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의 올바른 생활

2012. 3. 24. 23:2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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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의 올바른 생활

1) 보시(布施)
보시(布施)는 재가 신도들이 절의 불사를 위해 자신의 돈이나 물품을 바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본래의 뜻은 절의 불사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것을 어떤 조건이나 바람이 없이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보시법에는 보시의 종류에 따라 부처님의 법을 원하는 자에게 부처님의 법을 설하는 것[法布施],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물을 주는 것[財布施], 그리고 공포에 휩싸여 있는 중생들에게 두려운 마음을 없애주는 것[無畏施]으로 나뉜다. 또한 그 과보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보시라는 선업을 통해 내생에 그 복덕을 누리는 것과 번뇌를 완전히 끊고 윤회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깨달음을 얻는 것이 있다.

한편 보시는 대승불교의 수행 덕목인 육바라밀 중 첫 번째 덕목이기도 하다. 따라서 여기서는 내생에 복덕을 누리는 보시에 대해서만 생각해보기로 하자.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기의 것을 남에게 조건 없이 주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주고서도 주었다는 그 자체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재물을 다른 사람에게 보시하면서 스스로가 보시를 했다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는 경우에는 인과의 법칙에 의하여 반드시 그 보시 행위의 과보로써 내생에 그에 상당하는 복덕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비록 그 보시가 너무나도 커 내생에 천상에 태어난다 할지라도 그 복덕이 다 하면 또 다시 윤회의 세계로 떨어지고 만다. 더구나 만일 우리가 보시를 할 때 받는 사람이 부담을 느낀다면 그것이 반드시 선업을 짓는 행위만은 아니다.

그러므로 보시는 자신의 마음공부가 얼마만큼 되었는가를 가늠해 보는 좋은 척도라고 할 수 있다. 훌륭한 테니스 선수가 완벽한 서브를 넣기 위해 매일같이 연습을 하는 것처럼 우리들도 조건 없이, 그리고 바람 없이 주는 완전한 보시를 하기 위해 꾸준히 보시 수행을 해야 할 것이다.

2) 계율(戒律)
부처님의 가르침에 관한 책들을 삼장(三臧), 즉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이라 한다. 이 중에서 율장은 출가자나 재가자들이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할 여러 가지 규칙들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지켜야 할 규칙들이란 부처님께서 우리들의 몸과 마음을 보다 건강하고 건전하게 유지하여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다. 몸과 마음의 자유를 구속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불교에 처음 입문하면 재가 불자의 경우 기본 교육을 받은 후에 삼귀의계와 오계를 받게 되는데, 이 계율만 잘 지켜도 호법신장(護法神將)들이 우리들의 몸과 마음의 건강을 지켜준다고 한다.

이러한 계율에는 출가 스님을 위한 구족계(具足戒 : 비구▷250계, 비구니▷348계)와 재가 불자를 위한 5계(五戒), 즉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음주 등이 있다.

여기서 첫 번째에서 네 번째까지의 계율들은 어기는 그 자체가 악한 행동이라는 점에서 특히 중요하다. 그리고 다섯 번째의 계는 술 마시는 행위 그 자체는 나쁜 일이라 할 수는 없으나 과음을 하거나 중독이 되면 자신의 몸을 해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으므로 지켜야 한다.

또한 매달 음력 8, 14, 15, 23, 29, 30일의 6일을 6재일(六齋日)이라 하는데 이 날은 사천왕이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우리의 선과 악을 감찰하는 날이고 우리가 방심하는 사이 악귀가 잘 붙는 날이다. 이러한 날에는 몸을 조심하고 마음을 깨끗이 하기 위해 다음의 팔관재계(八關齋戒)를 지켜야 한다.

첫째, 살생하지 말라.
둘째, 도둑질하지 말라.
셋째, 음행하지 말라.
넷째, 거짓말하지 말라.
다섯째, 음주하지 말라.
여섯째, 몸에 패물을 달거나 화장하지 말며 노래하고 춤추지 말라.
일곱째, 높고 넓은 큰 평상에 앉지 말라.
여덟째, 제때가 아니면 먹지 말라.

팔관재계는 위의 재가 불자가 지켜야 할 오계에 몸치장을 화려하게 하거나 화장을 진하게 하여 밖에 놀러 다니지 말 것, 높고 넓고 잘 꾸며 놓은 곳에 앉지 말 것, 그리고 오전에 한 끼만 먹을 것 등이다. 나아가서 재가 불자가 지켜야 할 계에는 십선계(十善戒)가 있는데, 이것은 오계와 달리 수계 의식을 통해 받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앞에서 스스로 참회와 맹세를 통해 받을 수 있는 계이다. 이는 『천수경』 십악참회의 열 가지 악을 짓지 않겠다는 맹세를 말한다.

3) 참회(懺悔)
우리는 생활속에서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많은 죄악과 허물을 짓게 된다. 이러한 죄악과 허물은 대부분 세속적 욕망과 이기심에 의해 생겨난다. 이러한 잘못을 뉘우치고 정화하지 않는다면 불자의 삶은 결코 진리에 다가설 수 없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참회할 것인가? 참된 참회는 자기 성품 속에서 죄의 반연을 없애는 것이다. 죄의 반연이란 삼독의 나쁜 인연을 가리킨다. 만약 당장에 본래의 청정한 법신을 찾고자 한다면 바로 이 삼독의 악연을 마음 속에서 씻어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삼독은 어떻게 씻어낼 것인가? 『육조단경』에서 육조 혜능 스님은 참회에 대해 이렇게 설하고 있다.

선지식이여, 이것이 무상참회(無上懺悔)이니라. 참(懺)이란 무엇인가? 참이란 지나간 허물을 뉘우침이니, 지금까지 지은 모든 죄를 뉘우쳐서 영원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회(悔)란 무엇인가? 회란 이후에 짓기 쉬운 허물을 조심하여 다음부터 있을 모든 죄를 미리 깨닫고 영원히 끊어서 다시는 짓지 않도록 하는 것이니 이것을 합하여 참회라 하는 것이니라. 범부들은 어리석어서 지나간 허물을 뉘우칠 줄 모르고 앞으로 있을 허물은 조심할 줄 모르므로, 지나간 죄도 없어지지 않고 새로운 죄가 잇달아 일어나니 이러고야 어찌 참회라고 할 수 있으랴?
『육조단경』 「참회」

이처럼 참회는 과거의 잘못을 뉘우쳐 다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삼독의 잘못을 알고 다시는 그러한 잘못을 짓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마음에서 삼독을 없애나가는 것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탐려扁치 삼독을 셋으로 나누어서 한 가지씩 씻어내면 된다. 그 요령은 108배를 하되, 부처님이 실제로 앞에 계시다고 가정하고, 한 번의 절을 할 때마다 한 가지씩 참회를 해나가는 것이다.

우선 탐욕과 관련된 상념들을 한 가지씩 떠올려서 충분히 확인하고 스스로의 성품에 되뇌인다. “이러이러한 욕심을 내었습니다. 잘못되었습니다. 다시는 그러한 잘못을 짓지 않겠습니다.”하고 마음 속으로 다짐해 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욕심들을 참회해 나가되,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과거로 향해 거슬러 올라가면서 진행해 나간다. 그렇게 하다보면 보다 근원적인 욕심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어쨌든 더 이상 기억이 나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 나간다.

다음은 성냄에 관해서 참회한다. “이러이러하게 화를 내었습니다. 잘못되었습니다. 다시는 그러한 잘못을 짓지 않겠습니다.”하고 반성해 나간다. 시기질투하고 남을 흉보는 것도 일종의 성냄이다. 역시 참회해야 한다. 여기에서 명심해야 할 것은 무조건적인 참회를 해야 한다는 점이다. 조건부 참회가 되어서는 의미가 없다. 원인이야 어쨌든 간에 자신의 성품 가운데에 소용돌이를 일으켰다는 것은 무언가 자취를 남긴 것이므로, 언젠가는 그것을 확인하여 없애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조건부 참회는 다만 자신의 그릇에서 맴도는 것이므로 인식의 변화를 기대할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어리석음에 관해서 참회한다. 어리석음 가운데 가장 어리석은 것은 스스로 잘났다는 생각이다.

자기가 한껏 못났다고 생각해야 참회가 된다. 우리의 본성이야 잘나고 못나고를 초월해 있는 것이지만, 다만 분별의식이 못났다는 것이다. 꾀죄죄한 나를 잘났다고 착각하여 남과 비교해 잘잘못을 따지는 것, 이것이 정말 못난 것이다. 또한 인과를 믿지 않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다. 베푼 만큼 돌아오고, 지은 만큼 받는 것이다. 이를 확신하지 않는 까닭에, 은덕은 조금 베풀고서 대가를 많이 받지 못해서 안달하고, 허물은 많이 짓고서 과보는 조금 받으려 전전긍긍한다. 이처럼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못하기에, 자신을 흠뻑 사랑할 수도 없는 것이다.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흠뻑 사랑할 수 있을 때 다른 모든 존재를 한없이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참회를 통해 얻어지는 귀중한 결실이다. 완전한 존재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나를 사랑하려 한다면 인생을 낭비하고 말뿐이다. 이렇게 해서 참다운 자기 사랑에 점차 눈이 떠가면, 남의 허물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 스스로에게 못마땅한 점이 많은 사람일수록 남의 못마땅함을 잘 끄집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의 허물이 자주 눈에 띄면, 얼른 내 마음을 바로 잡을 일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108감사를 하도록 한다. 그것은 108배를 하거나, 108염주를 돌리면서 낱낱이 감사의 생각을 하는 것이다. 주위에서 감사할 일을 찾아내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나중에는 심지어 자신에 대해 불평불만인 사항까지도 감사한 마음이 들 수 있을 때까지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 이와 같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굉장한 자기긍정을 가져오며,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는 강력한 출발점이 된다.

4) 발원(發願)
많은 사람들이 불교에 관하여 갖는 의문 가운데 하나는, ‘불교에서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욕심이 없이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그리고 누구나 한 번쯤은 가져봄직한 의문이다. 치열한 생존경쟁의 험난한 세상을 살아나가면서 상대방을 짓누르기보다는 무조건 양보하고 욕심을 내지 않으려 하다가는, 얼마 안가 도태되고 말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다. 심지어 일부 불자들이 무기력해 보이며, 세상에 대하여 염세적이고 피동적인 자세를 견지하는 것도 이러한 불교관에 근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불교 특히 대승불교에서는 발원(發願)을 수행의 첫걸음으로 삼고 있음에 유의하여야 한다. 원(願)을 발(發)한다는 것, 이것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욕심과는 다르다.

욕심과 발원의 차이는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로, 욕심은 다분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바람이지만, 발원은 공통적 바람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것은 오직 나만을 위한 원이 아니라 우리 모두, 인류 전체, 나아가서는 일체 중생에 대한 기원을 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와 남은 구분되지 않는다. 남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며, 남이 잘되는 것이 곧 내가 잘되는 것이다. 둘째로, 욕심은 본능적인 것이지만, 발원은 능동적인 것이다. 잘 먹고 잘 살고, 부와 명예를 바라는 것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타고난 것이다. 하지만 발원은 애당초 없는 것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본래 꿈에도 남에게 주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일부러 원을 발하여 자꾸 베푸는 마음을 연습함으로써, 아상(我相)의 소멸에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로, 욕심은 결과를 중시하지만 발원은 과정 그 자체를 중시한다. 한마디로 발원은 결과에 대한 집착이 없는 것이다. 욕심은 미래에 중점이 두어져 있기 때문에, 그러한 욕망 달성을 위해서 때로는 현재를 희생할 것을 강요한다. 하지만 발원은 현재에 중점이 두어져 있다. 물론 스스로가 세운 원을 달성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기는 하지만, 결과에 대한 집착이 없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노력하는 자체가 즐거운 것이다.

이상과 같은 의미에서 보면, 발원은 참다운 자기전환의 시작이라 말할 수 있다. 업생(業生)이 아니라 원생(願生)으로 나아가는 첫 단추인 것이다. 업생이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과거에 지은 바 업에 이끌려 살다 가는 것이다. 원생이란 스스로의 삶을 갈무리해 나가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방향을 설정해서 과거의 업을 벗어나 새로운 창조적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나를 창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생을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발원이 필요하다. 걸림만 없다면 무엇이든 마음에 그리는 대로 되어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마음 속 어딘가에 걸림이 있기 때문에, 즉 ‘못한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든지 의욕이나 선입관을 가지고 할 것이 아니라, 원을 세워 해야 하는 것이다. 특히 초심자에게는 반드시 발원이 필요하다. 발원이란 ‘탐려扁치’라는 속성에너지의 방향전환이다. 그것은 욕심을 완전히 부정하여 억제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욕심을 일단 인정하되 다만 방향을 바꾸어 도심(道心)으로 인도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탐려扁치의 대전환이다. 탐심을 돌이켜 대신심(大信心)으로, 진심을 돌이켜 대분심(大憤心)으로, 치심을 돌이켜 대의심(大疑心)으로 만들어 수행의 방해물을 오히려 수행의 자량으로 삼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번뇌가 곧 보리라고 하는 대승불교의 진수이다. 돌은 그저 돌일 뿐이다. 그것에 걸려 넘어지면 걸림돌이요, 딛고 넘어가면 디딤돌이 된다.

이것은 존재의 속성인 탐려扁치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여 이에 역류하고자 인위적 노력을 가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에너지, 즉 끊임없는 향상성들을 오히려 도를 깨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하는 것이며, 이것이 발원의 참된 가치이다. 그러면 실제 발원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우선 발원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것으로 사홍서원이 있다.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衆生無邊 誓願度).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煩惱無盡 誓願斷).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法門無量 誓願學).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佛道無上 誓願成).

이 사홍서원은 대승보살들이 보리성취[上求菩提]와 중생구제[下化衆生]를 위한 보편적인 실천덕목으로 제시된 것이다. 보살이 성불을 이루기 위해서는 3아승기겁의 수행이 필요한데 그 동안에 모든 자리이타(自利利他)의 행을 완성해야 한다. 따라서 그 때뿐인 결심으로는 이것을 달성할 수 없다. 그래서 보리심을 일으킨 보살은 어떠한 곤란에도 물러서지 않는 견고한 결의를 일으켜야 한다. 이 결의가 바로 서원이다. 그리고 이타행을 통해 무량 무수의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 제도하면서도 누구를 제도한다거나 누가 제도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그래서 아무런 공덕도 구하지 않는 것이 바로 보살의 서원이다.

따라서 이 보살의 서원은 어떤 공격도 물리칠 수 있는 갑옷을 입은 것과 같이 견고하다 하여 ‘큰 서원(弘誓)의 갑옷(大鎧)을 입는다[僧那僧涅, 大誓莊嚴]’고 표현한다. 이러한 서원은 발원이 바로 업에 이끌려 사는 삶, 남의 짐이 되는 삶에서 스스로 창조해 가는 삶, 남의 짐을 덜어주는 삶으로의 전환이라는 것을 잘 표현해 준다. 결국 사홍서원이란 자신의 업력을 이겨내는 원력을 행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을 낮추고 일체의 중생을 부처님과 같이 공경하여야 한다. 밖의 중생을 공경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마음 속의 중생도 공경하여야 한다. 여기에서 공경한다는 것은 인정한다는 것이다. 인정하고 관심을 보여줌으로써 모두 함께 이웃이 되는 것이다.

서원은 클수록 좋겠지만, 가급적이면 자신의 현재 상황과 부합하는 것으로 하는 것도 괜찮다. 예컨대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이 간절할 경우에는 ‘일체중생이 모두 다 깨달음을 얻어지이다’하고, 병고에서 벗어나고자 하거든 ‘일체중생이 모두 다 병고에서 벗어나지이다’ 하며, 마음 편안함을 성취하고자 하거든 ‘일체중생이 모두 다 마음이 편안하여지이다’ 하는 식으로 발원해 나가는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내가 어서 깨쳐서 중생들을 제도하겠습니다’ 해야 할 것 같지만, 여기에는 나라는 생각과 남이라는 생각, 그리고 제도한다는 생각과 제도된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깨친 이의 특징이 이러한 네 가지 상(相)의 소멸이라고 할진대, 내가 수행해서 내가 깨치고 제도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오히려 네 가지 상이 증장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혹은 특별한 바람이 없는 경우에는 다음과 같이 하는 것도 좋다.

‘모든 사람들이 몸과 마음이 밝고 건강해져서 재앙은 소멸하고 소원은 성취해서 부처님 시봉 잘 하길 발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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