안 동지기도를 함께 하면서 내 마음은 환희

법열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함께 기도 한 불자님 중에도 그 기운을 느끼신

불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기도를 하면서 그러한 기운을 가지게 된 불자는 그 기쁨을 스스로도 옆에

있는 불자들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 끝에 “성불 하십시오. 성불

하세요.” 함께 기도하는 불자들과 인사를 나누는 그 시간은 순간, 천년의

시간처럼 우리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를 하면서도 그러한 기운을 느끼지 못한다면, 기도에 대한

확신과 신념이 없는, 신심 없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확신과

신념 없이 기도를 하고 있으면 의심만 생기고 의구심만 일어납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인생살이 자체가 불안해져서 분별심으로 판단하려고

하는 삼독심(三毒心)으로 흔들림을 가지기 마련입니다. 그러한 기도는

머릿속에 인식된 고정 관념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왜 그토록 간절한 기도가 필요한 것일까요? 그렇게 간절한

기도를 하게 되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딪치게 되는 수만은 어려움도

흔들림 없이 한결같은 평상심으로 그 문을 통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려움에 부딪치게 되면, 어떤 사람은 입이 바싹 바싹

마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안절부절못하여 쩔쩔매기도 하는데, 그러한

사람일수록 더욱 기도를 해야 합니다.

마음의 안정을 유지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 확신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 이렇게 나타나는 덕목이 바로 기도의 힘입니다.

그것은 누가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스스로 이루어가야 하고

발현시켜야 하고 꽃피워 결실을 맺어야 합니다.

참 행복은 주어진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살아온 인생

되돌아보면, 여한 없는 인생은 결국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몫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열심히 기도정진하는 임진년 한해가 되기를 간절히 서원합니다.

(월간붓다1월호)

 

스스로 행복한 사람
                                           / 법정 스님

현대인의 불행은 모자람이 아니라
오히려 넘침에 있다.
모자람이 채워지면 고마움과 만족함을 알지만
넘침에는 고마움과 만족이 따르지 않는다.
우리가 불행한 것은 가진 것이 적어서가 아니라
따뜻한 가슴을 잃어 가기 때문이다.

따뜻한 가슴을 잃지 않으려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동물이나 식물 등 살아 있는 생물과도
교감할 줄 알아야 한다.
석창포와 자금우 화분을 햇볕을 따라 옮겨 주고
물뿌리개로 물을 뿌려 주면서
그 잎과 열매에 눈길을 주고 있으면
내 가슴이 따뜻해진다.

한밤중 이따금 기침을 하면서 깨어난다.
창문에 달빛이 환하게 비치는 것을 보고
창문을 열었을 때
달도 희고 눈도 희고 온 천지가 흰 것을 보면
내 가슴 또한 따뜻해진다.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사실에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 영원한 존재는 그 누구에게도,
그 어디에도 없다.
모두가 한때일 뿐이다.
살아 있을 때
다른 존재들과 따뜻한 가슴을 나누어야 한다.

자기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마찬가지로 자기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그러므로 행복과 불행은 밖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고 찾는 것이다.
행복은 이웃과 함께 누려야 하고
불행은 딛고 일어서야 한다.
우리는 마땅히 행복해야 한다.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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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얼린 모음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