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이란? - 청화큰스님

2012. 3. 3. 08:2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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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禪)이란?

 

청화큰스님

 


 선(禪Dhyana, Zen)ㆍ정(定Samadhi) … 선(禪)은 관(觀)을 위주(爲主)하고 정(定)은 지(止)를 위주(爲主)하나 합(合)하여 정혜균등(定慧均等)의 묘체(妙體)를 선정(禪定)이라 함. 또 사유수(思惟修)ㆍ기악(棄惡)ㆍ정려(靜慮)ㆍ공덕총림(功德叢林)ㆍ심일경성(心一境性)ㆍ현법락주(現法樂住) 등의 이름이 있음. 또한 선종(禪宗)의 선(禪)은 명(名)은 사유정려(思惟靜慮)의 뜻을 취하나 그 체(體)는 열반묘심(涅槃妙心)으로서 바로 불심(佛心)을 의미함.



선() 이것은 이른바 자나(Jhana)의 음사인데, 우리 한국 선은 세계적으로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본 선은 많이 알려져서 그 사람들이 Zen 그러니까 미국 쪽에서도 선을 Zen이라고들 발음합니다. 그리고 선과 정을 구분을 하는 분도 있고 구분 않고 합해서 선정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선()은 관()을 위주로 하고, 관() 이것은 관찰을 뜻하는 것입니다. 정(samadhi)은 이른바 삼매에 든다고 하지요. 삼매란, 마음에 다른 생각이 없이 오로지 한 생각에 머무르는 것이 삼매입니다. 독서도 역시 독서만 열심히 하면 독서삼매라 하는 것이고, 여기서의 정은 그냥 나쁜 생각으로도 한 곳에 머무를 수가 있는 것인데, 나쁜 생각이 아니라 정념으로 한 생각에 머무는 것이 이른바 사마디(samadhi)란 말입니다.


정념이란 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우리 마음의 본래 성품자리, 본래 성품은 바로 진여불성이 아닙니까. 그 진여불성 자리에다가 오로지 우리 마음을 머무르게 해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사마디(samadhi)라고 합니다.

선은 그 자리를 주로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관조를 한다는 말입니다. 가사 실상관(實相觀)이라. 실상관은 우주법신을 관찰하는 것이고, 그래서 선()은 관찰을 위주로 하고 정()은 지()를 위주로 하나 합하여 정혜균등(定慧均等)의 묘체(妙體)를 선정()이라고 합니다.


정혜균등이란 말을 참선 배우는 사람들은 꼭 외워 두셔야 됩니다. 정은 우리 마음이 오로지 한 곳에 머무는 것을 정()이라고 하고, 즉 고요한 것을 정이라 하고 또 혜() 이것은 참다운 지혜, 우주의 실상을 비춰보는 그런 지혜(智慧)를 혜라고 합니다. 여기 있는 지혜는 보통 지식적으로 아는 지혜가 아니라 참다운 반야의 지혜, 우주의 실상을 비춰보는 지혜가 여기 있는 정혜(定慧)의 혜에 해당합니다. 정()도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정념(正念)이라. 정념(正念)이 한 군데 모이는 것이 정()이란 말입니다.

정혜균등이란, 정과 혜가 평등하게 나가는 것이고, 고요한 것은 정이고 혜는 비춰보는 것인데 무얼 비춰보는고 하면은 실상(實相)을, 우리 불성을 비춰본단 말입니다. 이것이 가지런히 되어야 참선진도가 빨라집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우리 본래 면목, 우리 불성 자체는 원래 정ㆍ혜가 같이 구족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성이나 우주의 본성인 진여불성 자리는 정과 혜가 본래적으로 원만구족하게 갖춰져 있기 때문에 우리 공부도 거기에 걸맞게끔 정ㆍ혜가 가지런히 균등하게 나가야 이른바 개안이 빠르단 말입니다. 정에만 치우치고 혜에만 치우치더라도 공부가 안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공부 진도가 더딘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어느 때나 중도를 추앙합니다. 중도란 것은 이것과 저것의 중간이 아니라, 다 갖추고 있는 온전한 자리를 제대로 참구하는 것이 중도란 말입니다. 이른바 진여불성이 바로 중도인 것이고, 우리 본성이 바로 중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할 때는 꼭 고요하니 우리 마음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정()과 또는 우리 불성 자리를 비추어 보는 혜()와 같이 아울러 나가야 공부가 빠른 것입니다. 그런데 관찰만 많이 하고 혜 쪽으로만 치우쳐서 고요히 머무르지 않는다면 공부가 더디단 말입니다. 그래서 육조단경(六組檀經) 부촉품에서 ‘일상삼매(一相三昧’), ‘일행삼매(一行三昧)’ 말씀을 제가 드렸지요. 일상삼매 이것은 혜에 해당합니다.

일상삼매는 천지우주가 오직 하나인 평등무차별의 진여불성이라고 관찰하는 것이고, 그리고 일행삼매는 그 자리를 놓치지 않고서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일행삼매이고 정()에 해당한단 말입니다. 좀 어려운 법문이나 기본적으로 알아 두시면 공부하실 때에 큰 도움이 되십니다.


일상삼매, 일행삼매, 정ㆍ혜 또는 간단히 천태식으로 말하면 지관(止觀)이라. 그칠 지()자는 정()에 해당하고 관()은 혜()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래 우리 불심에 갖추고 있는 것이 바로 참다운 지혜 또는 조금도 번뇌가 없는 고요한 자리이기 때문에 공부도 거기에 맞게 해야 우리 번뇌의 습관성을 빨리 녹이고서 참다운 진여불성을 견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선정을 ‘사유수(思惟修)’라. 사유수란 것은 바르게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바르게 생각을 해야지 그냥 덮어놓고 생각한다고 그것이 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 만유란 것은 오직 진여불성(眞如佛性)뿐이다. 이렇게 뚜렷이 생각해야 그것이 정사유(正思惟)가 됩니다.


그 다음에는 ‘기악(棄惡)’이라. 버릴 기, 모질 악. 악을 버린단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선공덕(禪功德)입니다. 사유수라는 것은 바른 생각을 관조함으로 해서 자연적으로 악심이나 나쁜 생각이 없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 다음은 ‘정려(靜慮)’라. 고요할 정, 생각할 려. 고요히 조금도 삿된 생각 없이 바르게 참다운 진리를 생각한다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공덕총림(功德叢林)’이라. 이런 것이 모두가 다 선정의 뜻풀이입니다. 공덕총림은 무엇인고 하면, 공덕, 이것은 자기나 남이나 누구나 간에 유익되게 하는 것이 공덕입니다. 총림, 이것은 그야말로 수풀모양으로 하나 둘 있는 것이 아니라 숲처럼 무한공덕이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참선을 한다고 생각할 때는 무한공덕이 거기에서 우러나온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도 역시 하나의 참선 공덕이 따르는 것입니다.


아까 기악, 악을 없애는 것도, 참선을 하면 차근차근 사람이 선량해져 가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진여불성하고 가까워져 가니까, 마땅히 진여불성 자리는 만능의 자리인 동시에 오직 하나의 생명자리이기 때문에 나쁜 마음이 생길 수가 없겠지요. 자타(自他)라는 구분도 역시 참선을 해 가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차근차근 자기 모서리가 끊어져서 무아(無我)라, 내가 없다는 생각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본래가 무아이기 때문에 공덕총림 또는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 오직 마음이 하나로 묶인단 말입니다. 처음에는 이 생각, 저 생각이 다 나오지만은 마음이 정화가 되면 오직 하나의 생각으로, 영원적인 그 맑은 생각, 부처님 마음 같은 그런 생각에 가까워집니다. 그래서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 오직 부처님 경지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현법락주(現法樂住)’라. 이것 역시 참선공덕입니다. 우리가 지금 재미있는 것도 있고, 싫은 것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 중생의 재미있는 것은 속락(俗樂)이라. 세속적인 오욕 같은 것은 재미는 좀 있다 하더라도 그런 것은 허망 무상한 안락인 것입니다.

그러나 법락(法樂)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안락이 아닙니다. 법락, 이것은 공부를 해서 원래 우리 불성에 갖추어져 있는 공덕을 얻으므로 참다운 안락이 온단 말입니다. 따라서 신통자재나 그런 것도 모두가 다 법락 가운데 들어갈 수 있겠지요. 현법락주라, 법락이 나온다는 말이고 아까 얘기한 경안이라, 몸도 마음도 가뿐하니 환희심에 차서 닦아 나가는 것이 경안인데, 그것 역시 법락입니다.


그것이 견성오도(見性悟道)한 것은 아니지만, 이와 같이 법락이 나타나는 것이 현법락주(現法樂住)인데 참선이라는 뜻에서 이런 등등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러나 선종(禪宗)의 선()은 고요히 생각도 하고 사유 정려(思惟靜慮)하는 뜻을 취하고 있으나 그 체()는 열반묘심(涅槃妙心)이라. 열반묘심은 불심입니다. 일체종지의 근본자리. 본래면목자리인 불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냥 선정이라고 할 때는 관찰도 하고 그러겠지만 선종(禪宗)에서 선이라 할 때는 훌쩍 뛰어 넘어 이것저것을 다 초월한 하나의 불심을 바로 선이라고 합니다. 불심만을 문제시하고 견성만을 문제시하는 그런 것이 선종(禪宗)의 선()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불교의 교리 내에서 보통 선정이라고 할 때와 선종에서 ‘선’ 할 때는 차원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무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모든 문화가 상충하지 않고 같이 화해가 되어 더불어서 발전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불교 내에서 부질없는 소모를 안해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도 무슨 무슨 종파가 오십 종파요, 일본도 지금 팔십 종파라 합니다. 더구나 미국은 종교박람회장 같아서 불교도 지금 별의 별 파가 다 들어와 있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서로 각축하고 다투는 마당에서는 우리가 굉장히 주의를 해야 합니다. 다른 쪽을 이해도 하고 살피기도 해야겠지요. 제 입장도 그런 처지에 입각해서 근본선도 우리는 알아야 되겠고 또 스리랑카 사람들이 공부하는 것도 참고를 해야 되고, 일본의 임제종이나, 화두를 참구하는 의미도 알아야 되겠으며, 또는 화두 없이 잠자코 비춰보는 묵조선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간단히 윤곽만 살폈지마는 그런 것을 다 취급을 했습니다.

 

 

 

 

 

염불선/청화스님

 

 

공부가 익어져서 한 고비를 넘어서면 염불이고 화두고 다 초월해버립니다.
그러나 화두나 염불이나 묵조나 모두가 다 한 고비를 넘어서기 전에
습인(習忍)을 익혀서 마음이 딱 자성(自性),
곧 불성(佛性) 한 자리에 머물기 전에 하는 것이지
공부가 익은 사람들한테는 이런 것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땅히 부질없는 시비논쟁은 말아야 합니다.  

염불이라 할 때의 염(念)이란,
사람 사람마다 마음에 나타나는 생각을 염이라 하고,
불(佛)은 사람 사람마다 갖추고 있는 깨달은 근본 성품을 말합니다.
염불 공부란 우리 눈앞에 좋다 궂다 시비분별하는 여러 가지 생각이
우리 본각(本覺)의 참 성품임을 각오(覺悟)하는 것이요,
이것이 곧 참다운 염불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처와 내가 본래 하나임을 재확인하는 공부입니다.
생각은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것이고
부처도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본각진성(本覺眞性)인데
생각 생각에 부처를 여의지 않고서 염(念)하는 것이
참다운 상근인(上根人)의 염불인 것입니다.
이러한 염불은 부처와 더불어서 둘이 아니고, 부처를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부처와 둘이 아니기 때문에 부처를 떠날 수가 없겠지요.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업장 때문에 자꾸만 떠나버리니까
우리가 떠나지 않기 위해서 내가 부처임을 재확인하기 위해서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또는 미운사람이나 고운 사람이나
다 부처란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염불하는 것입니다.
미운 사람도 부처요, 좋아하는 사람도 부처라고 깨달으면
미워도 미운 사람에 집착하지 않고 좋아도 좋아하는 사람에 걸리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한테나 남한테나 이런 도리를 역설하고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  청화큰스님 염불선 법문집-

 

 

 

 

 

남에게 상처주는 말을 잘 하는 사람을 가만히 살펴보면

본인이 불행해서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자라온 성장 배경이나 지금 처한 상황이 불행하니

나오는 말도 아프고 가시 돋쳐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 만나면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니 참 불쌍타" 생각하고 넘어 가십시오

 

타인을 향한 비난은 많은경우

비난하고 있는 사람 자신의 콤플렉스와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비난하는 사람의 불행한 심리 상태가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비난하는 사람이 오히려

애처롭게 보일때도 있습니다

 

  

<혜민스님..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