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세계관

2012. 3. 24. 22:2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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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세계관

불교에서는 세계를 관계의 존재라고 한다. 서로 의지하고 돕는 관계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세계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기본 세계관은 연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그물처럼 이루어져 있는 것이 세계요 삶인 만큼 따로따로 나뉘어져 있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삶의 문제를 나누어 사고하는 것은 불교적으로 옳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세계관이라는 제목으로 문제를 다루는 까닭이 무엇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그렇게 설명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익숙해져 있으므로 이해하는 데 도움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불가피하게 세계관이라는 이름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언제나 총체적 관계성의 의미로 설명되고 있음을 놓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진실로 열의를 기울여 사유하는 성자에게 법의 참된 모습이 밝혀질 때 일체의 모든 의혹 사라졌으니, 연기의 도리를 알았으므로…. 『자설경(自說經)』

고요히 명상에 잠긴 수행자에게 진실의 법칙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 순간 모든 의혹이 사라졌으니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의 원인을 알아낸 까닭이다. 『마하박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직후 자신의 감흥을 읊은 내용이다. 깨달음을 통해 밝혀낸 진리가 연기법임이 분명하게 잘 드러나 있다. 보통 ‘존재의 실상을 깨달았다.’ 또는 ‘진실의 법칙을 밝혀냈다.’고 한다. 수행을 통해 밝혀낸 ‘존재의 실상’ 또는 ‘진실의 법칙’이 연기법인 것이다. 부처님이 깨달은 법 또는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연기법이라고 한다는 의미이다. 부처님께서 연기법을 영원한 진리라고 했다. 여래의 출현 여부에 관계없이 본래부터 존재하는 영원한 법칙이라고 했다. 부처님 가르침이 팔만 사천가지라고 하지만 그 어떤 내용도 연기법을 벗어난 가르침은 없다. 연기법은 불교의 전부이다. 연기법을 벗어나면 그것은 이미 불교가 아니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영원한 법칙으로서의 연기법, 불교의 기본으로서의 연기법, 불교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연기법은 어떤 내용인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잡아함경』

일반적으로 연기법의 공식처럼 평가되는 경구이다. 이 세상 모든 존재(세계)가 서로 의지하고 서로 돕는 총체적 관계에 의해 생성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하는 것을 뜻한다. 불교의 핵심인 연기법의 세계관을 가장 깊고 풍부하게 다루는 경전이 『화엄경』이다. 특히 심오하고 불가사의한 연기법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멋진 비유가 인드라망 즉 제석천 궁전의 그물 비유이다. 인드라망 비유만큼 중중무진(重重無盡)한 연기법의 세계관을 실감나게 잘 드러낸 비유는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를 화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제석천 궁전에 투명한 구슬그물(인드라망)이 드리워져 있다. 그물코마다 박힌 투명구슬에는 우주삼라만상의 영상이 찬란하게 투영된다. 삼라만상이 투영된 구슬들은 서로서로 다른 구슬에 투영된다. 이 구슬은 저 구슬에, 저 구슬은 이 구슬에, 작은 구슬은 큰 구슬에, 큰 구슬은 작은 구슬에 투영된다. 동쪽 구슬은 서쪽 구슬에, 서쪽 구슬은 동쪽 구슬에, 남쪽 구슬은 북쪽 구슬에, 북쪽 구슬은 남쪽 구슬에 투영된다. 너의 구슬은 나의 구슬에, 나의 구슬은 너의 구슬에, 정신의 구슬은 물질의 구슬에, 물질의 구슬은 정신의 구슬에 투영된다. 인간의 구슬은 자연의 구슬에, 자연의 구슬은 인간의 구슬에, 시간의 구슬은 공간의 구슬에, 공간의 구슬은 시간의 구슬에 투영된다. 동시에 겹겹으로 서로서로 투영되고 서로서로 투영을 받아들인다. 총체적으로 중중무진하게 투영이 이루어진다. 『화엄경』



연기법의 세계관으로 보면 이 세상 어느 것 한 가지도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은 없다. 시간과 공간, 인간과 자연, 정신과 물질, 중생과 부처, 신과 인간, 너와 나, 과거와 현재, 미래 등 모든 이 중중무진의 관계 속에 성립 전개되고 있다. 영원에서 영원 너머에 이르기까지 중중무진(重重無盡)한 총체적 관계 속에 끊임없이 생성변화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주요, 우리들의 삶인 것이다.

 

 
연기법은 불교 가르침과 인간관의 핵심
-사성제는 연기를 깨달아가는 개념적 틀

 

우리는 지금껏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론(교학)과 실천(수행)의 두 측면에서 대충 살펴보았다. 이제부터는 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이해를 위해 다소 색다른 관점에서 들여다보고자 한다. 물론 앞으로 소개될 가르침들은 이미 앞에서 다루었던 내용들도 있을 것이고, 또 전혀 다루지 않은 완전히 새로운 개념들도 있을 것이다.


흔히 팔만사천 법문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마음 심(心)자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익히 들어왔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에는 마음 심(心)자에 못지않게 중요한 핵심단어가 있으니 그게 연기(緣起)다. 마음이 내적이고 주관적인 느낌이라면 연기는 외적이고 객관적인 느낌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부처님께서는 고타마 시타르타 태자로 계시던 어느 날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는 인간의 모습을 보시고 고(苦)를 통찰하셨다. 그리고는 어떻게 하면 우리 인간들이 그러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를 화두로 삼게 되었고, 그 후 출가, 수도하시어서 깨달으신 것이 연기법인 것이다.


연기법은 분명 있는 그대로의 진리임에 틀림없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붓다가 깨달은 인간관이고 세계관이기도 하다. 즉 우리 인간과 세계, 우주는 연기적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세계, 자연, 우주가 모두 연기적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독립적 존재, 관계가 아니라 상호의존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분리될 수 없는 유기적 관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기적 관계에 부합하는 존재방식, 삶의 태도, 관계방식은 자연이고, 선(善)이고, 웰빙이고, 깨달음이고, 열반이다. 반대로 연기적 관계에 위배되는 존재방식, 삶의 태도, 가치, 관계는 인위적이고, 불선(不善)이고, 탐진치 삼독이고, 고통이다.


누구든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연기를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연기를 깨닫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45년간의 세월동안 우리들로 하여금 오직 연기의 도리를 이해하고 깨달아서 실천할 수 있도록 가르침을 펴셨다. 그 가르침을 듣고(聞), 사유해서(思), 일상의 삶과 관계 속에서 실천하도록(修) 노력하는 것을 우리는 깨달음의 길, 수행의 길이라고 부른다.


그러한 깨달음의 길, 수행의 길의 가장 단순한 형태, 기본적인 모델 가운데 하나가 사성제, 즉 4가지 거룩한 진리다. 첫 번째 진리는 연기적 존재방식, 태도, 가치에 위배되는 삶, 인식, 관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고통이 존재한다는 가르침이다(고성제). 두 번째 진리는 연기적 존재방식, 태도, 가치에 위배되는 삶, 인식, 관계를 유발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 자신이 상대적, 상호의존적인 존재가 아니라 독립적이고 절대적인 존재라는 사실에 집착하기 때문이라는 가르침이다(집성제). 세 번째 진리는 반연기적 태도, 방식, 가치 등을 제거하는 방식이 있다는 가르침이다(멸성제). 네 번째는 반연기적 태도, 방식, 가치 등을 제거함으로서 연기적 삶, 머무름, 관계를 실현하는 진리의 길을 완성해가는 가르침이다(도성제).


어떤 의미에서 사성제는 연기를 깨달아가는 개념적 틀의 성격이 강하다. 개인적 경험이긴 하지만 실제로 이를 수행에 적용시켜서 활용해 보면, 자칫 대상을 경험함에 있어서 치우치고 한정된 인과관계에 고정되어 분석적인 성향을 띠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서광 스님
그 결과 경험의 대상을 향한 우리의 의식이 역동적이고, 확산되기 보다는 오히려 경계를 한정시키고 단절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다음 호에서는 연기를 통찰하고, 연기적 삶의 태도와 가치를 내재화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실질적인 방법이 무엇인지 탐색해 보고자 한다.
 

서광 스님 동국대 겸임교수

 

 

 

 

 

 

 

 

회심 
                      / 법정스님                          

남을 미워하면

저쪽이 미워지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미워진다.
부정적인 감정이나

미운 생각을 지니고 살아가면,
그 피해자는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하루하루를 그렇게 살아가면
내 삶 자체가 얼룩지고 만다.
인간관계를 통해 우리는
삶을 배우고 나 자신을 닦는다.

회심回心,
곧 마음을 돌이키는 일로써
내 삶의 의미를 심화시켜야 한다.
맺힌 것은 언젠가 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번 생에 풀리지 않으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다.
미워하는 것도 내 마음이고,
좋아하는 것도 내 마음에 달린 일이다.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