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10. 10:18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조주(趙州)선사
조주스님은 행각하다가 남전스님 회하에 이르렀다. 조주스님이 인사를 드렸는데 남전스님은 그때 방장실에 누워 있다가 스님이 오는 것을 보고 불쑥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
“서상원(瑞像院)에서 왔습니다.”
“상서로운 모습(瑞像)은 보았느냐?”
“상서로운 모습은 보지 못하였고, 누워있는 여래는 보았습니다.”
“너는 주인이 있는 사미냐, 주인이 없는 사미냐?”
“주인이 있는 사미입니다.”
“누가 너의 주인이냐?”
“겨울이라 아직 날씨가 차갑습니다. 바라옵건데 스님께서는 존체 보존하소서.”
남전스님은 유나(維那)를 불러 말했다.
“이 사미에게 특별한 자리를 주도록 하라.”
『조주록』은 조주종심(趙州從諗·778~897) 스님과 스승 남전보원(南泉普願·748~835) 스님의 첫 만남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당시 조주 스님의 나이 겨우 10세 전후였다고 하니 놀라운 천재성이며 뛰어난 선기(禪氣)가 아닐 수 없다.
존경스럽지 않은 선사란 없다. 그럼에도 조주 스님에게 더욱 각별히 마음이 끌리는 것은 수행자로서 티끌 만한 흠결도 찾아 볼 수 없는 고귀한 삶 때문이다. 빼어난 수행자로, 자애로운 스승으로, 그러면서도 청빈과 검소로 평생을 일관했던 선지식으로, 스님은 1200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지금도 여전히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사람들은 조주 스님을 엄한 스승보다는 할아버지 같은 친근함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 스님을 사람들은 고불(古佛)이라는 별칭으로 상찬했다. 특히 종문(宗門)의 제일 화두인 조주 스님의 무(無)자 화두는 깨달음으로 가는 지름길로 지금도 많은 수행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조주록』에 따르면 스님은 어린 시절 고향 인근의 호통원(扈通院)으로 동진 출가했다. 그러나 출가만으로는 깨달음에 대한 목마름을 다스리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은사를 따라 여러 곳을 전전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그러다 남전스님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깨달음의 법비에 흠뻑 젖을 수 있었다. 스님은 스승이 입적하기까지 40년간 정성을 다해 시봉했다. 요즘말로 보기 드문 효 상좌였던 셈이다.
남전스님이 선지식이라고는 하나 육체가 소멸되지 않은 이상 인간적인 모습들이 훈습처럼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을 터. 그럼에도 40년을 변함없이 정성을 다해 모신 것을 보면 평상심이 삶 자체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스님은 스승의 열반 이후에 60세가 넘은 노구(老軀)를 이끌고 20년간이나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중국 천하를 만행했다.
“열 살 먹은 아이라도 나보다 나은 이에게는 내가 배울 것이요. 100살 먹은 노인이라도 나보다 못한 이는 내가 가르치리라”
행각을 나서면서 스님이 세상에 던진 한마디다. 깨달음을 향한 결기라기보다 오히려 나이도, 지위도, 욕망도 모두 떠난, 텅 빈 허공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스님은 행각하면서 마조, 백장, 약산, 도오, 위산, 임제 스님 등 중국불교의 기라성 같은 선지식을 만났다. 그리고 깨달음의 벼리를 더욱 날카롭게 다듬었다.
조주 스님은 80세가 되어서야 고향에 돌아왔다. 그리고 인근 관음원에서 120세가 되도록 40년간이나 후학들에게 깨달음의 축복을 내렸다. 스님은 짧은 몇 마디 말로 깨달음의 문을 활짝 열어 보인 까닭에 임제스님의 할(喝), 덕산스님이 방(棒)과 비견하여 구순피선(口脣皮禪)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종문의 제일 화두인 무(無)자 화두를 비롯해 ‘뜰 앞의 잣나무’, ‘청주의 베옷’, ‘진주의 큰 무’ 등 번뇌와 망상을 단칼에 베어버리는 기라성 같은 화두들이 모두 조주 스님에게서 나왔다.
기록에 따르면 조주 스님은 20세 무렵 이미 깨달음을 얻었다고 알려졌다. 남전 스님에게 도를 물었던 스님은 ‘평상의 마음이 도’라는 말에 확연하게 깨달았으며 마음은 달처럼 환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오도송을 읊조리며 이후로 번뇌 망상을 쉬었다.
“봄에는 꽃들이 피고/가을에는 밝은 달빛/여름에는 산들바람 불고/겨울에는 흰 눈/쓸데없는 생각만 마음에 두지 않는다면/이것이 바로 좋은 시절이라네.” (春有百花秋有月 夏有凉風冬有雪 若無閑事掛心頭 便是人間好時節)
그러나 스님은 깨달음을 얻은 이후 40년 동안 한곳에서 스승을 모셨고 다시 20년 동안 두루 천하를 주유했다. 보임(保任)의 과정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장구하고 치열했던 수행의 여정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스님은 당신의 법력으로 세상의 모든 번뇌가 한꺼번에 베어지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학인이 와서 조주 스님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그러자 조주 스님은 관음전 밖 나무를 보며 대답했다. “뜰 앞의 잣나무니라.” 그러자 학인은 다시 물었다. “경계를 가지고 학인을 가르치지 마십시오.” 그러자 스님은 대답했다. “나는 경계를 가지고 학인들을 가르치지 않는다.” 이에 학인이 재차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그러자 조주 스님은 다시 대답했다.
“뜰 앞의 잣나무니라.”
조주스님이 주석하고 계시던 절에 딸린 조그만 암자에 학인스님이 계시었는데 이 학인스님도 평상시 공부하면서도 항상 음심 마구니가 공부에 가장 큰 방해가 되었답니다. 어느 날, 동네에서 올라온 개 두마리가 법당 앞마당에서 헐떡거리며 교접하는 것을 보고 그 학인스님은 큰 분심을 일으키며, 부처님께서는 '모든 생물에 다 불성이 있다'했거늘 지금 법당 앞에서 저 지꺼리를 하는 저 개한테도 '과연 불성이 있는 것인가?'하고 의심을 하고 있던 차에 며칠 지나 초하루 불공을 드리려오는 많은 보살들 앞에서 그 개들에 다시 와서 또 교접을 하는 겁니다. 자기 마음을 들켜버린 것 같기도 하고 민망하여 그 길로 큰 절 조주스님께 쫒아 올라가 묻기를,
"스님,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니,
조주스님께서 "없다(無)!"
이 말 한마디에 학인스님은 홀연히 깨달았다.
“어떤 것이 조사의 관문인가? 조주의 무(無)자 공안 이것이야말로 선종의 제일 관문이다. 360개 뼈마디와 8만4000여 개 털구멍으로, 온 몸으로 의단을 일으켜 밤낮으로 ‘무(無)’자를 참구하라. “어째서 무라고 했는가?” “어째서?”, “어째서 무인가?” 오로지 한 생각 “어째서 무라 했는가?”라고 의심하라. 그렇다 갑자기 뭉쳐졌던 의심덩어리가 대폭발을 일으키면 하늘이 놀라고 땅이 진동할 것이다. 이것은 마치 관우 장군의 대도를 빼앗아 손에 넣은 것과 같아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는 것과 같고, 생사의 기로에 섰을지라도 자유자재를 터득하여, 어디서 어떻게 태어나든지 마음대로 행하여도 해탈무애(解脫無碍)한 참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무(無)자 화두를 대하는 마음가짐을 무문혜개 스님은 이렇게 비장하게 전하고 있다. 일본사람들은 나라가 바다 속에 잠기더라도 『임제록』 한 권만 건지면 더할 것이 없다고 했다지만 우리에게는 아마도 조주 스님의 무(無)자 화두가 아닐까 싶다.
※ 행복은 밖에서 오지 않는다 ※
- 법정스님 -
누구나 바라는
그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행복은 밖에서 오지 않는다.
행복은 우리들 마음속에서 우러난다.
오늘 내가 겪은 불행이나 불운을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남을 원망하는 그 마음 자체가 곧 불행이다.
행복은 누가 만들어서
갖다주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만들어간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세상은
우리 생각과 행위가 만들어낸 결과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천당도 만들고 지옥도 만든다는 것이다.
사람은 순간순간
그가 지난 생각대로 되어간다.
이것이 업(카르마)의 흐름이요 그 법칙이다.
사람에게는
그 자신만이 지니고 있는 특성이 있다.
그것은 우주가 그에게 준 선물이며
그 자신의 보물이다.
그 특성을 마음껏 발휘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긍정적인 사고가 받쳐주어야 한다.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일마다 잘 풀린다.
그러나 매사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될 일도 안 되고 일마다 꼬인다.
이 세상은 공평무사하게
누구에게나 똑같이 하루 스물네 시간이 주어져 있다.
그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인생은 달라진다.
이 귀중한 우주의 선물을
우리는 순간순간 어떻게 쓰고 있는가
긍정적으로 쓰고 있는가
부정적으로 쓰고 있는가
밝은 마음으로 쓰고 있는지
어두운 마음으로 쓰고 있는지 수시로 물어야한다.
우리가 지닌 생각이 우리 집안을 만들고
이 세상을 만들어간다 명심할 일이다.
-옮 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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