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4. 20. 17:04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경전을 읽으시는 스님
롭쌍 왕뒤 티벳 망명 노스님.
나이 열세 살 되던 해에 라싸 근교 뀐뒬링 곰빠란 절에 보내졌단다.
올 연세는 78세이며,
평생 학고방 같은 조그만 단칸방 안에서 지금도 매일 변함없는 일과 속에,
가진 게 거의 없는 수행자의 삶이다.
어떤 특별한 존함이나 이력도 없고
그저 드러나지 않는 자기만의 조용한 비구 삶일 뿐이다.
늘 부산하고 예식이나 의식이 많은 사원을 떠나
그 단칸방 한자리에서 이렇게 혼자 지낸 지가 26년이란다.
역사적으로 종교의 제일 부끄러운 모순이란 게
우선 제일 많은 사람을 죽여 왔다는 것 일 게다.
어느 종교나 이웃 사랑과 관용,
자비의 실천을 호소하는데도 그 이면에는 무서운 폭력,
자기 종교를 위한다는 도그마를 앞세워 수많은 사람을 죽여
온 역사라는 게 가끔 종교의 회의와 실망감을 느끼기도 한다.
한번은 내 방에 찾아온 한 나이든
낯선 여행자의 말이 잊을 수가 없고 부끄러움으로 남아있다.
“시님요, 막말로 요즘 성직자가 정말 성직자 맞습니까? 방에 한번 들어가 보세요.
정말 우리 보담 몇 배 고급스런 물건들이 꽉 차 있고요.
막말로 우리가 있는 마누라 하나 없다는 거 빼곤 있을 거 다 있던디요.
또 눈에 보이는 건 죄다 최고급품이구요.”
이 노스님과 인연이 시작된 것은 어디서 들으신 건지
약을 누구에게나 준다는 말을 듣고 찾아오신 때부터다.
무릎이 시어간다며 영양제를 받아가기 위한 것이었다.
일 년에 서너 번 정도 필자를 찾아오신다.
벌써 십 육칠년이 넘는다. 잡수는 게 너무 간소하다.
거기에 오후불식(정오가 지나서는 다음날 아침까지
일체 음식을 먹지 않는 것)과 티벳 사람이라면 불문율로
누구나 먹는 육식을 전혀 하지 않는 순수 채식가이다.
일과는 새벽 세 네 시가 아닌 두시부터 명상과 간경, 그리고 절로 시작된다.
당신 방 정말 좁은 방에서 매일 삼백배의 절을 한다.
소박한 티벳식 짬빠(볶은 보릿가루)와 버터차로
아침을 마친 뒤 달라이 라마가 거주하는 왕궁과 절 주위를 참배하는
티벳 사람만의 불교 신앙의식인 꼬라 길을 매일 새벽에 세 바퀴, 낮에 네 바퀴 씩 돈다.
한 바퀴 도는데 얼추 반시간이 걸리는 길이다.
점심 이후는 당신 개인 일과로서 난민들 가정을 방문하는 게 많다.
어느 날부터 이 스님의 손이 약손이 되어가는 것이었다.
아픈 부위에 손을 대고 기도하면 신통하게도 아픈 곳이 낫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 특별한 비밀 수행을 해 온 어떤 비법일까? 아니다.
그 어떤 비법이랄 건 하나도 없다.
한 비구승의 맑고 맑은 영혼의 에너지일 것이다.
이 노스님이 추운 겨울이 다가오면
여기를 떠나 성도지 부다가야에 내려가신다.
노구에 추위도 피할 겸 바로 당신 혼자 정해 놓고
연연히 해가는 수행을 하러 가는 것이다.
티벳 절을 매번 이십만 배 씩를 한다.
백일을 정하고선 그 노구에 하루 이천 배 씩 절을 올리는 것이다.
지금까지 집에서 매일 삼백 배씩 하는 절 빼고,
부다가야에서만 절하신 게 올해로써 육백만 배를 마쳤단다.
놀랍지 않은가! 흔히들 티벳 전통대로
어떤 수행 전에 십만 배를 기초수행으로 하는 것으로 안다.
부처님을 부르는 목적
살 줄 아는 것은 어떻게 살아야 살 줄 아느냐?
하루에 24시간, 8시간 자고 8시간 놀고 8시간 일하고 하면
24시간인데, 한 시간씩만 자기가 뭔가 인생을 한 번 돌아
보는 겁니다. 사람은 20년 크고, 20년 동안 여물어지고,
사십이 넘어가면 눈썹도 하나 희어지고 머리도 하나 희어
지고 이빨도 하나 흔들해져 나사가 늘어집니다.
40대부터 늘어져 가지고 20년 내려가면 육십. 육십 내려
가면 그 다음 20년은 들어갈 준비해야 됩니다. 천 년 만 년
살 거라고 기대 걸지 말고, 정말 몇 십 년 보장할 수 있는
계약서도 없는 이 몸을 태산같이 믿고 사는 사람들이 수두룩
했어요! 한정되어 있습니다. 이건 생물이야! 이 생물을,
자기 생물, 몸뚱이 관리하는 법도 모르는 작자가
부처 된다고 왔다 갔다
해봐야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 몸은 물질이야! 물질은 따뜻한 기운, 물 기운, 바람 기운,
이 세 가지가 멀어지면 끝장나는 겁니다. 그러면 염불을 많이
하면 극락 간다고 하지만은 죽은 뒤에 극락 가라면 반드시
내 발로 걸어 다닐 때, 내 눈으로, 두 눈으로 똑똑히 볼 때,
극락세계가 어디 있는지, 가는 길은 어느 길인지, 가긴 누가
갈 건지, 이 세 가지 문제를 해결 짓지 못하고, 자기 발로
걸어 다니고 지 눈을 떠 가지고 있을 때도 못 가는 작자가
죽을 때 당황해서 천지가 아득할 때, 극락세계 간다는 것은
서울 김서방네 집 찾아가는 격입니다.
막연하게 어디로 갈 거냐는 것입니다.
그런 공짜 염불 그만하고 뭔가 한 번 생각해봐야 될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염불하는 것도 부처님 부르는 때도 부르는
이유가 분명히 서야 됩니다. 왜 부르는지, 무엇 때문에
부르는지, 반드시 부르면 한 번 불러서 안 나오고 두 번
불러서 안 나타나면 세 번 만에는 삼천대천세계가 둘러꺼지게
불러 가지고 부처님을 만나 봐야 합니다.
삼천대천세계가 바깥 세계가 아니고 내 탐심(貪心),
내 진심(瞋心), 내 치심(癡心)이 다 무너지고
마음의 문이 탁 열리면 자성극락 아미타요,
자기 성품이 바로 극락세계가 됩니다.
자기 마음이 바로 부처라, 반드시 부를 때는 만나볼
각오가, 목적과 기대와 희망이 서 가지고 척 불러서 하루
한 마디씩 불러 3일만에 완전히 만나보고 끝장을 내야 합니다.
시작했으면 결론이 나와야 되는데,
천 년 만 년 불러도 결론이 나지 않습니다.
만약에 집에 손자가 할아버지 할머니 열 번만 계속 부르면
‘저놈의 새끼, 왜 자꾸 쳐 부르기만 하느냐’고 작대기 들고
나갈 겁니다. 우리 부처님은 너무 착하고 점잖아서 매일 불러도
화도 안 내고 가만히 있는 것은 워낙 점잖으니 가만히 있습니다.
나부터라도 다른 할아버지라도 가만히 안 있을 겁니다. 부르는
목적이 분명히 있어 가지고 부르면, 확실히 세 번 불러서 척 만나
놓고 보면 정말 자아를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부른다는 개념은 그렇게 불러야 합니다.
성수 스님 법문 중에서
당신의 사랑으로
응달지던 내 뒤란에
햇빛이 들이치는 기쁨을
나는 보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사랑의 불가로
나를 가만히 불러내신 당신은
어둠을 건너온 자만이
만들 수 있는
밝고 환한 빛으로
내 앞에 서서
들꽃처럼 깨끗하게
웃었지요
아,
생각만 해도
참
좋은
당신.
문득문득
목소리도 듣고 싶고
손도 잡아보고 싶어요.
언제나 그대에게 가는 내 마음은
빛보다 더 빨라서
나는 잡지 못합니다.
내 인생의 여정에
다홍꽃 향기를 열게 해 주신
당신.
내 마음의 문을 다 여닫을 수 있어도
당신에게 열린 환한 문을
나는 닫지 못합니다.
해 저문 들길에서
돌아오는 이 길
내 눈 가득 어른거리고
회색 블럭담 앞에
붉은 접시꽃이 행렬을 섰습니다.
나 홀로 걷는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어린 참나무 잎이 지기 전에
그대가 와서 반짝이는 이슬을 텁니다
나는 캄캄하게 젖고 내 옷깃은
자꾸 젖어 그대를 돌아봅니다
어린 참나무 잎이 마르기 전에도
숲에는 새들이 날고 바람이 일어
그대를 향해 감추어 두었던
길 하나를 그대에게 들킵니다
그대에게 닿을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내 마음 가장자리에서
이슬이 반짝 떨어집니다
산다는 것이나
사랑한다는 일이나 그러한 것들이
때로는 낯설다며 돌아다보면
이슬처럼 반짝 떨어지는 내 슬픈 물음이
그대 환한 손등에 젖습니다
사랑합니다.
인생도 사랑도 그러합니다
그 숲,
봄갈이 해논 밭흙같이
보드랍고 따스한 몸이 오는 그대
그대 사랑은 한없이 크고
끝도 갓도 없이 넓어서
내가 그대 앞에 서서
이만큼 이만큼
이, 이, 이만큼 보다 더 크게
내 아무리 두 팔이 찢어지게
다 벌려
저 하늘
이 땅만큼
그대 사랑한다 해도
그대는
내가 사는
저 하늘 이 땅 같아
나는 그대 사랑 안에 있고
그대 사랑은
내 손 내 맘 안 닿는 데까지
피어나는 꽃처럼
일어서는 봄산처럼
세상을 환하게 열어줍니다
가난하고 쓸쓸했던 내 세상
봄이 오는 들길을 따라
불쌍한 우리 보리피리 불며
산 설고 물 설은 산중 땅
찾아온 그대
내가 저문 산처럼 배고파 누우면
그대는 내 곁에
저문 강으로 따라 누워
당신의 피와 살을 주어 채워 적시고
내가 새벽 산처럼 어둡게 서 있으면
그대는 훤한 앞산으로
해 받아 일어서서
내 이마에 이마를 대어
산문을 열어줍니다
사랑하는 당신
아직은 그대 앞에 두 손 다 편히 내려놓고
그대 바라볼 수 없이
흔들리는 우리 땅
우리들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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