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의 이념과 실천 / 마성스님

2012. 3. 16. 13:1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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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의 이념과 실천 

 

마성/ 동국대학교 겸임교수

 

 

1. 보살의 이념

 

대승불교는 보살의 불교입니다. 대승경전은 오직 보살의 이념과 실천에 대해 설하고 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보살이란 산스크리트어 ‘보디삿뜨와(bodhisattva)’를 한자로 음사한 ‘보리살타(菩提薩陀)’의 줄임말입니다. ‘보디삿뜨와’의 보디(bodhi)는 ‘깨달음’을 뜻하고, 삿뜨와(sattva)는 ‘유정(有情)’ 또는 ‘중생(衆生)’을 뜻합니다. 따라서 보살은 ‘깨달음을 얻은 유정’ 혹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유정’이라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보살은 ‘위로는 깨달음을 추구하고[上求菩提],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下化衆生]하고자 노력하는 이’를 말합니다. 또한 보살은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완성하고자 정진하기에 ‘마하살(摩訶薩, mah?sattva, 大士)’로 찬양되기도 합니다.

 

원래 ‘보살’이라는 말은 성도(成道) 이전의 석가모니불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불전문학(佛傳文學)에 의하면, 과거 한 수행자가 연등불(燃燈佛, D?pa?kara)을 만나 미래세에 자신도 붓다가 되기를 서원하였는데, 그는 연등불로부터 미래세에 성불하리라는 기별(記別), 즉 수기(授記, 예언의 뜻)를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보살’로 불렸습니다. 그러므로 불전문학에서 말하는 보살은 오직 ‘석가보살’ 한 명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보살의 관념이 확대되어 후대에 이르러 붓다의 전신(前身)뿐만 아니라 붓다가 되고자 서원한 자는 모두 ‘보살’이라는 의미로 재해석되었습니다. 처음 대승불교를 일으킨 사람들은 자신들을 ‘보살’이라고 자칭하였습니다. 붓다가 되고자 발심하면 누구나 보살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보살은 비록 아직 깨닫지는 못했지만, 보리심(菩提心)을 일으켜 보살도를 실천하려고 발원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범부보살이라고 부릅니다.

 

대승불교의 보살은 서원에 의해 탄생[願生]합니다. ‘원(願)’이란 보살이 추구하는 삶의 목표이자 원동력입니다. 마치 전사들이 전쟁터에 나아갈 때 갑옷을 입는 것과 같습니다. 보살은 크나큰 서원의 갑옷을 입습니다. 범부들의 원은 대개 이기적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보살의 원은 보리심에 근거한 이타(利他)의 서원입니다. 보살의 서원에는 각각의 보살이 일으키는 개별적이고도 특수한 원[別願 또는 本願]과 모든 보살이 갖추고 있는 보편적인 원[總願]이 있습니다.

보살의 서원이 별원이든 총원이든 모두 ‘불도의 성취’와 ‘중생의 구제’로 압축됩니다. 이른바 상구보리(上求菩提)와 하화중생(下化衆生)이 그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라고도 합니다. 대승불교의 보살은 이 두 가지를 각기 다른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즉 중생구제는 바로 발심할 때 세운 서원의 실현이며 자비행은 깨달음의 결과를 중생에게로 돌리는 실천[廻向]이기 때문에 중생구제의 이타행[下化衆生]과 불도의 성취[上求菩提]는 보살의 서원으로서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보살사상의 이념은 이미 초기경전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를테면 대승불교의 이타정신은 ‘전도선언(傳道宣言)’에 담겨져 있습니다. ‘전도선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존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나는 신들과 인간들의 모든 덫으로부터 벗어났다. 비구들이여, 그대들도 신들과 인간들의 모든 덫으로부터 벗어났다. 비구들이여,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신들과 인간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 둘이서 한길로 가지 마라. 비구들이여,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뜻과 문장이 훌륭한 법을 설하라. 오로지 깨끗하고 청정한 삶을 드러내라. 눈에 티끌 없이 태어난 사람도 있지만 그들은 가르침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버려지고 있다. 그들은 가르침을 들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나도 또한 가르침을 펴기 위해서 우루벨라의 세나니가마(將軍村)로 갈 것이다.[Sa?yutta-nik?ya(PTS), vol. Ⅰ, pp.105-6; Vinaya-pi?aka(PTS), vol. Ⅰ, pp.20-21.]

 

이 ‘전도선언’의 핵심은 ‘많은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길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많은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라는 대목은 대승불교의 이타정신을 표현한 것입니다. 또한 대승불교의 ‘자리이타(自利利他)’에 해당되는 ‘자호호타(自護護他)’의 가르침도 초기경전에 언급되어 있습니다.[SN Ⅴ, pp.168-9.] 자호호타란 ‘자기를 보호하는 것이 곧 남을 보호하는 것이며, 남을 보호하는 것이 곧 나를 보호하는 것이다'[SN V, p.169, "att?nam (bhikkhave) rakkhanto para? rakkhati, para? rakkhanto att?na? rakkhat? ti."]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초기경전에 언급된 ‘사무량심(四無量心)’과 ‘사섭법(四攝法)’은 나중에 보살의 실천법으로 강조됩니다.

 

사무량심은 사랑의 마음[慈], 연민의 마음[悲], 함께 기뻐하는 마음[喜], 평등한 마음[捨]를 말합니다. 그리고 사섭법은 재물과 법을 베푸는 것[布施], 부드러운 말을 하는 것[愛語], 중생을 이롭게 하는 여러 가지 행위[利行], 중생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고락을 같이하며 삶을 같이 하는 것[同事]를 말합니다. 전자의 사무량심은 대자기적 수행법이고, 후자의 사섭법은 대사회적 실천법입니다.

 

이러한 대승불교의 이타정신은 ‘동체대비(同體大悲)’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동체(同體)란 타인이나 중생의 불행과 아픔을 곧 나의 아픔과 불행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적극적인 의미의 실천 윤리를 말합니다. 동체대비의 사상이야말로, 인간과 환경을 포함한 모든 사회적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실천 윤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동체대비의 사상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국가나 민족, 또는 계층과 세대라는 한계까지 벗어나 인류와 사회의 문제로까지 확대, 적용해 볼 수 있는 실천 윤리 또는 논리인 것입니다.

 

2. 보살의 실천

 

대승불교에서 보살의 실천행은 육바라밀(六波羅蜜)입니다. 그러면 육바라밀의 사상적 근거는 무엇인가? 육바라밀의 사상적 근거는 초기경전에 나오는 ‘삼론(三論 : 施?戒?生天)’과 ‘사섭법(四攝法)’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초기경전에 나오는 시(施)?계(戒)?생천(生天)의 삼론(三論)은 붓다가 재가자들에게 가장 빈번하게 설한 가르침입니다. 시(施)란 보시(布施, d?na)를 말합니다. 보시를 현대어로 풀이하면 ‘베풂’ 혹은 ‘나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戒, s?la)란 지계(持戒), 즉 계율을 지키는 것을 말하는데, ‘절제’ 혹은 ‘단속’이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생천(生天)이란 ‘하늘에 태어남’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생천은 그러한 개념보다는 ‘성스러움’ 혹은 ‘행복’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서로 연결시켜 보면 ‘나눔과 절제의 생활을 통해 행복을 가꾸어 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施)?계(戒)?생천(生天)의 가르침은 보시(布施)?애어(愛語)?이행(利行)?동사(同事)라는 사섭사(四攝事) 혹은 사섭법(四攝法)으로 확대되고, 나중에는 육바라밀로 체계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른바 불교의 실천 이념은 개인의 해탈로부터 중생의 해탈로, 개인복지로부터 사회복지로, 자리의 실현으로부터 이타의 실현으로 확장되어 갔음을 보여줍니다. 대승불교는 이러한 전향적 자세를 심화시키고 강화하면서, 보살의 공통적인 기본 덕목을 육바라밀로 제시했습니다. 따라서 대승불교의 실천 이념은 육바라밀을 통해 구현됩니다.

 

대승불교에서 보살이 육바라밀로써 자비를 실천하는 논리는 간단명료합니다. 자비심이 발동할 수 있는 기반은 공성(空性)의 체득이므로, 이 공성을 육바라밀로써 실천하는 데서 자비는 저절로 발현됩니다. 다시 말하면, 대승불교의 보살은 자비의 구현을 위해 육바라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보살의 수행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육바라밀입니다. 바라밀은 ‘저 언덕에 이른 상태’, ‘완성’이라는 뜻입니다. 중생들의 어리석음과 탐욕으로 생기는 괴로움의 세계를 ‘이 언덕’이라고 한다면, 지혜와 자비로 가득 찬 깨달음의 세계는 ‘저 언덕’입니다. 그리고 보살이 실천하는 육바라밀은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살은 육바라밀을 닦음으로써 궁극의 깨달음[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일찍이 석가보살도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무수한 생애 동안 보리심을 발한 보살로서 육바라밀을 실천함으로써 지혜와 자비의 완성을 추구하였던 것입니다.

 

아난다여, 모든 보살마하살이 궁극의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육바라밀을 닦아야 한다. 왜냐하면 아난다여, 육바라밀은 모든 보살마하살의 어머니로서 모든 보살을 낳기 때문이다. 아난다여, 만약 보살마하살이 육바라밀을 닦는다면 모두 궁극의 깨달음을 얻으리라. 이런 까닭에 나는 육바라밀을 거듭 그대에게 부촉하는 것이다. 아난다여, 육바라밀은 모든 부처님의 진리가 담겨 있는 이루 다함이 없는 법의 곳간[法藏]이니, 시방의 모든 부처님이 현재 설법하는 것은 모두 육바라밀의 벗의 곳간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과거의 모든 부처님 역시 육바라밀을 닦음으로써 궁극의 깨달음을 얻었으며, 미래의 모든 부처님 또한 육바라밀을 닦음으로써 궁극의 깨달음을 얻게 되리라. 또한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불제자들 역시 육바라밀을 통해 열반을 얻을 것이다.[『摩訶般若波羅蜜經』권20 ?累敎品?(T8, 363a-b), “阿難! 諸菩薩摩訶薩欲得阿?多羅三?三菩提, 應當學六波羅蜜. 何以故? 阿難! 六波羅蜜是菩薩摩訶薩母, 生諸菩薩故. 阿難! 若有菩薩摩訶薩學是六波羅蜜, 皆得阿?多羅三?三菩提. 以是故, 我以六波羅蜜倍復囑累汝. 阿難! 是六波羅蜜是諸佛無盡法藏. 阿難! 十方諸佛現在說法, 皆從六波羅蜜法藏中出. 過去諸佛亦從六波羅蜜中, 學得阿?多羅三?三菩提. 未來諸佛亦從六波羅蜜中, 學得阿?多羅三?三菩提. 過去未來現在諸佛弟子, 皆從六波羅蜜中學得滅度, 已得今得當得滅度.”]

 

여기서 바라밀이란 빠라미따(p?ramit?)의 음사로서, ‘피안(p?ra)에 이른(i) 상태(ta)’ 혹은 ‘최상(p?rami)의 상태(t?)’, 즉 ‘완성(perfection)’을 의미하는데, ‘도피안(到彼岸)’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때 ‘도달’이나 ‘완성’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도달이고 완성할 수 없는 완성입니다. 즉 바라밀은 무차별?공(空)에 입각한 실천이기 때문에 특정한 도달이나 완성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따라서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끊임없이 닦아가야 하는 것이 바라밀의 참뜻입니다. 이제 육바라밀의 내용을 개략적으로나마 살펴보겠습니다.

 

1)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 d?na-p?ramit?)

 

보시(布施, d?na)란 남에게 재물이나 가르침 등의 베풂을 말합니다. 보시바라밀이란 보시를 완전하게 성취함, 즉 보시의 완성을 말합니다. 보시의 원어 다나(d?na)를 ‘단(檀)’으로 음역하기도 합니다. ?대지도론? 권11에서는 “[문] 무엇을 단(檀)이라 하는가? [답] 단이란 보시를 말하며, 마음에 상응하는 착한 생각[善思]을 일러 단이라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착한 생각으로부터 몸과 입의 업을 일으키면 역시 단이 된다’고 하며, 또한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믿음과 복밭과 재물, 이 세 가지 일이 화합할 때 마음에서 희사할 생각이 우러나 능히 인색함을 깨뜨리면 이를 단이라 한다.”[『大智度論』권11(T25, 140c), “問曰: 云何名 ‘檀’? 答曰: 檀名布施; 心相應善思, 是名?檀. 有人言: 從善思起身?口業?亦名?檀. 有人言: 有信?有福田?有財物, 三事和合時, 心生捨法, 能破?貪, 是名?檀. 譬如慈法, 觀?生樂而心生慈; 布施心數法, 亦復如是, 三事和合, 心生捨法, 能破?貪.”]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2) 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 ??la-p?ramit?)

 

지계란 계(戒)를 받아 지킨다는 뜻입니다. 지계바라밀이란 계율을 완전하게 지킴, 즉 지혜의 완성을 말합니다. 전통적으로 계에는 재가 신자들이 지켜야 할 오계(五戒)가 있습니다. 오계란 산목숨을 죽이지 마라, 남의 물건을 훔치지 마라, 사음하지 마라, 거짓말을 하지 마라, 술을 마시지 마라 등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때[三長六齋日]에는 여덟 가지 계[八齋戒]를 지켜야 합니다. 지계는 신체, 재물, 공덕에 대한 배려 또는 수호입니다. 보살이 이러한 배려에 나태하면 이타행은 불가능합니다. 지계는 신체의 수호, 마음의 제어, 재물에 대한 배려, 공덕에 대한 배려, 신체의 정화라는 다섯 방면에서 실천되어야 합니다.

 

3)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 k??nti-p?ramit?)

 

인욕은 자기의 마음에 거슬리는 일에 대하여 노여워하지 않고 참고 견딤을 말합니다. 이를테면 모욕을 참고 노여움을 일으키지 않음. 참고 견디어 마음을 움직이지 않음. 마음을 안정시키고 성내지 않음을 뜻합니다. 인욕바라밀이란 인욕을 완전하게 성취함, 즉 인욕의 완성을 말합니다.[곽철환,『시공불교사전』, (서울: 시공사, 2003), p.589.] 다시 말해서 인욕은 ‘참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 세계는 고해이며, 그러한 세계에 사는 한 괴로움을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욕된 일을 당하여 참지 못하는 것은 진실로 ‘나’가 있다고 하는 에고 의식[我想] 때문이며, 보살에게는 그러한 마음이 없습니다. 인욕은 고뇌에 대한 인내, 법을 이해하기 위한 인내, 타인으로부터 받은 해악에 대한 인내 등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그 중에서도 셋째의 인내를 특히 강조하는 것은, 여기서도 타인에 대한 배려를 무엇보다도 중시한 것이라고 이해됩니다. 모름지기 보살은 득과 실, 명예와 불명예, 칭찬과 비방, 즐거움과 괴로움이라는 여덟 가지 세속의 일에 초연해야 합니다.

 

4) 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 v?rya-p?ramit?)

 

정진은 힘써 수행함. 선(善)을 행하려고 노력함이라는 뜻입니다. 정진바라밀이란 완전한 정진, 즉 정진의 완성을 말합니다. 정진이란 나약함이 없는 부동심의 실천이며 불퇴전의 노력입니다. 대승의 공관(空觀)은 결코 허무에 의한 나태가 아닙니다. 붓다가 입멸하면서 “생겨난 것은 반드시 멸하는 것이니, 게으르지 마라.”는 가르침을 남기고 있는데, 선법(善法)을 증장시키는데 정진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중생의 정진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지만, 보살의 정진은 집착함이 없는 이타의 정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정진은 일차적으로 바른 법을 체득하는 데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보살은 먼저 법을 묻는 데 정진해야 합니다. 법을 묻는 사람에게는 지혜가 머물고, 지혜가 있는 사람에게는 번뇌가 소멸하기 때문입니다.

 

5) 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 dhy?na-p?ramit?)

 

선정은 범어 dhy?na 혹은 팔리어 jh?na를 음사한 선(禪)과 그 번역인 정(定)의 합성어입니다.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여 산란하지 않는 상태.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한곳에 집중함. 마음의 통일을 의미합니다. 선정바라밀이란 완전한 선정, 즉 선정의 완성을 말합니다. 선정(dhy?na)의 정은 삼매(三昧, sam?dhi)라는 뜻으로 ‘산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요히 사색하는 것[靜慮]’이라고 풀이되며, 세계 실상이 무자성(無自性)?공(空)임을 삼매로써 직관하여 그것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6) 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 praj??-p?ramit?)

 

지혜는 범어 praj?? 혹은 팔리어 pa???를 의역한 것입니다. 지혜는 ①모든 현상의 이치와 선악 등을 명료하게 판단하고 추리하는 마음 작용. ②분별하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직관하는 마음 작용. 미혹을 끊고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주시하는 마음 작용. 분별과 집착이 끊어진 마음 상태. 모든 분별이 끊어져 집착하지 않는 마음 상태. 모든 분별을 떠난 경지에서 온갖 차별을 명료하게 아는 마음작용 등으로 풀이합니다. 지혜바라밀이란 분별과 집착이 끊어진 완전한 지혜를 성취함, 즉 분별과 집착을 떠난 지혜의 완성을 말합니다.[곽철환, 위의 책, p.660.] 

 

반야(praj??)란 ‘수승한(pra) 지혜(j??)’라는 뜻으로, 이때 지혜는 사유분별의 망상을 떠난 지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가득(不可得)이며, 무소득(無所得)입니다. 즉 우리가 일상적으로 갖는 분별의 지혜가 밤과 낮의 구별이 있는 지구에 비유된다면, 이 같은 무분별의 지혜는 밤낮의 밝고 어두움의 구별이 없는 태양에 비유되는 것으로, 태양의 밝음은 어두움에 의해 드러나는 상대적 밝음이 아닌 절대적 밝음이기 때문입니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에 의지할 때, 마음에 장애가 없고, 마음에 장애가 없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으며, 전도된 생각을 멀리 떠나 마침내 열반에 이르니,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 위없이 더 높은 궁극의 깨달음을 얻은 것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였기 때문이다. [『般若波羅蜜多心經』(T8, 848c), “菩提薩?依般若波羅蜜多故, 心無??; 無??故, 無有恐怖, 遠離?倒夢想, 究竟涅槃. 三世諸佛依般若波羅蜜多故, 得阿?多羅三?三菩提.”]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모든 보살은 보리심(菩提心)을 일으켜 육바라밀을 하나하나 닦음으로써 마침내 붓다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나중에는 육바라밀에 ⑦up?ya(方便), ⑧pra?idhi(or pra?idh?na, 願), ⑨bala(力), ⑩j??na(智)를 더하여 십바라밀(十波羅蜜, da?a-p?ramit?)로 확대하기도 하였다.] 대승불교는 반야의 지혜에 근거하여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보살행을 무한히 펼쳐 나가는 보살의 불교인 것입니다.▣

 

<법회와 설법> 통권 제175호, 2009년 12월호, pp.10-20  

 



삼월의 바람속에- 이해인 - 
어디선지 몰래 숨어들어 온
근심, 걱정 때문에
겨우내 몸살이 심했습니다
흰 눈이 채 녹지 않은
내 마음의 산기슭에도
꽃 한 송이 피워 내려고
바람은 이토록 오래 부는 것입니까
삼월의 바람 속에
보이지 않게 꽃을 피우는
당신이 계시기에
아직은 시린 햇볕으로
희망을 짜는
나의 오늘
당신을 만나는 길엔
늘상
바람이 많이 불었습니다
살아 있기에 바람이 좋고
바람이 좋아 살아 있는 세상
혼자서 길을 가다 보면
보이지 않게 나를 흔드는
당신이 계시기에
나는 먼데서도
잠들 수 없는 삼월의 바람
어둠의 벼랑 끝에서도
노래로 일어서는 삼월의 바람입니다
그림/자연화가 이신애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
(꽃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