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인가?

2012. 3. 24. 21:4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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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인가?

 

선(禪)은 자신의 참모습을 아는 일이다. '나는 무엇인가?'
이것이 매우 중요한 물음이다.

인생은 빈손으로 와 빈손으로 가는 것.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사는 것은 일어나는 한 조각 구름 같고,
죽는 것은 흩어지는 한 조각 구름 같다.
떠 있는 구름은 본래 없는 것.
살고 죽고, 오며 가는 것도 그런 것.
그러나 늘 맑은 대로 머무르는 한 물건이 있다.
그것은 홀로 항상 청정하여 생사(生死)에 기대지 않는다.
그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항상 청정하여 순수하고 깨끗한 한 물건인가?

만일 여러분이 그것을 깨닫는다면 생사에 걸림이 없이 자유로워진다.

그러면 어떻게 생사에 걸림 없는 자유를 깨달아 얻을 수 있을까?

우선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
목표가 분명하면 생활이 밝아진다. "왜, 선(禪)을 수행하는가?", "왜 날마다 먹는가?"

그것을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 모두 놓아 버려라.

그 다음엔 우리의 견해나 조건, 상황을 모두 놓아 버리고 다만 행할 뿐이다.

거기에는 주인과 객, 안과 밖이 따로 없다. 안과 밖은 이미 하나가 되고

너와 나의 목표, 행동이 같게 된다. 이것은 위대한 보살의 길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놓아 버릴 때 우리는 자신을 온전히 믿을 수 있다.

그러면 마음이 하늘처럼 깨끗해서 거울처럼 맑다. 붉은 것은 붉게,

흰 것은 희게 보인다. 배고픈 자에게 음식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물을 준다.

모든 것이 이 맑은 거울에 비쳐서 보인다.

그러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하늘은 푸르고 나무는 파랗다. 소금은 짜고, 설탕은 달다. 개는 '멍멍' 짖는다.

바로 이와 같이 모든 것이 그대로 진리이고 우리 또한 진리이다.

그러면 진리가 어떻게 바르게 작용하여 우리의 삶을 올바로 이끌어갈 것인가?

남이 배고플 때 무엇을 할 것인가? 부처님을 만나면 무엇을 할 것인가?

담뱃재를 어디에 털 것인가? 모든 사람이 그것을 다 알면서도 실행하지 못한다.

 우리가 모든 것을 온전히 실천하면 우리의 평상심은 올바른 삶이 된다.

예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신 것도 바로 그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아는 게 너무 많다. 그러나 그 안다고 하는 것은 삶에 전혀

움을 주지 못한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는데, 만약 우리가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무엇인가? 아무리 특별한 경험이 있고 선(禪)에 대한 이해가

깊다 해도 순수하고 깨끗한 그 하나를 얻지 못한다면 특별한 경험과 선(禪)을

이해하는 것은 여러분의 수행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선(禪)수행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모를 뿐'을 실천하는 것이다.

옛날 조주(趙州)선사가 남전선사에게 물었다.

"도가 무엇입니까?"
"평상심이니라."
"그러면 그것을 계속 간직하려고 애써야 합니까?"
"애쓰면 그르친다."
"애쓰지 않고 어떻게 도를 알겠습니까?"
"도는 알고 모르는 것과 상관이 없다. 안다고 하는 것(知)은 망상이고,

모른다고 하는 것은 무기(無記)이다. 의심 없이 도달하는 도는 허공과

같이 맑고 넓은데 어찌 옳다 그르다 시비를 가릴 수 있겠느냐?"


이 말을 들은 조주선사는 크게 깨달았다. 조주선사는 무엇을 깨달아 얻었나?
선(禪)수행자들은 자주 '무엇을 지니려'한다. 하지만 그것이 큰 잘못이다.

앞서 말한 대로 안다고 하는 것은 망상이다. 아는 것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올바른 수행은 그 아는 것을 잘 소화하여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 지혜로워지는

것이다. 그것이 참다운 평상심이다.

그러면 왜 공안 365개를 만들었을까? 세상 사람이 너무 많이 알기 때문에

우리는 지식 치료제를 써야 한다. 조주(趙州)는 무엇을 얻었나?

입을 열어 말하면 벌써 실수한 것이다. 그러나 생각하지 않으면, 순수하고 깨끗한

답은 항상 앞에 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참 '나'가 진리를 올바르게 수용하고 중생을 구제할 것인가?

도(道)는 위대한 어머니
비었어도 끊임없이
온 세상에 생명을 준다.

도(道)는 항상 우리 안에 있어서
우리는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한다.

 

도(道)는 어떻게 끝없는 세상에 생명을 주는가?

이것도 같은 관점이며 같은 문제이다.
이 글에서는 불교적인 공안, 기독교적인 공안, 도교적인 공안, 선(禪)적인 공안이

실려 있다. 오래된 공안도 있고 새로운 공안도 있지만, 모두 아름다운 이야기로

우리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그 흥미로운 공안 이야기에 집착하거나

여러분의 견해에 매달린다면 그 공안의 참뜻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견해나 조건, 상황을 모두 놓아 버려야 한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은 하늘같이 맑아져서, 어떤 공안에 대해서도 저절로 정답이

나온다. 그것이 지혜(예지)이다.
여러분이 공안을 받았을 때 설사 그 공안의 뜻을 알 수 없다해도 걱정하지 말라.

그 공안에 집착하지도 말고, 또 그 공안을 이해하려고 애쓰지도 말라.

오직 '모를 뿐'인 마음을 지키며 천 년, 만 년이 지나도록 쉬지 말고 정진하여야 한다.

그러면 마침내 도(道)와 진리, 인생을 깨달아 매 찰나 찰나마다 올바른 상황에서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진리를 올바르게 수용하게 된다.

이것이 위대한 사랑, 위대한 자비, 위대한 보살의 길이다.

문자를 세우지 아니하고
교(敎)밖의 것을 따로 전하니,
똑바로 마음을 가리켜
본성을 바로 보아 부처가 된다.

 

만일 이 문에 들어서거든, 일체 생각을 내지 마라. 부처님께서는 모든 법(一切法)은

모든 마음(一切心)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다.

 만일 모든 마음이 없다면 모든 법이 무슨 소용인가?
아무 것도 만들지 않고 찰나 찰나 '오직 행할 뿐'으로 날마다 오직 한마음으로

정진해서 365공안을 성취하고 크게 깨달아, 고통받는 중생을 구하기 바란다.

 

- 모셔온 글 (숭산스님 법문으로 사료됩니다)

 

 

 

 

 

너구리 새끼 / 벽암록 역해에서

 

 

어느날 원효가 대안대사를 만났다

어미 잃은 몇마리 너구리를 안고 있었다.

대안 대사는 마을에 돌아가 '젖을 얻어올 테니 

새끼를 보살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얼마 안돼 새끼 한마리가 굶주려 죽었다.

원효는 너구리의 극락왕생을 위하여 아미타경을 읽어주고 있는데,

대안 대사가 돌아와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이 놈의 영혼이라도 왕생하라고 아미타경을 읽고 있는 중입니다"

"너구리가 그 경을 알아 듣겠소?"

"너구리가 알아들을 경이 있습니까?"

대안대사는 너구리에게 얼른 젖을 먹이며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너구리가 알아듣는 아미타경입니다"

 

- 조오현 (스님)

 

 

 

 

자신의 심지를 굳건히 하라

 

오늘부터가 아니라 먼 옛날부터

사람들은 헐고 뜯나니

말이 많아도 비방을 받고

말이 적어도 비방을 받나니 . .

비방받지 않는 사람 세상에 없다

 

비방만 받는 사람 칭찬만 받는 사람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칭찬도 비방도 속절없나니

모두가 제 이름과 이익을 위한 것 뿐 . .

 

- 법구경에서

 

 

예배의 참뜻

 

 

먼 지방에 사는 박칼리라는 비구가 중병에 걸려 죽게 되자

그는 부처님을 뵙고 예배드리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라며

매일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말을 들은 부처님이 직접 찾아갔습니다.

부처님은 여러가지 위로의 말을 들려주며 물었습니다.

"네가 살아온 길에 후회되거나 원통한 일은 없느냐?"

"죽기 전에 부처님을 찾아뵙고 예배드리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이렇게 일어설 수도 없는 것이 원통하고 후회되옵니다."

이 말에 부처님은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박칼리야. 이 썩어질 몸뚱이를 보고 예배드려서 어쩌자는 것이냐!

나를 보거든 몸뚱이가 아니라 진리를 보아라

진리를 보는 것이 나를 보는 것이니라"

 

- 김원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